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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31화 (31/155)

< --   - 3.   -- >         * 31화 *

그렇게 4일 후. 그럭저럭 진석의 식물학으로 부족한 식재를 약간이나마 보충해가며 그란델의 국경마을을 거쳐 페레나 시에 다시 도착할 수 있었다. 한 번 와본것 뿐이었지만 진석은 능숙하게 마차를 몰아 전에 묵었던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 앞에선 여전히 의욕 없어보이는 종업원이 설렁설렁 호객을 하고 있었다. 마차를 그에게 맡긴 일행은 함께 여관안으로 들어섰다. 낯이 익은 여관주인이 꾸벅 인사를 해왔다. 제이스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방은 셋... 아니, 둘. 하나는 큰 방으로. 그리고 윗쪽에 우리가 왔다고 보고해둬. 출발은 내일 아침이라는것도 일러두고."

"알겠습니다."

여관주인은 싹싹한 태도로 방 열쇠를 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스는 넘겨받은 열쇠 중 하나를 아르데나에게 건넸다.

"자. 뭐 우린 둘이서 같이 방을 쓸테니까 넌 이쪽."

"아, 네."

"그리고 이거."

제이스는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네 아르데나에게 건넸다.

"이건...?"

"뭐긴, 돈이야. 아마 한 이삼십 골드쯤 들었으려나? 중심가에 가면 그런대로 괜찮은 옷가게들이 있으니 한동안 입을 옷하고 그외에 필요한게 있다면 적당히 사렴. 계속 맞지도 않는 내 옷을 입고 다닐 순 없잖아. 쓰고 남은 돈은 가져도 좋아."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보이며 감사를 표하는 아르데나. 제이스는 그녀에게 이만 가보라는듯 휙휙 손짓을 하곤 진석의 팔을 붙잡은채 2층으로 마구 잡아끌기 시작했다.

"뭐야. 왜 이래?"

당황스러워 하는 진석. 제이스는 그런 진석을 향해 흡사 먹이를 노리는 야수같은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죽이고 대답했다.

"왜긴. 저 애를 데리고 다니면서 눈치보느라 장장 나흘이나 한 번도 못했잖아! 밥도 목욕도 다 필요없어. 지금 당장 해야겠으니까!"

"으아아아, 이거 놔라! 대낮부터 이 무슨 파렴치한! 치, 치녀 같으니!"

자신보다 힘이 훨씬 약한 제이스에게 일방적으로 질질 끌려가는 진석. 하긴 아르데나의 눈치를 보느라 며칠간 전혀 못해 쌓여있던건 사실이라, 질질 끌려가는 척 하며 제이스의 장단에 맞춰주고 있었다. 금세 가장 안쪽의 큰 방까지 끌려간 진석. 문이 빠르게 쿵 닫히고 둘의 모습은 방 안쪽으로 사라졌다. 1층 카운터 앞에 혼자 덩그라니 남겨진 아르데나.

"......"

자신도 저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둘은 현재 사랑하는 사이 같으니 자신이 끼어든다면... 셋이서? 아르데나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한참을 제 자리에 서서 이런저런 망상을 하던 아르데나.

"저기... 괜찮니?"

제자리에 못 박힌듯 멍하게 서있는 아르데나가 걱정스러워 말을 거는 여관주인. 아르데나는 그제서야 흠칫 올라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괜찮으니까!"

아르데나는 죄지은 사람마냥 당황해하며 허겁지겁 여관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고보니 자신의 손엔 아까 제이스가 쥐어준 묵직한 돈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현재 자신이 입고 있는 것은 그란델 왕국의 국경 마을 잡화점에서 구입했던 초라한 평상복. 반면 제이스는 세련된 디자인의 여성용 정장을 즐겨입었다. 그 옷 취향은 그녀 본인의 것일까 아니면 러셀씨가 좋아하는 것일까? 어느쪽인진 모르겠지만 아르데나도 지금 입고 있는것보단 더 나은걸 입고 싶었다. 분명 나이때문에 자신을 여자로 보지 않는다곤 했지만, 그래도 남자는 남자 아닌가. 조금이라도 예쁘게 꾸미면 그의 눈을 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 제이스씨에겐 미안했지만...

