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3. -- > * 40화 *
조금전까지 자신에게 알랑거리던 것과는 달리 마치 딴사람이 된 듯한 차가운 말투. 카야는 깜짝놀랐다. 뭐야 이 남자? 나한테 홀딱 넘어가있던게 아니었나? 진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불편하다는 듯 목과 소매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 헤치곤, 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를 힘껏 집어던졌다.
"크억?!"
선두에서 달려오던 레드라인의 조직원 하나가 가슴에 나이프를 적중당하고 바닥에 우당탕 구르며 나가떨어졌다. 와아아 하고 덤벼들던 조직원들이 하나같이 움직임을 멈추고 쓰러진 동료와 진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갑자기 끼어든 저 남자는 대체 뭔가? 이내 여기저기서 하나 둘 욕설이 터져나왔다.
"뭐야 저거?!"
"개새끼! 죽이자!"
"죽여어어!"
분노에 휩싸인 레드라인의 패거리는 재차 진석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진석은 재킷을 벗어던지고 허리 뒤춤에 감춰두었던 흑철단검과 런들 대거 포님을 꺼내어 역수로 쥐었다.
"뭐가 이렇게 시끄럽냐 이 병신새끼들. 몽땅 거름이나 돼라. 시클론!"
파앗. 카야의 눈앞에서 진석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고 느낄정도로 빠르게 튀어나갔다. 세상에, 저게 사람의 움직임이란 말인가? 격투에 조예가 있는 카야는 진석이 뛰어나가는 모습 하나만으로도 경악했다. 하지만 더 놀랄일은 그 다음부터였다.
"크하악!"
"으거... 억."
레드라인의 무리 한 가운데로 뛰어든 진석은 정말 바람같이 그들의 사이를 헤쳐나가며 두 자루의 단검을 휘둘러댔다. 그 몸놀림이 어찌나 기민한지 수십명이 덤벼들고 있음에도 아무도 그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했다. 다른 이들은 평범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데 진석만이 마치 비디오를 2배속, 3배속으로 돌리는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마치 무인지경을 지나듯 뛰고, 구르고, 무기를 휘둘렀다. 진석이 지나가며 검을 내지를때마다 무슨 볏단이 잘려나가듯 여러 사내들이 피를 뿌리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뭐, 뭐야? 저놈 뭐야아아앗?!"
우두머리로 보이는 근육질의 사내는 도무지 눈 앞의 상황이 이해가지 않는다는 듯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아니 어떻게 삼십이나 되는 부하들이 단 한 명에게 저렇게 무참히 도륙당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상식을 초월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상대의 우두머리가 홀로 레스토랑에 나와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잔혹한 복수극을 기대하며 부하들을 잔뜩 끌고 왔건만, 눈앞에선 믿을 수 없는 악몽이 펼쳐지고 있었다.
"토르멘타!"
파바바밧! 조직원들의 한복판에서 진석의 기술이 작렬했다. 사정권내에 있던 네 명의 사내가 전신을 난도질 당한채 뒤로 나가떨어졌다. 눈깜짝할 사이에 레드라인의 조직원 중 반수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졌다. 잠깐사이에 수많은 조직원을 시체로 만들고 그들의 피를 잔뜩 뒤집어 쓴 진석. 남은 자들을 향해 씨익 웃어보이며 양 손에 든 두 단검을 장난스레 빙글빙글 돌려보였다. 레드라인 조직원들의 입장에선 피범벅이 된 채 실실 웃는 그가 흡사 지옥에서 막 튀어나온 마귀처럼 느껴졌다.
"히, 히익."
"무리다! 저런걸 어떻게 당해!"
"주... 죽고싶지 않아!"
결국 남은 조직원들중 열 명 가량이 무기를 집어던지고 히이이 비명을 지르며 가게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근육질의 우두머리는 그들을 막아보려 했지만 본인도 적잖이 황망한터라 그중 한 명도 제대로 붙잡지 못했다. 그 사이 진석은 그나마 남아서 버티던 몇 명의 조직원들을 슥슥 허수아비 베듯 해치워버리고 우두머리의 앞에 다가와 섰다. 우두머리는 공포를 느끼며 뒷걸음질을 쳤다.
