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37화 (37/155)

< --   - 3.   -- >         * 37화 *

이른 아침. 진석과 제이스는 호텔 근처의 한 카페에서 카야와 만났다. 카야의 입장에서 어젯밤의 일은 놀라울 정도였다. 수호자는 그녀 자신이 장담한대로 술집과 보트하우스의 레드라인 인원들을 싹 격멸했던 것이다. 게다가 보트하우스에선 목이 부러져 죽은 레드라인의 두목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어제 진석과 두 여자가 활약하던 시각, 카야도 오십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여관 겸 도박장으로 쓰이는 레드라인의 영업장을 공격해 큰 피해없이 그곳을 탈취했다. 이제 레드라인에게 남은것은 창관과 아편굴을 겸하는 영업장과 선착장 지구 남쪽방면의 상점 몇 곳 뿐이었다. 어제 카야가 부하들과 함께 쓰러트린 레드라인의 조직원 수는 약 스물 가량. 수호자들이 쓰러트린 숫자를 합하면 무려 오십여 이상! 레드라인의 전력은 확실히 반토막 이하로 떨어졌고 세력권도 그 태반을 잃었으니 실질적으로 양쪽의 싸움은 빅 본 쪽으로 그 추가 기울었다 할 수 있었다. 크나큰 도움에 우선 감사의 인사를 하려 했는데 어째 상대의 상태가 이상했다.

"...어이, 정신 좀 차려."

"핫, 아... 아아."

꾸벅꾸벅 조는 제이스의 어깨를 흔드는 진석. 해가 뜰때까지 진석의 혀놀림에 농락당하던 제이스는 채 얼마 자지도 못하고 카야를 만나러 끌려 나온것이다. 정신이 멍하고 아직도 아랫도리에서 뭔가 구물거리는 감촉이 남아있는것 같아 이따금 몸을 흠칫흠칫 거렸다. 카야는 그 모습이 그저 피곤해서 저런가보다 하고 쓴 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피곤하신가 보군요. 하긴 어제 그렇게 큰 일을 해주셨으니."

"...큰일이 있긴 했지, 암."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키득거리는 진석. 카야 입장으로선 당연히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제이스는 도통 정신이 들지 않는지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더니, 양 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가볍게 짝짝 두드렸다.

"으... 정말. 아, 아무튼 우린 요청받은 일은 해주었으니까... 아 그, 그... 안되겠어. 머리가 안 돌아."

안면을 감싸쥐고 으으 신음하더니 자기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힘겹게 커피를 마시려는 제이스. 하지만 지금도 눈이 반쯤 감겨있는게 커피고 뭐고 마셔봤자 별 소용 없어보였다. 진석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 대신 말했다.

"아무튼 우린 우리 몫의 일은 다 처리했으니... 나중에 일이 생기면 그때 또 보도록 하지. 이쪽 몸상태가 안 좋아서 먼저 실례해야겠어. 그럼."

진석은 그렇게 말하곤 잔에 든 커피를 마시려는건지 거기에 코를 박으려는건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제이스를 데리고 카페를 빠져나갔다. 카야는 그 뒷 모습을 보며 턱을 괴었다.

"...저 정도로 녹초가 될 만치 힘들었던건가? 흐음."

홀로 남은 카야가 잠시 망중한을 즐기며 남은 차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데, 카페 외부에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호위를 서고 있던 부하들 중 하나가 다가와 그녀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저기... 카야님. 방금 그들이 둘 다 수호자인가 뭔가 하는 자들 맞습니까?"

"그래. 근데 그건 왜 묻지?"

"아 그게..."

사내는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 망설이더니 결국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좀 이상합니다. 여자쪽은 이전에도 자주 봤던 사람이 맞지만 남자쪽은..."

"남자쪽은? 왜?"

"...전에 래스커 지부장이 살아있을때, 대대적으로 추적하라고 지시를 내렸던 인물이 분명합니다. 제가 분명 이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있던 저 자를 발견한 기억이 있어서..."

