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3. -- > * 32화 *
여관 2층의 가장 안쪽 방. 제이스로선 진석을 쥐어짜 보겠다고 끌고 들어갔지만 아무리 해도 지치지 않는 그의 상대가 될 수 있을리 없었다. 땀투성이가 된채 지쳐 쓰러진것은 제이스 쪽이었다. 침대 위에 길게 뻗은 그녀는 희미하게 멀어져가는 절정의 여운을 느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정말... 어떻게 되어먹은 아랫도리야?"
진석을 만나기 전까진 교단의 다른 수호자 셋과 관계를 가져본 그녀였다. 드레비안과 맥, 머서. 까놓고 말해 그 중 밤일에 가장 능숙한 것은 드레비안이었다. 그도 첫경험 상대는 제이스였을텐데, 어디서 배워온건진 몰라도 여러가지 의미에서 테크닉도 뛰어났고 지속력도 훌륭했다. 제일 떨어지는건 머서였다. 내성적인 성격의 머서는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 남매같은 사이인 제이스와 섹스를 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던지 도무지 어쩔줄 몰라해서 처음부터 제이스가 리드를 해줘야 했다. 맥은 진석과 비슷한 타입이었다. 상대를 생각하기 보단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거칠게 덤벼드는 그런 유형. 애무나 삽입도 자기 마음대로였다. 하지만 맥이 셋 중 횟수는 가장 많았다. 한 번만 사정하면 담백하게 끝내는 드레비안. 자신이 리드를 해줘야 하는 머서와는 달리 맥은 최소 세번씩은 해야 만족했으니까. 맥의 정력도 훌륭한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석에겐 비교할 수 조차 없었다. 맥이 좀 거칠게 구는 정도였다면 이 남자의 그것은 압도적인 폭력이었으니까. 한 자리에서 자신을 붙잡고 놔주지 않은채 두 자리의 횟수의 사정을 가볍게 해버리곤 했다. 게다가 지금 지쳐 드러누운 자신과 달리 그는 아무렇지 않게 의자에 앉아 물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지치긴 커녕 그의 물건은 여전히 꼿꼿한 채였다. 제이스의 묘한 시선을 눈치챈 진석은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좀 더 하고싶어?"
"......"
물론 섹스라는게 단순히 횟수가 전부는 아니겠지만 이런 상대를 어떻게 당하겠는가? 제이스는 아니라는 대답을 하려 했지만 진석은 물컵을 내려놓곤 잽싸게 다가와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바보! 그게 아니라... 아앙! 모, 목덜미 핥지마!"
"아아 기껏 넣어준게 흘러내리고 있잖아. 아깝게스리. 마개를 해야겠지?"
씨익 제이스를 내려다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 진석. 뭐 어쩌겠는가? 제이스는 한 번 더 몰아칠 열락을 기대하며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그런데 막 본격적인 삽입을 하려는 찰나, 밖에서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뭐야."
혀를 차며 잽싸게 몸을 일으키는 진석. 제이스는 시트에 손을 뻗어 몸을 가렸고 진석은 대충 바지만 주섬주섬 걸친채 문으로 향했다.
"누구?"
진석은 한 뼘 정도만 살짝 문을 열며 밖을 내다보았다. 복도에 서 있는것은 예쁜 새 옷을 사입고 돌아온 아르데나와, 남성용 정장에 중정모를 쓴 숏 포니테일의 낯선 여자였다. 여자쪽은 중절모를 살짝 들어 인사를 하곤 진석에게 물었다.
"이거 실례. 이 아이의 보호자 맞습니까?"
"아, 네. 일단은 그런데... 무슨일로?"
'일단은?'
카야는 눈 앞의 남자가 한 대답이 어째 미묘하다고 느꼈다. 젊어보이는데 이 아이와는 무슨 관계일까? 그러고보니 머리칼이 둘 다 흑발이다. 애 아빠는 아닐것 같고, 나이 터울이 있는 남매일까? 카야는 머릿속으로 의문을 품으며 아르데나를 가르켜보이곤 설명했다.