"큭... 너, 넌... 뭐냐..."
"곧 죽을놈이 알거 없잖아?"
"으, 으아아아아!"
악을 쓰며 손에 든 몽둥이를 필사적으로 휘둘러오는 그. 진석은 그보다 빠르게 우두머리 사내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며 손에 든 두 단검을 갈비뼈의 틈새로 찔러넣었다. 폐부가 찔려 크헉 괴로운 호흡을 토하며 멈춰서는 사내. 하지만 진석은 멈추지 않고 단검을 뽑아 간과 비장, 신장, 횡경막을 연달아 찍었다. 하나같이 내장을 파고드는 치명적이고 잔혹한 공격들. 마지막으로 목 양쪽의 경동맥과 경정맥을 찌르며 양팔을 옆으로 쫙 펼쳐버렸다. 목이 반쯤 잘려나가며 검날의 흐름을 따라 피보라가 벽에 촥 흩뿌려졌다.
"흐어..."
제대로 된 단발마도 내지 못한채 그대로 뒤로 넘어가는 우두머리 사내. 상체가 걸레짝이 될 정도의 난도질을 당했으니 당연하게도 즉사였다. 진석은 단검에 묻은 피를 휙휙 털고, 옷 소매에 피를 대충 문질러 닦은 뒤 허리춤에 꽂아넣었다.
"......"
카야는 제자리에 선채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이 정도인가. 이 사내의 실력은 이런 수준이었단 말인가. 겨우 단검 두 자루로 수십명을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우다니. 이런 무시무시한 실력자는 처음이었다. 조직 내에선 누구보다 뛰어난 격투가였던 래스커가 살해당한것도 납득이 갔다. 피로 흠뻑 젖어 귀신같은 몰골을 한 진석은 시체들 사이를 헤치고 다가와 카야의 앞에 섰다.
"래스커는 내가 죽였다."
"...!"
경악으로 크게 떠지는 카야의 눈. 지금 이 사실을 자신에게 말하다니? 그렇다면 이 남자는 진즉부터 자신의 목적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복수를 하고 싶었나? 그래서 이딴걸 나에게 먹이려고 한거겠지?"
진석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와인병을 들어 그것의 내용물을 바닥에 흘렸다. 콸콸콸. 보랏빛 와인이 쏟아져 사방으로 튀었다. 아무말 못한채 망연히 그 모습을 바라보는 카야.
"내가 네 목적도 모르고 여기 나왔을거라 생각했나? 장단 좀 맞춰줬더니 기고만장 해서는. 교단의 수호자를 우습게 봤구나."
뭔가 말을 해야하는데 카야의 입에선 한 마디의 대꾸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순간, 눈 앞에 있던 사내가 사라졌다.
"...크읏?!"
사라진게 아니었다. 그는 특유의 날랜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자신에게 다가와 목을 틀어쥐었다. 당장이라도 목을 부러트릴 것 같은 어마어마한 악력이 파고들었다. 도저히 저항 할 수 없었다. 허튼짓을 하면 당장이라도 꺾어버리겠다는 매서운 살기가 느껴졌다.
"크, 큿... 학..."
"겁도 없이 네놈들의 주인인 교단에 이빨을 드러낸 용기만큼은 가상하니, 특별히 한 번의 기회를 주지. 내일 아침 동이 틀때쯤 사무실로 찾아가마. 나와 싸울 기회를 주지. 혼자서 기다리건, 부하들을 몽땅 모아놓건 상관없어. 네가 날 꺾으면 순순히 내 목을 내어주마."
진석은 카야를 바닥에 확 내팽개쳤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져 목을 부여잡고 콜록콜록 괴로운 기침을 토하는 그녀. 진석은 벗어두었던 재킷을 걸치며 엉망진창이 된 레스토랑을 뒤로 하고 걸어나갔다.
