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 -- > * 10화 *
"으으... 아 머리 아퍼..."
에나는 동이 틀 무렵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머릿속이 쿵쿵 울리는듯 쑤셔왔고 무엇보다 목이 엄청 말랐다. 비몽사몽한 채로 물을 찾아 비틀비틀 침실을 나섰는데 벽난로 앞 호피 위에 앉아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진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우... 뭐 하시... 아니, 그보다 물을..."
진석은 손에 쥐고 살펴보던 나무막대를 다시 품속에 집어넣고, 숙취에 괴로워하는 에나의 모습이 재밌다는듯 실실 웃으며 탁자에 있던 물병에서 물을 따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자."
"고... 고맙... 읍, 꿀꺽꿀꺽."
정신없이 물을 들이키는 에나. 물 한 컵을 단숨에 마시고나니 겨우 조금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컵을 내려놓은 에나는 손등으로 눈가를 부비며 진석에게 질문했다.
"으... 어제 나... 어떻게 된거에요?"
"엄청 잘 마시던데, 술."
"아..."
그제야 어제 진석이 계속 자신에게 술을 마시게 하던것이 어렴풋히 떠올랐다. 에나는 필름이 끊길 정도의 과음을 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숙취가 이렇게나 괴롭다는건건 처음 알았다. 게다가 숙취로 쩔쩔메는 자신을 모습을 보곤 재밌다는듯 웃는 진석을 보니 날 일부러 숙취로 괴롭히려고 그렇게 술을 퍼먹인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못됐다. 이 남자는 얼마나 나를 괴롭혀야 만족하는걸까?
"너무해요. 어째서 그렇게 나한테 술을... 이렇게 머리도 아프고 속도 쓰린데..."
화를 내려다가도 그마저 기운이 달린듯 비틀거리다가 근처의 소파에 쓰러지듯 몸을 묻는 에나. 머리를 붙잡고 끄응 신음을 내뱉는 안색이 파리했다. 정말 숙취로 어지간히 괴로운 모양이었다. 진석은 이럴줄 알았다는 듯 준비해둔 약 몇 가지를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이건 뭐에요?"
"숙취해소제. 잠깐만 지나면 싹 가라앉을거야."
에나가 숙취로 고생할게 뻔하니 진즉 카운터에 문의해서 받아온 물건이었다. 귀족이나 부자 상대로 장사하는 고급 호텔이니 만큼 응급상황을 대비해 고객을 위한 상비약 정도는 당연히 구비해 두고 있었다. 숙취해소제 역시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호사스런 만찬과 술을 즐기는 손님들이 많은 만큼 그들이 숙취해소제를 찾는 일도 잦았기 때문이다. 물론 기본 제공되는 상비약이라고 해도 귀하거나 비싼 약품은 숙박대금에 합산하여 청구했지만, 숙취해소제는 약학 E랭크로도 만들 수 있는 간단하고 저렴한 약품이라 서비스 차원에서 무료로 제공해 주었다. 에나는 두 말 않고 진석이 내민 파란색 물약과 흰색의 환약 두 알을 집어 삼켰다. 그리고 관자놀이를 짚은채로 으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다시는 술 안 마실거에요."
"왜? 주사가 꽤나 귀엽던데. 나로선 좀 더 자주 보여줬으면 싶더만."
"...내, 내가 취해서 뭐라고 했어요?"
"응 비밀."
"아~ 정말!"
그렇게 티격대는 와중, 에나는 탁자 위에 처음보는 주머니 여러개가 놓여있는걸 발견했다.
"그런데 저건 뭐에요?"
"그냥 사소한 선물."
"네?"
에나는 선물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일어 아픈 머리를 감싸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쪽으로 다가갔다. 겉보기엔 뭔가 묵직해보이는 주머니들. 진석을 한 번 돌아보았지만 네 맘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까닥일 뿐이었다. 천천히 손을 뻗어 주머니를 열었다.
"...이건?"
금화였다. 주머니 안에 금화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어림잡아도 수백개. 그런 주머니가 네 개나 더 있었다.
"어, 어머... 세상에."
너무 큰 돈을 보자 지금껏 평범한 삶을 살아왔던 에나로선 욕심보단 덜컥 겁부터 났다. 자신이 주인으로 섬기기로 정한 저 사내는 자신이 술에 취해 잠든 하룻밤새 대체 어디서 이런 거금을 만들어왔단 말인가? 놀라움보단 당혹스러움이 더 컸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큰 돈을..."
진석은 에나의 물음에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아니 거기있는게 다 금화는 아니고 오른쪽 두 개는 은화 주머니야. 세봤더니 금화는 총 380닢에 은화는 275닢이더라고."
"......"
