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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23화 (23/155)

< --   - 2.   -- >         * 23화 *

재질은 모르겠지만 회색의 석재로 지어진 신전의 외관은 굉장히 소박했다. 갈론에서 본 헤세스 약품 통상의 규모나 아랫 마을에 지어진 대규모 타마엘 초 농장같은 것을 보고 이놈들 신전은 과연 얼마나 사치스럽고 비까번쩍하게 지어놨을까 했는데 막상 보자니 여느 시골의 수도원이나 다름 없는 아담한 모양새였던 것이다. 마차가 신전 앞에 서자 입구에서 장봉을 든채 신전을 지키고 있던 두 남자가 다가왔다.

"아 수호자님, 돌아오셨군요."

"고생하셨습니다."

따스하게 웃으며 맞이하는 남자들의 태도가 흡사 가까운 친지를 대하는 것 같다. 게다가 헤세스 약품 통상에서 고참 사무원이 진석을 경계했던 것관 달리 이들은 진석의 존재를 신경도 안쓰는 모습이다. 그냥 거기 옆에 뭐가 있구나~ 하는 느낌. 진석은 남자들에게 마차를 넘기고 배낭을 멘 채 제이스를 따라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오셨군요."

"매번 수고하십니다."

복도를 지나면서 사원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보이는 몇몇 평신도들을 지나쳤는데, 그들도 하나같이 입구를 지키던 남자들처럼 제이스를 향해 친밀한 인사를 건네왔다. 제이스 역시 평소의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들의 인사를 다 받아준다.

'생각하던거랑 전혀 다른 모습인데?'

세계를 망하게 하려는 사교집단이라 광기에 물든 정신병자들의 소굴을 생각했건만 이건 뭐 너무 평화롭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지금까지의 모습만 보자면 정말 어느 평화로운 교단의 사원과 다를게 하나 없다. 게다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는 평신도들의 모습은 누가 억지로 강요한 것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태도라는걸 잘 알겠다. 제이스는 그런 진석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손을 잡아주며 배시시 웃었다.

"왜. 분위기가 생각하던거랑은 좀 달라?"

"솔직히 많이 다르네. 좀 더 뭐랄까... 과격한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럴리가 있나. 이들은 대신관님의 인도로 헤세스모데우스님의 진리에 눈을 뜬 선량한 신도들. 그 본산에서 머무는 이들이 어떠한 불안이나 불만을 가질리 없잖아?"

솔직히 이쪽이 더 무섭다. 진석은 그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대놓고 '으하하! 우리는 세계를 멸망시키겠다!' 이러는 악당이라면 별 고민없이 목을 쳐버릴 수 있을테지만, 허신을 강림시켜 세계를 멸망시키는게 진정한 정의이며 옳은일이라고 세뇌당한 평범한 사람들이 상대라면...

'지금은 제이스를 통해 교단에 협력하는 루트를 골랐지만 교단을 물리치는 쪽의 선택을 했으면... 진짜 엄청나게 험난했겠군.'

교단에게 속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빼면 평신도들은 정말로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이들을 함부로 악의 말단이라 규정짓고 죽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진석이 생각하기에 이 평신도들을 탓하는건 사기꾼에게 속은 피해자가 잘못했다는 말과 다를게 없다고 느껴졌으니까. 진실을 왜곡해 달콤하게 포장하여 상대를 속인쪽이야말로 진정한 문제이고 원흉이 아니던가? 그러는사이 둘은 어느 대기실 같은곳에 도착했다.

"잠깐만 여기서 앉아서 기다려 줘. 안에 계신 대신관님께는 일단 내가 먼저 말씀드릴테니까..."

그리곤 진석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안쪽의 방으로 낼름 들어가버리는 제이스. 진석은 할 수 없이 근처에 있던 소박한 나무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대신관은 또 어떤 놈일까? 제이스는 직접 보면 알거랬지만 이런 교단을 세우고 유지하는 상대라니 도통 감이 안온다. 기반을 일궈놓은 능력만 보자면 거의 여느 나라의 재상급이 아닐까 싶다. 대신관이라는 칭호가 있는만큼 역시 나이를 먹은 노인일까?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10분에서 15분쯤 지났을까. 슬슬 지루해진 진석이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는데 저쪽 복도에서 작은 여자아이 하나가 종종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와 되게 귀엽게 생겼네.'

