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 -- > * 14화 *
"안돼!"
무작정 데이나를 노리고 달려들려 했지만, 순간 등쪽에서 강력한 충격을 느끼고 앞으로 나동그라졌다. 크윽 분한 신음성을 뱉으며 뒤를 돌아봤더니 래스커가 발차기 후 자세를 가다듬는 모습이 보였다. 뒤에서 걷어차다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지만 그 순간 또 다시 데이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홍염탄."
"망할!"
진석은 꼴사납게 데굴데굴 옆으로 굴렀고, 홍염탄이 날아들어 아슬아슬하게 어깨를 스치며 바닥에 내리꽂혔다. 대리석 바닥이 산산히 깨져나가며 검게 타올랐다. 조금이라도 피하는게 늦었다면 아까 홍염탄을 맞은 사내처럼 몸이 꿰뚫렸으리. 게다가 안심하기엔 일렀다. 그새 다가온 래스커가 진석을 벌레처럼 짓밟겠다는 듯 발을 한껏 들어올린채였다.
"이거나 먹어라!"
"너나 먹어!"
진석은 재빨리 양 손을 허리뒤로 뻗어 청동단검을 뽑으면서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뻐억! 래스커의 발에 가슴팍을 걷어차이며 뒤로 밀려나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걷어 차임과 동시에 청동단검으로 래스커의 디딤발 무릎 안쪽을 벨 수 있었다. 힘줄이라도 제대로 끊긴건지 크윽 하고 다리를 감싸안으며 주저앉는 래스커. 진석은 그 틈에 잽싸게 몸을 일으키며 혼신을 다해 기술을 날렸다.
"라파가아앗!"
번쩍. 양손의 단검이 그려낸 수평의 선이 주저 앉아있던 래스커의 빈틈을 파고들며 목덜미를 갈랐다. 푸슈슉! 래스커는 피가 뿜어지는 자신의 목을 부여잡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표정을 띄운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베여나간 목의 상처에서 핏줄기가 퓻퓻 뿜어져 바닥에 피웅덩이를 넓혀갔다. 이제 남은것은 의외의 상황에서 어쩔줄 몰라하는 잔챙이 부하 둘과 여자 하나! 진석은 양손의 청동단검을 휘릭, 솜씨 좋게 뒤집어 칼날쪽을 잡은 뒤 그 부하 둘을 노리고 힘차게 집어던졌다. 파라락 힘차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단검들! 한 쪽은 목덜미에, 다른 한 쪽은 명치에 정확히 명중했다. 급소에 단검을 맞은 둘 역시 괴로운 단발마를 토하며 제자리에 쓰러졌다.
"헉... 허억..."
입은 타격이라곤 래스커에게 걷어차인 두 번 뿐이라 그리 대단치 않았지만 뒤를 생각치 않고 기술을 연속으로 마구 써댔더니 SP가 상당히 줄어있었다. 바일리 델 비엔토의 SP 소모율은 생각보다 컸던 것이다. 진석은 또 언제 빈틈을 노리고 날아들지 모르는 마법을 경계하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여자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보이지 않았다.
"어?"
하지만 의문도 잠시. 뻥 뚫린 욕실문 안쪽에서 붉은 머리의 여성의 에나를 뒤에서부터 붙잡은채 질질 끌고나오고 있었다.
"너어!"
진석이 노성을 외치며 한 발 내딛었지만 그녀는 후후 싸늘하게 웃더니 루비 로드를 에나의 턱 밑에 겨누곤 차분히 말했다.
"솜씨가 제법 대단한데... 썩히긴 아까워. 어때? '우리' 밑에서 일해보는건."
"...뭐?"
"네게 필요한건 아마 돈이겠지? 얼마든지 주겠어. 이 여자와 더불어 여느 귀족 부럽지 않게 평생 떵떵거리며 살 정도의 돈을 주지. 단 죽을때까지 우리의 명령을 따르며 일해야 하지만."
"......"
