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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18화 (18/155)

< --   - 2.   -- >         * 18화 *

그렇게 교단에 합류하기로 한 진석은 제이스와 함께 메디니아로 향하기로 하고, 우선 목적지를 가까운 러프야드로 정했다. 수배의 위험은 둘째치더라도 당장 제이스가 입을 옷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입고 있던 검은 정장은 잘게 찢어 포박용 끈으로 썼었고, 마부석에서 범할땐 그나마 남아있던 속옷마저 끊어버렸으니. 이동하는 동안 제이스는 진석이 입지 않고 남겨둔 남성용 정장의 재킷 하나만을 걸친채 마차칸 안에 있기로 했다.

"그나저나 당신 정말... 대단하네. 이, 임신이라도 시키겠다는거야?"

진석은 어제 믿음과 신뢰의 어쩌고 하며 얼렁뚱땅 펠라치오를 받은 후 페르모티오의 영향으로 몸이 달아 오른 제이스와 몇차례나 더 몸을 합쳤다. 이미 강제로 한참이나 당해서 지쳐있었지만 미약의 기운을 빌어 약빨아닌 약빨로 수차례 정사를 나누었다. 아침이 되어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보니 이제서야 임신여부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진석은 피식 웃으며 아무 말없이 짐을 정리하다 생각났다는 듯 어제 자신이 만들어둔 하급 체력회복제 하나와 제이스가 쓰던 루비 로드를 찾아 건넸다.

"이건..."

"회복약이다. 뭐 근처의 약초로 대충 만든거라 효능은 그럭저럭일테지만 안 먹는것 보단 나을테니 마셔둬."

손가락으로 시커멓게 멍든 제이스의 가슴을 가르키는 진석. 제이스는 약과 루비 로드를 받아들곤 새삼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질문했다.

"이거 당신이 직접 만든거야?"

"그래. 무슨 문제라도?"

"아니 문제라기 보단... 의외라서. 그리고 수호자들 중에서도 약학에 정통한 사람이 하나 있거든. 어쩌면 당신과 말이 통할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말을 하며 약을 꿀꺽 마시는 제이스. 야생의 약초로 만든 약이 맛있을리는 없는터라, 미간을 찌푸리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 써. 시금털털하고... 먹을때마다 느끼는거지만 약맛은 정말 싫다니까."

"어젠 정액도 잘만 삼켜넘기더만."

"그, 그건! 네가 시켰잖아! 서로간의 믿음이니 뭐니 하면서!"

가볍게 놀려봤더니 미간을 팍 찌푸리며 얼굴을 붉힌채 정색을 하고 반박한다. 진석은 몇마디 더 놀려주려다 '관두자. 어차피 언제고 죽이기로 맘먹은 상대인데 이러다 정든다.' 라고 생각하며 짐 정리를 마치고 말을 메어둔 고삐도 풀었다.

"자 그럼 출발하지. 안으로 들어가."

"후우... 알았어."

마차는 숲을 서서히 빠져나가, 러프야드로 향했다. 진석은 제발 수배령이 걸려있지 않기만을 바랬다.

몇 시간 쉬지않고 마차를 몰아 정오에 좀 못미칠때쯤 러프야드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도시 초입에 경비병들이 있긴 했지만 졸린 눈으로 하품만 쩍쩍 하고 있는게 걱정하던 수배령 같은건 내려지지 않은듯 했다. 진석은 내심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허나 러프야드는 소작농을 대거 이주시킨 기획 농경 도시라, 일반적인 도시에 비해 상업 및 부대시설이 턱없이 부실했다. 귀족에 속한 소작농들이 1년 내내 죽어라 일만하는 도시인것이다. 그나마 술집이라면 몇 눈에 띄였지만 여느 마을이라면 큼직하게 자리잡았을 시장같은건 존재하지 않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상점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있을뿐. 진석은 마차 안쪽에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뒤 잡화점으로 들어섰다.

"으하암... 에, 어서옵쇼."

도시 초입에서 본 경비병들과 마찬가지로 의자에 앉아 멍한 눈을 한채 하품을 하다 진석에게 건성으로 인사를 건네는 장년의 가게 주인. 진석은 가게 안에서 적당한 옷가지를 골라보았다. 그런데 수도에서 별로 먼 곳도 아니건만 물건의 질과 양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누가 입을까 싶은 촌스러운 옷들 중 그나마 낫다싶은 여성복 상하의를 골랐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의 옷 여벌도 살 생각이었지만 옷가지 꼴이 너무 말이 아니라 관뒀다. 그것과, 기름병, 밧줄 뭉치를 하나 집어 계산대로 가져갔다.