카야의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카야는 그를 황급히 끌어다 자리에 앉히고 질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해봐."

"마, 말씀드린대로 입니다. 래스커 지부장이 죽기 전에 저 여자 수호자가 무슨 물건인가를 찾아오라고 지시했었답니다. 그런데 그걸 누가 훔쳐가버려서, 다시 되찾기 위해 범인으로 추정되는 저 남자를 쫓았었습니다. 정보상 피터슨 영감의 도움이나 다른 조직의 인원까지 끌어다 온 도시를 뒤졌고, 결국 제가 여기에서 노닥거리는 저 자를 발견해 미행을 붙였었습니다. 이후 베이머스 호텔에서 머문다는걸 확인하고 지부장에게 알렸습니다만..."

"그런데? 그래서 뭐!"

"그날 밤 래스커 지부장은 덱과 솜씨 좋은 부하 몇 명을 데리고 베이머스 호텔로 향했고, 이후 호텔방에서 모조리 살해당한채 발견되서... 혹시 저 남자가 지부장 살해에 관계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띠잉. 카야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분명 래스커 이야기가 나왔을때 저 남자의 태도는 뭔가 석연찮긴 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가 래스커 살해에 관련이 되어 있을줄이야?

"...크으윽."

타앙! 카야의 주먹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주변의 이목이 카야에게 집중되었지만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으드득 이를 갈았다.

"이놈들... 설마 했지만 사람을 가지고 놀다니. 방금 알려준 그 일. 또 누가 알고있지?"

"저... 저 밖에 모릅니다. 그때 같이 추적했던 인원은 다른 조직의 도우미였고, 그나마 같이 행동했던 다른 동료는 이번에 레드라인에게 당해서 죽은터라... 이런건 달리 누구에게 말 할 수도 없고 해서..."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하는 부하. 카야는 테이블 위에 놓아뒀던 중절모를 집어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아, 이 일은 절대 다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마. 그리고 정보상 피터슨 영감이라는 작자가 있다고 했지? 만나봐야겠어. 안내해!"

이렇게해서 제이스가 우려했던대로 카야의 귀에 래스커 살해에 관한 건이 들어가 버렸다.

그 사이, 진석은 호텔방에 제이스를 데려다 재워놓고 홀로 나와 거리를 걷고 있었다. 미리안이 명령했던 일은 애당초 두 가지. 빅 본을 돕는것과 신기 폭풍의 지팡이를 훔쳐오는 것. 그 중 전자는 간단했기에 보다시피 그리 어렵지않게 해결했다. 이제 문제는 두번째였다.

'한 나라의 왕궁에 잠입... 을 어떻게 하지?'

그냥 힘으로 상대를 쓰러트리거나 누구 패죽이라는거면 쉽겠지만 도둑질이라. 그것도 한 나라의 왕실을 터는 일이라니? 전쟁을 걸어 다 죽이고 때려부수며 처들어간 기억은 많이 있지만 도둑질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끄응.'

여전히 번화한 데오그라즈의 거리. 도로엔 많은 사람들과 짐수레가 바쁘게 오갔다. 그 군중속에 파묻혀 정처없이 걷고 있는 진석. 끙끙거리며 고민하다 우선 왕궁의 모습이라도 직접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길 가던 노인을 붙잡고 왕궁의 위치를 묻자 친절히 길을 일러주었다.

"이쪽 길로 쭉 가다가, 사거리에서 왼쪽길로 꺾으면 정면으로 왕궁이 보일거외다. 그 다음부턴 그냥 왕궁이 보이는 방향으로 길을 따라가면 되지."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진석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노인이 알려준 방향으로 향했다. 한참을 걸어 과연 사거리에서 꺾자 저쪽 멀리 왕궁으로 보이는 건물의 모습이 보였다. 상업지구와 선착장지구 쪽 위주로만 다녀서 몰랐는데 왕궁은 도시의 북서편, 귀족이나 부호들의 거처가 많은 고급주택가 방향을 지나서 위치해 있었다.

