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3. -- > * 39화 *
"제시! 아르데나!"
콰앙. 호텔의 방문을 박차고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서는 진석. 안에는 룸서비스로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제이스와 아르데나가 있었다. 제이스는 별 일이라는 듯 포크에 찍혀있던 스테이크 조각을 얌 하고 입에 넣으며 말했다.
"왜 그래? 그렇게 허겁지겁."
"휴우... 아직 별 일 없었나. 아니 그보다 네 예측이 맞아버렸어. 카야가 눈치 챘다."
스테이크에 곁들여 나온 당근을 찍어먹으려던 제이스는 그 말에 입맛이 뚝 떨어졌다는 듯 포크와 나이프를 접시 위로 툭 내던졌다.
"아 정말... 그 짜증나는 년이."
제이스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짜증으로 가득찬듯한 히스테릭한 얼굴. 진석으로선 간만에 보는 표정이었다. 미간에 손가락을 짚고 으음 하며 뭔가를 생각하던 제이스는 갑자기 환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응. 역시 안되겠네, 죽이자!"
"...야 무슨 소풍이라도 가자는 듯한 발랄한 어조로 그런말 하지마라. 무섭게스리."
진석은 제이스와 아르데나의 곁으로 다가와 의자를 당겨 앉았다. 하지만 분명 카야를 당장 어떻게 하긴 해야했다. 둘의 눈치를 보던 아르데나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기... 제가 어떻게든 해볼까요?"
"네가? 어떻게?"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르데나를 바라보는 제이스. 아르데나는 손에 든 포크를 불끈 쥐어보이며 말했다.
"그야 오빠를 곤란하게 만드는 상대따윈 죽여버리는게 당연..."
"아 그만그만! 니들 머릿속엔 그것 밖에 해결책이 없냐?"
양 손을 휙휙 내저으며 끼어드는 진석. 글렀다. 이 두 여자는 글러먹었어. 머릿속이 무슨 13일의 금요일이냐? 어떻게 니들은 무조건 죽인다는 선택기밖에 없냐! 끄응 고심하던 진석의 시야에 한 구석에 굴러다니던 큼직한 짐 배낭이 들어왔다.
"...가만."
그러고보니 저 짐가방 안엔 다량의 물건이 들어있다. 옷부터 시작해서 모포나 랜턴, 기름병, 밧줄, 제조키트, 직접 만든 약품들과 돈주머니 기타 등등. 잠깐. 직접 만든 약품?
'아하.'
미약이 있었다. 요새 쓸일이 없어서 까먹고 있었는데 많지는 않지만 사원에 머무르고 있을때 약간이나마 만들어둔 미약도 저기 전부 들어있었다. 약학 C랭크 일때 만들수 있던 페르모티오와 아우그멘. 가벼운 흥분제인 페르모티오와, 발라서 성감을 높이는 타입인 아우그멘은 각기 세 병 가량 있었다. 그리고 B랭크로 올라가면서 만든 새 미약 콤모티오 한 병. 콤모티오는 페르모티오의 강화판이었다. 페르모티오와 마찬가지로 구강으로 섭취하는 타입인데 효과는 대여섯배 가량 강력했다. 그러나 콤모티오의 진짜 사용법은 단순히 콤모티오만을 먹이는 것이 아니었다. 콤모티오에 페르모티오나 술을 섞으면 신기하게도 그 효과가 더 배가됐다. 단위로 보자면 페르모티오의 거의 열배가량. 그러면 콤모티오에 아예 술과 페르모티오를 둘 다 섞으면?
'후후후... 후후후후...'
새로 만든 미약 콤모티오의 효과를 상상하는 진석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걸렸다. 그 표정을 바라보던 제이스가 흠칫했다.
"와, 기분나빠."
"...야. 사람을 보고 기분나쁘다니."
"분명 그 웃음을 본 기억이 있거든? 예전에 숲에서 묶여있던 나한테 거짓말을 늘어놓을때의 표정이랑 비슷한걸. 이번엔 또 무슨 흉악한 생각을 하는거야?"
제이스의 말에 말문이 막히는 진석. 만난 이후로 쭉 같이 붙어다녔더니 진석에 대한 눈치가 제법 많이 늘어난 모양이었다. 지이이 가느다란 가자미 눈을 하곤 진석을 노려보는 그녀.
"아항? 뭐 뻔하네. 또 붙잡아다 묶어놓고 능욕이라도 할 생각인가 보지? 그때의 나처럼?"
"......"
"흐응. 러셀도 참 발전이 없구나 발전이. 차라리 깔끔하게 죽여주는게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여자로서 강간당하는게 어느정도의 고통인지 모르지?"
