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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44화 (44/155)

< --   - 3.   -- >         * 44화 *

레오노르는 진석을 이끌고 방을 나가 복도를 조금 걷더니 멀리 가지 않고 바로 옆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순순히 레오노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는 진석. 안은 방금가지 레오노르가 있던 방보다 좀 좁고 소박했는데, 방 한 가운데의 테이블에 화려한 갑옷을 걸친 여기사 셋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방으로 들어온 레오노르와 진석을 바라보았다. 레오노르는 진석을 향해 방긋 웃어보이더니 여기사들쪽을 향해 진석의 등을 턱 떠밀었다.

"엇...?"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레오노르를 바라보는 진석. 허나 레오노르의 얼굴은 방금까지의 세상물정 모른다는 순진한 공주님의 그것이 아니었다. 생판 딴 사람이 된 듯 싸늘한 표정으로, 딱 잘라내듯 말했다.

"침입자입니다. 체포하세요."

"뭣?!"

기겁하는 진석. 설마, 설마! 방금까지의 그 멍청한 모습이... 전부 연기였단 말인가?! 뒤에서 여기사들이 일어나 무기를 뽑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오노르는 진석을 향해 흥 코웃음을 쳤다.

"놀랐습니까? 내가 머리가 텅 빈 바보인 줄 착각하셨나요? 그렇다면 진짜 바보는 그쪽이군요. 대 해밀턴 공작가의 장녀가 설마 세상물정도 모를거라 생각했습니까? 너무 감쪽같이 속아줘서 이쪽이 되려 고마울 정도군요."

세상에. 진석은 진짜로 완벽히 속았다. 눈 앞의 공주가 정말 세상물정도 모르는 머리 빈 여자라고 믿어버렸던 것이다. 허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레오노르 공주의 연기는 엄청나게 현명한 판단이었다. 왕궁의 창문으로 침입해온 낯선 사내라면 당연히 뭔가를 노리고 침입한 불한당일 확률이 높을터. 게다가 방금전 레오노르 공주 본인은 옆에서 도와줄 사람도 없는 홀몸. 섣불리 저항한다거나 비명이라도 질렀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차라리 멍청함을 가장해 상대에게 협력적으로 보인다면, 아무 피해를 입지 않고 되려 이렇게 함정으로 밀어넣을 수도 있을터! 그 짧은 순간에 그런 계산을 내리고 실제로 완벽히 행동에 옮겼다는거 아닌가? 특히 가슴이 드러난것 조차 부끄러워 하긴 커녕 아무렇지 않은듯 태연히 대처한 연기력은 정말 일품이었다.

"꼼짝마라!"

"무릎 꿇어!"

장검을 뽑아든 세 여기사는 진석을 빙 둘러싸고 항복을 종용해왔다. 한낱 NPC에게 완전히 속아넘어간 진석은 패배감에 치를 떨었다. 자신은 어째서 공주는 멍청하다는 고정관념 같은걸 가지고 있었던가? 누가 가슴 큰 금발녀는 멍청하다고 그랬어? 이 꼴이 뭐냐고 이게! 레오노르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진석을 향해 차가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죽이진 마세요. 배후를 캐봐야 하니까. 폭풍의 지팡이를 노린 것을 보아하니 의심스러운게 한두군데가 아니거든요."

"시클론!"

레오노르 공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석은 시클론을 사용했다. 긴 탈출통로를 지나며 연신 화염화살을 써왔고, 조금 전엔 나무에 오르고 건물에 뛰어드느라 라파가까지 2연속으로 사용했다. 달리 SP가 회복될 시간이 없이 계속 기술을 써왔기 때문에 현재 남은 SP라곤 달랑 10! SP를 초당 1씩 소모하는 시클론은 앞으로 딱 10초 가량 쓸 수 있었다. 이 10초 안에 승부를 내야한다!

"핫!"

