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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8화 (8/155)

< --   - 1.   -- >         * 8화 *

수도까지의 길은 평온하고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도로 향하는 가도인데 치안관리가 허술할리 없었다. 막대한 물자와 재화가 오가는 수도 근처의 가도에서 도적질이라도 했다간 주변의 도시나 요충지에 세워진 요새에서 몰려나온 경비대나 군대에게 둘러쌓여 순식간에 토벌당할게 뻔했다. 식사를 위해 이동 중간에 마차를 잠시 세우고 30분쯤 휴식시간을 가졌던 것 외엔 지루하기까지 한 여정이었다. 그나마 옆에서 간간히 말벗이 되어주는 에나가 없었으면 마차 안에서 수면상태로 놓고 수도에 도착할때까지 스킵을 시켰을것이다. 많은 승객과 진석, 에나를 실은 마차는 해가 뉘엿뉘엿 지려는 저녁무렵이 되어서야 수도의 성문을 통과해 역에 도달했다.

"생각보다 큰데."

진석은 마차에서 내리며 데오그라즈시의 전경을 둘러보고 그렇게 감상을 말했다.

"해밀턴 시도 발달한 곳이지만... 수도에는 비교가 안되네요. 대단해."

뒤따라 내린 에나는 눈을 반짝거리며 들뜬 표정을 지었다. 역시 한 나라의 수도. 해밀턴시가 우습게 보일정도로 넓었다. 거기에 도대체 이 많은 인간들이 어디서 쏟아져 나온건가 싶을 정도로 거리에 오가는 사람이 넘쳐났다. 중심가엔 4~5층에 달하는 고층건물도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어둠이 서서히 하늘을 덮어가며 건물과 가로등엔 하나 둘 불빛이 늘어났는데, 아기자기한 특유의 건축양식과 어우러져 도시의 전경 전체가 흡사 하나의 예술품처럼 아름다웠다. 도시의 동쪽편 끝엔 거대한 등대가 세워져있고 그 옆으로 뻗어진 선착장엔 수백대가 넘는 숫자의 크고 작은 배들이 줄지어 세워져있었다. 날이 저물고 있음에도 실시간으로 짐을 싣고 나르며 오가는 배들과 일꾼도 많았다. 사람과 물자가 넘쳐나는 항구도시의 활력감이 한 눈에 느껴졌다. 하지만 멍청히 서서 도시의 전경에 감탄만 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 진석은 와아 하며 여기저기를 구경하는 에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자 그럼 가자. 숙소를 잡아야지."

"아, 네!"

배낭을 고쳐멘 진석은 에나와 함께 인파를 뚫고 도시 안으로 발을 들였다. 사람이 너무 많아 통행하는게 짜증날 정도였다.

"아니 수도라 인구가 많은건 당연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많은데?"

"아마 축제때문일거에요."

짜증내는 진석의 옆에서 일러주는 에나. 진석이 돌아보며 축제? 하고 반문하자 에나는 크흠 헛기침을 한 번 뱉곤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음주부터 일주일간 왕실 주관으로 해신제가 열리거든요. 대규모 예식 행사에 왕궁에선 무도회가 열리고 각 가문의 유망한 기사님들이 출전하는 토너먼트도 개최된다고... 각지에서 축제를 보고 즐기러 몰려온 사람들일거에요. 저도 해신제는 이야기만 들었었는데 직접 수도에 와보니 열기만으로도 뭔가 가슴이 뛰네요."

"......"

그런건 몰랐다. 물론 국가마다 특정한 국경일이나 축제같은게 있는건 잘 알고 있었지만 해신제라는건 지금 처음 들었다. 업데이트로 추가된 부분인걸까?

"아니 잠깐. 그러면 지금 숙소... 구할수나 있으려나."

"아."

생각 못하고 있었다는듯 손바닥으로 입을 막는 에나. 축제 직전의 피크인데다가 눈에 보이는 사람도 이렇게 발에 치일정도니 숙소고 뭐고 과연 몸 뉘일곳을 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있다고 해도 축제가 코앞이니 만큼 바가지를 씌울건 안봐도 뻔할터. 보통 이런 대규모 축제 이벤트는 플레이어 입장에서도 즐길거리였었지만, 지금 진석의 상황으로선 하나도 도움 안되는 재수없는 상황일 뿐이었다. 진석은 잠시 서서 으으 낮은 탄식을 흘리다가 에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무튼 이러고 서있어봤자 아무것도 안되니 우선은 움직이자."

