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비스트 8
19장 복수(2)
클라우디아가 레이라 부인의 방을 찾았다. 레이라 부인은 딸의 방문에도 정신없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명하고 있었다.
“그웬 영애는…… 따로 자리를 만들 테니 바로…….”
‘그웬 영애?’
왜 모친이 그녀를 언급하는지 알 수 없었다. 클라우디아는 제 모친의 일이 끝나길 기다리며 방을 거닐었다.
협탁이 눈에 들어왔다. 기회는 지금이었다. 저 협탁에 리즈 왕비의 일기장이 들어 있었다.
‘내가 일기장을 가져다주면…….’
클라우디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진저의 생각처럼 멍청한 여자가 아니었다. 일기장을 건네주면 뒤돌아보지도 않고 란델로 돌아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일기장이 필요한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일기장만 내 손에 있으면 돼.’
그들은 모친을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라면 다르다. 섣불리 일기장을 이용하려 들지 않으리라 확신할 터였다.
‘날 손에 넣으려 혈안이 되겠지.’
그의 달콤한 미소가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보고 있어도 그리워하는 듯한 간절한 표정. 그녀가 평생을 바라마지 않던 게 바로 그것이었다.
클라우디아는 레이라 부인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사내의 껍데기만 차지한 채 모든 것을 가졌다고 착각하며 살긴 싫었다.
그녀는 진저여야 했다. 진저만 자신의 것이 되어준다면 엘리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제 몫이 될 것 같았다.
클라우디아가 조심스럽게 협탁에 손을 뻗었을 때였다.
“루디.”
레이라 부인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니?”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별일 아니면 나중에 오너라. 골치 아픈 일이 생겼어.”
“무슨 일이에요?”
무언가 말하려 입을 벌리던 레이라 부인이 숨만 들이켜곤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클라우디아가 입안의 여린 살을 씹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필리아를 단속하랄 땐 어른처럼 행동하길 바라더니 정작 자신이 어른이고 싶을 땐 아이 취급을 했다.
자식조차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제게 비밀이 많네요.”
“뭐?”
“저는 어머니 인생에…….”
‘들러리일 뿐인가요?’
클라우디아가 입을 다물었다.
“속 뒤집을 거면 나가라.”
레이라 부인이 혀를 찼다.
“어떻게 마음에 차는 놈이 하나 없어.”
“저도 노력했어요. 어머니의 마음에 차는 자식이 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요! 저라고 어머니 때문에 힘들지 않은 것 같으세요?!”
“네가 나 때문에 힘들다고? 사생아를 공주 대접받게 해준 게 누군데!”
“사생아로 낳으신 건 어머니시죠. 저와 필리아를 낳아 백작 부인이 되려고! 아니, 폐하께 조금이라도 다가가려고 그러신 거잖아요! 저희를 이용하셨으면서 왜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으세요?!”
레이라 부인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래서 자식새끼 키워 봐야 헛수고라는 거지. 너는 나를 꼭 빼닮았어. 네가 내 자식이 아닌 다른 여자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욕망에 취해 평생을 괴롭게 살았을 거다.”
“지금도 충분히 괴로워요.”
클라우디아가 레이라 부인을 노려보았다.
“나가!”
레이라 부인이 소리쳤다. 클라우디아는 더 있을 생각도 없었다며 방을 나섰다.
그런 딸의 뒷모습을 흘기던 레이라 부인이 악을 내지르며 테이블의 물건을 모두 집어 던졌다.
찻잔이며 유리로 된 시계 등이 쨍, 파열음과 함께 바닥에 처박혔다.
“그 여자의 딸은 제 어미라면 끔찍한데…… 아즈렌, 엘리사! 그것들을 찢어 죽였어야 해!”
레이라 부인은 리즈 왕비의 시체가 아직도 사랑해 마지않는 남자의 침실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체만 건드리려 하면 침묵하고 있던 왕이 두 눈을 까뒤집었다.
‘다 갈기갈기 찢어버리겠어.’
그녀는 엘리사가 무사히 그란디아를 떠나게 할 마음이 없었다.
리즈 왕비도, 그 딸도 모두 제 손으로 찢어발길 것이다.
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웬 영애까지 이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들을 처리할 방법은 일기장뿐입니다. 제게 넘겨주시죠.”
레이라 부인이 벅을 찢어져라 노려보았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일기장 타령이었다.
“네게 넘긴들 ‘그 부분’을 해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성국엔 레스칼포네족의 자료가 많이 있습니다. 성국에서 신관들과 함께 고민하다 보면…….”
그녀가 벅의 뺨을 올려붙였다.
“나를 위해 일하겠다는 헛소리는 마라. 일기장을 가지면 네 욕심만 채우려 들겠지! 하지만 벅, 기억해라. 내 입에서 우리가 그 부분을 해석하지 못했다는 말이 나오면 너는 파울로의 손에 죽을 것이다.”
레이라 부인이 씩씩대며 그를 밀쳤다.
벅이 욕설을 삼켰다.
‘일기장이 내 손에 들어오면 너부터 죽여주마.’
왕에게 버려진 매춘부의 딸년이 지금껏 득세할 수 있는 게 누구 덕인지도 모르고. 벅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공의 병사를 그란디아 내에 들여 달라니요.”
거스터 후작이 코웃음을 쳤다. 자신을 뭐로 보고 그런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한단 말인가. 그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후작 영애가 용병의 아이를 밴 적이 있었다지?”
후작이 진저를 노려보았다. 그는 결혼 후 오랜 시간이 지나 본 딸을 몹시 사랑했다.
“그 일로 레이라 부인의 딸에게 모욕까지 당했다고?”
그 얘기를 듣고 얼마나 분노했는지 모른다. 제 힘으로 키운 개가 주인의 손을 문격이었다.
레이라 부인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그녀는 아이들끼리의 말싸움이라며 사과는커녕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생각해 본 적 없나? 그 여자의 딸이 어째서 당신의 딸을 모욕했을까.”
“…….”
“제 어미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는 거다. ‘거스터 후작은 이제 필요하지 않다’고.”
“허튼수작으로 나를 희롱하려 들지 마시오.”
“당신의 쓸모는 하나뿐이야.”
“그웬 공작!”
“마영석. 성국에 속한 그란디아에서 유일하게 마영석을 거래할 수 있는 위치. 그런데 거래가 끊긴다면?”
며칠 전 카르트가에서 더 이상 마영석을 대지 않겠다는 말을 전해왔다.
“다른 거래처를 찾으면…….”
“란델은 그란디아와 거래할 수 있는 단 하나뿐인 나라다.”
거스터 후작도 그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다.
성마 전쟁 이후 각 나라에선 성국과 마탑, 둘 중 하나를 택했다. 성국에 속한 나라는 마영석을 채굴하면 바로 성국에 올려보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이 사사로이 이용할 수 있는 마영석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반면에 마탑을 택한 나라는 마영석을 사사로이 채굴할 뿐 아니라 시중에 마법 아이템을 판매하기까지 했다.
성국와 마탑은 경쟁 관계이므로 마탑을 받아들인 나라에선 성국에 속한 나라에 마영석 수출이 금지되었다.
그래서 성국에 속한 나라가 마영석을 들이는 방법은 하나였다. 대륙에서 유일하게 마탑과 성국을 모두 받아들인 란델을 통하는 것.
후작 앞에 있는 이 남자는 란델에서도 가장 많은 마영석을 확보한 자였다.
게다가 입법 최종 의결권을 가진 4공 중 하나. 상단이라면 이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자에겐 당신이 가장 큰 아군이자…….”
진저가 후작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적이야.”
“…….”
“그 여자의 치부를 모두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귀족들에게 가장 입김이 강하지. 그 여자는 궤도에 오른 지 한참 되었으니 이제 기반을 다질 차례야. 당신이 필요할까?”
“그건…….”
“당신을 치려 할 거다. 그 증거로 레이라 부인이 클라우디아를 내게 붙였지.”
“그 여자가……!”
후작이 이를 갈았다.
“하지만 공도 그 여자와 마찬가지 아니오? 이번 일이 끝나면 나를…….”
진저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엘리사의 말이 떠올랐다.
‘결속의 증거를 원할 거예요. 우리 쪽으로 넘어온다는 확신이 있다면 말씀하세요. 내가 당신의 아이를 품고 있다고.’
위험하긴 하지만 저자가 레이라 부인에게 계속 붙어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진저가 입을 열었다.
“내 아내는 여전히 제1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지.”
“공주님은 여성이니…….”
“나는 란델의 공작이니 당연히 왕위 계승은 무리. 하지만 내 아들이라면 다르다.”
후작의 눈이 커졌다.
“그럼 공주님께서 각하의……!”
“답변은 이틀 내로.”
진저가 후작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때마침 클라우디아가 진저를 찾아왔다.
“드릴 말씀이…… 후작?”
클라우디아를 본 후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 * *
후작은 결국 진저의 말대로 하우벡 부대를 용병으로 위장해 그란디아로 들였다.
그동안 엘리사와 진저는 준비를 마쳤다.
진저가 아내의 어깨를 감쌌다.
“제가 란델에 간 건 칼바람이 부는 겨울이었어요.”
“그래.”
벌써 더위가 한풀 꺾였다. 곧 가을이 찾아올 것이다.
“당신을 만난 후 세 번째 계절이에요.”
아내는 벌써 지친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워 입이 썼다.
“난 당신이 우선이야. 도망치고 싶다면 함께…….”
“아니요, 여보. 저는…….”
엘리사가 배를 감쌌다.
“다음 겨울엔 근심 없이 웃고 싶어요.”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모후는 강한 여자였다. 그 힘은 부왕의 극진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래서 더 강해져야 했다. 남편의 사랑을 받는 제가 모후보다 약해선 안 되는 법이니까.
그녀는 굳은 의지로 남편의 사랑을 증명하고 싶었다.
“시작해요.”
엘리사의 말에 방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몸을 긴장시켰다.
제일 처음 나선 사람은 진저였다. 그는 클라우디아에게 한 번도 보이지 않던 미소를 보였다. 클라우디아는 언제나처럼 그의 미소에 혼을 빼앗겼다.
“부탁한 건 어떻게 됐지?”
“……엘리사 공주를 위한 일인가요?”
“그렇다고 하면?”
하늘로 둥둥 띄워놓고 바닥에 처박아버리는 일이 잦았다. 그녀는 그의 앞에서 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의 마음대로 던지고 주울 수 있는 공. 클라우디아가 인상을 쓰며 그의 가슴을 떠밀었다.
“제가 공의 부탁을 안 들어드리면 어쩌시려고 저를 이렇게…….”
진저가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곧 품에 안을 것 같은 사람처럼 다가갔으나 그녀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애가 닳았다.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은데 이내 연기처럼 사라질 것도 같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를…… 그래도 어머니인데…….”
클라우디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공의 부탁이 어머니께 해가 되는 건…….”
“별것도 아니잖아. 난 내 아내가 안쓰러워. 꼭 나를 보는 것 같거든.”
“……도태된다고 해서 공과 같다곤 할 수 없어요. 저도 공처럼 귀족이 아닌 어머니가 있어요.”
