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3. -- > * 28화 *
아르데나는 자신이 어디서 태어난지 모른다고 했다. 과거의 일들은 기억이 명확하지 않다고 했다. 허나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실은 자신이 속해있던 가문이 무언가의 일로 어떤 마법사와 얽혀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것. 그리고 그 대상이 바로 본인이었다는 사실. 마법사의 저주는 지극히 단순했다. 가족들에겐 그저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이었을 그녀를 둘도 없이 흉포한 괴물로 만든것이었다. 그녀는 괴물이 된 채 저주의 힘에 휘둘려 가문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참의 난동 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는 처참한 현실에 절망했다.
허나 이후로도 저주는 풀리지 않았고, 아르데나는 때때로 끔찍한 괴물의 모습으로 변해 산과 들을 떠돌던 인근 마을이나 행인들을 무차별로 습격해 죽였다. 정신을 차리면 눈 앞에 자신에게 살해당한 사람들이 널려있고. 의식을 잃으면 다시 괴물이 되고, 정신을 차리면 또 시체밭 한 가운데고... 그런 생지옥의 반복 속에서도 미치지 않고 자아를 유지한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헌데 마침 근처를 지나던 명망있는 모험자 무리가 그 소문을 듣고 괴물이 된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그 모험가 무리중엔 고명한 마법사가 있었다. 그는 아르데나가 저주에 걸린 몸이고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음을 눈치챘다. 마법사는 불쌍한 희생양인 그녀를 죽이는 대신 저주를 풀어주려 했으나, 저주를 건 자의 원념이 어찌나 대단한지 주문이 너무나도 강력한터라 도저히 깨지못했다. 그 대신 기존의 저주를 슬쩍 비틀어 새로운 저주를 덧씌우는 식으로 바꾸었다. 그것은 그녀를 한 자루의 검으로 만들어 버리는 저주였다.
아르데나는 그렇게 괴물에서 다시 한 자루의 단검이 되었다. 그런데 두 개의 저주가 얽혀서 무슨 작용을 한건지, 그 단검은 사용자로 하여금 신체적 능력을 크게 올려주는 작용을 하였다. 특히 완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고 했다. 그렇게 그녀는 한 자루의 마검이 되어 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오랜 시간 세상을 돌았다고 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검이 된 채 아주 희미한 자아만을 겨우 유지하던 아르데나는 마치 사람들이 잠을 자다 뒤척임을 하듯, 정말로 우연히 깨어났다고 했다. 단, 사람이 아닌 괴물의 모습으로. 검이었던 그녀를 팔기위해 짐 수레에 싣고 수송중이던 상인단은 불행하게도 그 희생양이 되었다. 상인단을 다 찢어 죽이고 나서야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는, 수십년만에 깨어났으나 또 다시 시체뿐인 눈앞의 풍경에 절망하며 손에 잡히는 천조각을 두르고 무작정 평원으로 발걸음을 옮긴것이라고 했다.
"흑... 으흑..."
아르데나는 계속 서글피 울며 겨우 이야기를 마쳤다. 진석은 당황스러워졌다. 이 이야기가 다 사실이라면 아르데나는 그야말로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눈 앞에서 괴물로 변할지도 모르는 일. 어떻게 해야되나 고민하는 찰나 메시지창에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퀘스트 '저주받은 소녀, 아르데나'를 얻었습니다.]
"......"
결국 아르데나와의 만남은 진석의 예상대로 이벤트성 퀘스트였던 모양이다. 진석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퀘스트창을 열어보았다.
- 퀘스트
[ 저주받은 소녀, 아르데나 ]
등급 : B 랭크
내용 : 아르데나의 정신세계로 들어가 그녀를 옭아메고 있는 저주를 파훼하십시오.
보상 : 아르데나의 저주를 완전히 제어하여, 그녀의 의지대로 언제든지 마검이나 괴물로 변신 할 수 있게 됩니다. 마검이나 괴물로 변신해도 온건한 자아를 유지 할 수 있게 됩니다. / + 스테이터스가 일부 상승합니다. / + 스킬 경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또 뭐냐고 이건!"