한 열살쯤 되었나 싶은 금발 벽안의 여자아이. 반짝거리는 허니 블론드와 큼직한 눈동자. 정말 무슨 인형처럼 귀여워 보였다. 소박한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는 소녀의 머리칼은 한 갈래로 잘 땋아내려져 있었고 그 끄트머리엔 빨간 리본이 달려 있었는데, 걸음걸이에 맞춰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리는게 자연스레 눈길이 갈 정도로 깜찍했다. 여자아이는 진석을 발견하곤 호기심 가득한 미소를 띈채 이쪽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아저씨는 누구세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신전에 들어오고나서 마주친 평신도들은 죄다 제이스에게만 인사를 건넸지 진석은 본체만체 신경도 안썼다. 그런데 이 어린 여자아이는 그런 자신에게도 자연스레 관심을 가져주는게 아닌까? 그 모습이 왠지 귀엽게 느껴져 손을 뻗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아저씨는 러셀이라고 한단다. 앞으로 이 교단에서... 함께 일할 사람이라고 할까?"

"와아. 그런데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수호자님들 같은 훌륭한 일을 하는거에요?"

훌륭하다라. 진석은 갑자기 자신에게 달라붙어 아양을 떨던 제이스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고 말았다.

"글쎄다? 나도 무슨일을 하게 될 진 아직 모르겠는걸."

"러셀 아저씨는 왠지 뭐든 잘 하실거 같아요!"

활짝 웃으며 생판 처음 보는 자신을 높게 평가해주는 여자아이. 티없이 밝은 모습에 진석은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아빠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슬슬 쓰다듬어 주었다. 에헤헤 웃던 여자아이는 진석의 옆자리에 폴짝 올라와 앉더니 손가락을 뻗어 그의 전투용 벨트를 가르켰다.

"아저씨는 칼이 되게 많네요."

진석의 전투용 벨트에 꽂혀있는 여덟자루의 단검들. 진석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욕심쟁이라서 많이 가지고 다닌단다."

"흐응... 저한테 하나만 주시면 안돼요?"

"이건 아저씨한테 필요한거라서 안돼. 대신 나중에 인형이라도 사주면 어떨까? 그쪽이 더 좋지 않겠니?"

"응, 그게 더 좋아요!"

연신 방긋방긋 웃으며 눈동자를 반짝이는 여자아이. 그 모습이 너무 귀여운데다가 흡사 어린 조카를 대하는 기분이라 진석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제이스를 따라 대신관을 만나러 왔다는 사실도 잊고 한참을 여자아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아 이런 딸 있으면 키울맛 나겠다.'

너무 귀여워서 끌어안고 볼이라도 마구 부비고 싶었지만 무슨 오해를 살지 모르니 안되겠지. 진석이 그런 생각을 할 무렵, 대기실 안쪽의 문이 열리며 제이스가 혼자 걸어나왔다. 진석은 제이스의 존재를 깨닫고 휘휘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이. 뭐야, 어떻게 됐어? 난 안들어가 봐도 되나?"

"응... 뭐 그럴 필요는 없어."

"뭐야, 문전박대냐?"

"그게 아니라..."

제이스는 샐쭉 웃으며 진석의 뒤를 가르켰다. 진석은 뭔데 하며 무심코 그녀가 가르키는대로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 있는건 아까의 순진무구한 모습과는 달리, 마치 생판 다른 사람마냥 어른스런 눈웃음을 띄고 있는 여자아이. 그녀는 양 손으로 자신의 치마 끝단을 살짝 들어올리며 정중한 인사를 건네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러셀 헤이든씨. 초면부터 의도치않게 정체를 속여서 미안하군요. 제가 헤세스모데우스님의 대신관, 미리안 프라우드입니다."