클라우디아가 그의 팔을 잡았다.
“공과 가장 비슷한 건 저예요. 공주님은 폐하의 적녀라……!”
설득한다고 통할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부탁을 들어주는 쪽이 나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어머니에게 피해가 가는 것도 아니었다. 깊은 한숨을 뱉은 클라우디아가 그의 부탁에 대해 얘기했다.
“귀족들과의 독대는 어려워요. 특히 거스터 후작 쪽은 어머니의 허락이 없으면……. 하지만 공주님을 제 파티에 초대하는 정도라면 괜찮아요.”
클라우디아는 진저가 엘리사에게 사람을 만들어주려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의 목적을 몰랐다. 그녀는 엘리사의 입지가 서길 바라는 줄로 알았지만, 그가 진정 아내를 티파티에 참석하게 하려는 이유는 달리 있었다.
진저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진저가 엘리사에게 초대장을 전해주었다. 그녀는 헬렌으로부터 받은 파티 초청객 명단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수도에 오백 이상의 군사를 가진 건 거스터 후작과 마델란 백작, 그리고 게티 백작이에요. 특히 게티 백작은 국군의 총사령관을 지낸 적이 있어 무인들과 친분이 두텁죠.”
“게티 백작을 끌어들일 수 있겠어?”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티 백작과 독대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아들을 이용해 아비를 움직여야 했다.
“궁을 포위할 때 궁 밖에서 군사가 움직인다면 단숨에 수세에 몰릴 거야.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지?”
“네.”
게티 백작은 거스터 후작을 비롯한 레이라 부인의 최측근이었다. 거스터 후작이 변절했으니 게티 백작도 저울을 재려 할 게 분명했다.
여기서 그가 원하는 걸 줄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저…… 리한이 도와준다면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 같은데…….”
리한은 문에 등을 기댄 채 삐딱하게 고개를 젖히고 있었다.
“그래…….”
“그런데 문제가…….”
엘리사가 곤란한 듯 두 손을 맞잡았다.
“문…… 제……?”
“게티 공자는 아름다운 걸 좋아해요.”
리한은 남성미가 넘치는 타입이 아니었다. 일반 남성보다 선이 가늘어서 미남이긴 하지만 미소년이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그 아름다운 것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게 남자…… 인데…….”
미리 왕궁에 들어와 있던 하우벡이 엑, 소리를 내며 펄쩍 뛰었다.
“남색가라고요?!”
“마법과 남색에 푹 빠져 있대요…….”
엘리사는 몹시 미안한 표정이었지만 리한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금사 같은 부드러운 금발을 쓸어 올렸다.
“그런 놈…… 쯤이야…….”
마법사들은 특이한 사람이 많았다. 남자만 사랑할 수 있는 남자부터 기아처럼 뼈밖에 없는 여성을 숭배하는 남자까지 온 인간 군상을 다 겪어본 그였다.
귀찮긴 하지만 이 일만 끝내면 마탑 후계 자리를 내던지고 온종일 개처럼 먹고 자고 싸고, 딱 세 가지만 반복할 수 있으리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 게…….”
“고마워요…….”
진저가 픽 실소를 흘렸다.
“저놈한텐 당신만큼 고마운 사람이 없어.”
“네?”
“세상에서 가장 지겹고 귀찮은 짓을 떠넘겼잖아.”
엘리사가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마법에 관심이 많았다. 삶에 치여 한 번도 원하는 걸 해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사실은 마탑에서 마법을 배우게 되는 걸 기대하고 있었다.
“우리가 바라는 게 일치해서 다행이에요.”
“우리?”
진저가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그러나 엘리사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그의 질투는 언제나 그녀를 기쁘게 했다.
“어쨌든 고마워요. 게티 백작만 우리 쪽으로 넘어오면 마젤란 백작도 어쩔 수 없을 거예요.”
“그럼 이제 레이라 부인을 공격하는 일만 남았나?”
“왕성을 포위하는 건 마지막 방법이고, 저는…….”
엘리사가 방 안에 있는 루펠라, 라골, 리한과 기사들을 쭉 둘러보았다.
“여러분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이기고 싶어요.”
라골이 말했다.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최대한 안전하게 싸우겠다는 말이에요.”
“그게 무슨…….”
엘리사가 서랍에서 몇 장의 양피지를 꺼냈다.
“적들의 내분을 만들 거예요.”
“내분?”
“내분?”
하우벡과 마크빌이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엘리사가 들고 있는 건 어떤 남자의 신상이 적혀 있는 서류였다.
“개인의 능력으로 보자면 레이라 부인은 뛰어난 편이에요. 투자할 곳과 아닌 곳을 정확히 찾고, 상대의 약점 또한 한 번에 파악하죠.”
“그래서?”
“그녀는 이미 당신과 클라우디아를 짝으로 만들 수 없다는 걸 알 거예요. 그녀 자신이 루펠라를 노리고 있으니까.”
루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그 여자가 하는 말을 들었잖아.”
“이제 클라우디아를 시집보낼 다른 곳이 필요하겠죠. 이왕이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곳을 선호할 테고요.”
그녀가 양피지를 내려놓았다.
“모로스 국은 성국을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요. 이미 종교가 너무 많이 퍼져서 이단으로 처리할 수 없는 수준이거든요.”
서류를 확인한 라골이 놀란 표정으로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벤달 자작이군요. 모로스 국에서 가장 많은 마영석을 가졌다는…….”
진저와 라골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라골이 설명을 시작했다.
“비밀리에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이상성애자라고. 각하에 비하면 외모도 능력도 형편없죠. 그저 가진 거라곤 마영석뿐인 남자예요.”
“클라우디아가 이런 남자와 결혼하려 할까요?”
남자에 대한 설명을 들은 모두 조금 전의 라골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누구도 엘리사가 이런 일을 계획하고 있으리라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엘리사는 조금도 거리낌 없는 표정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창고에 갇혀 어머니를 부르짖었다. 나이가 든 지금은 자신만이 아닌 곁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남편과 아이에게까지 여파를 미치고 있는 이들이었다. 단죄함이 옳았다.
“이자를 클라우디아의 남편감으로 어떻게 추천하려고요?”
루펠라의 말에 엘리사가 남편을 쳐다보았다.
“거스터 후작이 있잖아요. 마영석을 거래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 명분도 있고요.”
진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로 거스터 후작에게 자작의 신상명세를 전했다.
한번 의심을 시작한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의심을 확신한다. 거스터 후작이 그랬다. 그는 레이라 부인을 쳐내기로 결심을 마쳤다.
거스터 후작은 진저의 말대로 레이라 부인에게 자작의 이름을 넌지시 꺼냈다.
엘리사의 생각처럼 레이라 부인은 진저를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녀는 벤달 자작에게 큰 관심을 가졌고, 후작은 엘리사가 조사한 자료를 그녀에게 전달했다.
“소문이 안 좋은 자로군.”
“소문일 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보다 나은 자의 흠을 잡고 싶어 하죠. 그웬 공작의 소문이 더럽듯이 말입니다.”
진저의 소문은 9할이 진실이었으나 레이라 모녀는 엘리사로 인해 변한 그를 만났다. 확실히 가능성 있는 말이었다.
“마영석의 중요성은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마도구로만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마영석으로 만든 무기는 어떤 무기보다 견고합니다.”
“군사력에 보탬이 될 거다?”
“바로 그렇습니다.”
레이라 부인의 눈에서 욕망이 일렁거리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거스터 후작이 일을 완수하고 레이라 부인의 반응을 진저 측에 전했다.
“당신의 생각대로더군.”
진저가 아내에게 말했다. 엘리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제 계획을 시작할 때예요.”
“오늘 클라우디아의 파티에 참석할 건가?”
“네, 리한과 함께요.”
진저는 미리 파울로로부터 파티장에 마력 제한 결계가 쳐 있지 않음을 확인했다.
그곳이라면 호위 없이 보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리한은 일당백도 어렵지 않은 사내였다.
“그래.”
게티 백작만 그들에게 넘어오면 수도에서 정변이 일어나도 큰 무리 없이 왕국군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란디아는 성국에 군권을 모두 빼앗긴 상태였다. 수도를 호위하는 게티 백작과 마젤란 백작, 그리고 거스터 후작의 군사를 제외하면 왕궁에서 쓸 수 있는 군사의 수는 고작 천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에겐 교황 후보이자 전투 신관인 파울로가 있었고, 현 란델 마탑의 후계인 리한이 있었다.
리한 또한 보기 드문 강력한 마력의 소유자였다. 전투에 참가한 경험도 있었다.
파울로와 리한뿐만이 아니었다. 근 십 년간 대륙에서 가장 많이 전쟁에 참전한 그웬의 정예가 백여 명이나 왕국에 들어와 있었고, 카르트 후작가로부터 도움까지 얻었다.
이제 일기장만 손에 넣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클라우디아는 레이라 부인과 분열하면 일기장을 빼앗으려 할 거예요. 그녀의 행동을 주시했다가 일기장이 어디에 있는지 찾으면 돼요.”
“분명히 일기장을 쉬이 열 수 없도록 수를 써놨을 거야.”
“지금 당장 레이라 부인을 칠 명분이 없어요. 그녀를 고문해 일기장을 열 수도 없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일기장의 위치만 확인해야 해요.”
루펠라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이미 준비도 끝났는데 왕궁을 포위하면 안 돼요?”
진저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것뿐이라고 했잖아.”
“지금이 최악이 아니면 언제가 최악이라는 거야. 왜 있는 걸 안 써?”
“왕이 있는 궁을 제1 왕위계승자가 포위한다. 이건 반역을 뜻하는 거야.”
“폐하는 언니 편이잖아. 폐하가 증언하면…….”
라골이 한숨을 내쉬었다.
“군권이 성국에 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건 폐하 위에 교황이 있다는 뜻이고, 교황에게 이번 일을 미리 언질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럼 교황에게 일을 전달하면……. 아, 신관장 파울로를 제외한 그란디아의 신관들은 모두 레이라 부인의 사람이지. 전달할 방법이 없겠구나.”
엘리사가 루펠라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성국에서 신관들을 파견한 건 성국에 속한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감시하기 위해서예요. 왕이 교황과 일대일로 대화하면 당연히 신관의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겠죠? 신관의 힘은 성국을 등에 업었다는 것밖에 없으니까요.”
루펠라와 마찬가지로 일을 절반만 이해하고 있던 기사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성국에 보고할 땐 늘 신관을 통해서 하죠. 파울로가 이 일을 성국에 전달하려면 그란디아를 비워야 해요. 지금 파울로가 그란디아를 비우면 우리는 전력의 3할을 잃는 거예요.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클 수도 있죠. 파울로는 레이라 부인의 일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니까요.”
“그렇군요.”
“아아.”
“그럼 다른 신관을 통해서 성국에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는데 그란디아의 신관들은 아무도 신뢰할 수 없어요.”
무작정 들이받으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추후에 성국과의 문제가 발발할 터였다. 특히 진저는 란델의 4공 중 하나였다. 엘리사보다 진저가 위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명분이 없는 한 왕궁을 포위할 순 없다.”