'제법 커 보이는데?'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 리베라의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도시는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되었다. 외성은 도시 외곽의 경계를 따라 둘러진 외벽. 외적을 막고 출입자를 통제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방어수단이었다. 그리고 내성. 내성은 왕이나 도시를 다스리는 유력자가 머무는 거처였다. 그러니 외성이 무너져 적이 도시로 침입해 가장 먼저 노리는 것도 바로 내성이었다. 내성이 함락된다는 것은 완전한 패배를 의미했으니까. 그러므로 내성은 내성 나름대로 높은 성벽을 쌓거나 해자를 파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거나 무력하게 무너지지 않도록 견고함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란델의 왕궁도 그런 방어적인 측면을 상당히 중시해 설계되어 있었다.

"후우... 이것 참."

인적이 드문 고급주택가를 지나 왕궁의 앞에 선 진석은 혀를 찼다. 생각 이상으로 견고해 보이는 성벽이 왕성을 두르고 있었다. 5미터 가량 되는 성벽, 주변을 따라 깊고 넓게 파여 있는 해자. 해자의 너비와 깊이도 족히 3~4미터 이상은 되었다. 거기에 성벽의 위를 따라 규칙적으로 점점이 배치되어 있는 병사들. 그냥 여기서만 보아도 외곽에선 잠입이 불가능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한 나라의 왕성 경비가 허술할리는 없겠지..."

저렇게 무식하게 인력으로 빙 둘러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조용히 뚫겠는가? 진석은 그냥 주변을 지나는 행인인듯 가장해 왕성의 주위를 빙 돌며 살펴보았다. 왕성의 총 너비는 무려 축구 운동장 두 개를 합쳐놓은 크기쯤 될까? 가로세로 150에서 200미터 가량 되는 것 같았다.

"돈 많다고 과시하는 것 같은 크기구만. 기본설정으로 했으면 금방 털리고 사라질 나라주제에 이 뭔 쓸데없이 큰 왕성이람. 쳇."

높은 성벽과 빈틈없이 둘러진 해자로 딱히 잠입할 틈도 보이지 않았지만, 잠입한다고 쳐도 이만한 너비라면 안에 들어가서 폭풍의 지팡이를 찾아내는것도 어렵겠다 싶었다. 외부의 성벽 너머로도 잘 보이는 거대한 왕궁은 그 내부가 얼마나 넓고 복잡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게다가 이만한 크기라면 병사의 수도 많을터.

"이만한 규모면 분명 안쪽에 수비대의 병영도 있을테니... 성벽위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 수효를 생각해보면 교대인력까지 생각해서... 으으음. 적어도 삼사백가량은 되지 않을까? 분명 1개 대대급쯤은 있겠지."

갈수록 태산이다. 성벽을 넘을 방법도 생각나지 않는데 그만한 인원이 지키고 있을거라 생각하면 도무지 뚫을 방법이 나오지 않는다. 어젯밤 진석 자신이 레드라인의 조직원들을 상대로 무시무시한 무위를 내보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인 수준의 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한 나라의 왕실을 지키고 있는 군인이라면 말단조차도 엄격한 훈련을 받은 정예라는 의미이다. 게다가 맨몸에 별 볼일 없는 무기를 쓰던 뒷골목 깡패들과는 달리 이들은 튼튼한 갑주와 잘 정비된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 한 개인이 일신의 무력만 믿고 엄정한 군기와 조직력으로 뭉친 군대에 덤벼든다는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격이다. 군주와 장수 플레이를 오래 해온 진석은 일사불란하게 지휘되는 군대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단기로도 다수에게 어느정도의 피해는 입힐 수 있을테지만 지금 진석은 싸움을 하러 온게 아니었다.