은화와 금화의 교환비는 10대 1이니, 환산하자면 금화만 400닢이 넘어간다. 자신이 상회에서 꼬박 10년을 한 푼도 안쓰고 일해도 채 벌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금액. 말문이 막혔다.
"뭐 나쁜일해서 벌어온 돈은 아니니까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자세한걸 설명할순 없다만 그래도 굳이 조금 말해주자면... 나름대로 착한일을 해서 벌어온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능청을 떠는 진석. 에나는 도저히 눈 앞의 사내를 이해 할 수 없었다. 강도인가 싶었는데 강간범이 되고. 결국 자신을 육욕으로 굴복시킨 것도 모자라 무작정 재산을 처분하고 여행을 떠나게 만들더니, 별반 가진것도 없는 주제에 밤새 어디서 이런 어마어마한 거금을 만들어오고... 대체 이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게다가 뭐? 착한일? 이런 거금을 만들어오는 착한일이 세상에 어디있단 말인가. 그런게 있으면 자신에게도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그럼 매일매일 착한일만 하면서 살 수도 있겠지. 어째서 저런 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걸까. 자신은 몸도 마음도, 모든걸 다 내주었는데. 그런 자신을 믿지 못한단 말인가? 내심 울컥하고 섭섭한 마음이 솟구쳤다. 진석은 에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채 태평하게 말했다.
"너 다 가져. 뭐 내가 초면에 했던 짓을 생각하면 돈으로 갚을 수는 없다만."
"...아니에요."
"어?"
"돈 같은거, 하나도 가지고 싶지 않아요!"
에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버럭하고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러운 에나의 태도에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을 짓는 진석.
"거짓말하지 말아요... 이런 어마어마한 돈, 하룻밤새 간단히 구해왔을리 없잖아요. 내가 바보로 보여요? 분명 내가 알지못하는 뭔가 위험한 일을 했을게 뻔한데!"
"......"
"그... 그냥! 그냥 난 다 좋았어요! 러셀님 본인도 말했다시피 첫 만남의 형태는 최악이었지만, 결국엔 모든걸 바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 남자가 나타났다는게! 모든걸 다 접어둔 채 지긋지긋한 해밀턴에서 벗어난것도! 생전 처음 수도에 온것도! 이런 멋진 방에서 묵은것도 다 좋았어요!"
"에나..."
"하지만... 하지만 내가 모르는곳에서... 겨우 이런 돈, 이런걸 갖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다는건... 싫어요. 돈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길바닥에서 노숙을 하면 어때. 가난하게 여행해도 상관없어요. 나, 난 그냥... 둘이 함께... 함께..."
잦아 들어가는 에나의 목소리에 물기가 감돈다. 진석은 그제서야 자신이 크게 실수했다는것을 알았다. 눈 앞의 상대방은 단순히 육욕에 굴복해서 자신을 따르는것만은 아니라는걸 이제서야 깨달았다. 유년기부터 생계를 잇기위해 쭉 일만 해온 자신을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강제로 끄집어낸 존재. 그것이 자신이었던 것이다. 플레이어인 진석 입장에서야 내키는대로 행동했을뿐이지만 도시에서 평범하게 살아온 에나에겐 그의 모든 행동이 파격이었을 터. 그런 그가 이끄는대로 이제 겨우 평범한 삶에서 한 발 벗어났을 뿐인데, 자신은 모르는 어딘가에서 분명 큰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돈을 마련해오다니. 만약 그러다 그를 잃는다면. 자신은 어딘지도 모를곳에서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에나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가 자신과 함께 한다는게 중요했지, 돈 같은건 정말로 아무래도 좋았다.
"미안."
어느새 소리없이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는 에나. 진석은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살며시 품에 안아주었다.
"내가 너무 철없이 굴었네. 그래. 사실 저건 네 생각대로 위험한 일을 해서 만들어온 돈이 맞아."
"......"
훌쩍거리며 어깨를 들썩이는 에나의 등. 진석의 손길이 그녀를 달래듯 찬찬히 쓸어내려주었다.
"게다가 앞으로도 위험한 일을 하지 않을거라는 보장은 못해. 하지만... 적어도 그런일이 생기면 숨기거나 거짓말은 하지 않을께. 그것만은 확실히 약속할께."
"...네. 훌쩍! 야, 약속이에요."
지금까지의 행동만 봐도 알 수 있듯 어차피 제멋대로 사는 사람인것을. 그가 무슨 일을 하건 자신은 막을수도 그럴 능력도 없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을 믿고 그걸 숨김없이 알려준다는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에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진석은 주머니에서 복면으로 썼던 꼬깃꼬깃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상냥히 닦아주었다.
"으이그. 그냥 모른체하고 좋은게 좋은거다 하면서 받으면 될것을."