“그럼 이도 저도 못한다는 거잖아. 일기장을 찾아도 레이라 부인에게서 빼앗을 수 없으면 끝이야.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일기장의 위치를 찾으면 거래를 제안할 거예요.”
“거래?”
“레이라 부인에게 왕비 자리를 주겠다고요.”
“믿을까요?”
“믿을 수밖에 없도록 궁지에 몰아야죠.”
왕궁을 포위할 수 있다는 것만 보여주면 된다. 이건 겁을 먹는 상대 쪽이 지는 게임이었다.
“정말 왕비가 되게 하는 건 아니죠?”
“약속을 했으니 지킬 거예요.”
“네?!”
“팔다리를 다 잘라놓겠지만.”
이름뿐인 왕비 자리쯤이야 줄 수 있었다.
“거스터 후작에게도 왕의 장인 자리를 약속했습니다. 최측근인 그를 레이라 부인에게서 떼어놓고, 레이라 부인의 모든 힘을 빼앗는 데다 후작 쪽으로 사람까지 모이게 되면…….”
루펠라는 정쟁 같은 건 잘 모르지만 내궁의 일은 알고 있었다.
이런 경우 백이면 백 약한 쪽이 잡아먹힌다.
“언니가 손을 쓰지 않아도 후작이 레이라 부인을 처리하겠군요.”
“우리는 그 증거만 확보하면 돼요. 다시는 나를, 그리고 각하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확실히 엘리사는 변했다.
왕의 의사 같은 건 묻지 않았다. 그도 엘리사에게 의사를 물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니가 란델로 가면 폐하를 인질로 잡을 수도 있어요.”
라골이 입꼬리를 늘렸다.
“잡을 수 없을 겁니다. 귀족끼리 분열할수록 왕권은 강해질 테니.”
왕이 엘리사에게 소중하지 않기에 이런 방식을 택했다. 그녀에게 왕이 소중하다면 티끌만 한 위험까지도 신경 썼을 터였다.
그녀는 복수를 하고 있었다. 레이라 부인과 왕, 그리고 자신을 도태시킨 귀족들에게.
엘리사가 남편을 쳐다보다가 배를 쓰다듬었다.
남편은 그녀에게 약속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4공의 권력과 함께 그란디아의 왕좌를 아이에게 주겠노라고.
“이 아이가 그란디아의 왕이 될 거예요. 그동안 폐하께선 제 아이를 위해 죽을 수 없어요. 왕권을 강화하고 왕좌를 지키고 있어야 하니까.”
아이만은 절대 자신이나 남편 같은 천덕꾸러기로 자라게 하지 않으리라.
모든 것을 쥐여주고 천하를 호령하게 할 것이다.
엘리사와 진저가 서로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 * *
엘리사는 살면서 가장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다. 누구도 감히 그녀의 옷깃을 스칠 수 없을 정도로 고가의 드레스였다.
그녀의 목표는 게티 백작의 아들만이 아니었다. 클라우디아가 남편을 더 간절히 바라게 만드는 것. 그게 그녀의 두 번째 목표였다.
한참 거울을 보고 있던 엘리사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모든 진실이 드러난 뒤, 이번 일을 계획하고 준비하며 그저 복수심을 불태웠다. 그리고 그녀도 함께 재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건 자신이 선해서가 아니었다. 이때까지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이 바보 같아서, 숨죽이며 모욕당했던 때가 떠올라서.
이렇게까지 사람을 미워하게 만든 그들이 싫었다. 혐오스러워 참을 수 없었다.
진저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미안해서요.”
그가 그녀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신은 그만 죄스러워해도 돼.”
“…….”
“모후에게 미안하고, 내게 미안하고, 아이에게 미안해하면서 사는 건 너무 힘들잖아.”
“제가 부족했기 때문이에요.”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의 가장 나쁜 버릇이 바로 이것, 자책이었다.
그가 표정을 굳히고 그녀의 어깨를 돌렸다.
“엘리사.”
“…….”
“당신 성이 뭐야?”
“……네?”
“뭐냐고.”
“그란…… 그웬. 엘리사 그웬이에요.”
“그웬의 성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한없이 이기적이야. 나도, 루펠라도, 선대도 그랬지. 이제 당신도 그렇게 해.”
“…….”
“뺨을 맞았으면 치아를 몽땅 털어줘야지. 발을 밟혔으면 상대의 다리를 잘라버려.”
“…….”
“그게 귀족으로, 또 왕족으로 태어난 우리의 숙명이야. 일반인의 잣대를 우리에게 댈 순 없어.”
“…….”
“남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으니 남처럼 인간적으로 살려 해선 안 돼.”
엘리사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의 말은 위로가 되는 한편 그녀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증명하는 것 같아서.
“복수하고 싶어요.”
엘리사는 살며 처음으로 복수라는 말을 입 밖에 내었다. 무서울 줄 알았는데 속이 시원했다.
“우물에 갇히고, 창고에 갇혀서 저는 이제 어둠과 좁은 곳이 무서워요. 매일매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원망해야 했어요. 어머니, 왜 저를 데려가지 않으셨나요. 밤마다 어머니의 이름을 외치고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어요.”
엘리사가 진저의 가슴에 안겨 흐느꼈다.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왕족다운 대우는 받아본 적이 없어요. 왕족으로 태어나 괴로운 일이 더 많았어요. 모욕당하고, 희롱당해도 말 한마디 못했어요.”
“그래.”
“당신을 믿지도 못했어요. 내 앞에 나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어도 마음 놓고 안기지 못했다고요!”
그녀가 소리쳤다.
“이제 되돌려줄 거예요! 그들이 제게 한 짓, 어머니에게 한 짓! 모두 곱절로 돌려줄 거예요!”
아버지란 사람에게도 모든 것을 빼앗고 싶었다.
진저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래도 돼.”
“모두 저를 이용하고 살았으니 저도 모두를 이용할 거예요!”
악에 받쳐 눈물을 흘리는 그녀가 차라리 반가웠다. 속에 분을 감추고 쌓아두는 게 아니라 밖으로 표출하고 복수를 외치는 그녀가 차라리 사랑스러웠다.
진저가 아내의 뺨을 쓰다듬었다.
“당신이 바라는 모든 것을 이뤄줄 거야.”
부부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파티장엔 익숙한 얼굴 천지였다. 란델에서 엘리사를 곤욕스럽게 했던 비앙카 또한 언제 그란디아로 돌아왔는지 클라우디아의 파티에 참석했다.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모였다. 결혼 전이라면 상상하지도 못할 광경이었다. 파티의 주인공인 클라우디아보다 엘리사가 더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엘리사의 마음에 들기 위해 혈안이었다.
“드레스가 아름다워요. 란델 디자이너의 작품인가요?”
“일전에 보았을 때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각하의 환영 연회 때 멀리서 뵈었어요. 오랜만에 뵈었는데 곤욕을 치르고 계셔서 마음이 어찌나 안 좋았는지 몰라요.”
“아버님께서 인사 전하라 하셨어요. 그란디아에선 얼마나 머무실 건가요?”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엉켜 제대로 말을 들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클라우디아의 시선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아주 강렬한 시선이었다.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엘리사를 주시하고 있는 그녀의 곁에 필리아가 있었다.
“카인 공자까지……!”
필리아가 씩씩거리며 엘리사를 노려보았다.
“언니, 두고 볼 거야?”
“저것도 얼마 가지 않을 거다. 사람들이 얼마나 철새 같은지 잊었니?”
“어머니가 보시면 기가 막히실 거야. 그래, 어머니는 뭐라셔?”
필리아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란디아에서 처리하실 거라고 하시지?”
클라우디아는 말없이 잔을 사환에게 넘겼다. 어머니의 의중 같은 건 이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그렇다. 딸이 관심 있는 남자가 있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다른 혼처를 추천했다. 싫다는 그녀에게 이만큼 귀하게 크게 해줬으면 빚을 갚으라고 성화였다.
‘빚을 갚으라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분 나쁜 말이었다. 다른 부모들은 뭐 하나라도 더 해주려고 난리였다. 황금으로 만든 의자에 앉혀 주고도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미안해했다.
클라우디아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엘리사가 입고 있는 저 드레스는 왕궁의 재정으로는 쳐다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사준 드레스를 입고 으스대는 꼴이라니.’
지금이야 신혼인 데다 서로 닮은 구석이 많다고 느껴 애틋한 것뿐이었다.
눈에 콩깍지가 떨어지면 진저 그웬은 제 차지였다. 하루빨리 그를 가지고 싶었다. 그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그와 자신이 얼마나 어울리는 짝인지 알려주는 게 그녀의 가장 큰 바람이었다.
엘리사를 따라온 리한이 멀뚱히 있다 그녀를 놓치고 말았다. 엘리사는 인파에 휩쓸려 보이지 않았다.
마력을 조금 방출해 주변을 탐색하니 위험인물은 없었다. 그는 엘리사가 돌아올 때까지 배나 채우기로 했다.
접시에 음식을 담고 있던 그의 곁에 누군가 다가왔다.
“정말 아름다운 머릿결입니다.”
버터에 구른 것 같은 느끼한 목소리였다. 그는 사내임이 분명한 리한을 마치 여성처럼 구슬리려 했다.
흑발에 녹안을 가진 사내였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고집스럽게 생긴 데다 해괴하게 생긴 마도구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게티 공자로군.’
아니나 다를까 사내는 자신을 게티 가의 하우스라 말했다.
“어디서 온 누구십니까? 팔찌를 보니 마법에 관심이 있으신 듯한데…….”
“…….”
그와 말을 섞는 건 상상 이상으로 귀찮은 일이었다. 리한이 입을 꾹 다문 채 게티 공자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리한은 대륙 내에 소문이 자자한 마법사였다. 하지만 극도로 게으른 탓에 사람과의 대화조차 귀찮아했다. 그는 사람을 차단하기 위해 두꺼운 로브를 걸치고 다녔다.
그래서 리한의 외양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금발이라는 건 유명했다.
“대마법사 리한도 귀인처럼 아름다운 금발을 가지고 있다지요?”
“…….”
게티 공자는 그 대마법사 리한이 앞에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수작을 걸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함께 마법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루펠라가 이를 으득 갈았다.
‘저 바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게티 공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했는데 왜 말 한마디 섞지 않는가!
참다못한 루펠라가 그들에게 다가가려 걸음을 떼었다.
“아가씨.”
그레닉이 그녀를 붙잡았다.
엘리사는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그녀에게 그레닉을 붙여놓았다.
루펠라가 새초롬히 그를 노려보았다.
‘설마 사람 많은 곳에서 납치까지 할까 싶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그레닉은 훌륭한 기사예요. 꼭 옆에 붙여두세요.’
엘리사의 말만 아니었더라면 그레닉과 함께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그녀는 여전히 그레닉에게 유감이 있었다.
“저자가 차고 있는 마도구만 십 종이 넘습니다.”
“그런데?”
“위험하니 가까이하지 마시라 말씀드리는 겁니다.”
“내가 알아서 해.”