...뭐? 진석은 순간 띵, 글자 그대로 누가 망치로 머리를 내리치는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너무 놀라 입이 쩍 벌어졌지만 말문은 턱 막혔다. 이런 어린 여자 아이가 세계를 멸망시키려드는 사악한 교단의 대신관이라고?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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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90여년전. 당시의 메디니아는 현재만큼 약학이 발달하지 못했었다. 정말로 한낱 약소국이었던 나라. 프라우드 가문은 그런 메디니아에 속한 귀족 가문이었다. 하지만 귀족 가문이라고 해도 거의 허울뿐인 가난한 몰락 귀족. 미리안은 그런 프라우드 가문에서 태어났다.

과거 미인으로 이름높았던 외할머니의 유전자를 온전히 이어받았는지 겨우 열 살의 나이로도 눈에 번쩍 띌 만큼 미리안의 외모는 아름다웠다. 조금 더 성장하면 그녀는 정말로 눈부시게 피어오를게 분명했다. 그리고 몰락했다고 한들 프라우드의 성은 분명 귀족의 그것. 여러 이름있는 가문에서 미리안을 노린 청혼이 줄이어 들어왔다. 귀족들 사이에서의 조혼은 흔해빠진 일이었으니 그녀가 초경조차 치르지 않은 어린아이라고 해도 그것을 문제 삼는 이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당사자인 미리안 본인이 결혼을 끔찍하게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마찬가지. 가문간의 일에 어린 그녀가 발언권을 갖는 일은 없었다.

결혼을 통해 넘겨받을 막대한 지참금과 상대 가문의 도움이라면 땅에 떨어진 프라우드 가문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세워볼수도 있을터. 미리안의 아버지는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국 가장 많은 액수를 제시한 한 귀족 가문에 그녀를 보내기로 한다. 그나마 미리안과 비슷한 나이라거나 자상한 상대였으면 좋았을것을, 하필이면 결혼 전력만 네 번에 나이는 이미 50을 넘긴 중늙은이가 상대였다. 거의 할아버지와 손녀딸의 나이차. 이건 말이 결혼이지 시장에서 경매로 물건을 낙찰받는 행위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지참금에 대한 이야기가 어디에선가 잘못 흘러나간 것일까. 지참금은 신랑의 가문에서 신부측인 프라우드 가문으로 건네지기로 한 것. 지참금이 신부의 마차에 실려 옮겨질리도 없건만, 어리석은 한 무리의 도적떼가 미리안이 탄 마차를 습격하고 만다. 예상치 못한 습격에 수행원은 다 살해당하고 미리안 역시 돈이 한 푼도 실려있지 않음을 안 흥분한 도적들의 흉기에 찔려 처참한 죽음을 당하고 만다.

겨우 열 살. 아무것도 모를 나이에 가문의 중흥을 위해 물건처럼 팔려가다 불한당들의 손에 참혹하게 살해당한 미리안. 짧고 애닯픈 삶이었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저승 저편으로 떨어져가던 그녀의 영혼에 차원을 넘어선 허신 헤세스모데우스의 손길이 닿았다. 그는 작은 영혼에게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허신 헤세스모데우스의 힘으로 미리안은 죽음에서 부활했다. 죽은지 겨우 수시간만에 되살아나 허신의 권속이 된 미리안은 그 껍데기만이 같을뿐, 내용물은 예전의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신의 힘을 빌어 자신을 살해했던 도적들을 찾아 모조리 참살하고 본인의 가문과 청혼을 해온 상대 가문 역시 그날로 몽땅 태워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리고 홀로 길을 떠돌며 능력있는 자를 찾아 허신의 진리를 설파하고 권능을 내보여 자신의 아래에 복속시켰다.

허신의 권속이 되어 더 이상 늙지도 죽지도 않는 불사자가 된 미리안. 자신이 복속시킨 이들과 더불어 긴 세월에 걸쳐 이 세계에 허신을 강림시키기 위한 노력을 차근차근 쌓아나갔다. 교단도, 수호자도, 헤세스 약품 통상도, 타마엘 초 농장과 평신도들의 마을도. 모두 미리안의 손으로 쌓아올린 것이었다. 메디니아 왕국을 약학의 대국으로 만들어준 엠퍼슨 메디컬 아카데미 조차 사실은 미리안의 생각으로 만들어 진 것. 그뿐만이 아니었다. 메디니아의 수많은 귀족들과 궁중의 대신들에게도 그녀의 입김이 닿아있었다. 메디니아라는 나라 자체가 이미 반쯤 미리안이 뒤에서 조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진석의 생각 이상으로 교단은 크고 강대했다. 그 정점에 위치한 이가 바로 이 작은 체구의 금발소녀, 미리안 프라우드. 그녀는 편안한 미소를 띄우며 말을 이어갔다.