레오노르 공주가 죽이진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지 정면에 서 있던 여기사는 진석의 무릎 아래를 노리고 장검을 찔러왔다. 제법 검술에 능한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이었지만 시클론을 사용한 지금의 진석에겐 느려터진 춤사위나 다름없었다. 찔러오는 검날을 밟고 뛰어오르며 여기사의 턱을 힘차게 올려찼다. 어지간하면 여자의 얼굴에 발길질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인 이상 이거저거 가릴때가 아니다!

"커헉!"

발차기에 맞은 여기사가 나가 떨어지자 뒤쪽에 서 있던 두 여기사들이 깜짝 놀라 달려들며 동시에 진석의 등 뒤를 베어왔다. 호흡이 착착 맞는 훌륭한 연수합격! 하지만 진석은 그대로 백덤블링을 하며 교묘하게 두 검날의 호선을 피해, 되려 여기사들의 배후를 점했다.

"타아!"

그리고 양 팔을 든채 앞으로 달려들며 막 뒤를 돌아보는 두 여기사의 관자놀이께를 장타로 후려쳤다. 동시에 가해진 일격에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바닥으로 쿠당탕 나가떨어지는 두 여기사들. 세 명의 여기사는 전부 일격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진석은 잽싸게 바닥에 떨어진 장검을 주워들곤 놀란 얼굴로 제자리에 서있던 레오노르 공주의 목에 가져다 댔다.

"체크메이트."

여기까지 정확히 10초. SP가 0이 되며 시클론의 제한시간이 다했다. 레오노르 공주는 자신의 눈 앞에서 일어난 짧은 사투가 믿기지 않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마, 말도 안돼. 내 호위 기사들을 이렇게 순식간에..."

"밥값 못하는 호위 기사군. 자!"

"꺄앗!"

진석은 레오노르 공주의 손목을 붙잡고 방 안쪽으로 끌고 가 구석에 넘어트렸다. 분노에 찬 표정으로 진석을 올려다 보는 공주.

"당신 참 대단하군 레오노르 공주. 정말 감쪽같이 속았어. 낯선 남자에게 가슴을 훤히 드러내보이고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는걸 보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공주라고 철썩같이 믿어버렸단 말이지."

"흥. 무례한... 그깟 속살 보이는 것 쯤 대수일성 싶은가? 지금이라면 여죄를 묻지 않을테니 조용히 물러가라!"

"오오. 이제서야 뭔가 좀 공주님 같군."

까닥까닥 장검의 끄트머리를 흔들어 레오노르 공주의 치맛자락을 들어올리는 진석.

"하찮군. 이까짓 행동으로 내게 모욕을 줄 셈인가?"

"뭐 아까 속은게 열받기도 하고 그럴셈인데."

진석의 말에 눈을 가늘게 치켜뜨는 레오노르 공주.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선선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욕망에 솔직한 남자군. 그렇다면 차라리... 우리측에 고용되는게 어떤가? 그대의 고용주가 누구였는지 따윈 묻지 않겠어. 얼마를 받았는진 모르겠지만 그만한 실력이라면 두 배를 내지."

"...허?"

"돈으로 부족한가? 뭣하다면 여기 쓰러져 있는 쓸모없는 여자들도 다 그쪽에게 주지. 맘대로 부리거나 품어도 좋아. 차라리 당신을 내 호위로 쓰고 싶으니 말야."

궁지에 몰렸음에도 태연하게 스카웃 제안을 해온다. 이 패턴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일전 제이스에게도 슬쩍 틈을 보여주니 교단에 합류하라며 필사적인 설득을 해왔었다. 하지만 이 공주는 제이스보다 몇 배는 대담하다. 진석이 욕망을 조금 드러내자 바로 그 점을 공략하며 협상을 걸어온다. 이미 교단에 합류한 몸만 아니었다면 바로 응낙하고 싶을 정도다. 벙찐 진석이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스스로 치맛자락을 살짝 걷어보였다. 도발적인 몸짓이었다.

"아니면... 역시 내가 품고 싶은건가? 아깐 당신을 속이려고 멍청함을 가장해 내뱉은 말이긴 하지만 뭐 솔직히 내가 아름답진 하지. 딱 한 번 정도라면... 응해줄수도 있어. 나도 순진해빠진 처녀는 아니니까."

