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 -- > * 21화 *
여관의 욕탕은 진석의 생각보다 잘 갖추어져 있었다. 일반적인 목욕탕처럼 다인용 욕탕과 씻을 수 있는 수도 시설이 구비되어 있었는데, 남들과 함께 욕탕을 쓰고 싶지 않은 예민한 사람을 위해 약간의 추가요금을 내고 1인용 욕조가 있는 작은 개인 욕탕을 빌려 쓸 수도 있었다. 제이스는 당연히 개인 욕탕을 이용했다. 오늘은 왠일인지 평소엔 없던 라벤더 향 입욕제 서비스까지 해주길래, 제이스는 평소보다 오래 욕조에 몸을 뉘이고 피로를 풀었다. 그런데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시간이 좀 지나자 뭔가 이상해지는것을 느꼈다. 전신의 피부가 간지러워지나 싶더니 어디에 살짝만 닿아도 이상할정도로 민감하게 느껴진것이다. 게다가 아까 식사를 마친뒤부터 은근히 치솟아 오르던 그쪽의 욕구까지. 이 두가지가 합쳐지니 제이스로선 미칠지경이었다. 대체 내 몸이 왜 이러는거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비틀비틀 간신히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으... 아으... 입욕제가 뭔가 잘못된거 아냐...?"
이전에도 이 욕실을 이용했었지만 이런적은 없었다. 달라진거라면 뜬금없는 입욕제 서비스 뿐. 망할 여관주인놈, 도대체 욕탕에 뭘 풀어놓은거야? 제이스는 뿌득 이를 갈며 욕조에서 힘겹게 빠져나왔다. 벽을 짚는 손이나 바닥을 딛는 발. 그 모두가 민감한 자극이 되어 제이스를 괴롭게 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옷을 입은 뒤 2층까지 올라가야 할텐데, 손이나 발을 디딘것 만으로도 이 정도 자극이 밀려드니 도무지 방까지 돌아갈 일이 엄두가 안났다. 후들거리던 그녀는 바닥의 물기에 아앗 하며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엉덩방아를 찧자 상상을 초월하는 자극이 척추를 타고 번개처럼 뇌를 관통했다.
"히야... 악!"
한 순간에 가볍게 가버렸다. 음부에서 찔끔찔끔 애액이 흘러나왔다. 넘어져 엉덩이를 바닥에 찧은 충격만으로 가버리다니. 말도 안되는 상황에 머리속이 엉크러졌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를 상황이었다. 주저앉아 힘겹게 숨을 몰아쉬던 그녀의 손이 자신의 다리 사이로 향했다.
'이게 다... 그놈때문이야!'
제이스는 진석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쩌다보니, 그야말로 어쩌다보니 자신이 교단의 동료로 끌어들인 사내. 만난지 채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벌써 셀 수도 없이 자신과 몸을 겹친 남자.
"으읏... 핫."
숲에서의 밤. 자신의 필사적인 설득 후 합의하에 나눈 섹스보다, 비오던 평원에서 그의 과거를 듣고 난 뒤에 했던 섹스보다, 좁은 마부석에서 짐승처럼 강제로 범해지던 섹스가 떠올랐다. 몇 번이나 구타당하고 이러다 죽는게 아닐까 싶을정도로 힘들었던 강간이었을 뿐인데도... 어째선가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눈꼽만큼의 자비도 없이 자신을 죽일듯 찔러대던 남자의 분신.
'어째서... 그딴 남자... 대신관님께 데려가 교단을 위한 장기말로 부릴 생각인데...'
머리속에선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그렇다. 이것은 분명 호감이었다. 첫 만남부터가 서로의 목숨을 뺏으려드는 최악의 형태였고 심지어 자신은 그의 애인마저 죽였거늘. 아무리 자신이 그를 설득해 교단으로 데려가는 상황이라고다고 해도, 서로를 믿는 조건으로 섹스를 몇 번 나누었다고 해도, 이런 호감을 느낄 수 있는 관계가 아닐텐데. 이게 말이 되는가? 대체 이 기분은 뭐란 말인가.
'왜... 러셀... 그 남자의 하나하나가 신경쓰이는건지...'
