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3. -- > * 42화 *
"화염화살."
그나마 잃은 랜턴 대신 조명으로 쓸 마법 주문이 있다는게 천만 다행이었다. 우습게도 이 마법은 전투용으론 한 번도 쓴 일이 없었지만, 다른 용도론 정말 유용하게 써먹고 있었다. 적어도 마법서의 가격이었던 1골드의 값어치는 톡톡히 한달까.
"하지만 계속 띄워놓을 수는 없다는게..."
마법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화염화살의 경우 마법을 목표를 향해 발사하지 않고 방치해 둘 시 3, 4분 가량 지나면 저절로 소멸했다. 잠깐동안 광원으로 사용하는거라면 상관없을 시간이지만, 도시를 대각으로 가로지르는 긴 지하터널을 걸어야 하는 진석 입장으로선 적지만 SP를 꾸준히 소모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쯧."
그렇다고 달리 어쩔 방법이 없었으므로 계속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은 입구는 좁았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넓어져 성인 남성 대여섯이 나란히 걸어 갈 수 있을 정도의 너비가 되었다. 입구 부근은 확실히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는 느낌이었는데, 걸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안쪽은 사람의 손이 닿았다는 티가 나기 시작했다. 조금 더 걸어가자 저 앞쪽에 동굴 측면으로 나있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인가..."
아마 바로 이 위쪽이 등대인듯 했다. 이 계단을 걸어올라가면 등대의 지하인듯 싶었다. 혹시나 해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 보았는데, 위쪽으로 향하는 길은 나무로 된 덮개문으로 막혀있었다. 덮개문 틈새로 빛 한 점 안 들어오는것이, 분명 천같은 무언가로 이 위쪽이 잘 덮혀있는듯 했다. 아마 위쪽 등대 안으로 들어가서 보자면 바닥에 지하로 향하는 문을 뚫어놓고 그 위를 적당한 무언가로 덮어 가려놓은 모습이리라.
"병사들은 등대 바닥에 이런 문이 있는줄도 모르는거겠지?"
하긴 일반 병사들에게 왕족들의 탈출통로가 여기 있다는걸 알려줘서 뭐 하겠는가. 별 소득없이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가는데, 벽에 뭔가가 걸려있는것을 보았다. 벽에 돌출된 횃불 걸이에는 윗부분이 다 타고 손잡이 부분만 남은 횃불자루가 걸려있었다. 얼추 두 뼘정도 될듯한 길이.
"횃불의 자루인가... 위쪽 부분은 다 탔으니 그냥 나무토막이지만..."
진석은 자루를 꺼내어 손에 쥐었다. 끝부분을 적당히 깎아내면 찌르기 용도로 대강이나마 써먹을 수 있을법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단검으로 횃불 자루의 끝을 두세번 깎아 내는 찰나, 화염화살이 훅 하고 사라졌다.
"아 이런. 벌써?"
다시 화염화살의 주문을 사용해 빛을 만들어냈다. 서둘러 횃불 자루를 대충 깎아 나무 말뚝으로 만든 다음 그것을 쥔채 계단을 내려가 다시 통로를 걸었다. 차라리 뛰어 가고 싶은 생각이 안드는건 아니었지만 안쪽에 혹시 뭐가 있을지 모르므로 신중해야 했다. 그럴 확률은 낮았지만 만에 하나 이 통로 중간에 왕족들만 아는 함정같은게 설치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데, 앞뒤 안보고 달려들었다가 무슨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차라리 신중한 편이 나았다. 그리고 주변을 잘 살피며 움직인 덕에 이 나무 말뚝이라도 하나 줍지 않았는가? 무기라기엔 너무 조악했지만 지금의 진석에겐 이거라도 없는것보단 백 번 나았다.
"흠..."
조용히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는 진석. 길은 단순한 일자형이라 헷갈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단지 화염화살이 밝혀주는 범위가 그닥 넓지않아 전방으로의 시계가 제한된게 좀 답답할 뿐. 화염화살의 밝기로는 기껏 전방 약 3~4미터까지 밖에 밝히지 못했다. 원래 조명용의 주문이 아니니 광도가 낮은게 마치 건전지가 다 되어서 간당간당한 후래쉬를 들고 있는 느낌이랄까?
"......"
