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 -- > * 15화 *
그란델 왕국의 수도 데오그라즈의 북쪽으로는 러프야드 시가 위치해 있었다. 데오그라즈에서 도보로 너댓시간이면 갈 수 있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 상업시설이나 기타 부대시설이 적어 도시라기엔 뭔가 살짝 부족한 느낌. 그렇다고 마을이라고 부르기엔 상주인구가 많았다. 러프야드의 주변 일대는 모두 농경지로, 귀족가문에 속한 소작농들이 대규모로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러프야드는 수도에서 소모하는 식량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일종의 기획 농경 도시였다. 그 러프야드의 남서쪽 방향엔 동서로 산자락이 뻗어져있고 약간의 숲지도 형성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발원해 동북쪽으로 흘러가는 강줄기가 러프야드 주변 농경지에 공급되는 농업용수로 쓰였다. 수도를 탈출해 북쪽으로 마차를 계속 몰던 진석은 저 멀리에서 강이 흐르는 것을 발견하곤 지도창에서 주변의 지형을 확인했다. 현재 위치로부터 강을 따라 서쪽으로 좀 가면 숲이 나오는것을 확인 하곤 주저없이 말머리를 그쪽으로 향했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다른 생각을 하고 싶었지만 어째선지 에나의 죽음이 계속 머리에 떠올랐다. 그도 그럴것이 게임을 시작한 이후 거의 떨어지는 일 없이 계속 붙어다닌 상대가 바로 에나였다. 비록 며칠뿐이긴 했지만, 그 대부분의 시간을 그녀와 함께 보냈었으니. 쓸데없는 짓을 해서 엄하게 잘 살고 있던 사람 인생 하나 말아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르던 동물이 죽어도 마음이 아플진데 하물며 게임상이라지만 살을 섞던 사이가 아닌가.
"그냥... 그냥 NPC잖아 NPC. 씨발..."
하지만 그냥 NPC일 그녀가 왜 이렇게 가슴속에 남아 거슬리는걸까. 어디 하소연 할곳 없는 진석의 마음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무나 붙잡고 두들겨 패고라도 싶은 기분이었다.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보았더니 어둑한 밤 하늘엔 달만 밝았다.
"......"
그렇게 말을 몰길 십수분. 강을 따라 듬성듬성 수풀이 우거지고 나무들이 하나 둘 늘어난다 싶더니 제법 울창한 숲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무들의 밀도가 높아져 더 이상 마차로 들어갈 수 없는 깊숙한곳까지 최대한 마차를 끌고 들어온 진석은 마부석에서 내려 말을 메어놓고 강가로 향했다.
"푸하..."
강물을 양 손 가득 떠 얼굴에 적셨다. 잔뜩 뒤집어써 굳어있던 피가 녹아 뚝뚝 흘러내렸다. 수면위에 비치는 그 모습은 마치 진석 자신이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 어쩐지 보기싫어 몇 번이고 거칠게 물을 퍼서 얼굴에 묻은 피를 박박 문질러 씻어냈다. 조용한 숲 속에서 차가운 강물로 세수를 하다보니 어째 머리의 열도 식고 끓어오르던 속이 가라앉는게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그래. 지나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로드를 해서라도 에나를 살리고 싶은 마음이 없는건 아니었지만 불가능했다. 리베라는 플레이어가 게임을 종료할 시에만 자동저장된다. 진석은 한 번도 종료하지 않고 지금까지 쭉 진행했으니 아직 세이브 파일조차 없기 때문이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몸에 묻은 물기를 옷에 대충 슥슥 문질러 닦으며 마차쪽으로 향했다.
"엇?"