"어디보자. 그러니까 위아래 옷 한 벌 씩이랑 기름병... 그리고 밧줄? 음음, 은화 한닢만 주십쇼."

그나마 물건이 쌌다. 여긴 이거 딱 하나가 장점이구만. 진석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가게를 빠져나왔다. 마차문을 열고 안쪽으로 옷과 기름병을 건네주며 기름병은 가방 안에 넣어두라는 말을 했는데, 금세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아니 좀! 옷 꼬라지가 이게 뭐야! 나 놀리려고 일부러 이런걸 사왔어?"

"내가 일부러 그랬을거 같아? 의심스러우면 그거 입고 직접 가게 안에 들어가보지 그래. 그나마 그게 이 가게에서 파는 옷중에선 나은축에 속하거든?"

"...됐어."

퉁명스런 목소리와 함께 슥슥 옷을 입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 대충 알아들은 모양이다. 잠시 마차에 기대 서있던 진석은 안쪽에 말을 걸었다.

"그보다 점심은 먹어야 할거 아냐? 내 배낭에 남아있는거래봐야 육포랑 건량 쪼가리 약간 뿐이거든."

"이런거 입은채로 나돌아다니기 싫어. 알아서 적당히 사와."

아오 이게. 진석은 틱틱거리는 제이스의 태도에 좀 짜증이 났지만 이 정도는 그냥 참아 넘기기로 했다. 마차를 몰고 주변의 식당을 찾던 진석은 적당해보이는 식당에 들러 병맥주와 빵, 버터와 치즈를 얹어 찐 감자와 염장한 고기를 얇게 저며 튀긴 것을 사서 돌아왔다. 마차안의 제이스에게 그녀 몫을 건네주자 미간을 찌푸리며 특유의 화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건? 채소는 하나도 없잖아? 무슨 이런 기름진 것만 사왔어?"

"...야, 너 진짜 까탈스럽다."

진석 입장에서야 공복도 수치만 유지하면 되니 아무거나 먹어도 상관없지만 얘는 NPC주제에 음식투정을 다 한다. 갑자기 유순한 에나의 태도가 그리워졌다. 에나는 밥도 참 잘했는데. 아 어쩌다 이런 히스테릭한 여자와 한 편이 되기로 해서 이 고생이람. 두고보자, 언젠가 죽인다. 새삼 다짐을 가슴에 새기는 진석. 진석과 제이스는 그렇게 러프야드에서 대충 보급을 하고 마차를 몰아 북쪽의 페레나 시로 향했다. 러프야드에서 페레나까지는 마차로도 하루 이상 걸리는 거리라 중간에서 야숙을 하던가 마차촌에 도착해 묵어야 할 것 같았다.

덜그럭덜그럭 다각다각. 쭉 뻗어진 가도에서 멍하니 마차를 모는건 꽤나 지루한 일이었다. 하늘도 어째 찌뿌둥하니 먹구름이 가득 끼어있었다. 하긴 차라리 땡볕 맞는것보단 낫겠지. 할 일이 없던 진석은 한 손으론 말의 고삐를 쥔 채 다른 손으로 화염화살을 만들었다 없앴다를 반복하며 숙련 작업을 했다. 한 10분쯤 그러고 있으니, E랭크였던 화염화살이 어느순간 D랭크로 올라갔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흔해 빠진 하급 마법이라도 랭크가 올라가면 갈수록 점점 더 그 등급을 올리기 힘들어진다. 허나 지금은 입문 등급인 E, 최저랭크였으니 높은 지력덕에 그나마 금방 올라간것이려니 싶었다. D랭크로 올라간 화염화살을 다시 손바닥 위로 띄워보고 있는데 마차 안쪽에서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진석은 마부석에서 마차 안쪽과 연결된 작은 창을 열어 대답했다.

"왜."

"잠깐 마차 좀 세워봐. 답답해서 마부석에서 바람이라도 쐬야겠어."

진석은 제이스가 원하는대로 바로 마차를 제자리에 세웠다. 마차 안쪽에서 내린 제이스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진석의 옆자리에 올라와 앉았다. 진석은 다시 마차를 출발시켰다.