아무 말 없이 주변을 살피며 계속 통로를 걸었다. 중간에 또 한 번 화염화살이 사라져, 재차 불을 밝히고 안쪽으로 걸어갔다. 슬쩍 뒤를 돌아보았는데 아까 자신이 들어온 해안동굴의 입구쪽은 이제 손톱만한 빛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제 겨우 수백미터. 아직 갈 길은 한참 남아 있었다.
"...응?"
그때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느꼈다. 강렬한 비린내. 아니, 여긴 바다 근처니까 특유의 물비린내가 나는건 당연하지만서도... 이건 뭔가 더 강한 냄새였다. 냄새라기보단 악취에 가까웠다.
"칫..."
제자리에 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레 바닥이나 벽을 살펴보았다. 한 발 한 발 신중히 나아가는 진석의 눈에 바닥에 굴러다니는 생선뼈가 보였다.
"......"
만조가 되어 바닷물이 차올라도 이 동굴까진 들이칠리는 없을터. 시간에 따라 사용할 수 없는 종류의 동굴이라면 탈출통로로 만들었을리가 없다. 그렇다면 여기 생선뼈가 굴러다니는 이유는...
"...뭔가 있군."
과연, 예상대로 안으로 걸음을 옮길수록 더 많은 생선의 잔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것들에게서 강렬한 악취가 풍겼다. 하지만 악취의 원인은 그것이 아니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앞에서 더욱 강렬한 냄새가 풍겨왔다. 점점 더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다에 가라앉은 폐선의 잔해로 보이는 목재의 일부라거나 다 깨어진 접시, 항아리, 녹슨 촛대나 각종 식기... 온갖 잡동사니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통로의 벽이나 잡동사니 사이로 녹색의 이상한 점액질 같은것이 군데군데 묻어있었다. 강렬한 악취의 정체는 바로 그 점액질인것 같았다. 진석은 소름이 돋는걸 느꼈다.
'이런 씨... 뭔가 몬스터 같은게 통로에 자리잡고 사는 모양인데.'
탈출통로 같은건 나라가 침공당해 망하는 상황에서나 쓰기위해 만들어진것. 평상시에도 누군가 꾸준히 관리하거나 내려와 살펴볼리 없었다. 그러다보니 바다에 사는 어떤 종류의 몬스터가 이 통로를 자기 집인양 거처로 삼고 있는듯 했다. 벽에 발린 점액질의 흔적이 주르륵 흘러내리는게, 묻은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것 같았다. 그때 화염화살이 훅 하고 사라지며 어둠이 사방을 채웠다.
'아 뭐 이렇게 금방금방 꺼져?'
서둘러 화염화살을 허공에 만들어 내는 진석. 어둠이 사라지고 주변이 밝아지자, 방금전까진 아무것도 없는 앞쪽 공간에 낯선 생물체가 하나 나타나 있었다. 흡사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뜬금없는 등장이었다.
"헉?!"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는 진석. 어둠속에서 거대한 몬스터가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2미터쯤 되어보이는 체구. 흡사 게나 가재의 그것처럼 생긴 얼굴. 몸에는 단단해보이는 키틴질의 갑각이 전신을 뒤덮고 있었는데, 오른팔은 사람 몸통만한 큼직한 집게발이었고, 왼손에는 사이사이에 물갈퀴같은 피막이 덮여있는 네개의 손가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기묘한 주둥아리를 오물거리던 몬스터는 갑자기 퉷 하고 무언가를 진석에게 뱉었다.
"읏!"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그것을 피하는 진석. 몬스터가 뱉은 액체에 맞은 바위벽이 순식간에 쉬이익 소리를 내며 녹아들고 있었다.
'산성액 같은 건가. 치료 수단도 없는데 저런걸 맞았다간 큰일난다!'
어차피 곱게 지나가기는 텄다. 게다가 놈이 먼저 공격을 해왔으니 봐주고 뭐고도 없었다. 진석은 땅을 박차고 몬스터에게 달려들었다.
"이 놈!"
하지만 몬스터는 규규귝 기묘한 소리를 내며 빠르게 뒤로 물러서 어둠속으로 몸을 감췄다. 화염화살이 밝혀주는 거리 저 밖으로 물러나버린 것이다. 진석은 당황해서 멈춰섰다.
'도망? 아니, 그럴리가...'
