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빌어먹을 꿈이 깨지 않는다.
‘소원은 다 들어주는 것 아니었나.’
다시 현실로 돌아가고 싶다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생각했다. 말로 하지 않으면 못 알아듣나 싶어 소리 내서 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망할 게이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허겁지겁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센터 직원을 도와 서류를 다시 주워 줄 때까지, 이 세계는 그대로였다.
방법이 틀렸나?
‘꿈을 깨는 방법이 뭐가 있더라.’
애초에 이곳이 꿈은 맞는 걸까. 그가 알기로 꿈을 자각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시계를 보거나, 손등을 보는 것. 꿈에서는 시간이 자기 멋대로 흘러가, 시계를 볼 때마다 시침과 분침이 뒤죽박죽이라고 했다. 또, 손등을 보면서 손바닥이 보고 싶다 생각하면 손바닥이 보인다고.
하지만 아무리 시계를 봐도 시간은 일정하게 흘러가고 자신의 손등을 보며 손바닥을 보고 싶다 생각한들 손바닥이 보이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 이곳이 현실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나.
아니, 아니다. 우선은 꿈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구분하기 좋다. 꿈에서 깨는 방법도 두 가지. 외부 자극과 내부 자극.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거나, 아니면 스스로 깨어나는 것. 전자는 이미 그의 에스퍼들이 수없이 실패한 방법일 테니 이 세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스스로 깨어나는 것밖에 없었다.
멍하니 생각하던 그의 시선이 휑하니 열린 창문에 닿는다. 7층에서 뛰어내리면 살 확률보다 죽을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 충격을 가하면, 분명 잠든 정신이 깨어날 거다…….
“팀장님.”
“어?”
창틀을 쥔 팔을 어떤 손이 거세게 붙잡는다.
“뭐 하십니까?”
언제부터, 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다 사그라진다. 차영헌의 특기는 이미 잘 알고 있었던 바다. 뒤를 점하는 걸 이 녀석보다 잘하는 에스퍼는 없다.
그리고, 그의 착각이 아니라면…….
“……차영헌 에스퍼.”
이 녀석은 이 세계가 현실이 아니라는 걸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왜 모르겠는가. 태도가 바뀌었는데. 물론, 성격이야 갑자기 바뀌는 놈이 있다 치더라도 그 실력만큼은 진짜였다. 자신은 차영헌의 진짜 신입 시절이 어땠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에스퍼의 기량이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늘어날 수는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강하게 잡힌 팔을 내버려 둔 채,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너는 알고 있지.”
“뭘 말입니까.”
“나갈 수 있는 방법.”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일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팔목을 으스러뜨릴 듯 아프게 쥘 뿐이다.
“모릅니다.”
모른다, 라…….
그런 대답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약간 일그러진 얼굴로 차영헌을 쏘아보았다. 차영헌은 조금도 켕기거나 구린 데가 있는 사람 같지 않게 그를 당당히 마주 보아 왔다.
“팀장님은 제가 이런 모조품을 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어쩌면 이곳은 차영헌의 염원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그가 원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차영헌이 씹어 내뱉듯 말했다.
“그렇다면 저를 잘못 아신 겁니다.”
“…….”
“수십 번도 넘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곳에서 그만 살고 싶다고요.”
“……뭐?”
“생각만으로는 안 돼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팀장님처럼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될 줄 알고요. 뭘 믿고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하려고 하십니까? 게이트 때문에 이렇게 된 것 아시지 않습니까.”
“…….”
“만약에 정신만 죽게 되면…… 그러면요?”
글쎄…….
그렇다면 참 끔찍해질 것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에스퍼들 역시 이곳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말라 죽게 될 테니까. 다 함께 죽는 엔딩이라니 그것참 환상적이군.
창틀을 붙들고 있던 손을 놓자, 차영헌 역시 천천히 팔목을 놓았다. 그는 욱신대는 팔을 쓰다듬으며 침묵했다. 이곳은 어딜 보나 차영헌을 위해 준비된 세계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본인은 상당히 유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차영헌 에스퍼는 이 세계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요.”
“…….”
“아닙니까?”
차영헌은 바로 물음에 답하는 대신 팔을 뻗어 열린 창문을 닫았다. 그의 몸이 한층 더 가까워진다. 동시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쉴 새 없이 불어오던 바람이 멈춘다.
그리고 그대로 창틀을 짚은 채, 불시에 입을 맞추려 들었다. 거친 감촉이 입가에 뭉개지듯 쓸린다.
하…….
“공과 사를 구분해.”
진심으로 짜증이 난다.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동안 몇 번 거절당한 것에 앙심이라도 품은 모양이다. 본래대로 망나니로 돌아온 녀석이 뒷머리가 잡힌 채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편리하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만……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세계에 기대 사는 희망고문 같은 인생은 딱 질색이어서요.”
그러더니 보란 듯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살짝 핥고, 그를 비스듬히 내려다본다. 물끄럼한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그래, 그것도 옳은 말이다.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현실을 버리고 꿈속의 삶을 선택할 리 없겠지.
입 밖으로 가벼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언제부터……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가요.”
차영헌이 슬쩍 눈썹을 모았다.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한참 그렇게 굳어 있던 차영헌이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정확하지는 않다고, 기억을 더듬는 듯 느긋한 어조였다.
“애인이 있다고 하셨을 때 말입니다.”
어렵지 않다는 듯 중얼거린다.