정신세계로 들어가라니 뭔 소린지 모르겠다. 사람의 정신세계라는게 뭐 문 열고 맘대로 들어갈 수 있는것도 아닐텐데. 게다가 보상은 또 이게 뭔가. 뒤쪽의 두 개는 알겠지만 아르데나가 스스로의 저주를 제어 할 수 있게 된다는건 대체 뭐야? 아니 저주를 파훼하면 제거되야 하는거 아닌가? 제어만 할 수 있게 된다는게 참 터무니 없다.
'하지만...'
아르데나가 괴물로 변신하는 능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아마도 엄청난 전력이 될 것같았다. 그녀가 괴물이 된 모습을 직접 본건 아니었지만 이야기를 쭉 들어봐도 그렇고 상인들의 시체 상태만 봐도 얼추 짐작 할 수 있었다.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무리 떼로 몰려들어도 변신한 그녀를 어떻게 하지못할테지. 즉 아르데나의 저주를 파훼해주고 그녀의 신용을 얻어 동료로 끌어들인다면... 그녀를 강력한 무기로서 휘두르거나 무시무시한 괴물로서 부릴 수 있다는 의미!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진석은 아르데나에게 다가가 바닥에 떨어진 천조각을 주워 그녀의 몸을 덮어주었다.
"내가 도와주지. 자세한 방법은 모르겠자만... 뭐 어떻게든 해주마."
"...!"
"러셀!"
아르데나와 제이스는 둘 다 놀란표정을 지으며 동시에 진석을 바라보았다. 진석은 어깨를 으쓱하며 무심코 아르데나를 달래주기 위해 머리를 쓰다듬으려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뭐 어때. 좀 도와줄수도 있-"
진석이 그렇게 말하며 아르데나의 머리에 손을 얹은 찰나, 갑자기 눈앞의 모든것이 핏 하고 사라지며 어두워졌다. 진석은 깜짝 놀라 펄쩍 뛰었지만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새카만 어둠뿐이었다.
"뭐야 이거? 어떻게 된거야?"
설마, 서얼마, 서어얼마! 머리에 손을 얹는게 정신세계로 들어가는 방법이었던 거냐? 뭐 이딴 어처구니 없는 경우가! 장난하냐! 진석이 당황스러워 하는데 갑자기 눈앞에 흐릿한 풍경이 떠올랐다. 마치 안개 위에 입체영상을 투사하는것 같은 조악하고 불분명한 형태였다.
"그 자가... 에게... 청혼... 말도 안되는..."
"...는 저주를 건다고 협박... 하지만..."
"걱정 할 것 없... 너는 우리가 지키... 사랑하는 내 딸..."
흐릿한 형체의 남녀가 무언가의 이야기를 나누다 이쪽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그 말소리는 고장난 라디오를 수신하는 것 처럼 끊기고 잡음이 섞여 도통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진석은 그 모습이 아르데나의 시야로 본 과거의 기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저 남녀는... 아르데나의 부모이리라. 풍경은 다른 장면으로 전환되었다.
"생일 축... 너도 이제... 살이 되..."
"선물... 좋아하는... 하하하..."
생일 축하를 해주는듯한 모습. 풍경은 연속적으로 바뀌어갔다. 친구와 노는듯한 모습. 누군가와 다투는 모습. 밤하늘을 보며 별이 예쁘다고 혼잣말을 하는 모습. 주변사람들과 어딘가에 놀러간 모습. 웃고 떠드는 모습... 일상생활의 풍경들과 고장난 잡음처럼 뒤섞인 말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불쌍하군...'
진석은 아르데나에게 측은지심을 느꼈다.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평범하게 살아가던 여자아이가 어느날 갑자기 저주를 받아 끔찍한 괴물이 되고, 자신의 가족마저 살해한 뒤 끝내 한 자루 검이 되어 오랫동안 세상을 떠돈게 아닌가? 제작진중에 사람 괴롭히기 좋아하는 상변태가 섞여있는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순간, 영상과 소리가 뚝 끊기고 다시 어둠만이 남았다. 그리고 어째 뒷골이 쌔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뒤를 돌아보자...