"헤세스모데우스님은 저에게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도적들의 손에 살해당한 저를 다시 숨쉬게 하고 땅 위에 걷게 만드셨지요. 자신의 의지를 실천할 그릇으로 삼은것입니다. 허나 저 자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 분이 저에게 허락하신 권능이 있기에 이 모든것이 가능했을 뿐..."

대신관의 방 안. 별 다른 장식이나 눈에 띄는 가구도 없는 지극히 소박한 방.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대신관 미리안, 그리고 수호자 제이스와 마주 앉은 진석. 진석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그저 귀엽게만 보였던 상대방이었지만 지금은 열 살의 외모답지 않은 기묘하고도 강력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겉모습만 어린아이일 뿐이지 그 알맹이는 이미 백년 가까이를 살아온것이다. 허신의 권속으로 무언가 거대한 힘을 하사받은데다가, 그 연륜과 경험을 바탕으로 온갖 지략이나 권모술수에도 통달했을터. 만약 자신이 허신의 강림을 막기위해 지금 당장 미리안을 죽이려 덤벼든다고 해도... 어째선지 이길거라는 생각이 요만큼도 들지 않았다. 최신식 탱크에 죽창 한 자루 들고 덤벼드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진석은 미리안의 능력을 확인해 보고자 메뉴를 열어 그녀를 관심 NPC로 등록하려 했다. 그러나,

'...등록이 불가능하다고?'

등록을 할 수 없는 NPC라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등록 방지 락이라니? 이 게임을 오래해왔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플레이어는 언제나 모든 NPC의 능력을 속속들이 살펴보며 게임을 진행 할 수 있었는데, 미리안은 어째선지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상 섣붙리 어리석은 행동을 할 수도 없었다.

'아니 뭐 이딴...'

처음엔 제이스 정도의 능력을 가진 이를 수호자로 삼은걸 보고 만만하게 생각했다. 물론 제이스가 약한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혼자서도 일반 보병 정도가 상대라면 잠깐사이에 수십명 정도는 가볍게 죽일 수 있는 강력한 비전마법사. 허나 진석은 높은 스테이터스와 수많은 플레이 경험을 지닌 플레이어. 제이스 정도의 능력자는 셀 수 없이 상대해봤다. 그러니 겨우 제이스 같은 전투원 몇 명 모아놓고 세상을 멸망시킬 교단입네 하는게 처음엔 전혀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전장에서 폭풍처럼 밀어닥치는 중장기병이나 하늘을 새카맣게 가리는 장궁병의 집중사격이 몇 배는 더 무서웠다. 이전의 자신은 전장에서 단기로 백단위의 적을 도륙하며 대륙을 몇 번이고 정벌했던 몸. 방랑자 플레이라고 해도 별 다른 어려운 상대는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어째 지금은 눈 앞에 있는 여자아이의 바닥을 도저히 헤아릴 수 없었다. 절대로 자신에겐 털끝만한 위해도 끼칠 수 없을 것 같은 어린 아이의 모습이건만 어째선가 두렵게 느껴진다. 어쩌면 그녀야말로 진짜 괴물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대가 아닐까?

"저는 러셀님의 마음에 미혹이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

"러셀, 너!"

미리안의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제이스. 지금까지의 관계고 뭐고, 명령이 내려지기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진석을 향해 덤벼들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미리안은 후후 웃으며 손을 들어 흥분하는 제이스를 제지했다.

