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 -- > * 24화 *
밖으로 나가보니 사원의 뒤쪽에는 한 판 벌이기 좋은 적당히 너른 공터가 있었다. 맥은 목과 팔을 빙빙 돌리며 몸을 풀었다. 이따금 으득으득거리는 소리가 나는게 사뭇 위협적이었다. 몸을 풀던 맥은 진석에게 물었다.
"그러고보니 무기 쓸거야? 뭐 나야 상관없지만."
단검이 주렁주렁 메달린 진석의 벨트를 가르키는 맥. 그러고보니 맥은 그냥 맨몸이다. 비무장인 상대로 무기를 쓸 순 없지. 진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벨트를 풀어 옆에 던져두었다. 맥은 그 모습을 보며 맘에 든다는 듯 씨익 웃었다.
"하, 뭘 몰라서 그러는 거겠지만 날 상대로 맨손이라. 그 호기는 제법 맘에 드는데 그래."
"난 댁이 드럽게 맘에 안들어. 잔말 말고 시작하지."
손목을 가볍게 풀고 전투자세를 취하는 진석. 맥도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며 그 곰같은 거체의 중심을 낮추고 싸울 태세를 취했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된 공기. 먼저 움직인것은 맥이었다.
"카아아앗!"
그 거대한 덩치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간격을 좁혀 달려든다! 흡사 고속열차를 연상시키는 무시무시한 돌진. 아무리 자신이라도 저런 돌격을 정면에서 어떻게 할 수 있을리는 만무! 진석은 우측으로 피하며 타이밍을 맞춰 맥의 측면에 옆차기를 가했다. 정확히 맥의 갈비뼈 아래쪽으로 파고드는 발차기. 하지만,
"?!"
아무 반응이 없었다. 진석이 당황하는 사이 진석을 지나친 맥은 촤아악 흙먼지를 날리며 돌진을 멈췄다. 분명 회피 후 옆구리에 정확한 킥을 먹였음에도 전혀 공격당한 사람 같지 않았다. 맥은 당황스러워 하는 진석을 향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방금 뭐 했나? 너무 물러!"
"......"
그러고보니 맥은 전신이 근육이다. 정말로 완벽한 근육의 갑옷. 저런 탄력있고 두꺼운 근육이라면 평범한 공격따위 피해를 주지 못할것이 분명했다. 공격을 하는 틈에 핀포인트로 급소에 발차기를 꽂았다 생각했지만 돌진의 여파에 밀려 너무 얕았던 것이다. 맥은 그냥 쿵쿵거리며 진석을 향해 다가와 주먹을 휘둘렀다.
"고작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뭔가 더 보여줘봐!"
기술도 기교도 없이 그냥 안면을 향해 휘두르는 막주먹. 나는 공격하는 시늉만 낼테니 어디 네 재주껏 반격해보라는 의미였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도발에 진석의 머리통에 불이 들어왔다. 그래 어디 너 한 번 맛 좀 봐라. 진석은 주먹이 으스러질정도로 강하게 모아쥐며 전신의 힘을 끌어올렸다. 진석의 주위로 무형의 기류가 솟구쳤다.
"라파가!"
"음?!"
바일리 델 비엔토! 진석은 손에 단검이 없었음에도 과감히 자신의 전투용 스킬에 시동을 걸었다. 라파가는 빠른 숏대쉬 후 양손으로 교차 수평베기를 하는 기술. 하지만 기술을 빠른 대쉬까지만 전개하고 멈췄다. 그 다음은 대쉬의 속도를 살려 주먹을 날리면 됐으니까. 진석은 맥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르기로 파고 들어가 명치 부근에 전심전력의 초고속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꽂았다.
"크억!"
뻐어억! 둔탁한 타격음이 울려퍼지며 순간 맥의 거구가 아주 약간, 정말 눈꼽만큼이었지만 허공에 떠올랐다. 맥은 그저 자신과 진석의 체구차이만을 보곤 얕봤고, 제이스는 진석의 능력이 어느정도인지 정확히 몰랐다. 무력 45와 민첩 40, 정말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육체능력이었다. 물론 맥도 덩치에 걸맞는 강력한 무력을 지녔었지만 그보다도 진석이 한 수 위에 있었다. 명치에 일격을 먹고 멈칫한 맥에게 진석의 다음 기술이 날아들었다.
"오에스테!"
