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25화 (25/155)

< --   - 3.   -- >         * 25화 *

이후 며칠에 걸쳐 사원에 머무는 동안 미리안은 교단내에 진석이 정식으로 다섯번째 수호자가 되었음을 알렸다. 그 동안 제이스와 맥 이외의 다른 두 수호자도 만날 수 있었다. 창을 주무기로 쓰는 교단의 챔피언 드레비안과 약학에 능통하며 제이스처럼 특별한 비전마법을 구사한다는 머서, 그 둘이었다. 마른 체구에 안경을 쓴 머서는 수호자들 중 나이가 가장 어렸으며, 내성적인 성격으로 말수가 적은데다 진석을 굉장히 낯설어했다. 제이스가 알려주길 머서는 자주 밖으로 나도는 일을 맡는 나머지 세 수호자와는 달리 평상시엔 헤세스 약품 통상 내의 연구팀에서 신약의 개발 및 연구업무를 하거나, 수확한 타마엘 초를 마약으로 가공하는 업무를 전담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챔피언인 드레비안은 진석이 보기에도 굉장한 미남이었는데 몸의 근육이 마치 그리스 조각상마냥 아름답고 균형이 잡혀 있었다. 그런데 드레비안은 내성적인 머서보다도 말 수가 적은데다 표정의 변화도 아예 없는게 이건 뭐 사람이 아니라 흡사 로봇을 상대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호자의 업무는 전부 대신관인 미리안이 지시한다고 했다. 그 주기는 들쭉날쭉 하기때문에 임무가 쉴 틈 없이 몇 달 동안 쭉 이어지는 때도 있는가 하면, 이따금은 일이 없어 몇 주씩 사원이나 갈론에서 머물며 탱자탱자 놀기도 한다고 했다. 지금 당장은 맡길 일이 없는지 아무런 지시도 없었기에 진석은 제이스와 딱 달라붙어 마치 신혼부부마냥 매일밤 몸을 섞으며 탱자탱자 보냈다.

그렇다고 아주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진석은 우선 머서에게 접근했다. 내성적인 머서였지만 자신도 약학을 어느정도 익혔다는 것을 알려주자 반색하며 좋아했다. 그간의 낯설어 하던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약학에 대해 줄줄 떠들어대는 모습은 자신의 전문 분야를 사랑해 마지 않는 학자처럼 보였다. 머서에게서 약학의 비법을 좀 배우고 여러 약초를 얻어 틈날때마다 약의 제조 연습을 했다. 더불어 화염화살의 연습도 꾸준히 했는데 덕분에 약학과 화염화살의 랭크를 한 단계씩 올릴 수 있었다. 이제 진석의 약학은 B랭크, 화염화살은 C랭크에 도달해 있었다.

맥과 드레비안과는 셋이서 번갈아 가며 대련을 했다. 맨손으로 할 때도 있었고 무기를 장비하고 할 때도 있었다. 맨손으로 겨룰때는 진석, 맥, 드레비안 순으로 강했다. 무구의 보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스테이터스가 높은 진석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던 것이다. 허나 무기를 쓰면 놀랍게도 진석과 드레비안이 평수를 이루고 맥은 되려 한 수 떨어지는 편이었다. 물론 진석이 전심전력을 다한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드레비안 쪽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드레비안이 창을 다루는 솜씨는 정말 귀신같은게 그대로 아무 나라에 던져놔도 창술 하나만 가지고 장군의 자리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정도였다. 그리고 맥은 엄청나게 두꺼운 중장갑을 입고 사람 몸통만한 너비의 대형검을 무기로 사용했는데, 어마어마한 완력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괴적인 검격은 일품이었다. 그대로 전장에 나선다면 일반 잡병 일이백쯤 혼자서 단숨에 쓸어버릴듯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새 게임을 시작 전 세팅해둔 타이머의 시간이 다 되었다는 알림 메시지가 떠올랐다. 3시간 어치의 기간인 18일째의 아침에 도달한 것이었다.

'이런. 벌써 이렇게 됐나?'

진석은 지금까지 진행한 플레이 내역을 저장하기 위해 사원에 있는 자신에 방에서 게임을 종료시켰다. 게임을 종료한 후 헤드 기어를 벗자 해가 떨어져 어둑해진 창밖의 풍경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후우..."

