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그렇게…… 편하게 말씀하실 수 있어서 좋으시겠습니다.”
“…….”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차영헌이 자꾸만 욕설을 짓씹었다. 명백한 스트레스 반응이었다. 공기가 먼저 반응했다. 가이딩이 충분히 되어 있지 않았다면 폭주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다. 지나친 감정적 동요로 차영헌의 능력이 스멀스멀 밀려 나오고 있었다.
그는 과열되어 있다. 말리려 해도 들어 먹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붉어진 눈으로 그가 고은교를 응시한다. 눈동자 안에는 초점이 없다.
물 냄새가 난다.
그는 소리 없이 가까이 와 있다. 어깨를 움켜쥐고, 제멋대로 품 안에 끌어당긴다.
“저도 그냥 죽어 버리려고 했습니다. 아십니까?”
“윽, 차영헌 에스퍼!”
콱 끌어안긴 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힘껏 조이듯 그를 끌어안은 차영헌이 뒤이어 중얼거린다.
“에스퍼라서, 그것도 S급 에스퍼라서,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됐습니다. 그래서 그냥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살았어요.”
바짝 끌어안긴 채여서, 공교롭게도 차영헌의 입술이 바로 귀 옆에 있었다.
“하지만 팀장님이 돌아온 순간부터 그러기 싫어졌습니다.”
“…….”
숨 막힌다고, 이 자식아…….
“그런 제가, 왜 제 손으로 팀장님을 놔 드려야 합니까?”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차영헌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짐승도 가시에 코를 찔리고 나면 두 번 다시는 장미꽃 냄새를 함부로 맡지 않는다. 하물며 사람이라고 해서 다를까.
한 번 상처를 받고 나면 다시 상처받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다른 육체나마 자신이 돌아왔음을 확인했다고 해서, 차영헌이 한 번 받았던 상처가 아문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그때의 고통을 떠올리며 더욱 방어적으로 변했으면 변했지…….
큰 괴로움일수록 멀어지고 싶은 법이고, 아무래도 차영헌은 그때의 기억을 복기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흔들릴 정도로 아팠던 모양이다.
힘겹게 호흡하며 팔을 뻗어 차영헌의 등을 감쌌다. 그리고 말없이 쓰다듬었다. 차영헌은 얼굴을 보여 주지 않고 간절히 그를 껴안은 채 떨고 있었다. 그것이 안타까웠다.
“무서워하지 마라. 별것 아니야.”
그래…… 차영헌은 명백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한때 자신의 가이드를 잃은 고통이 다시 찾아올까 봐 겁먹은 것이다.
그가 죽고 싶어 한 것도 이해되었다. 장이주가 사라졌다는 이유로 그렇게 오래, 크게 괴로워했다면 차라리 죽어서 그만 괴롭고 싶었을 것이다. 고통은 해방을 바라게 되지. 자신도 그랬다. 일평생 불치병에 시달리며 영원한 해방을 바랐다. 하지만 결국 추락하기 시작했을 때, 땅과 맞부딪힐 충격과 고통을 두려워했다. 고통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니.”
그래, 결국에는 자신을 돌아오라고 붙잡아 준 그이에게 감사했다. 다시 살 수 있게 된 것에 환희를 느꼈다.
나약함은 인간의 본질이다.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죽은 사람마저 다시 데려올 정도로 욕심 덩어리인 것. 몹시 증오하는 사람에게 실은 사과 받고 싶어 하는 것. 옳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속이게 되는 것. 모순투성이에 이기적인.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모든 건 완벽하지도 영원하지도 않고 너도 가끔은 나를 원망했다는 걸 네 마음은 알고 있을 것이다. 잃는 것이 무서워서 쥐고 있을 뿐, 마음이 조금이라도 덜했다면 너를 아프게 하는 나를 세상 그 무엇보다 가장 먼저 버리고 싶겠지.