바람에 흘러가듯 가벼운 스텝을 밟으며 양팔에 쥔 검으로 원무를 펼치는 기술, 오에스테. 이번엔 꽉 쥔 주먹을 아래에서부터 한껏 휘두르며 원심력을 이용, 맥의 관자놀이를 향해 강력한 왼손 훅을 때려넣었다. 빠아악! 머리를 직격당한 맥의 거체가 흔들리며 옆으로 한 걸음 밀려났다. 몸이 근육의 갑옷을 입고 있다고 한들 머리통까지 근육인건 아닐터! 단 두 방을 맞았을 뿐인데 맥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허나 여기서 멈출 진석이 아니었다. 승기를 잡았을때 쐐기를 박아야 하는 법.
"토르멘타!"
짧은 순간, 육체의 한계를 초월한 속도로 움직여 간격안의 상대 전원에게 막을수도, 피할수도 없는 난무를 펼치는 기술. 그것을 양 주먹으로 시전했다. 진석의 주먹이 몇개로 분열한것처럼 보이며 어마어마한 속도로 맥의 전신을 강타했다. 퍼버버버벅! 흡사 두꺼운 북을 연타하는 것 같은 소리가 공터에 울려퍼졌다. 수초간 진석의 주먹은 쉬지않고 맥의 급소를 때려댔다. 자기 반밖에 안되는 체구인 진석의 폭풍같은 난타에 꼼짝도 못하고 얻어맞기만 하는 맥. 이미 눈동자의 빛이 흐려지고 있었다.
"마무리다, 라파가!"
연타를 맞은 여파로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참 물러난 맥에게 다시 한 번 숏대쉬를 거는 진석. 다다닷! 진석의 발이 좌우를 빠르게 박차며 순간이동하듯 간격을 좁혔다. 그리고 이미 자세가 흐트러질대로 흐트러진 맥의 안면 한복판을 노리는 섬전같은 피니쉬!
"자라!"
뻐어억! 진석의 주먹이 마치 내려찍듯 맥의 얼굴을 사선으로 강타했다. 그 펀치의 충격에 허공에서 한바퀴 빙글 돌며 바닥으로 쿠당탕 나동그라지는 거체. 땅에서 장렬한 흙먼지가 피어났다.
"......"
맥은 찍소리도 못하고 땅바닥에 얼굴을 박은채 기절해버렸다. 겨우 수십초만에 결착나버린 싸움. 승자는 진석이었다. 그것도 압도적인 승리. 진석은 바닥에 처박혀 정신을 잃은 맥의 모습에 이제야 좀 속이 풀린다는 듯 양 손을 탁탁 털며 바닥에 던져두었던 벨트를 주워들었다.
"나 원. 별게 다 사람 성질 건드리고 말이야."
바닥에 침을 한 번 퉤 뱉고 주섬주섬 벨트를 착용하며 길을 따라 다시 사원안으로 들어가는 진석. 안쪽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제이스는 혼자 들어온 진석의 얼굴을 보고 깜짝놀랐다.
"엇! 아니, 어떻게?"
"...어떻게라니! 사람 기분 나쁘게. 내가 이겼다 왜. 됐냐?"
진석의 퉁명스런 대꾸에도 대번에 기쁜 기색을 띄며 달려와 그를 끌어안는 제이스.
"아 정말. 나는 큰일나는줄 알았는데, 러셀 대단해!"
"으휴... 내가 미쳤지. 이런 애를 놓고 낯부끄럽게 그런 겨, 결투같은걸 벌이다니."
투덜거리는 진석이었지만 제이스는 그런 불만조차 귀엽다는듯 진석을 더 쎄게 끌어안고 자신의 가슴팍에 그의 얼굴을 당겨 파묻게 했다. 승리따윈 기대조차 않고 그나마 러셀이 덜 다치기나 바라고 있었을 따름인데 예상을 깨고 그가 맥을 꺾은것이다! 제이스로선 어떻게 된건진 몰라도 러셀이 이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게 놀라웠다. 게다가 말은 저렇게 해도 결국은 이게 다 자신을 위해 싸운것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맥의 입에서 자신과 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그에 대해선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다는게 고마웠다.
"응응. 잘했어 잘했어. 자, 상이야. 가슴 좋아하지?"
야 이게 뭐하는 짓이야? 사람을 뭘로 보고! 아니 뭐 가슴은 좋아하지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결국 제이스의 행동에 몸을 맡기는 진석이었다.