현실에선 3시간일 뿐이었지만 게임 속 세계에선 2주 반이나 되는 긴 시간이었다. 약간의 피로감이 몰려왔다. 진석은 벗은 헤드기어를 옆에 내려두곤 의자에 몸을 기대며 잠깐 자신의 플레이를 돌이켜 보았다.

"해밀턴시에서 시작. 강도짓부터 저지르고... 에나를 얻었지. 그란델의 수도 데오그라즈로 간 이후 폭력조직을 털면서 이상한 나무 막대를 손에 넣었지만, 그걸 되찾으러 온 제이스에게 에나가 살해당하고... 제이스를 붙잡아서 설득 당하는 척 메디니아에 위치한 교단에 잠입하다보니 되려 수호자라는 직위까지 받아버렸네."

아무생각 없이 플레이 한 것 치곤 꽤나 파란만장한 결과였다. 하지만 늘 대륙통일이라는 목표만 따라가다 방랑자로서 자유롭게 살아가는건 의외로 재밌었다. 그러나 캐릭터를 만들때 스테이터스 분배에서 조금 후회되는점도 있었다. 그냥 통솔과 정치력은 버리고 무력과 민첩이나 마저 올리는게 더 좋았을것을.

- 꼬르륵.

"어... 또 배고프네."

3시간 전에 밥을 먹긴 했지만 찬밥과 반찬 몇조각이라는 부실한 식단으로 때워서인지 다시 배가 고파졌다. 우선 화장실이나 들렀다가 편의점에라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따르르릉!

타이밍 좋게도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윤재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서진석의 불알친구였다. 이 녀석은 전역한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었는데, 이런 저녁 시간에 전화를 한 걸 보니 술이라도 한 잔 하자는걸까 싶어 얼른 받았다. 하지만 재한이 꺼내온 용건은 생각과 다른 것이었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다리를 다쳤는데 이게 의외로 심해서 전치 1개월이나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집에만 틀어박혀있느라 심심해 죽겠다고? 배부른 소리하고 자빠졌다. 만날래? 술이나 빨자."

"야 나 지금 술 못먹어. 약 타다 먹고 있는게 있어서. 그리고 다리 다쳤다니깐? 내가 이 다리를 끌고 어딜 나가겠냐. 니가 우리집으로 놀러올래?"

"내가 뭐가 아쉽다고 주말 저녁에 사내새끼 집엘 놀러가냐? 할 거 없음 VR 기어 사다 게임이나 해."

"근데 VR 기어 꽤 비싸지 않냐? 그리고 예전에 VR 게임 해본 기억으론 뭐 그냥 그랬었는데..."

"원래 해외 여행 가려고 돈 좀 모아둔거 있다면서? 여행 못가게 됐으니 그걸로 사면 되지. 그리고 게임은 한 번 해보면 알거다. 중고딩때 하던거랑 요새 나온 성인용 VR 게임은 진짜 차원이 달라."

그런식으로 잠깐 별반 대단찮은 잡담을 나누다 전화를 끊었다. 진석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래도 친구놈이 다쳤다니 나중에라도 한 번 들러 얼굴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진석은 재킷을 걸치고 요깃거리를 사러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에서 적당히 먹을걸 사온 진석은 TV를 보며 요기를 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VR 기어를 켜고 헤드기어를 눌러썼다. 현재 시간은 오후 8시 반. 그리고 어차피 내일은 일요일이니 이번엔 어디 그냥 되는데까지 해보자 마음먹고 타이머의 세팅 없이 게임을 시작했다. 너무 봐서 지겨울 정도인 인트로를 스킵 한 후 이전에 저장해둔 게임을 익숙하게 로드했다. 수십초간의 짧은 로딩 후, 눈 앞이 밝아지며 진석은 다시 리베라의 세계로 발을 들였다.

"일~어나~라~"

"......"

방랑자의 여정이 시작된지 18일째의 아침. 분명 사원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침대에 누운채로 게임을 종료했었는데, 어째선지 자신의 눈 앞에 제이스가 올라타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오므린채 음후후 웃는게 어째 고양이가 연상되는 표정이다.

"잘 잤어? 이쪽은... 어라? 기운이 없잖아?"

손을 뻗어 진석의 바지 위를 더듬는 제이스. 게임을 종료하기 전 아침에 일어났다가 다시 누워서 게임을 종료했던터라 아침 발기가 되어있을리는 없었다. 아니, 애시당초 게임이지 현실이 아니라고. 아침 발기는 무슨 아침 발기? 하지만 제이스는 진석의 속내도 모르고 멋대로 떠들어댔다.