그때 어둠속에서 퉷퉷 하는 소리가 연속으로 들려왔다. 진석은 화급히 뒤로 물러났다. 진석이 서있던 자리로 몬스터가 뱉은 산성액이 두 발 날아와 바닥을 녹였다.
"...이게 진짜!"
몬스터는 어둠속에서도 사물이 잘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니 이런 어두운데서 멀쩡히 살고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 자신은 어둠속으로 물러난 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상황. 그렇다면...
"가라!"
진석은 손을 뻗으며 전방을 향해 화염화살을 날렸다. 허공에 떠 있던 화염화살은 진석의 손짓을 따라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과연, 화염화살이 진석에게서 십수미터쯤 떨어진 곳을 지날때 벽쪽에 바짝 붙어 서있는 몬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화염화살은 빗나갔지만 놈의 위치는 확인했다. 진석은 앞으로 달려나가며 재차 화염화살을 시전해 곧바로 쏘아냈다.
"해산물같은게 감히! 화염화살!"
몬스터는 연속으로 마법이 날아들고 동시에 진석이 매섭게 달려들자 당황했는지 허둥지둥 화염화살을 피했다. 그리곤 집게발로 주변에 굴러다니던 큼직한 나무토막을 집어들더니 이쪽으로 힘껏 던졌다. 진석은 몸을 숙여 그것을 가볍게 피하고 또 다시 화염화살을 시전해 광원으로 띄워올렸다. 이제 둘의 간격은 고작 3, 4미터!
"시클론! 라파가!"
몬스터가 뒤로 주춤거리는 것이 또 다시 어둠속으로 몸을 숨기려고 하는 것 같아 진석은 재빨리 시클론을 걸고 뒤이어 라파가를 걸었다. 지잉 하고 눈앞에 섬광이 퍼져나가는 것 같은 시클론 특유의 감각. 그리고 두 다리가 번갈아 땅을 박차며 빠르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순식간에 몬스터가 진석의 간격 안으로 들어왔다.
"이거나 받아라!"
진석은 숏대쉬의 탄력을 살려 오른손에 든 단검을 갑각의 사이를 노리고 강하게 찔렀다. 하지만 아까 전 동굴 입구에서 바위에 던져 내구도가 줄어있었던 것일까? 단검은 채 반도 들어가지 못하고 갑각 틈새에 낀채 팅 소리를 내며 검날이 부러져 버렸다.
"윽!"
이놈의 싸구려 단검! 이래서 내구높음이 붙은 무기를 써야하는데! 몬스터는 진석의 공격에 별 피해를 입지 않았는지 규유육 하고 기묘한 분노의 외침을 내지르곤 진석의 머리를 향해 거대한 집게발을 휘둘러왔다. 저 커다란 집게발에 잡혔다간 사람 몸뚱아리쯤 그대로 잘려나갈터! 할 수 없이 뒤로 두세걸음 물러났고 몬스터의 공격은 허공을 갈랐다.
"그럼 이거라도 먹어!"
집게발이 허공을 가른 틈을 타, 진석은 광원으로 띄워놓았던 화염화살을 몬스터의 머리를 향해 쏘았다. 고작 화염화살 한 발을 머리에 맞춘다고 해도 놈을 쓰러트릴 순 없을터. 하지만 진석의 진짜 노림수는 그게 아니었다.
"큣!"
서로 엎어지면 코 닿을 가까운 거리였던 만큼 피할 수도 없었다. 화염화살은 빠르게 날아가 몬스터의 안면에 적중해 파아앙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불꽃을 퍼트렸다. 큰 피해는 아닌것 같았지만 얼굴 바로 앞에서 불꽃이 터졌으니 아주 멀쩡할리는 만무. 몬스터가 깜짝 놀라 휘청하는 사이 진석이 재차 라파가를 걸며 빠르게 뛰어들었다.
"타아아앗!"
화염화살을 쏘아버려 광원도 없었지만, 아직 몬스터의 머리통 부근에는 화염화살의 미약한 잔해가 흩날리고 있었다. 그 희미한 빛을 목표로 달려들었다. 왼손에 든 나무 말뚝을 꽈악 쥐고 몬스터의 머리통에 힘껏 찔러넣었다.
"이 자식, 해물꼬치나 돼라!"
"기에엑!"