진석의 핀잔에 에나는 포옥하고 그의 가슴에 안겨 얼굴을 묻었다.
"...너무 적잖아요. 제가 정말 모른척하고 받게 만드려면 저거 100배는 더 가져오셔야해요."
"하하하."
진석은 한 방 먹었다는듯 유쾌하게 웃으며 품에 안긴 에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서로 바싹 맞닿은채 느껴지는 체온과 숨결, 그리고 여성 특유의 향기... 라기엔 어제 마신 술냄새가 아직 강하게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런점까지 포함해서 한낱 게임이 아닌 진짜 사람을 대하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 이 게임을 계속 할 수 밖에 없는거겠지, 진석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이전의 수많은 플레이에서도 여러가지 형태의 인연을 만들었었다. 하지만 군주라던가 한 나라의 장수인, 기본적으로 높은 신분이다보니 언제나 정치나 군략, 전쟁따위에 몰두해야했고 이런 남녀간의 인연은 깊게 파고들진 못했었다. 항시 적국이나 정적을 쓰러트릴 효율적인 방법의 추구만 해왔을 뿐.
'어느 나라나 높은 신분은 정략결혼을 하는게 기본이지. 군주의 신분으로 다른 나라의 공주와 결혼한다면 확고한 동맹이 됨과 동시에 그 나라의 왕권에 대한 명분도 얻어 전쟁같은 강경한 수단보다 손쉽게 병탄을 시도 할 수도 있고...'
허나 인연을 맺는다 해도 주판알을 따지듯 여러가지 계산이 오가는 정략결혼따윈 애당초 할 생각이 없었다. 후손을 낳아가면서 게임을 천천히 진행 하는건 진석의 성격이 아니었다. 대륙의 주도권을 쥔 시점에선 약소국들을 괴롭히거나 향락을 부리며 여유를 부리긴 했지만 결국 언제나 자기대에서 대륙의 통일을 완료했었다. 여자가 안고 싶으면 손 쉽게 하녀나 시종을 품었다. 혹은 돈을 주고 샀다. 그도 아니면 전장에서 붙잡은 포로나 적국의 인질을 범했다. 능욕하고 조롱하며 그들의 절망감을 보는것을 게임의 한 재미로 여겨왔는데 지금은... 한낱 NPC로 보던 대상이 자신에게 보여주는 호의에 마음이 흔들리는게 느껴진다. 그렇게 에나를 품에 안고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녀의 훌쩍임이 완전히 멎었다. 진석은 에나를 품에서 떼어놓았다.
"자 이제 끝. 그보다 일단 좀 씻는게 어때? 술 냄새가 진동한다."
"아... 그, 네에..."
억지로 품에서 떼어놓자 뭔가 말하려는듯 입술을 샐쭉이다 말을 삼키는 에나. 얼굴에 은근한 홍조가 떠오른 채 양 허벅지를 바싹 붙이고 비비적거리는 모습이 어째... 진석은 능글맞은 태도로 그녀에게 질문했다.
"왜. 뭔가 원하는거라도 있어?"
"읏, 그... 그게. 주인님 품에서 체취를 맡으니 저도 모르게... 그으..."
"모르게? 모르게 뭐?"
"......"
진석의 추궁에 갑자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에나. 진석은 놀리는듯한 어조로 계속 캐물었다.
"자. 주인님한테 대답은 똑바로 해야지?"
"우, 으... 흐, 흐응... 부..."
"뭐라고? 안들려."
"...흥분됐어요! 주인님의 온기랑 냄새에 저도 모르게 젖어버렸어요!"
에나의 필사적인 외침에 진석은 순간 뿜을뻔 했지만 주인으로서의 위엄을 생각해 간신히, 필사적으로 억누를 수 있었다. 추궁때문에 할 수 없이 대답을 쥐어짜낸 에나의 얼굴은 토마토마냥 달아올라 누르면 빨간물이 뚝뚝 떨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스스로 젖었다느니 하는 천박한 말을 내뱉었다는걸 깨달은 에나는 아으으 하며 눈 둘데를 몰라했다.
"아 정말 에나는 너무 야한 아이로구나. 주인님은 실망이 커요."
"에? 그, 그런..."
"음 나쁜아이는~ 벌을 줘야겠지? 먼저 욕실에 들어가서 물 받아놓고 기다리고 있어. 당장."
당황해하는 에나를 내려다보며 히죽 웃어보이는 진석. 에나는 진석의 명령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곤 고개를 끄덕이며 지체없이 욕실로 들어갔다. 에나의 모습이 욕실 안으로 사라지자 진석은 후우 긴 한 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휴우. 왠지 엄청 피곤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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