"호... 혹시 몸이 어디 안 좋아?"

"......"

"아니면 설마! 내가 질렸어?"

"......"

"그래서 다른 여자랑 자기라도 한거야? 몇 시간을 해도 수그러들지 않던 물건이 아침부터 이렇게 요지부동이 될 정도로? 너무해!"

"듣자듣자 하니 별 소리를 다하고 있네."

진석의 위에 올라탄채 가슴으로 꾹꾹 압력을 가하며 장난스레 떠들어대는 제이스. 진석은 그런 제이스를 양팔로 와락 끌어 안고 자기 옆에 눕혔다.

"꺗! 어머, 무슨짓이야! 이 짐승!"

제이스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스스로 자신의 옷을 하나씩 벗어제끼고 있었다. 기대하고 있었다는듯한 신속한 동작이다.

"야. 실실 웃으면서 그런말 해봤자 설득력 없거든?"

아침부터 침대위에서 만담을 나누며 하나 둘 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이 되는 진석과 제이스. 완전히 서로에게 익숙한 연인과 다름 없는 모습이었다. 제이스는 진석이 자신의 몸 위로 올라타자 진석의 목을 감싸안으며 행위에 들어가기 좋게 다리를 벌리고 허리를 밀착시켰다.

'아니 근데... 내가 왜 아침부터 얘한테 이렇게 휘둘려야되지?'

그럼에도 물건은 이미 준비 만전이다. 진석은 속으로 스스로의 꼬락서니에 한심함을 느끼며, 달뜬 재촉의 신호를 보내오는 제이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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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식사도 있고 하니, 행위는 평소보다 짧게 끝났다. 짧았다고 해도 진석은 연달아 세차례나 사정했다.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제이스와 욕실에서 함께 씻은뒤 식당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둘이 제일 늦었다. 이미 사원내의 신도들이나 다른 수호자들도 둘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때문에 달리 타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미리안만이 놀리는듯한 미소를 띄며 둘을 향해 말했다.

"아침부터 기운이 넘치는건 좋지만... 매번 식사시간에 늦는건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네요."

"에... 뭐, 죄송. 다 얘 때문에. 매일매일 쥐어짜지는 입장도 힘들어요."

진석은 제이스를 가르키며 지쳤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진석도 교단의 분위기에 꽤나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진석이 새로운 수호자로 임명되고나자 다른 평신도들도 태도도 여느 수호자를 대하듯 정중하고 공손해져 있었으니, 그런 대접이 썩 싫진 않았다. 제이스는 능청을 떠는 진석의 태도에 얼굴을 붉히며 그의 등짝을 때리곤 자리에 앉았다. 진석도 제이스의 옆에 앉았고 곧바로 아침식사가 시작되었다. 다같이 둘러앉아 따뜻한 아침밥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이들이 세계를 멸망시키려 드는 교단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정도로 평화로웠다.

"아참. 식사 후에 수호자 여러분은 제 방에 들러 주시기 바랍니다."

식사 도중, 미리안이 전언을 고했다. 진석은 따끈따끈한 흰빵에 버터와 잼을 듬뿍 발라 입에 집어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뭔가 일거리를 던져주려는 모양이군 하고 생각했다.

식사를 마치고 진석을 포함한 수호자 다섯은 함께 모여 미리안의 방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흰색 법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미리안이 진지한 표정으로 책상에 앉아 몇가지 서류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일단 다들 앉으세요."

미리안은 손을 멈추지 않으며 수호자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다섯이 자리를 잡고 앉은뒤에도 미리안은 계속 서류에 뭔가를 적어나가며 말했다.

"한 동안은 계속 바쁠겁니다. 일단 이번엔 세 가지 일거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거기까지 말을 하다 멈춘 미리안은 서류 말미에 슥슥 사인을 하고 인장도 찍은 뒤 둘둘 말아서 그것을 밀납으로 봉인했다. 미리안은 힘들다는듯 후우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봉인된 서류를 들어보였다.

"우선 이것. 애거스트 공화국의 지부에 직접, 가능한 최대한 빨리 전달해야 합니다."

