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 -- > * 20화 *
"어서옵쇼~ 어서옵쇼! 페레나 최고의 무구들임다!"
여러곳의 장비점을 슥 눈으로만 둘러보며 설렁설렁 돌아다니던 진석. 게중 한 가게앞에서 왠 여자점원이 열심히 호객을 하고 있길래 호기심이 들어 다가가봤다. 키는 좀 작았지만 짧은 숏컷에 그을린 피부가 인상적인 건강미 넘치는 소녀였다. 가게 이름이 들어간 앞치마를 두르고 지나다니는 사람들 상대로 크게 팔을 흔들어 보이며 자신 가게의 물건이 최고임을 몇 번이나 강조해 외치고 있었다.
"참 기운넘치네."
"앗, 손님이심까? 헤헤! 저야 기운빼면 시체라서요! 뭐가 필요하심까?"
점원 소녀는 무심코 중얼거린 진석의 혼잣말에도 싹싹하게 반응하며 응대해왔다. 진석은 속으로 어린애가 붙임성이 좋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안내를 따라 가게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엔 생각외로 꽤나 많은 종류의 무구가 진열되어 있었다.
"단검을 보고 싶은데."
"단검 말씀이심까~ 음! 단검 좋지요! 특별히 필요하신 종류나 재질을 일러주시면 추천해 드릴 수도 있는데. 물론 손님 예산에 맞춰서도 권해드릴 수 있슴다."
단순히 기운만 넘치는 줄 알았더니 말하는 투가 제법 손님을 많이 상대해본 태도다. 진석은 허리춤에 달린 자신의 돈주머니를 슬쩍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예산은 충분하니 좋은걸로 볼 수 있을까?"
"오옷, 이거이거 씀씀이가 훌륭하신 손님이 오셨슴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저희 가게에서 가장 좋은 물건을 가져오겠슴다!"
척하고 무슨 경례라도 하듯 이마에 손을 붙여보이더니 쪼로로 가게의 창고 안쪽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소녀. 어미를 음다~ 슴다~ 로 끊는 미묘한 말투나 행동거지가 제법 귀엽게 느껴졌다. 진석이 잠시 가게 안에 진열된 여러 물건을 구경하고 있자니,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점원 소녀가 작은 나무상자 몇 개를 안은 채 달려나왔다.
"기다리셨슴다~ 자, 여기. 한 번 둘러보시죠!"
소녀가 가져와 카운터에 늘어놓은 상자는 총 세 개였다. 진석은 우선 맨 오른쪽의 상자부터 열어보았다. 흑철로 된 유선형의 평범한 단검이었다. 정확한 수치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집어들고 무기의 정보창을 띄워보았다.
- 흑철단검
공격력 : 18 + (4)
설명 : 우수한 광물인 흑철로 단조한 단검. 날카롭게 벼려져 있다.
특징 : [내구높음], [날카로움]
특징이 두 가지 붙어있었다. 내구높음이야 뭐 이름 그대로. 전에 쓰던 강철단검에도 이게 붙어있었다. 제이스의 홍염탄을 맞고 박살나긴 했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홍염탄만큼 강력한 마법이라도 내구높음이 붙어있었던 덕에 막아낼 수 있던것이다. 그리고 날카로움은 공격력에 약간의 추가데미지를 더하는 옵션이었다. 공격력에 표시된 (4), 바로 이것이 날카로움의 옵션이었는데 기본 공격력인 18에 1~4 사이의 랜덤한 데미지를 추가로 더 준다는 의미였다. 즉 이 단검은 최소 19, 최대 22의 공격력을 지닌다는 의미였다. 뭐 마법이나 특수능력이 붙은 무기는 아니었지만 평범한 가게의 물건치곤 상당히 괜찮았다.
"이거 괜찮네. 일단 이걸 사기로 하고 다음은..."
손에 쥔 흑철단검을 내려놓고 가운데의 상자를 열어보았다. 쉘 가드가 손잡이를 감싸고 있는 망고슈였는데, 검날에서 미묘하게 보라색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직접 집어들고 성능을 확인해 보았다.
