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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34화 (34/155)

< --   - 3.   -- >         * 34화 *

"음 저긴가? 빨간 건물이랬지?"

기억을 따라 선셋대로까지 온 진석은 베이머스 호텔 건너편에 있는 4층짜리 붉은 건물을 발견했다. 로엔 호텔도 베이머스 호텔 못지 않은 최고급 호텔이었다. 해신제 직전에 왔을땐 묵을 방이 없어 베이머스 호텔에서 1박에 4골드라는 거금을 주고 묵었었는데, 여긴 또 얼마나 하려나? 뭐 지금은 어차피 남는게 돈 뿐이니 상관 없지! 아예 한 층을 싹 빌려버릴까보다! 진석은 베이머스 호텔에서 특실을 빌리고 수중에 단 돈 은화 한닢만 남았었던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르데나와 함께 로엔 호텔의 로비로 들어섰다.

"어서오십시오."

베이머스 호텔의 로비가 화려한 붉은톤이었다면, 이쪽은 베이지톤이다. 차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 가만 보니 직원들이 입고 있는 복장도 이쪽이 더 세련됐다. 진석과 아르데나가 카운터에 다가서자 단정히 머리를 틀어올린 여직원이 둘을 맞이했다.

"두 분이신가요?"

"아니, 셋. 이따가 일행이 한 명 더 올거라서. 음... 금액은 상관없으니 안에 방이 둘 이상 딸린 객실이 있을까? 가능한 좋은곳으로."

아르데나에게는 방을 따로 빌려줄까 하다가 생각을 바꿔 그렇게 묻는 진석. 여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물론 있습니다. 최상층의 특실로 1박에 5골드입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러고보니 며칠이나 묵을지 모르겠는데... 에라, 어차피 하루이틀새 끝날일도 아닐테니 우선 일주일 쯤 묵는걸로 해둘까? 계산은 이걸로."

진석은 품에서 미리안에게 받았던 수표 중 한 장을 꺼내어 카운터 위로 내밀었다. 호기롭게 고액의 수표를 내미는 모습에 여직원의 태도가 한층 더 정중해졌다. 그러고보면 등에 큼직한 짐가방을 메고 있어서 그렇지 진석이나 아르데나의 옷차림도 꽤나 좋은데다가 둘 다 쉽게 볼 수 없는 미남미녀다. 여직원은 유람이라도 나온 높은 신분의 남매가 아닐까 생각하며 숙박계를 작성했다.

"명의는 앤커니로. 그리고 나머지 대금은 돌려줄 필요없이 달아두고 체크아웃할때 정산하는걸로."

어차피 호텔에서 묵다보면 세탁이나 식사 등 여러가지 서비스를 이용할텐데 일일이 계산하기 귀찮을 것 같아 그렇게 처리했다. 어차피 배낭안에도 수백닢의 금화가 그대로 남아있기도 하니 거슬러 받기가 귀찮았던 것이다. 진석과 아르데나는 곧 직원의 안내를 받아 4층의 특실로 올라갔다. 진석은 짐을 한쪽에 풀어놓고 방을 대충 둘러보았다.

"뭐 요구한대로 방이 하나 더 딸려있다는 것만 빼면 베이머스 호텔이랑 비슷하네."

베이머스 호텔의 특실 만큼이나 호사스러운 방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무식할정도로 컸던 베이머스 호텔의 침대와는 달리 이쪽의 침대는 정상적인 크기라는 것. 그리고 방 안에 관엽식물 화분이 꽤 여럿 장식되어 있다는 것 정도? 그런데 아르데나는 무슨 별세계라도 본 사람마냥 놀라워하며 방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그만 떠올려야지 했는데 저걸 보니 또 에나 생각나네.'

이것저것 다 신기해하는 아르데나의 모습이 어째 에나와 겹쳐보인다. 진석은 그런 생각을 떨쳐내겠다는듯 고개를 좌우로 훌훌 털었다. 푹신한 소파에 앉은 진석은 한참 구경중인 아르데나를 불렀다.

"아르데나, 잠깐 이쪽으로 와볼래?"

"네!"

