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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45화 (45/155)

< --   - 3.   -- >         * 45화 *

진석이 생각보다 이른시간에 무사히 왕궁에서 빠져나온 덕에, 기껏 탈출시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 준비 시켜놓았던 빅 본의 조직원들은 그냥 되돌려보냈다. 이후 다함께 호텔방에 되돌아온 진석과 제이스, 아르데나. 제이스는 진석이 훔쳐내온 폭풍의 지팡이를 손에 쥐고 생일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마냥 촐싹대며 좋아했다.

"대단해! 정말로! 너무 훌륭해! 도대체 무슨수로 혼자 왕궁에서 폭풍의 지팡이를 무사히 탈취해 온거야? 게다가 가네딘 후작이었나? 그 양반 죽은걸로 지금 도시 전체가 난리도 아니던데 그것도 러셀이 한거지? 아니 뭐 그딴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이거 진짜 엄청난 물건인걸! 대신관님도 분명 기뻐하실거야!"

마도구 감정의 스킬을 지니고 있는 제이스는 폭풍의 지팡이가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그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신이 나서 떠들어 댔지만 소파에 길게 뻗어있던 진석은 골골 앓는 소리를 냈다.

"으... 자세한건 묻지마. 힘들어 죽는줄 알았네. 말할 기운도 없다."

게임이니 현실처럼 몸이 막 힘든것은 아니었지만 하루종일 워낙 여러가지 일이 있었으니 정신적으로 피곤했다. 금고실에서 레오노르 공주와 헤어진 진석은 이후 곧바로 왕성을 빠져나가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의 입구에도 경비병력이 있었고 1층의 로비엔 여러 귀족들이 데려온 호위기사들이 넘쳐날 정도로 있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용무가 있어 온 병사처럼 대담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레오노르 공주는 눈에 띌지도 모른다고 했었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흔한 경비병 차림인 진석에게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높은 성벽이 둘러져 있고 수많은 병사들로 빈틈 없이 지키고 있는 왕궁 안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의외의 맹점이랄까? 무사히 안으로 들어간 진석은 지나가는 하급 문관을 붙들고 마치 용무가 있어 온 병사처럼 자연스레 대전의 업무가 끝나는 시간과 가네딘 후작의 위치를 물어 확인했다. 이후엔 인적이 뜸한 어느 서류보관실에서 몸을 숨기고 기다렸다. 그대로 수시간, 얌전히 휴식을 취해 SP를 어느정도 회복시켰다.

그리고 업무를 마친 귀족들이 대전을 빠져나가기 바로 직전 미리 밖으로 나가 가네딘 후작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와중 옷자락을 적당히 찢어 복면으로 만들어서 머리에 뒤집어 쓰고, 대전에서 빠져나온 가네딘 후작의 근처로 다가가 머리를 겨냥해 냅다 나이프를 집어던졌다. 그리곤 시클론과 라파가를 이용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죽어라 병영의 막사 뒤편으로 튀었다. 마침 시간도 일몰 이후라 주변이 어둑해져서 적당히 몸을 숨기며 도망가기 용이했다. 무사히 창고 지하에 도달한 진석은 그대로 철판을 닫으며 아래로 뛰어내려, 어두운 수 km의 탈출통로를 미친듯이 질주했다. 뭐가 있을지 몰라 천천히 나아가던 낮과는 달리 아무것도 없는 일자 통로라는걸 알고 있었으므로 진석의 행동은 신속했다. 너무 달려서 체력이 소진되는것도 무시하고 화염화살로 길을 밝히며 거침없이 달렸다. 그리고 해안 절벽에 도착한 진석은 그대로 경비병 옷을 벗어던지고 바다로 다이빙. 해변가까지 겨우겨우 헤엄쳐 돌아간 다음 지나가던 행인을 기절시켜 옷을 빼앗아 입고 호텔로 돌아왔다.