"심심하면 잠이나 자지 그랬어."

"...이미 좀 잤어."

거기까지만 이어지고 끊어져버리는 대화. 진석은 아무생각 없었지만 제이스는 왠지 안절부절 못하더니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 저기."

"또 왜."

"음... 아니 그러니까..."

자신의 아랫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제이스. 이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어제 내가... 당신이 교단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걸 이야기 해줬었잖아?"

"그런데?"

"그런데라니. 나는 그쪽에 대해 하나도 몰라. 심지어 너나 나나 서로의 이름도 모르고 있다구."

"......"

생각해보니 아직까지 이름을 밝힌 기억이 없다. 한 편이 되기로 하고 몸도 그렇게 섞었거늘 아직까지 통성명도 제대로 안했다니. 물론 진석이야 그녀를 관심 NPC로 등록해서 이름과 스테이터스 확인은 물론 무슨 능력을 지녔는지까지 파악했지만, 그건 플레이어로서 일방적으로 정보를 확인한것 뿐. 앞으로의 진행을 위해서라도 늦었지만 통성명 정도는 제대로 나눠야했다.

"워낙 정신 없이 이래저래 흘러가다보니 생각도 못하고 있었네. 나는 러셀 헤이든. 러셀이라고 부르면 돼."

"러셀 헤이든... 이라. 나는 제이스 스콧필드. 보통 수하로 부리는 떨거지들 앞에선 데이나라는 가명을 주로 쓰지만 뭐 당신은 교단에 합류하기로 했으니... 트, 특별히 제시라고 불러도 좋아."

제시가 그녀의 별칭인 모양이었다.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이스. 아니, 제시. 내 이야기가 듣고 싶어?"

"그거야 당연히 들었으면 싶지. 어쨌든 한 배를 타기로 했잖아? 그러니 동료가 어떤 사람인가 정도는 파악을 해야하지 않겠어?"

일리가 있는 말이다. 진석은 잠깐 뜸을 들여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어차피 게임 상 시간으록 고작 며칠전에 이 세계에 진입한 몸. 나는 플레이어고 너는 일개 NPC에 불과해! 라고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해버릴수는 없는거니 속여넘기기 위해 적당히 둘러댈 과거사가 필요했다. 생각을 정리하는 진석의 침묵이 길어지자, 혹 자신의 과거사를 밝히기 싫어하는 것으로 오해한 제이스가 난감해하는 기색을 띄웠다.

"아니 뭐... 정 이야기 하고 싶지 않으면..."

"...그건 아니고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할지 생각을 정리하느라. 후우, 뭐 그래. 나는 북부 출신이야."

제이스는 어제 진석이 자신을 협박할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 중에서도 군견에 관한 내용을 상기하며 역시 이 남자는 북부 출신 무관이었구나 하며 자신의 추측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그녀는 계속되는 진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자라난곳은... 그래 거기도 교단이라고 부를만한 곳이었지."

"...!"

"하지만 워낙 어릴때라 그닥 떠오르는건 없어. 그나마 희미한 기억속에 남아있는건 그냥 그곳이 교단같은 곳이었다는 것 뿐."

"그리고?"

적당히 지어낸 이야기건만, 제이스는 의외의 과거에 흥미가 동하는지 다음 이야기를 채근했다. 진석은 생각외로 속내가 훤히 드러나는 타입이었구만 하고 생각하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어느날 갑자기 군대인지 뭔지, 병사들이라고 생각되는 집단에게 공격을 받았어. 사람들이 다 죽고 건물은 활활 불타고... 뭐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희미한 것도 있지만 어린나이엔 꽤 충격이었던지 솔직히 그때의 기억은 뒤죽박죽이야. 아마도... 부모님이었던것 같은 여자가 뭔가 부상을 입었던지 피를 엄청 흘리면서도 필사적으로 날 안고 달려 숲으로 겨우 도망치게 해줬지."

"......"

"그 다음은 어떻게 된건지 기억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 허나 뭐 이후엔 나 혼자였던걸 보면... 그 희생덕에 나만큼은 어찌어찌 혼자서라도 살아 남았은거겠지. 아무튼 정처없이 헤메다 하멜뷔에른 왕국의 울드라는 도시에서 거지패들에게 주워져 구걸로 연명하다가... 조금 머리가 커지고 나선 어느 변두리 주점의 잡일꾼으로 들어갔지. 도적길드가 운영하는 곳이었어."