- 불행의 망고슈
공격력 : 16 + (3)
방어력 : 2
설명 : 방어용 단검인 망고슈. 이전 사용자의 원혼이 남아있어 사용하는 자가 점차 불행해진다. 날카롭게 벼려져 있다.
특징 : [불행], [날카로움]
뭐야 이건? 검날에서 이채가 돌아서 뭔가 좋은건가 했더니 불행 옵션이 붙은 무기잖아? 운이 나빠지는 옵션엔 불운과 불행, 저주받음 세 가지가 있는데... 불운이 길가다 넘어지는 정도의 가벼운 종류라면 불행은 지나가는 마차에 치이거나 건물 아래를 걷다 화분에 머리를 맞는 심각한 수준이고 저주받음은 헛것이 보이며 환청이 들리는가 하면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을수도 있는 수준의 목숨이 위험한 단계다. 이런건 공짜로 줘도 안 가진다! 진석은 미간을 구기며 망고슈를 집어놓고 상자를 닫아버렸다. 옆에 서서 날 지켜보던 점원 소녀는 진석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엇, 그건 맘에 안드심까?"
"맘에 들고 말고 이건 버리던가 녹여서 다른 무기를 만드는게 나을걸. 원혼이 붙은 무기다."
"으에엣! 저, 정말임까? 으... 아니, 그러고보니 어째 짚이는게 없는것도 아닌데..."
"...뭐?"
"아니 전에 그걸 사갔던 손님이 어째 이걸 사고 나선 되는일이 없다며 팔다리가 한짝씩 부러진채 투덜거리며 반품을 해왔... 읍."
실언을 했다는걸 깨닫곤 깜짝놀라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소녀. 진석은 씨익 웃어보이며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런걸 알면서도 이걸 나한테 팔려고 했단 말이지?"
"...아! 아하! 하하하하! 소, 손님 무기 보시는 눈이 참 훌륭하심다! 그보다 마지막 물건을 한 번 보시죠! 이건 맘에 드실검다!"
능청스럽게 화제를 돌리는 소녀. 한 대 쥐어 박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긴 했지만 어쩌겠나, 어른인 내가 참아야지. 어차피 얘는 장사꾼 아닌가. 팔 수 있는거라면 뭐든 팔아야할테니. 진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 상자를 열어보았다. 날이 뾰족 솟아있어 얼핏 송곳처럼 보이는 런들 대거였다. 손잡이가 상아로 되어있고 마감이 고급스러운게 한 눈에도 비싸보였다.
- 백의 런들 대거, 포님
공격력 : 29
설명 : 찌르기에 용이한 송곳과 같은 형태의 단검. 완성도가 높아보인다. 성스러운 기운이 느껴진다. 더 나은 데미지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소유자의 기품이 올라갈듯 하다.
특징 : [완성도 높음], [성속성], [회심율 상승], [매력+1]
진석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거야 이거! 세번째 상자야말로 꽤 좋은 무기였다. '포님'이라는 고유의 이름이 붙은 무기인데다가 좋은 옵션이 네 가지나 달려있었다. 완성도 높음은 말 그대로 무기의 기본 성능을 올려주는 옵션. 원래 평범한 단검의 공격력은 10 전후. 지금 지닌 청동단검은 달랑 5밖에 안되니 얼마나 낡고 허름한 상태인지 알 수 있으리라. 질 좋은 단검이라고 해도 공격력이 20 선에서 왔다갔다 하는데 이건 무려 29! 단검 주제에 여느 장검 수준의 공격력이었다. 그리고 두번째 붙은 옵션은 성속성. 이 속성이 붙은 이상 유령이나 악마 계열의 적에게 추가 데미지를 줄 수 있을터였다. 뭐 평범한 군주나 장수 플레이에선 특별히 그런 적들을 상대할 일이 없었지만 지금은 방랑자 플레이에다가 사교집단에 입단하러 들어가는 길이다 보니 만에 하나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세번째는 회심율 상승. 공격이 더 치명적으로 적용할 확률이 올라가는 옵션이다. 안 그래도 해부학 덕에 회심율에 보정을 받고 있었으니 이 무기라면 크리티컬을 낼 확률이 더더욱 상승! 마지막은 매력+1이었다. 이거야 뭐 설명할 필요없이 스테이터스를 그만큼 올려준다는 뜻.