"대신 네가 지면 각오해 두는게 좋을거다. 이번일의 댓가는 톡톡히 받을 생각이니까."
"하아... 하아..."
카야는 대꾸 한마디 못한채 호흡을 가다듬으며 분기가 서린 눈으로 그의 등을 노려보았다. 복수할 기회라.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이렇게 무자비하고 잔혹한 상대를 무슨수로 이긴단 말인가? 자신의 스승인 래스커조차 당해내지 못했던 저 남자를... 압도적인 실력차를 보니 설령 부하들을 다 모아봤자 여기 널려있는 시체들처럼 허무히 살해당할게 뻔했다.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에 부하들의 소중한 목숨을 낭비 할 수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마땅히 뭔가를 해볼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분했다. 정말 한 없이 분했다. 뭐가 조직이고 뭐가 빅 본이냐. 결국 보잘것 없는 놈들이 끼리끼리 뭉쳐 범죄조직이랍시고 잘난척 행세한게 아닌가. 저렇게 진짜 힘을 가진 자 앞에선 그저 무력히 밟힐뿐인데. 혼자 남겨진 카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으아아아아 쪽팔려어어어.'
한편 카야를 남겨두고 레스토랑을 빠져나온 진석은 잽싸게 인적이 뜸한 근처 골목으로 달려들어가, 피로 물든 셔츠를 벗고 가능한 얼굴이나 손에 튄 피를 박박 문질러 닦았다.
'안 어울리는 개폼 잡았더니 민망해 죽겠네. 아오 얼굴 화끈거려.'
예상치 않게 레드라인의 조직원들이 나타난덕에 진석은 카야에게 속아넘어가는척 하다 뒤통수를 쳐주려던 계획을 수정했다. 애당초 카야가 레드라인의 조직원들에게 살해당하도록 방관할 수도 있었지만 어째 그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꾸며놓은 모습을 보니 굉장한 미인인데 저깟놈들 손에 죽게 내버려두자니 아깝달까 왠지 그냥 두고 볼 순 없달까... 카야는 자신을 죽이려는 상대임을 알고 있음에도 이 모양이었다. 진석도 자신이 무르다는건 자각하고 있었다. 그것도 특히 여자에게. 어제만 하더라도 레드라인의 사무실인 보트하우스를 박살내고, 전혀 상관도 없는 창녀까지 구해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차라리 이렇게 된거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줘서 그녀의 마음속에 절대적인 패배감을 심어주자는 생각을 했다. 원수고 뭐고 반항할 수 없을 정도의 격차를 느끼게 하면 복수를 포기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근데 설마 진짜로 조직원들 다 모아놓고 기다리는건... 아니겠지?'
그것만큼은 진석으로서도 피하고 싶었다. 60여명이라니. 뭐 진석 자신이 그깟 조무래기 집단에게 질리는 없을테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숫자의 차이가 압도적이니 아무리 조무래기들이라 한들 SP를 다 소진해버리면 혼전의 와중에 몇 대 찍힐수도 있었다. 게다가 빅 본의 일반 조직원들을 다 죽이면 빅 본을 수하에 두고 부리는 입장인 교단에게도 피해를 끼치는 꼴이다. 기껏 마약을 퍼주며 이만큼 키워놨는데 그걸 부려먹지는 못할 망정 몽땅 죽여서 뭘 어쩌겠는가? 그리고 카야 앞에선 교단의 수호자입네 교단에 이빨을 들이댄 댓가네 뭐네 마치 뭐라도 되는양 잘도 떠들었지만 그냥 위압감을 주기 위한 허세였을 뿐이다. 교단에 들어간지 채 얼마 되지도 않은 진석이다. 얼렁뚱땅 수호자라는 직위를 받긴했지만 아직 교단의 세부적인 실체도 잘 모르는데 무슨 권한이 있겠는가?