"네, 네에... 괜찮겠죠? 아무리 그래도 방 하나 정도는..."

"...있겠지. 있을거야."

에나에게 대답하기보단 스스로를 안심시키듯 내뱉는 진석이었다. 이내 두 사람의 모습이 거리의 인파속에 삼켜져갔다.

"이걸 어쩌나. 빈 방이 없는데."

"......"

벌써 열두번째 숙소였다. 여기에서도 퇴짜. 눈에 띄는 어지간한 곳은 다 들어가 방을 잡아보려 했지만 어디에서도 머물곳을 구할 수 없었다. 치솟는 짜증에 끄으으 하며 머리털을 쥐어뜯는 진석에게 여관 주인이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쯔쯔... 거 축제를 보려는 심산이었으면 한 달전엔 예약을 하던가 방을 잡던가 손을 썼어야지."

그게 되겠냐. 게임을 시작한지 이제 겨우 3일째다. 진석이 대답없이 한숨만 푹 쉬자 주인은 팔짱을 척 끼며 계속 말했다.

"그 뭐냐. 요 앞에서 오른쪽 큰 길로 10분쯤 가면 선셋대로라고, 귀족나으리들이나 부자양반들 대상으로 영업하는 고급상점들이 잔뜩 모인 거리가 있어. 그쪽에 있는 숙소들은 호화롭긴 하지만 워낙 비싸게 받아먹는터라 주머니 가벼운 서민들은 아예 출입할 생각도 못해. 혹 지갑 사정에 여유가 있으면 그쪽으로라도 가봐. 지갑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추천은 못해주겠다만 선착장쪽으로 가보게. 그쪽 뒷골목에 선원이나 부두 노동자 대상으로 장사하는 싸구려 숙소들이 좀 있거든. 창녀들도 많이 돌아다니는데다가 질이 나쁜 부류도 많고 해가 떨어지면 치안이 안 좋아져서 위험하지만..."

진석은 여관 주인의 설명을 듣고 알려줘서 고맙다고 대답한 뒤 밖으로 나왔다. 여관 앞엔 계단턱에 쪼그려 앉은 에나가 종아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진석이 나온걸 보자 벌떡 일어나더니 쪼르르 다가와 물었다.

"여기도 방... 없나요?"

"응."

"그럼 이제 어쩌죠?"

근 한 시간째 돌아다녔는데도 방을 못 하고 있으니 에나도 꽤나 걱정되는 모양이다. 어디보자, 은행에 남아있던 에나의 저축과 집기, 옷등을 팔아 마련해서 준비한 여비가 동화는 제하고 금화 다섯닢에 은화 세닢 이었다. 여기서 은화 한 닢은 마차삯으로 써서 이제 남은건 금화 다섯에 은화 둘. 큰 돈은 아니지만 작은돈도 아니었다. 뭐 이 돈이면 아무리 비싸도 선셋대로인가 뭔지 하룻밤 정도는 묵을 수 있겠지. 진석은 에나의 손을 이끌고 여관 주인이 일러준 서쪽의 선셋대로로 향했다.

"어디로 가시는거에요?"

"선셋대로."

"선셋대로요? 아!"

뭔가 생각났다는듯 무심결에 짝 손뼉을 치는 에나. 에나도 선셋대로가 어떤 거리인지 정도는 알고있는 모양이었다.

"방금 들른 여관주인이 알려주길 너무 비싸서 아무나 못 이용할 숙소가 많다던데."

"네. 귀족이나 부자들이나 드나드는 비싸고 호화스런 거리라고 들어서..."

"뭐 그렇다고 우리가 못 갈 곳 가는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말꼬리를 흐리는게 에나는 내심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뭐 비싼 보석이나 옷을 사러가는것도 아니고 그래봐야 하루 묵을 숙소다. 까짓 비싸봐야 얼마나 할까. 진석은 에나의 귓볼을 꾹 잡아당겼다.

"아얏."

"괜찮아. 뭘 지레 걱정을 하냐."

"...네."