"크와아아아아아아-!!!"
"...아이고... 세상에... 이 무슨..."
그것은 글자 그대로 괴물이었다. 무려 4미터에 달하는 신장. 전신을 뒤덮은 칠흑같이 검은 털. 늑대를 닮은 머리와 하나하나가 단검만한 크기의 송곳니. 로랜드 고릴라가 연상되는, 박력이 넘치다 못해 폭발할 지경인 전신의 근육. 스치기만 해도 팔다리가 잘려 나갈것 같은 거대한 손톱과 발톱.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늑대인간에다가 고릴라의 근육을 가져다 붙인것 같았다. 이거 무슨 최종보스가 아닐까 싶을 정도의 임팩트가 흘러넘쳤다. 불덩이마냥 이글이글 붉은 기운이 넘실대는 두 눈동자가 진석을 노려보았다.
"크르으으으으..."
"아이... 씨발..."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벨트에서 흑철단검과 런들 대거 포님을 뽑아들었는데, 순간 허공에서 뭔가 나타나 발치로 떨어지며 챙그랑 맑은 소리를 냈다. 깜짝 놀라 뭔가하고 바라보니 한뼘 반 정도 되는 길이의 투박한 단검이 떨어져 있었다.
'이건... 혹시 이게 아르데나가 검으로 변했을때의 모습일까?'
괴물의 저주가 나타났으니, 당연히 검의 저주도 나타난거 아닐까? 마치 저 괴물을 물리칠 방법은 이 검뿐이란다 하는 식으로. 진석은 그렇게 추측하며 흑철단검을 집어넣고 대신 그 단검을 얼른 집어들었다. 그러자 괴물은 기다렸다는 듯 길게 표호하며 진석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체구가 큰 만큼 보폭도 커 정말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아오 쫌! 이건 체급차가 나도 너무 나잖아!"
수면에 다이빙하듯 필사적으로 몸을 던져 괴물의 안쪽으로 뛰어드는 진석. 진석이 회피한 공간엔 부우웅 엄청난 파공음과 더불어 괴물의 손아귀가 스치고 지나갔다. 공격을 한 번 피했을 뿐인데 입이 마르고 식은땀이 샘솟는 기분이다. 진석은 앞으로 데구르르 구르다 손에 쥔 두 단검으로 괴물의 발등을 콱 찍었다.
"캬아!"
거대한 덩치엔 별로 크지도 않을 상처일텐데 놈은 소리를 지르며 발을 감싸쥐곤 제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진석은 그 몸부림에 휘말릴까 싶어 발등을 찍은 칼을 얼른 뽑으며 옆으로 몸을 피했다. 발등을 감싸쥐곤 크으으 하며 진석을 노려보는 괴물의 횃불같은 두 눈동자.
"가아아아아-!!!"
"시끄러 임마!"
진석은 허리춤에서 슬쩍 투척용 단검을 하나 뽑아 들곤, 괴물이 위협하듯 표효하는 틈에 힘껏 집어 던졌다. 파라라락 빠르게 회전하며 날아간 단검은 괴물의 목덜미에 박혔지만, 괴물은 무슨 벌레가 물었냐는 듯한 태도로 그것을 툭 털어내곤 두 앞발을 마구 휘두르며 덮쳐왔다.
'안 먹히잖아! 아무리 단검이래도 확실히 꽂혔는데... 방금 발등을 찍은건 엄청 괴로워 할만큼 효과가 있었는데? 설마! 아까 주운 이 단검이 아니면 공격이 안 먹히는건가?'
끌어안듯 동시에 휘두르는 두 앞발의 사이로 몸을 날리는 진석. 정말 몸 하나 간신히 빠져나갈 좁은 틈! 어차피 뒤로 물러나봐야 연속공격을 당할 뿐, 이렇게 계속 간격 안으로 파고드는게 옳은 판단이었다. 팔 사이를 뚫고 들어가 용수철처럼 괴물의 가슴팍을 향해 뛰어오른 진석은 공중에 뜬채로 스킬을 시전했다.
"오에스테!"