'뭐 성속성이나 매력+1 대신 내구높음이 붙어있으면 더 좋았을텐데... 리베라에선 달리 무기의 내구도가 표시 되지 않으니 험하게 쓰다간 언제 그 수명이 다 할지 모른다는게 참... 에이, 아니지 아니야. 그래도 이 정도도 어디냐.'
귀족급의 재력을 지니고 있으면 귀한 아이템을 경매로 구입 할 수 있는 옥션을 찾아 좋은 아이템들을 마구 구입할 수도 있을테지만 그냥 길거리 상점에서 살 수 있는 물건 치곤 이것도 엄청나게 좋은편이었다. 진석은 첫번째와 세번째 단검 상자를 골라 계산대 쪽에 놓았다.
"좋아. 이거 두 개 사지. 아 그리고 투척용으로 쓸만한 단검들 있을까? 투척용으로 쓸건 대충 싸구려라도 상관없으니까 알아서 적당한 걸로."
"옙! 가져다 드리겠슴다! 손님 통이 크신게 남자 답슴다!"
점원 소녀는 아부를 떨며 가게 한 쪽 구석에서 단검이 잔뜩 들어있던 나무상자를 들고왔다. 이것들은 그야말로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낮은 단검들. 잔뜩 쌓아놓고 벌크 제품마냥 대충 헐값에 파는 싸구려 무기였다. 진석은 그나마 게중에서 괜찮아보이는걸 적당히 열 자루쯤 추렸다. 전투용 벨트에 최대한 꽂을 수 있는 단검의 수는 총 여덟 자루. 메인 무기로 쓸 흑철단검과 런들 대거 포님 이 두 자루는 뽑기 쉬운 맨 앞에, 나머지 여섯은 상황을 봐가며 투척용으로 쓸 생각이었다.
'투척 기술은 없지만... 바일리 델 비엔토도 있고 뭐 무력이 워낙 높아놓으니 근거리에서는 그럭저럭 써먹을 수 있을거란 말이지.'
스킬중엔 물건을 던질때의 속도와 정확성을 비약적으로 올려주는 투척 스킬도 있었다. 허나 처음 캐릭터 생성시 선택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 바일리 델 비엔토의 덕으로 단검을 다룰땐 상당한 보정을 받고 있으니 그런대로 무력에 의존하여 던지는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리베라는 특정 행위를 반복 숙달하면 스킬을 익히거나 향상시킬 수 있는 게임. 단검도 많이 던지다보면 언젠가 저절로 투척 스킬을 익힐 수 있을것이 분명했다. 무기 선택을 마친 진석은 점원 소녀에게 방어구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리고 뭔가 가벼운 방어구 없을까?"
"가벼운... 방어구 말임까? 흐음. 잠시만 기다려 보십쇼!"
소녀는 잠시 생각을 하나 싶더니 또 다시 안쪽으로 쪼르르 들어가 버렸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그녀는 머리에 희끗희끗 새치가 잔뜩 난 중년남자를 데리고 나왔다. 전체적으로 서글서글한 생김새에 가벼운 미소를 띄고 있는게 참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딸애한테 들었는데 가벼운 방어구를 찾으신다구요."
부녀가 하는 가게였군. 아버지가 가게 주인, 딸은 점원이었던건가. 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리고 가능한 움직이는데 불편하거나 방해가 되지 않는걸로."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주인은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 가서 쌓여있는 물건들을 잠시 뒤적거리더니 나무 상자 두 개를 안아들고 걸어나왔다.
"이런건 어떨까요? 한 번 보시죠."
주인은 상자 두 개를 한꺼번에 열고 안의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우측엔 가죽제로 보이는 각반 같은게 들어있었고, 좌측은 굉장히 굵은 직물로 짜여진 런닝 셔츠 같은것이 들어있었다. 진석은 우선 우측의 물건을 확인해봤다.
"팔과 다리에 착용 가능한 가죽 토시와 각반입니다. 달리 특별한 손질이 된 건 아니라 썩 높은 방어력을 기대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피해는 막을 수 있겠지요."