푸우욱! 아무리 단단한 갑각이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고 해도 역시 머리통은 예외였던지, 몬스터의 눈과 눈 사이로 나무 말뚝이 한 뼘이나 파고들었다. 보통 이런 갑각류는 뇌가 작아 머리를 향한 공격이 있을까 확신은 없었지만... 부들부들 떨며 집게발을 축 늘어트리는걸 보니 급소가 맞긴 맞는것 같았다. 말뚝에 머리가 꿰뚫린 몬스터는 입에서 부글부글 허연 거품을 토해내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털썩 쓰러졌다.
"...휴."
진석은 빠르게 화염화살을 띄워 주변을 밝히며 쓰러진 몬스터를 살펴보았다. 경련하듯 사지를 떠는게 아직 숨은 붙어있는것 같았지만 오래가진 않을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런데서 몬스터가 살고 있었을 줄이야."
주변을 둘러보니 놈은 이곳은 거처로 삼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다 먹거나, 바닷속에 흩어진 폐선이나 물건들의 잔해를 끌어다 모아놓는게 취미인듯 싶었다. 혹시 이 잡동사니 사이에 뭔가 쓸만한게 있을까 싶어 잠깐 둘러보았지만 죄다 그냥 쓰레기였다.
"하긴 이딴 몬스터가 가치있는 물건을 구분할 수 있을리가 없지."
그나저나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잠깐의 싸움으로 그나마 있던 단검과 나무 말뚝마저 써버렸다는것. 칼날이 반토막난 단검은 그냥 버리고, 말뚝이나마 다시 뽑아서 쓸까 했는데... 깊게 박힌 말뚝 사이로 흘러나오는 몬스터의 걸쭉한 체액이 거슬렸다. 어째 고약한 냄새도 나는게 손에 저런걸 묻히고 싶지 않았다.
"...그냥 맨손으로 가자. 어떻게든 되겠지. 나도 모르겠다."
결국 무기만 소모하고 아무 소득없이 통로 안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는 진석. 방심하지 않고 신중히 나아갔지만 이후로는 별 다른 장애물 없이 고요했다.
진석이 한참 긴 지하통로를 지나 왕국으로 향하고 있을때, 제이스가 헉헉거리며 노를 젓는것을 결국 보다 못한 아르데나는 괴물의 힘을 끌어내서 대신 노를 저었다. 그 덕택에 배를 빌렸던 남쪽 해안가에 금세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 진작 좀 쓰지 그랬어. 그 힘."
"죄송해요..."
아르데나의 능력에 대해 정확히 모르고 있던 제이스는 이제서야 아르데나가 자신이 원할때 괴물의 힘을 따로 끌어 쓸 수 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얘... 러셀 말대로 제법 쓸만하네? 저번 레드라인 패거리를 처리할때도 도움이 됐고. 그러고보면 러셀은 눈썰미도 좋고, 얼굴도 잘생겼고, 나름 능력도 있고, 바... 밤일도 잘하고... 성격만 좀 더 좋으면 완벽할텐데! 왜 그렇게 사람 괴롭히고 놀리길 좋아하는걸까?'
남쪽 해안가에서 배를 반환한 제이스와 아르데나는 옷을 갈아입고 호텔로 되돌아와 무기를 챙긴다음, 선착장 지구의 빅 본 사무실로 향했다. 진석이 제이스에게 지시한 사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적당히 대여섯명 정도 동원해서 왕궁 서쪽편에 대기시켜 둔 다음, 정확히 자정에 왕궁에 불화살을 몇 대 쏴날리고 도망가게 하면 된댔지?'
진석은 왕궁안에 잠입해 자정이 될때까지 폭풍의 지팡이를 탐색한 다음, 훔쳐내건 실패하건 불화살로 소란을 일으키고 그 틈을 타 탈출 할 생각이었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자정이 되기 전에 진석이 폭풍의 지팡이를 탈취해서 발각되지 않고 빠져나오는 것이었지만, 왕궁 내부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는 이상 생각대로 성공할 확률은 낮았다.
'성공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어떠려나. 제이스가 본 진석은 뛰어난 전사였지만 도둑질엔 재능이 있을거라곤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해 속인다거나 협박을 하는 재주도 꽤 있었지만 그것만으론 물건을 훔쳐낼 수 없는 노릇이다. 제이스와 아르데나가 빅 본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서 노닥거리던 십여명의 사내들이 그녀들을 돌아보았다.