"뭐 다른게 아니고 이 아이가 혼자 돌아다니다가 불한당들에게 험한꼴을 볼뻔해서..."
그 말에 진석은 깜짝놀란 표정이 되어 그대로 밖으로 나와 아르데나의 양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아? 다친데 없지?"
"괘, 괜찮아요. 이쪽분이... 도와주셔서."
진석은 떨떠름한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여보이며 카야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이것 참... 아무튼 고맙습니다."
카야는 손을 맞잡고 가볍게 악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내 눈에 띄여서 무사하긴 했지만 이렇게 귀여운 동생이라면 혼자 돌아다니지 않게 하는게 좋을거 같네요."
"네. 제가 경솔했네요."
진석이 사과하자 마치 자신의 잘못인양 안절부절 못하는 아르데나. 하지만 진석은 아르데나의 표정을 보곤 다 안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이런, 그런 표정 하지마. 네가 잘못한게 아니니까."
그 모습에 카야는 한 마디 쏘아주려던 생각이 쏙 들어가버렸다. 뭐 생각하던 것처럼 노예라거나 학대당하는건 아닌것 같으니. 따지고보면 아까 그 양아치들이 나쁜놈이지 그냥 혼자 쇼핑을 했을뿐인 이 소녀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카야는 중절모를 가볍게 들어 작별인사를 대신하고 복도를 돌아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방 안쪽에서 시트로 가슴을 가린 제이스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뭐야? 누가 왔길래 이렇게 한참... 어머?"
"엇, 그... 수호자 씨?"
눈이 마주친 제이스와 카야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았다. 이전에 딱히 이야기를 나눠본건 아니었지만 카야는 일 문제로 조직의 사무소를 오가던 제이스의 안면은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제이스 역시 빅 본에 관한 일은 거의 전담하고 있었으므로, 두목의 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가운데 선 진석은 멀뚱멀뚱 두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어라? 서로 아는 사이?"
잠시 후, 여관 1층의 식당 한 테이블. 진석과 제이스, 아르데나는 카야와 마주 앉아 있었다. 카야는 자기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곤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 인사 드리죠. 카야 스톡이라고 합니다. 그보다 보통은 혼자 다니시는 것 같던데... 일행이 느셨군요. 역시 교단쪽 분들인건지?"
사실 빅 본 측에서는 제이스가 교단의 수호자라는 것만 알고 있었지 그 교단이 뭔지도 몰랐다. 라기보단 아예 관심도 없었다. 그들은 마약을 공급해주고, 빅 본은 그들이 원하는 일을 처리해준다. 서로가 서로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완전한 거래 상대. 그것만이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카야의 생각은 달랐다. 저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빅 본에게 마약을 퍼주고 있을리는 만무. 게다가 저쪽에서 언제고 마약공급을 끊으면 빅 본은 가장 큰 주요 수입원 하나가 그냥 말라버리는 셈이다. 여러 나라에 뿌리를 뻗고 있는 거대한 조직이면 뭐하는가. 조직의 주도권을 정체도 모르는 자들에게 쥐어준채 멍청하게 덩치만 키웠을 뿐인데. 카야는 이번 동행에서 조금이라도 좋으니 그들의 정체에 관한 정보를 얻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제이스는 카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건지 훗 하고 가볍게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뭐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난 데이나, 이쪽은..."
진석에게 눈짓을 하는 제이스. 적당히 '가명'을 대라는 의미였다.
"음, 어... 앤커니."
갑자기 댈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예전 해밀턴 시에서 책방에 들렀을때 지도 코너를 알려준 점원의 이름을 대는 진석이었다.
"...라고 불러. 그보다 출발은 내일 아침이라고 했을텐데 뭐하러 지금 온거야?"
