#127
그러나 장이주는 지난밤처럼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꿈속이라도 이런 상황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어깨를 잡고 뒤로 밀쳐냈다.
“정말 쉽지 않으시네요.”
순순히 뒤로 밀려나며 이승우가 중얼거렸다.
이제 하룻밤을 날리는 건 아무렇지 않았다. 그는 매일 밤 끈질기게 시도했다. 어떤 날에는 성공했고 어떤 날에는 실패했다. 그 결과 장이주를 어떻게 유혹하면 되는지 잘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그냥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가 알아서 유추했다. 좋은 머리를 가져서인지 그는 자신이 내놓은 결론을 쉽게 믿어 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약간의 연극적인 요소를 가미해야 했지만, 이승우는 원래도 이런 걸 잘했다. 음흉한 본심은 뱃속에 숨기고 얼굴은 부드러운 빛을 띄우는 일. 성사율이 높아질수록 그는 장이주의 몸에 매료되어 갔다. 이 상황은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중독적이다.
“읏……!”
이승우는 그가 어떤 성교를 좋아하는지, 또 성감대가 어디인지 경험으로 서서히 습득하게 되었다. 그를 만족시키는 방법을 익히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눈 감고도 그가 좋아하는 부분을 정확히 짚을 수 있었다. 나날이 이 짓에 능숙해지는 건 매일 더 예민해지는 것 같은 이 남자의 몸 덕분이다.
“제가…… 이렇게 만든 건가요?”
“흐윽, 큿…….”
그러니까 비록 이승우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마치 몸만은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은.
“저를 기억하고 계시네요.”
갈비뼈가 풍선이 되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흉부 안쪽이 뻐근해지는 것 같다. 교묘한 성취감이 차오른다. 이승우는 그의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습관처럼 울혈을 남겼다. 이로 탄력 있는 살을 물고 짓씹는다.
이대로 그를 먹어 치워도 좋을 것 같다. 붉게 달아오른 목선을 따라 몇 번이고 입술로 그림을 그린다. 아까부터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점점 미쳐가는 중이다. 누구보다 자신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
이승우야말로 이 꿈에서 살고 싶었다.
그는 무료함을 느끼며 장이주가 살아가는 현실의 영상을 응시했다.
이 세계는 장이주에게 친절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행동을 응원하게 만들고, 기쁨을 느끼게 만들 정도로 그는 매사에 열심을 보였다. 이렇듯 장이주를 관찰하다 보면 금세 시간이 흘렀다.
그때, 평소처럼 턱을 괴고 장이주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던 이승우의 표정에 금이 갔다.
‘키스해도 됩니까?’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었는데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차영헌이 자극제가 되어 주었다.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장이주를 노리는 에스퍼가 있는 걸 무력하게 보는 건 굉장히 끔찍한 기분을 선사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꿈속에서만 장이주-고은교를 만질 수 있는 이승우는 그 꼴을 가만히 볼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라면 현실에서 장이주는 차영헌과 진지한 만남을 갖게 될 것이다.
자신은 죽어도 그의 현재가 될 수 없겠지.
그러나 그렇게 마음먹어도 그때만 잠깐이었다. 장이주를 안고 걷다가, 그와 눈을 마주치면 결심 따위는 사라지고 이제껏 해 왔던 일들을 멈출 수 없었다.
장이주를 돌려보낸 뒤 이승우는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가 한참을 고민했다.
‘얼굴을 보지 말자.’
그 눈과 마주치는 것이 문제였다. 사람의 음심을 자극하는 그 유혹적인 얼굴 말이다.
그다음 날부터 이승우는 그를 업은 채 매일 밤 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욱한 안개를 헤치며, 그가 뭐라고 하든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 건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고행이라도 하듯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걸음마다 얼마나 많은 고뇌가 있었는지 그는 결코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없었다.
연속된 실패는 이승우를 침울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초기에 생각했던 것처럼 장이주를 설득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장이주를 데리고 갈 수 없는 것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 또한 좋은 변명거리가 되어 주었다. 나중에는 밤마다 그를 독점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하게 되고 말았으니.
이 길이 끝나지 않아도 괜찮다.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마음은 하룻밤에도 수십 번씩 무너졌다가 다시 세워졌다. 단 하루, 하루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장이주를 깨워 함께 나갈 수 있을 텐데. 지금 이승우를 지탱하고 있는 건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자신이 너무 나약해서 그런 걸까. 이승우는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 생각했다. 어느 날에는 마음을 굳게 먹는다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여러 번 되뇌었다. 그가 자신을 유혹하더라도 휩쓸리지 말자 다짐했다.
그리고 그날.
“승우야.”
그는 자신을 만지는 손길보다 더 유혹적인 게 남아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신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
그 순간이 다가와서야 이승우는 인정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은교가 원한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결코 이 길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
그는 눈을 떴다.
컨디션이 영 좋지 않은 탓인지 온몸이 흠뻑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도 머리칼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
‘……안 말리고 잤던가.’
열이 오른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지 체온은 식어 있었다. 침대 밖으로 발을 내린 그가 잠시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은 채 호흡을 골랐다.
뭔가 아주 중요한 걸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요즈음 이 말도 안 되는 찜찜한 기분이 이어져 오고 있었다. 도대체 그게 뭘까 곰곰이 생각해 봐도 도통 떠오르지 않아, 그저 기분 탓이겠거니 하고 넘기던 것이 수일째. 오늘은 유독 답답함이 심해 새벽에 깨고 만 것이다.