"누가... 아."
안에 있던 이들은 페레나 시에서부터 데오그라즈까지 동행했던 자들이라, 이쪽을 금세 알아보곤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왔다. 그들도 제이스가 교단의 수호자이며, 바로 그저께 레드라인의 조직원 수십명을 격멸해준 무시무시한 능력자라는 것 쯤은 잘 알고 있었다. 제이스는 고압적인 태도로 그들을 깔아보며 물었다.
"지부장은 어디있지?"
"그게 어쩐일인지 아침나절에 부상을 입어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들었습니다. 자세한 건 웍스턴 부지부장이 위에 있으니 올라가 보십시오."
카야가 패거리를 이끌고 오기 전까지 지부장을 대행하던 웍스턴이란 사내가 정식으로 부지부장으로 임명된 모양이었다. 이전, 래스커가 지부장일때 그 오른팔이었던 덱의 위치라고나 할까. 제이스는 아르데나를 데리고 익숙하게 2층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안에선 부하 한 명과 함께 금고에서 돈자루나 마약뭉치를 정리하고 있던 웍스턴이 있었다.
"아니 이거, 어서오십시오. 그런데 무슨일로...?"
웍스턴은 제이스를 보자 하던일을 멈추고 바로 인사를 건네왔다. 제이스는 사무실 한 가운데 서서 척하니 팔짱을 끼고 말했다.
"카야의 상태는 정확히 어떻지?"
"아 지부장이라면... 오른팔에 금이가고 갈비뼈가 두 군데나 부러졌습니다. 게다가 여기저기 심한 타박상까지. 하지만 어쩌다 그렇게 된건지 통 말을 해주지 않아서... 제일 비싼 약을 처방받은덕에 그럭저럭 낫긴 했지만 의사가 하루이틀은 안정하라며 입원시키더군요. 솜씨 좋은 애들로 열 명쯤 호위로 붙여놨습니다. 용무가 있으시다면 제게 대신 말씀해 주십시오. 전해드리겠습니다."
사실 카야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제이스였다. 최소한 오늘은 병원신세란 말이지? 제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본론을 말했다.
"너희 애들 중에서 활을 쏠 줄 아는 녀석 다섯명 정도만 빌리지."
"활... 말입니까?"
뜬금없는 얘기에 웍스턴이 약간 당황스런 기색을 내비쳤다.
"그래, 솜씨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정말 간단한 일이니 그냥 쏠 줄 알기만 하면 돼. 적당한 수고비도 주지, 자."
제이스는 씨익 웃어보이며 품에서 백골드짜리 수표를 한 장 꺼내 웍스턴에게 내밀었다. 진석에게서 미리 건네받아둔 수표였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수표를 바라보는 웍스턴. 웍스턴도 이쪽 바닥에서 굴러먹은 경력이 있는데 네 그렇습니까 하고 곧이 곧대로 믿을리 없었다. 저건 거짓말이다. 누가 간단한 일 하는데 백골드라는 거금을 내밀겠는가? 제이스의 목적을 모르는 웍스턴의 머리속이 핑핑 돌았다. 이 돈을 받아도 될까? 비록 지금 자신이 카야를 대행하고 있긴 하지만 이런일을 맘대로 결정해도 되는걸까? 웍스턴이 그런 생각을 하느라 머뭇거리자 제이스는 웍스턴에게 다가가 손에 수표를 쥐어주며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걱정된다면 지부장에게 확인해도 상관없어. 나는 로엔 호텔 앞의 노천 찻집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한 시간 내로 보내줬으면 좋겠군. 가능하면 입이 무거운 녀석들로 부탁해."
농밀한 성인 여성의 체향이 웍스턴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웍스턴이 채 뭐라 대답하기도 전, 제이스는 발길을 돌려 또각또각 굽 소리를 내며 아르데나를 데리고 방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웍스턴은 멍하니 자신에 손에 쥐어진 수표만을 들여다봤다.
"화염화살."
화르륵. 진석의 말에 허공에 한 뼘 반짜리 불화살이 생겨났다. 아무리 화염화살이 SP를 적게 소모하는 초급 기술이라지만 한 시간 반째 3, 4분 간격으로 쉬지않고 계속 사용하고 있었더니 SP가 슬슬 바닥이었다.