그런데 세수를 하러 다녀온 그 잠시 사이에 마차칸쪽의 문이 열려있는게 아닌가? 열린 문으로 들여다 보이는 안쪽엔 에나의 시체와 배낭만 남아있었다. 붉은 머리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하지만 세수를 한 시간은 기껏 2, 3분 남짓. 도망갔다고 해도 부상을 입은 몸이니 멀리가진 못했으리라. 진석은 허공에 화염화살을 하나 띄우곤 그것을 광원삼아 마차 주변의 흙을 살폈다. 비가 온건 아니지만 강가 주변이라 흙에 약간 습기가 있어, 희미하나마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거동이 불편한듯 다리를 끌며 지나간듯한 흔적이 한쪽을 향하고 있었다. 진석은 자국이 가르키는 방향을 서둘러 따라갔다. 수풀을 헤치고 겨우 40-50미터나 갔을까? 근처의 한 나무 등걸에 지친듯 몸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는 붉은 머리의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진석은 그녀에게 다가가 머리채를 확 틀어 쥐었다.
"어딜 도망가!"
"꺅!"
도망치다 바닥에 몇 번 넘어지기라도 한건지 검은색 정장은 여기저기 흙과 마른 나뭇잎 조각이 묻어 더러워져 있었고, 이마엔 땀이 비오듯 흘렀다. 어깨쪽에 감아준 붕대에서도 피가 적잖이 베어나오는게 잘도 이런 꼴로 도망을 쳤구나 싶었다.
"놔... 놔라 이..."
여자는 붕대로 묶어 포박을 해놨던 두 팔을 들어 허우적대며 저항하려 했다. 진석은 기껏 가라앉았던 짜증이 도로 치솟는걸 느꼈다.
"닥치고 가만 있어!"
텁. 진석의 손이 여자의 목덜미를 쥐었다. 해부학의 스킬을 이용해 경동맥쪽을 막자, 부상을 입고 무리하느라 별 체력도 남아있지 않던 여자는 금세 의식을 잃고 늘어졌다.
"정말 가지가지 짜증나는 년이구만..."
진석은 그녀를 어깨에 들쳐메고 마차로 돌아갔다. 속옷만 남기고 옷을 다 벗긴다음 옷가지를 길게 찢어서 그걸로 팔 뿐만 아니라 다리도 묶고 입엔 재갈을 메어 안쪽에 던져놨다. 다음은 에나의 시체를 처리할 차례였다.
"......"
막상 에나의 시체를 다시 보니 말로는 못할 복잡 미묘한 감정이 치민다. 진석은 손을 뻗어 에나의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머리카락을 단정히 쓸어주었다.
"하아..."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가슴이 메어지는 기분이 드는게 도저히 한 숨 외엔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배낭에서 에나에게 사줬던 옷이나 그녀의 소지품을 꺼내어 에나의 시체와 함께 들어 옮겼다. 그리고 근처에서 적당히 양지 바르겠다 싶은 자리를 찾아 손으로 땅을 팠다. 아무리 게임이라도 맨손으로 땅을 파는게 쉬울리도 없었고, 안 그래도 적은 체력이 조금씩 까였지만 무시하고 묵묵히 파내려갔다. 곧 한 사람이 들어가 누울 정도의 자리가 생겨났고 진석은 그 안에 에나를 조심스레 눕혔다. 옷가지랑 물건들도 옆에 같이 넣은 뒤 마지막으로 에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미안하다."
그것 밖엔 할 말이 없었다. 그 외에 자신에게 무슨 말을 더 할 자격이 있으랴? 파낸 흙을 덮어 시체를 잘 묻고, 근처에 굴러다니던 큼지막한 돌을 몇 개 주워 쌓았다. 무덤을 완성하고 나니 왠지 힘이 빠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옷이나 손은 흙으로 엉망이었다. 게다가 체력이 엄청나게 떨어져 있는 상태라 어느새 상태이상 빈사에 걸려있었다. 일시적으로 스테이터스가 저하되고 시야나 청각의 레벨도 떨어져 마치 진짜로 몸 상태가 좋지 않은것처럼 느껴졌다. 진석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에나의 무덤옆에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스킵을 해서 시간을 빠르게 보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조금 쉬고 싶었다.