이후 저녁식사때까지 진석과 제이스는 방에서 쭉 서로 몸을 섞었다. 달리 진석이 하고 싶었던게 아니라 제이스가 덮쳐온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요구해왔음에도 결국 먼저 지쳐 쓰러진건 당연하게도 제이스 쪽. 절륜과 스테이터스의 보정으로 몇시간을 해도 끄덕없는 진석을 이길 수 있을리 없었다. 진석은 식사시간이 되자 다리를 후들거리면서도 헤실거리는 제이스를 질질 끌며 식당쪽으로 향했다. 제이스가 일러주길, 이 사원에서의 식사는 모두 다 같이 한다는 규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식당에는 사원에 상주하며 온갖 일을 돕는 이십명의 평신도와 대신관인 미리안, 그리고 낮에 진석에게 얻어터졌던 맥이 먼저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안은 제일 늦게 나타난 진석과 제이스를 보며 자신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사이가 좋은게 부럽군요. 어서 자리에 앉으시죠. 다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느, 늦어서 죄송합니다."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히는 제이스. 하지만 미리안은 그녀를 향해 마치 엄마같은 푸근한 미소을 지어보였다. 분명 외양만은 열 살의 어린 아이인데 그 얼굴로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걸까? 진석은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미리안은 둘이 착석한 걸 확인 후 운을 떼었다.
"자 그럼 다들 모였으니 이제 드십시다."
진석과 제이스가 자리에 앉자 바로 식사가 시작되었다. 식기가 달그락 거리는 소음과 더불어 여기저기 가벼운 담소가 오고가는 평범한 저녁 풍경이었다. 진석도 자기 앞에 놓인 음식을 먹으려는 찰나, 맥이 의자를 질질 끌고 오더니 진석 옆에 자리를 만들고 앉았다. 이놈이 왜 옆에 오는건가 싶어 노골적으로 거북한 표정을 짓는 진석. 그런 그의 어깨를 왠지 친숙한 태도로 팡팡 두드리며 하하 웃는 맥.
"이야~ 이거 아깐 내가 완패했어. 정말 앗 하는 순간에 정신을 잃어버렸으니까. 인정할께. 넌 나보다 강해!"
맥의 말에 식당안에서 밥을 먹던 평신도들 사이에 술렁임이 돌았다. 맥은 교단내에서 두번째로 강한 힘을 지닌 수호자인데, 그런 그가 오늘 처음 나타난 사내에게 패배하고 그가 더 강하다는 인정을 하다니? 신도들 입장에선 놀라운 일이었다.
"하긴 이만한 능력이 있으니 대신관님이 널 받아들인거겠지. 아무튼 낮엔 미안했다. 뭐 사과의 의미라기엔 뭐하지만 앞으로 난..."
거기까지 말하고 몸을 숙이더니 진석의 귓가에 아주 작게 속삭이는 맥.
"제시에겐 절대로 손끝하나 대지 않을테니까. 앞으론 둘이 잘 해보라고."
그렇게 말한 맥은 다시 하하 호쾌하게 웃으며 진석의 등등 팡팡 두드렸다. 멍청하니 그런 맥을 바라보는 진석. 혹시 아까 낮의 일로 앙금을 품고 뭔가 또 찝쩍거리려나 했는데 깔끔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자신과 제시와의 관계를 생각해 주는게 아닌가? 그야말로 남자다운 시원시원한 태도였다. 맥이 이렇게 나오니 진석은 되려 꽁한 감정을 품고 있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잠시 생각하다 마지못해 겨우 한 마디 했다.
"...그래 알았어. 고맙다."
"좋아좋아! 너처럼 강한 남자라면 대환영이지. 앞으론 잘 지내보자고!"
활짝 웃어보이며 악수를 청하는 맥. 얼굴 여기저기엔 진석에게 맞은 상처나 멍이 남아 있었음에도, 한점 그늘따윈 남아있지 않은 표정이었다. 진석은 이 맥이라는 녀석은 참 직설적이고 호탕한 성격이구만 하고 생각하며 묵묵히 악수를 받아들였다. 그러고 있자니 식당 내 모든 평신도의 시선이 전부 둘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진석은 수십명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받아들이며 밥을 먹으려니 목이 꽉 메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 소화 안되겠다 이거.'
게임에서의 식사가 소화 안될리 있나. 하지만 수많은 이목이 집중된채 밥을 먹으려니 분명 그 정도로 거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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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이른 시각. 진석은 어제 미리안의 제안대로 일어나자마자 대신관의 방으로 향했다. 어제 맥과 한 판 붙고나니 쓸데없는 긴장도 좀 풀렸고, 밤을 보내며 나름대로 생각한 바가 있었다. 문 앞에 다다른 진석은 두어번 가볍게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기다리고 있었다는듯 안쪽에서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진석은 후우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간밤엔 편안하셨습니까."
"...뭐, 덕분에."
