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132화 (131/132)

Epilogue

학교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어쩌고, 실습 때 있었던 일에 대하여 유감이고 어쩌고. 본론은 2학기에도 수업을 할 의향이 있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그는 하지 않겠다는 말을 정중하게 열 줄 내외로 늘려 회신하고, 국장이 이번에는 제대로 된 후임자를 구하기를 빌었다. 다행히 그가 다시 국장에게 호출당하는 일은 없었다. 최소 이달 말까지는.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교수님, 뭐 보세요?”

현재 그는 센터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지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실습을 하고 난 다음에 설문지라니, 잘도 번듯한 공공기관인 척하고 있군…… 어떤 에스퍼는 각성했을 때부터 온갖 감시와 협박 속으로 밀어 넣더니.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재미있으세요?”

“딱히 재미로 보는 건 아닙니다만.”

어깨 너머로 웃는 소리가 나더니 기척이 좀 더 가까워진다. 익숙한 향수와 섞인 체향이 느껴졌다.

재미로 보는 건 아니라고 했지만, 학생들이 제출한 답변을 보는 건 흥미 채우기인 것도 사실이었다. 굳이 들여다볼 필요 없는 잡무에 가까웠다는 뜻이다. 이런 거야말로 속 빈 강정에 구색 맞추기라는 걸 아는데도 교수님의 지도에 감사드리고 다음에도 꼭 실습에 참여해 보고 싶다는 형식적인 내용은 읽어도 읽어도 또 읽고 싶어졌다. 묘하게 손이 가게 만든다고나 할까.

어차피 국장은 설문 조사 결과 따위는 보지도 않을 테니 자신이라도 보는 게 나았다. 그래, 나는 국장이 되어야겠다. 그래서 온갖 비윤리적인 관습을 뜯어고치리라. 다음 시대의 주역이나 다름없는 어린 이능력자들의 설문지를 한 장 한 장 읽으며 그는 야심을 불태웠다.

손에 쥐고 있던 설문지를 한 장 다 읽자, 기다렸다는 듯 설문지가 치워진다. 힐끗 고개를 들자 그린 듯 웃는 단정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설문지를 훑어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굳이 이런 걸 보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요.”

그가 돕는 걸 정말 ‘좋아한다’는 건 고은교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가까이 붙어서 치근덕거리고 있지 않았을 테니까.

“이승우 에스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틀자, 지나치게 가까운 눈과 곧장 마주친다. 달라붙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이승우가 어깨를 가볍게 둘러 움켜쥐고, 포옹하듯 붙어 그에게 다음 설문지를 내민다. 저절로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거의 관성적으로 설문지를 받아 드는데, 손과 손이 스쳤다. 노골적인 성애를 암시하는 은근한 접촉이었다. 동시에 한껏 고개를 숙인 채 그를 감싸 안는 것처럼 서 있던 이승우가 뺨을 비벼 온다.

“제가 읽어 드릴까요?”

그가 기습적으로 고은교의 입술에 살짝 입 맞춘다. 고은교가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 이후로 이런 자잘한 스킨십이 늘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스킨십이 익숙하다는 사실이다. 분명 이전에는 거절당할 것을 각오하고 만지는 것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언제 어떻게 스킨십을 해야 고은교가 눈 뜨고 홀랑 당할 줄 아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래도 이건 아니다. 황당한 얼굴로 이승우를 올려다보자, 그가 눈웃음을 치며 한 번 더 입술을 붙인다. 애초에 고은교가 설문지 따위에 신경을 쏟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었다. 관심을 전부 가로채려는 의도가 보이는 접촉이었다. 손으로 제 입을 막자 손가락 위로 입맞춤이 쏟아진다.

“이승우, 그만.”

“여기 저랑 교수님밖에 없어요.”

“원래 나밖에 없었습니다만.”

“이제 제가 왔으니까 저랑 교수님이죠.”

이승우가 혀를 살짝 빼고 윗입술을 핥는다. 애써 그 신호를 모르는 척했다. 애초에 이곳은 사무실이었다. 당직을 서던 직원이 볼일을 보러 잠깐 나간 거지, 따로 배정받은 사무실이 아니란 말이다. 언제 사람이 들어올지 모르는데 이렇게 에스퍼랑 딱 붙어서 비비고 있으면 곤란했다.

“떨어지세요. 아니면 나가든지.”

그나저나 이 녀석은 도대체 왜 이렇게 갑자기 대범해졌는지 모르겠다. 아니, 이걸 대범이라고 부를 수 있나? 지나치게 능숙해진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눈썹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자, 생긋 웃은 이승우가 그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문질렀다.

“그렇게 보시면 또 하고 싶어지는데…….”

떨어지란 말을 듣는 척도 안 하는 모습에서 예전의 이승우가 문득 떠올랐다. 자신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마음껏 굴었던 이승우 말이다. 그래, 그는 원래도 막무가내로 구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기점이 된 것이라면, 음. 짚이는 구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원래 에스퍼는 가이드에 대한 소유욕과 집착욕을 품고 사는 존재니까, 자신의 가이드를 잃어버릴 뻔한 일 때문에 더는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생각하게 된 것 아닐까. 게다가 이승우는 자신을 좋아한다. 지금 당장 가져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간절해진 것이라면야.

그럼에도 설명되지 않는 몇 가지 부분이 있기는 한데, 그거야 두 달 동안 이승우가 그쪽으로 한 단계 더 성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참게 해 주셔야죠.”

계속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불이라도 지핀 듯 눈을 빛내며 이승우가 기우뚱 고개를 기울여 왔다. 그러고는 입술을 가린 손을 덮어 가볍게 눌러 떨어트린다.

