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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22화 (22/155)

< --   - 2.   -- >         * 22화 *

메디니아. 영토의 절반이 산지이며, 타국에게선 대놓고 소국이라 불리우는 작은 나라. 도시는 수도를 포함 겨우 셋. 크고 작은 마을은 다 합쳐도 열 남짓. 국토의 총 인구래봐야 겨우 1만 가량. 하지만 메디니아가 그 명맥을 굳건히 유지할 수 있는것은 메디니아의 산지에서만 자라는 특유의 약초들과 그것을 가공하여 수출 할 수 있는 발달된 약학에 있었다. 놀랍게도 메디니아는 대륙에서 약학이 가장 발전한 나라였던 것이다. 영토와 인구는 적을지언정, 뛰어난 약품을 대량으로 수출해주는 나라와 섣부르게 척을 지려는 어리석은 국가는 없었다.

그런 메디니아의 수도 갈론. 갈론엔 대륙에서 가장 발달한 약학과 각종 의료학을 전수하는 엠퍼슨 메디컬 아카데미가 있었다. 대륙의 인재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아카데미 중 하나. 졸업만 한다면 약학사나 의사로서 대륙 어딜 가더라도 부와 명예를 누리며 대접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학비부터가 어마어마해 아무나 입학 할 수 없었던데다가, 입학했다 한들 뼈를 깎는 수준의 노력 없이는 졸업 할 수 없었다. 진석은 그런 엠퍼슨 메디컬 아카데미 앞을 막 마차로 지나고 있었다.

"아카데미네? 엠퍼슨 메디컬 아카데미라."

"말 그대로 의료전반을 가르치는 곳이야. 약학이 중심이지만."

진석의 혼잣말에도 꼬박꼬박 대답을 하며 옆에서 그의 팔을 꼭 끌어안는 제이스. 진석은 부담감을 느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니 근데 좀 떨어져 있어도 되잖아. 마차 안에 들어가 있던가. 너무 달라붙는다."

"싫다 뭐."

제이스는 혀를 베에 내밀며 팔을 더 당겨 안았다. 진석은 한숨을 내쉬며 마차를 계속 몰았다.

"어휴. 그나저나 이제 어디로 가면 되는데?"

"이 앞 광장에서 쭉 직진. 그대로 몇 분쯤 더 가다보면 우측에 4층 짜리 건물이 하나 보일거야. 거기가 갈론에 있는 교단의 지부랄까?"

데오그라즈에서 탈출하고 숲에서의 일단락 후 며칠간. 짧은 여행 끝에 허신 헤세스모데우스를 섬기는 교단의 실체에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무려 S 랭크의 퀘스트.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사교의 집단을 물리치고 세계를 구하느냐, 혹은 그에 협조해서 허신의 강림에 동참해 모든것을 끝내느냐 하는 중대한 기로. 하지만 옆에 달라붙어 자신의 볼을 꾹꾹 찔러대는 붉은 머리의 여자, 제이스 때문에 긴장감이라곤 코딱지 만큼도 없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바뀌는지 신기하긴 신기하다.'

사투의 빈틈을 노려 마법을 뻥뻥 쏴대고 인질이었던 에나로 시야를 가린 틈에 둘 다 꼬챙이처럼 꿰어 죽이려던 독랄한 여자가 틈만 나면 엉겨붙고 애교를 떠는데, 첫인상과의 갭이 너무 커서 지금 자신이 다른 사람을 상대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정도였다. 아무리 좋은게 좋은거라지만, 진석 자신은 얌전하고 순종적인 타입이 좋은터라 이렇게까지 들이대는건 솔직히 좀 피곤했다. 제이스는 검지손가락으로 진석의 볼을 누른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왜. 이제 막상 교단에 발을 들이려니 긴장돼? 응? 걱정돼?"

너 하는짓이 제일 걱정스럽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냥 입을 다물고 아무 대답않는 진석. 제이스는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리슬쩍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왔다.

"저기... 걱정하지마. 내가 있잖아? 이래봐도 교단에 네 명밖에 없는 수호자님이란 말이지. 대신관님께도 잘 말씀 드릴테니깐..."