"그거야 저희를 도와주실 귀한 손님들 아니십니까. 당연히 인사 정도는 드려야지요."
"흥... 새삼 입발린 소리는. 그나저나 앞으로 데오그라즈의 지부는 네가 맡게된 모양이지?"
다리를 꼬며 찻잔의 내용물을 후룩 마시는 제이스. 카야는 그 말에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 저에게는 스승이자 삼촌같은 존재이던 래스커 아저씨가 살해당하셨으니까요. 제가 그 뒤를 잇고 흉수도 찾아서 복수할 생각입니다."
"푸흡! 쿠, 쿨럭!"
옆에서 가만히 차를 마시던 진석이 마시던 것을 뿜으며 쿨럭쿨럭 재채기를 했다. 제이스와 카야의 시선이 진석을 향하자 그는 뻘쭘한 듯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아... 아니. 사레가 들려서. 이거 미안."
래스커라니. 그건 분명 자신이 데오그라즈의 호텔에서 살해한 상대가 아닌가? 그 제법 솜씨좋던 중년남. 진석은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내심 꽤 당황하고 있었다. 제이스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지만 이런면에선 진석보다 훨씬 냉정했다. 제이스는 으흠 목을 가다듬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거 안 된 일이지. 꽤 유능한 사내였는데."
"그러게요. 그런데 제가 듣기론 래스커 아저씨가 돌아가시기 전에 수호자님이 뭔가 일거리를 주었던걸로 알고 있는데... 그것과는 무관한걸까요?"
제이스의 눈빛이 번득인다. 진석은 눈 앞의 카야라는 여자가 보통내기가 아님을 깨달았다. 자신이 죽인 상대의 제자뻘이라니. 어디서 이런게 튀어나온거야? 안절부절 못하는 진석과는 달리 제이스는 태연했다.
"분명 그가 죽기전에 내가 부탁한 일이 있었어. 물론 여느때처럼 쉽게 완수했고. 이후 난 데오그라즈를 바로 떠났다만...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지? 내가 그를 죽이는데 관여라도 했다는건가? 하, 우리쪽 일을 충실하게 도와주는 유능한 상대를 죽여서 내가 얻을 이득이 대체 뭐지?"
제이스의 눈빛이 싸늘히 빛났다. 허튼 소리는 딴데가서나 하라는듯한 의도가 담겨있는 눈빛. 카야는 잠시 제이스의 눈을 마주보다 이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거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가 될만한 소리를 했군요. 앞으론 주의하겠습니다."
"흥."
카야는 생각했다. 분명 이 여자는 래스커 아저씨를 죽이지 않았다고. 어쩐지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남자는 어떨까? 래스커라는 이름이 나오고 나서 부터 역력히 당황하는 기색이 보인다. 그는 뭔가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 허나 지금 이런 분위기에서 그에게 직접 물어볼 순 없겠지. 데오그라즈까지 동행하는 동안 천천히 알아봐주마. 그렇게 생각하며 선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고 계시는데 폐가 많았군요. 그럼 내일 아침 다시 뵙겠습니다."
탁자에 놓여있던 중절모를 집어들고 가볍게 목례하는 카야. 그녀가 작별인사를 건네자 가만히 앉아있던 아르데나가 우물쭈물하다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오늘 감사했습... 니다."
"...뭘. 내일 또 보자."
싱긋. 마치 동생을 대하듯 아르데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곤 뚜벅뚜벅 여관을 빠져나가는 카야. 제이스는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진석을 향해 말을 걸었다.
"...러셀."
"응?"
"쟤, 보통내기는 아닌것 같네. 말조심해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아르데나? 너도 들었겠지만 저 여자나 다른 사람 앞에서는 우릴 데이나와 앤커니라고 불러."
"네..."