첫번째는 중요 서류의 배달건이었다. 애거스트 공화국은 메디니아의 서쪽에 자리한 나라로, 정치나 철학등의 사상이 대단히 발전한 나라였다. 마을이나 도시는 각 구획별로 주민대표를 뽑았고, 주민대표들이 재차 모여 투표로 의원을 선출했다. 그렇게 선출된 의원들은 정당을 세우고 총리를 선출해 나라를 이끌 지도자를 뽑았다. 원래 왕정제이다 공화제로 전환된 나라라 귀족들이 아예 없는것은 아니었지만 다른나라에 비하면 그 세가 무척 약했고, 뭇 왕정제 국가들의 곱지 못한 시선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부근의 나라들 중 누구보다도 가장 뚜렷한 발전세를 보이고 있는 나라였다.

"음... 머서?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너무 쉬운 일이라서일까. 아무도 자원하지 않기에 미리안은 직접 머서를 지명했다. 그냥 빨리 서류 배달만 하면 되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기에 수호자 중 전투력으론 떨어지는 편인 머서를 지명한 것이었다. 예전같으면 넷 중 가장 약한 제이스에게 시켰을테지만 미리안이 보기에 지금의 제이스는 진석에게 딸린 2인 1조의 세트였다. 일거리가 너무 많아서 다섯명이 전부 단독으로 움직여야 할 정도의 상황이 아닌 이상 일부러 둘을 떨어트릴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진석의 전투능력은 수호자 중 가장 강력한 드레비안과 호각, 혹은 그 이상으로 보이는데 제이스와 함께 서류 배달이나 시킨다는건 분명 낭비였다. 미리안은 머서에게 서류를 건네며 한 마디 덧붙였다.

"정확히 이틀 이내에 도달해야 합니다. 타마엘 초의 정제는 믿을만한 직원들에게 맡겨두고 지금 바로 출발해주세요."

"네, 그럼 즉시."

서류를 넘겨받은 머서는 그것을 품에 넣고 바로 방을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임무는 두가지였다. 미리안은 깃털펜을 들어 잉크를 찍곤 또 다른 서류에 뭔가 적어나가며 다음 일거리를 설명했다.

"갈론 동쪽의 항구도시 에베스 말인데요. '해적 군도'에서 세력경쟁에 밀린 해적단 하나가 내려와 부근에 자리를 잡고 상선을 마구잡이로 약탈하는터라 피해가 심각하다고 하네요. 뭐, 눈치껏 해먹었다면 해적들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을테지만... 우리쪽 화물선도 한 척 나포당해서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두 번째는 해적떼가 상대인 모양이었다. 호전적인 맥의 얼굴에 재미있겠다는 표정이 걸렸다.

"오, 바퀴벌레 소탕입니까? 제가 하죠."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나서는 맥. 미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믿음직하네요. 그러면 드레비안도 같이 가주세요."

"알겠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드레비안. 그는 굉장한 미남자였지만 언제나 저렇게 아무 표정이 없었다. 진석은 그 이유가 궁금하긴 했지만 에이 사내놈 과거사 따위 내가 알게 뭐야 하면서 무시했다. 단지 표정이 없고 정말 필요할때 이외엔 말수가 극단적으로 적어 무뚝뚝해 보일뿐이지, 대련 뒤에 보면 먼저 땀을 닦을 수건이나 마실걸 건네준다거나 하는것을 보아 눈치나 붙임성마저 없는것은 아니었으니까. 드레비안과 같이 가라는 말에 맥은 불만을 표시했다.

"일개 해적단따위는 저 혼자서도 충분한데요? 그깟 쓰레기들 상대로 드레비안까지 보내는건 낭비인데."

"맥. 처음에 말했었죠? 한 동안 바쁠거라고. 그러니 둘이 협력해서 가능한 신속하게 처리해줬으면 좋겠네요. 그 다음에 할 일도 잔뜩이니까. 지부를 통해 전서구를 보내둘거에요."

"그런거라면... 알겠습니다."

먼저 나간 머서의 뒤를 이어 맥과 드레비안도 함께 방에서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건 진석과 제이스. 미리안은 진석을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 마지막 일감입니다. 제시와 러셀님. 둘은 그란델 왕국의 수도 데오그라즈로 가주셔야겠어요."

"...데오그라즈에?"

데오그라즈의 이름이 나오자 진석은 2주 전의 일들이 떠올랐다. 난리를 피웠던 건으로 수배가 걸려있을지도 모르는데 거길 또 가야한단 말인가? 진석은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미리안은 그런 진석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걱정마세요. 러셀님의 수배 따윈 걸려있지 않으니까요. 제가 확인해봤습니다."