"...저도 러셀님이 좋으니까요."

혼잣말을 중얼거린 아르데나는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중심가쪽으로 향했다. 아까 마차를 타고 여관까지 오며 길은 대충 봐두었었다.

빅 본의 두목 포터 스톡에게는 세 명의 자식이 있었다. 본처에게서 낳은 두 명의 아들과, 첩에게서 얻은 딸 하나. 총 2남 1녀였다. 그 중 첫째 아들은 태어날때부터 몸이 약했는데 결국 열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돈은 썩을만큼 많았던 포터였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병은 신관의 힘이나 비싼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첫째 아들이 죽은 후 한동안 큰 슬픔에 잠겨 지내던 포터는 자신의 조직을 이어줄 둘째 아들을 지나치게 과잉 보호하게 된다. 집 문 밖으로만 나가도 수하들과 시종들을 붙여 수발을 들게 할 정도였다. 게다가 둘째 아들 역시 언제 무슨 사고나 병을 얻을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만에 하나를 대비해 첩에게서 얻은 딸 카야를 보험이자 스페어로서 사내아이처럼 기르게 했다. 입는 옷부터 행동거지 하나하나 전부 사내아이처럼 대하게 했다. 비싼 돈을 들여 고용한 가정교사들에겐 철저한 주입식 교육을 할 것을 강요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수하 중 하나였던 뛰어난 격투가 래스커에게 카야가 스스로 몸을 지킬 격투기술을 가르치게 했다.

이러다보니 정작 조직을 이어받아야 할 둘째 아들은 과잉보호로 인해 유약하고 의존적인 성격으로 자라났고, 만일을 대비한 보험으로 키운 딸이야 말로 남자답고 능력도 있는, 조직의 후계자로서 걸맞은 모습이 되어버렸다. 조직내에서도 아들쪽보다 딸 쪽이 조직의 후계로서 걸맞지 않냐는 이야기가 나올 지경이 되자 포터의 본처는 당연히 화를 냈다. 자신의 아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것을 첩의 자식, 그것도 계집애에게 빼앗길 상황이라니. 그런 와중에 데오그라즈의 지부장을 맡고 있던 래스커가 정체 모를자와의 소란에 얽혀 사망하고 지부 역시 다른 조직에게 공격받는 상황이라는 비보가 전해진다. 서둘러 데오그라즈의 지부를 위해 다른 누군가를 보내야 할 참이었다. 포터의 본처는 이것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남편에게 첩의 딸인 카야를 데오그라즈의 지부장으로 보내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넌지시 흘렸다. 포터는 자신의 딸을 외국의 위험한 지부로 보내고 싶은 생각따윈 없었지만, 부인의 성화에 못이겨 우선 의향만이라도 물어보게 되었다. 어지간한 대답이 나온다면 적당히 다른 부하를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카야의 입에선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가겠습니다. 어려서부터 절 돌봐주셨던 래스커 아저씨인데... 반드시 흉수를 찾아 제 손으로 직접 목을 비틀어 버리겠습니다."

카야는 어려서부터 자신을 돌봐주고 많은 것을 가르쳐준 래스커를 스승이나 삼촌처럼 여기고 있었기에, 그를 죽인자에 대한 복수심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었다. 포터는 할 수 없이 그녀의 요구을 받아들이고 만다. 마침 도움을 얻기 위해 '교단의 수호자들'측에도 요청을 해둔참이었으니, 그 무시무시한 자들이 동행해준다면 딸에게도 별 일은 없을거라는 속내가 깔려있었다. 그렇게 데오그라즈로 보낼 추가인력 사십여명과 카야는 준비를 마친채 이제나 저제나 수호자들에게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연락이 왔다. 빅 본이 일반 사업장으로서 위장해 보유중인 여관쪽에서 기다리던 손님이 도착했다는 전갈을 전달 받은것이다. 출발은 내일 아침이라고 했지만, 상대는 자신의 조직에 꾸준히 대량의 마약을 넘겨주는 공급책이자 데오그라즈에서의 일을 도와줄 귀한 손님. 카야는 데오그라즈의 지부를 일임받은 책임자로서 우선 인사정도는 해둬야 겠다는 생각에 중심가에 있던 사무실에서 빠져나왔다.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장정들이 그녀의 뒤로 우르르 따라붙었지만 카야는 말없이 손을 들어 그들을 물렸다.