제이스의 손놀림이 점차 거칠어졌다. 멈출수가 없었다. 별 요령도 없이 클리토리스를 문질거리고 있을 뿐인데도 머릿속이 저릿저릿한게 이런 쾌감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몸에 무슨일이 일어난건지 알 수 없었음에도 강렬한 쾌락엔 거부할 수 없어 그저 흘러가는대로 몸을 맡길수밖에 없었다. 이내 마지막 스퍼트. 빠르게 움직이던 그녀의 손가락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머릿속에서 불꽃놀이같이 터져나가는 최고조의 희열감. 제이스는 두 눈을 꾹 감은채 절정에 달했다.
"아아아...! 핫, 하아...!"
새된 한 숨이 흘러나온다. 절정의 쾌감이 강물에 흘러가듯 순식간에 사라지고 또 다시 굶주림같은 흥분감이 샘솟는다. 이걸론 부족하다. 스스로 하는 자위 따위론 불처럼 달아오른 몸을 식힐 수 없었다. 어쩜 좋단 말인가.
"...러셀..."
자신도 모르게 아주 작게 그 남자의 이름을 부르는 제이스. 당장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그의 지칠줄 모르는 왕성한 성욕이라면 틀림없이 자신이 진정될때까지 상대해 줄 수 있을텐데. 하지만 이곳은 여자 목욕탕. 그것도 개인 욕실이었다. 아무리 불러도 그가 나타날 일은 없으리. 그런데-
"왜. 도와줄까?"
"?!"
깜짝놀라 눈을 뜨고 고개를 드는 제이스. 눈 앞엔 그 남자가 태연한 모습으로 문을 연채 서있었다. 제이스는 하도 당황스러워 입을 꿈뻑거렸다.
"너... 너어..."
"뭘 너어~ 야. 사람을 불러놓고."
혼자서 자기도 모르게 낸 말이었는데 그걸 어떻게 듣고 온단 말인가? 하물며 여긴 여자 목욕탕이다. 즉 이 남자는 자신이 이렇게 될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도, 도대체... 무슨짓을 한거야?"
아우그멘 쓸때마다 받는 질문이군. 뭐 겨우 두번째긴 하지만. 진석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개인 욕실의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여관주인에겐 이미 금화 몇 닢을 더 쥐어주고 아무도 여탕의 출입을 하지 못하도록 부탁했다. 손님들은 여탕의 수도가 고장났다는 여관주인의 알림에, 성별에 따라 각기 시간을 나누어 남탕을 번갈아가며 사용하고 있었다. 지금 여탕엔 단 둘 뿐이었다.
"글쎄? 내가 뭘 했다고."
"으... 거짓말... 분명 네가 무슨 짓을..."
제이스의 말은 신경쓰지도 않고 훌훌 옷을 벗어 제끼는 그. 하는짓을 보니 백퍼센트 확실하다. 이런 상황이 될 줄 알았다는 듯 너무나 자연스러운 태도가 아닌가? 그러고보니 그 라벤더 향 입욕제. 평소엔 없던 서비스가 뜬금없이 오늘 제공되었다. 그 욕조에 몸을 담근 이후 자신의 몸이 이상해졌으니 틀림없이 그게 원인이라고 보는게 맞을터. 게다가 이 남자는 아까 저녁먹으라는 말을 하기 위해 방에 들렀을때 분명 안에서 약인지 뭔지를 만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네가... 입욕제를 만들어서... 여관주인에게...?"
"웃. 똑똑하네. 정답입니다! 문제를 풀었으니 상을 줘야겠지?"
바닥에 큼직한 수건을 깔더니 제이스를 번쩍 안아 그 위에 앉히는 진석. 지금의 제이스에겐 진석이 자신의 몸을 드는 감각마저 강렬한 자극이 되어 하악 학 하고 거친 호흡을 토했다.
"하, 하지마...!"
"그래? 그럼 나 그냥 나갈까? 혼자 여기서 밤새 자위나 하고 있을래? 애타게 내 이름 부르면서?"