"...말이 나와서 묻는데, 그 대신관은 어떤 사람이야?"

제이스는 진석의 질문에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보면 놀랄걸? 그러니까 설명보단 직접 보는게 나을거라고 생각해."

뭐야 그게. 진석은 슬슬 그냥 퀘스트고 뭐고 때려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왠지 벌써 다 귀찮아진다... 아아...'

하지만 마차는 벌써 제이스가 일러준 4층 건물에 가까이 다다르고 있었다. 건물 외부엔 큼직한 간판이 달려 있어 멀찍이에서도 그 이름이 잘 보였는데, '헤세스 약품 통상'라는 글자가 씌여있었다. 이놈들 보게, 대담한데?

헤세스 약품 통상은 메디니아 왕실에서 출자하여 설립한 공기업이었다. 기간시설에 관련한 것도 아닌 약품 회사를 공기업으로 세웠다는게 특이하긴 했지만, 지금은 메디니아 전체 약품 수출량의 무려 5할을 이 기업 하나가 담당하고 있었다. 외상 치료제, 내상 치료제, 각종 병의 치료약, 해독제나 강장제, 영양제, 해열제 등등... 온갖 종류의 약품을 대륙 여러나라에 끊임없이 팔아치우고 있었으니 매년 벌어들이는 수익도 상상을 초월했다.

'돈 따위 얼마든지 주겠다는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었군. 그나저나 사교집단 주제에 어떻게 이런 한 나라의 공기업을 지부로 삼고 있는건지...'

헤세스 약품 통상의 로비에 들어선 진석은 내부의 모습에 학을 떼었다. 어지간한 왕궁의 입구에 들어선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화려함이었다. 그야말로 우리는 이렇게 돈이 많아요~ 라고 과시하는 듯한 인테리어였다. 여기서 근무하는 것으로 보이는 직원들도 건물 안팎을 바쁘게 오가는 모습이 보였는데, 입구 바로 안쪽에서 건장한 체구의 경비병 여럿이 바짝 날이 선 모습으로 근무를 서는것이 보였다. 아니, 말이 경비병이지 금속 갑옷 풀세트에 장검과 방패로 단단히 무장한게 아닌가? 경비가 아니라 중장갑병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저 일개 회사의 출입구일 뿐인데 중장갑병 분대가 경비를 서고 있다니. 새삼 헤세스 약품 통상의 위용이 어느정도인지 짐작이 갔다. 진석은 제이스의 뒤를 따라 로비 안쪽의 메인 카운터로 다가갔다. 카운터 안쪽에는 깔끔한 정장을 입고 앉는 세 명의 사무원이 있었는데 제이스가 다가오자 하나같이 벌떡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게중 가장 고참으로 보이는 한 명이 카운터 밖으로 나와서 제이스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음. 대신관님께 전갈을."

"그런데... 뒤쪽의 분은?"

사무원이 낯선 인물인 진석을 경계하며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제이스는 째릿, 사무원을 노려보며 특유의 히스테릭한 표정을 지었다.

"알 거 없잖아? 중요한 손님이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바로 연락을."

사무원은 눈짓으로 카운터 안 쪽에 있던 한 다른 직원에게 신호를 주었고, 신호를 받은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쪽지에 뭔가를 적어 그것을 들고 안쪽으로 빠르게 모습을 감추었다. 제이스는 진석을 돌아보더니 방금 사무원에게 보여줬던것과는 정 반대의 환한 미소를 띄우며 물어왔다.

"저기... 난 필요한 서류가 있어서 잠깐 위쪽의 내 사무실에 다녀와야 하는데. 같이 올라가볼래?"

"아니 싫어. 내가 뭐하러? 귀찮아."

"심술궂긴. 그래 그럼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다녀올테니까."

제이스는 고참 사무원에게 손가락을 까닥하더니 그를 뒤에 달고 안쪽의 계단으로 올라가버렸다. 할 일이 없어진 진석은 한 쪽에 구비된 소파에 다리를 쩍 벌리며 편히 앉았다.