사람 일이라는게 참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구나. 진석은 새삼 그렇게 생각했다. 그야 그 당시엔 자신이 빅 본의 데오그라즈 지부 사무실을 일방적으로 털었고, 결국 추적당해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었으나... 허나 지금은 교단에 속해있고 빅 본의 일을 도와주라는 명령을 받은 참이 아닌가? 과거에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 본인의 행동이 이제 와서 자기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 진석이 끄응 하고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자 제이스가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뭘 그렇게 걱정하고 그래? 신경쓰지마. 여차하면 저깟 애송이 계집, 내가 흔적도 없이 태워버릴테니까."
"...아니. 그랬다간 일이 더 복잡해질 것 같으니 가능한 온건히 해결해보자고."
"알았어. 러셀의 생각이 그렇다면야."
진석의 손을 자신의 가슴쪽으로 끌어당기며 뜨거운 시선을 보내는 제이스. 진석은 힐끔 아르데나의 눈치를 보곤 슬쩍 손을 뿌리쳤다.
"에 뭐... 그보다 좀 이르지만 슬슬 저녁이나 먹자. 아르데나도 배고프지?"
"...네, 네에."
화제를 돌리려한 진석이었지만 제이스는 짖궂은 표정을 지으며 스윽 옆에 바짝 달라붙었다. 진석은 얘가 왜 이래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제이스는 그의 귓가에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오늘도... 같이 목욕하는거야? 그때처럼?"
"어우야. 아까 그렇게 했는데도 아직도 성에 안찼어?"
"나흘분이 쌓였는걸. 아직, 아직 부족해."
사실 아까 방에서 나눈 정사면 충분했었다. 하지만 카야의 말에 당황해하는 그의 모습이 왠지 신선했다. 평소엔 그렇게 센척을 하는 주제에 겨우 그 정도에 떠보기에 흔들리기나 하고. 이래서야 자기가 없었으면 제 풀에 래스커는 내가 죽였소! 라고 밝혔을지도 모를일이다. 정말 귀여운 남자... 스윽, 제이스의 손길이 진석의 허벅지로 파고들었다. 옆에서 제이스의 유혹과 그 손짓을 지켜보던 아르데나는 얼굴이 벌게진채 애써 못 본 척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진석은 이래도 되는걸까 생각하며 점점 더 달라붙는 제이스를 내버려두었다.
'...에라 모르겠다. 뭐가 되든 어떻게 되겠지 뭐. 하하하... 하아. 한심해...'
하지만 식사를 한 후, 진석은 또 엉겨붙으려는 제이스를 내버려두고 아르데나와 함께 외출했다. 아까 아르데나가 불한당들에게 봉변을 당할뻔 했다는 일도 있었고 자신도 간만에 옷이라도 두어벌 살 생각이었다. 지금 진석이 입고 있는건 일전 이 페레나 시 잡화점에서 구입했던 칙칙한 단색톤의 평상복이었다. 새삼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는 진석.
'그러고보니 싸구려라 빈티가 좀 나긴 하네.'
원래부터 차가운 인상에 언제나 정장차림을 하고 있어 시크해 보이는 제이스. 깡 마른게 흠이긴 했지만, 깔끔한 새 옷을 차려입고 나니 여느 귀한집 아가씨로 보이는 아르데나. 그 사이에서 자신만 허름해 보이는 옷을 입고 있으니 어째 좀 그랬다. 현실도 아니고 어차피 게임. 옷 같은데 크게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남는게 돈인데 뭐.'
일전 흑철단검과 런들 대거 포님을 살때 들렀던 그 무기상. 활달한 성격의 딸과 인심 좋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바로 그곳. 자기 옷 사러 나가는 김에 거기에 들러 아르데나에게 만약을 대비한 호신용 단검 한 자루 정도 사 줄 생각이었다. 아무 말 없이 진석의 뒤를 졸졸 따르던 아르데나는 진석의 등을 톡톡 가볍게 두드리더니 질문해왔다.