호사스런 방의 모습을 구경하느라 약간 들뜬 아르데나가 기분좋게 대답하며 쪼르르 달려나왔다. 진석은 아르데나를 옆에 앉힌 다음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며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아르데나. 음... 조금 힘들지도 모르는 부탁을 해도 될까 싶은데."

아르데나는 진석의 말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말씀만 해주세요. 오빠의 부탁이라면... 전 뭐든지 할 수 있어요."

눈동자가 결의의 빛으로 가득찬게 누가봐도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석은 웃는낯으로 기특하다는 듯 아르데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말을 이었다.

"네 변신능력말인데. 앞으로 내가 하는일에 필요할 것 같아. 쉽진 않을테지만 날 돕기 위해 힘을 빌려줄 수 있겠니?"

진석은 솔직히 당장 확답이 나올것을 기대하진 않았다. 아무리 자신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긴 해도 저주는 그녀를 오랫동안 구속해오던 것. 그리 쉽게 결정하진 못할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르데나의 입에선 즉답이 튀어나왔다.

"물론이에요! 오빠가 원하신다면 저는... 검이건, 괴물이건, 아니 그 무엇이라도 하겠어요."

저주로 인해 고통받았던 기억따윈 이미 다 날아가버렸다는듯 되려 당당한 태도의 아르데나. 진석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나 겉으로 내색하진 않고 담담히 손을 뻗어 장하다는 듯 아르데나를 살며시 안았다.

"아..."

"...고맙다 아르데나.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정말로 고마워."

진석의 품에 안긴 아르데나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채 어쩔 줄 몰라했다. 손만 잡아도 어쩐지 행복한 기분이 들었는데, 지금은 아예 품에 안아준게 아닌가. 진석의 가슴에 기댄 아르데나의 맥박이 점점 빨라졌다. 진석은 품에 안은 아르데나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차분히 말했다.

"원래는 좀 더 나중에 설명해줄 생각이었지만... 사실 나는 어떤 교단에 소속되어있단다. 세상을 위험하게 만드는 그런 사교의 집단이지. 이런 중요한걸 미리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만..."

세상이 위험해지건, 사교의 집단이건 그딴게 무슨 대수랴? 진석의 품에 안겨있는 아르데나는 자신을 구해주고 따스하게 대해준 눈 앞의 상대가 무슨 일을 하는지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괴물이나 검의 모습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아르데나에겐 세상을 위협하는 사교집단이라는 말도 별 무게감 없이 희박하게 들렸다.

"상관... 없어요. 오빠는 오빠니까..."

"그래, 착하구나. 고맙다 내... 동생아."

실제론 형제 자매가 없는 외동아들인 진석. 그래서 직접 입 밖으로 동생이라는 말을 꺼내기 참 힘들었지만 분위기상 어떻게든 말을 했다. 이것이 다 앞으로 아르데나를 자신의 충실한 도구로서 부리기 위한 포석이었다. 상대가 그 무엇도 아닌 자신의 호의를 기대하고 있으니 바라는대로 그것을 내어주며 길들이는 것 뿐. 과거의 기억을 대부분 잃고 가진것이라곤 몸에 새겨진 저주뿐이었던 아르데나는 그것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파악도 하지 못한채 진석의 호의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오빠..."

진석을 올려다보는 아르데나의 눈빛이 어째 묘하게 촉촉했다. 아차. 동생이라고 쐐기를 박았던 말이 되려 이상하게 먹혀들어간 모양이다. 저것은 남매관계가 아닌, 남녀의 정을 바라는 눈이다. 안되지. 이 이상은 곤란하다. 슬쩍 품에서 아르데나를 떼어놓으며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짓는 진석.

"자아. 그러면 한 번 보여줘볼래? 우선 검으로 변신하는 능력부터."

아르데나의 얼굴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자신의 손을 내밀어 진석의 손바닥 위에 얹었다. 그리고 눈을 감은채 집중하자 몸이 빛나기 시작하나 싶더니 진석의 손바닥 위로 응축되듯 모여들었다.

"호오..."