그레닉이 아예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저는 마님께 아가씨의 안전이 최우선이라 명받았습니다.”
“지금 저 바보가 계획을……!”
루펠라가 반박하려 할 때, 파티장에서 소란이 일었다. 엘리사 쪽이었다.
엘리사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비앙카를 지그시 응시했다. 부러 취한 체하는 게 빤히 보였다.
“좋으시겠습니다. 이래서 여자는 시집을 잘 가야 하나 봐요. 전엔 제 앞에서 말 한마디 못하던 분이셨는데.”
엘리사의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다.
이전에야 살기 위해 참았고, 란델에선 남편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참았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 참지 않기로 결심한 여자였다.
“란델에서도 공작부인이라고 얼마나…….”
짝!
비앙카의 얼굴이 돌아갔다.
놀란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엘리사가 손을 올려 병사를 불렀다.
“왕족을 모욕한 계집이다. 추포하라.”
변한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이 된 줄은 몰랐다. 당황한 비앙카가 클라우디아를 쳐다보았다.
클라우디아가 나설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란디아에 진저가 들어온 후로 그녀는 엘리사와 최대한 부딪치려 하지 않았다.
필리아는 비앙카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자신보다는 레이라 부인의 후계 같은 클라우디아를 따랐다. 그게 기분 나빴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클라우디아, 필리아 자매가 그녀를 외면했다. 병사들이 비앙카를 끌고 나가는 순간까지도 비앙카는 공주님을 외쳤다. 물론 그녀가 말하는 공주란 클라우디아를 뜻하는 것이었다.
클라우디아는 목적이 있어 침묵했고, 필리아는 생각 없이 침묵한 것이지만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은 술렁거렸다.
엘리사 공주의 위치가 이렇게 오른 것일까. 진저에게 줄 서기 위해 엘리사에게 살랑거렸던 자들은 이제 엘리사를 윗사람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엘리사의 마음가짐이 바뀐 것으로 이렇게 많은 것이 달라졌다.
엘리사는 자신에게 달라붙는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고 리한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게티 공자가 그에게 접근하는 것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공자.”
“아, 공…… 주님…….”
게티 공자도 엘리사를 무시하던 이들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비앙카의 일을 보고 눈빛이 달라졌다.
“무슨 일이신지요?”
“예?”
“이분은 제 손님이십니다. 남편의 절친한 지기세요.”
“아! 각하의…….”
아름다운 외모에 특이한 마도구, 게다가 진저 그웬의 절친한 지기라니. 볼수록 탐이 나는 사내였다.
“그런데 이분은 제가 마음 안 드시나 봅니다.”
게티 공자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이름 한 자 안 알려주세요.”
“아…….”
엘리사가 리한을 쳐다보았다. 대화 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리한이 왜 그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리한은 사람들과 대화를 많이 해본 타입이 아니었다. 어떻게 친해져야 하긴 하는데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만 다물고 있던 것 같았다.
“그…… 이분이…… 대륙어를 모르셔서!”
“예?”
한순간에 남편의 지기를 외국인으로 만든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해석은 가능한데 말은 잘 못하…… 세요. 그렇죠?”
멀뚱멀뚱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리한이 눈을 깜빡였다.
한 발 떨어져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루펠라와 그레닉도, 그리고 엘리사마저 간절한 표정으로 리한을 쳐다보았다.
여기서 대륙어를 하면 계획 시작도 전에 일이 잘못된다.
리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브까브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루펠라가 멍청한 표정으로 그레닉에게 물었다.
“저게 어느 나라 말이야?”
“저도…… 모르겠습니다.”
엘리사가 얼른 그의 말, 아니, 의성어를 수습했다.
“아주 먼 나라에서 마법을 배우신 분이에요!”
“아아, 어느 나라의 말입니까?”
“그게…… 저…… 보…… 바보.”
“예?”
“‘보바보바’라는 부족의 언어예요!”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게티 공자가 ‘그렇군요’ 하며 보바보바라는 부족명을 곱씹었다. 다행이었다.
“들어본 적 없는 나라입니다. 역시 배움은 끝이 없군요.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서 이 정도로 훌륭한 마도구를 만들다니. 이것도 보바보바의 마도구가 맞죠?”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 공용어는 어느 정도 하십니까? 제 말은 이해하신 걸까요?”
게티 공자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조…… 금…….”
리한이 말했다. 게티 공자는 감격한 듯 오오, 하고 소리쳤다. 워낙에 말이 느려서 어눌한 것으로 생각한 듯싶었다.
“팔에 차신 건 뭡니까? 저는 결계석을…….”
엘리사가 남몰래 한숨을 뱉었다. 다행히 잘 수습된 모양이었다.
그녀는 두 사내가 대화하기 편하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파티는 밤늦도록 끝이 나지 않았고, 그날 파티의 주인공은 엘리사였다.
이튿날 리한이 게티저의 초대장을 가져왔다. 눈이 거뭇한 게 내내 게티 공자에게 시달린 것 같았다.
“정말 고마워요, 리한.”
“이제…… 이것보다…… 귀찮은 일은…… 없겠죠?”
“그럼요! 게티저에 라골과 함께 가주면 돼요. 리한의 통역사라고 설명할게요.”
리한은 마음대로 하라며 고개를 떨궜다. 게티 공자는 아주 피곤한 놈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시끄러운 입에 메테오를 처넣고 싶었다.
사흘 뒤 리한과 라골이 게티저로 향했다. 그리고 게티 백작은 생각보다 쉽게 엘리사와 뜻을 함께하겠노라 말했다. 미리 거스터 후작으로부터 언질을 받은 것 같았다.
엘리사와 진저는 마지막 단계를 준비했다.
“이제 클라우디아에게 벤달 자작 이야기를 꺼낼 때예요.”
“우리 쪽에서 꺼내면 분명 의심을 할 거야.”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그 하녀.”
“맞아요.”
하녀를 통해 헬렌이 사람을 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듯 이번엔 반대로 하녀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엘리사가 호출 줄을 당겼다.
호출을 받고 온 시녀는 헬렌이었다. 부부는 헬렌에게 벤달 자작의 신상명세를 알려주고 이 소문을 재스민의 귀에 들어가게 하라 일렀다.
* * *
레이라 부인이 여자에게 차를 권했다. 여자는 마치 마른 나무 같았다. 껍질이 죄 말라 비틀어져 땔감으로 쓰일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초췌한 모습이었다.
“차 들어요.”
“어찌 말을 높이십니까?”
여자는 레이라 부인을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레이라 부인이 찻잎이 담긴 병을 들었다.
“아주 귀한 차예요. 그란디아에서는 나나 폐하만이 음미할 수 있죠. 내가 왜 이런 귀한 차를 그대에게 대접하는지 아나요?”
“이용할 일이 있으니 은혜를 베푸시는 게지요.”
레이라 부인은 무례한 대답에 타박은커녕 실소를 흘렸다.
“정답이에요. 하지만 이유가 그것뿐만은 아니랍니다.”
“…….”
“어린것들은 나이 든 이를 촌스럽다고 하죠. 저희가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나이 든 이들을 꽉 막혔다고 해요. 나도 어릴 때는 그랬어요.”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씀이십니까?”
“나이가 들어보니 알겠더군요. 삶의 경험치를. 그래서 난 부인을 존경해요.”
“…….”
“귀족들에게 맞서 제 핏줄도 아닌 아이를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지켜왔잖아요. 평범한 사람에겐 불가능한 일이죠.”
여자, 그러니까 마피 부인이 눈썹을 추어올렸다. 무슨 까닭으로 자신을 불렀는지 대충 감이 왔다.
거래 제안이 틀림없었다. 마피 부인이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마치 주판알을 고르듯이.
“서론은 그쯤 하시죠.”
“과연, 대단히 총명하시군요.”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나는 말이에요. 세상의 부조리를 온몸으로 겪어온 사람이에요. 귀족이 아니어서, 또 돈이 없어서, 부모가 천해서 얼마나 큰 곤욕을 치르며 자랐는지 몰라요. 그건 부인도 마찬가지겠죠?”
“…….”
“우리는 많이 닮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다르죠. 나는 왕보다 더한 권력자이나 부인은…….”
레이라 부인의 시선이 마피 부인의 온몸을 훑었다. 낡은 옷, 윤기 없는 머리, 얼굴에 가득한 주름살, 늘어진 피부. 모든 것이 관리 한 번 못 받은 여자임을 증명했다.
“온 정성 다해 키운 아이들에게도 외면받고 있어요.”
“희롱하실 셈이라면 이쯤 해주십시오.”
레이라 부인이 소리 높여 웃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어디서 입을 닫으라 마라야. 건방지게.”
“…….”
“평민으로 났어도 신분은 백작 부인이고, 폐하의 여자이며 이 내궁을 총괄하고 있다. 그대는 어떻지? 내 보기엔 대우받고 사는 건 아닌데. 어쩌면 내저 열쇠까지 그 바보에게 빼앗겼을 수도 있겠지.”
“…….”
“평생 그리 살 텐가? 총명한 여자가 왜 그리 멍청하게 굴어. 네가 키운 아이들이 공작가의 가주와 영애인데.”
마피 부인이 미간을 좁혔다.
“난 그런 것을 바라고 아이들을 키운 게……!”
“자식은 말이야. 키울 때는 세상을 ‘견디게 할’ 힘을 주고, 다 키워서는 세상에 ‘먹히지 않을’ 힘을 줘. 돈과 권력으로 말이야. 네 자식들은 어떻지? 기저귀 한 번 갈아준 적 없는 젊은 계집 치마폭에 쌓여 어미를 얼마나 매몰차게 대하고 있나?”
“…….”
“젊을 때는 사랑 없이는 못 살 것 같지. 아직 결혼한 지 일 년도 채 안 됐으면서 평생 서로 없이 못 살 것처럼 굴어.”
레이라 부인이 목을 쭉 빼고 마피 부인과 시선을 맞췄다.
“하지만 우리는 봤잖아. 그 사랑이라는 게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
“난 죽을 때까지 엘리사 공주와 겨룰 테고, 네 아이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온몸을 불태울 거야. 생각해 봐. 엘리사 공주가 아니어도 여자는 차고 넘쳐. 왜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살아야 하지? 어릴 때도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레이라 부인의 목소리에 마피 부인은 홀린 듯 두 손을 움켜쥐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하나만은 확실히 약속할 수 있지.”
“무엇을요.”
“그 지긋지긋한 신분을 뛰어넘게 해주지.”
레이라 부인이 손을 내밀었다. 마피 부인이 선뜻 손을 잡지 못하고 주저하자 그녀는 마지막 무기를 내놓았다.
“엘리사 공주에겐 큰 흠이 있어. 그건…….”
“마력.”
레이라 부인이 뜻밖이라는 듯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피 부인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두 여자가 서로를 신뢰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 * *
루펠라는 엘리사의 방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 입술을 삐죽거렸다. 때마침 밖으로 나오던 엘리사가 그녀를 불렀다.
“루펠라, 무슨 일이에요?”
“아, 유모가 며칠째 안 보여서…….”
“네?”