'세상 말세구만. 허신을 강림시켜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는 사교집단 주제에 이런 번듯한 꼴을 다 하고 있고... 그나저나 제이스가 꽤 높은 사람 분위기를 내던데. 나도 교단에 정식으로 들어가면 한 자리 달라고 해볼까? 낙하산 인사라. 그거야 말로 금수저들의 특권인데... 무일푼이나 다름 없는 꼴로 시작해 이런 거대 공기업의 간부급이 된다? 부하직원들 밥먹듯 야근시키면서 회식자리에 끌고다니고 예쁜 여직원에겐 직장내 성희롱도 저질러 버리고... 오오 세상을 멸망시킨다느니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보다 이쪽이 더 현실적으로 와 닿는 소악당일세. 꼭 한 번 해보고 싶은데.'

진석이 소파에 퍼질러진채 히죽거리며 그런 바보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위층에 올라갔던 제이스가 금방 내려왔다. 아까 올라갈때도 고참 사무원을 한 명 달고 갔었는데 이번엔 뒤에 따라오는 직원들 훨씬 수가 늘었다. 거의 열 명에 가까운 직원들이 쩔쩔메며 그녀의 뒤를 따라오다, 손짓 한 번에 멈춰서곤 90도 각도로 깍듯히 인사를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흥. 됐어, 이제 다들 올라가 일이나 똑바로 해."

그 모습에 기가 차는 진석. 야 이거 무슨 조폭이냐? 제이스는 서류가방을 든 채 어깨 너머로 머리칼을 훅 쓸어넘기며 진석에게 다가와 방긋방긋 웃었다.

"기다렸지? 이제 교단의 본원으로 가자."

"아니 그런데... 방금 뭐냐 그건."

"응? 아 저 직원들? 뭐 그냥 말단들이지. 하라는 일은 안하고 쓸데없는 소리나 하면서 시시덕대고들 있길래 끌고다니면서 면박 좀 준거야."

"하나만 묻자. 넌 이 회사에서 어느 정도로 높은 사람?"

"나? 일단은 이사 직함을 가지고 있는데."

"......"

나한테 깨지고 육욕에 굴복한 한낱 NPC 주제에! 공기업 이사님이라니! 뭐, 뭐가 이래! 현실의 진석 자신도 한낱 계약직 창고 직원이거늘... 에잇 이 썩어빠진 세상! 반드시 멸망시켜 버리겠어! 마음속에 쓸떼없는 다짐을 새기는 진석이었다.

교단의 본원은 갈론을 벗어나 마차로 한 시간쯤 떨어진 어느 산중에 위치하고 있었다. 제이스의 안내로 좁은 숲길을 벗어나자 야트막한 언덕이 펼쳐졌고, 그 위로 작은 마을의 전경이 보였다. 진석은 마을을 가르키며 제이스에게 물었다.

"저 마을이 본원?"

"그럴리가 없잖아. 본원은 언덕을 지나 산길을 좀 더 올라가야 있어. 여긴 평신도들 거주하는 마을이야. 평신도들의 대다수는 여기서 살지만 본원에도 청소나 식사 준비 등 수발을 들어주는 인원이 약간 거주하고 있지."

"그렇구만... 근데 이 사람들은 여기서 뭘 해먹고 사는거야? 농사짓나?"

"비슷해. 저기 저쪽. 좀 먼데, 보여?"

제이스는 언덕 너머 마을 안쪽에 만들어져있는 농장을 가르켰다. 길가에선 좀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보이긴 보였다. 농장 부근에선여러 사람들이 왔다갔다 움직이며 일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재배하고 있는 잎이 세갈래로 갈라진 어른 허리 높이의 다년생 식물. 진석이 익힌 식물학이 반응하여 농장에서 기르고 있던 작물에 대한 정보창을 띄워올렸다.

"저건..."

"타마엘 초. 이 지역에서만 자생하는 마약의 주 재료지."