샤아악. 빛의 응집이 끝나고 나니 아르데나의 모습은 사라지고 어느새 진석의 손 위엔 투박한 모양의 단검 한 자루만이 남아있었다. 지금껏 게임을 많이 해왔지만 이런 변신은 처음 본 진석은 흥미를 느끼며 검을 쥐고 상태를 살펴보았다.

- 마검 아르데나

공격력 : 32

설명 : 아르데나가 저주의 힘을 이용해 마검으로 변신한 모습. 겉보기엔 투박한 단검의 형태를 하고 있다. 손잡이를 쥐고 있으면 아르데나의 의식과 공명 할 수 있다. 사용자의 무력과 민첩이 큰 폭으로 늘어난다.

특징 : [암속성], [무력+6], [민첩+4]

'오오, 이거 끝내주잖아?'

현재 진석의 무력은 46, 민첩은 41. 아르데나의 저주를 깨부수며 얻은 보상으로 각기 1씩 상승했었다. 거기에 이 마검을 쓰면 무력은 무려 52, 민첩은 45가 된다. 한계 수치인 50을 뛰어넘는 오버 스테이터스! 이거야 이거하며 만족하는 진석의 머릿속에 갑자기 아르데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떠... 세요? 마음에 드시나요?]

의식을 공명한다는게 이런 의미였구나. 진석은 입으로 직접 대답하려다가 머릿속으로 대답을 떠올렸다.

'아아. 훌륭하네. 정말로 마검이라 불릴 정도의 능력이야. 자 이제 원래대로 돌아와도 좋아.'

[옆에 내려놔 주시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께요.]

진석은 방금 아르데나가 앉아있던 자리에 단검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이번엔 아까 검으로 변하던 모습을 거꾸로 되돌리듯 검신이 빛으로 화하더니 쭈욱 퍼져나가며 점차 사람의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진석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르데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잘했어. 대단하네 아르데나는."

"에... 아, 아뇨 저기 별 것... 아닌데."

노골적인 칭찬에 쑥스러워하는 아르데나. 그녀의 머리를 한참 쓰다듬던 진석은 흠 하고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러고보니 괴물로의 변신은... 여기선 무리겠구나."

특실의 천장이 꽤나 높긴 했지만 실내에서 신장 4미터에 육박하는 괴물로 변신하기엔 절대 무리다. 괴물 변신은 나중에 사람 없는 한적한데 가서야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아르데나가 약간 망설이듯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기... 오빠."

"응?"

"그, 그러니까요. 제가 완전히 괴물로 변신하지 않더라도... 어느정도는 괴물의 힘을 이끌어 낼 수 있는것 같아서..."

"그게 무슨 소리야?"

아르데나는 자신도 이것은 페레나시에서 데오그라즈로 오는 도중에 깨달은 힘이라고 대답했다. 완전히 괴물로 변신하지 않아도, 자신이 원하면 그 괴력이나 민첩성만을 일부 이끌어내어 몸에 깃들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알아듣기 쉽게 표현하자면 괴물로 변하기 직전의 문턱에서 멈추는 것이라나?

"그건 꽤 흥미가 가는데. 그럼 바로 그 힘을 한 번 끌어내볼래?"

"네. 오빠가 원하신다면. 봐주세요. 하아압...!"

소파에서 일어서더니 제 자리에 선채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는 아르데나. 이윽고 몸에서 서서히 무형의 기운이 뿜어져나오며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허어?'

무형의 기운이 진석에게까지 저릿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자 아르데나는 팟 하고 눈을 떴다. 선홍빛으로 붉게 물든 두 눈. 아르데나의 의식속에서 상대했던 괴물의 눈처럼 새빨간 기운이 이글거리는 눈동자였다. 진석은 순간 놀라 움찔했지만 평정을 가장하고 그녀의 모습을 살펴봤다.

"...어, 어때?"

"지금이... 힘을 이끌어낸 상태에요. 몸속에, 팔 다리에, 굉장한 기운이 솟아나고 있어요."

진석은 정확한 확인을 위해 메뉴를 열어 아르데나의 스테이터스를 확인해 보았다. 놀랍게도, 한자리였던 그녀의 무력은 42로, 그리고 민첩 역시 40까지 올라있었다.