히죽히죽 심술맞게 웃으며 그런 질문을 던지는 눈 앞의 사내. 당했다. 완전히 놈이 쳐놓은 덫에 걸려버렸다. 하지만 속았다는걸 알면서도... 어째선지 싫지 않았다. 바보같으니. 그래, 이 남자는 바보다. 이런짓 하지 않아도 원한다면 잠자리 따위 같이 해줬을텐데. 세상엔 섹스에 큰 의미를 두는 사람도 많지만 제이스에게 섹스따윈 별게 아니었다. 그저 필요에 의해서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행위일 뿐. 그녀는 교단에서 교육을 받을때부터 동료라 할 수 있는 다른 수호자들과의 관계를 가져봤다. 서로 사랑했다거나 하는것은 아니었다. 동료들과의 성교조차 대신관님이 가르쳐준 교육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눈 앞의 남자는 이미 자신과 몇 번이나 섹스를 한 사이가 아니었던가? 남자들은 한 번 관계를 맺은 대상에겐 비교적 흥미가 떨어지는게 사실일텐데. 왜 이렇게 까지 하는걸까. 대체 왜 일까. 아까 낮에 자신이 조금 쌀쌀맞게 던진 한 마디 때문일까? 그래서 이런짓을 한걸까?
"......"
제이스는 러셀이 자신을 위아래로 훑는 욕망에 찬 시선을 느꼈다. 그렇다. 저 남자는 지금 자신을 이런 상황으로 몰아놓곤 패배선언을 듣고 싶은것이 분명했다. 그래, 그것이 확실했다. 결국 자신이 해달라고 애원하는 그런 말이 듣고 싶은걸테지... 하찮은 정복욕이다. 참 이상했다. 저 남자와 엮이면서부터 한 번도 자신이 상황의 주도권을 쥐지 못했다. 데오그라즈의 호텔에서도 무사히 목표물을 되찾는듯 했으니 결국 기절해서 붙잡혔고, 숲에선 탈출을 시도하다가 힘으로 밀려 능욕당했다. 이후 설득에 성공해 겨우 자신이 그를 이끄는 입장이 되는가 했는데 어째선가 계속 상대의 욕망만 채워주고 있을뿐이다. 이러다보니 어디서부터 잘못된건지도 모르겠다. 저 남자는 이런짓까지 해가면서 날 굴복시키고 싶은건가? 어째서? 어차피 헤세스모데우스님이 강림할 세계, 이런 육욕도 결국엔 다 일시적이고 헛된 것이거늘. 진정한 신의 의미도 모르는 범속한 남자... 그래도, 그래도 그게 싫지는 않았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발버둥치듯 이런짓까지 해오다는게 기분나쁘진 않았다. 왜냐하면 저 남자도 그만큼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니 그냥 그가 원하는걸 들어주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상대의 손에 쥔 사탕을 빼앗으려 사소한 꾀를 쓰는 어린아이를 보는것 같아 귀엽기까지 했다. 그러니 한 번쯤은 어울려주는것도... 나쁘진 않겠지.
"하아... 마, 마음대로 해..."
"흐응?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치곤 영 미적지근 한데?"
정말 끝까지 유치한 남자다. 그래. 기왕 져주기로 했으니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철저히 져주마. 제이스는 다리 사이로 손을 뻗어 자신의 비부를 양쪽으로 벌려보이며 말했다.
"내 몸, 당신이 원하는대로 해도 좋아. 부... 부탁해. 읏... 당신의 것을 이 안에..."
"...그 말이 듣고 싶었어."
씨익 웃으며 제이스의 몸 위로 몸을 겹치는 진석. 제이스는 자신의 입술 안으로 파고 들어오는 혀의 감촉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다음날. 진석의 예고대로 제이스는 자기 발로 걸어서 여관을 나가지 못했다. 그야 해가 뜰때까지 밤새도록 정사를 벌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대단한건 그렇게 당하면서도 의식의 끈을 놓지 않은 제이스 쪽이었다. 온몸으로 약을 받아들였으니 얼마 버티지 못할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진석의 예상을 깨고 약효가 다할때까지 정신줄을 붙들고 있었다. 오기가 생긴 진석은 해가 뜰때까지도 그녀를 놔주지 않았고, 결국 걱정이 된 여관주인이 욕탕에 확인차 내려와보고서야 멈췄다. 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상태면서도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제이스를 보며 진석은 이거 진짜 독한년이라고 생각했다. 진석은 온몸이 정액투성이가 된 제이스를 씻기고, 잘 말린다음 옷을 입혀 2층의 방에 눕혀주었다.