짧디 짧은 체공시간안에 펼쳐지는 원무의 4연타! 괴물의 가슴팍에 길다란 상흔이 팍팍 새겨지며 시커먼 피가 튀어올랐다. 괴로움에 찬 괴성을 울부짖는 괴물. 착지하며 자세를 가다듬는 진석의 머리위로 거대한 괴물의 머리가 떨어져내렸다. 입을 한껏 크게 벌린것이, 그대로 물어 뜯어 죽여주겠다는듯한 기세였다.
"아이고 직접 오는거냐! 고마우셔라!"
덩치의 차이가 너무 나는데다가 단검을 쓰는 진석으로선 괴물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어려웠다. 짧은 단검으로 효과를 볼 수 있는 공격 포인트는 눈이나 목덜미, 발목 뒤쪽 정도. 그런데 상대가 자신을 물겠답시고 직접 급소 중 하나인 목덜미를 가까이 가져다 대주는게 아닌가? 이런 호기를 놓칠 수 없었다.
"라파가!"
원래대로라면 땅을 박차고 나갈 대쉬의 위력을 점프로 돌렸다. 힘차게 뛰어오르자 괴물의 아가리가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 옆을 정말 아슬아슬하게, 종이 한 장 차이로 비껴나가며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양손 수평 베기를 작렬시켰다. 두 단검이 교차하며 기다란 일자 섬광을 만들어냈다.
"크, 가, 카아아아아아아-!!!"
라파가로 목덜미를 벰과 동시에 분수같은 핏줄기가 솟아올라 진석의 상반신에 쏟아졌다. 안면으로도 튀어 시야를 가려버린 핏줄기. 진석은 크읏 하며 핏물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바닥에 착지했다. 하지만 눈에 피가 들어가 보이지 않은탓에 제대로 바닥을 딛지 못하고 헛걸음을 짚으며 넘어져 버렸다. 아무리 일격을 당했다지만 그 틈을 놓칠 괴물이 아니었다. 당황하며 옷소매로 급히 눈을 부벼 닦아내는 진석의 몸에 괴물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
뻐어억. 가죽으로 된 북을 치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가 났다. 괴물의 발길질에 채인 진석은 손에 든 단검들을 놓치며 저 멀리 십수미터를 날아가 공처럼 바닥을 굴렀다. 어마어마한 충격에 진석은 발길에 채인게 아니라 흡사 대형 트럭에 치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억... 크아... 헉."
일격. 단 일격을 허용했을뿐인데 체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정말 눈꼽만큼 남은 체력. 이런 상태라면 직격이 아니라 살짝 스치기만 해도 죽을것이다. 상태이상 빈사에 걸렸다는 메시지와 화면 하단에 빈사 아이콘이 동시에 떠올랐다. 애당초 지금의 일격으로 죽지 않은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하지만 괴로운건 괴물쪽도 마찬가지였는지, 한 쪽 앞발로 피가 마구 뿜어지는 목덜미를 부여쥔채 이쪽으로 비틀비틀 다가왔다.
"그... 읏. 서로 한 대씩 주고 받아서야... 수지타산이 너무 안 맞잖아..."
빈사 때문에 시야가 흐려졌고 스테이터스도 엄청나게 저하됐다. 게다가 몸도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어봐야 무조건 죽을터. 아니, 이 공간은 아르데나의 정신세계니 육체가 직접 죽는것은 아닐것 같지만... 어쨌거나 여기에서 살해당해서 좋은꼴을 볼리는 없으리라. 진석은 누가 톡 건드리기만 해도 넘어질정도로 후들거리는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손엔 무기가 없었다. 아까 괴물의 발에 치이는 순간에 그 자리에서 떨궈버렸으니까. 괴물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단검은 저 멀리에 떨어져 있었다.
"여자애 머리 한 번 잘못 만졌다가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개고생이냐...!"
확실하다. 제작진놈들은 사람 괴롭히기 좋아하는 변태들이 틀림없어. 진석은 속으로 제작진들을 욕하며 할 수 없이 투척용 단검들을 꺼내 쥐었다. 괴물은 이미 코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크르르르... 가아아앗-!!!"