뭐야 이 여자는? 공작가의 장녀이자 왕족임에도 자신의 몸마저 바로 협상의 카드로 내건다. 이렇게까지 나오니 되려 진석이 무서워질 정도다. 게다가 공주의 신분이면서 자기 입으로 처녀가 아니라고 밝히는게 더 충격적이다. 이전 군주와 장수 플레이때 정치에 발을 담궈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독하게 나오는 여자는 처음본다. 이런 타입은 적으로 만들면 아주 골치아플 타입이다. 애당초 척을 지지 말거나 차라리 죽여서 후환을 없에야 할 상대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자. 대답은?"

도발적인 눈웃음을 지어보이며 혀로 입술을 살짝 핥아보이는 레오노르 공주. 이건 뭐 요사스러울 정도의 분위기를 팍팍 풍기는게 공주가 아니라 숫제 고급 창부라고 해도 믿겠다. 도저히 아까 옆방에서 멍청한 소리를 할때와 같은 사람이라는걸 믿을 수 없었다.

'으으 솔직히 지금 당장은 교단의 일이고 뭐고 레오노르 공주랑 질펀하게 뒹굴고 싶다. 하지만...'

진석은 바닥에 장검을 툭 떨궜다. 그 모습을 보고 협상에 응한것이라고 생각한 레오노르 공주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진석에게 다가와 목을 끌어안았다.

"현명한 선택이야. 자 그럼... 여기서 바로? 가능하다면 아까의 옆방으로 돌아가서 하고 싶은데."

"착각이 심하군."

"뭣... 흐윽!"

왼손을 뻗어 레오노르 공주의 목을 죈채 벽으로 밀어붙이는 진석. 압도적인 완력에 공주는 아무 저항도 못하고 벽에 밀어붙여졌다.

"크윽... 시, 실수하는 거야... 당신!"

"별 걱정을. 나도 내 얼굴을 본 상대를 살려둘 생각은 없으니까. 저 기사들도 곧바로 당신 뒤를 따르게 해줄테니 저승에서도 수발 들어줄 시종 걱정은 말라고."

꾸욱. 한층 손에 힘을 주는 진석. 숨통이 막힌 레오노르 공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양 팔다리를 버둥대며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그녀. 하지만 무력 46의 힘 앞엔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숨이 막히는 고통에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레오노르 공주의 눈빛이 흐려진다 싶을때쯤, 진석은 손에 쥔 힘을 풀었다.

"커허억! 쿨럭! 헉! 허억... 무슨... 짓... 쿨럭!"

기침을 하며 숨을 몰아쉬는 레오노르 공주. 진석은 자신을 향한 원망섞인 눈빛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며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폭풍의 지팡이. 어디있지?"

"헉... 허억... 아, 알려주면 살려줄건가?"

"지팡이의 위치를 알려주고 수배를 걸지 않는다면야."

레오노르 공주는 분한 표정을 지으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의 입에서 의외의 이야기가 새어나왔다.

"왕당파에게... 그 지팡이가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 당신따윈 모르겠지..."

'왕당파?'

그러고보니 그란델 왕국은 귀족들의 세가 강한 나라다. 분명 정보상 피터슨도 귀족들의 파벌이 갈려 있다느니 어쩌니 했었는데... 아무래도 폭풍의 지팡이를 놓고 뭔가 정치적인 알력다툼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진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딴건 내 알바 아니다."

어느정도 호흡의 안정을 되찾은 레오노르 공주는 조금 냉정해진 얼굴로 진석을 바라보았다.

"당신... 다른 귀족에게 사주를 받고 온게 아니었군."

"내가 한낱 귀족 나부랭이 따위의 졸개로 보였단 말인가? 뭐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러던가. 그보다 어서 지팡이의 위치나 말해."

"큿..."

고민하는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무는 레오노르 공주. 머릿속으로 뭔가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진석은 공주의 눈 앞으로 왼손을 들어보였다. 흠칫 놀라며 뒤로 한걸음 물러나는 그녀.

"자, 잠깐! 알았어. 거래를 하자."