"하 참. 이걸 버틸줄이야. 금방 나가떨어질 줄 알았는데."
"흐... 흥. 나, 나는... 교단을 위해 훈련을 받은... 수호자. 겨, 겨우 이정도로... 지지않..."
눈은 반쯤 감긴채로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끝까지 지기 싫어하는 제이스. 하지만 그 얼굴엔 궁극의 열락을 맛보았다는 만족스런 미소가 걸려있었다. 진석은 그녀가 정신줄을 붙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은 아니었다. 교단에서의 오랜 훈련덕에 최소한의 체력이 남아있는 한 의식을 유지하는것은 가능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그냥 유지만 하고 있는것일 뿐. 실상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이미 제이스의 육체에도 예전 에나에게 진석이 했던것같은 파멸적인 쾌락의 낙인이 새겨진것이다. 지금까지 유지해온 교단의 수호자라는 직함을 바탕으로 얇디 얇은 외면의 껍데기를 유지 할 순 있겠지만, 한 번 미약과 이성함락의 상승효과로 처절히 난도질당한 내면은 이제 두 번 다시 진석의 요구에 거절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에나의 경우엔 평범한 일반인이었기에 제이스보다 정신력도 약했고 정신의 지주가 되는 일생의 목표 같은것도 없었기에 쉽게 함락되었을 뿐. 제이스에겐 허신의 강림이라는, 어린 시절부터 강제로 세뇌당한 지향점이 있기에 간신히 겉치레나마 유지할수는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진석 스스로만 몰랐을 뿐 진석이 목표로 한 제이스의 공략은 실상 거의 끝난 상태였다.
"알았으니 일단 자라."
진석은 억지로 제이스의 눈꺼풀을 손바닥으로 덮어버렸다. 그 조차도 저항못하고 눈을 감은채 순식간에 곯아떨어지는 제이스. 진석은 옆의 의자에 풀썩 주저앉으며 긴 한 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교단으로의 출발이 늦어지겠군. 하긴 뭐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다만."
뭐 적당히 점심때쯤까지만 재우고 두들겨 깨워 마차에 싣고라도 가면 되겠지 생각하는 진석이었다. 하루의 시작임을 알리기라도 하듯 창밖에서 짹짹 시끄러운 샛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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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교단이 있는 메디니아까지의 여정은 평탄했다. 우선 페레나 시를 떠나 한나절거리에 있던 작은 국경마을에서 보급을 했다. 메디니아의 국경까지는 마차로 약 나흘거리로, 이 지역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공백지라 중간에 마차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란델의 국경마을을 떠나 메니디아의 국경도시에 이르는 그 나흘동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닥 위험한 지역이 아니라서인지 도적떼나 흔한 몬스터 같은것과 마주치는 일조차 없었다. 그저 틈이 날때마다 진석이 제이스의 몸을 요구했을 뿐. 첫날엔 마차를 세우고 휴식을 할때나 관계를 가졌지만, 둘째날부턴 아예 마부석에서 관계를 가지며 이동했다. 그리고 셋째날이 되니 제이스의 태도는 이전과 180도 달라져있었다. 점심식사를 위해 잠시 근처의 나뭇가에 잠시 세워둔 마차. 식사 후 당연하다는듯 마차 안에서 몇차례의 섹스를 나누고, 제이스는 진석의 옆에서 팔을 베게 삼아 누운채 안겨있었다.
"하아, 하아... 도대체... 페레나시를 떠나고부터... 우리, 몇 번이나 한거지?"
"글쎄. 너랑 나 둘중 누가 갔느냐로 세야하나?"
"...바보."
진석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는 제이스. 이젠 예전의 껄끄러운 태도고 뭐고 다 날아가있었다. 친밀하게 딥키스를 나누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연인이나 다름 없는 사이. 제이스는 생전 처음으로 눈 앞의 사내에게서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오직 교단의 목적에 따라 살아왔던 생애에서 처음으로 자신만의 감정에 눈을 뜬것이다. 마음속에서 서서히 자라나는 그 감정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이렇게 영원토록 어떤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단 둘이서 지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진석은 진석 나름대로 곤란했다.