아침. 진석은 이름모를 샛소리와 눈을 부시게 하는 햇살에 잠에서 깨어났다. 게임을 시작한지 겨우 5일째. 추적을 피해 숲에서 야숙이라. 나도 참 게임 한 번 파란만장하게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체력은 완전히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회복되어 빈사 상태는 사라져 있었다. 대신 목마름이나 공복감 같은 디버프가 떠오른 상태. 그러고보니 어제 그 난리를 치느라 저녁을 못 먹었구나. 게임이다보니 배가 고프다는 느낌은 없지만, 공복으로 인한 디버프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현실처럼 끼니는 해결해 줘야 했다.
"하... 이 꼴을 해가지고도 입에 밥을 넣어야 한다는 생각부터 들다니, 현실이나 게임이나 목구멍이 포도청이야..."
진석은 에나의 무덤을 한 번 돌아보곤, 그럼 가볼께라고 말한 뒤 몸을 돌려 강가로 향했다. 벌컥벌컥 물부터 몇모금 들이키고 강에 비친 자신을 살펴보니 몸은 온통 흙투성이에 입은 옷은 핏자국에 흙이 범벅이 되어 엉망진창. 강물로 대충 빤다고 해결될 상태가 아니라 버리기로 결정했다. 화염화살의 주문을 써서 벗은 옷가지를 태우고 강에서 몸을 씻었다. 속옷만 입은채로 푹 젖어서 어정어정 마차로 돌아가니, 붉은 머리의 여자는 이미 정신을 차린채 구석에서 어떻게든 포박을 풀어보려는듯 꿈지럭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팔이나 다리 양쪽 모두 진석이 단단하게 묶어 꼼짝못하는 상황. 마차문을 열고 들어온 진석을 향해 눈을 부릅뜨곤 욱욱거리며 재갈 안쪽에서 항의의 소리를 냈다.
"아 시끄러 아침부터 기운도 좋다."
진석은 딱히 여분의 옷이 없었기 때문에 배낭에서 르 엘 드 알루에뜨에서 샀던 정장을 꺼내 재킷은 빼고 셔츠와 바지만 걸쳐 입었다. 숲 속에서 할만한 복장은 아니지만 이것 외엔 옷가지가 없으니 뭐 어쩌랴. 옷을 입은 다음 배낭 안쪽의 육포와 건량을 꺼내 입안에 대충대충 집어넣었다. 어차피 이런 휴대식량은 별 맛도 없는데다가 공복도를 채우는게 목적이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진석은 육포를 우물거리면서 여전히 꼼지락대고 있는 붉은 머리의 여자를 향해 말했다.
"죽일 필요는 없었잖아."
"......"
"어제일만 놓고 잘잘못을 가리자면 내가 먼저 네 부하들을 털었으니 내가 나쁜거긴 하다만... 그렇다고 그쪽도 선량한 인생을 살아온걸론 보이지 않는단 말이지?"
"웁!"
재갈 너머로 항의의 음성이 들려왔다. 진석은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재갈을 풀어주었다.
"하! 지금이라도 날 놓아준다면... 이번일은 불문으로 치지. 돈을 원한다면 만족할만큼 주겠어. 그러니 어서 이거 풀어."
"혹시 미쳤니? 택도 없는 소릴."
"미, 미친건 네 쪽이지! 감히 내가 누군줄 알고! 이런... 읍! 우그급!"
진석은 왁왁대는 꼴을 보곤 안되겠다 싶어 그냥 도로 재갈을 물렸다.
"뭐긴 뭐야 천하의 썅년이지."
"우우웁! 우윽!"
"걱정마. 쉽게 죽여줄 생각은 없으니까.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 신기록 갱신해 보지 않을래? 제일 오래 버텼던건 열흘쯤이었나, 어느 귀족 가문의 기사 아가씨였지."