"후후... 성급하군요 제시. 괜찮습니다. 이제 막 교단에 들어오신 분 아닙니까? 누구라도 마음이 흔들릴건 당연합니다. 허나 저는 이미 확신하고 있습니다. 러셀님은 분명 우리의 동료가 되어 헤세스모데우스님의 인도를 따를것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표정을 풀고 휴우 작게 한숨을 내쉬는 제이스. 미리안은 그런 제이스에게 손을 뻗어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 당신이 러셀님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것도 잘 알고 있지요."

"아, 아니! 그... 저기! 대신관님! 저는...!"

"괜찮아요. 탓하려는게 아닙니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헤세스모데우스님의 강림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입장. 제시의 마음으로 러셀님과 같은 뛰어난 인재를 얻어 그 힘으로 강림의 날을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요."

"......"

진석은 한 마디도 입을 열고 있지 않건만 미리안은 상황을 주도한채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진석은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꼭 손발이 묶인채 협상테이블에 끌려나온 기분이었다. 미리안은 씨익 미소를 띄우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창가쪽으로 다가가 바깥의 풍경을 내다보며 말했다.

"아무튼 러셀님에 대해서는 잘 알았습니다.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아침 일찍 다시 한 번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방은 제시가 안내해 드릴겁니다."

"알겠습니다. 자, 나가자 러셀."

결국 진석은 미리안이 자신의 정체를 밝힌 이후 한 마디도 못한채 일방적으로 이야기만 듣다 대신관의 방을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다. 복도를 앞서 가던 제이스가 진석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저기. 어때? 대신관님을 보고 나니."

"...몰라. 하나도 모르겠다."

"그게 무슨 의미야?"

후우 한숨을 내쉬며 우뚝 복도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는 진석. 제이스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다가오더니 옆에서 팔짱을 끼고 그를 이끌었다.

"자자. 대신관님의 정체에 대해 속인건 미안해. 하지만 아무 걱정할거 없잖아? 이제 너도 교단의 식구가 된거니까."

"나도 이제... 교단의 식구라."

"그래. 낯설겠지만 서서히 적응하면서 차근차근 해나가면 된다구. 내가 옆에서 쭉 같이 도와줄테니까."

제이스는 쾌활한 목소리로 떠들며 진석을 방으로 안내했다. 진석은 리베라를 시작한 이후 처음 느껴보는 무력감에 도저히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다. 내일 아침 대신관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도통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멍하니 제이스에게 붙들려 질질 끌려가고 있는데 느닷없이 앞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시잖아! 언제왔어?"

복도의 앞엔 거대한 덩치의 근육질 남자가 서있었다. 이게 사람인가 곰인가 싶을정도로 전신에 근육이 가득한 호남. 그는 응? 하며 제이스 옆의 진석을 노려보았다.

"그보다 옆의 그건 누구야? 비리비리한데."

충분히 건강한 표준체구를 지닌 진석이다. 살다살다 비리비리 하다는 소리는 처음듣는다. 그러나 눈앞의 울끈불끈한 남자에 비교하면 기껏 체구가 절반밖에 안되니...

"초면에 실례잖아 맥. 이쪽은 오늘부로 교단에 입단한 러셀이라고 해."

"호오~ 그래?"

팔짱을 턱 끼더니 어쩐지 이죽거리는 표정으로 진석을 가늠하듯 내려보는 맥.

"흥. 암만 봐도 별 볼일 없어보이는데? 잡일 담당인가?"

"맥!"

빠직. 진석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맥의 말은 계속됐다.

"뭐 됐으니까 그딴 녀석은 내버려두고 나랑 잠깐 어때? 늘 하던 그거말야."

늘 하던 그거라는 말에 갑자기 제이스가 당황스러워 하며 어쩐지 진석의 안색을 살폈다. 제이스는 우물쭈물 하며 말했다.

"그... 시, 싫어. 지금은 너랑 그럴 생각... 없으니까..."

제이스의 대답에 맥의 눈가가 예리해졌다.

"뭐야. 혹시 옆에 있는 비리비리씨 눈치를 보는거야? 네가 왜? 아항... 둘이 몇 번 같이 잤나보지? 난 또 뭐라고 하하하!"