'으으 생각할수록 쪽팔리네 거. 두 번 다신 못할짓이야.'
피를 대충 닦아낸 진석은 화염화살을 써서 엉망이 된 셔츠를 태워버리고 재킷만 걸친채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조심스레 호텔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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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동틀 무렵. 진석은 홀로 빅 본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이른 새벽의 거리엔 인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이게 다 내가 여기서 돈을 털면서 시작된 일이군.'
돈이 없으니 나쁜놈들을 털어 벌어보겠다는 안일한 생각. 무심코 저질러버린 강도질이 결국 지금 이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것이다.
'으음. 역시 돈은 정직하게 벌어야 후환이 없는건가. 생각해보니 애시당초 범죄나 강도질로 돈을 벌려고 할 게 아니라 용병일이라도 해볼걸 그랬지.'
하지만 용병일은 전쟁이라도 자주 벌어져야 돈을 제법 만질 수 있다. 용병의 가치가 가장 빛나는 곳은 전장이었으니까. 일반적인 군대들이 수행하지 못하거나 꺼리는 특수임무나 유격전이야 말로 용병들이 가장 활약하는 부분이었다. 허나 현재 대륙의 상황은 평화 그 자체. 이렇게 평화로운 평상시에 용병이 할 일이라곤 보통 호위나 경비 업무 정도. 하루종일 대상의 옆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일이니 인내심과 끈기를 요구하는터라... 까놓고 말하자면 지루했다. 게다가 용병으로서 어느정도 이름값을 높여야 받는 보수나 높지, 막 게임을 시작한 플레이어라면 그냥 동네 건달이나 다를 바 없는 상태. 용병이 되겠답시고 뛰어들어봐야 일용직 노무자나 다를 바 없었다.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건물 앞에 멈춰선 진석. 낡은 2층짜리 목조건물. 안에선 별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고 고요했다.
'부하들을 모아놓진 않은것 같군. 하긴 이 좁은 건물에 그런 대인원이 들어갈 자리도 없을테고.'
진석은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름램프와 촛불 몇 개가 밝히고 있는 조금 어둑한 실내. 별 다른 집기도 없이 살풍경한 내부엔 의자에 가만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카야의 모습이 있었다. 여느때와 같은, 정장에 중절모 차림이었다.
"부하들도 없이 혼자서 나와 맞서보겠다 이건가? 용기가 가상하군."
"...어차피 부하들 정도로 당신의 상대가 될 리 없잖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스윽 치켜드는 카야. 눈이 충혈되고 다크서클이 생긴게 한잠도 자지않고 밤새 깨어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어제 그런 일을 겪고도 잠이 솔솔 잘 온다면 신경줄이 아주 고래심줄일테지. 카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한쪽으로 치워두며 말했다.
"내가 진다면...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할거지?"
살짝 흔들리는 카야의 목소리. 카야는 솔직히 두려웠다. 저런 무시무시한 남자와 홀로 맞서 싸운다는것이, 사실은 다 팽개치고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두려웠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이길 경우 이번일의 댓가를 톡톡히 받아내겠다고 했다. 무엇을 요구할지 모른다는 점도 카야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패배가 불보듯 뻔한 상황에서도... 끝내 래스커의 복수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가장 한심했다. 이럴땐 복수고 뭐고 다 접어두고 고개를 숙이는게 가장 어른스러운 선택일텐데. 어차피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게 아닌가? 이제와서 이런 자살행위나 다음없는 싸움에 몸을 던진다 한들 누가 기뻐해줄리도 없었다. 그럼에도, 카야는 맞서기로 결정했다. 두려움을 인정하면서도 맞서는 자세. 이것은 용기일까 만용일까?
"흥. 그런걸 묻는거 보니 아직 싸우지도 않았는데 벌써 패배를 인정하는건가?"
"......"