진석은 이전 군주와 장수 플레이때 포로로 사로잡았던 적국의 여성들을 괴롭히고 능욕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자세한건 까먹었지만, 능욕을 당하면서도 꽤나 오랫동안 꿋꿋한 태도로 버티던 어느 명문 무가의 귀족 아가씨가 기억났다. 뛰어난 검술과 군략을 갖추고 있어 약관의 나이로 고위 기사의 신분을 얻고 전선에 지휘를 하고자 나왔지만 운 없게도 첫 상대가 플레이어인 진석이었다. 진석과 그녀가 각기 이끄는 전장의 상황은 평수, 아니 솔직히 진석쪽이 조금 밀리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된 이래 지저분한 도발과 모욕을 계속 날려대며 꾸준히 일대일 승부를 청해온 진석의 요구에 덜컥 응했다가 패배하여 사로잡힌것이다.
"처음 며칠은 나 혼자서 밤낮없이 능욕해봤는데 영 자기가 졌다는 사실을 인정 안하더라고. 그래서 한 며칠쯤 병사들 노리개감으로 던져줬지. 근데 이게 얼마나 독한지 그래도 꿋꿋한거야. 일주일 넘게 잠도 제대로 못자가며 그렇게 당했으면 보통은 맛이 갈텐데."
일방적으로 이어지는 진석의 경험담에 데이나는 혼란스러워졌다. 귀족의 기사 아가씨? 병사? 그렇다면 이 자는 어느 나라의 전직 무관이었단 말인가? 보통 솜씨가 아닌건 확실하다만, 그럼 전직 무관이었던 주제에 범죄 조직 상대로 강도질을 하고 있었다고? 대체... 대체 이 자의 정체는 뭔가? 데이나의 속내도 모른채 진석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나도 슬슬 약이 오르더라고. 그래 어디까지 버티나 싶어 형틀에 묶어놓고 발정기가 온 군견들을 번갈아가며 방에 넣어줬지. 이게 다 동물복지란 말이야 동물복지."
어느 경비대건 경비견 몇 마리쯤 키우는건 흔했지만, 전장에 나간 군대에서까지 군견을 활용하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았다. 조련이나 관리의 문제도 있거니와 들이는 노력과 비용 대비 그렇게 효율좋은 병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륙 북부에서나 일부 특산 대형견을 운용하고 있을 뿐. 그렇다면 이 남자는 북부 출신? 데이나는 멋대로 추측하며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꼴을 당하면서까지도 버티는거야! 반드시 아군이 자신을 구하러 올거라고, 그때가 되면 내 목은 정의의 칼날 아래 떨어져 내릴거라고 하는데 으아~ 그 굳은 의기에 되려 내가 졌다고 인정할 뻔했다니까? 근데 말야. 사람 몸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 중 해부학이라는게 있는거 알아?"
데이나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하는 진석의 눈동자가 서서히 위험한 빛을 띄며 번들거린다. 스윽 몸을 들이댄 진석은 데이나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이래보여도 그게 내 취미거든. 온건한 방법으로 안 된다면 거친 방법을 쓸 수 밖에."
꿀꺽. 데이나는 스스로도 모르게 긴장하여 마른침을 삼켰다.
"미인도 피부 한꺼풀 안쪽은 똑같다는 말이 있지? 사실이더라고. 이틀째까지는 잘 버티더니만 사흘째 결국 죽어버렸어. 뭐 아무리 의지가 대단한 귀족 기사님이라고 해도 온몸의 껍질이 다 벗겨져서야 역시 버티기 힘들었겠지."
위험하다. 지금 이 남자는 극히 위험한 상태다. 자신도 살인따위 셀 수 없이 저지르며 상당한 수라장을 넘기고 살아왔다. 어줍잖은 위협이나 협박따위 한 귀로 듣고 흘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꼼짝없이 붙잡힌데다가 상대의 애인으로 보이는 여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으니 그 분노가 고스란히 쏟아져 올 것은 분명. 자신에게 듣고 싶지도 않은 과거의 경험담이나 늘어놓고 있는것은 그것과 같은 행위를 자신에게 맛보여주겠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데이나는 서서히 눈 앞의 남자에게서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진석은 보란듯 히죽히죽 광소를 띄웠다.