'아 오늘은 일을 너무 많이 했어. 해안 절벽에서 무기를 홀랑 잃어버린 것 부터 시작해서... 통로를 지나다 산성액을 뱉는 몬스터랑 싸우기도 하고, 기껏 통로 입구에 다다라 철문을 연답시고 쇠말뚝을 박으며 난리를 치고... 경비복을 훔쳐입곤 나무를 타서 왕성에 몰래 잡입하질 않나, 왕가슴 공주님과 부딪혀 이래저래 휘둘려보질 않나. 마지막엔 계획에도 없던 후작의 암살까지!'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폭풍의 지팡이를 손에 넣었고 화염화살도 A랭크로 오른것었다. 거기에 패시브 스킬인 '투척'까지 새로 익혔다. 이전 아르데나의 저주를 풀어주며 패시브 스킬 회피의 심득을 익힌 이후 두번째로 새로 얻은 스킬이었다. 리베라에서 스킬을 랭크 업 시키기 위한 조건은 보통 두 가지였다. 해당 스킬을 일정 횟수만큼 사용하거나, 혹은 일정 시간을 사용하거나. 진석이 주무기를 다루는 기술로 선택한 바일리 델 비엔토 같은 액티브 스킬은 일반적으로 사용 횟수가 랭크업의 조건이었다. 그리고 패시브 스킬은 반대로 그 스킬을 사용하는 시간이 랭크업의 조건이었다. 그래서 진석은 액티브 스킬인 화염화살의 경우 당연히 사용 횟수가 랭크업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사용 시간이 랭크업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거참. 당연히 횟수라고 생각하고 화염화살 수련할땐 무조건 화염화살을 만들었다 없에기만 반복했는데, 바보짓이었잖아? 총 사용 시간이 랭크업의 조건이었을 줄은... 이놈들 게임을 참 이상한데서 꼬아놓는다니까. 낮에 탈출통로에서 조명삼아 하루종일 켜놓고 다닌걸로 랭크업을 할 수 있을줄은 몰랐다 진짜. 의외의 수확이네. 그리고 패시브 스킬 투척이라... 지금도 투척으론 쏠쏠히 재미를 봐왔는데, 앞으론 투척 공격을 할땐 더 강력한 보정이 붙겠군. 하긴 단검 진짜 많이 집어던지고 다녔지. 내가 그걸로만 벌써 몇 명을 골로 보냈는데! 이제서야 얻은게 이상할 정도다.'

이제 진석의 화염화살은 랭크 A. 이제부턴 화염화살을 무려 세 발이나 한꺼번에 띄워 발사할 수 있었다. 비록 위력은 낮다고 해도 어느정도 숙련된 공격마법으로서 활용이 가능해 진 것이다. 물론 그만큼 SP 소모량은 늘긴 했지만 바일리 델 비엔토 만큼 심하게 소모하는것도 아니었고, 분명 여러모로 유용하게 쓸 수 있으리라. 그리고 패시브 스킬로 습득한 투척 역시 뭔가를 던지는 공격을 할때 그 위력과 정확도를 훨씬 올려줄 것이다.

'지금까진 잔챙이들만 상대하느라 전투시 딱히 화염화살을 활용할 일은 없었지만... 그나마 대련할때 나랑 맞수가 되던 교단의 챔피언 드레비안을 상대할때라면 어떨까? 화염화살로 선 견제를 넣으며 방어나 회피를 이끌어내고 그틈에 라파가 같은 기술로 사삭...'

소파에 퍼질러져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진석의 앞으로 귀여운 얼굴이 쏙 드밀어졌다. 제이스가 사주기라도 한 건지 치렁치렁하던 머리카락을 하얀 리본 끈으로 잘 정리해서 포니테일로 묶은 아르데나였다.

"저기... 오빠. 피곤하시면 그... 안마라도 해드릴까요?"

"......"

요녀석! 정말 기특하구나! 응응, 거두길 잘했어. 저기 옆에서 폭풍의 지팡이를 들고 여전히 꺄아꺄아 하며 신나있는 어떤 여자와는 다르구나. 진석은 흔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 부탁해볼까."

"...그럼 실례할께요."

그냥 옆에 서서 적당히 주물러주려나 했는데, 아르데나는 대담하게도 진석의 등 위로 올라타는게 아닌가? 옷 너머로 등 위에 올라탄 아르데나의 체중과 하반신의 감촉이 느껴졌다.

"저, 무겁진 않으세요?"

"아니? 가벼워."

처음 만났을때보다 좀 살이 붙었고, 지금도 신경써서 가능한 영양가 있는 식단 위주로 먹이고 있었지만 아직 아르데나는 마른편이었다. 하긴 아르데나와 만난지 이제 기껏 일주일 남짓인데 그간 살이 쪄봐야 얼마나 쪘겠는가. 아르데나는 진석의 등에 올라탄 채 손을 뻗어 어깨와 허리를 번갈아가며 조물조물 주물러댔다.

'손에 힘이 별로 없다보니 이제 안마해준답시고 주무른다기 보단... 뭐랄까, 조그마한 동물이 와서 부비작대며 애교를 부리는 느낌이네.'

딱히 결리는데가 있는것도 아니었고 안마로 피로를 풀고 싶다던가 하는것도 아니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진석의 입장으로선 아르데나가 이런식으로 자신을 신경써준다는걸 보는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니까. 뭣보다 귀엽잖아? 잠시 그러고 있는데 옆에 있던 제이스가 둘의 모습을 보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흐응~?"