"...또 속아서 함정에 빠지고 싶진 않은데?"

스윽. 진석의 손이 벽에 바싹 붙어있는 레오노르 공주의 목을 살짝 쥐었다. 그녀는 눈을 꾹 감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아냐! 정말이야! 폭풍의 지팡이는 내가 직접 넘겨줄테니, 대신 지금 대전에 있을 가네딘 후작을 죽여줘!"

"......"

가네딘 후작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보나마나 해밀턴 공작이 속한 왕당파와 반대되는 세력의 우두머리이리라. 자기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에서도 지팡이의 향방을 걸고 어떻게든 거래를 제시해오는 레오노르 공주의 필사적인 모습이 어쩐지 싫진 않았다.

'대단하네. 여장부인걸.'

평범한 여자였다면 방금 목 한 번 조른것 만으로도 목숨의 위기를 느끼고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텐데. 실제로 에나를 굴복시킬때도 같은 방법을 썼었다. 목을 조르는것 만큼 직접적이고 알기 쉽게 목숨을 위협하는 방법은 또 없었으니까. 하지만 진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귀찮은데. 지금 당장이야 네 목숨이 위험하니 거래입네 뭐네 해놓고 결국 나중엔 내 수배나 걸겠지. 그냥 널 죽이고 내가 직접 지팡이를 찾아보는게 안전할 것 같은데?"

"틀려. 폭풍의 지팡이가 보관된 금고는 특제야. 그란델 왕가의 혈족만이 열 수 있는 특수한 마법이 걸려있단 말이야!"

"뭐?!"

눈에 살기를 담아 노려보는 진석. 하지만 움찔거리면서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마주보는 레오노르 공주. 이 태도를 보아하니 그녀의 말이 아마 거짓말은 아닌것 같았다.

'모르지. 가슴을 훌러덩 내놓고도 눈 하나 깜짝 안하던 여자니. 이래놓고 또 속이는걸지도 모르지만...'

진석은 공주의 목을 붙잡고 있던 손을 내려놓고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폭풍의 지팡이를 넘겨 줄테니 대신 가네딘 후작을 죽여달라라... 뭐 그 후작 나으리가 옆에 호위를 얼마나 달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어느정도 거리까지 접근 할 수만 있다면 단검 투척 한 방 날려놓고 튀면 되는걸. 금고에 왕족만이 열수 있는 특별한 마법이 걸려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여기서 레오노르 공주를 죽이는게 손해이기도 하고...'

후우. 짧은 한숨을 내쉰 진석은 결국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뭐 좋아. 가네딘 후작을 죽여주지. 대신 지금 물어보는 질문에 아는대로 정직히 대답해라."

바짝 긴장하고 있다 진석의 승낙이 나오자 안도의 표정을 짓는 레오노르 공주.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당차게 협상을 걸어오긴 했지만, 그녀도 바짝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이런 상황에서 긴장하지 않는것이 더 이상하겠지. 레오노르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지."

"우선 왕궁내 폭풍의 지팡이의 위치. 그리고 가네딘 후작의 호위 숫자. 후작에게 이 병사의 옷을 입은채로 얼마나 접근 할 수 있는지도."

흠 하고 목청을 가다듬은 레오노르 공주는 차분한 어조로 진석의 질문에 대답했다.

"지팡이는 왕성 5층의 금고실에 있어. 왕가의 귀중품들을 보관해두는 전용 금고방이지. 나라면 당신을 데리고 안에 들어가 지팡이를 꺼내 줄 수 있으니 걱정마. 그리고 가네딘 후작의 호위는... 내가 알기로 사병이 대략 삼십 가량. 하지만 일반 사병은 왕성 내부로 못들어와. 사병들은 왕성 입구쪽의 대기소에 모여 있을테니 왕성 내에 대동하고 들어온 숫자는 아마 호위기사로만 예닐곱쯤? 대전 내에선 수행 인원이 두 명으로 제한되므로 나머지 기사들은 대전 1층의 로비에 모여 있겠지. 대전 내부에서 승부를 본다면 상대는 호위기사 두 명, 대전 밖에서 노린다면 여섯에서 일곱이겠네."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막힘없이 늘어놓는 레오노르 공주.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는 계속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 말인데, 일반 경비병이 대전에 드나드는 일은 거의 없으니 대전내에서 그 병사차림으로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의심받을지도 몰라. 대전안에서 처리를 할거라면 하급 문관의 차림을 하는게 나을지도. 하지만 대전 밖에서라면 일반 경비병이 많이 돌아다니니 상식적인 거리까지는 다가가도 별 상관없을거야."