고은교가 다른 손으로 황급히 이승우를 저지하며 말했다.

“이곳은 가이딩실이 아닙니다, 이승우 에스퍼.”

손에 든 설문지를 강제로 이승우의 품에 떠안긴 고은교가 재빨리 지시를 내렸다.

“읽으세요.”

“……네, 교수님?”

이승우가 천천히 눈을 깜빡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아까 읽어 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제야 데일 듯 뜨겁던 시선이 설문지로 내려간다. 이승우는 약간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딱히 반기를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순순히 학생들이 써 놓은 답변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승우 문제가 아닌가.’

가벼운 듯 집요한 접촉은 이전에도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달라졌다. 이승우가 이끄는 대로 은근히 넘어가려는 습관은 꼭 몸에 배인 것처럼…….

“2번, 실습 중 불편했던 점이나 개선했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면 알려 주세요. 없음.”

“없다고 적힌 부분은 생략하고 넘어가세요.”

“네.”

착하게 대답한 이승우가 설문지를 다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던 생각을 마저 이어서 하려던 고은교는 부드럽게 들리는 이승우의 목소리에 잠시 넋을 놓았다.

“여기 계셨군요.”

그때,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동시에 차분히 설문지를 읽던 이승우의 목소리도 멈추었다. 차영헌이 뚜벅뚜벅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완전히 에스퍼 정복 차림이었다. 발목을 바싹 조이는 검은색 군화와 빳빳하게 각이 잡힌 제복을 훑어보자 견적이 나왔다. 오늘 그는 S급 에스퍼들을 데리고 센터가 여는 기자회견에 참석한 듯했다. 곧 있을 S급 게이트에 들어갈 에스퍼로 차영헌이 추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은 의식을 잃고 있었기에 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 없었지만, 의식을 되찾은 것은 물론 몸에 이상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순조롭게 S급 게이트에 들어갈 이능력자 명부에 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운 좋게도 센터가 S급 게이트를 가장 먼저 발견했고, 센터 내부의 S급 이능력자들을 데리고 게이트 작전 팀을 구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노련한 S급 에스퍼 중 하나인 차영헌은 기회가 되면 꼭 데리고 가야 할 히든카드였다.

물론 아주 오래간만에 튀어나온 S급 게이트의 등장에 언론이며 온갖 기업들이 눈 벌게지도록 센터의 진행 상황을 감시하고 있었다. 차영헌이 새로운 팀의 주축이 됨에 따라 현장에 들어갈 이능력자가 몇 명 빠지거나 새로 추가되었고, 그에 따라 센터는 에스퍼에 한해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 상황에 대해 간단히 브리핑하기로 했다.

“저는 바깥에서 일을 하고 왔는데, 안에서 다른 놈이랑 좋은 시간 보내고 계셨습니까?”

“…….”

이승우와 고은교를 쭉 훑어본 차영헌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미리 이승우를 떼어 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승우가 입술을 대고 있을 때 들어왔다면, 모르긴 몰라도 지난번처럼 센터 건물을 날리려 들었을 것이다.

“질투가 추하네요. 그렇죠?”

이승우가 조용히 속삭였다. 물론 차영헌의 귀에는 충분히 들렸을 만한 목소리였다. 차영헌의 턱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고은교가 한숨을 내쉬며 이승우를 돌아보았다.

“이승우 에스퍼, 괜한 사람 도발하지…….”

순간, 이승우가 무언가를 아주 빠르게 쳐냈다. 고개를 홱 돌리자 차영헌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손을 뻗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지금 두 사람, 뭐 하는 겁니까.”

“제 앞에서 다른 에스퍼를 쳐다보시길래.”

황당한 시선이 도로 차영헌을 향하자, 그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리며 내뻗은 손을 거둬들였다. 고은교는 자신의 생각을 정정했다. 입술을 대든 안 대든, 이놈들은 어떻게든 고은교를 독점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 다 큰 성인들이 지금…….”

쳐다봐 주지 않는다고 고개를 돌리게 하려는 놈이나, 그 손을 쳐내면서 아웅다웅하는 놈이나…….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그가 조용히 말했다.

“둘 다…… 나가.”

“교수님.”

“아니면 내가 나갑니다. 결정하세요.”

이승우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항의했지만, 그는 아주 단호하게 차영헌과 이승우를 문밖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잠깐 사이에 몹시 피곤해졌다. 이승우가 들고 있던 설문지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주워서 설문지 더미 위에 얹어 놓았다. 머리 좀 식히라고 두 놈을 밖으로 내보냈으니 조금 뒤에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 그의 눈 안에 설문지의 마지막 문항이 들어온다.

‘십 년 뒤 미래의 자신은 어떤 모습입니까?’

다시 봐도 제법 건설적인 질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설문지를 마저 차곡차곡 정리했다. 십 년 뒤라. 그는 자신의 나이를 세어 보다가 픽 웃었다.

장이주였을 때는 반려동물의 털이 건강상의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어서 식물 말고는 아무것도 키우지 못했다. 그러니까…… 십 년 뒤에는 좀 느긋하게 살면서 개를 키우면 좋겠다. 강아지는 외로움을 많이 타니까 두 마리가 좋겠고, 합사가 가능하다면 고양이도 한 마리 키우고 싶다.

‘흠…….’

그리고 다정하고 신실한 배우자가 하나 있으면 좋지 않을까. 그런 따스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그리고 있는데, 문밖에서 쿵, 하는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이 녀석들이…….”

잠시라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모양이다. 설문지 더미를 내려놓고, 그는 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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