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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26화 (26/155)

< --   - 3.   -- >         * 26화 *

사원에 올때의 길을 거꾸로 거슬러 갈론에 도착한 진석과 제이스는 우선 시장에 들러 보급을 했다. 물론 메디니아를 벗어나기 전에도 마을이 있긴 했지만 동네 잡화점 수준이었으니 수도인 갈론에서 미리 구입하는게 나았다. 마차로 이동한다고 해도 페레나 시까지 족히 5, 6일은 가야하고 두 나라의 국경사이는 마차촌조차 없는 공백지 였으니 두 사람 몫이라고 해도 제법 넉넉히 준비를 했다.

"배를 타고 가면 편한데."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음식 위주로 구입해 마차를 채우던 제이스는 볼멘 소리를 냈다. 며칠간 마차를 타고 전전하며 또 야숙을 해야된다는게 싫은 모양이었다. 갈론에서 동쪽으로 반나절 거리에 있는 항구도시 에베스. 맥과 드레비안이 향한 그 에베스라면 정기선을 타고 데오그라즈까지 이틀이면 닿을 수 있었다. 진석은 상인에게 물건값을 치르며 대답했다.

"하지만 페레나 시에서 빅 본 녀석들을 달고 가야 하니까."

"그거 말인데. 그냥 저희들끼리 가면 되는거 아냐? 왜 우리가 데려가야 하지? 보모노릇도 아니고, 참 나."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어차피 행선지가 데오그라즈라면 각자 알아서 간 다음 나중에 만나면 될 것을. 진석도 의문스럽긴 했지만 별 다른 생각이 떠오르진 않았다.

"글쎄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내버려두고 배를 타고 갈수도 없잖아? 명령이니까."

"뭐 그렇긴한데... 아 정말."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리는 제이스. 모처럼 특유의 히스테릭한 표정이 튀어나왔다. 눈꼬리가 날카롭다보니 좀만 인상을 써도 저런 얼굴이 되어버리는게 신기했다. 진석은 피식 웃으며 제이스에게 물었다.

"그보다 술도 좀 살까? 뭐가 좋아?"

"응- 비싼거. 마차에서 야숙하면서 무슨 낙이 있겠어? 술이라도 좋은거 마셔야지."

"...안돼. 얼마나 비싼걸 살 생각이야? 사지말자. 물이나 마셔."

"아 정말! 돈 따위 충분히 있잖아? 지갑 내놔!"

사실 진석이 지금 보급에 쓰는돈은 2주 전 데오그라즈의 지부 금고에서 털었던 돈이었다. 미리안이 5천골드를 주긴 했지만 이 수표는 어디까지나 데오그라즈에서만 사용 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아직은 쓸 수 없었다. 지갑을 노리고 엉겨붙는 제이스에게 못 이기고 결국 지갑을 빼앗긴 진석은 쓸데없이 비싼 술들을 구입하는 모습을 두 눈 뜨고 지켜봐야했다. 아니 자기 지갑도 있으면서 왜 내 돈을 쓰는거야? 게다가 산 술도 어째 하나같이 자기 취향이 아니다. 툴툴거리며 마차에 짐을 싣는 진석이었다.

마차는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 메디니아의 국경마을을 벗어났다. 진석과 제이스는 다시금 길도 제대로 닦이지 않은 국경간의 공백지로 진입했다. 초목이 제멋대로 자란 들판이 저 멀리까지 펼쳐져있었다. 마부석, 진석의 옆에 앉아있던 제이스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저기."

"응."

"...이름이 뭐였어? 그... 내가 전에 죽인... 애인..."

더듬더듬 어렵게 말을 꺼내는 제이스. 갑자기 자신이 죽인 에나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진석은 입을 다물고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에나. 에나 필즈."

"에나 필즈... 라는 이름이었구나."

그리고 침묵. 수분간 둘 사이엔 침묵이 이어졌다. 잠시 후 먼저 입을 연것은 제이스쪽이었다.

"...미안해. 어쩔 수 없었어. 그땐 네가 갑자기 나타나 교단의 일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어."

"그래."

"요, 욕할거면 해도 좋아. 제대로 사과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 너한테 애인인양 뻔뻔하게 붙어있었으니... 참 못됐지, 나?"

"......"