진석을 증오에 찬 눈초리로 쏘아보다 목덜미를 쥐지 않은 다른쪽 앞발 하나만으로 공격을 가해오는 괴물. 진석은 거의 바닥에 쓰러지듯 몸을 날려 그것을 피하고 양손의 단검을 핑그르 회전시켜 칼날을 쥐었다.
"이거라도 먹어라!"
양손에서 뿌려진 두 개의 단검이 괴물의 눈동자를 노리고 빠르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빈사의 몸 상태로, 그것도 회피하는 도중에 던져서일까. 하나는 택도 없이 빗나가버렸고 다른 하나는 괴물의 가슴 한복판에 꽂히긴 했는데 역시 별다른 타격은 없는듯했다.
"윽! 젠장...!"
괴물은 진석이 휘청거리면서도 공격을 피해내고 역습까지 가해오자, 되려 한 발자국 딛고 앞으로 나서며 다시 한 번 발차기를 날렸다. 흡사 거대한 벽이 밀려오는 것 같은 묵직한 앞차기! 저기에 채였다간 그야말로 온몸의 뼈가 박살날 것 같았다. 진석은 할 수 없이 또 몸을 날렸다. 하지만 너무 급하게 움직이려다 되려 자기 발이 꼬여, 넘어지며 데구르르 바닥을 굴렀다. 꼴사납게 바닥을 구르는 진석의 옆을 괴물의 발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 간격은 겨우 반뼘차이. 하지만 빗나간 발차기로도 풍압이 어찌나 센지 그 바람만으로도 몸이 밀려날 정도였다. 그만큼 괴물로서도 온 힘을 다한 앞차기였던터라 공격이 빗나간 뒤의 자세는 꽤 흐트러져 있었다. 진석은 이를 악물곤 자리에서 일어나 십여미터 앞에 떨어진 단검을 향해 달려갔다.
"카악!"
그렇게 놔두지 않겠다는듯 괴물의 팔이 다급히 휘둘러져 지면을 볏단베듯 쓸어내렸다. 진석의 하체를 박살낼듯 쇄도해오는 칼날같은 손톱들! 닿기만 하면 그대로 다리를 잘게 토막낼 것 같았다. 허나 손톱들은 진석이 신은 가죽부츠의 외피만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살짝 스친것 만으로도 가죽부츠는 반 걸레짝이 되었지만 진석은 어떻게든 몸을 날리며 단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큿, 잡았다! 정말로 위험했다!'
스치기만해도 죽는 절체절명의 상황. 괴물의 공격을 두 번이나 피해낸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무기도 다시 회수했다. 그 모습에 분한듯 노성을 토해내는 괴물. 시간으로 치면 얼마 되지 않는 사이였지만 그래도 피를 제법 흘려서인지 괴물의 움직임도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목덜미를 움켜쥔 앞발 사이로 여전히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아하아 숨을 몰아쉬던 진석은 단검을 꽉 움켜쥐며 괴물을 향해 전투자세를 취했다.
"피차... 엉망진창이니까... 헉. 후우... 얼른 끝을 보자고?"
그리고 서로를 노려보는 진석과 괴물. 수초간 서로를 노려보던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상대방을 향해 달려들었다.
"덤벼라아아-!!!"
"가아아아아-!!!"
괴물은 상처를 막고 있던 앞발을 떼고 자세를 낮추며 늑대가 달리듯 진석을 향해 질주했다. 아무리 덩치가 크다지만 네 발로 달리고 있으니 정면에선 달리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간격에 들어왔을때 앞발로 후려치거나 물어서 죽이겠다는 의도가 느껴졌다. 진석은 몇 걸음 힘차게 달려나가다가, 급정거를 하며 온몸의 힘을 팔과 어깨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마치 야구경기의 투수가 체인지업을 하는듯한 자세로 전신의 힘을 단검에 실어 집어던졌다. 어두운 공간속을 뚫고 단검은 한줄기 섬광이 되어 괴물의 정면으로 쏘아져나갔다.
"케엑!!!"