진심일까 아니면 나무 막대를 되찾기 위한 거짓 제안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겁에 질린 에나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섣불리 대답 할 수 없었다. 저 여자가 쏘아내는 엄청난 위력의 마법이 에나의 머리를 향했다간 끔찍한 일이 벌어질 터였으니. 진석이 입술을 깨물고 침묵을 지키자 여자는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싫은가? 간단한 결정이잖아. 그것조차 판단하지 못하다니 생각보다 어리석은데."
"뭣..."
"됐어, 두 번이나 기회를 주긴 싫으니까. 홍염..."
"잠깐!"
진석은 마법을 발동하려 하는 데이나의 말을 막고 품에서 천천히 나무 막대를 꺼냈다.
"원하는건 이거였지? 그녀를 무사히 놓아주면 건네주마."
"먼저 주면 놓아주지."
"너..."
"이 상황에서 우선권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해?"
진석은 손에 든 무기도 없는 맨몸이고 그녀는 언제든 마법을 발동해 에나를 죽일 수 있는 입장이다. 데이나는 다시 한 번 루비 로드를 바짝 들이대며 에나의 턱 밑을 꾹 짓눌렀다. 히익 하고 공포에 질린채 떠는 에나. 진석은 크읏하고 혀를 차더니 할 수 없다는 듯 나무 막대를 데이나의 발치쪽으로 던져주었다. 흥 코웃음을 치며 그것을 주워드는 데이나.
"진작 이랬으면 서로 편했을것을."
"그럼 이제 에나를 놓아줘."
"좋아. 약속은 지켜야지."
의외로 순순히 에나를 얽메고 있던 팔을 풀고 진석쪽으로 그 등을 탁 떠미는 데이나. 진석이 무심코 앞으로 몇 발짝 걸어나가며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에나를 맞잡으려 한 순간, 에나의 등 너머에서 붉게 반짝이는 빛줄기를 보았다.
"홍염사."
퍼억! 뭔가가 에나의 가슴을 뚫고 튀어나와 진석의 왼쪽 어깨까지 관통해버렸다. 데이나의 루비 로드에서 뻗어진 진홍색 불꽃의 실이 에나와 진석 둘을 나란히 꿰뚫고 있었다. 그렇게 눈 한 번 깜빡일 정도의 사이, 화르륵 하고 불꽃의 실이 허공에 녹아가듯 사라지며 대량의 체력치가 줄어들었다는 경고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진석의 시야엔 눈앞의 에나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에나는 뭐가 어찌된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에서 푸웃 가는 핏줄기를 뿜었다.
"쿨럭! 주... 주인니..."
"에나아아아!"
손을 뻗은 자세 그대로 제자리에 풀썩 쓰러지는 에나. 진석은 재빨리 바닥에 쓰러진 에나에게 달려들어 안아들고 상태를 살펴보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엔 이미 빛이 없었다. 어떻게 손 써볼 도리조차 없는 즉사였다. 순식간에 사망한 에나의 머리를 껴안고 망연자실해 하는 진석의 귓가에 데이나의 빈정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사이좋게 같이 보내주려 했는데 정말 운도 좋네. 혼자 남아버려서 어쩜 좋담?"
"......"
"뭐 됐어, 목표물도 회수했으니 장난은 끝. 죽어. 홍염탄."
진석은 에나의 시체를 놓고 재빨리 바닥을 굴렀다. 그 순간 홍염탄이 완성되며 방금까지 진석이 있던 허공을 꿰뚫고 지나갔다. 데이나는 쳇 혀를 차며 다시 루비 로드를 진석을 향해 겨누었다.
"홍염... 꺗?!"
갑자기 뭔가가 날아와 루비 로드를 쥐고 있던 손가락을 정확히 맞추었다. 손을 때린 통증에 놀라 그만 루비 로드를 바닥에 떨어트리는 데이나. 당황해서 허겁지겁 로드를 주워드는데, 그 옆에서 탱그르르 맑은 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금화가 보였다.
"금화?"