인력으로는 파도를 붙잡을 수 없어. 떠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고, 운명이라면 나는 최선을 다해 걸어갈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차영헌의 팔에서 조금씩 힘이 빠졌다. 어깨 너머에 턱을 올려놓은 채 차영헌은 침묵했다. 그는 차영헌의 마음이 가라앉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애초에 그가 차영헌의 등을 마주 안아 주었을 때부터 마구잡이로 그를 당기던 힘이 멈춘 참이다.
“얼굴 좀 보자.”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밀자, 차영헌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가까이 있었기에 엉망진창인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젖어 있는 차영헌의 눈 밑을 엄지로 가볍게 닦았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된다면…… 이번에는 너무 울지 말고.”
“…….”
“다른 애들에게도 잘 말해 줘. 특히 승우…가.”
이상하게도 이승우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머뭇거리게 되었다.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애는 나를 좋아했으니, 많이 힘들어할지도 모르겠다. 가능하면 네가 많이 보살펴 줘.”
그렇게 말하는 순간 눈물이 뺨 위로 툭 떨어졌다.
“……팀, 장님.”
차영헌이 바보처럼 입을 벌리며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주 큰 충격이라도 받은 몰골이다. 저는 한참을 오열했으면서 남이 조금 울었다고 이런 표정이라니, 이런 꼴을 보면 차영헌도 다 크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르르릉, 먼 곳에서 희미한 천둥소리가 났다.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차영헌의 눈을 응시한다. 어차피 끝은 그다음으로 가기 위한 시작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극과 극은 언제나 붙어 있다.
“……그게 진정으로 팀장님이 원하시는 겁니까?”
그가 그렇게 해 주었던 것처럼 차영헌 역시 손을 들어 한 방울 맺혔다 떨어진 눈물 자국을 문질렀다.
“그래.”
대답한 순간 얼핏 차영헌의 얼굴이 천둥소리와 함께 희미하게 보였다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본 그의 얼굴은 몹시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의 에스퍼는 두 번 묻지 않았다.
한순간 세상은 깜깜해지고, 쏟아지던 빗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다.
*
“……습니다. 더 오래 의식이 없으셨다면 전류 자극을 계속 주며 최소한의 근육을 살리는 작업까지 해야 할 뻔했지만, 그래도…….”
의식을 잃은 지 두 달이 지났다고 했다. 날짜를 따져 보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시간이 지나야 계산이 맞는데, 의식의 흐름과 실제 시간 사이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고은교는 무표정한 얼굴로 닥터의 설명을 들으며 어딘지 촌스러운 구석이 있는 선인장 화분을 응시했다. 단순한 취향인지 아니면 선물 받은 건지 모르겠지만, 라고 적힌 글귀의 빨간색 하트는 무채색의 진료실과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으니 퇴원하셔도 됩니다만, 차후 경과를 지켜보며 꾸준히 내원하시는 편이…….”
그는 의사의 말을 끝까지 경청한 뒤 고개를 끄덕여 ‘예’라고 대답했다. 다음 진료 예약은 보름 뒤로 잡았다.
그가 깨어난 걸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남선재였다.
그는 마치 고은교가 언제 깨어날지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정확히 눈을 뜬 순간,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으니 말이다. 하필 남선재를 가장 먼저 보다니, 고은교는 약간 곤혹스러웠다. 남선재라면 틀림없이 눈물 콧물 쏟으며 매달려 올 거라 생각했다.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 친구들에게는 제가 연락할게요.’
뜻밖에도 남선재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고은교를 몇 초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간단하게 말한 뒤 병실을 나갔다. 평소의 태도를 생각하면 지나치게 담백한, 아니…… 쌀쌀맞다고 생각될 정도로 산뜻한 반응이었다.
그사이 고은교는 닥터와 만나 그동안의 일에 대해 간략히 들었다. 한 것이라고는 그저 누워 있는 것이 다였으니 딱히 ‘일’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지만…… 어쨌든 누워만 있느라 전신의 근육이 빠져 재활 운동을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잘됐다.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꽤 과로하고 있었는데, 느긋하게 휴가를 보내며 근육을 좀 키울 기회였다.