"잘 구워진 자기 내장을 맛보는 색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굴도록 해. 그게 의외로 먹을만 하던데 말야."
"...!"
이건... 흔해빠진 위협이 아니라 진심이다...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빨아들일듯 노려보는게 실제로 저지르고도 남을 상대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외진 숲 속. 도움을 바랄 상대조차도 없는 상황. 눈 앞에 있는건 자신을 고문해서 죽이겠다는 협박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 복수심에 찬 남자. 무력감이 데이나의 온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재갈을 물고 있는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진석은 겁 먹은 기색이 역력한 데이나를 내버려두고 배낭을 챙긴채 마차의 문을 닫았다.
'내가 미쳤냐? 그런짓을 하게.'
위에서 데이나에게 한 얘기는 일부만 진실이었다. 대결에서 패배해 붙잡힌 주제에 콧대가 어찌 높은지 틱틱거리고 계속 건방지게 굴길래 며칠동안 잠도 안 재우고 능욕한건 사실이었지만 그냥 거기서 끝. 병사들에게 놀잇감으로 던져줬다는 부분부턴 전부 거짓말이었다.
'실컷 공포에 질려 떨고 있으라지.'
애당초 말 하는 성질머리를 보아하니 쉽게 굴복할 상대같진 않기도 했고, 좀 괴롭히면 픽 죽어버릴 육체적 고통보다는 정신적인 고통을 주고 싶었다. 쉽게 죽여줄성 싶더냐? 내 아주 철저히 망가트려주마. 진석은 그렇게 다짐하며 마차에서 좀 떨어져서 지도창을 열어보았다.
"음... 일단 러프야드는 못 갈테고."
경비병들에겐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거리의 시민들이 인상착의를 제보했을지도 모르고, 마차를 훔쳐 북쪽 방향으로 향한 것 정도는 이미 알려져 있을테니 그란델 왕국 전체는 아니더라도 데오그라즈와 러프야드를 포함한 북쪽 지역엔 수배가 걸려있을 확률이 높았다.
"차라리 그럼 다른 가까운 곳이..."
이렇게 된 이상 만일을 위해서라도 그란델 왕국을 벗어나는게 낫겠다 싶어졌다. 지도를 들여다보며 그란델 왕국에서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만한 길을 찾아보았다. 선택지는 두 가지가 있었다. 북쪽 혹은 서쪽. 우선 최단거리에 위치한 가장 가까운 다른 나라는 그란델 왕국의 북쪽에 위치한 소국 메디니아. 러프야드의 북쪽에 위치한 페레나 시까지만 다다르면 메디니아의 국경이 머지 않았다. 이쪽은 평야지대인 만큼 마차의 말을 떼어 이동한다면 길어야 삼사일내에 국경을 벗어날 수 있겠다 싶었다. 단 앞서 말했다시피 러프야드를 포함한 북쪽 지역엔 수배가 걸려있을 확률이 높았다.
'도시에 들러 보급을 할 수 없다는 얘기지.'
육포와 건량도 약간은 남아 있지만 잘해봐야 앞으로 두어끼 정도 겨우 먹을 분량. 쓰다 남은 금화는 많이 있었지만 아무리 돈이 많아도 수배의 위험을 생각하면 도시에 들러 보급을 한다는건 위험했다. 게다가 너른 평야 뿐인 북쪽방향을 지나다 혹 수배에 걸려 기병들에게 쫓기기라도 한다면 딱히 숨을 지형지물이나 따돌릴 방도가 없어 곤란했다. 또 가도 주변에 설치된 진지나 요새에서 병사들이 정기적으로 순찰을 실시한다는 사실도 감안하면 북쪽 루트는 발각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저게 있으니 말이지.'