'세상에. 이 정도면 거의 내 스테이터스랑 맞먹는 수치잖아? 그런데 이건 또 뭐야.'

아르데나의 상태를 나타내는 부분에 빨간 아이콘이 하나 떠 있었다. 확인해보니 [흉성]이라고 쓰여있었다.

'그렇군. 아무리 제어가 가능해졌다고 해도 저주는 저주. 본래의 성격과 달리 흉포해진다 이건가?'

평소엔 얌전한 태도의 아르데나였지만 괴물의 힘을 일부 이끌어낸 지금은 뭔가 안정이 되지 않는지 어쩐지 안절부절 흥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산책이 가고 싶은데 목줄에 메여있어 마구 안달내는 강아지를 연상시켰다. 표정 역시 평소의 그것과는 달리 굉장히 들떠있었다. 넘쳐나는 기운을 해소하고 싶어 어쩔줄 모르는 느낌이랄까?

'대충 알겠군. 흉성 상태의 아르데나라. 분명 지금의 아르데나에게 내가 누구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주저않고 투견처럼 덤벼들테지. 그리고 이 상태에서 피를 보거나 더 흥분하게 되면 바로 괴물상태로 넘어간다거나... 아마 뭐 그렇겠지.'

"됐어 아르데나. 원래대로 돌아와."

"네... 네."

혼자 숨을 몰아쉬며 흥분해있던 아르데나였지만 진석의 말에 정신을 차리곤 눈을 감고 힘을 제어해 몸 안으로 봉인했다.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할 정도로 몸에서 연신 뿜어지던 투기와 기운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윽고 완전히 본래의 상태로 돌아온 아르데나는 잠깐 괴물의 힘을 이끌어낸 것만으로도 지쳤는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고생했다. 가급적이면 괴물의 힘은 쓰지 않는게 나을 것 같네."

진석은 그렇게 말하며 아르데나를 일으켜 제대로 소파에 앉아 쉬게 했다. 아르데나는 조금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진석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미숙해서."

"무슨 소리야. 이런 힘을 다루는게 쉬울리 없잖아? 충분히 잘했어."

미소를 지으며 아르데나의 어깨를 두드리는 진석. 아르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 다음부턴... 오빠를 위해서 더 노력할게요."

일신에 큰 힘을 지녔음에도 그것을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전념해주는 소녀라니. 이 어찌 기특하지 않을까? 흡사 좋은 장비나 아이템을 손에 넣은것 같은 묘한 충족감. 진석은 만족스러웠다.

'아무튼 아르데나는 그렇다 치고... 제이스는 언제쯤 오려나?'

제이스는 카야와 부하들을 따라서 데오그라즈의 빅 본 지부로 이동했다. 일전 진석이 복면을 쓰고 난입해 금고를 털어갔던 바로 그곳이었다. 이따금 래스커에게 명령을 내리러 오던 제이스에겐 익숙한 곳이었다.

'여전히 지저분한 골목이네...'

그렇지 않아도 인구밀도가 높은 한 나라의 수도. 과밀화된 선착장 일대는 슬럼화 되어있었다. 지부 사무실은 그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으니 주변의 환경은 지저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카야와 더불어 40여명에 달하는 험상궂은 사내가 동시에 이동하자 길가에서 시시덕대던 건달이나 이른 영업을 나온 창녀들도 질겁하며 골목이나 건물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그들도 이곳에 자리잡은 빅 본과 레드라인 두 조직의 다툼 정도는 알음알음 들어 알고 있었을터. 바보가 아닌이상 이런 폭력조직의 무리에 휘말리고 싶어하진 않았다. 부하들은 밖에 대기시킨채, 제이스가 카야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십여명의 사내가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인사를 해왔다.

"오셨습니까!"

"그래. 사무실은 2층인가?"

"네, 올라가시면 됩니다."

카야는 부하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갔다. 삐걱삐걱. 낡은 목조건물의 계단에선 메마른 소리가 났다. 카야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페레나의 사무실은 더 깨끗하고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뭐 이미 다른 조직들이 여럿 자리잡은 데오그라즈에 빅 본이 억지로 머리를 들이민 꼴이니 내 맘처럼 좋은 곳에 자리를 잡을 순 없었던 거겠지. 허나 가능하다면 하루빨리 사무실을 다른곳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카야였다. 짧은 복도를 지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서 대기하던 한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 인사를 해왔다.