진석은 에나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그러고보니 에나의 얼굴도 벌써 가물가물 하다. 목소리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따져보면 에나는 겨우 사나흘 같이 지냈을뿐인 상대. 죽은지 벌써 보름은 지났으니 그럴만도 하다. 처음엔 에나를 죽인 제이스와, 제이스가 속한 집단에까지 강렬한 복수심을 불태우던 진석이었지만 지금은 아무 유감이 없는 상태였다. 숲에서의 설득 이후, 절륜과 이성함락, 미약의 효과가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키며 작용해 제이스는 진즉부터 진석에게 몸도 마음도 완전히 빠져있었으니. 자신을 사랑해준다고 말하는 상대에게 증오를 품는 일은 진석에겐 불가능했다. 게다가 진석이 미리안의 입발림에 완전히 속아 넘어가 정식으로 교단의 수호자가 된 것도 포함해 새삼 이제와서 에나의 일을 꺼내 제이스를 탓한다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제이스는 마음 한 켠에 여전히 에나를 죽인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다시 데오그라즈로 가는 길. 어차피 떠오를 일이라면 차라리 그 전에 확실히 마무리 짓고 넘어가자는 생각에 진석에게 말을 꺼낸 것이었다.

"그때 당시야 나도 말로 형용 할 수 없이 분노했던건 사실이지만... 이제와서 돌이킬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네가 말했잖아? 헤세스모데우스를 강림시켜 영구한 평온을 얻으면 다시 만날 수 있을거라고."

"응... 그렇긴 하지만..."

진석은 손을 뻗어 제이스의 손을 맞잡았다.

"아..."

"사과는 됐어. 그때의 네가 잘못한 건 없어. 넌 해야할 일을 했을 뿐. 따지고 보면 일의 시발점을 제공한것은 나였으니까... 결국 가장 나쁜건 바로 나겠지. 이제 괜찮으니 그냥 다 잊어버려."

"......"

눈을 내리깔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제이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맨 처음, 데오그라즈의 호텔에서 봤을땐 정말 무서운게 뭔지 모르는 멍청한 도둑놈이라고 생각했고... 숲에서 난행을 당할땐 결국 다른 놈들과 똑같은 쓰레기라고 여겼었는데... 지금은...'

페레나 시 여관의 목욕탕에서 진석이 쓴 정체모를 약으로 반쯤 육욕에 져서 체면이고 뭐고 덮어놓고 이후 일방적으로 좋아한다며 스리슬쩍 고백을 하긴 했었지만, 지금은 자신이 전 애인을 살해했던 일마저 덮어주는 모습에 제이스는 한층 더 깊은 애정을 품게 되었다. 대신관님과 교단을 등지는 일만 아니라면 정말 상대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석은 어느새 훌쩍거리고 있는 제이스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뭘 울고 그래. 울지마, 뚝."

자신의 등허리를 쓸어내리는 손길.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말. 제이스는 상대의 그런 행동 하나하나조차 너무 고맙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훌쩍! 아 정말!"

너무 좋다. 이 남자가 너무 좋았다. 이젠 도저히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옆에서 진석을 끌어안고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는 제이스. 옷 너머로 전해지는 상대의 체온. 푸근했다. 그냥 언제까지라도 이대로 있고 싶었다. 진석은 그런 제이스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마차를 몰았다.

그렇게 서로 말 없이 끌어안은채 한 시간쯤 마차를 더 몰았을까? 저 멀리 앞에 뭔가 흐트러져 있는것이 눈에 띄었다. 별 다른 지형지물이나 고저차가 없는 평원이다보니 한참을 더 가고서야 그것이 무엇인지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멀찍이 보이는 그것은 파손된 마차와 짐수레들이었다. 말과 사람의 시체로 보이는것이 부근 여기저기에 널려있었다.

"웃... 도적의 습격일까?"

제이스는 그렇게 말했지만 진석의 생각은 달랐다. 아직도 사고 현장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이라 자세히 확인을 할 순 없었지만 짐수레에 실려있는 화물로 보이는것들이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도적이 습격을 한 것이라면 짐수레를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터.

"몬스터인가?"

"모, 몬스터? 하지만 이런 평원에서 나올만한 몬스터라니... 금시초문인데..."