술술 설명을 해나가는 레오노르 공주의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아름답고, 똑똑하고, 담력도 있고... 결정적으로 가슴이 엄청 크다. 단순히 큰것뿐만 아니라 처지지도 않았고 밸런스도 좋다. 정말 맘에 드는 가슴이다.

'아 자꾸 가슴을 의식했더니 갑자기... 땡기네. 아랫도리가.'

아까 거짓말로 수하가 되는척 해서라도 레오노르 공주를 한 번 안을걸 그랬나? 아니, 아니지. 정신 차리자. 조금만 더 나아가면 폭풍의 지팡이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정말 무슨 원숭이도 아니고 성욕이라는 본능에 져서 일을 망칠 순 없다. 섹스라면 나중에 제이스와 실컷 할 수 있다! 몸도 마음도 공략이 끝난 제이스를 상대로는 이런짓 저런짓 내키는대로 다 할 수 있다!

"...좋아, 믿지. 하지만 지팡이를 먼저 받아야겠어."

진석은 쓰러진 기사 중 한 명의 허리춤에서 검집을 끌러 자신의 허리춤에 차고, 장검을 주워 꽂아넣었다. 그리고 레오노르 공주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앞장서. 수상한 행동을 하면 뒤에서 바로 목을 베어버린다. 내 솜씨는 아까 봐서 잘 알테지? 쓸데없는 짓은 안 하는게 좋을거야."

"알아. 나도 이런식으로 죽고 싶진 않으니까. 그보다 당신이야말로 지팡이를 넘겨받자마자 도망가지 않아줬으면 좋겠는데? 그건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물건이니까. 솔직히 가네딘 후작의 목을 떨어트린다고 해도 부족해."

지지 않고 대꾸하는 레오노르 공주. 진석은 어째선지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까 날 감쪽같이 속인게 너무 충격적이라 그런가... 어째 이 공주 되게 마음에 드는데? 만약 교단에 가기전에 이 여자를 먼저 만났더라면, 어떻게든 공략해보려고 온갖 용을 쓰고 있었을지도? 그런데 중요한건 이미 처녀가 아니라니! 공주잖아? 공주인데도! 우째서! 자고로 아름다운 공주님이라면 남자들의 으흐흐한 판타지를 충족시켜줄 의무가 있지않나? 없나? 에잇 몰라 젠장. 그나저나 먼저 깃발꽂고 간 그 잘난놈은 대체 누구야?'

공주를 따라 계단을 오르며 별 실없는 생각을 하는 진석.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오르는동안 하녀나 시종을 각기 한 번씩 마주쳤지만 그쪽에서 먼저 가볍게 목례하고 지나갔을 뿐 별 일은 없었다. 이내 최상층인 5층에 오르자 레오노르 공주가 진석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쪽 복도 끝이야. 근위 기사와 병사 두 명이 지키고 있는데, 혹시 당신에게 말을 걸어도 쓸데없이 대답하지마.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그러지."

근위 기사와 병사 둘이 있다는 말에 진석은 조금 긴장했다. 아까처럼 그들에게 자신을 공격하게 만들지도 몰랐으니까. 물론 자신이 겨우 세 명을 상대로 질리는 없지만 지금은 SP도 거의 없는 상황. 혹 그들과 자신을 싸움 붙여놓고 그 소란을 틈타 공주가 도망가서 병력을 더 불러오기라도 한다면 곤란해진다. 잠시 레오노르 공주를 따라 복도를 걷다, 모퉁이에서 꺾고보니 바로 커다란 문이 하나 보였다.