"어서오십시오, 카야 아가씨. 제가 현재 지부를 책임지고 있는 웍스턴이라고 합니다."

웍스턴은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사내로 덥수룩한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얼굴엔 어쩐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부상을 입기라도 한건지 왼쪽 팔뚝엔 붕대가 감겨있었다. 웍스턴은 원래 래스커 휘하에서 도박장을 맡고있던 영업장의 책임자였으나, 지부장인 래스커와 그 오른팔인 덱이 죽어버려 순서상 할 수 없이 임시로 지부장을 대행하고 있었다. 별 일이 없었다면 그로서도 어떻게든 지부장일을 대행 할 수 있었을테지만 현재 레드라인에게 공격을 당하는 중이라 매우 곤란한 지경에 빠져있었다. 카야는 제이스에게 의자를 권하고 자신도 자리에 앉으며 웍스턴에게 말했다.

"음. 오자마자긴 하지만 상황의 설명부터."

"네. 이쪽을 봐주십시오."

웍스턴은 벽 한켠에 걸어놓은 선착장 지구의 지도를 가르켰다. 지도에는 빅 본이 소유하고 있는 영업장과 사무실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현재 저희가 데오그라즈에 보유하고 있는 영업장은 이 도박장과, 창관, 술집. 총 세곳입니다. 그 외엔 거리에 마약판매책을 풀고 있고 또 지금 계시는 이 건물과 창고가 있습니다. 창고는 밀수품을 보관해두는 곳으로, 임대해서 쓰고 있으며 실 소유자는 화물 회사의 선주입니다."

"그나마 창고쪽은 별 문제 없겠군."

카야의 말에 웍스턴은 조금 놀랐다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항구의 화물 창고는 법적으로 아무나 소유할 수 없게 되어있으며 허가받은 자만이 운용하거나 임대 할 수 있었다. 허가 받은 사업자에게만 권한을 주어 화물의 입출입을 투명하게 관리하겠다는 일종의 밀수 방지책이었으나 그냥 눈가리고 아웅이었다. 창고를 보유한 사업자는 그들의 의향에만 맞으면 아무에게나 창고를 빌려주곤 했다. 게다가 창고를 임대 해주는 사업자들은 그들 간에 긴밀한 연결고리가 있어 화물조합을 결성해놓곤 한 번 그들의 눈에 밉보이면 아무리 큰 돈을 내어줘도 물건을 보관할 자리를 한 뼘도 얻을 수 없게 했다. 밀수를 저지르는 범죄조직들도 창고는 임대해서 사용하는터라, 항쟁이 나도 상대의 물건이 쌓인 창고를 노리는 일은 저지르지 못했다. 그들이 보유한 창고에서 소란을 일으켰다간 화물조합의 눈 밖에 나버려 다신 어느 창고도 빌리지 못할것이 뻔했으니까. 세금을 한 푼도 물지 않고 물건을 팔아먹을 수 있는 밀수라는 큰 수익 창구가 날아가는 셈이다. 물론 화물조합의 구성원들이 어지간한 개인사업자라면 조직측에서도 협박이나 돈으로 회유 할 수 있을테지만, 화물 창고를 소유하고 있다는것은 이미 여느 귀족급 이상의 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아무리 폭력을 밥벌이 도구로 삼는 범죄조직으로서도 쉽게 어찌 해볼 수 없는 상대라는 것. 그러니 항쟁이 벌어져 서로의 영업장을 직접 공격하는 일이 생겨도 지키는 사람 하나 없는 창고는 노리지 못하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카야는 이미 그것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 하지만 일주일 전, 이쪽 술집을 빼앗겼습니다."