"저기... 어디가시는거에요?"
"음 그렇지. 그러고보니 아르데나가 좀 골라주지 않을래?"
진석은 손벽을 짝 치며 대답했다. 아르데나가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자 진석은 손을 들어 저 앞쪽에 보이는 의류점을 가르켰다.
"모처럼 생각난김에 나도 옷이나 새로 사려고. 아르데나가 골라주는 걸로 입을께."
"......"
진석과 옷가게를 번갈아 보던 아르데나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그녀. 진석은 피식 웃으며 아르데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리고 둘은 가게로 들어가 아르데나가 골라준 옷을 적당히 몇 벌 구입했다. 계산을 마치고 옷 가게를 나선 진석은 아르데나를 데리고 무기점으로 향했다. 무기점 앞에선 이전과 같이 점원 소녀가 기운찬 호객을 하는 중이었다. 진석이 아르데나와 함께 그쪽으로 다가서자 소녀는 앗 하더니 먼저 진석을 알아보고 말을 건넸다.
"아! 일전의 그 눈썰미 좋은 미남 손님!"
진석의 현재 매력은 런들 대거 포님의 보정을 받은 41. 진석이 별로 의식하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 NPC들 입장에선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미남인것이다. 게다가 무기를 감정하는 모습도 보여줬었으니 그녀로선 당연히 기억하고 있을터. 점원 소녀가 그렇게 반가운 내색을 하자 진석도 고개를 까딱 하며 인사를 받았다.
"여어. 또 왔어."
"헤헤~ 혹시 제가 또 보고 싶어서 오신건 아니겠... 은, 어라. 동행이 있으심다? 혹시 동생분?"
둘 다 미남미녀에 머리색이 같으니 그렇게 보인 모양이다. 진석은 딱히 부정을 하지 않고 태연히 대답했다.
"응 뭐어. 오늘은 내가 쓸건 아니고 적당히 얘가 호신용으로 지닐만한걸 하나 사려고."
아르데나의 호신용으로 쓸만한 걸 사러 왔다는 말에 아르데나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점원 소녀는 헤쭉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헤에... 동생을 걱정하는 팔불출 오빠인검까? 훌륭함다! 자자, 우선 안으로!"
저번과 같이 소녀의 안내를 받아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일전에 왔을때와는 달리 안쪽의 상품들이 꽤 바뀌어있었다. 물건의 회전율이 좋은걸까, 아니면 그냥 랜덤으로 파는 물건들이 바뀐걸까? 진석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무구들을 구경했다. 소녀는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곧 자그만한 나무 상자를 하나 꺼내왔다.
"우선 이건 어떻겠슴까?"
달각. 상자를 열어보니 안엔 새하얀 날을 한 작은 단검이 있었다. 날의 질감을 보아하니 금속이 아닌 뼈를 가공해 만든것 같았다. 길이가 채 한 뼘도 안되는게 무기로서의 기능을 하는 단검이라기보단, 일종의 멀티툴처럼 소소한 작업용에나 쓸만한 휴대용 나이프에 가까웠다. 날의 길이도 겨우 손가락 하나 정도. 진석은 그것을 집어보았다.
- 휴대용 본 나이프
공격력 : 4
설명 : 짐승의 뼈를 깎아 만든 소형 나이프. 휴대나 사소한 작업에 편리하다. 단, 그리 튼튼해 보이지는 않는다.
특징 : [내구낮음]
"흐음..."
본격적인 전투용도로 쓸 것도 아니고 유사시를 대비한 호신용 무기이므로 그렇게 위력이 높은걸 사줄 필요는 없다. 어차피 아르데나는 별 스킬도 없으니 무기를 제대로 다루지도 못할것 같고. 그러니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정도면 충분. 그런 점에서 이 본 나이프는 크기가 작아 휴대성이 좋다는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내구낮음이 붙어있다는게 좀 걸렸다. 원래 뼈로 만든 무구들이 그런편이긴 하지만서도... 진석은 나이프를 내려놓고 점원 소녀에게 물었다.