"이래서야 돈이 아무리 있어도 방법이... 그러고보니 진짜 도적들이라면 과연 어떻게 할까? 도적길드라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길드라곤 하지만 범법자인 도적놈들 집단이다. 아무나 볼 수 있도록 간판 걸어놓고 영업을 하는것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아는 사람만이 찾아 갈 수 있는게 도적길드였다. 하지만 진석은 데오그라즈에 대해 아는것이 별로 없었다.

"아침에 보고 헤어졌건만 기껏 도적길드 찾아달랍시고 다시 빅 본을 찾아가기도 그렇고."

게다가 진석은 현재 교단의 수호자 아닌가? 빅 본을 상대로 할땐 항상 우위에 서있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고작 도적길드 알려달랍시고 옆집 놀러가듯 해서야 이쪽의 위엄이나 신비로움 같은걸 유지 할 수 없으리.

"아... 뭔가 좀 정보가 필요해 정보."

머리를 감싸쥐고 으으 괴로워하는 진석. 그러다 생각난바가 있는지 어? 하며 고개를 들었다.

"정보, 정보라... 맞아. 왜 생각을 못했지? 도적길드야 쉽게 찾을 수 없다 해도 정보상 정도라면 쉽게 찾을 수 있을텐데."

어느 도시에나 정보를 상품 삼아 팔고사며 먹고사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데오그라즈 같은 대도시라면 더더욱. 정보상을 자처하는 이들은 자신이 머무는 영역안의 모든 정보를 취급했다. 시장의 상품 시세 부터 귀족가나 정치인들의 알력, 뒷골목의 뜬소문들까지... 오죽하면 정보상은 왕궁의 야식 메뉴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일까.

"돈은 충분하니까."

정보상과 거래할 수 있는 수단은 두 가지. 정보나 돈이었다. 자신이 가진 정보를 정보상에게 팔거나 비슷한 정보로 교환, 혹은 돈으로 살 수 있었다. 지금 진석의 수중엔 5천 골드가 넘는 자금이 있었다. 아무리 비싼값을 요구하는 정보상이라고 해도 이 금액이라면 분명 왕궁으로 숨어들만한 방책을 얻어낼 수 있을터.

"뭐 그럼 점심때고 하니... 밥도 먹을 겸 슬슬 시장쪽으로 가볼까."

여기서 뿌리내리고 오래 장사한 토박이 가게의 주인이라면 정보상의 위치 정도는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했다. 정보상은 도적길드만큼 위험한 존재는 아니었으니까. 물론 위험하지 않다곤 해도 길가에서 대놓고 영업하는건 아닐테니, 가게 주인들을 상대로 적당히 얘기하며 은화라도 몇 닢 쥐어주면 그 위치를 알 수 있을게 분명했다. 진석은 어디 하나하나 차근차근 풀어나가보자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시장쪽으로 향했다.

"여긴가?"

"네. 이쪽으로..."

어딜봐도 그저 평범한 건물로 보이는 2층짜리 연립주택. 카야는 부하의 안내를 받아 그와 둘이서 정보상 피터슨의 가게를 찾아왔다. 어디에 위치해 있을까 했는데 의외로 서민들이 모여사는 주택가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피터슨이란 어떤 자지?"

"그게... 평범한 인간이 아닙니다."

그야 그렇겠지. 수백 수천가지의 정보를 손에 쥐고 그것을 가치가 있는 상품으로 포장해 파는것으로 돈을 버는 상대가 평범할리 있을까? 하지만 부하는 카야의 생각을 짐작했는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말 그대로 인간이 아닙니다. 라케르투스 족이죠."

"라케르투스 족?"

라케르투스 족. 수인종에 속하는 도마뱀 인간이었다. 기본적인 체구는 인간과 비슷하나 생명력과 근력, 민첩성이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호전적인 성질로 주로 온난한 숲이나 늪지에서 부족 단위로 분포했다. 일반적인 변온동물과 체온 조절 능력 비슷해 너무 춥거나 더운곳에선 동면이나 하면을 했다. 즉, 신체 능력은 뛰어나나 불을 이용한 공격이나 냉기 마법에는 약하다는 의미였다. 허나 그들의 능력이 어떻건, 인간들 사이의 일반적인 인식으론 라케르투스 따위 그냥 몬스터나 짐승 수준의 취급을 받았다.