던전이나 저주받은 유적등지에서 볼 수 있는 언데드 종류가 아니라면 몬스터들도 엄연한 생물체. 먹이사슬의 생태계가 갖추어 진 곳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이런 초지뿐인 평원에서 뭐 먹을게 있다고 무시무시한 몬스터가 어슬렁거리겠는가? 둘은 언제라도 싸울 수 있도록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마차를 몰았다. 진석은 단검을 뽑아든채 고삐를 쥐었고 제이스도 품에서 루비 로드를 꺼내어 쥐었다. 아무 말 없이 사방을 경계하며 수분쯤 마차를 더 몰고 나서 사고 현장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진석과 제이스는 마차에서 내려 시체들과 현장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십여구쯤 되는 시체와 몇구의 말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지독한데..."

사람과 말의 시체는 뭐가 큰 짐승이나 괴물같은것이 깨물고 잡아 뜯은 흔적이 역력한게 정말로 처참하게 죽어있었다. 멀쩡한 시체가 하나도 없었다. 진석은 해부학을 사용해 시체의 상태를 자세히 둘러보았고 죽은지 몇시간 지나지 않았다는 정보를 알 수 있었다.

"물린 자국의 치열을 보면 그리즐리 베어 같은 대형짐승 보다도 최소 두세배 이상 큰 무언가 같은데."

다 큰 그리즐리 베어의 몸 길이는 2미터를 가뿐히 넘어 3미터 가까이 된다. 과장을 조금 보태 거의 2층 건물의 높이 만한 크기. 그런 곰보다도 두세배는 더 큰 괴물이라니? 믿을 수 없었지만 시체의 꼬락서니를 보자니 설득력이 있었다. 제이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뭐, 뭐야. 그런 괴물이 있단 말이야?"

뭐가 습격한 건진 알 수 없었지만 진석은 단검이 무기인 자신으로선 상성이 엄청 나쁜 상대일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덩치가 큰 상대라면 단검처럼 작은 무기로는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 힘들게 뻔했으니까. 차라리 마법을 쓰는 제이스가 상대하기 쉬울터였다.

"그래. 이런놈이 상대라면 거인이라도 데려와야 싸움이 되겠는데."

리베라의 세계엔 흔히 거인족이라 부르는 코디악 족이 있었다. 주로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으로 이들의 평균 신장은 대략 2미터 50가량. 이따금 큰 개체는 3미터 가량이나 되었다. 무시무시한 신체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번식력이 낮은데다가, 평원에서만 터를 잡고 사는 커드머스의 유사인종 비엔 처럼 자신들의 영역인 산지에서 별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만한 거인들을 데려와야 이 정체모를 괴물과 맞설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진석은 시체들을 적당히 한쪽으로 모아 수습했다. 뭐하는건가 싶어 멍하니 지켜보던 제이스도 으으 하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할 수 없이 진석을 도왔다.

"으... 왜 이런일을..."

"그래도 그냥 내버리고 가긴 그렇잖아. 한쪽에 곱게 모아놓는 정도는 해주고 가자고."

시체를 대강 수습한 진석은 주변을 살펴 시체에서 떨어진것으로 보이는 돈주머니를 챙겼다. 그 모습을 보던 제이스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 죽은 사람이 쓸 수 있는것도 아니니 이 정도는 수고비로 받아두겠어."

돈 주머니 안의 동전들을 대충 세어보니 약 10골드 가량의 금액이 들어있었다. 돈을 챙긴 진석은 이번엔 짐수레의 화물들을 살펴보았다. 그냥 평범한 곡물포대와 호미, 괭이, 낫 같은 농작용 도구뿐이었다. 짐 사이에 자물쇠가 달린 작은 나무상자가 하나 있긴 했는데 이미 열린 상태였고 안도 비어있었다. 안에 뭐가 들어있었는진 몰라도 이것의 내용물만 저절로 사라졌을리는 없으니 그저 원래 비어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뭐야. 이쪽은 별로 챙길게 없군."

"저기... 어서 그만 가자. 이 괴물이 언제 또 나타날지도 모르고..."

"어차피 평원 한복판이잖아? 애시당초 멀리 돌아갔으면 모를까 나타난다면 도망칠데도 없는데 뭘."

"그건 그렇지만... 아무튼 그만 가자! 묘하게 기분나빠."

어차피 더 챙길것도 없었으니 진석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마차에 올랐다. 사고 현장을 지나서도 제이스는 뭔가 불안한 듯 한참을 사방을 경계했다. 도대체 뭐가 습격한걸까? 진석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을 지우지 못했으나 이후로도 한참 아무일 없이 마차는 평원을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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