차분히 테이블에 앉아 진석을 기다리고 있던 미리안. 머리를 땋고 원피스를 입고 있던 어제완 달리, 오늘은 전신을 감싸는 하얀색 법복 같은것을 걸치고 있었다. 진석은 최대한 태연한 모습으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후후... 이제서야 하는 이야기지만, 어젠 맥을 가볍게 쓰러트리셨다는걸 듣고 저도 꽤 놀랬었습니다. 맥은 강한 아이인데."
"그야 뭐 내가 더 강했으니까."
"목소리가 굳어있는게 아직까지 긴장하신 것 같군요. 지금은 단 둘 뿐이니 좀 더 편하게 대하셔도 된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스윽 일어나는 미리안. 타박타박 진석의 바로 앞까지 걸어오더니, 싱긋 웃으며 그의 무릎 위로 걸터앉았다. 진석은 깜짝 놀랐지만 미리안은 등을 스윽 기대오며 고개를 뒤로 돌려 진석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아니..."
"러셀님과 저. 이렇게 둘만 있을땐 어제 제가 그냥 평범한 아이인줄 아셨을때처럼 편하게 대해주셔도 됩니다. 그런 어린아이 대접을 받은건 저도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러셀님이 어떤 사람일까 떠 본 행동이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더군요."
생긋. 어제 보여준 그것과 같은 티없이 밝고 환한 웃음. 오늘은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온 진석이었건만 상대가 이렇게 나오니 어떻게 해야 할 지 난감했다.
"어차피 러셀님이 우리에게 힘을 보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거대로 상관없겠지요. 강림의 준비는 이미 태반이 끝났습니다."
"...!"
"물론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도 여전히 힘들고 어렵습니다. 아직도 많은것이 필요하지요. 하지만 거의 눈 앞. 수십년에 걸쳐 공을 들인 준비는 이제 몇 걸음만 더 디디면 끝납니다. 이런 상황에, 러셀님도 제시를 따라 여기까지 찾아 온 이상 굳이 더 고민할 필요가 있으신가요?"
꼬옥. 미리안의 작은 손이 진석의 손을 감싸쥐었다. 미리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몸을 좀 더 진석에게 밀착시켰다. 움찔하고 진석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히 굳는게 느껴졌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왠지 러셀님이 싫진 않습니다. 후후. 어쩐지 제시가 부럽군요."
"......"
"뻔뻔하게 이런 부탁 드려도 될진 모르겠습니다만... 다시 한 번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실 수 있나요? 어제처럼."
또 다시 어제처럼 아무것도 못한채 미리안에게 상황의 주도권을 내주고 만 진석. 얘기 해오는 내용에 따라서 강하게 나가볼까도 했지만, 이런식으로 나오는데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잠시 고민하던 진석은 결국 손을 뻗어 미리안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아..."
눈을 감고 기분 좋다는 듯 진석의 손길을 느끼는 미리안. 진석은 분명 본인이 미리안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상황임에도, 되려 그녀가 자신을 어린아이 다루듯 능숙하게 어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한 판단이었다. 미리안은 어제 진석에게 평범한 아이처럼 가장하고 있었을때 확인한 모습과 제이스에게 들은 이야기로 미루어 눈 앞의 남자가 나름 불한당을 가장하고 있지만 진짜 악당은 되지 못할, 적당히 무른 성격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자신의 애인을 죽인 원수인 제이스에게 되려 설득당해 여기까지 찾아 온데다가 그녀와 붙어다니며 희희낙락 하는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투철한 목적의식이 있기보단 적당한 이득이나 즐거움을 찾아 움직이는 성격임이 확실했다. 거기에 자신이 나름대로 공들여 키운 수호자 제이스와 맥을 혼자서 쓰려트렸다는 점을 봐도 절대 놓치기 아까운 실력자인건 확실. 처음 보는 아이에게도 상냥하게 대해주던 그라면 자신이 이런식으로 나왔을때 제안을 거부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미리안은 몸을 슬쩍 돌려 진석의 품에 파고들었다.
"따스하고... 기분 좋군요 러셀님의 품은. 오빠라는 존재가 있다면 분명 이런 느낌일까요?"