입술을 살짝 내밀며 눈을 내리까는 에나. 별것 아닌 몸짓이건만 어스름한 거리의 불빛에 비친 옆모습은 어쩐지 대단히 귀여워 보였다. 처음엔 단순히 강도질로 털어먹을 대상으로만 봤던 상대였건만... 진석은 서서히 자신의 마음속에 에나의 존재가 자리잡기 시작하는걸 느꼈다.

"4골드? 1박에?"

"네, 그렇습니다."

붉은 톤으로 호화스럽게 장식된 실내. 화사한 샹들리에의 빛이 밝히고 있는 로비의 구석구석엔 꽃이나 그림, 도자기 따위의 미술품이 장식되어 있었다. 카운터 안쪽의 깔끔한 정복을 차려입은 직원은 짐짓 사무적인 웃음을 띄우며 진석의 질문에 대답했다. 어쩐지 '너희같은 주머니 가벼운 서민들이 올 곳은 아니란다'하는 의미가 담겨있는것 웃음같아 기분나빴다.

"저희 호텔엔 1박 1골드나 2골드의 방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만... 최근엔 축제를 보러 방문하신분들이 너무 많아 만실이 된 상태라서요. 남은건 1박 4골드의 특실뿐입니다."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방을 준비해드릴까요?"

유들유들하게 되묻는 직원의 태도가 어째 깐족거리는 것 같아 진석은 한 대 쳐버리고 싶다고 느꼈다. 1박에 4골드, 금화 네닢이라면 사치를 넘어선 돈낭비다. 에나가 상회에서 회계사무 일을 하며 한 달에 받았던 봉급이 3골드를 약간 넘었다고 했으니, 아무리 축제기간이라 성수기 요금이 적용된걸 감안하더라도 이건 정말 지독한 수준이다. 직원은 돌아가겠다는 대답을 기대하는것 같았지만, 진석은 오기가 생겨 품에서 금화 네닢을 꺼내 카운터 위로 내밀었다.

"자, 방 준비해줘. 우리 짐도 좀 옮겨주고."

"엇... 아, 알겠습니다."

직원은 호기롭게 큰 숙박비를 치룬 진석의 태도에 깜짝놀라 부랴부랴 짐꾼을 부르고 방을 안내할 준비를 서둘렀다. 자신의 호텔에 묵는 손님이 아니면 모르되, 지정된 숙박비를 치른 이상 체크아웃 할때까진 최선을 다해 모셔야 할 중요한 손님이 된것이었으니까. 비록 좀전엔 거만한 태도를 내보이긴 했지만, 나름 수도 데오그라즈 유수의 호텔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있기에 그런것이었다. 하지만 여비의 태반인 금화 네잎을 1박 요금으로 치루는 모습을 지켜 본 에나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에나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따라가는 진석의 뒤에 달라붙어 귓가에 따지듯 속삭였다.

"아니 러셀님! 마음은 알겠지만서도! 너무 비싸잖아욧!"

"응. 비싸긴 비싸네."

"아이 참! 진짜! 이제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진석의 너무나 태연한 태도에 또 다시 뾰루퉁해지는 에나. 진석은 그런 에나를 보며 히죽 미소지었다.

"걱정마. 내일이 되면 알테니까."

"......"

에나는 하나도 못 믿겠다는듯 불신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사이 둘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3층 복도 끝자락의 방 앞에 도달했다. 직원은 공손한 태도로 문을 열곤 진석에게 방열쇠를 내밀었다.

"특실입니다."

"와아..."

방금전까지 뾰루퉁했으면서도 방 내부를 보더니 바로 감탄성을 내는 에나. 과연 1박 4골드, 특실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호사스러운 방이었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마감된 실내는 어지간한 귀족가문의 응접실 보다도 잘 꾸며져 있었다. 무심코 눈길이 갈만한 구석구석엔 계절에 맞춘 꽃이나 미술품이 장식되어 있었고, 큼직한 벽난로 앞엔 호피가 깔려있었다. 고급 가죽과 목재로 만들어진 가구들은 요소요소 금박이 입혀 꾸며져 있는것이 한 눈에 봐도 이거 정말 값 좀 나가겠구나 싶었다. 큼직하게 뚫려있는 창문으론 도시의 야경과 항구의 경치가 동시에 내려다 보였다. 에나가 방 구경에 정신이 팔린 사이, 진석은 직원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미드 엑손 정도는 있겠지? 그거 두 병하고 아직 식전이니 식사도 올려주게."