가죽이 가볍고 질기긴 했는데 그냥 팔다리에 가죽 한 겹 덧대는 정도라 정말 방어력 면에선 큰 기대를 할 순 없을 것 같았다. 토시와 각반을 내려놓고 좌측의 셔츠를 살펴 보았다.
"서부 사막 동굴 깊은곳에 서식한다는 붉은 메갈롯 거미의 거미줄을 가공해서 짠 셔츠입니다. 붉은 메갈롯 거미의 거미줄은 가볍지만 철사수준의 강도를 자랑하죠. 옷 안쪽에 내의처럼 입으셔도 됩니다."
- 붉은 메갈롯 거미 셔츠
방어력 : 24
설명 : 서부 사막 동굴에 서식하는 붉은 메갈롯 거미의 거미줄로 만든 튼튼한 셔츠. 매우 가볍다. 단, 불에 타기 쉽다.
특징 : [경량], [불에 약함]
일반적인 정규병이 걸치는 방어구는 가죽 갑옷 세트. 투구와 부츠는 제하고 몸통 갑옷만 보면 보통 20 초중반의 방어력이 나온다. 내의로 입어도 되는 이 가벼운 셔츠가 그 수준의 방어력을 갖추고 있다니 분명 좋은 물건이긴 하다. 안타까운건 불에 약함 특징이 달려있다는 것. 설명대로 인화물질에 닿게 되면 순식간에 타버릴 것이다. 불은 여러모로 흔한 공격수단이라 좀 꺼려지긴 하는데... 그래도 경량 옵션 덕에 지금도 손에 든듯 만듯한 가벼움을 자랑하는데다 방어력도 괜찮은편이다. 진석이 잠시 서서 고민하자 주인 사내가 사람 좋은 미소를 띄며 말했다.
"안 그래도 모처럼 물건을 많이 팔아주신 손님이니, 이 셔츠를 사신다면 좀 저렴하게 드리겠습니다."
"...아빠! 또!"
그 뒤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작은 목소리로 화를 내는 딸내미. 안 그래도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이다 싶었는데 그 인상에 걸맞게 손님들에게 물건을 싸게 팔아대는 모양인가보다. 진석은 싸게 해준다는 말에 바로 구입을 결정했다.
"그럼 토시랑 각반은 됐고, 이 셔츠는 같이 계산해주시죠."
"네네! 거기까지! 계산은 제가 하겠슴다! 아빠는 들어가주세요."
계산대로 향하는 자기 아버지의 등을 안쪽으로 떠다미는 소녀. 하지만 아버지쪽은 그런 딸의 행동이 귀엽다는듯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주곤 본인이 계산대에 서서 진석이 구입한 물건값을 셈하기 시작했다. 딸이 옆에서 아빠! 하면서 뭐라뭐라 항의의 소리를 냈지만 사람좋게 허허 웃으며 무시할 뿐이었다. 진석은 그 광경에 피식 웃으며 딸내미가 고생이구만 하고 생각했다.
"4골드 5실버만 주시죠."
옆에 있던 딸이 아버지가 제시한 금액을 듣곤 노골적으로 울상을 지었다. 단검을 열 두자루나 산데다가 셔츠까지 사서 셈이 어떻게 되는진 정확히 모르겠지만 딸의 표정을 보아하니 어지간히 싸게 팔아주는 모양이었다. 진석은 흔쾌히 계산을 치르고 가게를 나왔다.
무기와 방어구를 구입한 진석은 잡화점과 약초가게를 들렀다 여관으로 돌아왔다. 잡화점에선 평상복 두어벌과 육포와 건량을 사서 보충했고 약초가게에선 평범한 약의 재료들과 더불어 미약의 재료, 그리고 제조키트를 하나 더 구입했다. 예전 에나에게 성감을 높여주는 아우그멘을 쓰기 위해 약초를 샀을때는 소지금이 넉넉하지 못해 한 번 만들 정도만 샀었지만 이번엔 돈이 남아도는 만큼 아주 두고두고 쓸 정도로 왕창 구입했다. 에나에게 아우그멘 반 병만을 쓰고도 하룻밤새 육욕의 포로로 만들었을 정도인데, 작정하고 왕창 써버리면 과연 어떻게 될까? 진석은 제이스를 괴롭힐 생각에 왠지 신이 났다.