진석이 아이에게 약한 성격임을 파악하곤 그런 말로 자연스레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미리안. 진석으로선 눈앞의 상대를 미워하거나 경계할래도 도저히 그럴수가 없었다.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어린 소녀가 정말 세계를 말아먹으려는 사교집단의 수괴란 말인가? 아니, 뭐 분명 맞기야 하겠지만... 이렇게 여리고 귀여운 아이를 어찌 자신의 손으로 해칠 수 있겠는가? 높은 자유도를 보장하는 성인용 게임이었기에 갖은 막장짓을 다 해본 진석이었지만 어린 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해친다는 것은 차마 상상도 못해봤었다. 그 알맹이는 분명 소녀가 아닌 백살에 가까운 허신의 권속이라는걸 알면서도 차마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었다. 미리안은 마치 새끼고양이가 어미의 품속에 파고들듯 꼬물꼬물 진석의 품안으로 파고들며 말했다.
"다른 이들이 있을때는 안되겠지만 앞으로 이렇게 둘만 있을땐... 오빠라고 불러도 되겠죠?"
품이 넉넉한 법복속에 가려진 작고 가녀린 열 살의 체구. 조심스레 자신을 올려다보며 대답을 기대하는 반짝이는 눈동자. 너무나 순진무구한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진석은 도저히 거부의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그랬다간 자신이 여자아이의 사소한 부탁마저 거절하는 인간쓰레기가 되는게 아닌가 싶은 지경이었으니.
"...으... 그... 그래."
"고마워요, 오빠. 후후."
미리안은 짧은 양 팔을 뻗어 진석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진석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부비부비 볼을 비볐다.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지만 진석의 눈엔 미리안의 몸짓 하나하나가 몸서리 처지도록 귀여울 따름이었다. 정말 그냥 어린 여동생이 좋아하는 오빠의 품에 안겨 재롱을 부리는것만 같았다.
'하... 할 수 없잖아. 이 상황에서 얘를 내던지기라도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한참 애교를 떨던 미리안은 이내 하던짓을 멈추고 진석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오늘부로 오빠는 다섯번째 수호자로서 앞으로 교단을 위해 절 도와주세요."
"...알았다."
"고마워요. 상냥하시네요."
그리고 몸을 일으켜 진석의 볼에 가볍게 자신의 입을 쪽 맞추는 미리안. 미리안은 갑작스런 뽀뽀에 당황해하는 진석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곤 그의 가슴에 자신의 두 손을 얹었다.
"하아. 제가 이런 몸만 아니었던들... 한 번이라도 좋으니 오빠 같은 사람과... 또 하는 소리지만 정말이지 제시가 부럽네요."
미리안은 살짝 볼을 상기시키며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지었다. 방금까진 그저 순진무구함 뿐이던 그 어린 얼굴에 일순 묘한 색기가 흘렀다. 진석은 깜짝 놀라 미리안을 자신의 무릎에서 떼어 내려놓았다. 아무리 진석이 밝힌다고 해도, 어린 아이를 상대로 그런 마음을 품는 일은 절대 없었다.
"아, 안돼! 무슨 소릴 하는거야 지금!"
"후후훗, 농담이에요. 저도 해선 안될 일 정도는 안답니다."
웃음을 지어보이면서도 한 켠으로 쓸쓸한 기색을 내보이는 미리안. 변화무쌍한 미리안의 태도를 보고 있는 진석의 머릿속엔 상대가 백 살에 가까운 노회한 악의 장이 아닌, 흡사 무슨 저주로 성장이 멈춰버린 가련한 여자아이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빨리 허신을 강림시켜 세상에 영구한 평온인가 뭔가를 오게 만드는게 미리안을 그 고통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해답처럼 생각되었다. 진석으로 하여금 되려 자신을 보호하고 도움을 줘야 할 대상처럼 느끼게 만드는 미리안의 노림수가 정확히 먹혀들어간 것이다. 몇 마디 말과 몸짓만으로 상대의 심리를 능숙히 다루는 그 모습은 정말로 사교의 장 다웠다. 미리안은 자신의 의도에 홀딱 넘어간 진석을 향해 귀엽게 윙크하며 살짝 혀를 내밀어보였다.
"흐흥, 제시와 둘이 알콩달콩한게 눈꼴 시려워서 그냥 한 번 심술 좀 부려봤어요."
"으... 끄응."
"그보다 슬슬 배고프시죠? 이제 식사하러 가지 않을래요?"
그러고보니 식전이다. 하긴 일어나자 마자 여기로 왔으니. 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리안은 해맑게 웃으며 진석에게 자신의 손을 내밀어 보였다.
"같이 손 잡고 가요 오빠. 아, 물론 다른 사람들 앞에선 오빠라고 부르지 못해도 이해해 주셔야 돼요?"
"...그래."
이렇게해서 진석은 완전히 미리안에게 넘어가버렸다. 세상의 멸망을 위해 암약하는 허신 헤세스모데우스 교단의 다섯번째 수호자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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