무언의 감정이 약간 담긴 제이스의 목소리. 부지런히 움직이던 아르데나의 손가락이 순간 멈칫했다. 진석은 엎드린 자세 그대로 제이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뭐가 흐응이냐. 너는 그 지팡이나 들고 계속 춤이라도 추지 그래. 나보다 그런 물건이 더 좋은거잖아?"

"트, 틀려! 당연히 러셀 쪽이 더 좋... 이 아니라. 아르데나, 잠깐 비켜봐."

"네. 언니."

'...언니?'

하긴 데오그라즈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제이스와 아르데나 둘을 떼어놓고 주로 혼자서 돌아다녔던 진석이었다. 레드라인의 영업장을 습격할때도 그랬고, 오늘만 해도 진석이 왕궁에 잠입한 사이 둘은 하루종일 같이 행동했었으니까. 데오그라즈에 오기전까진 분명 아르데나가 제이스씨라고 꼬박꼬박 경칭을 붙였던것 같은데 어느새 언니라니. 진석이 못 보는 사이 둘도 그런대로 친해진 모양이었다. 아르데나가 진석의 허리에서 일어나 물러서자 이번엔 제이스가 그 위로 올라탔다. 제이스가 허리위에 걸터앉자 진석은 엄살을 피웠다.

"윽, 무거워."

"거짓말! 안 무겁잖아? 사람 놀리지 좀 마."

"아니 진짜로. 네 쪽이 아르데나 보다 배는 무겁... 꿱!"

제이스는 진석의 놀림에 옆에 있던 쿠션을 들어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하지만 진석의 입은 그 정도로 다물어지지 않았다.

"젊다고 방심하고 틈나는대로 술을 마셔대니 뱃살이 푸둥푸둥 늘어나는거야. 게다가 밥 먹을때 보면 후식도 꼭 엄청 단 걸 주문해서 싹싹 다 긁어먹더라? 그러니 허벅지도 투실투실. 술에, 단 음식에, 이거 살이 안찌는게 이상... 끄악!"

퍽퍽퍽퍽퍽. 도끼눈을 치켜뜬 제이스가 진석의 뒤통수를 향해 미친듯이 쿠션을 내리쳤다. 처음엔 맞으면서도 에이 어차피 장난이니까~ 솜이 든 쿠션인데 이까짓거 아무리 맞아봤자~ 하던 진석이었지만 이거 뭔가 내리치는 힘이 장난이 아니다! 한대 당 겨우 1씩이긴 하지만 맞을때마다 진짜로 체력치가 줄어든다! 쿠션으로 맞고 체력이 까이다니 놀라운 경험이다.

"안 그래도 신경쓰고 있는데! 이 바보야! 뭐? 푸둥푸둥? 투실투실? 죽을래!"

"아니! 저기요!"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아르데나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진석과 제이스의 시선이 동시에 아르데나를 향했다. 아르데나는 한 손을 내민 어정쩡한 자세로 에- 음- 하며 잠시 머뭇대더니 입을 열었다.

"제시 언니는 가, 가슴이 크니까요! 저보다 키도 크고, 다리도 길잖아요! 저는 아직  어린애고... 언니는 어른이니까 차이가 나는게 당연한거... 아닐까 하고..."

"그... 그렇지? 응. 아르데나가 뭘 좀 아네."

그제서야 조금 진정하곤 죽어라 휘둘러대던 쿠션을 내려놓으며 머쓱하게 얼굴을 붉히는 제이스. 하지만 밑에 깔려있던 진석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르데나는 참~ 착하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입은 사실만 말한단다. 얘 진짜 되게 무겁... 흡!"

"그래! 무거워서! 그것 참 미안하게 됐네!"

퍽퍽퍽! 기껏 내려놓았던 쿠션을 다시 집어들고 진석을 두들겨패는 제이스. 한참을 그러던 제이스는 이내 바닥에 쿠션을 내팽개치곤 아르데나의 손을 붙잡은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기서 혼자서 자던가 말던가! 나는 아르데나랑 잘거니까! 흥!"

"......"

콰앙. 제이스는 거칠게 방문을 닫아버렸다. 실컷 얻어맞고 소파위에 혼자 남겨진 진석.

'얘는 처음엔 엄청 차갑고 독랄한 이미지였는데... 왜 가면 갈수록 애처럼 유치하게 굴어? 매일매일 같이 자는 사이에 그정도 놀릴수도 있지 뭘.'