강철단검은 홍염탄에 맞아 깨졌고, 청동단검은 간격이 떨어져있던 두 명을 마무리 하기 위해 투척해 버렸다. 수중에 아무런 무기가 남아있지 않던 진석은 이판사판 주머니에 남아있던 동전 몇 개를 쥐어 데이나에게 집어 던진것이었다. 그 중 하나가 운 좋게도 그녀의 손에 정확히 명중해 잠깐이나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런 잔머리를!"
데이나는 그렇지 않아도 사나워보이는 눈꼬리를 확 치켜뜨며 전방으로 루비 로드를 뻗었다. 데리고 온 수하들은 다 죽었고, 생각보다 시간을 너무 오래 끌기도 했다. 이제 단번에 강한 기술로 마무리 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잠깐의 시간을 번 진석은 저쪽 구석 가방안을 허겁지겁 뒤지며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소용없어! 죽어라, 홍염삭!"
루비 로드가 번쩍 빛나며 초승달 같은 모양의 길다란 화염탄이 발출되었다. 강력한 절삭력으로 바위도 무처럼 베어내는 회심의 공격 마법. 이것에 맞으면 다져진 생선마냥 토막나며 검게 불타 죽으리라. 데이나는 눈 앞의 검은 머리 사내가 맞이할 처참한 결말을 기대했지만 홍염삭이 펼쳐짐과 동시에 진석의 손에서도 뭔가가 집어 던져졌다. 무력 45의 강력한 힘으로 던져진 그것은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들어 홍염삭에 맞부딪혔다. 그리고 퍼엉! 허공에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아닛?!"
진석이 집어 던진것은 헤밀턴시의 잡화점에서 샀던 기름병이었다. 여행하며 야영할때 모닥불을 피우거나 랜턴에 채워 쓰기 위해 구입했던 것. 데이나는 바로 앞에서 일어난 예상치 못한 폭발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이거나 먹어어엇-!!!"
진석은 데이나가 폭발에 당황하는 틈을 타 또 다시 손에 든 뭔가를 전심전력을 다해 집어던졌다. 데이나가 아차 하며 루비 로드를 든 손을 뻗으려고 했지만 늦었다. 진석이 온 힘을 다해 던진 그것은 데이나를 향해서 그야말로 섬광처럼 날아들었다.
"캬아학!"
퍼억! 강렬한 파육음이 방안에 울려퍼졌다. 진석이 던진 무언가는 데이나의 우측 쇄골과 어깨의 사잇 부분에 날아와 꽂혔다. 손잡이 부분까지 합쳐 채 한 뼘이나 될까 싶은 자그마한 과도. 진석이 맨 처음 에나의 집을 털때 부엌에서 치료약과 더불어 챙겼넣었던 물건이었다. 어찌나 강한 힘을 담아 던졌는지, 과도에 적중당한 데이나는 마치 누가 뒤로 밀어내듯 지이이익 한참을 밀려나 벽에 등이 닿고 나서야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나마 급소를 면해 죽은것 같지는 않았지만, 동공이 풀린채 움찔움찔 불규칙하게 경련하는 모습은 쇼크로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허억... 허억..."
여러 상대를 쓰러트리며 그들의 피를 뒤집어 써 엉망진창의 몰골이 된 진석은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특별한 무구나 도와주는 동료 없이, 홀몸으로 강력한 마법사가 포함된 열 명이 넘는 상대를 전부 쓰러트린 것이다. 하지만 승리감이나 성취감따윈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진석은 힘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
눈에 들어오는건 바닥에 쓰러진채 싸늘히 식어가는 갈색머리의 여성.
"에나..."
쓸데없는 다툼에 휘말려 이게 막 정이 들려고 하던 상대가 죽어버렸다. 물론 이전 플레이때도 동료나 전우가 죽지 않았던건 아니다. 이 게임상에서 누군가를 잃는 경험은 흔한것이었다. 하지만 화가 났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한낱 게임이라 해도 모든 행동엔 댓가가 따른다는 것 쯤은 잘 알고 있다 여겼는데 지금 이게 무슨 꼴인가. 문득 엘란 공주의 퀘스트 마지막 부분이 떠올랐다. 덤벼오는 강력한 암살자들에 맞서 공주와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그 부분. 어쩐지 그것이 지금 자신의 상황에 오버랩 되었다. 허나 자신은 보호해줘야 할 상대를 지키는데 실패했다.