'환장하겠군...'
어둠속을 계속 해쳐나가고 있자니 시간 감각도, 거리 감각도 엉망이다. 메뉴를 열어 정확한 시간을 파악 할 순 있었지만 체감상으론 여기 들어온지 서너시간도 더 지난것 같았다. 게다가 진석은 이 탈출통로가 단순히 일직선일거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완만한 곡선이었고, 왕궁쪽을 향해 갈수록 약간씩이긴 하지만 땅속으로 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서서히 그 끝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
주변을 경계하며 걷는것도 지쳐, 어느새부턴가 터덜터덜 그저 바닥만 보며 걷고 있었는데 어느샌가 바닥이 끝나고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진석은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펴보았다. 과연, 우측편으로 위쪽을 향해 사다리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다 왔구나! 아오 정말 지겨워 죽는줄 알았네."
언제 만들어진건지 모를 금속 사다리는 녹과 먼지가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진석은 어쨌든 끝에 도달했다는 기쁨에 사다리를 타고 척척 위로 올라갔다. 사다리를 타고 한 20여 미터쯤 올라갔을까, 머리 위엔 묵직해보이는 철제 덮개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말이 덮개문이지 이건 그냥 통짜 철판이었다.
'그러고보니 이거... 위에 뭔가 무거운게 얹혀있거나 자물쇠라도 잠겨 있으면 망하는거잖아?'
그렇다. 기껏 해안동굴쪽으로 탈출통로를 거슬러왔지만 위쪽이 막혀있으면 다 허사. 왜 이걸 미처 생각 못했을까? 진석은 허둥지둥 철판에 손을 대고 슬쩍 힘을 줘봤다. 과연 이 위에 무언가가 올려져 있기라도 한지 엄청 묵직했다.
"아니 이런..."
곤혹스러움을 느끼며 양 손바닥을 철판에 밀착시키고 있는 힘껏 밀어봤는데, 진석의 힘으로 감당 할 수 있는 정도의 물건이었던지 끼익 하며 철판이 살짝 들렸다. 하지만 사다리에 몸을 걸친채 힘을 써서 그런지 사다리의 연결부위에서 뿌드득하는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낡고 녹슨 사다리로는 진석이 밀어내는 힘을 감당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대로 계속 힘을 쓰다간 사다리가 째로 떨어져나갈지도 모르는상황. 진석은 기껏 들리던 철판에서 손을 떼었다. 꾸웅. 수센티 정도 열렸던 철판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다시 닫혔다.
"젠장. 도대체 되는일이 없구만."
이제 겨우 왕궁에 발을 들이나 했더니 별게 다 문제다. 도둑질도 엄청나게 힘들구나, 아무나 하는게 아니었어. 새삼 도적들에 대해 감탄하는 진석이었다.
"아무튼 계속 이러고 있을수도 없는데... 뭔가 뾰족한 수가..."
시간은 벌써 오후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제이스에게 일러둔 자정까지는 10시간도 남지 않았다. 왕궁 안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이 10시간도 모자랄지 모른다.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수 없었다. 진석은 자신의 몸통에 사선으로 걸쳐두었던 밧줄에 눈이 갔다.
"...이걸 써볼까."
진석은 사다리를 타고 도로 맨 아래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사다리 끄트머리 부분을, 양손으로 붙잡고 우둑 끊어냈다. 워낙 녹이 슬어있던데다가 진석의 힘이 강했기 때문에 의외로 쉽게 끊어졌다. 그렇게 사다리를 맨손으로 해체해 두뼘짜리 쇠막대 네 개를 만들었다.
"좋아 이거면 되겠지."
막대들을 챙겨 다시 사다리를 오르는 진석. 금세 철판앞까지 올라간 진석은 상의로 입고 있던 붉은 메갈롯 거미 셔츠를 벗어 손에 글러브처럼 둘둘 감은 다음, 그 손에 쇠막대를 쥐고 사다리 옆쪽의 돌벽에 강하게 내리 찍었다. 암반이 그리 단단하지 않기도 했지만 힘이 워낙 좋은 탓에 쇠막대는 단번에 3분의 1쯤 파고 들었다. 돌조각이 퍼스슥 부서지며 튀어올랐다. 셔츠를 감은 주먹을 꽉 쥐고 힘을 모은 진석은 마치 망치로 못을 박듯 쇠막대의 끝을 두들겨, 절반 넘게 박아넣었다. 꿍꿍 하고 땅이 울리는 소리가 퍼져나갔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런 탈출통로의 입구가 숨겨져 있는 곳이면 사람이 자주 드나드는 곳은 아닐테니 이 정도 소리쯤 상관없겠지.'
