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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43화 (43/155)

< --   - 3.   -- >         * 43화 *

"내가 생각해도 대담한건지 멍청한건지 모를 상황이구만."

진석은 몸을 발딱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잔뜩 달라붙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이러는 와중에도 귀중한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 멍하니 퍼질러 있을 순 없었다. 창고의 입구로 다가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

현재의 위치가 왕궁내에서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이 창고는 분명 복도의 맨 끝이었다. 복도를 살펴보니 이곳엔 횃불조차 하나 걸려있지 않아 어둑했다. 별 광원도 없다보니 맨 구석인 이쪽의 복도는 아래의 탈출통로 만큼이나 어두웠다.

"완전 구석중에서도 끄트머리군. 하긴 왕족들을 위한 탈출통로니 일부러 찾기도 힘든 이런데에 숨겨놓은거겠지."

딱히 오가는 사람은 없는것 같아 안심하고 복도로 나섰다. 복도를 지나며 주변의 다른 방들을 살펴보았는데 마찬가지로 쓸모없는 물건들을 적당히 쌓아둔 창고인 것 같았다. 아니, 복도 전체에 먼지가 가득 쌓여있는게 애당초 이곳엔 사람이 출입한지 오래된것 같았다. 조금 긴장을 풀고 복도의 끝에 다다르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곧바로 계단을 올라가 보니 밖으로 통하는 것으로 보이는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이 안쪽은 쓰이지 않는 창고로 출입하는 사람도 없는걸로 보이지만... 이 밖은 분명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겠지?'

혹시해서 문에 귀를 가져다 대고 밖에 누가 있진 않나 기척을 살폈다. 딱히 별 다른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조심스레 문 안쪽의 자물쇠를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바로 앞에 다른 건물인듯한 벽의 일부가 보였다.

'으잉?'

주변에 인적이 없는것 같아 좀 더 몸을 내밀고 밖을 살펴봤다. 지금 진석이 있는 건물은 왕성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였다. 아마도 왕궁의 성벽 안쪽에 지어진 외부 창고. 그리고 그 바로 앞을 가로막듯 세워져 있는 이 건물은...

'...병영? 막사인가?'

건물 위에 검과 방패가 그려진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것을 보아하니 확실했다. 즉, 상황을 정리해보자면 진석이 지하통로를 통해 올라온 이 건물은 외부의 창고였다. 그것도 왕궁 경비병들을 위한 막사 뒤쪽에 지어진 창고.

'으어억.'

탈출통로를 지나면 곧바로 왕족들이 머무는 왕궁의 본성으로 진입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병영 바로 뒤쪽이라니? 들켰다간 그냥 망하는거다. 아무리 능력치가 높다지만 맨몸에 SP도 바닥. 훈련도도 높고 중무장한 왕실 경비대를 어떻게 다 상대하겠는가? 하나둘도 아니고 수백은 될텐데! 진석은 잽싸게 문을 닫고 창고 안쪽으로 들어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습습후후."

가슴이 쿵쾅거렸다. 갖은 고생을 하고 용을 써서 겨우 왕궁안에 발을 들였나 했더니 이게 뭔가. 막사 바로 뒤? 뭐가 이따위야? 진석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휴..."

이런 상황이라면 이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이대로 잠입을 강행하거나, 어두워질때까지 기다려 틈을 노리는 것이었다. 잠입을 강행한다면 뭐... 적당히 혼자 돌아다니는 경비병이나 시종을 쓰러트려 옷을 빼앗아 입는다거나? 하지만 날도 밝고 안쪽의 구조도 모르니 들킬 확률이 높았다. 어두워질때까지 기다렸다 움직이면 발각될 확률은 낮아질테지만 일몰은 대략 7시 경. 자정까지는 5시간 밖에 남지 않는다.

"또 선택인가. 시간을 아끼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왕궁 본성에 진입을 강행하느냐, 아니면 시간을 소모해서 위험을 줄이느냐..."