달칵.
진료실 문을 닫고 나오자, 자신을 바라보는 세 명의 남자가 있다. 이승우는 반듯하게 앉아 있다가 그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다가왔고, 우시현은 애초에 앉지 않고 불량하게 벽에 기대 있었다. 남선재는 그 옆에서 허리를 굽히고 앉아 있다가 고은교가 나오자 눈만 들어 그를 확인한다.
“잘 지냈습니까?”
그들을 아주 오래간만에 만난 것 같았다.
“네.”
“하. 잘 지냈겠냐?”
같은 질문이어도 이승우와 우시현의 대답은 이렇게나 천차만별이다. 우시현은 코웃음 치며 비딱하게 말했지만 살짝 풀린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생각보다 오래 잠드셔서 걱정했어요.”
“이제 괜찮습니다.”
이승우가 걱정할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비단 이승우뿐만이 아닐 것이다. 우시현은 대놓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별달리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곁에서 온종일 종알종알 떠들 것 같은 남선재가 여전히 묵묵부답인 건 여전히 의외였다.
때가 되면 입을 열겠지. 남선재를 흘긋 쳐다본 고은교가 짤막하게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게이트 안에는 어떻게 올 수 있었던 겁니까?”
그 말에 이승우와 우시현이 슬쩍 눈빛을 주고받는다. 왠지 모르게 남선재를 힐끗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승우가 대표로 나와 간단히 대답을 정리한다.
“성가신 일들이 있었어요. 나중에 설명 드릴게요. 그보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당장 유동식은 무리겠지만, 그래도 뭔가를 드셔야…….”
“아니, 괜찮습니다. 지금은 좀 쉬고 싶어서.”
아까 깨어났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쉬고 싶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자 정말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데려다 드릴게요.”
이승우가 반색하며 제안한다.
“……그래요. 부탁합니다.”
에스퍼에게 사적으로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한 적은 없는데…… 오래 누워 있기도 했고, 이 정도 도움은 받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승우의 얼굴에 약간의 놀라움이 떠올랐다. 그리고 보는 사람의 기분이 이상해질 것 같은 부드러운 웃음도 이어 떠오른다.
우시현은 이 상황이 낯간지럽다고 생각했는지 눈썹을 팍 찌푸렸지만, 은근슬쩍 따라붙었다. 그에 비해 남선재는 어색한 얼굴로 이만 가보겠다는 말을 꺼낸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남선재와 자세한 이야기를 해 볼 필요가 있다는 걸 기억해 두고, 몸을 돌릴 때였다.
복도 끝에서 차영헌이 모퉁이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팀장님.”
언제 울고불고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멀끔한 얼굴이었다.
“늦게 일어나셨네요. 잠자는 공주인 줄 알았지 뭡니까.”
“뭐야, 저 새끼. 건방지게…….”
등 뒤에서 우시현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차영헌 에스퍼.”
아주 어렵게 결정을 내렸던 차영헌의 얼굴이 아직까지 선명하다. 그가 길쭉한 다리를 뻗어 성큼성큼 다가온다.
그 모습을 보자 마음이 묘하게 뭉클해진다. 차영헌이 자랑스럽고 기특했다.
“잘 해낼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칭찬의 말을 던진 순간, 차영헌이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뭐지?
“팀장님께 배운 건데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 얼굴을 안다. 저 녀석, 자기만 알고 있는 뭔가가 있는 거다. 뒤늦게 아주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게 정상적으로 돌아갔는데, 왜 저런…….
“잠깐…… 차영헌 에스퍼. 뭘 자른 겁니까?”
설마…….
“적절하게 잘랐죠.”
그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에스퍼들 말고는 아무도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어차피 목소리를 낮춘다 한들 에스퍼들은 들을 수 있겠지만, 저들은 자신이 ‘진짜’ 고은교가 아니라는 걸 진작 알고 있다.
“……고은교와 이 몸의 인연을 끊은 겁니까?”
그 물음에 차영헌이 입꼬리를 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