“음식이 입에 안 맞는다고 했더니 왕궁에서 주방이라도 빌렸나 봐요.”
그란디아의 간은 란델에 비해 무척 심심한 편이었다. 엘리사가 처음 란델에서 간으로 고생한 만큼 루펠라도 그란디아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역이었다.
“마피 부인이요?”
“몸도 안 좋은데 왜 사서 고생을…….”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애정이 배어있었다. 엘리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피 부인에게서 주방을 빌려달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내궁에서 주방을 빌리려면 당연히 자신이나 레이라 부인의 허가가 있어야 했다.
“저는 주방을 빌려달라는 말은 못 들었어요.”
루펠라의 시중을 들고 있는 하녀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엘리사는 그란디아의 시녀를 믿을 수 없어서 루펠라에게 그웬저에서 데려온 아이를 붙여놓았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그웬 저에 있던 하녀라 루펠라의 생활습관이나 취향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도 있었다. 엘리사보다 마피 부인을 오래 보아왔던 사람이라 그녀의 말을 쉽게 거절하지 못했다.
“저…… 그게…….”
엘리사와 루펠라가 하녀를 쳐다보았다.
“내궁에서 요리를 하시는 게 아니라 조리된 요리를 옮길 때 간을 맞추는 겁니다.”
하녀의 말은 사실과 달랐다. 마피 부인은 직접 주방에 들어가 하나부터 열까지 조리 과정을 지켜보았다. 무슨 조화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하녀는 그 일을 클라우디아와 관계가 있다고 짐작할 뿐이었다. 엘리사와 진저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에 가능한 어림짐작이었다.
‘마님이 아시면 속상하실 테니까…….’
엘리사가 하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의 눈을 피했다. 충분히 수상한 행동이었다.
“사실이더냐?”
“예?!”
“네가 한 말에 조금도 거짓이 없느냐 묻는 것이다.”
“그, 그럼요!”
하녀가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폐, 폐하의 부름에 늦겠습니다. 어서 가보셔야지요.”
하녀의 말에 루펠라가 인상을 썼다.
“폐하를 뵈러 가는 거예요? 또 무슨 말로 언니의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루펠라.”
엘리사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말을 듣지 않아도 언행을 조심하라는 타이름임을 알 수 있었다.
엘리사에게 몇 차례 실수를 한 후로 루펠라는 기가 죽어 있었다. 그녀가 ‘죄송해요’ 하고 중얼거렸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엘리사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엘리사는 다시 한번 하녀를 쳐다보았다. 지금은 부왕과의 독대가 있어 어쩔 수 없지만 나중에라도 하녀를 캐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엘리사가 본궁으로 향하고 루펠라도 진저에게 이 일을 알리기 위해 그를 찾으러 떠났다.
하녀가 조심스럽게 엘리사의 방문을 열었다. 엘리사는 평소에도 방 정리를 란델의 하녀에게 지시했다. 혹시 그란디아의 시녀를 통해 정보가 새어 나갈까 우려했던 것이다.
하녀가 그녀의 방을 찾는 건 이상할 게 없었는데도 유난히 경직된 움직임을 보였다.
「마님이 무슨 일을 계획하시는지 알아와.」
「마님에게 비밀이 있다는 말씀이세요? 언제 우리가 윗분들 일을 다 알았다고요. 귀족들은 비밀 몇 가지쯤은 당연히…….」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마님께서 아시면 전 죽은 목숨이에요.」
「무슨 일이 있으면 내 핑계를 대. 주인님과 아가씨가 나를 죽게 내버려 두시겠니.」
「마님을 배신하는 거잖아요!」
「귀족과 염문설이 있던 널 그웬저에 받아준 사람이 누군지 기억해라.」
입은 은혜가 있어 마피 부인의 명을 거절하지도 못했다.
방에 들어온 하녀가 서랍을 뒤졌다. 어제 차 시중을 들 때 분명히 수많은 양피지를 본 것 같았는데 그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녀는 식은땀까지 흘리며 방을 뒤졌다. 아무리 뒤져도 비밀과 관련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흐르는 땀을 닦기 위해 고개를 올리던 그녀가 책장 위에서 삐져나온 양피지를 발견했다.
그녀가 얼른 의자를 가져왔다. 의자 위에 올라가 손을 뻗으려는데 등에서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넌…… 뭐야…….”
눈 깜짝할 사이에 푸른 실 같은 것에 몸이 묶였다. 당황한 하녀가 허둥대다 의자에서 떨어졌다.
검은 로브를 입은 자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로브 사이로 언뜻 금발의 결 좋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리, 리한 님!”
리한은 엘리사의 부탁으로 마력 결계의 순도를 계산하던 중이었다. 그의 뒤로 다른 사내가 다가왔다.
“누구의 명으로 방을 뒤지고 있는 게냐.”
진저였다. 낯빛이 새하얗게 질린 하녀가 어깨를 덜덜 떨었다.
진저와 리한은 테라스 쪽에 숨어 하녀의 행동을 쭉 주시하고 있었다. 방을 청소하러 온 것인지, 아니면 엘리사의 명으로 무엇을 찾으러 온 건지, 그도 아니면 첩자인지.
“첩자 노릇을 했으니 사지가 절단 되도 할 말이 없겠지.”
“주, 주인님 저는 그, 그게……!”
진저가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주…… 큭!”
“대답해. 누구의 명으로 공작부인의 방을 뒤지고 있는지!”
“끄극, 주인, 끅!”
진저가 손의 힘을 풀자 하녀가 컥컥거리며 숨을 골랐다.
“마피 부인의 명으로…….”
진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그 시각, 재스민은 클라우디아의 머리를 빗고 있었다. 그웬 공작이 그란디아를 찾은 후 늘 어두웠던 그녀가 오늘따라 표정이 환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공주님.”
클라우디아가 손을 펼쳤다.
“단추인가요?”
“그래.”
그냥 단추는 아닌 것 같았다. 독수리의 날개에 하나하나 세공이 들어가 있었다. 몹시 호화로운 옷의 단추가 분명했다.
‘독수리? 독수리라면…….’
“그웬가의 문양이로군요!”
클라우디아는 진저에게 증표를 달라 청했다. 자신에게 마음을 내어줄 가능성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진저는 귀찮다는 듯 재킷에서 단추를 뜯어내 그녀에게 쥐여 주었다. 반지도 아니고, 값비싼 보석도 아니었지만 클라우디아를 기쁘게 하기엔 충분했다.
클라우디아가 단추를 매만지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고작 단추 하나로 그녀의 마음을 이토록 충만하게 하는 남자는 그가 유일했다.
단추가 반짝일 때마다 그와 자신의 미래가 그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재스민이 빗질을 멈추고 눈을 깜빡였다.
“결혼이 결정되어 기쁘신 게 아니라요?”
클라우디아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뜻이냐는 듯 눈을 치며 떴다.
“소문이 돌던데요. 공주님이 벤달 자작과 연을 맺으실 거라고…….”
“뭐?”
“레이라 부인께서 결정하셨대요.”
클라우디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잔뜩 화가 난 클라우디아가 방을 나섰다. 그녀는 노크도 없이 레이라 부인의 방문을 열었다. 마침 그녀는 벤달 자작의 신상이 조사된 자료를 읽고 있었다. 레이라 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딸을 바라보았다.
“예의 없이 무슨 짓이니?”
“드릴 말씀이…… 그건 뭐예요?”
레이라 부인이 말없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눈을 가늘게 뜬 클라우디아가 모친의 허락 없이 서류를 집어 들었다.
“클라우디아!”
“저를 팔아넘기시려고요?”
“…….”
“제가 그웬 공작을 마음에 두었다는 걸 알면서……!”
“네가 그웬 공작의 무엇을 알기에 마음에 두었다는 거냐?”
“그건……!”
“이자도 창고에 재물 넉넉히 쌓아둔 자고, 권력이야 재물을 손에 넣으면 자연히 따라오는 거야. 뭐가 문제라는 거니? 외모? 늙어 멀쩡한 남자 못 보았다.”
클라우디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결국 저를 팔겠다는 거군요.’
어머니의 잔인함은 말 못하던 어릴 때부터 보아온 것이었다. 백작 부인이 되기 전에도 그랬다. 레이라 부인은 전남편인 백작보다 백작 부인과 사이가 좋았다. 그녀에게 한껏 야살을 떨어 그녀의 남편에게 접근한 것이다.
제발 남편을 빼앗지 말아 달라 애원하는 백작 부인을 사고사로 위장하여 죽인 것도 어머니였다.
타인에게 그토록 잔인한 사람이 딸이라고 이득 없는 사랑을 주겠는가.
‘그래도 설마 했지. 설마 내게 이렇게까지 모질 줄은 몰랐어.’
클라우디아가 레이라 부인을 노려보았다.
“루디, 너도 세상을 알게 되면…….”
“세상 같은 건 이미 충분히 알아요. 어머니가 보여준 세상은 늘 끔찍했어요.”
“내 덕에 배불리 먹고, 값비싼 드레스며 장신구를 두르고 살았다는 걸 잊지 마라.”
“어머니 덕분에 그것들이 다 가짜라는 것도 알았죠.”
“루디!”
“어머니가 소름 끼쳐요. 싫어! 정말 끔찍해!”
엘리사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멍청한 주제에 자존심만 높은 게 남편을 잘 만나 근심 없이 살았다.
그 남편은 얼마나 근사하던가. 그는 거스러미 하나도 나지 않도록 아내를 지켜주었다.
클라우디아도 그런 남편을 가지고 싶었다. 그의 보호를 받으며 평생 사랑 속에서 살려 했다.
“이제 어머니에게 이용당하지 않아요.”
레이라 부인이 클라우디아의 뺨을 내려쳤다.
짝, 소리와 함께 클라우디아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제야 어머니가 어째서 딸들에게 관대하였는지 깨달았다. 딸이어서, 제 핏줄이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어머니의 소유물이니까.’
클라우디아가 그대로 몸을 돌려 레이라 부인의 방을 나섰다. 그녀는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진저를 찾았다.
진저에게 간 그녀는 그의 팔을 붙들었다.
“제게 기회를 준다고 하셨죠.”
진저가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제가 공의 마음에 들면, 제게도 기회를 준다고 하셨어요.”
“내 마음에 들면 말이지.”
“그란디아의 왕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제게 공의 옆자리를 주세요!”
그녀가 진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더 이상 어머니를 믿을 수 없었다. 그녀를 지킬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었다.
진저가 한쪽 입꼬리를 늘렸다.
‘넘어왔군.’
벤달 자작의 이야기가 그녀의 귀에 들어간 게 틀림없었다.
이제 남은 건 한 가지.
아내의 목줄이자 자식의 목숨을 지킬 수 있는 물건, 리즈 왕비의 일기장을 되찾는 것뿐이었다.
* * *
엘리사와 왕은 한참 말이 없었다. 부른 사람도, 불려간 사람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20년이 넘도록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딸도 부친도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차가 다 식도록 말이 없던 왕이 헛기침을 했다.
“그때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엘리사가 그를 쳐다보았다.