"...큭..."
게다가 이만한 난리를 쳤다. 놈들이 어떻게 알고 호텔까지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있어봤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비대에 체포되어 감옥에 처박힐게 뻔했다. 그리고 여기 널려있는 수많은 시체. 이들이 아무리 범죄 조직의 일원들이라지만 이만한 숫자를 죽였으니 자신이 받을 선고는 사형밖에 없지 않겠는가? 또 에나를 죽인 원흉인 붉은 머리의 여자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이... 개같은 년...!"
진석은 단검 투척을 맞고 쓰러졌던 사내들의 시체에서 청동단검을 회수하여 그녀에게 다가섰다. 분노가 치밀었다. 당장이라도 몸통에서 모가지를 잘라내고 싶었다. 진석은 단검을 상대의 목덜미에 찌르려 팔을 번쩍 치켜들었지만, 차마 찌르지 못하고 한참을 부들부들 떨다 단검을 천천히 검집으로 되돌렸다. 손을 뻗어 데이나의 품 안에 들어가 있던 나무 막대와 바닥에 굴러다니는 루비 로드를 회수해 챙겼다.
"...도대체 이게 뭔진 모르겠지만, 배후를 밝혀내서 몽땅 박살내주마."
이 여자는 에나를 죽이기 전 분명 자신에게 '우리'를 위해서 일하라는 회유를 했었다. 그 의미인 즉슨 이 여자 뿐만 아니라 그녀를 포함한 어떤 세력이 또 있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아까의 분위기를 곱씹어 생각해보자니 자신이 쓰러트린 중년남, 래스커의 패거리는 단순히 그녀의 부하 쯤으로 보였다. 범죄 조직조차 수족처럼 부리는 의문의 세력... 당장 자세한건 알 수 없었지만 눈 앞엔 자신에게 모든것을 설명해 줄 상대가 쓰러져 있었다.
"마음같아선 당장 죽여버리고 싶지만... 망할!"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라도 죽게 놔둘 순 없었다. 배낭에서 붕대와 연고형 외상 치료약을 찾아 가져왔다. 이 역시 에나의 집에서 챙겼었던 물건. 그걸로 붉은 머리의 여자를 치료했다.
"에나의 물건으로 에나를 죽인 년을 치료하다니 씨발 이 무슨 빌어처먹을..."
해부학으로 사용 가능한 응급처치를 써서, 정말 딱 죽지 않을 정도의 처치를 마친 진석은 바깥이 시끄럽다는것을 깨닫곤 창문을 통해 호텔 입구쪽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에서의 소란탓인지 와글와글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장사진을 치고 있었고 경비대로 보이는 십수명의 병사들도 막 도착해 건물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아 진짜!"
진석은 최대한 서둘러 짐을 베방에 마구 때려박았다. 그리고 배낭을 멘 뒤, 쓰고 남은 붕대로 붉은 머리 여성의 손목을 꽉 묶어 어깨에 짊어메었다. 거기까지 하고나니 벌써 복도 저만치에서 우르르 여러 사람이 몰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큭... 복도는 어차피 글렀고..."
나갈곳을 찾던 진석의 시선이 문득 에나를 향했다. 리베라에서의 시체는 두 가지 형태로 사라졌다. 우선 전장. 수많은 인원이 전투를 벌여 무수한 시체가 생겨나는 전장에선 원활한 메모리 관리를 위해 시체가 플레이어의 시선에서 벗어날시 가능한 빠르게 사라졌다. 하지만 평상시엔 시체라고 해도 여전히 상호작용을 하는 가변 NPC 취급을 받아, 플레이어가 시체에서 멀어지거나 일정 시간이 흐를때까진 남아있었다. 그러다보니 진석은 차마 에나의 시체를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었다. NPC의 시체 따위에 미련을 두는건 바보같은 짓이라는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한 팔로 힘겹게 에나의 시체를 들어 반대쪽 어깨에 짊어메었다. 등엔 무거운 배낭, 양 어깨엔 두 여성의 신체. 무력 45의 스테이터스가 아니었으면 엄두도 못낼 모습이었다. 에나의 시체를 막 짊어지고 나니, 방 안으로 경비병들이 들이닥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놈들! 다들 꼼짝마!"