웍스턴은 술집을 가르키며 말했다. 선착장 지구는 크게 보자면 동서남북 네개의 구획으로 나눌 수 있었는데 빅 본의 사무실과 창관, 도박장은 모두 북쪽 지구에 위치해 있었고 거리도 서로 그리 멀지 않았다. 도박장이나 창관은 손님측에서 알아서 찾아오는 반면, 술집은 일반 주민을 상대로도 장사해야 하므로 비교적 주택가와 인접한 서쪽지구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때문에 제때 대응하지 못하고 레드라인의 패거리의 공격에 그대로 가게를 빼앗겨 버린것이었다.

"여덟명이 있었지만 서른이 넘는 떼거리가 몰려와서... 세 명이 죽고 넷은 중상. 한 명이 간신히 도망쳐 습격 사실을 알렸습니다."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며 말하는 웍스턴. 카야는 미간을 좁히며 쓰고있던 모자를 벗어 책상위로 던져놓으며 말했다.

"그 넷은? 괜찮은가?"

"두 명은 각자 팔다리가 심하게 상하고 치료도 늦어져서... 다 나아도 절거나 잘 못쓰게 될 것 같다고 들었습니다. 나머지 둘은 요양만 잘 하면 괜찮다고 합니다."

"하아... 그리고?"

"네. 레드라인 놈들은 자신들의 구역인 남쪽 지구를 벗어나 북쪽 지구에도 대여섯명씩 짝을 이루어 돌아다니며 저희쪽 마약판매책을 공격하거나 따로 돌아다니는 조직원들을 노려 공격하고 있습니다. 래스커 지부장이 살아있던때엔 총 오십여명의 전투원에 십여명의 신입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스물 둘입니다. 기껏 들어왔던 신입놈들도 반은 도망가고 반은 되려 레드라인쪽에 들어갔습니다."

원래 인원의 절반도 채 안되다니. 정말로 피해가 막심한 상황이었다. 카야가 한숨을 내쉬는 사이 듣기만 하고 있던 제이스가 입을 열었다.

"레드라인이라. 흥. 래스커가 살아있을때도 놈들때문에 골을 싸메곤 하더만... 그래, 네가 알고 있는 레드라인의 영업장을 표시해봐."

"아... 네. 우선 빼앗긴 이 술집입니다. 이 술집을 빼곤 놈들의 사업장은 죄다 남쪽지구에 있습니다. 이곳은 아편굴 겸 창관. 층을 나누어 영업한다고 하더군요. 이건 여관. 이 여관도 지하에선 도박장이 운영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확실하진 않지만 이쪽 거리의 상점들 몇 채와... 마지막으로 보트하우스. 이 보트하우스가 사무실을 겸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이스는 다리를 꼰채 발목을 까닥거리며 웍스턴에게 물었다.

"그래서 놈들 총원이 몇 정도 되지?"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최소 80, 최대 100은 될겁니다."

씨익. 제이스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고작 그거? 라는 의미가 담긴 조소였다. 제이스는 카야를 바라보며 물었다.

"자, 네게 선택권을 주지. 우선 술집은 되찾아 주겠어. 그리고 그 외에 저 중에서 박살내고 싶은곳을 하나만 골라봐."

"아... 그럼 보트하우스를."

물론 수익 측면을 생각한다면 창관을 겸하는 아편굴이나, 도박장이 들어서있는 여관을 공격해 빼앗는것이 좋을것이다. 하지만 웍스턴의 정보가 정확하다면 사무실을 겸하는 보트하우스엔 분명 레드라인의 간부들이나 두목이 있을것이 분명했다. 아버지의 수행원들 수십명을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처치해버린 수호자들의 전투력에 대해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바 있다. 그들이 기왕 실력을 발휘해준다면 상대에게 가장 치명적일 장소가 좋았다. 수호자들이 보트하우스를 쳐서 상대의 머리가 잘려나가준다면, 남은 몸통은 지부에 남아있는 인원과 자신이 데려온 부하들을 합쳐 충분히 제압 할 자신이 있었다. 제이스는 카야의 선택에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후후, 뭐 좋아. 약속한대로 두 군데는 우리가 처리해주지. 뒷수습은 알아서 하도록."

"그런데 언제 움직이실 겁니까? 저희도 거기에 맞춰서..."

"이까짓 놈들 상대로 질질 끌기엔 시간이 아까워. 오늘 밤이야. 자정에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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