그렇게 나머지 쇠막대 3개도 더 박았다. 손이 얼얼했지만 셔츠로 잘 감쌌던 덕에 다친곳은 없었다. 확실히 이 옷은 방어구로써 제 몫을 다 하고 있었다. 이제 사다리가 붙어있는 돌벽 양쪽엔 쇠막대가 각 2개씩 단단히 박혀있었다. 진석은 몸에 감겨있던 밧줄을 풀어 그 쇠막대에 걸쳐놓고 다시 셔츠를 입었다.
"이 밧줄을 요렇게... 걸쳐서 디딤축으로..."
진석은 좀 헤메면서 밧줄을 벽에 박힌 쇠막대들에 걸치고 묶어, 자신의 체중을 받쳐줄 임시 지지대이자 발판으로 만들었다. 한 쪽 다리는 사다리에, 한 쪽 다리는 쇠막대와 밧줄로 만든 지지대에 걸치고 힘을 써서 철판을 열어볼 생각이었다. 이거라면 사다리가 힘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고 해도 이쪽 임시 지지대로 버텨 볼 수 있으리라. 밧줄의 끄트머리를 꽉 묶어 완성한 진석은 사다리와 밧줄로 만든 발판 위에 다리를 한쪽씩 걸친채 철판에 다시 양손바닥을 가져다댔다.
"열려라 참... 깨!"
우드드득. 진석이 온 힘을 다해 철판을 밀어내자 흙먼지가 투둑 떨어지며 철판이 열리고 그 틈새로 밖의 빛이 새어들어왔다. 그 순간, 화염화살의 제한시간이 다 되어 불이 꺼졌다. 눈앞이 어두워졌다.
"윽!"
화염화살을 쓰기 위해선 한 손이 자유로워야 하지만 지금은 양 손이 모두 철판을 짚고 있는 상태. 틈새로 새어들어오는 빛에 의지해 철판을 계속 밀어냈다.
'으라차차차!'
무력 46에서 뿜어지는 가공할 힘이 철판을 힘껏 들어올렸다. 철판위에 얹혀져 있던 무언가는, 철판이 들어올려지며 옆으로 밀려났는지 어느순간 묵직하게 느껴지던 무게감이 자연스레 사라졌다. 철판을 훌떡 밀어내고 통로를 완전히 개방한 순간, 콰드득 소리가 나며 진석의 한쪽 무게를 지탱해주던 사다리의 연결부위가 여러군데 끊어지며 옆으로 기울었다.
"으억?!"
진석은 허우적대면서도 통로 위로 팔을 뻗어 붙잡았다. 아래를 보니 벽에 붙어있던 사다리의 연결부위들이 완전히 떨어져 벽에 기운채로 무용지물이 되었는데, 쇠막대와 밧줄로 만든 임시 지지 발판이 있어 떨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서둘러 버둥거리며 통로 위로 기어올라갔다.
"후아."
기어올라가 바닥에 털썩 드러누웠다. 먼지가 풀풀 날렸다.
"윽... 먼지."
누운채로 주변을 둘러보자니, 아마도 거의 사용되지 않는 지하 창고인것 같았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상자나 잡동사니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옆으로 쓰러져 있는 저 큼직한 상자는 아마 이 철판 위에 얹혀져 있던 것이리. 어둑하고 먼지가 가득한 창고벽 한쪽 맨 윗부분엔 손바닥만한 채광창이 나 있어 거기를 통해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튼 왕궁에 들어오는데는 성공했는데..."
이제 겨우 첫 관문을 돌파한 것 뿐이었다. 피터슨의 말대로 왕궁 안 깊은 금고같은곳에 폭풍의 지팡이가 숨겨져 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훔쳐낼지 막막했다. 지금 자신은 왕궁에 들어오는건 성공했지만 맨몸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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