"저항하지 말고 순순히... 엥?!"
"이, 이게 이게 무슨 일이야!"
우르르 몰려들어온 경비병들은 데이나의 마법으로 엉망진창이 된 방안의 꼴과 사방에 널려있는 시체들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단순히 범죄조직간의 폭력사건 정도로 생각하고 출동했는데 현장의 상황은 그야말로 피바다였던 것이다. 진석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자신의 정면인 창문쪽으로 향한채 묵묵히 서있었다. 경비병들은 진석의 존재를 알아채곤 소리를 질렀다.
"어... 어이 너! 네놈 여기서 뭘 한거냐!"
"거기 꼼짝 말고 서있어! 긴급 체포하겠다!"
후읍. 진석은 경비병들의 말은 눈곱만치도 신경쓰지 않은채 크게 심호흡했다. 지금부턴 스스로 생각해도 미친짓을 할 작정이었으니까.
"아닛?!"
"무, 무슨짓이냐!"
진석은 그대로 창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앞발을 내밀어 창문을 걷어차 깨트림과 동시에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무거운 짐가방을 메고 양 어깨엔 사람을 하나씩 얹은채 3층 건물에서 뛰어내린것이다! 순간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분명 어제 이 시간엔 에나와 함께 보던 풍경이었는데... 짧은 부유감이 끝나고, 쿠우웅! 양 다리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전해졌다. 곧 체력이 위험 수준까지 떨어졌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민첩 40인 진석이 그냥 맨몸으로 3층 높이에서 뛰어내린거라면 별 피해 없었을 테지만 역시 몸에 짊어지고 있는 무게가 문제였다. 그나마 게임이니 체력이 떨어지는 정도로 끝났지, 현실이라면 비참한 꼴이 되었으리라. 어쨌거나 체력이 바닥이건 뭐건 한가로이 쉴 순 없었다. 진석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가야할까 아니면 그냥 육로로 빠져나가야 할까?
'...육로다.'
결정을 한 그는 주변에서 놀란 표정을 짓고있는 시민들을 마구 밀치며 도시의 북쪽으로 달려나갔다. 데오그라즈의 동쪽과 남쪽은 바다. 서쪽에 위치한 해밀턴시에서 이쪽 데오그라즈로 왔었으니, 이제 나아갈 길은 북쪽뿐이었다. 바다로 나가봐야 어차피 진석에겐 배를 운용할 기술이 없으니 도시의 경비병들이 배로 추적을 해온다면 따라잡힐게 뻔했다. 그러니 차라리 북쪽으로 빠져나가는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혼잡한 인파를 가르며 달려나가는 진석의 기세와 속도는 사람 둘을 메고 있는것 같지 않게 무시무시했다.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체력이 줄어들고 있다는 경고 메시지가 연신 떠올랐지만 한가롭게 체력관리나 하고 있을때가 아니니 무시했다. 한참을 미친듯이 달려 도시 북쪽의 마차역에 다다른 진석은, 적당한 이두마차를 하나 골라 안쪽에 에나의 시체와 붉은 머리 여자, 배낭을 몽땅 집어던져 넣은 뒤 말을 몰아 도시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제서야 뒤쪽에서 그 마차의 마부인듯한 남자가 나타나 꽥꽥 소리를 질러댔지만 소용없었다. 마차는 빠르게 도시의 경계를 빠져나가 가도를 타고 쉼없이 달려 밤의 어둠속으로 그 모습을 감추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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