지도상 하멜뷔에른 왕국은 현재 여기서 가장 멀리 떨어진 대륙 최북단의 나라다. 대륙 맨 남동부에 위치한 그란델 왕국과는 거의 정반대의 위치. 아무리 세가 강한 허신의 교단이라고 해도 전 대륙의 정보나 상황을 통괄하고 있진 않을테니 거짓말을 할거라면 확인이 어려운 멀리 떨어진곳의 이야기를 하는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진석은 지금까지의 플레이에서도 이런식으로 거짓말이나 이야기를 지어내야 할 경우가 많았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적당한 둘러대기에 익숙했다. 잠깐 사이에 막 지어낸 이야기건만, 제이스는 열중한채 대단히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진석은 커험 한 번 헛기침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원래 도적놈들이란게 비겁하고 음험한 놈들이라 그 안에서 신용을 받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어. 가진건 몸뚱아리 하나 뿐이니 뭔 일이건 그냥 닥치고 죽어라 열심히 시키는대로 따랐지. 일삯은 커녕 삼시세끼 찬밥만 겨우 얻어먹으면서도 사시사철 노예나 다름없이 노력했어."

"그... 아, 아냐. 계속해."

제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뭔가 말을 꺼내려다 앗 하며 입을 막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진석.

"...음. 뭐 그러고 몇년을 지내다보니 나도 제법 머리가 커졌어. 목소리도 굵어지고 키도 커지고. 풋내가 풀풀 나긴 했지만 길드에선 그런대로 써먹을 수 있겠다고 판단했던 모양이야. 주점일은 그만두게 하고 도둑의 일에 대해 가르치더라."

진석은 거기까지 말하곤 품에 꽂혀있던 청동단검 두 자루를 척 꺼내보였다. 낡고 지저분했지만, 꽤 세월의 손때가 탄 물건인 것 같아 묘하게도 진석의 이야기에 무게감을 더해줬다. 진석은 청동단검을 빙글빙글 돌리다 다시 차락하고 허리춤에 꽂아넣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도 내심 주점일이나 하며 썩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처음엔 길드의 일원이 되어 그들의 기술을 배운다는게 기분 좋았지만... 왠걸. 그냥 주점일하는게 낫겠다 싶을정도로 힘들더라. 진짜 개처럼 굴리면서 혹독하게 가르치는데 너무 힘들어서 도망치고 싶었던게 한 두번이 아니야. 무슨 도적놈들 주제에 이런 훈련인지 생사람을 잡는건지 모를 짓을 해대는지... 그렇다고 시키는걸 따라가지 못하면 쓰레기 취급하며 두들겨 패는데 맞기도 엄청 많이 맞았고.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버텼나 모르겠네 거참. 뭐 식물학이랑 약학도 그때 좀 배웠고. 야외에서도 필요하면 최소한의 독과 약 정도는 만들 수 있어야 한다나 뭐라나. 아무튼 그렇게 한 1년 개처럼 굴려지니 머릿속에 살기같은게 맴돌더라. 뭐라고 해야되나. 몸이 가장 성장하는 시기에 한계까지 단련을 하니 체력와 근력은 매일매일 부쩍부쩍 늘고... 그렇게 힘들던 훈련도 여유가 느껴지기 시작하니 내 힘과 기술을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도 들고."

"...알지. 뭔지 알 것 같아 그거."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던 제이스는 어째선지 고개까지 끄덕여가며 진석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이렇게까지 성실하게 속아넘어가고 있으니 사기를 치는 있는 진석 입장에서도 왠지 보람이 느껴질 정도였다. 진석이 잠깐 이야기를 멈추고 제이스를 바라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아니 뭐, 우리 수호자로 선발된 네명도 어려서부터 원로들과 대신관님께 쭉 엄한 지도랑 훈련을 받아왔거든. 아무튼 계속 이야기 해봐."

그런 부분에서 멋대로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석의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이놈들이 날 왜 이렇게 혹독하게 가르치나 했더니 암살자로 키우려고 했던 모양이야. 계절이 딱 지금처럼 가을의 초입쯤 되었을때의 어느날, 충분히 가르쳤다 싶었는지 훈련을 중단하고 길드에서 운영하는 창관으로 데려가더라."