엑손은 대륙 남부에서 고루 유통되는 고급 벌꿀주로, 벌꿀 특유의 향과 맛이 살아있지만 25도가 넘어가 벌꿀주 치곤 상당히 독주에 속하는 술이었다. 진석은 조용히 술과 식사의 주문을 하며 직원의 손에 남은 금화 한 닢을 쥐어주었다. 행색은 평범해 보이지만 겨우 술 두 병과 식사 주문으로 금화를 내다니, 사실 이 두 남녀는 엄청 대단한 인물들인걸까? 아주 드문 경우긴 하지만 평범한 행색으로 돈을 물쓰듯 하며 한가롭게 유람을 다니는 귀족이나 부호들도 분명 있었다. 직원은 제멋대로 착각해선 최대한 빠르게 올려드리겠다고 말하곤 카운터에서의 태도와는 180도 달라진 깍듯한 인사를 하며 방을 나섰다.

"후우..."

진석은 방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몸을 묻었다. 과연 겉으로 보이는 고급스러움 만큼이나 편안하다. 이제 수중에 남은 소지금은 은화 두닢과 동화 약간. 금화 다섯닢이라니. 무려 5골드, 단 하룻밤과 잠자리와 한 끼 식사로 지불하는 돈 치곤 너무 컸다. 하지만 에나를 달고 선착장가의 싸구려 숙소를 찾아 돌아다니는것도 부담스러웠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저기 주인님! 이거 보세요 이거!"

안쪽의 침실로 들어갔던 에나가 고개를 쏙 내밀더니 왠지 흥분해서 진석을 불러댔다. 뭔가 하고 들어가봤더니...

"뭐야 이거. 운동장인가?"

"그렇죠? 진짜 크죠?"

역시 호사스러워보이는 침실의 침대는... 이만하면 트리플 킹사이즈, 아니 쿼트로플 킹사이즈는 되겠다. 건장한 남성 십수명이 단체로 올라가 누워도 자리가 남을만치 컸다. 공간낭비란 이런걸 말하는게 아닐까 싶을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 상식을 초월한 쓸데없는 크기에 헛웃음이 나왔다. 에나는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웃는낯으로 그 커다란 침대에 걸터앉아 양손으로 팡팡 쿠션 위를 두드려보였다.

"엄~청 부드러워요!"

그래, 그래 보인다. 분명 조금전까진 뚱해 있었음에도 언제 그랬냐는듯 눈을 반짝이며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구는 에나의 태도. 그 모습에 진석도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에나의 손에 이끌려 다음에 구경한곳은 욕실이었다. 침대만큼은 아니지만 거짓말 조금 보태서 수영을 해도 될 정도로 커다란 석재욕조가 그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특실 내부를 구경하고 있자니 곧 방 밖에서 메이드가 노크를 하고 주문한 술과 식사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어머, 식사는 또 언제 주문하셨어요?"

문을 열어주자 메이드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카트를 끌고 들어와 술과 요리를 탁자 위에 세팅해주었다. 빠르게 식사 준비를 마친 뒤 꾸벅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여보이며 방을 나서는 메이드. 진석이 그 뒷모습을 무심코 바라보자, 에나가 뒤에서 스윽 진석의 허리를 껴안아오며 중얼거렸다.

"...저런 제복이 좋으세요?"

싫어하는 남자는 없을걸? 차마 입 밖으로 내진 못하고 에나의 머리위에 턱 손을 올린채 좌우로 부비부비 마구 문질러 헤집었다.

"아, 아이참."

"밥이나 먹자."

"후후. 네."

둘은 마주앉아 이런 저런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시작했다. 진석은 식사중에 에나에게 수시로 엑손을 권해 계속 마시게 했다. 잔이 비면 채워주고 또 채워주고... 엑손은 당도가 높고 워낙 맛이 좋아서 도수가 높음에도 취하는줄도 모른채 한 잔 두 잔 연거푸 마시다 어느 순간 한계를 넘어 쓰러져버리는 술이었다. 과연 술 한 병이 바닥날때쯤 되자 에나의 얼굴은 꽤나 붉어져 있었고 발음도 슬슬 꼬이기 시작했다.