그런거 신경쓰면 이 게임 해먹겠냐. 하지만 정론이라 진석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제이스는 아무말도 못하는 진석을 놀리듯 고개를 쭉 내밀며 계속 말했다.
"요 강~간~범~! 머릿속에 여자를 굴복시킬 방법이라곤 오로지 그 생각밖에 없어요? 어쩜, 정말 저질이야!"
"크아악!"
정곡을 찔린 진석은 우와악 하고 벌떡 일어나 자신을 약올리는 제이스의 가슴에 두 손을 뻗어 마구 주물러댔다. 갑작스런 행동에 꺄악하고 질겁하며 뒤로 물러나는 제이스.
"무, 무슨짓이야 이 바보야!"
"시꺼! 사람은 궁지에 몰려 할 말이 없어지면 원래 힘에 의지하는 법이야!"
"아파! 소, 손 떼!"
"괘씸한지고! 이 괘씸한 가슴이 그런 말을 한거냐? 아앙? 요래요래!"
"하지... 하지 말라니까 정말! 아아앙!"
그렇게 폭주하는 진석은 어떻게 말리거나 끼어들수도 없을만큼 눈이 맛이 가있었다. 너무나 한심한 모습에 아르데나는 처음으로 자신의 오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엉망진창이 된 둘을 내버려두고 알아서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아르데나였다.
잠시후, 하이힐 굽에 얻어 맞아가며 이성을 되찾은 진석은 바닥에 정좌하고 있었다.
"음 진정됐다."
"하아... 하아... 정말 무슨짓이야."
지친듯 숨을 몰아쉬는 제이스는 진석때문에 옷 매무새가 잔뜩 흐트러진 채 소파에 기대어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그녀는 엉망으로 뒤엉킨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아무튼... 내 생각은 변함없어. 예로부터 누군가의 입을 막는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은 죽이는거야. 내 홍염옥으로 뼈까지 싹 태워버리면 증거고 뭐고 남지 않을테니까. 이후엔 적당히 레드라인 놈들의 소행으로 돌려버리던가 하면 되지 뭐."
"역시 그 방법뿐인가..."
진석은 팔짱을 끼며 흐음 하곤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뭔가 아쉬웠다. 다른 해결 방법이 있을것 같았다. 진석의 시선이 무심코 배낭으로 향하더니, 이내 다시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또 다시 미약의 활용법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또!"
따악! 제이스가 휘두른 하이힐 굽이 진석의 이마를 강타했다. 끄악 하며 이마를 감싸쥐고 바닥을 구르는 진석. 한참을 굴러다니다 겨우 아픔을 진정시킨 진석은 분노에 찬 눈으로 제이스를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제이스는 새침한 표정으로 하이힐을 고쳐 신으며 말했다.
"네, 네가 그딴 재수없는 여자하고 몸을 섞는 모습따윈... 생각하고 싶지도 않단 말이야, 이 바보야."
"......"
진석은 화가 싹 가라앉는걸 느꼈다. 하긴. 눈 앞에 있는 제이스는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는 상태. 상황이 어찌됐건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손을 댄다는데 박수치며 좋아할리는 없었다. 이게 정상이겠지.
'할 수 없구만. 역시 제이스의 말대로 적당히 레드라인의 복수인양 꾸미는 식으로 죽여야하나...'
카야를 죽이는 쪽으로 마음을 굳혀가는 진석. 그런데 밖에서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
진석과 제이스의 시선이 동시에 문을 향했다. 혹시 카야가 복수를 위해 부하들을 이끌고 찾아온걸까? 진석은 벌떡 일어나 제이스에게 만약의 사태에 준비를 하라는 눈짓을 해두고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저 손님? 안 계십니까? 프론트에서 왔습니다만."
프론트의 직원인지 칼을 든 적인지 알게 뭔가. 진석은 흑철단검을 빼어들고 등 뒤에 손을 감춘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찰칵하고 문이 열리며 밖에 서있던 호텔 직원의 모습이 나타났다. 복도엔 그 이외에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안도하는 진석. 직원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곤 손에 든 편지를 내밀었다.
"앤커니 님 맞으시죠? 이 편지를 전해달라는 부탁이 있어서요."
"이 편지는... 누가?"
"그것까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편안히 쉬십시오."
진석에게 편지를 건네준 직원은 정중히 고개를 숙여보이곤 문을 닫았다. 편지의 겉봉엔 '앤커니님에게'라고 쓰여있었다. 제이스는 진석이 건네받은게 궁금한지 안쪽에서 고개를 기웃거리며 물었다.
"뭐야 그게?"
"편지. 누군가 내 앞으로 보냈다는데?"