"아, 레오노르 공주님."

문 앞에서 금고실을 지키며 서있던 젊고 건장한 체격의 근위기사가 레오노르 공주를 먼저 알아보고 목례를 해왔다. 양 옆에서 단창을 들고 근무를 서던 두 병사는 경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안에 볼 일이 있습니다. 열어주세요."

"네. 그런데 뒤쪽의 그 병사는?"

근위기사는 레오노르 공주의 뒤에 멀뚱히 서 있는 진석을 가르키며 질문을 해왔다. 레오노르 공주는 별 것 아니라는듯 가볍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짐꾼삼아 데리고 왔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길."

"그렇군요. 이봐, 문을 열게."

"옛!"

병사들은 주머니에서 각자 열쇠를 꺼내더니 문 양쪽의 구멍에 집어넣고 타이밍을 맞춰 동시에 돌렸다. 일부러 혼자서는 열 수 없는, 둘 이상이 동시에 협력해야 열리는 구조로 만들어 둔 것 같았다. 철컥하고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나자 병사들은 양쪽에서 문을 잡아당겨 금고실을 개방했다. 끼이익 하고 서서히 열리는게 문의 무게만도 제법 나가는 모양이었다.

"들어가시죠."

안쪽으로 길을 터주는 근위기사. 레오노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진석도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둘이 금고실 안으로 들어가자 병사들은 다시 문을 닫았다. 쿠웅. 문이 닫히는 묵직한 소리가 퍼져나갔다. 문의 두께를 보아하니 이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밖에선 눈치채기 힘들 것 같았다.

"호오..."

금고실이라는 말이 어울리게, 안쪽은 각양각색의 금고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온갖 종류의 금고를 모아놓은 작은 금고 전시장 같았다. 고작 주먹만한 크기의 작은 금고부터 사람이 들어갈만한 큼직한 것도 있었다. 눈 앞에 있는 금고의 갯수만 어림잡아도 백여개는 가볍게 넘어갔다. 휘익 휘파람을 부는 진석.

"이거 대단한걸. 이 금고들 안에 전부 무언가 들어있는건가?"

레오노르 공주는 고개를 저으며 금고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럴리가. 대부분은 눈 속임용 전시품이야. 이쪽이야, 따라와."

공주는 금고들이 쌓여있는 안쪽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진석도 군 말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금고실 맨 안쪽까지 들어간 그녀는 한쪽 구석에 멈춰서서 발로 카펫이 깔려있는 바닥을 탁탁 두드려보았다.

"뭐하는거야?"

"잠깐 기다려봐. 이쪽... 아니, 이쪽이었나?"

몇 번 바닥을 두드리며 움직이던 레오노르 공주는 이윽고 한 자리에 멈춰서서 바닥에 깔린 카펫을 살짝 걷어냈다. 그러자 그 아래 바닥에 일체형으로 붙어있는 금고의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쪽에 작은 원판같은게 달려있는 희한한 모양의 금고였다.

"이게 진짜야. 이 원판에 왕족의 피를 떨어트리면 열리지."

그렇게 설명한 그녀는 갑자기 치맛자락을 걷고 자신의 허벅지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진석은 저 공주님이 갑자기 뭘하는건가 의아해 했는데, 그녀는 잠시 뭔가를 꼼지락 거리더만 이내 치마 안쪽에서부터 작은 나이프를 하나 꺼내들었다. 이전에 진석이 아르데나에게 사준 본 나이프와 비슷한 크기였다. 진석은 감탄했다.

"허... 그런곳에 호신용 무기를 숨겨놨을 줄이야."

레오노르 공주는 호신용 나이프를 손에 들고 진석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지었다.