정곡. 카야는 분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진석은 손목과 다리를 가볍게 풀더니 카야를 향해 조소를 날리며 까딱까딱 손짓했다. 선수는 양보해줄테니 어디 먼저 들어와 보라는 의미의 도발. 꾸욱 아랫입술을 깨무는 카야. 그녀는 중절모를 벗어서 바닥에 내려놓는 척 하더니 휙하고 진석의 얼굴을 향해 집어던졌다.
'이건 뭐 누가 래스커 제자 아니랄까봐 하는짓도 똑같군. 뭔가를 집어던져 주의를 끈 이후 기습적인 발차기라도 날리려나?'
진석의 예상은 정확했다. 카야는 진석의 얼굴쪽을 향해 중절모를 던진 뒤 지체없이 달려들어 빠른 날아차기를 가했다. 하지만 그것을 완벽히 예상하고 있었던 진석. 중절모를 가볍게 쳐내고 되려 발차기를 가하는 카야를 노리고 뛰어들어 공중에서 그녀의 옷깃을 잡아챘다.
"뭣?!"
"하찮다!"
카야의 옷깃을 꽉 붙든 진석은 그녀를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콰당! 나무바닥위로 카야의 몸이 나뒹굴었다.
"크읏...!"
예상치 못한 반격에 충격을 입었지만 몸보다는 정신적인 충격이 더 컸다. 선수부터 이렇게 완벽히 자신의 행동이 읽히다니? 몸을 추스려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는 그녀. 꽤 아프긴 했지만 아직 이 정도는 아직 버틸만 했다. 이를 악물고 진석을 향해 재차 달려들었다.
"이야아아!"
"그런 기합으로 싸움에서 이길 수 있으면 피차 이런 고생 안하지."
냉정한 말로 카야의 투지를 일축하는 진석. 그런 진석에게 정중선을 노리는 매서운 펀치의 연타가 날아들었다. 주먹의 끝이 뭔가 번쩍 빛나는게, 자세히 보자니 손에 브레스 너클이 끼워져 있었다.
'거 참, 아무리 그래도 이건 래스커와 싸움방식이 너무 판박이잖아?'
진석은 오른손으로는 주먹을 뻗어오는 카야의 소매를 낚아채고, 왼손으론 그녀의 멱살을 잡아챈 다음 몸을 빙글 회전시키며 허리를 축으로 그녀를 집어던졌다. 유도의 양팔 업어치기였다.
'뻑하면 다대일로 싸우다 일대일로 싸우니 이거 너무 여유롭잖아! 내가 이런 익숙하지도 않은 업어치기 같은걸 다 시도해볼 정도로!'
잠도 제대로 못 자 피로가 쌓인데다 긴장감으로 몸이 굳은 카야. 아무리 투지를 불태우며 공격을 가해왔다고 해도 진석이 보기엔 그저 똑같이 느려터진 공격이었다. 아무리 격투에 소양이 있는편이라 한들 카야의 기량은 래스커보다 훨씬 떨어졌던 것이다. 진석이 시도한것은 근접전에 숙련된 자라면 쉽게 벗어날 수 있는 어설픈 업어치기였지만, 옷을 거머쥔 완력이 너무 강하다보니 제 컨디션이 아닌 카야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이끌려 허공에서 완전히 한 바퀴 돌아 바닥에 내쳐졌다. 콰당탕!
"컥...!"
아까 발차기를 시도하다 붙잡혀 던져졌을때와는 비교도 안되는 충격이 전신에 퍼져나갔다. 자기 체중만큼의 가속도가 더해진 타격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은것이다. 그나마 나무바닥이니 망정이지 맨 땅바닥이었으면 더 큰 피해를 입었으리라. 아직 상대는 무기조차 꺼내지 않았거늘, 이 남자는 단검을 다루는 것 뿐만 아니라 이런 체술마저 구사할 수 있었단 말인가? 경악스러운 와중에도 연신 온몸 구석구석을 때리는 고통. 정말 말도 안되게 아파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바닥에 내쳐질때 부딪힌 어깨와 옆구리가 호흡을 할때마다 욱신욱신 저려왔다. 어딘가 뼈가 부러지거나 금간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볼품없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당당히 일어서고 싶었는데 팔과 다리는 제멋대로 벌벌벌 떨렸다.