'뭐 이것도 다 에나를 위한 복수의 일환이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며 두 개의 제조키트로 아우그멘의 제조를 시작한 진석. 한 번 제조에 두 시간이 걸리는 아우그멘이었지만 저녁무렵이 될때까지 모두 두 번의 제조를 완료, 합계 4병의 아우그멘을 만들 수 있었다. 아우그멘을 만드는 4시간 동안엔 짐 정리를 하고 화염화살의 숙달을 계속했다. 아우그멘을 완성한 뒤 한 쪽의 제조키트로는 섭취형 흥분제인 페르모티오를, 다른 한 쪽으론 간단한 라벤더 향 입욕제를 만들었다. 페르모티오와 입욕제를 막 완성하고 나니 문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누구?"
"누구긴 누구야. 나야."
약간 퉁명스런 목소리. 제이스였다. 진석은 방 안의 상황을 보여줄 수 없다는 생각에 그녀를 방으로 들이지 않고 자신이 먼저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왜?"
"왜긴, 저녁때잖아. 밑에서 물어보니까 아직 밥 안 먹었다고 하던데?"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러고보니 쇼핑을 마치고 돌아와 거의 다섯시간여를 방에 틀어박혀 미약만 만들어대고 있었다. 제이스가 진석의 어깨너머로 슬쩍 방쪽을 들여다보려고 하며 킁킁거렸다.
"그보다 뭔가... 희안한 냄새가 나는데? 안에서 뭘 하고 있었던거야?"
"아니 뭐 새로운 약을 만드는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잘 안되서."
"흐응... 아무튼 정리하고 내려와. 대충 주문은 해놨으니까. 나도 이 구질구질한 옷 갈아입고 내려갈테니. 얼른 식사를 하고 뜨거운 물에 몸 좀 담궈야겠어."
그러고보니 손에 뭔가 쇼핑백 같은걸 잔뜩 들고 있다. 용무를 보고 오는 길에 옷이나 신발 따윌 사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진석은 고개를 끄덕이곤 제이스가 방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곤 헐레벌떡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이런! 식사주문을 해놓다니 깜찍한 짓을. 내가 먼저 손을 써서 이것부터 먹이려고 했는데.'
진석은 갓 완성한 페르모티오와 입욕제, 아우그멘 두 병을 들고 후닥닥 방을 빠져나가 1층으로 내려갔다. 여관은 2층이 숙박실, 1층은 식당과 주방, 주인과 종업원의 방이 있었고 지하가 욕탕이었는데, 시간이 저녁인지라 1층의 식당에 다른 손님들이 꽤 자리를 채운채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진석은 주방과 홀을 오가는 여관주인을 찾아 붙잡곤 무작정 한쪽 구석으로 끌고갔다.
"무, 무슨 일이시죠?"
당황하는 여관주인에게 누가 볼새라 조심스레 미약들을 내미는 진석. 여관주인은 이게 뭔가 싶어 아무말도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진석을 바라보았다. 진석은 목소리를 최대한 죽인채 속삭였다.
"위험한 물건은 아닙니다. 내 일행 여자 잘 알고있죠?"
여관주인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석은 미약병들과 함께 금화 한닢을 꺼내 그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이 투명한건 그녀의 식사나 마실거리에 섞으세요. 그리고 이 보라색 나는건 입욕제. 분홍빛 약과 함께 섞어 그녀가 쓸 욕조에 부어주면 됩니다. 말했다시피 위험한건 아니고... 뭐 그냥 그녀랑 사이가 좀 좋아지고 싶어서 이러는거니까, 같은 남자로서 이해하시겠죠?"
여관주인은 입 밖에 내진 못했지만 진석을 '아이고~ 이런 밝히는 놈!'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손님을 대하는 여관의 주인인만큼 이게 무슨 약이고 무슨 의도로 말한건지 충분히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여관주인은 금화와 약병을 받아 품에 집어넣곤 조금 걱정스런 어투로 물었다.
"그런데... 도와드린걸로 후환은 없겠죠?"