"...!"

진석은 깜짝 놀랐다. 매일 방에 틀어박혀 식사 시간을 제외하곤 뭔가 서류더미에 파묻혀 지낸다 싶더니 어느새 그런것까지 파악하고 있었던걸까? 허나 진석이 몰랐을뿐이지 대륙 곳곳엔 수호자들도 잘 모르는, 미리안이 심어둔 '눈'이 많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수십년전 교단의 세력을 키울때부터 암약해온 여러 '원로'들 역시 대륙 곳곳에서 미리안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거나 지금도 여러가지 일에 손대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메디니아의 최대 교역국 중 하나인 그란델 왕국의 현황도 손바닥 보듯 하고 있었다. 그녀 자신이 허신에게 하사받은 힘도 어마어마했지만, 오랜 시간을 들여 구축한 이 정보망이야 말로 그 정수였다. 미리안은 손에 쥐고 있던 깃털펜을 빙글빙글 돌려보이며 말했다.

"음... 사실 마지막 일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우선 페레나 시에 들러 빅 본과 접촉해 그들의 조직원들과 합류해서 데오그라즈로 가셔야합니다."

"빅 본이라면... 그 범죄조직 맞지?"

진석의 물음에 미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러셀님의 활약... 이랄까? 간부와 주요 전투원들을 몽땅 제거하신 탓에 빅 본의 데오그라즈 지부가 큰 피해를 입었고, 그 사이 라이벌 조직인 레드라인에 밀려 엉망이 되었다며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거든요. 빅 본은 아직 이용가치가 있으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

경위를 설명하며 난처하다는 웃는 미리안. 2주 전, 데오그라즈의 베이머스 호텔에서 벌였던 일전 때문이리라. 그때 진석은 빅 본의 데오그라즈 지부장인 래스커와 그 오른팔인 덱, 그리고 주요 전투원들을 혼자서 모조리 죽였었다. 지부장과 핵심인력을 잃은 빅 본의 지부는 그렇지 않아도 상대 조직인 레드라인과 대립중이었는데 이 건으로 영업장까지 하나 빼앗기며 크게 밀리게 된 것이었다.

"...그, 그래서?"

"페레나 시에서 합류한 그들을 이끌고 데오그라즈에 가서 레드라인을 적당히 손봐주셨으면 합니다. 격멸할 필요까진 없어요. 어디까지나 적당히. 균형을 살짝 빅 본쪽으로 기울이는 정도면 충분하지 손 안대고 코풀게 해줄 필요까진 없거든요."

그렇게 설명하며 익숙한 손놀림으로 다음장의 서류에 손을 대는 미리안. 또 뭔가를 슥슥 적어나가며 말을 이었다.

"뭐 아무튼 그 건은 재량껏 처리해주시면 됩니다. 중요한 건 그란델 왕실이 해신제에서 신기 폭풍의 지팡이를 선보였다는 것이지요."

미리안의 눈빛이 이채를 띄었다. 서류를 적어나가던 손을 멈추고 깃털펜을 잉크병에 꽂아 둔 채 턱을 괴었다.

"해신제 마지막 날 왕자가 시민들과 초대받은 귀빈들의 앞에서 폭풍의 지팡이를 이용해 폐선을 박살내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던가요... 귀족의 세가 강하고 왕권이 약한 그란델 왕실이니만큼 우연히 손에 넣은 신기로 무력시위를 선보여 대중의 지지를 얻고자 한 행동이었을테지만 어불성설. 자신들이 보유한 전력을 그런식으로 일반에 선보이다니 바보짓도 정도가 있습니다."

어린 소녀의 얼굴에 싸늘한 조소가 떠오른다. 쿡쿡거리며 잠시 웃던 미리안은 이내 표정을 되돌려 평소의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폭풍의 지팡이가 필요합니다. 그만한 신기에 잠재된 마력이라면 헤세스모데우스님의 강림을 위한 제단 완성이 한결 수월해지겠지요."

거기까지 말한 미리안은 잉크병에 잠겨있던 깃털펜을 쥐고 다시 서류에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란델 왕궁에 잠입해 폭풍의 지팡이를 가져오세요. 쉽진 않겠지요. 빅 본의 조직원들을 이용하는 것도 좋을겁니다. 세부적인건 모두 일임하겠습니다."