“짐이 침실에서 네게 했던 말이 상처가 되었다면 미안하구나.”
그녀는 당혹스러웠다. 그가 사과를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심이셨잖아요.”
엘리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왕의 목소리도 작아졌다.
“짐에게 최우선인 사람이 왕비라는 건 부정하지 않으마.”
“예…….”
“하지만 너도 내겐 목숨보다 중요한 사람이야.”
“……어머니의 딸이라서요?”
엘리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어라 말하려 했던 그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도 위로가 될 순 없었다. 리즈 왕비를 지키기 위해 딸을 방치했음은 사실이었으니까.
“폐하.”
“……그래.”
“제가 그란디아를 떠날 때 폐하께서 약조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왕은 결혼 전날 밤 그녀에게 약속했다.
「결혼을 바라지 않느냐?」
그때 그녀는 그란디아를 떠날 수 있다면 노예가 되어 팔려가도 괜찮았다.
「불민한 자가 기쁨을 내색지 못해 성심을 어지럽혔습니다. 벌해주십시오.」
표정은 마치 죽은 사람 같았는데 말만은 번드르르했다. 그래서 딸의 세월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알 수 있었다.
왕은 그런 딸에게 말했다.
「바라는 것이 있느냐?」
「후에 바라는 것이 생기거든 말씀드리겠습니다.」
「짐의 이름을 걸고 네 바람이 무엇이든 들어줄 것이다.」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딸의 영혼 없는 표정과 고저 없는 목소리를 듣고 가슴이 미어졌다. 아이를 두고 차마 눈을 감을 수 없다 울던 아내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말씀해 주십시오. 폐하의 이름, 왕의 명예 목숨을 걸고 지켜주시겠습니까?”
“……그래.”
엘리사가 마른침을 삼켰다.
“바라는 것이 있거든 괘념치 말고 말하라. 태양을 거꾸러뜨리는 일일지라도 바람을 들어줄 것이다.”
“제게…….”
엘리사가 왕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제게 어머니의 시체를 주십시오.”
그때 정오를 알리는 북소리가 들렸다. 쿵, 하는 웅장한 소리가 마치 왕의 심장이 내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엘리사 리즈 그란디아.”
“말씀하십시오, 폐하.”
“네가 원한다면 이 심장인들 못 내어주겠느냐. 하지만…….”
왕의 눈이 차가워졌다.
“그 사람은 안 돼.”
“어머니의 물건을 모두 제게 상속하시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제 바람이라면 태양 또한 떨어뜨리겠다 선언하셨고요. 한데 왜 아니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가 페하께 바라는 건 오직 어머니의 시체뿐입니다.”
“시체라 부르지 말라!”
왕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엘리사는 그에게 지지 않고 말을 이었다.
“왜요?”
“잠들어 있을 뿐이다…….”
목소리로 알 수 있었다. 부왕 또한 모친이 다시 인세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아집이고 독선이었다. 엘리사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은 약할 때 신을 찾는다. 바라는 게 있는데 도저히 개인의 힘으로 안 될 때. 가족의 건강 등을 비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부왕도 그랬다. 약해졌기에 어머니의 태생을 신성화한 것이다. 레스칼포네족이니까, 두 개의 목숨을 가지고 있다는 설도 있으니까, 그 사람이 돌아올 수도 있다고 했으니까.
“결혼을 하니 알겠어요.”
“…….”
“어머니는 지금 후회하고 계실 거예요. 제가 어머니라면 피눈물을 흘렸을 테니 확신할 수 있어요.”
“…….”
“폐하, 제발 핑계 대지 마세요.”
“뭐?”
“아내를 깊이 사랑한다고 딸을 방치하는 사람은 없어요. 저는 폐하께 방치당한 게 아니에요. 학대를 당한 거죠.”
엘리사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제 의견을 피력함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제가 미우셨겠죠. 이해는 해요. 저도 아이로 인해 남편을 잃는다면 약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
“하지만 폐하, 저는 약해질지언정 저 자신을 놓지는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녀가 남편을 떠올렸다. 너무나 사랑해서 그를 위해 목숨조차 내놓을 수 있었다. 그건 모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러했기에 부왕이 그 긴 세월을 모친만 떠올리며 살지 않았겠는가.
“남편을 사랑했던 저는 누군가를 방치하고, 학대하는 사람이 아닐 테니까요.”
“…….”
“폐하, 어머니께서 사랑했던 남자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
“그 남자가 지금의 폐하라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나요?”
한참 뜸을 들이던 그가 조소를 흘렸다.
“아니.”
그랬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자신처럼 못난 사람이 아니었다. 함께 가자, 너와 함께라면 지옥도 견딜 수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한다. 그리 자신 있게 말하던 남자였다.
엘리사가 말했다.
“그렇다면 어머니께서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분명하군요.”
“이유…….”
“어머니가 사랑한 남자는 더 이상 이곳에 없잖아요.”
말문이 막혔다. 그가 약지에 있는 반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랬나. 그래서 당신이 내게 돌아오지 않은 건가.’
엘리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리즈 왕비는 단 한 번도 그와의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다. 왕의 메마른 볼이 눈물로 젖어 들었다. 실핏줄이 자글자글 터져 붉어진 눈으로 인해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제게 어머니의 시체를 주세요. 혼만이라도 사랑하는 남자의 곁에 돌아올 수 있게.”
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 * *
깊은 밤, 엘리사는 리즈 왕비의 물건이 있는 비밀의 방을 찾았다. 방은 언제나처럼 먼지 한 톨 굴러다니지 않았다.
낡은 의자에 앉아 물건을 쭉 둘러보던 엘리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의 손에 기름병과 성냥이 들려 있었다.
불을 내어 모친이 남긴 것을 모두 재로 만들 셈이었다. 하지만 쉬이 움직일 수 없었다.
「엘리사, 내 보물!」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아른아른했다.
엘리사는 눈물을 흘리며 책장을 매만졌다.
어릴 적의 엘리사가 강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슬픔에 겨워 어머니의 물건을 보려 하지 않은 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레이라 부인이 궁에 들어온 뒤로는 자신만 세상에 남겨놓은 모친이 원망스러워 일부러 어머니의 물건을 찾지 않았다.
그녀가 조금 더 강해서 어머니의 추억을 떠올리며 웃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일기장은 레이라 부인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책장에 엘리사의 눈물이 떨어졌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던 그녀가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을 발견했다.
눈물이 떨어진 자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이게 뭐지?’
엘리사가 그곳을 문질렀다. 물기가 모두 없어지자 빛도 함께 사라졌다.
“눈물이 왜…….”
엘리사는 뺨에 남은 눈물을 손끝으로 덜어내 다시 그 자리에 묻혔다. 눈물이 닿자 또다시 반짝였다.
“혹시…….”
그녀가 가지고 있던 옷핀으로 손가락을 찔렀다. 피가 떨어지자 순식간에 방이 환해졌다.
그리고 어떤 방향을 향해 반짝이는 점선이 그려져 있었다.
엘리사가 점선이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액자였다. 엘리사가 해바라기밭과 우물이 그려져 있는 액자에 손을 뻗었다.
“앗!”
순식간에 액자가 작은 문으로 바뀌었다. 문을 여니 그 안에 두 권의 책이 있었다. 모친의 필체는 아니었다. 언어조차 대륙 공용어가 아니었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엘리사는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그 언어를 읽을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한 번도 보지 못한 언어가 머릿속에 들어오는지, 또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인지를. 엘리사가 떨리는 손으로 붉은 커버의 책을 들었다.
‘마지막 아이에게.’
모서리에 조그맣게 대륙 공용어로 글씨가 적혀 있었다. 분명 어머니의 필체가 아니었다.
“마지막…… 아이?”
책을 펼친 엘리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 * *
레이라 부인이 진저의 몫으로 내어준 손님방에서 큰소리가 오갔다.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막돼먹은 사람인 줄은 몰랐어.”
“…….”
“무슨 까닭으로 하녀에게 서류를 빼 오라고 명한 거지?”
“…….”
“유모!”
문 밖에 서 있던 라골이 고개를 숙였다. 그에겐 이모인 마피 부인은 언제나 존경스러운 사람이었다.
귀족들에게 맞서 지기를, 또 여동생 같은 아이를 지켜준 것도 그랬고, 똑 부러지는 일 처리는 같은 일을 하는 라골의 귀감이었다.
진저와 루펠라가 마피 부인에게 실망하고서도 라골은 그녀를 믿었다. 이유가 있었겠지, 까닭이 있어 그리한 것이겠지. 하지만 믿음은 한순간에 부서졌다.
진저를 쳐다보는 마피 부인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더 이상 아이의 분노는 그녀에게 상처가 될 수 없다는 듯, 그녀는 묵묵히 그의 말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말해.”
“…….”
“지금 말하면 고문은 없을 거야.”
“…….”
그녀는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게 또 부모의 주검을 묻게 할 생각인가?”
“……저를 부모로 생각하십니까?”
“지금은 그리 생각했던 어린 내가 부끄러워.”
마피 부인은 방 한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는 하녀를 쳐다보았다.
“저는 아닙니다.”
“하녀가 토설했다.”
“거짓이겠지요.”
하녀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마피 부인! 부인이 제게…….”
“증거 있습니까?”
진저와 하녀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증거도 없이 저를 몰아붙이시는 겁니까? 그런데도 저를 부모로 생각하셨다고요?”
하녀는 억울함에 눈물까지 보였다. 그녀는 납작 엎드려 고개를 저었다.
“제가 무슨 이유로 마님의 방을 뒤지겠습니까! 주인님, 저는 정말 마피 부인의 명을 받아서……!”
진저도 하녀의 말을 믿었다. 마피 부인의 텅 빈 눈동자에서 이미 확신을 얻었다. 하지만 증거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진저가 실소를 흘렸다.
“나만 한 사람이 증거도 없이 그대를 몰아붙였군.”
“아시니 다행입니다.”
진저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라골!”
라골이 그의 부름을 받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고신해라.”
라골의 시선이 피붙이에게 닿았다. 결국 일을 이 지경으로 키웠다. 진저의 잔인함은 제 손으로 그를 키운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하녀의 고신은 다른 고용인의 몫이란 것도 잘 알고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조카의 손에 고신당하게 될 것을 빤히 알면서도 그를 몰아붙였다. 그리하여 조카가 직접 이모를 고문하게 만들었다. 라골은 그녀가 몹시 원망스러웠다.
라골이 그녀의 양손을 결박했다.
마피 부인이 조카의 손에 의해 끌려나가기 직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라 부인의 전언입니다.”
진저와 라골이 잠깐 시선을 교환했다.
레이라 부인이 찾은 사람은 진저가 아닌 마피 부인이었다. 진저가 눈을 사납게 치켜뜨고 그녀의 말을 전한 시종을 노려보았다.
“부인께서 란델의 문화에 관심이 깊으십니다. 또래의 여성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전하셨습니다.”
진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레이라 부인과 소란을 만들어선 안 된다. 계획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유모를 제 수중에 넣었다고 선언하는 게로군.’