"어째서 그런 짐승이 한 나라의 수도에서 정보상을 할 수 있는거지?"

"그야 저도 모르지만 면전에서 그런말은 삼가시는게 좋을겁니다. 그런쪽의 언급엔 예민한 걸로 알고 있어서..."

"...알았다."

카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하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에는 입에 이쑤시개를 물고 있는 한 사내가 벽에 기대어 있었는데, 가죽갑옷을 입고 허리에 곡도를 찬 행색이 흡사 숙련된 용병 같았다. 그는 무심하게 카야와 부하를 한 번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내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딘가 멍한게 만사 관심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부하는 힐끔힐끔 그의 눈치를 보며 카야를 위층으로 인도했다.

"'문지기'입니다. 피터슨의 수하로, 저래뵈도 무시무시한 실력자죠."

"흠..."

카야는 계단으로 올라가며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별 생각 없이 돌아본건데, 그와 눈이 마주쳤다. 계단을 오르며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입가에 씨익 작은 웃음을 띄고 있는것이 보였다. 그냥 멀뚱하게 서있는것 같더만 자신들을 재고 있었던 것인가. 과연 부하의 말대로 보통 실력자는 아닌것 같았다. 2층 복도로 올라간 둘은 맨 안쪽의 방문앞에 섰다. 부하가 문을 노크하자 곧 찰칵하고 눈 높이에 달린 작은 창이 열렸다. 안쪽의 눈동자는 밖에 서 있는 카야와 부하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 문을 열어줬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나무문이었는데 열때 철컹 하고 무거운 소리가 나는것이 안쪽에 철판이 대어져 있었다. 카야는 속으로 이거 보통이 아니구나 생각했다. 헌데 문을 열고 둘을 맞이한 것은 무희복 차림의 젊은 여성이었다. 서부 사막지대의 무희들이나 입는다는 하늘하늘한 시스루 타입의 무희복. 카야가 내심 당황해 하는데 무희복의 여성은 생긋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둘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들어오세요."

정중한 태도로 안쪽을 가르키는 여성. 카야는 머리에 쓴 중절모를 벗어 옆구리에 끼운채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부하는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서 있었다. 카야가 뒤를 돌아보자 그는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분명 저 같은 말단이 들을 이야기는 아닐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 그럼."

부하는 복도에 놔둔채 카야만이 안으로 들어섰다. 무희복 여성의 안내를 받아 집 안으로 들어서자니 진한 향 냄새가 난다는걸 느꼈다. 게다가 집안 곳곳에 어마어마한 양의 서류나 책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도통 정리라던가 청소따위완 인연이 없어 보였다. 무희복 여성은 엉망진창인 집안을 능숙하게 지나 한 방문을 열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카야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이거이거. 처음보는 손님이군. 싯."

푸른 벨벳을 마치 벽지처럼 사용해 치장한 방안. 호사스런 마호가니 책상 안쪽에는 비대한 체구의 도마뱀 인간이 앉아있었다. 검은색 스리피스 정장에 모노클까지 끼고있는게, 복장만 보자면 여느 부호나 귀족 양반같이 느껴졌다. 무희복 차림의 여성은 그 도마뱀 인간의 등 뒤로 돌아가 양팔로 그를 끌어안으며 교태를 부렸다. 도마뱀 인간은 그게 귀여워 못견디겠다는듯 그녀의 볼에 자신의 거친 뺨을 문지르며 카야를 향해 말했다.

"시시싯. 그래, 내가 피터슨이라고 하네. 쪼맨한 정보를 사고 팔아 근근히 벌어먹는 불쌍한 노인네지. 빅 본의 아가씨가 뭘 알고 싶어서 예까지 오셨나?"