미리안은 책상의 서랍을 열곤 뭔가를 꺼내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진석은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들었는데, 다름아닌 수표뭉치였다.

"이건..."

"데오그라즈 은행에서 발행한 백 골드 짜리 수표 오십장. 오천골드입니다. 한 나라의 왕실을 털기 위한 공작금으론 너무 적은감이 있지만, 앞서 말한 해적들 때문에 화물선이 피해를 입은터라 이번달엔 예산의 여유가 별로 없어서..."

"......"

진석의 입이 말 없이 쩍 벌어졌다. 이만한 금액을 별거 아니라는 듯 툭 내놓다니. 예산의 여유가 없어서 내놓는게 오천골드면 여유가 있을땐 어떻다는 말인가? 진석은 새삼 제이스가 강조하던 교단의 힘이라는게 이런거구나 실감했다. 미리안은 놀란 표정을 짓는 진석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남는건 반환할 필요 없이 러셀님이 전부 가지셔도 상관없습니다. 앞으로도 교단을 위해 일해주실 소중한 수호자인데 겨우 돈 몇 푼으로 덮는것 같아 좀 그렇지만..."

크으, 배포도 크구나! 진석은 미리안의 통큰 씀씀이에 일 할 의욕이 불끈 샘솟는걸 느끼며 수표를 품에 챙기며 제이스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이 방을 빠져나가는 찰나, 뒤에서 미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수고해주세요, 오빠."

타악. 문이 닫혔지만 마지막 말은 제이스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제이스는 놀란 토끼눈을 하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진석의 옷자락을 쥐고 한 쪽 구석으로 끌고가 따지듯 물었다.

"너... 너! 대신관님에게 무슨 짓을 한거야? 오, 오, 오, 오빠아?"

무슨 생각을 한건지 파랗게 질려 진석의 옷깃을 쥔채 마구 흔들며 답변을 채근하는 제이스. 진석은 미리안이 심술을 부려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구나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서, 설마... 대신관님께... 손을 댄거야?!"

"......"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는게 어처구니 없어서 진석이 대꾸조차 하지 않자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인건지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며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는 제이스.

"이런 미친 짐승같은... 대, 대신관님에게... 그 작은몸에... 구멍만 있으면 누구라도 가리지 않는다는건가... 나는 이런 쓰레기같은 남자가 좋답시고..."

"...뭐 임마?"

그냥 둘이 있을땐 오빠로 부르기로 했다고, 너와 내 사이가 너무 보기 좋아서 심술을 부린거라며 제이스에게 대강의 사정 설명을 해준 진석. 제이스는 하긴 아무리 너라도 대신관의 힘엔 발끝도 미치지 못할테니 강제로 그런일을 한건 아니겠구나 하며 제멋대로 납득하곤 오해를 풀었다.

"...그러고보니 괜히 나만 욕 먹었잖아? 야 사과해. 뭐? 짐승? 쓰레기? 너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거냐?"

"흐응. 쓰레기는 취소하더라도... 짐승은 맞잖아? 그 숲속에서의 일 생각안나? 난 정말 죽는줄 알았는데."

"해보라며 다리를 쩍 벌려댄게 누군데. 이 쩍벌녀야."

"쩌, 쩍벌녀어~? 그렇게 치면 러셀은 파렴치한 강간범이잖아!"

"그 강간범에게 모닝 섹스를 하러 제 발로 찾아오는 시점에서 끝난 이야기라고 생각되지 않냐?"

둘은 티격태격하며 짐을 챙겨선 함께 사원을 빠져나왔다. 사원의 입구엔 평신도들이 미리 마차를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진석과 제이스가 예전에 타고 올 때 사용한 그 마차였다. 진석은 마차 안에 짐가방을 던져놓곤 마부석에 앉았다. 제이스도 입을 삐죽 내밀곤 혼자 툴툴거리면서도 짐을 안에 넣어두곤 진석의 옆에 앉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진짜 좋아하긴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 작품 후기 ============================

이쪽의 주인공인 서진석은 부회의 방랑자라는 성인용으로,

서진석의 친구인 윤재한은 견진의 여기사라는 전연령용으로 두 가지 글을 동시에 써보려고 했었는데...

둘을 한꺼번에 쓰는건 제 역량으로는 무리더군요. 전연령판은 쓰다 던졌습니다.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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