"음, 우우... 그러니까요. 그게... 어..."

"그래그래 자 한 잔 더."

진석은 엑손의 두 병째를 따서 비어있는 에나의 술잔에 가득 채워주었다. 멍한 눈동자로 진석과 자신의 술잔이 차오르는 모습을 번갈아 보던 에나는 에헤헤 하고 헤실헤실 웃으며 잔에 가득 담긴 술을 단번에 벌컥벌컥 원샷해버렸다.

"푸하!"

"잘 마시네. 자 조금 더 마실래?"

"어? 어음... 좋아요! 헤헤."

사양않고 또 다시 술을 받아들이는 에나. 진석은 재차 유리잔에 황금빛 술을 가득 채워주었다. 잔을 입으로 가져간 에나는 이번에도 원샷을 하나 싶던 기세로 꿀꺽꿀꺽 술을 마시나 싶더니, 반쯤 마시다 멈추었다.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돈 갑자기 진석을 노려보며 사뭇 따지는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아니! 그것보다! 쭈인님!"

"응 그래 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부드럽게 대꾸하는 진석의 얼굴을 수초간 말 없이 노려보는 에나. 뭔가 말하고 싶은듯 입을 우물거리다가, 이내 푸후 한숨을 내쉬곤 탁자 위로 시선을 떨궜다. 그리고 중얼중얼 다 들으라는듯 혼잣말을 시작했다.

"저엉말이지... 난데없이 사람을 함부로 거, 겁탈하구 말이야... 나느은... 얼마나 무서웠는데. 킁. 훌쩍..."

"......"

"사람으을! 여자아를! 뭘로 보구 말이야... 너무 막 험하게 하잖아 진짜아... 그... 기, 기, 기분은... 진짜아 좋지만... 그래두 나빴어어... 못된 사라암. 나쁜 사라암."

주정이 한탄으로 이어지는걸 보니 슬슬 한계에 가까워진게 아닐까 싶었다. 이것도 나름 귀엽긴 했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진석은 에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눈 앞에 술병을 흔들어보였다. 몽롱한 눈동자로 고개를 들어보이는 에나.

"에...?"

"그래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 한 잔 더 어때. 쭉 들이키고 나면 다 잊어버릴 수 있을거야."

반만 차 있는 에나의 술잔을 마저 가득 채워주는 진석. 에나는 헤에 하고 손에 쥔 술잔을 한참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가로 가져갔다. 꿀꺽꿀꺽꿀꺽. 채 삼키지 못한 한 줄기 벌꿀주가 입술 사이로 새어나와 턱을 타고 흘렀다. 푸하 하고 또 한 번의 원샷을 마친 에나는 술잔을 타앙 호쾌하게 내려놓곤 갑자기 진석에게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그으러니까! 잘! 해야돼! 나한테!"

"응응. 알았어 알았어."

"나... 나는! 믿... 당신 믿고! 따... 따라오... 으... 으헥."

에나는 반쯤 감긴 눈으로 고개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횡설수설 하더니 결국 탁자 위로 머리를 파묻곤 드르릉 소리를 내며 잠들어버렸다. 어째 이 아가씨는 자신과 얽히면서 쭉 정신을 잃기만 하는것 같다. 강제로 범해 혼절시키고, 미약으로 능욕해 보내버리고, 이번엔 술로 쓰러지고. 이게 도대체 스스로도 뭐하는 짓인가 모르겠다. 진석은 탁자위에 퍼질러진 에나를 조심스레 안아들고 침실로 옮겼다. 조금이라도 잠자기 편하도록 겉옷은 벗겨준 뒤 시트를 끌어올려 잘 덮어주었다.

"나는 잠깐 다녀올테니까."

쪽. 잠든 에나의 이마에 입을 맞춘 진석은 방 구석에 고이 놓여진 배낭에서 일전에 복면으로 쓰려고 구입했던 그 싸구려 손수건을 꺼냈다.

"분명 선착장 주변에 질 나쁜 놈들이 많이 꼬인댔지?"

진석은 아까 여관주인이 해준 말을 떠올렸다. 틀림없이 폭력단이나 범죄 조직들이 연계되어 영업을 하고 있을것이었다. 우득우득. 손과 목을 가볍게 풀자 뼛소리가 울렸다.

"그럼 어디 돈 좀 벌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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