"그거야 뭐, 내일 아침에 그녀가 여기서 자기 발로 걸어나 갈 수 있을지나 모르겠는데요."
"...큭큭. 하긴 뭐 저도 일개 여관의 주인일 뿐입니다만, 평소 대놓고 아랫사람 취급하던 그 뻣뻣한 태도가 솔직히 기분나쁘기는 했던지라... 잘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얘길 마치고 여관주인이 주방안쪽으로 모습을 감추자마자 옷을 갈아입은 제이스가 식당으로 들어섰다. 제이스가 조금만 빨랐더라도 둘이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곤 괜한 의심을 샀을지도 몰랐는데 타이밍이 적절했다. 진석은 적당히 빈 자리에 앉으며 제이스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제이스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흥. 남자라면 의자쯤은 빼주지 그래."
"뭔 소리야.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딱히 데이트라도 하는것도 아니고."
"됐다. 말을 한 내가 바보지. 그보다 낮엔 뭘 했어? 계속 틀어박혀 약만 만들어댄거야?"
"무슨 사람을 아편굴 중독자 처럼 말하냐? 뭐 이것저것 쇼핑 좀 했지."
"옷이라도 산거야?"
"옷 따위... 는 사긴 샀구나. 잡화점에서 평상복을 산거지만."
"하앙~? 참나. 러프야드에서 옷 고를때부터 알아봤다니깐. 페레나에는 중심가 쪽에 꽤 괜찮은 옷을 취급하는 가게들이 있는데."
"옷이야 뭐 대충 아무거나 입으면 어때. 잡화점표 옷도 좋기만 하구만."
"그래도 원판은 나쁘지 않으면서 통 꾸밀줄도 모르는구나."
"...내가 원판이 괜찮아? 음. 하긴. 내가 좀 잘생겼지."
"입이 문제지. 멀끔하게 생겨서 바보같은 소리나 하고 있으니 진짜 바보같이 보이는거야."
그런식으로 주거니 받거니 한담을 나누고 있자니 여관주인이 금세 술과 음식을 내왔다. 제이스에겐 보이지 않게 진석을 향해 살짝 윙크를 해보이며 과실주 병을 가르키는 여관주인. 진석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스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과실주를 잔에 따라 마셨다.
"넌 안 마셔? 이거 향이 좋은데."
"아니 난 그런 달달한 술은 별로. 나는 맥주나 마실까. 저기, 맥주 좀 가져다주세요."
"알겠습니다."
여관주인과 진석의 의도를 모르는 제이스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며 잔을 입에 가져갔다. 하지만 과실주를 몇 모금 들이키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는 제이스.
"...여기 들를때마다 자주 마시던건데 어째 오늘 술은 맛이 좀..."
이런이런, 눈치채면 안되지. 진석은 테이블을 탁 치며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뭐야. 나 같은놈하고 겸상하고 있으니 술맛도 안난다는 비아냥이야?"
"엥? 무슨 소리야. 그냥 오늘은 진짜 술맛이 뭔가 미묘해서..."
"에이 정말! 알았어. 자, 받아!"
과실주 병을 들더니 막무가내로 제이스의 잔을 가득 채우는 진석. 제이스가 너 지금 뭐하는거냐는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진석은 병을 내려놓곤 되려 기분나쁘다는 태도로 말했다.
"왜, 내가 주는 술은 못 받겠다는거야?"
"아니 어째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데?"
그때 여관주인이 주방에서 나와 진석의 앞에 맛나 보이는 거품이 넘실거리는 맥주잔을 내려놓고 돌아갔다. 진석은 잘됐다는듯 맥주잔을 들어보이며 제이스의 앞에 내밀었다.
"자자. 그럼 화해주라고 생각하고 건배라도 하자고."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주제에 좀 전부터 뭔놈의 태도가 취한 사람마냥 엉망이야 너."
이크. 너무 나갔나 보다. 적당히 해야지. 진석은 태연함을 가장하며 잔을 부딪히고 맥주를 마셨다. 제이스도 한 숨을 쉬더니 잔에 가득 담긴 술을 들이켰다. 그렇게 식사 시간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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