진석은 침착하고 왕궁의 구조를 떠올려봤다. 자신도 군주 플레이를 하며 왕성에 오랫동안 기거했었다. 잘 생각하면 대략적인 위치는 파악할 수 있을 터. 당연하지만 중앙에 있는 가장 큰 건물이 왕족이 기거하는 본성일것이다. 왕성의 면적이 여유가 있는만큼 병영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것으로 보아 시종들이 기거하는 숙소나 대신들과 업무를 보는 대전 역시 별도의 건물일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병력의 대다수는 왕성 외곽을 두르고 있는 성벽 부근에 주로 배치되어 있는것으로 추정되니...

'...강행이다.'

어두워질때까지 기다려봐야, 내부 구조를 꿰고있지 못한 이상 자신 역시 어둠속에서 건물들을 파악하는데만도 시간을 낭비할게 뻔하다고 생각됐다. 조금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일단은 하는데까진 해보고 싶었다.

'정 안되면 도망쳐야지 뭐.'

발각된다면 성벽을 넘든 다시 탈출통로를 이용하든 일단 도망쳤다가, 최후의 수단으로 왕궁에 무력을 통한 강행돌파를 걸어본다는 선택기도 있었다. 제이스에게 일러둔 자정의 탈출 방법처럼, 빅본의 인원들을 일부 동원해 왕성 외곽에 적당한 소요를 일으키고 그 사이 허술해진 곳을 틈타 힘으로 돌파해 어떻게든 왕궁에 진입 할 수 있을것 같았다.

'물론 그건 계획이라기엔 너무 무식하고 위험도가 높은 방법이라 절대 하고 싶진 않다만...'

안 된다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뭐 어쩌겠는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 지금 가능한 일이라면 그게 뭐든간에 한 번 시도라도 해봐야 했다.

"...운이 따르길."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문을 열고 조심스레 밖으로 나갔다. 막사 건물을 살펴보니 직사각형 형태로 그 길이는 약 30여 미터. 뒤편으로 뚫려 있는 창문들을 조심스레 피하며 벽 외부로 돌출된 벽돌을 밟으며 건물 위로 타고 올라갔다. 겨우 2층 건물이고 높은 완력과 민첩성을 지닌 몸이다보니 건물을 오르는게 그리 어렵진 않았다. 자세를 낮춘채 지붕을 타고 올라 막사 앞쪽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어디 보자."

바로 앞엔 이 건물과 똑같은 모양의 막사가 한 채 더 있었다. 그리고 막사의 양쪽으론 병영의 본부와 무기고로 보이는 단층 건물이 각기 한 채씩 더. 주변엔 병사들이 두셋씩 짝을 이뤄 막사나 건물들을 꾸준히 드나들고 있었다.

"많은데..."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숫자만 해도 열너댓, 아니 스물은 되겠다. 지붕을 타고 움직이다 조심스레 다시 바닥으로 내려섰다. 우선 제대로 된 옷가지라도 훔쳐 갈아입어야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을 낮춘채 막사 뒤편에 난 창문들로 안쪽을 하나하나 훔쳐보았다. 네번째 방까지는 안에 사람이 있거나, 텅 비어있었는데 다섯번째 방은 커튼이 반쯤 쳐져있었고 안에서 코고는 소리가 났다.

'교대 근무자가 자고 있는건가?'

조심스레 창문을 열고 안으로 살짝 들어섰다. 막사의 방은 2층 침대가 두 개 들어서있는 4인 1실의 구조였는데 그 중 한 칸에 누워있는 병사가 드렁드렁 코를 골며 세상모르고 단잠에 빠져있었다. 방안을 잘 살펴보았더니 구석의 바구니 안에 경비병의 상하의가 걸쳐져 있었고 그 옆엔 벗어둔 부츠도 굴러다니고 있었다.

'좋아.'