봉투의 끄트머리를 손에 쥔 흑철단검으로 죽 잘라내고 서둘러 안의 편지를 꺼내보는 진석. 접힌 편지를 펴고 내용을 확인해보니 거기엔 전혀 의외의 내용이 적혀있었다. 한참 멍한 표정을 짓던 진석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맘에 든다는걸? 단 둘이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싶다는군."
"뭐? 그 편지 보낸게 누구야?"
눈썹을 찌푸리는 제이스. 감히 자기 남자에게 꼬리를 치다니! 아니 그보다, 지금 그에게 이런식으로 개인적인 접근을 시도할 여자가 있었던가...? 진석은 피식피식 어처구니 없다는 웃음을 지어보이며 제이스에게 대답했다.
"카야 스톡."
"...어?"
-----
귀족이나 부호들이 주 고객층인 선셋대로엔 고급 레스토랑도 많았다. 미식가인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곳이다보니 인테리어면 인테리어, 접객이면 접객, 맛이면 맛.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훌륭한 레스토랑이 많았다. 주머니 두둑한 손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서비스란 바로 이런것이구나 하는 견본이 될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르 아시에뜨는 특별히 질 좋고 신선한 해산물 요리로 성업중인 곳이었다. 그 입구에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는 정장차림의 진석.
'현실에서는 가고싶어도 비싸서 못 가는 고급 레스토랑인데 게임속에선 자주도 가는구만...'
진석은 새로 사입은 정장의 감촉이 어째 거슬렸다. 소매와 목덜미 부분의 풀이 빳빳히 먹여져 약간 까슬거렸던 것이다.
'...게다가 여기 예전에 에나랑 왔던데잖아? 하고 많은데 중에서 하필 골라도 여길 고르냐.'
쯧 혀를 찬 진석은 문을 열고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나이 지긋한 반백의 종업원이 가볍게 인사를 건네왔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 하셨습니까?"
"그... 일행이 먼저 와 있을겁니다. 카야라는 이름인데."
안경을 한 번 고쳐쓴 노 종업원은 명부에서 이름을 훑더니 고개를 끄덕하고 진석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이쪽입니다."
안내를 받아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 가게에 가득 들어찬 손님들과, 안쪽의 제일 좋은 자리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는 카야의 모습이 보였다. 남성용 정장에 중절모를 쓰고 다니던 평소의 모습은 어디 갔는지 붉은색의 화려한 홀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등이 다 드러나는 대담한 디자인의 드레스.
'어쭈? 제법 힘주고 나왔는데?'
진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테이블로 다가가 카야의 맞은편에 앉았다. 카야는 진석을 향해 배시시 웃어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오셨군요. 혹시라도 안 오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짙은 화장에 도발적인 장신구를 걸친 섹시한 모습. 평소때 보던 남자같은 모습과의 갭이 너무 커서 이게 진짜 같은 사람이 맞나 싶어졌다. 은은한 조명 아래 자신을 향해 지어보이는 요염한 미소. 달콤한 향수의 향이 코를 간지럽히는게 한껏 치장한 젊은 여성의 매력이 그대로 느껴졌다. 자극적이었다. 과연 여자란 꾸미고 아니고의 차이가 엄청나구나, 진석은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역시 실례가 됐겠죠? 갑자기 편지를 보내서."
말투 하나하나에 묻어나는 끈적끈적한 유혹의 느낌. 순간 진석은 자신이 여기 나온 목적도 잊을뻔했다.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저건 꽃을 가장한 덫이었다. 예쁘다고 덥썩 손을 뻗었다간 감춰진 칼날에 찔려 죽을 치명적인 덫. 눈 앞의 카야는 진석이 래스커에 건에 대해 완전히 감추고 있을거라 짐작하는 상태. 그러니 이런식으로 먼저 꼬드겨 온게 아니겠는가? 자신만 따로 불러내서 유혹한 다음 단 둘이 되어 방심했을때 복수를 하려 들겠지. 하지만 진석은 정보상 피터슨이 일러준 정보로 카야의 속내를 파악하고 있었다.
'금화 백 닢으로 목숨을 건진건가... 뭐 목숨을 구한 댓가치곤 싸지.'
만약 백 골드가 아까워 피터슨의 제안을 거절하고 이 정보를 듣지 않았다면, 의심을 하면서도 결국 매력적인 카야의 모습에 홀려 헬렐레 유혹에 넘어가 비명횡사 했을 수도 있으리라. 뭐 기왕 이렇게 된거 어디 한 번 즐겨보자고 마음먹으며 진석도 씨익 미소를 지었다.
"실례라니, 천만에요. 사실 저도 이렇게 단 둘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자리를 꼭 한 번 갖고 싶다고 생각했던터라..."
"후후, 그런가요? 이거 부끄럽네요."