"뭘, 숙녀의 소양이지. 사실 아까 당신이 내 제안에 넘어가 날 안으려고 했다면 틈을 봐서 이걸로 물건을 찔러주려 했어. 찔리기 전에 찌른다... 랄까. 당신 실력은 솔직히 탐나긴 하지만 그렇다고 소중한 첫경험까지 줄 순 없었으니까. 고용주가 될 수 있는 쪽의 몸을 탐내다니? 그 정도로 욕심이 많은 자는 고용해봐야 반드시 해가 될 뿐. 그리고 난 공작가의 장녀이자 이 나라의 정당한 왕족. 정체모를 남자에게 함부로 몸을 내줄 정도로 싸지 않다고?"

"...아까와는 뭔가 이야기가 다른데? 처녀 아니라며?"

"그럼 당신 또 속았네. 정말 순진한걸? 처녀만큼이나 순진하네."

후후후 하고 진석을 비웃으며 자신의 손 끝을 나이프로 살짝 베어 그 피를 금고의 위에 달린 원판 위로 떨어트리는 레오노르 공주. 이야 이 공주 정말 물건은 물건일세? 진석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사이 피를 머금은 원판은 환하게 빛나더니 뭔가 철커덕 철커덕하는 구동음을 냈다. 곧 쉬익 하고 바닥에서부터 금고가 솟아올랐다.

"거 신기하네. 무슨 장난감같은데."

"장난감이라니! 비싼 금액을 들여 특별히 주문한 특제 마법 금고인데."

금고의 문을 열고 안쪽에서 두뼘쯤 되는 짤막한 지팡이를 꺼내는 레오노르 공주. 나무의 가지를 대충 깎아만든것 같은 그 지팡이의 끝엔 달걀만한 크기의 푸른색 보석이 박혀있었다.

"그게 바로..."

"그래. 이게 신기라고 불리우는 폭풍의 지팡이야. 그 이름 그대로, 폭풍이라는 자연재해를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무기지."

설명을 하던 레오노르 공주는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지팡이의 끝을 진석쪽으로 향했다.

"너...!"

"당신, 래스커라고 했지? 어차피 가명일테지만. 아무튼 이걸로 당신은 내 손에 한 번 죽은거야."

그러더니 금고를 바닥에 밀어넣곤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레오노르 공주. 카펫을 잘 덮어 금고가 있는 자리를 가리곤 진석에게 다가와 지팡이의 손잡이를 내밀었다.

"내가 이 지팡이를 쓸 수 있었다면 말이지."

"......"

정말 끝까지 대단한 공주님이다. 공주에게서 지팡이를 받아드는 진석. 아무래도 지팡이를 쓰려면 뭔가 특별한 조건이 있는듯 했다. 진석은 지팡이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 폭풍의 지팡이

공격력 : -

설명 : 폭풍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전설의 마도구. 단, 마법을 한 가지 이상 익힌 자만이 사용 할 수 있다. 폭풍을 소환 할 시 사용자의 능력치를 랜덤하게 영구 감소시킨다. 능력치의 감소량은 폭풍의 범위와 지속시간에 영향을 받는다.

특징 : [마도구], [사용제한 - 마법 스킬 보유], [폭풍 소환 가능], [사용시 능력치 영구 감소]

'희한한 물건이군... 하긴 이건 평범한 무기가 아니라 기상을 제어 할 수 있는 마도구니까.'

레오노르 공주는 지팡이를 쓸 수 없다고 한 걸 보니 마법을 익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부족할거 하나 없는 공주님이 뭐에 쓰겠다고 마법 따윌 익히겠는가. 마법을 익힌 아랫사람을 부리면 되는걸. 게다가 이 지팡이로 폭풍을 소환하면 랜덤하게 능력치가 영구 감소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큰 힘에는 큰 댓가가 따른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물건이었다.

'그렇다면... 어, 뭐였더라? 그 도토리인지 도시락인지 하는 왕자는 사실 마법사이고, 자신을 희생해서 이걸 한 번 사용했다는 이야기군. 미리안은 바보짓이라 저평가 했고, 피터슨은 두 번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을 물건이라 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둘 다 맞는 말이네. 자신의 능력을 영구히 갉아먹는 무기를 일국의 왕자라는 신분으로 직접 휘두르다니, 아무리 계획을 세워서 한 일이라 한들 차후 일국의 왕이 될 입장으로선 분명 바보짓이다. 게다가 이렇게 능력을 빨아먹는 무기를 마구 남발 할 수는 없을테니 정말 중요한 때가 아니라면 이걸 꺼내 쓸일은 없을터. 그런 의미로 보자면 피터슨의 말도 분명 맞다.'