진석은 옷과 부츠를 챙겨 밖으로 나온 다음 창문을 닫았다. 입고 있던 반바지를 대충 땅에 묻어버리고 경비병의 제복을 입은 뒤 부츠도 신었다. 무기나 갑옷, 투구는 막사에 들어오기 전 무기고에 반환하는 것 같았지만 일단 이 복장이라면 눈에 띄어도 그리 큰 의심은 받지 않으리라.

'최대한 자연스럽게.'

진석은 막사 뒤편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구석으로 이동하며 본부 건물을 지나 왕궁 중심쪽 큰 건물들이 있는곳으로 향했다. 별 일 없이 무사히 지나온터라 일단은 됐다 생각하는 찰나, 갑자기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거기!"

"......"

뭐지. 들킨건가? 경비병 차림이라도 혼자 돌아 다니는건 수상해 보였던건가? 튀어야되나? 별별 생각을 하며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투구에 갑옷차림, 그리고 손에 창을 쥔 한 병사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진석을 보고 고개를 한 번 갸웃 하더니 머쓱하다는듯 웃었다.

"이거 원. 뒷모습이 옆 소대 친구하고 비슷해가지고 착각해서 불러세웠네. 미안해, 가 봐."

"아... 아아."

미안하다는 듯 살짝 손을 들어보이는 병사에게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해보이고 발길을 돌리는 진석. 가슴이 쿵쾅쿵쾅 미친듯이 두방망이질 쳤다.

'헉! 허억! 헉! 들킨줄 알고 십년감수했네! 망할놈! 으으... 심장 쫄깃해. 수명이 줄어드는 것 같은 기분이다.'

병영쪽을 빠져나온 진석은 중앙부의 건물들로 걸음을 옮겼다. 왕성 중앙엔 세채의 건물이 있었는데 우선 왕족이 기거하는 가장 큰 건물인 본성, 귀족들과 대신들이 공무를 위해 출입하는 대전, 마지막으로 대외업무로 사용하는 공관. 이 셋이었다. 대전과 공관은 서로 마주보고 있었고 본성은 그 뒤쪽에 위치해 있었다. 본성 뒤쪽으론 넓은 온실과 정원이 꾸며져 있는것도 보였다. 귀족이나 왕족의 일원으로 보이는 화려한 차림의 남녀들이 정원의 분수대 주변에서 티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물론 그들을 호위하기 위한 병력들이 정원 주변에 잔뜩 배치되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본성에 들어가야 할텐데... 하지만 본성의 입구도 중무장한 병사들이 지키고 있잖아?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렇게 혼자 돌아다니는 경비병따위 출입시켜주지 않을텐데.'

하여간 하나를 해결하니 또 다른게 문제다. 정면으로 출입하는건 무리일것 같아 슬쩍 본성 주변을 한바퀴 돌며 달리 출입할만한 틈이 없나 살펴보았다. 하지만 달리 뚫을 수 있을만한 길은 보이지 않았다. 본성 건물 우측편 잘 눈에 띄지 않는곳에 큼직한 떡갈나무가 몇 그루 자라있긴 했는데...

'나무를 타고 올라가 창문으로 들어가볼까?'

떡갈나무들이 자라있는 맞은편 3층쪽의 창문이 열려있는게, 잘만하면 뛰어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무와 창문의 거리는 약 3~4미터쯤? 평소라면 이런 위험한 시도는 하지 않을테지만 달리 들어갈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진짜 여러가지 한다. 하다하다 나무까지 타는구나. 끙.'

주변을 살피며 떡갈나무 밑으로 몸을 숨긴 진석. 손에 퉤퉷 침을 뱉은다음 라파가의 숏대쉬로 바닥을 박차고 훌쩍 뛰어올라 나뭇가지에 손을 뻗었다.

'웃차! 오오. 하니까 되긴 되네.'

떡갈나무의 가지가 워낙 굵고 튼실해서인지 의외로 쉽게 나무를 타고 오를 수 있었다. 훌쩍 훌쩍 위로 타고오른 진석은 3층 창문이 눈앞에 보이는 높이까지 다다랐다.