"...창관?"

"그래. 거기서 길드의 나름 높은 사람이 여태까지 묵묵히 훈련을 따라준 내 고생을 칭찬하고 어쩌고 저쩌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날 구슬리더군. 술도 잔뜩 먹이고 여자도 실컷 안게 해줬어.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까. 누굴 하나 죽이고 오라며 일을 시키더라고. 길드의 은혜에 보답할 시간이라면서."

"하..."

"그렇다고 그 상황에서 내가 어쩌겠어? 따라야지. 그리고 첫 암살 대상은 굉장히 쉬운 대상이었거든. 내가 속한 도적 길드쪽의 사금융에서 돈을 빌려쓰고 갚지 않은 어떤 상인이었는데, 이놈이 간이 배밖으로 튀어나온게 자기가 도시의 어느 폭력단하고 친분이 있답시곤 그거 하나 믿고 배짱을 튕기며 차일피일 상환일을 미뤄왔더라고. 이자는 커녕 원금도 한 푼도 안 갚으려드니 길드 입장에선 강제로 채무를 받아내야 했지. 핏값으로."

"그 상인을 죽인거야?"

"아니. 그 가족."

씨익 냉혹한 미소를 띄워보이는 진석. 이야기에 빠져들어있던 제이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모습에 캬 이거 나한테 의외로 연기자의 재능이 있는거 아냐? 하며 자아도취에 빠졌다.

"마누라랑 딸만 둘이 있었는데... 이 놈이 가지가지 꼴깝을 떠는게 집 밖에 가족 모르게 첩을 셋이나 만들어놓고 그 첩들 집에서 하루씩 번갈아가며 지내더라고. 그래서 뭐 나는 가장이 지켜주지 않는 집에 손쉽게 들어가 마누라는 죽이고 딸들은 길드로 끌고왔지."

"그 상인은 어떻게 됐어?"

"나도 그 뒤는 자세히는 몰라. 딸 들은 빚 대신 노예시장에 팔렸던가 창관에 넘겨졌던가 한 것 같고... 상인은 그제서야 지 집안이 풍비박살난걸 깨닫고 정신나간놈처럼 길드에 처들어 왔다지만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를 뚝 떼서 쫓아냈다나. 그렇다고 지가 어쩔거야. 내가 워낙 깔끔히 일을 처리한 탓에 증거나 목격자도 하나 없는 상황이고, 애당초 잘못은 돈을 갚지 않은 상인쪽에 있으니 법에 호소를 해서 해결을 볼수도 없고. 실의에 빠져 지내다 결국 운영하던 상회도 쫄딱 망하고 폐인이 됐다던가."

"훗. 그거 마음에 드는 결말이네."

"...그래?"

이야기를 하는데 도취해서 잠깐 잊고 있었다. 눈 앞에 있는 날카로운 인상의 이 붉은 머리 여자, 제이스는 세계를 멸망시키려 드는 사교집단의 주축이라는걸. 그러니까 한 마디로 악당이라는 얘기다. 그러니 모두 행복하게 하하호호하는 동화같은 것보단 이런류의 비참한 결말이 나는 이야기가 구미에 더 맞겠지.

"그래서 그게 끝이야?"

"아니... 아무튼. 그런식으로 몇 번이고 길드에서 시키는대로 암살일을 충실히 행했어. 처음엔 창관에 데려가 싸구려 독주이나 먹이고 인심쓰듯 여자나 좀 안게 해주더니 나중엔 수고비라며 돈도 좀 쥐어주더라고? 보상의 정도가 차츰 커지다 보니 어느샌가 일에 재미마저 느끼기 시작했어. 그렇게 또 한 2년쯤 보냈는데... "

거기까지 말하는데 갑자기 후두둑. 찌뿌둥 하던 하늘에서 한 두 방울씩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 이런."

"갑자기 비라니... 아 저기. 저쪽으로 가자."

제이스는 가도에서 약간 떨어진곳에 제법 큰 나무가 몇 그루 자라있는 곳을 가르켰다. 저기라면 말들이 대충이나마 비를 피할 수 있겠다 싶었다. 뭐 사람이야 마차 안으로 들어가면 되니까. 진석은 서둘러 나무 아래에 마차를 대고 말들의 고삐를 묶은 다음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사이 비가 제법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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