진석은 콧잔등을 긁으며 마차쪽을 한 번 쳐다보았다. 인질을 하나 데리고 있는 이상 행동의 제약은 더더욱 커질터. 북쪽은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었다.
"그럼 서쪽인가..."
서쪽은 숲을 지나 산을 타고 대륙 중부지역로 향하는 루트. 단 산을 넘는 길이 나있는건 아니다보니 할 수 없이 말은 포기해야 했다. 산을 넘어 서쪽으로 진행하면 별 볼일 없는 소도시들과 마을 몇몇 뿐. 그리고 바로 국경이었다. 그 일대는 다른 나라와 접경을 한 곳도 아닌 그냥 광활한 초지였다. 아직 제대로 개척이 되지 않은 지역이다보니 국경을 넘어가면 정말 그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건 그 광활한 초지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커드머스라는 이름의 아인종 국가. 커드머스는 비엔이라는 유사인종들이 세운 나라로, 비엔은 대체적으로 수명이나 신체구조가 인간과 유사했으나 피부색이 청회색을 띄었고 치열이 인간의 그것관 달리 뾰족뾰족 날카롭다는게 특징이었다. 비엔만의 특징이라면 주로 초지나 평원 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한다는 것. 그래서 고정적으로 위치해있는 수도를 제외하면 넓은 평원에서 항시 부족단위로 마을을 옮겨다녔다. 자신들의 영역으로 삼은 평야 지대 이외엔 달리 진출하려고도 하지 않는 보수적 성향이라 몇 번이고 게임을 반복해도 커드머스가 세력을 키우는일은 좀체 본 적이 없었다. 허나 그렇다고 우습게 볼 수 만도 없는게 비엔은 기마술과 더불어 투창, 활, 슬링 같은 장거리 무기에 대단히 특화되어 있었다. 거기에 평야지역에 떡 자리잡고 있으니 어줍잖은 보병대를 보냈다간 말을 타고 빠르게 이동하며 가하는 기마사격이나 투창세례를 흠씬 얻어맞고 패배하기 딱 좋았다. 지금까지의 플레이 경험에 비춰보았을때 대부분의 경우 비엔들의 인간에 갖는 태도는 그럭저럭 원만한 편이긴 했지만, 직접 접촉해보거나 누군가에게 비엔의 동향에 대한 정보를 듣기 전까진 장담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일단 커드머스쪽으로 가서 다시 상황을 봐야하나? 음 근데 걔들 뭐 볼거나 있는지 모르겠네."
진석이 비엔과 커드머스에 대해 아는것은 딱 저것뿐. 게임을 진행하며 딱히 비엔이라는 종족에 대해선 관심을 가져본일이 없었던것이다. 두어번쯤 영토를 확장하다 커드머스를 밀어낸 경험이 있어 그때 기마와 장거리 무기에 강하다는걸 알았을 뿐, 어떤 문화를 이루고 사는진 잘 몰랐다.
"산을 타야되나."
못 넘을만치 험한 산세인건 아니지만 인질까지 데리고 걸어서 갈 생각을 하니 현기증이 난다. 어떻게든 말을 이용하고 싶었지만 잘해봐야 산 초입까지나 가능하지, 중반부터는 무리일게 뻔했다.
"일단 지금은 뭐라도 좀 모아볼까."
식물학도 있고 아니면 단검 투척도 있으니 뭐든 먹을걸 채집하거나 동물이라도 사냥해서 산을 넘을 식량을 조금이라도 모아볼까 싶었다. 하긴 옆에 강도 있군. 물고기를 잡아도 되겠다. 진석은 전투용 벨트를 착용하고, 정제기구가 담겨있던 작은 가방을 채집용 바구니 삼아 무작정 숲으로 들어갔다. 생존전문가가 별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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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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