큰 병이라도 걸린 건가?
불치병이 완치되고 나서는 몸의 통증이 가라앉아 이렇게 새벽마다 깨어날 일이 없어졌지만, 그때의 경험을 되살려 봤을 때 어쩌면 새 병이 생기고 있는 징조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곤란한데. 가야 할 게이트가 여럿이다. 그가 손을 내려 자신의 명치 부근을 문질렀다.
컨디션이 몹시 저조했지만, 어쨌든 출근은 해야 했다. 내근 업무를 맡아 할 건 없으니 바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려고 왔는데, 휴대 전화로 호출이 왔다.
“무슨 일입니까?”
[저, 팀장님. 오늘 월별 행사 건 관련해서 공문이 내려왔는데요…….]
“월별 행사?”
[네. 소원 수리서, 팀별로 적어서 제출하라고 하시네요.]
“……내 책상 위에 올려놔요. 나중에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월별 행사로…… 뭘 제출해?
그는 황당한 얼굴로 휴대 전화를 노려보았다. 그런 게 있었나? 소원 수리서? 맹세코 그는 이런 걸 제출해 본 적이 없었다. 국장한테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사무실 비품 목록이라도 제출하라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어제 한참 찾아도 안 보이던 녀석이 어슬렁거리며 들어온다.
“차영헌 에스퍼.”
“좋은 아침입니다, 팀장님.”
그 녀석은 느물거리는 인사를 건네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정면에서 가벼운 샴푸 향이 풍긴다. 뭘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른 아침부터 땀을 빼고 센터 공용 샤워실에서 몸을 씻고 온 흔적이 역력하다.
“저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랬다. 어제 차영헌이 전기와 마력을 가리지 않고 기의 흐름을 죄 끊어놓고 사라지지 않았던가.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뒷짐을 졌다.
“어제 한 일에 대해서 해명을 좀 듣고 싶은데.”
“아.”
“어떻게 된 겁니까?”
잠깐 고민하던 척하던 녀석이 씨익 웃는다.
“너무 일에 열중하시는 것 같아서 몰래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
이건 뭐, 관심 좀 안 준다고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개도 아니고.
“심부름이라도 할까요.”
“됐습니다.”
비위 맞추려는 시늉이 우습다면 우스웠다.
그 이후로도 차영헌은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여느 때와 같은 하루였다. 한 시쯤, 소원 수리서를 써야 한다는 말을 어디에서 주워듣고 뭘 적으실 거냐고 캐물어 대기 전까지는.
“막내가 대신 쓰면 되겠네요.”
그걸 옆에서 듣던 팀원이 속 좋게 웃으며 말하자 차영헌이 반색한다.
“제가 써서 제출해도 됩니까?”
“니가 갖고 싶은 거 말고, 인마.”
“저도 압니다.”
그들은 좋을 대로 떠들었다. 싱글벙글 웃던 차영헌이 슬그머니 장이주를 흘끗 본다. 사수 녀석이 소원 수리서에 적어야 할 아이템 몇 개를 부르더니 멀뚱멀뚱 듣기만 하는 차영헌에게 메모하는 습관이 안 되어 있다며 면박을 준다. 얼씨구. 장이주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금 와서 됐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하다.
“5층 사무실에 가서 내 이름 대고 소원 수리서 받아 가세요.”
“예.”
기다렸다는 듯 차영헌이 꽁무니를 뺐다.
“이런 건 막내가 해야죠.”
굳이 이런 잔심부름을 시킬 생각은 없었는데……. 게다가 차영헌은 현장 이능력자가 아닌가. 이런 자질구레한 내근 업무는 할 필요가 없었다.
왠지 좀…… 부하 직원을 개인적인 볼일에 동원한 비윤리적인 느낌이 있다.
‘……됐다. 이미 치른 일인데.’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오늘 치 시뮬레이션을 끝내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센터에는 각 팀을 위한 사무실이 5층부터 9층까지 있는데, 다음에 들어갈 S급 게이트에 대한 정보를 받느라 잠깐 7층에 들러야 할 일이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그는 서류 더미를 안고 있는 사람과 살짝 팔을 부딪혔다. 그 덕에 서류 몇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얼른 허리를 굽혀 종이를 주워 들었다.
“아, 죄송……. 감사합니다.”
머쓱한 얼굴로 센터 직원이 인사한다.
“아닙니다.”
무심코 그의 시선이 손에 든 종이의 상단을 훑는다.
소원(所願) 수리서.
접근성에 비해 복잡한 한자라고 생각했다. 문득 예전에 이 생각을 한 적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한자를 어디에서 봤더라. 그때는 이 한자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아!”
외마디 비명 소리에 그가 번뜩 고개를 든다.
열려 있는 창문으로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순식간에 센터 직원의 양팔 가득 안겨 있던 종이들이 사방으로 펄럭이며 흩어진다.
종이학이나 종이비행기처럼.
그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떴고, 소원(所願)이라고 적힌 종이들이 그의 몸에 힘껏 닿았다가 힘없이 떨어진다.
“……하아.”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그리고 가엾은 센터 직원을 태운 채 그대로 내려갔다.
그는 가늘게 숨을 뱉고는 그대로 복도에 주저앉았다. 숨이 막힌 것 같기도, 머리가 아픈 것 같기도, 괴로운 것 같기도……. 아무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드물게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은교가 고개를 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