"됐어. 간단히 인사정도만 하고 올테니까 따라올 필요없다. 내일 출발하는 녀석들 중 애인있는 놈들은 한동안 애인 못 만나볼테니 일찍 돌아가서 떡이나 많이 쳐두라고 해."

카야의 농담에 부하들 사이에서 박장대소가 터졌다. 단순히 두목의 딸이라서가 아니라 충분한 실력과 머리가 있었기에 부하들 사이에서도 제법 인망을 얻고 있었던 터였다. 거기에 숏 포니테일과 몸에 착 붙는 검은색 남성용 수트. 중절모를 눌러쓰며 외출하는 그녀의 모습은 거대 범죄조직의 수뇌가 아닌 흡사 무슨 패션모델처럼 보였다. 사무실을 빠져나가 잠시 거리를 걷자 주변의 상인이나 주민들이 웃는낯으로 아는체를 해왔다. 페레나 시는 빅 본이라는 조직이 완전히 장악한 곳. 그런 조직의 두목 딸이니만큼 누구라도 잘 보이고 싶어했다. 카야로서도 사람들의 그런 심리를 읽고 있었기에 사람들의 사소한 청원이나 다툼 따윌 중재해주며 적당히 인심을 얻어왔다. 이 거리에서 그녀는 유명인사였다. 적당히 인사를 받아넘기며 여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중심가를 지날때, 두 남자가 한 여자아이에게 추근대며 은근슬쩍 골목으로 몰고가는 것을 보았다.

'뭐야 저 새끼들. 혹시 우리 애들은 아니겠지? 사람들에게 쓸데없이 피해를 주는 일은 분명 엄금해뒀는데.'

나름 이 거리의 주인이라는 의식이 있던 카야는 거침없이 그 골목으로 향했다. 상가건물들 사이의 틈새. 행인의 발길이 잘 닿지않는 으슥한 뒷골목. 그 맨 안쪽에서 건장한 두 남자가 가냘픈 여자아이 하나를 붙잡고 구석에 몰아붙이고 있었다. 카야의 입에서 즉각 노성이 튀어나왔다.

"야! 거기 양아치 두 마리!"

"...허? 뭐냐 저건."

"아이씨 짜증나게 뭔데."

이쪽을 돌아보는 두 남자. 팔뚝이나 얼굴 한 켠에 위협적인 문신을 새기고 있었는데 둘 다 처음보는 얼굴이었다. 그럼 그렇지, 자신의 부하들은 아니었다. 빅 본이 페레나 시를 장악하고 있다지만 이렇게 큰 도시에서 뜨내기들이나 길거리 양아치까지 다 제어 할 순 없는 노릇. 이렇게 선량한 시민에게 피해를 주는 놈들은 빅 본에게도 해가 됐다. 자신들이 온건히 지배하는 곳이라면 질서와 치안을 유지하는게 장기적인 수익 창출에 도움이 되지, 쓸데없이 약취하는것은 그야말로 양아치짓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유명인사인 카야도 못 알아보다니. 이 놈들은 빅 본이라는 조직조차 모르는 뜨내기들이 분명했다. 두 사내는 여자아이를 내버려두고 카야를 향해 위협적인 태도를 드러내며 다가왔다.

"하... 이쪽도 제법 반반한데? 잘 됐구만 이걸로 2대2네. 짝이 맞는다고."

"낄낄. 하긴 한 년 구멍 둘이 나눠쓰는것보단 그게 위생적이고 좋겠지? 야 너 이리와봐."

더러운 소리를 지껄이며 다가오는 둘. 그 중 얼굴에 칼날 문신을 한 사내가 카야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머리카락을 나꿔채려는 것 같았다. 익숙한 폼을 보니 여자 꽤나 괴롭혀본 티가 났다. 카야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쓰레기새끼!"