'좋아. 하나, 둘, 셋! 라파가!'

얼마 남지 않은 SP를 소진해 라파가의 돌진력으로 나무를 박차고 창문으로 뛰어들었다. 진석의 몸이 창문으로 쏘아져 들어가는 순간, 눈앞에 왠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으억?!"

"꺗?!"

쿠당탕! 하필 진석이 창문으로 뛰어드는 순간 안쪽에 있던 누군가가 창문쪽으로 다가온 것이다. 진석은 누군지 모를 사람과 부딪혀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크읏... 어?"

바닥에 넘어진 진석은 자신의 안면이 왠지 익숙하면서도 말랑말랑 포근한 감촉에 닿아있다는걸 깨닫고 눈을 떴다. 눈을 떠보니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젊은 여성이 자신 밑에 깔려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여성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자세로. 게다가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어깨와 가슴 부위의 노출을 강조하는 선드레스. 진석이 얼굴을 박으며 옷자락이 당겨진 탓인지 커다란 두 가슴이 드레스 밖으로 튀어나와 그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아야야야... 대체 뭐가... 엇?"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뜬 여성은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박고있던 진석과 눈이 마주쳤다. 잠깐의 침묵. 비명이라도 지를 줄 알고 진석은 순간 식겁했는데 여성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누구세요?"

"...에 그게. 글쎄요."

"그보다 저기 무거운데 좀 비켜주세요."

"아, 이거 죄송."

선선히 자신의 몸을 일으키는 진석. 하지만 여자쪽은 진석이 비켰음에도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말똥말똥 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십수초간 마주보다, 뻘쭘함을 이기지 못한 진석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안 일어나요?"

"그쪽이 잡아줘야죠."

마치 일으켜 달라는듯 누운자세 그대로 이쪽을 향해 양팔만 쭉 뻗어오는 그녀.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얼굴도 예쁘고 가슴도 엄청 커서 보고 있는 내 쪽이야 아이고 감사합니다긴 하지만...'

진석은 여성의 팔을 붙잡고 당겨 자리에서 일으켜줬다. 일어난 그녀는 양팔을 벌려보이며 말했다.

"그러면 먼지도 좀 털어주고, 옷도 가다듬어 주세요."

어서하라는 듯 선선히 진석쪽으로 한 걸음 다가서는 그녀.

"...네? 아, 네."

진짜 이거 뭐하는 여자야? 진석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순순히 그녀의 치마 자락을 팡팡 털어주고 흘러내린 옷자락을 추스려 묵직한 가슴을 다시 옷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정체 모를 금발의 아름다운 아가씨는 외간 남자가 자신의 몸에 손대고 옷까지 되입혀 주는데도 꺼리긴 커녕 당연하다는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돼, 됐습니다."

"응. 수고했어요. 그런데 다시 묻는 질문이지만 그쪽은 누구죠?"

진석이 추스러준 옷 매무새를 훑어보더니 만족스럽다는듯 웃어보이곤 질문을 던지는 그녀. 진석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래... 래스커라고 하는데요."

급한대로 아무 가명이나 대는 진석. 우습게도 자신이 죽인 상대의 이름이었다. 진석은 스스로도 난 정말 작명쪽으론 센스가 꽝이구나 생각했다.

"그렇구나. 만나서 반가워요 래스커. 나는 왕제인 해밀턴 공작의 장녀 레오노르 라고 해요."

레오노르의 소개를 들은 진석은 잠시 멍하니 있다 화들짝 놀랐다.

'...왕제인 공작의 딸이라고?'

왕제, 왕의 동생. 그리고 해밀턴... 해밀턴이라면 바로 진석이 게임을 시작했었던 도시의 이름이다. 그곳을 영지로 보유한 해밀턴 공작이란 자가 바로 왕의 동생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눈 앞에 있는 이 젊고 예쁜 왕가슴 처자는... 그 공작의 딸이라고?