마피 부인이 레이라 부인에게 아내의 임신 사실을 털어놓으면 모든 게 끝이었다. 아이를 가지고 하는 협박엔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무엇보다 엘리사가 가장 불안해할 게 분명했다. 아내는 이 계획의 중심이었다. 아내가 무너지면 모든 게 어그러진다.
마피 부인의 마음은 완전히 레이라 부인에게로 넘어갔다. 설득은 먹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금 당장 그녀의 목을 베는 것이었다.
진저의 시선이 침대맡에 놓아둔 검집에 닿았다.
「잠들 때까지 곁에 있을게요.」
「도련님이 제게 와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헛소리는 귀에 담지 마셔요. 도련님이 계셔서 제가 얼마나 기쁜지 아세요?」
「내 아가, 참고 견디다 보면 양지에서 걸을 날이 온단다. 내가 꼭 그리 만들어줄 거야.」
부모보다 더 부모 같은 사람이었다. 왜 하필 지금 그녀가 했던 말들이 떠오른단 말인가. 진저가 이를 악물었다.
“복장을 단정히 하고 부인의 방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마피 부인의 말에 시종이 마뜩잖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그웬 공작이 있는 자리에서 큰소리를 낼 순 없었다.
“레이라 부인께 전하겠습니다.”
시종이 방을 나섰다.
“지금 죽이시면 됩니다.”
“내가 못 할 것 같은가?”
“하실 수 있겠죠. 제가 그리 키웠으니까요.”
“유모!”
“쉬이 입을 열진 않을 겁니다. 저도 레이라 부인처럼 카드 하나는 남겨두어야지요. 그럼, 저를 죽일 마음이 드시거든 다시 찾으십시오.”
마피 부인이 문고리를 돌렸다. 때마침 엘리사도 남편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그의 방을 찾았다.
마피 부인과 엘리사의 시선이 얽혔다.
마피 부인은 엘리사에게 짧게 눈인사를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엘리사의 표정이 묘했다.
“엘리사?”
“무슨 일인가요?”
“일을 급히 진행해야겠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라골은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방문을 굳게 닫고 문 앞을 지켰다.
“당장 내일이라도 군사를 동원해서…….”
“혹시 마피 부인이…….”
진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가 품에 안고 있던 책을 그에게 건넸다. 책을 살핀 진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레이라 부인은 일기를 해석하지 못했어요.”
“그걸 어떻게 알아?”
엘리사가 책의 맨 뒷장을 펼쳤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언어로 된 문장이 보였다.
“이건…….”
부부가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라 부인이 마피 부인을 데려오라 재촉한 것일까. 진저가 밖을 향해 사납게 소리쳤다.
“날이 밝으면 다시 찾아오……!”
“파울로입니다.”
진저가 라골에게 눈짓하자 그가 문을 열어주었다.
파울로는 엘리사가 가지고 있는 붉은 책과 푸른 책을 보고 크게 놀랐다.
“리즈 왕비 생전에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십수 년 동안 흔적도 찾을 수 없었는데…….”
엘리사는 책을 찾은 경위에 대해 알려주었다. 파울로는 리즈 왕비의 혜안에 깊이 감동하여 말을 잃었다.
“이건 레스칼포네족에게 내려오는 책이에요. 어머니가 저를 위해 보관하고 계셨어요. 이 글자는 저만 읽을 수 있도록 마법을 걸어놓은 거예요.”
“뭐라고 적혀 있지?”
엘리사가 검지로 문장을 천천히 훑었다.
“엘리사, 너를 사랑한다.”
“왕비께서 적은 모양이군.”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아이야. 너 아닌 다른 자가 내 기억을 훔쳐볼 때, 우리는 재앙을 내릴 것이다.”
진저가 눈을 크게 뜨고 아내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마법을 건 사람이 왕비님 하나가 아니란 말이야?”
“레스칼포네족에게 대대로 전해 오는 고대 마법인가 봐요.”
“그 고대 마법이 뭐지?”
엘리사가 붉은 책과 함께 가져온 푸른 책을 펼쳤다.
“여기 적혀 있어요. 레스칼포네족은 유일하게 ‘기하스엘’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다고.”
“기하스엘이라면…….”
“기하스엘의 개체가 늘어난 건 우연이 아니었어요. 누군가 어머니의 일기장을 훔쳤기에 레스칼포네족이 기하스엘에게 걸어놓은 마법이 풀린 거예요.”
“잠깐, 이해가 안 돼. 훔쳐봤다는 건 일기장을 모두 해석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그때, 파울로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하스엘의 분노는 카르멘 화산의 폭발일 겁니다.”
“카르멘 화산의 폭발?”
“불덩이가 인세를 삼켜 버렸다는 이야기는 들으신 적 있을 겁니다.”
대륙의 사람이라면 모르는 자가 드문 일이었다.
“사실 카르멘 화산이 폭발한 게 아니었습니다. 국가 연맹이 레스칼포네족을 도륙한 후 기하스엘이 난폭해져 불덩이를 내뿜으며 사람들을 죽인 겁니다. 그때, 신관 하나가 엄청난 마력으로 고대 마법을 시전하여 겨우 기하스엘을 진정시켰다 들었습니다.”
진저가 토벌한 기하스엘도 불덩이를 쏠 수 있었다.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마법이 풀렸다면 그웬군만으로 처리할 수 없었어요. 그렇다는 건…….”
“해석을 못 했다는 거지.”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석하지 못했다면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어요. 우리가 두려웠던 건 마지막 순간 일기장을 불태워 버릴 수도 있다는 거였잖아요. 해석하지 못했다면 레이라 부인은 절대 일기장을 태울 수 없을 거예요.”
“라골, 마크빌과 하우벡을 불러라. 내일 당장 레이라 부인의 에튼궁을 포위한다.”
방에 있던 이들이 모두 눈을 빛냈다.
* * *
레이라 부인은 드물게 기분이 좋았다. 공작과 큰소리까지 오갔으니 마피 부인이 찾을 품은 저밖에 없었다.
마피, 그녀는 써먹을 곳이 많았다. 제 손으로 처리하게 되겠지만 그 전까지는 귀히 대접해 줄 작정이었다.
레이라 부인이 마피 부인을 향해 절그럭거리는 주머니를 건넸다.
“이게 뭡니까?”
“마음.”
“제가 보기엔 뇌물인 듯싶은데요.”
레이라 부인이 조소를 흘렸다.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내가 당신의 가치를 안다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것 아니겠나.”
레이라 부인이 몸을 일으켜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이게 뭔가요?”
“나와 그대를 지켜주고, 세상에 있는 모든 금은보화를 쥐어줄 카드.”
레이라 부인이 상자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상자가 밝게 빛나며 자물쇠가 풀렸다.
“리즈 왕비의 일기장이야.”
“……제게 이것을 보여주시는 이유가 뭐죠?”
“같은 배를 탔으니까.”
레이라 부인이 일기장을 쓰다듬었다.
“그대가 나를 절대 배신할 수 없도록 확신을 주고 싶은 거지.”
“전 이미 주인에게 버려진 몸입니다.”
“그래, 하지만 완전히 나를 신뢰하지도 못하잖아.”
레이라 부인의 말이 맞았다. 마피 부인이 굳은 표정으로 일기장을 쳐다보았다. 이게 한낱 매춘부를 여왕의 자리에 올려준 카드였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보다도 귀한 물건이었다.
“난 리즈 왕비의 딸을 폐위시킬 거야.”
“그분에겐 주인님이 계십니다.”
“내겐 그대가 있지 않나.”
“무슨 말씀이신지……?”
“약속하마. 이 일기장을 그대에게 공유해 줄 것이다.”
마피 부인의 목울대가 꿀렁, 하고 움직였다.
“그러니 너는 증언을 해.”
“증언이요?”
“엘리사 공주가 그란디아의 군사 비밀을 유출했다.”
레이라 부인은 크게 놀란 마피 부인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우리는 이 카드를 공유하게 되는 거야. 그대는 이것으로 귀족이, 나는 여왕이 될 테지.”
“그럼 언제……?”
레이라 부인이 붉은 입술을 길게 늘였다.
“오늘 밤.”
“……오늘 밤이라고요?”
“오늘 밤 그웬 일가를 모두 추포한다.”
레이라 부인의 선언에 마피 부인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마피 부인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레이라 부인이 손뼉을 치자 무장한 병사들이 나타났다.
“공주, 엘리사가 그란디아의 비밀을 누설했다. 너희들은 지금 바로 반역도를 잡아 와라.”
레이라 부인이 요요히 웃었다.
병사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곧바로 그웬 일가가 있는 별궁을 포위, 엘리사의 방까지 밀고 들어왔다.
“마님!”
“마님, 제 뒤로.”
진저는 내일의 일을 위해 자리를 비웠다. 엘리사의 근접 호위를 맡은 마크빌과 케인이 그들을 저지했다.
마크빌의 이름은 무예를 닦는 자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위용 앞에 주눅이 든 병사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방문을 넘는 자는 벤다!”
케인이 소리쳤다. 병사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때, 중앙군의 부총사령관이 갑주를 찬 채 방문을 넘었다.
“해쉬 경.”
엘리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반역자 엘리사 그란디아를 체포한다.”
“반역이라니! 누가 폐하의 적통, 그란디아의 유일한 공주에게 누명을 씌우는가!”
그란디아 중앙군에겐 엘리사보다 레이라 부인의 명이 우선이었다. 부총사령관 해쉬가 공주를 향해 검을 겨누자 우왕좌왕하던 자들이 모두 검을 빼 들었다.
“감히 그웬의 안주인을 위협하는 자, 베겠습니다.”
케인이 해쉬 경을 향해 달려들고 마크빌이 엘리사를 등 뒤로 감췄다.
그들과 함께 있던 라골은 은밀히 통신 마도구에 손을 댔다. 리한을 불러야 했기 때문이다. 라골이 통신 마도구를 잡자마자 그와 가까이 있던 병사가 달려들었다.
“윽!”
라골의 푸른 재킷이 검게 물들었다.
“라골!”
엘리사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라골은 비무장 상태였다. 목이라도 베인다면 그대로 죽을 터였다.
“라……!”
“오지 마세요, 마…… 큭!”
병사가 라골의 다리를 찔렀다. 새하얗게 질린 엘리사가 마크빌의 등 뒤에서 튀어나왔다. 그녀는 해쉬 경과 병사들을 찢어져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내게 이런 짓을 하고도 살아남기를 바라진 않겠지.”
“반역도보다는 오래 살아남지 않겠습니까.”
그는 레이라 부인의 종이었다. 가끔 그녀의 침실을 찾는다는 소문까지 있는 자로 말로는 회유할 수 없었다.
“가족이 무사하길 바란다면 순순히 따라오시죠.”
“마님, 넘어가지 마십시오! 수많은 사지를 넘어오신 분입니다. 주군께선 쉬이……!”
“공작을 체포하기 위해선 희생을 피할 수 없겠지만, 그웬 영애 쪽은 다릅니다. 그웬 영애에게 간 자들은 ‘페니엄’입니다. 그들의 잔인함은 누구보다 공주가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엘리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시각, 해쉬의 말처럼 루펠라가 포위당했다. 그녀를 호위하는 그웬의 병사 몇이 시체가 되어 나뒹굴었다.