카야는 왼팔로 사내의 손을 쳐내고 완전히 열린 품 안쪽으로 파고 들며 안면에 벼락같은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인중에 정확히 파고드는 강렬한 펀치! 칼날 문신의 사내는 찍소리도 못하고 뒤로 발랑 나동그라졌다. 팔뚝에 문신을 잔뜩 새긴 다른 사내는 깜짝 놀라며 품에서 접이식 칼을 꺼내들었다.

"이 썅년이!"

휙휙 위협적으로 칼을 휘둘러오는 상대. 카야는 스웨이백으로 그것을 가볍게 피하며 비웃었다.

"병신. 칼도 딱 지 좆만한걸 쓰는구만."

"뭐라고?!"

카야의 도발에 흥분한 사내는 와악 하고 달려들며 칼을 찔러왔다. 하지만 예상했다는 듯 빠르게 자세를 낮추며 달려드는 상대에게 하단쓸기를 거는 카야. 사내의 정강이에 뒤축이 적중해 달려들던 그는 제풀에 앞으로 넘어져 버렸다.

"크윽. 너 잘도... 푸헉!"

자빠졌던 사내가 흥분하며 일어서려던 찰나 카야의 구둣발이 그의 턱을 강하게 올려찼다. 입에서 피를 뿜으며 그대로 죽은 개구리마냥 쫙 뻗는 남자. 그 와중에 안면에 주먹을 맞고 쓰러졌던 칼날 문신의 사내가 비틀비틀 일어나 품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카야는 그 모습을 보며 이마를 짚고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왜 니들은 하나같이 패턴이 똑같냐? 몰개성한 새끼들."

"에... 에이 씨발!"

정신을 잃은 자신의 동료와 여유롭기만 한 카야의 태도. 칼날 문신 사내는 자신이 눈앞에 있는 여자의 상대가 안된다는것을 직감했다. 활로를 찾던 사내의 시선이 골목 안쪽에 서있는 소녀를 향했다. 자신들이 끌고 온 무력한 여자아이. 인질로 잡을셈이었다. 하지만 카야도 남자가 뭘 하려는지 눈치챘다.

"너! 이리와!"

소녀를 인질로 삼으려 골목 안쪽으로 달려가는 칼날 문신 사내. 카야는 인상을 구기며 방금 쓰러트린 남자가 떨군 접이식 칼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지체없이 사내의 뒤를 향해 그것을 집어던졌다.

"큭!"

푹! 접이식 칼은 정확히 칼날 문신 사내의 정강이에 날아와 꽂혔다. 바닥에 미끄러지듯 넘어지는 남자. 허나 사내로서도 이판사판. 이를 악 물곤 정강이에 꽂힌 칼을 뽑아낸 다음 빠르게 몸을 일으켜 눈 앞에 있는 소녀를 붙잡으려 했다.

"타핫!"

그때 뒤에서 기합성이 들려왔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는 남자. 그러나 눈 앞에 들어온것은 쇄도하는 구둣발이었다.

"컥!"

카야는 빠르게 달려와 점프킥으로 칼날 문신 사내의 안면을 후려차버렸다. 그 위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사내의 몸이 허공에서 두 바퀴나 돌고나서야 바닥에 떨어졌다. 짧은 활극 뒤 인적없는 골목 안에 남은것은 정신을 잃은 두 사내와 겁을 집어먹은 소녀,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중절모를 집어드는 카야였다. 카야는 모자를 툭툭 털고 다시 눌러쓰며 소녀에게 다가가 친절한 태도로 물었다.

"괜찮아? 어디 다친덴 없니?"

"아... 괘, 괜찮아요. 정말 고맙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보이며 감사를 표하는 소녀. 십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싶은 굉장히 귀여운 외모의 아이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에 상당히 마른 체구. 근처에서 옷이라도 사고 있었던 참인지 손엔 낯익은 상표가 그려진 쇼핑백이 몇 개 들려있었다. 카야도 잘 아는 인근 여성복 매장의 로고였다.