'진짜배기 왕족의 공주잖아! 들켜버렸네? 이, 이걸 어쩌지? 게다가 가슴도 실컷 보고! 아니, 아예 얼굴을 파묻고 옷을 추슬러주면서 잔뜩 만지기까지 했는데! 주... 죽여야 하나? 입막음? 아니아니 지금 내 상황으로 왕궁내에서 누굴 죽이고 시체를 숨긴다는게...'

당황해서 아무말도 못한채 사고가 마비되어 어버버 거리는 진석. 레오노르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래스커는 여기서 뭘 하고 있나요? 왜 갑자기 창문으로 뛰어들었죠?"

글쎄다. 뭐라고 대답 해야 할까. 순수한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레오노르의 눈동자가 진석에게 대답을 채근해왔지만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 진석으로선 도저히 둘러댈만한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식은땀을 뻘뻘흘리는 진석의 모습을 본 레오노르는 뭔가를 착각했는지 혼자 멋대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저한테 쉽게 말 할 수 없는 일인가요? 핫! 그렇다면 혹시..."

"......"

"나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서? 참지 못하고 뛰어든건가요?"

몰라 뭐야 얘 무서워. 아까부터 보여주는 레오노르의 태도는 뭔가 핀트가 이상했다. 그녀의 사고방식은 어째 평범함과는 많이 어긋나 있는 것 같았다. 진석은 에라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 하며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내가 너무 아름다워서! 미안해요... 나는 죄 많은 여자..."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그렇게 중얼거리는 레오노르. 물론 굉장히 예쁘다는건 부정할 수 없었지만 머릿속에 하자가 있는 여자는 거저 줘도 싫다.

'아 진짜 깬다. 공주병이냐? ...아니, 공주 맞잖아. 그럼 뭐라고 해야될까.'

레오노르는 안쓰럽다는 듯 촉촉히 젖은 눈동자를 하곤 갑자기 진석의 손을 마주잡았다.

"약속해요. 절대로! 절대로 날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설하면 안돼요!"

"어... 왜죠?"

"아버지한테 혼쭐날거에요. 저한테 청혼했던 다른 귀족 가문의 수많은 신사분들도 하나같이 아버지 앞에서 호되게 혼났으니까. 그리고 래스커는 옷을 보니 병사죠? 평민 신분?"

"......"

"그러니 아버지에게 들키면 더욱 크게 혼날... 그런데 래스커. 굉장히 잘 생겼네요? 정말 병사 맞나요?"

진석의 손을 마주잡고 얼굴을 들여다보던 레오노르가 환한 표정을 지으며 진석에게 바싹 다가섰다. 무게감 느껴지는 두 가슴이 출렁하며 코앞에 다가든다.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보기좋게 흔들리는 저 큰 가슴을 잠시 보고 있자니... 어째 되려 침착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된거 진석은 사기를 쳐보기로 마음먹었다. 레오노르의 양 어깨에 손을 얹고 그녀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레오노르 님. 잘 들으세요. 사실 저는 일개 병사가 아닙니다."

"그러면요?"

"실은... 저는 자세한 건 알려드릴 수 없지만 세계의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암약하는 어떤 비밀 조직의 일원으로..."

아니아니아니아니.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말을 잘못꺼냈다. 무슨 세살배기도 아니고 이런 개소리를 누가 믿겠냐!

"멋져!"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진석의 손을 한층 꽈악 쥐는 레오노르.

'...믿는거야? 내가 했지만 저런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하긴, 말하는걸 들어보니 아버지인 해밀턴 공에게 엄청나게 과보호 받는 모양이었다. 넘어진걸 일으켜 달라고 하는거나 옷 매무새를 추스르는것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걸 보면 확실했다. 너무 소중하게 길러져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제대로 된 접점조차 가지지 못해, 세상물정조차 잘 모르는 공주님인 모양이었다. 차라리 잘됐다.

"그래서,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거죠?"