일부러 상대의 모습에 홀린듯 멍청한 표정으로 헤헤거리며 말을 늘어놓는 진석. 카야는 그의 시덥지 않은 말에도 하나하나 맞장구를 치며 연신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물론 겉은 웃고 있다만 그 속내는 지옥불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진석은 들뜬듯한 모습을 가장해 카야에게 슬슬 들이댔다. 혹시 애인은 있냐, 좋아하는 남자는 어떤 타입이냐는 등, 정말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멍청한 말을 마구 해댔다. 카야는 눈 앞의 남자가 헤벌레 하며 안달내는 모습에 자신의 떡밥을 물었다고 확신했다.
'지금이나 실컷 좋아해라. 개자식. 네까짓놈이 감히 래스커 아저씨를...!'
카야가 선택한 길은 당연하게도 원수인 진석을 죽이는 것이었다. 자고로 미인의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 있는 남자는 없는법. 일부러 편지를 보내 그 혼자만을 꾀어내어 좋은 분위기를 만든다음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 처리할 생각이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동안 미리 주문해두었던 술과 음식이 나왔다. 쪼르르륵. 웨이터가 진석과 카야의 잔에 번갈아 가며 와인을 채워주었다. 가만히 잔을 들어보이며 건배를 하자는 신호를 보내는 카야.
'어서 마셔라. 이게 네가 살아서 맛보는 마지막 술이 될테니...'
이 술엔 강력한 마취제가 들어있었다. 카야가 미리 종업원들에게 거금을 주고 부탁해둔 것이었다. 혹시 맛이 이상하다며 눈치 챌지도 몰라 조금 묽게 희석해서 섞었지만, 몇 모금만 마시면 잠시 후엔 꼼짝도 못하고 쓰러져 버릴터. 물론 자신은 적당히 마시는 시늉만 하거나 냅킨에 뱉을 생각이었다.
"자, 그럼 건배."
진석은 바보가 아니었다. 상대의 속내를 뻔히 파악하고 나왔는데 대접해주는 음식을 좋다고 먹을리가 있겠는가? 게다가 음식에 약을 섞는 수법은 이전에 진석도 제이스에게 한 번 써먹었던것. 진석은 유달리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 카야의 표정을 보고 이 술에 뭔가 섞여있음을 직감했다. 실수인척 잔을 손에서 떨어트리곤 상대의 반응을 볼 참이었다. 그런데,
"다, 당신들 지금 무슨... 으악!"
가게의 입구쪽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아까 진석을 안내해준 반백의 종업원이 얻어맞고 한쪽 구석으로 내동댕이쳐지는 모습이 들어왔다. 레스토랑 안으로 우르르 흉흉한 기세의 사내들이 몰려들어왔다. 숫자는 무려 서른 정도로, 손엔 하나같이 칼이나 몽둥이 같은 흉기를 들고 있었다. 게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근육질의 사내는 가게 안의 손님들을 휘휘 훑어보더니 카야를 발견하곤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너어! 빅 본의 계집년! 감히 농간을 부려 우리 두목을 죽여놓고 무사할 성 싶더냐? 뭐하냐, 저 년 잡아와! 생살을 잘근잘근 씹어먹을테다!"
근육질 사내의 호령에 뒤에서 씩씩 거리던 수많은 남자들이 우와아 하며 주변에 거슬리는 테이블이나 의자를 뒤엎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소란에 휘말린 무고한 손님들과 종업원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달아났다. 카야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신음했다.
"레드라인...!"
아직 남아있던 레드라인의 조직원들이 어떻게 복수를 하겠답시고 모여서 레스토랑에 따로 나와있는 카야를 노린 모양이었다. 카야 입장에서도 래스커의 복수를 위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단독으로 나와 이 자리를 마련한 참이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격투에 능한 자신이라도 한 번에 너댓명 정도면 모를까, 무기를 든 서른이나 되는 상대를 맨손으로 제압하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지금은 움직이기도 불편한 드레스 차림. 입구도 적들이 완전 막아선채니 도망가기도 힘들터.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저들에게 붙잡히면 도대체 어떤 꼴을 당할지... 식은땀이 흘렀다.
"크크크큭!"
이런 상황속에서, 진석은 이마를 붙잡고 유쾌하게 웃어제꼈다. 원래대로라면 카야의 수작에 넘어가는척 해주다 역으로 뒷통수를 쳐주려 했지만, 갑작스레 상황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이 재밌었던 것이다. 여기서 레드라인의 졸개들이 튀어나올줄이야? 기왕 이렇게 된거 잘됐다 싶었다. 계획 수정이다. 저놈들을 이용해야겠다! 카야가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진석을 바라보자, 진석은 웃던것을 멈추고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식사용 나이프를 집어들었다.
"지금부터 잘 봐두는게 좋을거야. 쇼타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