진석의 눈앞에 타마엘 초에 대한 정보창이 떠올랐다. 제이스가 말했듯 마약의 주 원료가 되는 메디니아의 고유 작물 타마엘 초. 가공하기에 따라 의약품이 되기도 하지만 마약으로서의 가치가 훨씬 컸다. 게다가 타마엘 초로 마약을 만드는 방법은 비교적 간단한 편이었다. 우선 완전히 성장한 작물의 잎을 수확해 응달에서 말린 다음, 특정한 부재료와 배합해 침전법으로 우려냈다. 그리고 그 액체를 망에 걸러 불순물을 제거 한 후 한 번 끓여서 증류시키면 원액의 완성. 완성된 원액을 가공하면 중독성 높은 다운 계열의 마약이 만들어졌다. 제이스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평신도들이 타마엘 초를 수확하고 그걸로 마약을 만들면, 헤세스 통상의 약품 수출 루트를 통해 우리가 부리는 범죄조직들에게 공급해 주는거야. 대륙 어디가 됐건 이런 양질의 마약을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는건 오로지 우리 뿐일 테니까. 한 번 이 맛을 들여놓으면 범죄 조직이랍시고 어줍잖은 폭력을 무기삼아 허세를 부리던 놈들도 우리의 말은 충실히 따를 수 밖에 없는 개가 되는거지. 어때, 정말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

좀 전까진 분위기에 들떠 헬렐레 하던 진석이었지만, 새삼 그 말을 듣고나니 눈 앞의 여자와 그녀가 속한 이 조직이 얼마나 지독한 악당인지를 실감했다. 약품 수출 루트를 통해 몰래 다른나라에 마약을 뿌리고 있는데다가 평신도들을 부려 마약의 원료를 재배하게 만들고 있었다니. 악당의 노력도 노력은 노력이다~ 라고 생각하던 진석이었지만 그래도 막상 눈 앞에서 그 실체를 보니 기분이 찝찝했다. 진석의 표정이 말 없이 굳어지자 제이스는 그에게 바짝 다가가 앉았다.

"저기...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 할 거 없어? 어차피 평신도들은 그냥 단순한 약초인줄 알고 재배할뿐인데다가, 우리가 쓰려고 마약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그냥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서 쓰는 것 뿐이니..."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라...'

또 다시 떠오르는 자신의 이전 군주 플레이들. 자신 역시 사람을 일개 장기말로 보곤 도구처럼 써먹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어떤 위치에 올라가 앉으면 결국 그 자리에 어울리게 행동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 교단도 허신의 강림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그들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는것이리라. 그래, 그냥 그런것일테지. 허나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으론 납득되지 않았다. 퀘스트만 보곤 흥분해서 별 깊은 생각 없이 뭐 나도 멸망에 동참하거나 아니면 기회봐서 뒷통수치거나~ 하고 룰루랄라 왔는데 헤세스 약품 통상이나 대규모 타마엘 초 농장 같은 교단의 실체를 하나씩 눈으로 확인하니 어째 기분이 무거워진것이다. 하는짓이 진짜 못되먹은놈들 아닌가!

'스스로도 아무 생각 없이 플레이 하고 있다는건 자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발을 담그고보니 이놈들 규모나 세력이 장난이 아닌데? 이런 놈들을 도와서 세계를 망하게 해도 될라나...'

하긴 제이스의 몸을 농락하는 재미에 홀려 요 며칠새 열심히 아랫도리만 놀렸지 뭔가 이후의 계획을 세우거나 특정한 수단을 강구한것도 아니다. 제이스가 교단의 일원으로 받아준다는 말을 믿고 오긴 했지만 이대론 진석 역시 한낱 교단의 도구가 되어 휘둘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이 정말. 혼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볼을 부풀리며 눈 앞에 얼굴을 들이미는 제이스. 귀여운 행동이었지만 진석은 왠지 심통이 났다. 에잇, 애시당초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에나를 살려내라!

"아야얏! 볼은 왜 꼬집어?"

"그냥 짜증나서."

"아흐으. 볼따그 양혹으로 잡하 당히이 마~"

그 와중에도 마차는 덜걱거리며 쉼없이 산길을 올랐다. 고개 너머로 허신 헤세스모데우스의 신전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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