"이거랑 비슷한 크기의 다른건 없을까?"
"뭐어 단순히 크기나 휴대용으로 찾으시는거라면 너클같은게 있슴다만..."
슬쩍 진석의 뒤에 선 아르데나를 바라보는 소녀. 뒷통수를 벅벅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동생분이 험한 주먹질을 할 수 있을것 같진 않고... 이거외의 소형 무기래봐야 그냥 보통 단검들임다. 아, 대신 이건 끝쪽에 고리가 있어서 목걸이로도 차고 다닐수도 있슴다. 그러니까 본인이 벗어두지 않는 이상 흘리거나 잊어버릴 일은 절대 없슴다!"
진석이 내려놓은 나이프를 다시 들어보이며 세일즈 포인트를 어필하는 소녀. 진석은 팔짱을 끼고 어쩔까 고민하다 아르데나에게 직접 보여줬다.
"어때. 이거 괜찮을까?"
"...네. 전 사주시는거라면 뭐든 괜찮으니까요."
"끙. 아니 그렇게 정해버리지 말고... 일단 한 번 직접 쥐어보기라도 해봐."
점원 소녀에게서 받아든 본 나이프를 아르데나의 손에 쥐어주는 진석. 아르데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잠깐 어쩔줄 몰라하더니 에잇 하고 허공에 나이프를 두어번 휘둘러 보았다. 대충 휘둘러보는것 뿐인지만 정말 어설픈 자세. 저래서야 누굴 공격하긴 커녕 옆에서 슬쩍 밀기만 해도 제풀에 넘어지게 생겼다. 진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야 어차피 뭘 사줘도 마찬가지일테지.
"...그냥 저걸로 할게. 목걸이 끈도 달아줘."
"예입! 매번 감사함다!"
진석은 기왕 무기점에 온 김에 투척용으로 쓸 싸구려 단검을 몇 자루 더 사서 가게를 나섰다. 가게를 나서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르데나는 자신의 목에 걸린 본 나이프가 어색한지 그 자루를 자꾸만 손으로 매만졌다.
"왜, 마음에 안들어? 다른걸 사줄걸 그랬나?"
"아니! 아니에요! 마... 마음에 들어요."
과거의 기억이 명확하지 않은 아르데나였지만,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는다는 기억이 흐릿하게나마 남아있긴 했다. 아마도 자신의 생일이었으리라. 주변의 사람들 모두가 축하해주는 따스하고 행복한 분위기... 비록 지금 받은 것은 제대로 된 축하 선물이 아니라 몸을 지키라고 사준 호신용 나이프였지만,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덕분에 조금 행복해졌다. 조각난 기억의 끄트머리를 더듬던 아르데나는 꼬옥 진석의 옷깃을 쥐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맙... 습니다."
"일일이 감사인사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별 것도 아닌데 머쓱하게시리."
짐짓 태연함을 가장하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하는 진석. 고마운 사람. 아르데나는 용기를 내어 손을 뻗어 진석의 손을 슬쩍 쥐었다. 진석은 그런 그녀를 돌아보더니 피식 웃곤 손을 더 꽉 쥐어주었다.
'대신관인 미리안이 어린 조카나 친척아이 상대하는 느낌이었다면, 아르데나는 나이 터울이 있는 얌전한 여동생 같다는 느낌이네. 귀여워.'
둘은 그렇게 손을 꽉 마주잡은채 여관에 돌아갔다. 이후 자기만 두고 나갔다고 삐진 제이스를 달래주느라 진석은 또 다시 한참을 그녀와 함께 침대위에서 뒹굴어야 했다.
============================ 작품 후기 ============================
선작 및 추천 주시는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많이 부족한 글임에도 관심주는 분들이 있으니 부끄럽고 기쁩니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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