맥은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제이스의 팔목을 부여잡고 확 잡아당겼다. 제이스는 앗 하며 맥의 품으로 휙 딸려가버렸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쭉 같이 자랐고 잠자리도 계속 해오던 사이잖아, 제시. 애당초 네 처음도 내가 받았었고. 이제와서 고작 저런 녀석으로 만족 할 수 있겠어?"

"......"

그 말에 제이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과거 미리안은 교단의 수호자를 키우기 위해 직접 재능이 있어보이는 어린아이를 네 명 뽑았었는데, 그 중 여자는 제이스 하나 뿐이었다. 미리안은 그들을 직접 키우고 훈육하며 어느정도 자랐을때 제이스로 하여금 나머지 셋과 번갈아가며 관계를 맺게 했다. 여자가 제이스 하나 뿐인 이상, 만에 하나 그녀를 두고 일어날지도 모르는 쓸데없는 다툼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수호자로서 서로간의 동료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를 들어 그들 간의 자유로운 섹스를 권한것이었다. 셋 중 맥을 제외한 나머지 둘은 나이를 먹고 성장해나가며 그다지 제이스와의 육체관계에 연연하지 않았지만, 맥 만큼은 여전히 그녀와 정기적으로 관계를 가지는 사이였다. 물론 진석의 입장에선 전혀 모르는 이야기었다. 하지만 아무리 대신관의 압력에 눌려 방금전까지 넋을 놓고 있었던들, 생전 처음보는 상대에게 이만큼이나 무시당하고 참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진석은 제이스를 강제로 잡아 끌고 데려가려는 맥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어이, 덩어리."

"응? 지금 나보고 한 소리야?"

"그래. 귓구녕에 뭐 박았냐? 사람 말이 잘 안 들리나보지?"

우뚝. 제이스를 잡아 끌던 맥의 발걸음이 멈췄다. 실실 웃고 있던 맥의 얼굴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어디서 굴러먹던건지도 모를놈이 겁이 없는데 그래."

"그만해 맥! 알았으니까, 같이 가면 되잖아! 자!"

제이스는 사색이 되어 진석을 향해 가려는 맥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도 그럴것이 제이스는 수호자들 중 가장 약체. 반면 맥은 수호자 네 명 중 두번째로 강했다. 일전 진석이 래스커와 부하들을 상대하며 보여준 무위도 있었지만, 제이스가 보기엔 그 정도로는 절대 맥의 힘에 미치지 못할거라 판단한것이다. 진석이 다치는 사태만은 피해보고자 맥을 막아서는 제이스. 하지만 맥의 덩치를 제이스가 막을 수 있을리 만무했다. 맥은 제이스를 가볍게 밀어내고 진석의 앞에 다가와 서서 고압적인 태도로 내려다보았다.

"용기는 가상한데 말이야. 그만한 실력이 있는가는 모르겠네?"

"어디 공터나 있으면 안내해라. 두들겨서 바닥에 눕혀줄테니까."

"하하하하! 이것 참. 어디서 이렇게 유쾌한 친구를 주워왔어? 좋아! 따라와라."

맥은 호쾌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러 밖으로 향했다. 진석도 두 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제이스만이 우왕좌왕 어쩔 줄 몰라했다.

"러셀! 불쾌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네가 사과해. 맥의 힘은 장난이 아니야!"

심각한 표정으로 진석에게 호소하는 제이스. 딴엔 걱정해서 하는 소리겠지만 이쯤되니 자존심이 팍 상했다.

'내가 아무리 나도 모르게 대신관에게 쫄아있었다지만 사람을 아주 상호구로 봤나보네?'

진석은 제이스를 향해 웃어보이며 말했다.

"진짜 내가 걱정된다면 따라오지말고 여기서 기다려. 금방 돌아오지."

"러셀..."

그 말에 제이스는 아무말 못하고 제자리에 못박힌 듯 멈춰섰다. 뭔가 더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진석은 뒤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맥을 따라 사원을 빠져나갔다.

============================ 작품 후기 ============================

한 편만 놓고 가자니 짧은 것 같아 두 편 두고 갑니다. 손이 더디다 보니 열심히 쓴다고 쓰는데도 비축분이 안 늡니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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