“꺄악!”
저택에서 데려온 하녀며 그란디아의 시녀들까지 비명을 질러댔다.
그레닉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대여섯이나 되는 사내들을 홀로 상대하느라 이미 이곳저곳에 검상을 입고 있었다.
“그레닉…….”
“옆에 있어.”
“하지만!”
“내 여자에게 손끝도 못 대게 할 테니까.”
루펠라는 물기 어린 눈동자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달콤한 말에 설레기보다 그의 목숨이 더 걱정되었다.
“싫어! 네가 죽으면 나더러 어떻게 살라고!”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죽는 것보다 그가 다치는 게 겁이 났다. 그의 상처가 수십 배가 되어 그녀에게 되돌아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레닉은 물러설 수 없었다. 병사들의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저들의 목적은 루펠라를 증언대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었다.
병사 중 하나가 눈을 빛냈다.
「그웬가에서 엘리사 공주에게 반발할 만한 일이 있어야 해.」
「반발할 일이라시면…….」
「그웬 영애가 죽는 것 정도는 되어야겠지?」
병사가 루펠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루펠라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정신을 차리자 보이는 건 사랑하는 남자의 가슴, 그리고 붉게 충혈된 눈동자였다.
그레닉이 천천히 무너졌다. 루펠라가 비명을 질렀다.
“안 돼!”
목숨보다 사랑하는 남자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나 처참하여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병사가 그녀의 목을 향해 검을 겨눴을 때였다. 난데없이 사방이 모두 붉어지더니 그란디아의 병사들이 하나씩 목을 잡고 쓰러졌다.
사내가 루펠라의 방으로 들어왔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그레닉의 이름을 외치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제발, 제발…….”
“…….”
“제발 살려줘. 내가 죽어도 돼. 나는 죽어도 돼! 나는 행복했단 말이야. 이 사람 때문에 평생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 하지만 이 사람은 아니야. 오빠, 이 사람은 언제나 나 때문에 불행했어…….”
루펠라가 사내의 다리를 끌어안고 애원했다.
“리한, 제발 그레닉을 살려줘!”
리한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 * *
결국 진저를 제외한 그웬의 모두가 추포되었다. 사람들이 빽빽이 모여 있는 대전까지 끌려간 엘리사는 왕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레이라 부인을 노려보았다.
왕의 곁엔 그를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레이라 부인의 ‘페니엄’이 붙어있었다.
이미 무언가 대화가 오간 표정이었다. 왕은 루펠라가 정신을 놓은 채 끌려 들어왔음에도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녀를 비롯한 그웬의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제 딸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폐하, 명심하세요. 왕비의 일기장은 제게 있어요. 그것이 없으면 어차피 공주는 죽은 목숨이죠.」
「너 같은 걸 궁에 들이는 게 아니었어.」
「사랑에 눈이 어두웠던 젊은 날의 폐하를 탓하세요. 그리 걱정하지 마세요. 죽이지는 않을 겁니다. 그웬 일가를 그란디아에 묶어놓을 구실이 필요할 뿐이죠. 제 말 명심하세요. 허튼수작을 부렸다간 일기장은 그날로 재가 되어버릴 테니.」
「레이라!」
「사랑하는 아내의 시체에 숨을 불어넣을 수도 있는 소중한 보물이지 않습니까. 얌전히 있어 주시면 아내와 딸의 목숨은 해치지 않을 거예요.」
악에 받친 레이라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왕태후를 떠밀어 죽이려던 것을 그가 사전에 저지했었다.
자식이 모후를 죽이는 것을 막았다고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쳤다. 종내엔 일기의 앞부분을 태우기까지 했다. 젊은 날 왕비와의 기억이 모두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내 자식을 죽일 순 없어.’
왕이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제가 어머니였다면 피눈물을 흘릴 거예요.」
「남편을 만나고 알았어요. 숨죽여선 안 된다는걸.」
「폐하, 저는 제 남편과 아이와 함께 세상을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서 강해지기로 했습니다.」
딸은 그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의 죽음을 침묵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왕은 딸에게 미움을 받아도 괜찮았다. 그건 자신의 몫이라 결론을 내린 지 오래였으니까.
‘하지만 나로 인해 또다시 스스로를 혐오하게 된다면.’
그가 눈에 힘을 주어 감았다.
엘리사가 소리쳤다.
“폐하, 모함입니다!”
좌중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과거의 엘리사는 그런 생각 같은 건 조금도 못할 정도의 순둥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사람 많은 자리에서 레이라 부인의 딸에게 모욕을 주고, 왕족에게 무례했다며 귀족 영애를 추포했다. 좌중의 의견이 갈렸다.
“왕족의 모범이었던 그대가 이런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파요.”
레이라 부인이 눈썹을 늘어뜨렸다. 엘리사가 악을 내질렀다. 이미 자신으로 인해 한 사람의 목숨을 잃었다. 루펠라는 그레닉을 잃고 정신을 놓기까지 했다.
“반역도는 폐하를 겁박하는 네가 아닌가!”
엘리사의 고함에 좌중이 모두 숨을 들이켰다. 엘리사는 레이라 부인에게 이렇듯 크게 소리를 지른 적이 없었다.
“증언이 있습니다! 공주가 그웬 공작에게 나라의 비밀을 누설하는 것을 그웬의 하녀가 보았어요!”
레이라의 말에 소란이 더욱 커졌다.
“그웬? 그웬이 왜 그란디아를…….”
“아내가 그란디아의 왕위 계승 서열 1위지 않소. 왕위가 탐이 났던 게지.”
“폐하가 살아계시는데 뻔뻔하게. 역모일 뿐 아니라 패륜이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엘리사 공주의 폐위를 주장했다.
“폐하! 패륜을 저지를 저 반역도를 당장 사사하십시오!”
“그렇습니다, 폐하! 엘리사 공주는 왕족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그란디아의 모두를 능멸했습니다!”
“공주를 사형대로!”
“사형대로!”
“사형대로!”
사람들의 고함에 엘리사가 루펠라를 끌어안았다. 자신은 죽어도 아이와 가족만은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차라리 남편만이라도 도망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보…….’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던 클라우디아, 필리아 자매가 입술을 끌어올렸다.
필리아는 애초에 엘리사와 그웬 일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클라우디아는 진저에게서 엘리사를 떼어낼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내가 일기장을 찾아오면 돼. 그럼 어머니와 거래를 해서 공만은 란델에 돌려보낼 수 있어.’
목숨을 살려준 자신을 깊이 신뢰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클라우디아가 황홀한 듯 탄성을 흘렸다.
필리아가 사람들과 함께 소리쳤다.
“공주를 사형대……!”
“우와아아아-!”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진저와 그웬군이 나타났다.
레이라 부인이 비명을 지르듯 고함을 내질렀다.
“감히 폐하의 궁을 포위하다니! 역도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진저가 성큼성큼 걸어 아내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그레닉과 루펠라에게 죄스러워 숨도 쉴 수 없었다.
“그레닉이…… 그레닉이 루펠라를 지키다…….”
진저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 루펠라를 쳐다보았다. 그가 하우벡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그가 루펠라를 안아 들었다.
공작부인과 영애를 위해 숨죽이고 있던 마크빌과 케인 등의 기사들도 자신을 제압한 기사를 때려눕혔다.
“폐하! 보십시오! 공주가 반역을……!”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했던 왕이 소리쳤다. 지금이었다. 레이라 부인의 주장만 뒤집을 수 있다면 그녀를 끌어내릴 명분이 생긴다.
“그대가 진정 그란디아의 왕위를 탐냈는가!”
왕의 말에 레이라 부인이 숨을 몰아쉬었다. 엘리사를 힐끔 쳐다본 진저가 입을 열었다.
“가문의 명예와 이 목숨을 걸고 단언합니다. 그웬가의 가주 진저, 폐하께 바라는 건 오직 그란디아의 금지옥엽뿐입니다.”
그가 엘리사를 끌어안았다.
“짐은 공의 말을 믿……!”
“증인이 있습니다! 공작을 키운 유모가 엘리사 공주와 공작이 공모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마피 부인이 좌중 속에서 걸어 나왔다.
왕과 진저, 엘리사, 또한 그웬의 모두가 이 황망한 광경에 말을 잃었다.
“유모…….”
진저가 이를 갈듯 그녀를 불렀다. 마피 부인은 대답하지 않고 오직 왕과 눈을 맞출 뿐이었다. 왕은 그녀에게 쉬이 질문을 하지 못했다. 이미 레이라 부인의 사람이 되었다면 대전을 포위한 진저는 정말 죽은 목숨이었다.
“미천한 몸이 폐하께 아룁니다.”
레이라 부인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런 사실이…….”
대전에 모인 이들 모두가 숨죽였다.
“없습니다.”
레이라 부인의 눈이 커지고 대전은 터질 듯 소란스러워졌다.
레이라 부인은 아예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진저가 그녀를 막아서자 그의 가슴을 할퀴며 악을 내질렀다.
“감히 폐하께 거짓을 고하는 게냐!”
마피 부인이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 꺼내 들었다. 녹색으로 빛나는 작은 돌멩이였다.
그녀가 돌을 세 번 돌리자 기이하게도 돌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난 리즈 왕비의 딸을 폐위시킬 거야.』
『그분에겐 주인님이 계십니다.』
『내겐 그대가 있지 않나.』
『무슨 말씀이신지……?』
『약속하마. 이 일기장을 그대에게 공유해 줄 것이다. 그러니 너는 증언을 해.』
『증언이요?』
『엘리사 공주가 그란디아의 군사 비밀을 유출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우리는 이 카드를 공유하게 되는 거야. 그대는 이것으로 귀족이, 나는 여왕이 될 테지.』
레이라 부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귀족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경악한 자들, 환호하는 자들, 그리고 레이라 부인과 마찬가지로 새하얗게 질린 자들.
마지막 경우가 대전에 모인 사람 중 절반을 넘는 것을 보면 이때까지 그녀가 얼마나 많은 귀족을 포섭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도 있었다. 거스터 후작과 게티 백작 또한 아차 하는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엘리사가 인상을 쓰며 외쳤다.
“폐하를 위협하고 있는 저들을 즉살하라!”
우왕좌왕하고 있던 병사들이 페니엄을 향해 검을 겨눴다. 당황한 페니엄 또한 검집에서 검을 빼 들었는데, 그들은 제대로 된 위협을 할 시간도 없이 그웬의 기사들에게 제압당했다.
엘리사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폐하를 구하였다!”
남편은 대전을 포위했다. 진저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대전을 포위했던 백여 명의 그웬군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진저가 아내를 향해 눈짓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 기사단은 무얼 하는가! 반역도와 역도의 개를 당장 추포하라!”
그동안 해쉬에게 밀려 중앙 기사단장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못 낸 클라크 경이 나섰다.
그가 레이라 부인을 제압하고, 기사들에게 그녀의 두 딸을 제압하라 소리쳤다.
십여 년간 이어지던 실정이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