“제가 그딴 걸 원할 리가 없잖습니까.”
“…….”
그래……. 차영헌은 자신이 애인이 있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풀리지 않는 의문만이 가득한 세상이었다. 이곳은 정말 게이트가 구축한 함정에 불과한 걸까?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졌다. 머리채를 잡은 손을 놓자, 녀석이 입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떨어졌다.
“차영헌!”
이 자식이, 진짜…….
불호령에도 차영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한 번쯤은 저와 하셔도 되잖습니까? 보아하니 그 녀석들에게 많은 걸 허락해 주신 것 같던데요. 어쩌다 그렇게 심리적 장벽이 낮아지신 겁니까.”
“하…….”
도대체 뭘 안다고 저런 식으로 지껄이는 건지 모르겠다. 눈가를 좁히며 그를 노려보자, 차영헌이 어깨를 으쓱한다.
“소문 다 났어요. 팀장님이 에스퍼랑 잔다고.”
“……그건 그런 소문이 아닙니다, 차영헌 에스퍼. 아니, 애초에 내가 한 게 아니에요.”
망할 고은교가 우시현을 쫓아다니면서 만들어진 소문에 불과했다. 이 몸의 전 주인 말이다. 게다가 자다니, 당시의 우시현이 그런 걸 허락해 주었을 리가 없다. 손가락이라도 댈라치면 흠씬 두들겨 팼을걸.
‘……흠.’
사나웠던 초반의 얼굴과, 어젯밤 애달픈 얼굴로 자신을 꽉 끌어안은 채 물속 깊은 곳으로 잠기던 얼굴과는 꽤 괴리감이 있다. 문득 그 녀석의 뺨에 반짝이던 세 줄로 그어진 흉터가 떠오른다.
자신이 만든 것이다. 그때, 우시현은 자신을 지키려고 했다. 우시현뿐만이 아니라, 이승우, 그 녀석도…….
그때, 우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비가 오려나 봅니다.”
차영헌이 중얼거린다. 등 뒤로 빗방울이 창틀에 부딪혀 튀어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삽시간이었다. 비는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전조도 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아.”
아무런 힌트도 없는 걸까. 차영헌의 소원마저 무시당했다면, 이대로 영원히 게이트 속에서 살아야 하는 걸까.
계속해서 이 세계에 묶인 채로─
‘잠깐.’
묶여?
“영헌아.”
“예?”
“너…….”
마른침이 넘어간다. 등 뒤에서는 여전히 폭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가 아찔하다.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잠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너 혹시…… 이 세계의 흐름이 보여?”
“…….”
“그래, 단순히…… 느낌만으로는 여기가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아낼 수 없었겠지.”
이건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중요한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그는 분명히 게이트가 클리어 되는 것을 봤다. 모종의 영향을 받아 게이트의 잔해가 유지되었다 하더라도……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그 말은 게이트가 본래의 기질에서 벗어났다는 말이 된다. 또, 그동안 이승우가 그에게 설명한 바에 따르면 이곳은 두 사람의 의식 속이다.
그렇다는 건, 이 공간이 무생물보다는 생물에 가깝다는 뜻이겠지. 이능력자의 의식들을 삼켜서, 그들이 발산하는 에너지를 연료 삼았다면 이토록 오래 이 공간을 유지했던 것도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차영헌은…….
생물이라면 뭐든 죽일 수 있다. 아니, 「자를 수 있다」
“자를 수 있겠어?”
“말도 안 됩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차영헌이 대답했다. 아주 성급한 태도였다.
“안 됩니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고은교는 확신했다. 자신이 이제야 막 알아차린 걸, 차영헌은 진작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것 봐라…….
그는 차영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군가 자신을 속인다는 건 별로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그는 가볍게 속으로 숨을 들이켰다. 차영헌은 계속해서 안 된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차영헌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정신 차려.”
“…….”
손등으로 맞아 화끈하게 아프지는 않겠지만, 정신이 들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차영헌의 얼굴이 그걸 증명했다.
“왜 안 되는지 똑바로 설명해.”
얇은 눈매가 천천히 일그러진다. 차영헌이 바닥을 내려다본다. 굳게 다물린 입술은 영영 열리지 않을 것처럼 고집 있어 보였다.
“……저희는 이 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마 저희의 의식이 이 세계의 양분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그 끈을 잘라.”
생각보다 간단하게 일이 해결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차영헌은 입을 닫았다. 그의 눈은 공허해 보였다.
“그럴 수 없습니다.”
“왜?”
“저야 잠깐 육체와 의식이 끊어져도 상관없겠죠. 원래 이 몸의 주인은 저니까. 하지만 팀장님은…….”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듯 차영헌은 입을 닫았지만, 뒷말을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한 번이라도 잘못 연결된 인연의 끈이 끊어진다면…… 자신은 이대로 사라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구나.
작별 인사조차 남기지 못하고…….
거센 빗소리가 울렸다. 간간이 들리는 천둥소리에 센터 복도가 번쩍번쩍했다가 다시 어두워진다. 그는 물 냄새를 맡으며 센터 복도에 기대섰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건 고민거리도 아니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한 번 겪었던 일이지.”
우리는 이미 한 번 이별했는데,
“두 번이라고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미 장례를 치른 몸이야. 모험을 할 가치는 충분해.”
그때 겪었던 아픔이 아깝지 않느냐고.
그렇게 말하자, 차영헌이 이를 악물고 새빨개진 눈으로 고은교를 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