"으... 윽."
고개를 들어 진석을 노려보는 카야. 두 눈엔 아직 투지가 남아있었으나 방금 당한 양팔 업어치기의 피해가 너무 컸다. 진석은 딱하다는 듯 그녀를 깔아보며 말했다.
"그게 전부냐? 도대체 뭘 믿고 내게 도전한거지?"
"...다, 닥쳐. 래스커 아저씨의... 원수!"
카야는 어깨와 옆구리를 감싸쥔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격통때문에 이마엔 땀이 배어나왔고 다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깔끔하던 검은색 정장도 바닥을 두 번이나 구르는 통에 먼지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기회를 주고 있잖아? 날 꺾으면 깔끔하게 목을 내주겠대도?"
"으... 으아아아!"
빈정대며 놀리듯 툭 내뱉는 진석의 말이 적잖이 분했던지 카야는 주먹을 쥐며 달려들었다. 말이 달려들었다지,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비틀 거리는게 누가 옆에서 툭 치면 그대로 넘어질 것 같았다. 진석은 라파가의 숏대쉬를 이용, 카야에게 파고들어가 복부에 바디블로 원투를 꽂았다. 물론 때려 죽일 생각은 없으니 힘을 적당히 조절한 펀치였다.
"커- 허억...!"
하지만 힘을 잔뜩 뺀 펀치였음에도 지금의 카야에겐 치명타나 다름 없었다. 내장을 울리는 고통에 카야의 몸이 기역자로 꺾였다. 차라리 정신을 놓고 기절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팠지만 안타깝게도 바디블로는 상대를 일격에 쓰러트리는 타입의 공격이 아니었다. 바디블로는 체력을 빼앗기 위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때려 피로를 누적시키는 종류의 공격. 즉 힘을 조절한 진석의 바디블로는 그저 그녀에게 고통을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복수를 한다느니, 원수를 갚는다느니. 웃기지도 않아. 능력도 안되면서 어설프게 떽떽거리기나 하면 나 죽여줍쇼 하는 꼴 밖에 안된다는거 알아?"
진석은 배를 붙잡고 신음하는 카야의 목을 왼손으로 콱 잡아쥔채 벽으로 질질 끌고갔다. 쿠웅! 카야를 거세게 벽에 몰아붙여놓은 진석은 오른손으로 다시 한 번 바디블로를 먹였다.
"케헥!"
카야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며 눈물과 침을 질질 쏟아냈다. 자신의 목을 짓누르고 있는 진석의 왼손을 붙잡고 떼어내려 발버둥 쳤지만 이 남자의 팔과 손가락은 흡사 무슨 철근처럼 단단히 옭메여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진짜 재미없구만. 뭐 애당초 네가 나한테 복수한답시고 시시껍절한 계획을 세워 약탄 술을 먹이려고 했었으니... 나도 네 가족들이나 부하들 나부랭이를 죽이지 못할 이유는 없겠지?"
"...!"
"지금까지 이만큼 키워놓은 조직을 때려부수려면 좀 귀찮고 아깝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못할것도 없지. 빅 본은 이걸로 끝이다. 네 년의 어설픈 복수심이 불러온 결과를 보여주지. 너 하나만 남겨놓고 빅 본에 관련된 인간은 전부 죽여주마. 너 혼자 살아남아 소중한것들이 하나하나 사라져 가는 꼴을 똑똑히 지켜봐라. 이게 내가 원하는 댓가다."