푸우욱! 단검은 자세를 낮추고 진석을 향해 전력질주를 하던 괴물의 이마 한복판에 정확히 꽂혀들어갔다. 빈사때문에 무력이 떨어져있던 진석의 힘 덕분만은 아니었다. 괴물이 자신의 체중을 실어 전력질주를 한 탓이 더욱 컸다. 자기가 날아드는 단검에 머리를 드민 꼴이 된것이었다. 괴물은 이마 한복판을 꿰뚫는 송곳같은 위력에 그대로 발을 헛딛으며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허나 달리던 기세가 아직 남아있어, 바닥에 머리를 박은 자세 그대로 진석이 있는 방향으로 주우욱 밀려갔다. 자신을 향해 밀려오는 괴물을 바라보는 진석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토르멘...타!"
괴물이 자신의 코앞까지 밀려와 주먹의 간격안에 든 순간 진석의 바일리 델 비엔토가 폭발했다. 피할수도 막을수도 없는 초고속의 난격이, 전부 괴물의 이마 한복판에 꽂힌 단검 손잡이 끝을 두들겼다. 마치 못의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박아넣는 것 같은 모습. 진석은 자기 주먹으로 단검을 두들겨 통째로 괴물의 이마에 쑤셔박고 있었다. 괴물의 눈동자가 까무러치듯 치켜졌다. 이내 토르멘타의 짧은 제한 시간이 끝나고보니 단검의 손잡이는 반쯤이나 파묻혀 들어가 있었다. 단검자루를 맨손으로 두들긴 진석의 주먹도 엉망진창 피투성이가 되어있었지만 개의치 않는다는듯 다시 힘껏 외쳤다.
"토르멘타-!!!"
그리고 스킬이 발동되기 직전 찰나의 순간. 아까 허공에 떠올랐던 영상들이 진석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평범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가던 여자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어 이런 괴물이 되어 제 손으로 가족을 죽여야 했을까? 아무리 저주를 해제할 수 없어서였다지만, 저주를 중첩해 이번엔 한낱 단검이 되어 흐릿한 자아만을 유지한채 사람들의 도구로서 세상을 떠돌다니. 무슨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다 있단 말인가? 정말 터무니없이 얄궂고 기구한 팔자였다. 자신의 일도 아니었건만, 어쩐지 가슴속에 울분이 치밀었다. 으드득. 어금니를 깨무는 진석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저주인지 뭔지! 다! 박살나버려라아-!!!"
자신의 안위를 도외시하고 연속으로 펼쳐내는 혼신의 연격! 주먹이 수십개로 보일정도의 연타가 오로지 단검자루 한 점을 노리고 집중되었다. 중첩되는 타격의 압력에 짓눌리듯, 시뻘겋게 불타던 괴물의 눈동자는 어느새 그 빛을 잃고 흐려져갔다. 연타의 과도한 충격을 이기지못한 진석의 손가락도 하나 둘 우드득 하고 부러져 꺾였다. 진석은 손가락이 부러져 엉망이 된 양주먹을 쫙 편채 손바닥만으로 토르멘타의 제한시간이 다 될때까지 단검자루를 계속 두들겼다. 이제 단검자루는 완전히 이마속으로 파고들어가 이젠 잘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 되었다.
"케게에에에에... 게에에엑..."
괴물의 동공은 눈꺼풀 너머로 사라졌고, 아예 혀를 길게 빼문채 의식을 잃어버렸다. 아까 베였던 목덜미에선 피가 쏟아져내려 바닥에 큰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아무리 4미터에 달하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라도 한뼘반짜리 단검을 오로지 힘만으로 머리 한복판에 박아넣었으니 버틸 수 없었으리라. 토르멘타를 연속으로 두 번이나 펼쳐낸 진석도 기력이 다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헉... 허억... 하, 하아..."
아 죽겠다. 정말 난데 없이 이게 뭐람. 하지만 속은 후련했다. 말도 안될만치 무시무시한 괴물을 오직 자신 혼자서 쓰러트린 것이다. 그것도 고작 단검 몇 자루... 아니, 바로 이 두 주먹으로! 이런 무용담을 어디가서 말한들 과연 누가 믿어줄까? 실없는 웃음이 입가에서 새어나왔다. 그리고 순간, 다시 눈앞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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