'헤에. 여긴 꽤 비싼 가게일텐데 이렇게 많이... 부잣집 아가씨인가?'

카야는 소녀를 이끌고 골목을 나서며 그녀에게 질문했다.

"혹시 모르니까 내가 바래다줄께. 집이 이 근처니?"

"아뇨. 그건 아니고... 여, 여관에 일행이 있어요."

"그럼 혹시 여행중인거니? 여관에 계시는건 부모님? 아니면 다른 가족이나 친척?"

"......"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곤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는 소녀. 카야는 그 모습에 상대가 뭔가 사연이 있는 아이라는걸 알아챘다. 비싼옷을 입은데다, 또 잔뜩 구입한 걸 봐선 경제적으로 어려운것 같진 않지만... 몸은 다이어트를 해서 마른게 아닌, 어째 잘 먹지 못해 여위었다는 느낌이었다. 혹시 이건 학대의 흔적? 그렇다면 이 아이는 노예인걸까? 카야는 소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으음~ 저기 너. 이름이 어떻게 되니? 나는 카야라고 하는데."

"아, 아르데나... 라고 해요."

"그래 아르데나. 초면에 이런 질문은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너 혹시 노예?"

그란델 왕국에서 노예제는 공식적으로 허가되어있었다. 물론 애거스트 공화국 처럼 일부의 국가들은 노예제를 반대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국가들은 허가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노예라는 상품이 창출해내는 막대한 수익금. 그것들의 일부가 세수가 되어 재정에 큰 보탬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귀족들의 세가 강력한 그란델 왕국이니 노예제가 폐지될 일은 더더욱 없었다. 노예를 가장 많이 구입하고 부리는게 바로 귀족계층이었으니까. 빅 본 내에서도 인신매매를 저지르기도 했고 빚에 팔려온 여자들을 창관에 보내는 등 사람을 노예처럼 부리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허나 카야 개인으로선 노예제와 그런 짓거리를 혐오하고 있었다. 사람을 사고 파는 일이 아니더라도 돈을 벌어들일 수단은 얼마든지 있거늘. 비록 음지에서 범죄로 밥을 벌어먹는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싫은것은 싫었다. 더군다나 아직 어른이 되지도 못한 어린아이를 성노로 부리는 족속들은 사람같이 보이지도 않았다. 만약 이 아이가 노예라면 주인을 찾아 담판을 짓고 해방시켜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카야의 질문에 아르데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에? 아니요. 노예... 아닌데."

"...그래, 그렇구나. 내가 뭘 좀 착각한 모양이네."

표정을 보아하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혹 노예라는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워 거짓말을 했을수도 있지만 뭐 아무리 봐도 거짓말을 하는 듯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카야는 양아치들과 한 판 벌이고 난 뒤라 자신의 신경이 과민해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미안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는 카야.

"쓸데없는걸 물어봐서 미안. 그나저나 일행이 묵고 있다는 여관은 어디야?"

"아... 이쪽 큰 길로 쭉 따라가면 있는곳인데요."

"헤에. 이거 인연인가? 마침 행선지가 같네."

아르데나가 가르킨 방향으로 쭉 가야 있는 여관이라면 분명 빅 본이 소유한 업소였다. 마침 자신도 볼일이 있어 가는참이니 잘됐다고 생각했다. 카야는 아르데나와 함께 이런저런걸 물으며 여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어째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이 아르데나라는 아이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순진한건지 세상 물정을 모르는건지... 이런 애를 혼자 내보내다니. 보호자가 누군지 참.'

만나면 한 마디 정돈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는 카야였다.

============================ 작품 후기 ============================

이건 읽으시면서 딱히 신경 안쓰셔도 되는 부분입니다만, 동화 한 닢은 대략 천 원 정도로 설정해서 쓰고 있습니다. 동화 50닢 = 은화 1닢 이므로 은화는 5만원. 은화 10닢 = 금화 1닢 이므로 금화는 50만원. 대략 그 정도의 가치라는 느낌. 그렇지만 물가 수준이 현실과 동일한건 아니므로 대금이나 물건값등이 명확한 기준없이 제멋대로라도 이해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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