카야의 눈에 절망이 서렸다. 지금 이 남자가 대체 뭐라고 말한거지? 말도 안된다. 지금껏 자신의 전부라 여기고 몸담은채 살아온 조직과 부하들, 그리고 아버지가 죽는다? 그럴 순 없었다. 하지만 눈 앞의 사내는 그것을 현실로 만들만한 능력과 힘이 있었다. 래스커의 복수라니. 자신은 도대체 뭘 위해서 복수를 하겠다고 이 자에게 수작을 걸었던건가? 자신의 모든것이 파멸하는 꼴이 보고싶어서?
"아... 제, 제발... 제발... 용서를...!"
두려움과 공포에 질린 카야는 눈물을 쏟아내며 필사적으로 상대의 자비를 구걸했다. 자신이 어리석었다. 패배를 직감하면서도 어째서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맞서보려 했던걸까? 아버지에게 수호자들의 강력함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면서도. 자신이 잘난 뭐라도 된 양 착각하고 복수를 하겠답시고 가슴 속 한 구석에 치기어린 마음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첩의 자식임에도 자신을 충분히 아끼고 사랑해 준 아버지. 어려서부터 가족처럼 여겨왔던 조직의 일원들. 그들의 파멸을 목도 할 순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막아야했다.
"차라리 저를... 제 목숨을 드릴테니 그것만은!"
"하, 이제와서 용서? 네년의 목숨이 뭐 몇 푼 값어치나 있는줄 알아?"
콰당! 그렇게 말하며 카야를 바닥에 내팽개치는 진석. 카야는 쿨럭쿨럭 고통에 찬 기침을 하면서도 진석의 발치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바짓가랑이에 매달렸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부디 자비를..."
애걸복걸하는 카야의 호소.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진석에게 매달리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로 필사적이었다. 많은 부하를 이끌며 언제나 당당하던 평소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우와... 작정하고 하는 일이긴 하다만 이렇게 되니 내가 진짜 나쁜놈 같다.'
자비를 구하는 카야의 모습에 진석은 양심이 거하게 찔려오는것을 느꼈다. 진석은 이전 미리안이 내린 평가대로 진짜배기 악당까진 되지 못할 어중간한 성격. 물론 이것은 어차피 게임이니 필요에 의해서라면 어떤 나쁜짓도 서슴없이 할 수는 있었지만, 가능하다면 온건한 방식을 추구했다. 카야가 거대 범죄조직의 지부장입네 두목의 딸입네 해봐야 결국은 젊고 여린 한 사람의 여성.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다리에 매달려 이렇게 사정사정 해오는데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제와서 하하호호 웃으며 그래 그럼 여기서 끝내자 사이좋게 악수하고 끝낼 수도 없는 노릇. 한 번 시작한 일은 매듭을 지어야 했다. 철저히 잔혹한 수호자의 모습을 연기해야 했다. 진석은 최대한 거만한 태도로 카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면 용서니 자비니 뜬구름 잡는것 같은 소리만 반복하지 말고... 네 가족과 조직을 내버려두는 댓가로 내가 얻을 수 있는걸 말해봐. 넌 날 위해서 뭘 내어줄 수 있지?"
"아... 그, 뭐... 뭐든 드리겠습니다! 도, 돈이라면 얼마든지!"
미간을 확 찌푸리는 진석. 카야를 발길로 턱 밀어냈다.
"돈? 흥! 네깟 조직이 굴리는 푼돈 따위가 아쉬울 것 같나? 돈 따윈 썩을만큼 남아돈다."
사실 남아도는건 아니었다. 지금 진석이 보유한 300닢 가량의 금화도 애당초 래스커를 쓰러트리고 이 사무실의 금고에서 털었던것. 미리안이 준 수표는 공작금이니 함부로 쓸 수 없었다. 하지만 카야에겐 진석의 말이 곧이 곧대로 들릴터. 떠밀려졌던 카야는 허둥지둥 다시 일어나 진석의 발치에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수, 수호자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명하시는건 무슨일이건 충실히 행하겠습니다! 아니, 차라리 개가 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 하나로 용서를...!"