카야의 눈썹 끄트머리가 움찔했다. 아직 한 마디도 안했는데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니. 과연... 정보상이란 말이지? 카야는 앞에 놓인 의자에 편히 앉으며 입을 열었다.

"...어떤 남자의 정체에 대해 좀 알고 싶군요."

"호오. 무서운데? 복수인가?"

그 말에 딱딱하게 굳어지는 카야의 표정. 페레나 시에도 정보상을 자처하는 이들은 있다. 카야도 몇 번 정도는 마주해본 기억이 있다. 뭐 대단할 것도 없었다. 말이 정보상이지, 상인들 사이에서 시세 차익 따위의 정보로 먹고 사는 거간꾼이나 다를바 없었다. 그러나 눈 앞의 이 라케르투스 족 늙은이는 뭔가 달랐다. 어떻게 자신의 목적마저 알고 있는거지? 피터슨은 시시시 웃더니 책상을 열어 기다란 파이프 담배를 꺼냈다.

"싯싯시.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노려볼거 없네 아가씨. 나처럼 천대받는 수인이 인간의 도시에 정착해 산다는건 이런거니까."

피터슨이 입에 파이프를 물자 무희 차림의 여성이 손 끝에서 불을 피우더니 공손한 태도로 담배불을 붙여주었다. 옆에서 야한 차림으로 시중이나 들어주는 하녀같은게 아닐까 했는데, 마법사였다니? 입구를 지키고 있는 용병도 인상 깊었지만 이쪽도 놀라웠다. 피터슨은 쭈욱 파이프를 깊게 빨곤 푸하 연기를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분명 래스커였지? 이전번의 지부장. 시시... 제법 무서운 남자였는데 그렇게 허망하게 당할줄은. 싯."

"그 흉수로 추정되는 상대가 지금 이 도시에 있습니다. 듣기론 당신도 그의 추적에 도움을 줬다고 하더군요. 그가 정말로 래스커 아저... 아니, 래스커 지부장의 살해에 관련됐는지 진상을 아십니까?"

쭈욱 다시 파이프를 빨아들이는 피터슨. 잠깐 뜸을 들이던 그는 등을 펴 의자에 몸을 기대면서 말했다.

"안다고도 할 수 있고 모른다고도 할 수 있지."

"그게 무슨..."

탁탁. 피터슨은 파이프의 재를 재털이에 털며 대답했다.

"진상을 말해줄 이가 남아있지 않을땐 말이지, 진짜 진상같은건 없는 법이네. 싯. 그저 살아남은 자가 멋대로 떠벌이는게 진상인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쪽에게 얼마든지 진상에 대한 정보를 팔아넘길 수 있다네. 아무 관련도 없는 정보라도 비싼 값을 부르고 알려주면 아가씨는 그 정보를 가지고 옳다구나 이게 진실이었구나 하며 자기가 좋을대로 진상인지 뭔지를 끼워맞추겠지. 시시시시."

"......"

"싯싯시... 아가씨에겐 그다지 내 정보가 필요할 것 같지 않군. 뭘 확인해보고 싶어서 온건진 모르겠지만, 나보단 흉수인것 같다는 그에게 직접 물어보는게 빠르지 않겠나?"

꾸욱. 카야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확신 할 수 있었다. 뱃속에 구렁이가 수십마리는 들어있는것 같은 이 라케르투스 족 늙은이는 진짜배기라고. 자신도 범죄조직에 몸 담고 있으면서 이런저런 인간 많이 상대해 봤지만 이런 타입만큼은 정말 어떻게 대하기가 어려웠다. 자신의 패를 속속들이 다 들여다 보고 있는 상대와 카드게임을 하는 느낌이랄까? 피터슨은 몸을 기울여 거만한 자세로 턱을 괴면서 말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찾아온 손님을 빈손으로 보낼 수 없으니 '정확한 사실 한 가지'는 알려주겠네."