흥분한 표정으로 마주 쥔 손을 위아래로 휙휙 흔드는게 진석에게 대단한 흥미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진석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실 새어나올것 같은 웃음을 꾹 참고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금 그란델 왕실이 큰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어라? 왜죠?"

"폭풍의 지팡이... 라고 들어보셨나요?"

"아! 저 알아요 그거. 도트리시가 해신제때 보여준 그거 말이죠?"

해신제 때 폭풍의 지팡이로 폐선을 박살내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그란델 왕자의 이름이 도트리시인 모양이었다.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지팡이는 저주 받은 물건입니다. 그대로 놔뒀다간 그란델 왕가에 큰 불행을 불러올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제가 그 물건을 회수하러 숨어든 것 입니다."

"하지만 몰래 숨어들지 말고 정직하게 말하면 되지 않나요? 이 지팡이는 저주받았습니다 돌려주세요- 하고."

그게 되겠냐 이 밥통아! 머리로 갈 양분이 다 가슴으로 갔냐! 진석은 상식이 없는 레오노르의 대답이 답답했지만 애써 미소를 지어보이며 차분히 말했다.

"저주를 받았다지만 폭풍을 다룰 수 있는 강력한 물건입니다. 제가 솔직히 말한다고 해도 그저 지팡이를 탐내는 악한으로 착각해 다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지요. 그래선 안될 일. 차라리 제가 몰래 가져가 정화시키는것이 모두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납득한건지 오오하며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레오노르.

"래스커는 정말 훌륭하네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이 왕궁의 구조를 잘 모릅니다. 당연히 폭풍의 지팡이가 어디 보관되어있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니 레오노르님이 그란델 왕가를 위해 절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진석의 제안에 레오노르는 양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좋아, 내가 특별히 도울게요!"

"고맙습니다. 레오노르 님은 정말 아름다운데다 정의롭기까지 하시군요!"

나도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 진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적당히 레오노르를 칭찬해줬다. 레오노르는 조금 얼굴을 붉히며 한 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고 당당히 말했다.

"당연하죠! 저는 해밀턴 공작의 장녀 레오노르! 이 제가 옳은일을 행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아 예, 그러믄요. 그러시겠지요. 차마 입밖에 내진 못하고 마음속으로 딴죽을 거는 진석. 하긴 눈 앞의 공주가 바보면 어떠랴. 잘 구슬렸으니 이제 이 여자를 이용하면 왕궁내에 숨겨진 폭풍의 지팡이를 쉽게 찾을 수 있으리. 진석은 자신의 입 앞으로 검지 손가락을 세워 가져다 대며 목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쉿. 이 일은 은밀히 처리해야 합니다. 아무리 의도가 좋더라도 누군가에게 들키면 서로 곤란해질 수 있으니까요. 제 정체에 대해선 함구해 주셔야 합니다."

레오노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석의 말에 순순히 동의했다.

"그렇군요. 알았어요. 그러면 이제부터 뭘 하면 되죠?"

"음... 그렇지. 단도직입적으로 폭풍의 지팡이가 왕궁 어디에 숨겨져있는지 아시나요?"

"아뇨. 모릅니다."

"......"

시원스럽게 대답하며 방긋방긋 웃는 레오노르. 순간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며 한 대 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러면... 숨겨져 있을거라 짐작갈만한 장소라도?"

"글쎄요. 어디 있을까요?"

평소 제이스에게 촙을 먹이듯 손이 올라갈뻔한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정말로 한 대 칠 뻔 했다. 팔짱을 끼고 음~ 흠~ 하며 뭔가를 한참 생각하던 레오노르는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도움이 될만한게 생각났어요!"

"그런가요? 어떤거죠?"

"으음. 말로 하기는 어려우니까... 절 따라오세요!"

그러더니 진석의 손을 붙잡고 무작정 방 밖으로 이끌기 시작하는 레오노르. 진석은 어어 하면서도 그녀에게 끌려갔다.

'어라... 이거 이래도 괜찮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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