그렇게 외치며 바닥에 큰절하듯 넙죽 머리를 박는 카야. 분명 지금의 카야는 진석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뭐라도 해야하는 필사적인 입장. 하지만 젊은 처자의 입에서 충성을 바친다느니 개가 되겠다느니 하는 소리가 튀어나오니 진석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올뻔 했다.
'이 무슨 쌍팔년도 조폭같은 꼬락서니냐... 아니, 얘는 따지고보면 조폭 맞긴 하지만서도. 아오 안돼. 지금 웃으면 수호자의 위엄이고 뭐고 다 망하는거야. 참자 참어.'
진석은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과거에 있었던 기분나빴던 일들을 떠올렸다. 길가다 사소한 시비가 붙었던 일이나, 일터에서 있었던 짜증나는 상황들. 그리고 군대에서 짬이 안될때 겪었던 온갖 고생들. 그런일들을 떠올리자 과연 튀어나오려던 웃음은 쏙 들어가고 머릿속은 금세 차분해졌다.
'아 정말 그때 그 개새... 가 아니지. 흠흠. 각설하고.'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카야의 뒤통수 위로 턱 발을 얹어놓는 진석. 카야의 어깨가 움찔하고 흔들리는게 보였다.
"그래, 이제서야 그 멍청한 주둥아리에서 좀 제대로 된 말이 튀어나오는구만. 자비는 그렇게 구걸해야지. 그런데 어쩌나? 난 이런 비루먹은 개는 별로 필요 없는데. 차라리 아랫도리라도 벌린다면 모를까."
이전의 군주나 장수 플레이를 통해 자신이 주도권을 잡은 상대방을 괴롭히는데 능한 진석이었다. 진석의 입에서 튀어나온 지독한 발언에 카야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꾸욱 말아쥐며 부들부들 떨었다. 카야는 지금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도 비참하다 느꼈다. 자신을 발로 짓누르고 있는 이 남자는 대체 얼마나 수치를 줘야 만족할것인가? 개처럼 굴복하겠다며 완전한 항복을 선언했음에도 필요없으니 다리를 벌리란다. 그야말로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서글퍼질 정도의 모욕이었다. 가슴속엔 분노를 넘어선 새까만 증오가 타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무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상대의 모든 요구에 응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아버지와 조직을 지킬 수 있을테니까.
"마... 마음대로... 하십시오."
울음과 분함이 뒤섞인 카야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자신이 남자와 몸을 섞는일따윈 절대 없을거라 생각했건만... 결국 이런식으로 한낱 노리개가 되고 마는건가. 카야는 이를 꽉 물고 흐느꼈다.
'이만하면 됐겠지.'
진석은 그렇게 생각했다. 글자 그대로 상대를 힘으로 짓눌러 억지로 굴복시켰다. 허나 지금 여기서 카야를 범할 생각따윈 없었다. 그저 저렇게 모든걸 내려놓는 패배선언이 듣고 싶었을 뿐. 실컷 두들겨 패놓고나서 범한다니, 어째 내키지 않았다. 보트하우스에서 본 레드라인 대머리 중년 두목의 추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따지고 보면 진석은 훨씬 전에 제이스를 숲에서 힘으로 짓눌러 범한적이 있고, 그것보다 더 거슬러 보자면 에나집에 강도질하러 들어갔다가 겁박해서 강간을...
'새삼 돌이켜보니 나 진짜 쓰레기네. 이게 게임이라 망정이지, 현실이라면 징역 몇 년짜리일까.'
자신의 과거 행적을 떠올리던 진석은 카야의 머리를 밟고 있던 발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서럽게 엉엉 우는 카야를 내려다보며 최대한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오늘의 일을 잊지마라. 네 입으로 뱉은 말대로 교단과 나의 명령을 전심전력으로 따르도록. 그렇지 않으면 지금 정산하지 않은 댓가를 반드시 받아낼테니."
일방적인 선고를 내리고 뒤로 돌아 그대로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진석. 적막한 실내엔 혼자 남겨진 카야의 울음소리만이 계속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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