진석이 지팡이를 받아들고 한참 들여다보고 있자 레오노르 공주는 진석을 채근했다.

"자. 나는 약속대로 폭풍의 지팡이를 넘겨줬어. 이제 당신이 약속을 지킬 차례야."

공주의 말에 정신을 차리는 진석. 품속에 지팡이를 잘 집어넣고,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래. 나도 약속을 지키도록 하지. 그전에 아까 그 나이프 좀 빌렸으면 싶은데."

"이 나이프를? 무기라면 허리에 찬 장검이 있잖아. 그게 더 유용할텐데."

"내 주무기는 원래 단검이야. 이런 장검따위 잘 못 다룬다고. 대신 그 나이프를 넘겨주면 그걸로 가지였나 각다귄가하는 후작의 목숨을 끝장내주겠어."

진석의 설명에 레오노르 공주는 아핫 하고 크게 한 번 웃더니 한 걸음 다가와 진석의 손에 나이프를 꼭 쥐어주었다.

"그렇다면 흔쾌히 넘겨주지. 아니, 내가 꼭 부탁하겠어. 반드시 이걸로 놈의 목숨을."

도발적으로 빛나는 두 눈. 생기가 넘치는 레오노르 공주의 표정은 어째서인지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진석은 순간 뭐에 홀린듯 자신도 모르게 눈 앞의 공주에게 기습적으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읏!?"

팍 하고 진석의 가슴팍을 거세게 밀쳐내는 레오노르 공주. 그 얼굴엔 갑자기 일어난 일에 대한 당혹감이 가득 차 있었다.

"무, 무슨짓을...! 이제와서 약속을 깨고 여기서 날 범하기라도 하겠다는거야?"

"...아, 아니.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미간을 찌그러트리고 울상을 지은채 주머니에서 프릴이 달린 손수건을 꺼내어 입술을 박박 문지르듯 닦는 레오노르 공주.

"뭘 또 그렇게 더러운거 묻은양 유난을..."

"첫키스였단 말이야!"

"......"

바락 큰 소리를 지르는 레오노르 공주. 파르르 떨리는 눈가에는 눈물이 약간 고여있었다.

'...음, 그러고보니 처녀랬지. 내가 사고를 쳤구나. 으허허허허.'

"...가! 어서 가서 약속대로 가네딘 후작이나 죽여버려!"

레오노르 공주는 손수건을 바닥에 집어던지고 뒤돌아선채 씩씩거리며 소리 질렀다. 그 목소리엔 적으나마 물기가 섞여있었다. 후우 한 숨을 내쉰 진석은 공주를 남겨두고 금고실을 빠져나갔다.

"알겠다, 레오노르 공주. 언제고 인연이 된다면 또 만났으면 좋겠군."

"볼 일 없어! 당장 꺼져!"

노기 섞인 날카로운 음성이 금고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진석은 더 이상 아무말 못하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날 일몰 즈음. 그란델 왕궁에서는 대소란이 일어났다. 업무를 마치고 대전을 빠져나와 출궁하려던 가네딘 후작에게 복면을 뒤집어쓴 경비병 차림의 사내가 다가와 나이프를 집어던져 살해하고 어디론가 유유히 도주해버린 것이다. 귀족들의 거두 중 하나인 가네딘 후작이 저잣거리도 아닌, 엄중한 경비체계가 유지되는 왕궁내에서 암살당한것이다! 감히 왕궁내에서 대귀족을 시해하는 일이 벌어지다니? 그란델 건국 역사상 다시 없을 대사건이었다. 왕궁뿐만 아니라 수도 전체가 발칵 뒤집혀 난리가 났지만 결국 범인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남아 있는 유일한 증거라곤 가네딘 후작의 미간에 박힌 작은 나이프 뿐. 그나마도 출처를 전혀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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