'아이씨... 요 며칠새 끈적하니 엉겨붙는게 왜 자꾸 이뻐 보이는거야?'
그도 그럴것이 진석은 이미 에나와 보낸 시간보다도 제이스와 오래 지냈다. 그래봐야 아직은 며칠밖에 안되지만, 앞으로 그 시간은 점점 더 길어질 터. 에나가 막 죽었을때야 당연히 뜨거운 분노심에 불타올랐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단 둘이 며칠째 틈이 날때마다 몸을 섞고있다 보니... 분노심이고 뭐고 슬슬 정이 들고있다. 처음엔 [두고봐라! 나중에 죽여주마!] 하던것이 [음 죽여야하나? 그래야겠지?] 가 되더니 이젠 [꼭 죽일필요까진 있을까?]로 변한것이다.
'크흑! 미안해 에나! 나는 쓰레기야! 이제 나 얘 못 죽일것 같애!'
마음속으로 에나에게 무릎꿇고 싹싹 비는 진석. 참으로 갈대같은 인간이었다. 갈대가 바람결에 휘둘리듯 상황에 따라 금세 태도가 변해버리는 그.
'원수를 갚기위해 수년, 수십년씩 변함없는 마음으로 절치부심한다는게 진짜 보통일이 아니었구나. 그래, 관두자. 이제와서 이 녀석을 죽인다고 바뀌는것도 없을테고...'
진석은 결국 자신이 제이스를 죽일 수 없음을 인정해버렸다. 교단에 들어가 상황을 봐서 가능하면 뒷통수를 치고 제이스도 죽인다, 라는 처음의 계획은 뭐 아무래도 좋으니 교단에 들어가서 적당히 제이스와 함께 지내면 되겠다~ 정도로 변해있었다. 그녀를 관심 NPC에서 주요 NPC로 옮겨놓은지도 오래였다.
'게임이라지만 정말 대충대충 하는구나, 나.'
군주 플레이때는 무조건 최선의 선택만 하려 애썼다. 최단기간내에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이해득실에 충실한 그런 플레이. 방해가 되면 어제의 친구라도 베어버렸고 도움이 된다면 적조차 품에 끌어안았다. 사실 그런 플레이를 하지 않고선 대륙을 통일 할 수 없기도 했다. 왕좌가 주는 안락함과 쾌락에 취해있다간 외적보다 두려운 내부의 적에게 등을 찔리기 일수였으니. 게임이라고 해도 한 나라를 이끌고 운영한다는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장수 플레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수의 경우 문관과 무관이 나뉘어져있지만 어느쪽을 고르더라도 쉽지 않았다. 정치로 나라 안을 다스리며 외교로는 나라 밖과 협상해야하는 문관. 적을 찌르고 베는 칼과 창이면서도 유사시엔 나라를 지키는 방패가 되어야하는 무관. 둘 다 나름대로 어려운 길이었다. 거기에 틈만 나면 자신을 끌어내리려는 정적들과 맞서면서도, 누구보다 뛰어난 성과를 내어 왕에게 가장 신임받는 수하가 된다는 것. 보통일이 아니었다. 한 나라의 왕을 자신이 선도하여 대륙을 통일한 지배자의 위치에 올린다는건 군주 플레이 이상으로 몇 배는 어려웠다. 필연적으로 장수 플레이는 군주 플레이 이상으로 냉정하고 잔혹하게 플레이를 할 수 밖엔 없었다. 그런식으로 온갖 상황을 해쳐나가며 10회 이상의 대륙통일 엔딩을 달성했던 자신인데 지금은...
"저기 러셀? 드, 듣고 비웃지마. 나... 나, 조금... 당신이 좋아진것 같아..."
촉촉한 눈빛으로 용기를 쥐어짜내며 고백하는 제이스. 평소의 그 날카롭던 인상은 어디가고 마치 순진무구한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진석은 그런 그녀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그래."
이런꼴이다! 이것이 방랑자 플레이인가! 아니, 방랑자가 아니라 방탕자 아닐까? 진석은 품에 안겨오는 제이스의 감촉에 재차 자신의 아랫도리가 단단해지는것을 느끼곤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은 그저 여자라면 다 좋은게지. 참 정직한 신체 부위다. 너무 정직해서 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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