카야의 눈동자가 커졌다. 피터슨은 가느다란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가 노리고 있는 남자에겐 원래 동행인 여자가 있었다. 갈색머리의 여성. 베이머스 호텔에서 래스커가 살해당했을거라 추정되는 소동 이후, 그 사내가 경비대를 따돌린채 어깨에 짊어지고 나간것은 두 명의 여성. 갈색머리의 여성과... 붉은머리의 여성."

"...!"

수호자인 데이나의 머리는 분명 붉은색이다. 그녀는 분명 자신은 래스커의 살해건에 관련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피터슨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거짓. 즉 그녀는 어떤 형태로건 래스커의 죽음에 얽혀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거짓말을 했을까?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보통 두 가지. 이득을 얻기 위해서나, 혹은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서. 데이나가 래스커를 죽여서 얻을 이득은 없었을거다. 그녀가 직접 말했던대로 래스커는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는 종이나 다름없었으니. 그렇다면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다는 의미. 그러면 이 상황에서 데이나가 거짓말을 해서 감추고 지키려 한 대상은 분명...

"...그 남자가 죽였겠군.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거였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카야를 보며 피터슨은 재밌다는듯 큭큭 웃었다.

"싯싯싯. 정보상이란 이래서 재밌다네. 어떤 사실을 완제품처럼 포장해서 그대로 팔아치우는것보다 한 토막만 일러줘서 스스로 진실에 내딛게 만드는것. 한 인간의 사고를 내가 온전히 이끌어낸다, 이게 또 묘한 쾌감이란 말이지."

데오그라즈의 정보상인 이 라케르투스 족 늙은이는 사람의 사고를 지배한다는 묘한부분에서 재미를 느끼는 부류인 모양이었다. 하긴, 그는 수인종. 사고 방식이 인간의 그것과 같을리 없었다. 피터슨의 정보로 진석이 래스커를 죽였음을 확신한 카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이만 돌아갈 생각인가? 싯시. 그 전에 계산을 부탁하겠네."

"...계산?"

"잊었나? 내가 '정확한 사실 한 가지'를 일러주지 않았나. 이래뵈도 난 싸지 않네."

후우. 카야는 한숨을 내쉬곤 품안에 손을 넣었다. 그럼 그렇지. 이런 능구렁이 같은 영감이 뭔가를 공짜로 알려줄리는 없는법. 정보상 아니던가?

"얼마면 됩니까."

"내 정보의 시세는 하나에 금화 백닢이라네."

터무니 없는 액수다. 카야의 미간이 좁혀졌다. 겨우 몇 마디 일러주고 백골드라니? 피터슨은 액수를 듣고 멈칫하는 카야를 보며 짝 손뼉을 치곤 시시시 웃었다.

"시시시싯... 뭐 초면인데다 첫 거래니 이번만큼은 특별히 반액으로 해주지. 앞으로도 자주 보는 관계가 됐으면 좋겠으니 말이야."

"......"

현재 카야의 지갑안에는 10골드 짜리 수표 여섯장이 들어있었다. 페레나에서 출발하면서 총 5백골드 가량을 가지고 왔는데, 그중 4백골드는 지부에 보관해 두었고 40골드 가량은 여러가지 경비로 지출했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곤 지갑을 통째로 피터슨의 책상 위로 던져주는 카야. 무희복의 여성이 지갑을 집어들고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고 피터슨은 만족스럽다는듯 씨익 웃었다.

"고맙구만, 그럼 살펴가시게. 몸이 이래놔서 배웅은 따로 하지 않을테니."

카야는 깊게 중절모를 눌러쓰며 방을 나섰다. 라케르투스 족 정보상 늙은이가 제 잘난듯 이래저래 떠들며 자신의 기분을 나쁘게 만든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엔 수호자랍시고 자신을 속이고 래스커를 살해하는데 연관된 두 남녀를 끌어내 무릎꿇릴 방법의 모색으로 가득차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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