아무리 NPC라 해도 분명 여자는 여자. 그 여심을 헤아리지 못하는 진석이었다.

그 날 새벽. 진석은 무언가 자신의 몸 위로 올라타는 감각에 잠에서 깼다. 눈을 번쩍 뜸과 동시에 머리맡 협탁위에 놓여 있던 단검을 집어들어 상대의 목덜미로 겨누었다.

"나! 나야!"

기겁을 하며 양손을 번쩍 들어보이는 제이스. 목에 와닿는 차가운 검날에 감촉에 놀랐는지 손을 마구 내저었다. 정신을 차린 진석은 그녀의 목에서 즉시 단검을 떼곤 다시 협탁위로 던져놓았다.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제이스.

"어휴, 놀랬잖아."

"나야말로. 낮에 별일이 다 있었던터라 신경이 곤두서있었단 말야."

"으응..."

제이스는 진석의 위에 올라탄채 잠시 아무말 없이 앉아있었다. 잠깐의 침묵. 진석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나저나 안 자고 왜."

"...나 진짜 그렇게 무거워? 살쪘어?"

그게 그렇게 신경쓰였나? 기껏 이런 시간에 찾아오더니 그것부터 되묻는게 어째 귀엽다. 진석은 히죽 웃으며 제이스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야 당연히 장난이지. 뭐야, 겨우 그게 신경쓰여서 이 새벽에 찾아온거야?"

"아니... 꼭 그런건 아닌데... 그, 그냥 같이 자러 올수도 있지 뭐."

말 끝을 흐리는 제이스. 그녀는 진석이 내어준 팔을 베고 누우며 계속 말했다.

"그리고 어젯밤엔 결국 같이 안 잤으니 얘길 못해줘서... 나 앞으로 며칠간은 위험일이야. 가능하다면 손이나 입으로 해줄테니까. 그래도 러셀이 정 하고 싶다면 어쩔수 없지만서도... 그러니까 저기, 그... 하다못해 밖에 내줬으면..."

제이스의 말에 머리를 긁적이는 진석. 얘는 그냥 같이 자러 왔다더니만 은근슬쩍 밤일 이야기를 꺼내고 있네. 많은 부분이 가능한 현실적으로 구현되어있는 게임 리베라였지만, 여성의 생리 부분 만큼은 완전 예외였다. 게임내에서 여성의 생리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뭐였더라? 개발진 인터뷰에서 본 기억이 있었는데. 원래는 성인게임답게 생리주기나 배란일, 가임기 부분까지도 최대한 구현하려고 했는데... 이 부분의 개발 도중 버그가 속출했던데다, 그 덕에 연산해야 될 부분이 대폭 늘어나 작업기간이 길어졌고, 심지어 마무리 작업 중 물리적 사고로 데이터 일부가 날아가 전부 헛수고가 되었다고. 결정적으로 베타테스팅 도중 플레이어가 여성캐릭터로 진행할때의 편의성 여부에 클레임이 들어와서 결국 개발진이 눈물을 머금고 삭제했다고 했지. 가능하면 차후 확장팩이나 DLC를 낼때 이 부분을 가능한 다시 살려보겠다고 한것도 기억난다. 음, 게임 잘 즐기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이놈들 정말 변태들이다. 정말 쓸데없을 정도로 변태적인 열정이다.'

결국 타협안으로 여성캐릭터는 한 달 중 약 4~6일 가량의 가임기가 찾아오도록 만들었다. 생리처럼 주기를 계산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지만, 그냥 캐릭터가 스스로 '가임기에 들어섰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설정했다. 그야말로 지극히 게임다운 해결방법. 여성 캐릭터로 진행하는 플레이어의 경우, 임신 여부를 OFF로 두면 가임기가 오지 않아 상관없었지만 ON으로 할 경우 가임기에 들어설때 스테이터스 상태창에 그 여부가 별도로 표시되었다. 그렇게해서 가임기에 들어선 여성 캐릭터와 성관계를 가지고 질내에 사정을 하면 대단히 높은 확률로 임신이 되었다. 그리고 진석이 제이스와 만난지는 약 3주 가량. 그녀에게 이번달의 가임기가 찾아온것이었다.

'나야 임신 여부를 OFF로 해놨으니 아무리 사정해도 임신할일은 없지만서도.'

하지만 NPC인 제이스 입장에서야 알 수 없는 일이니 이렇게 직접 진석에게 자신의 가임기 여부를 알려주는 모양이었다. 서로 조심할건 조심하자는 의미겠지? 그때 진석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얘는 나하고의 관계에서 전혀 임신할 일이 없다는걸 모르지. 그러면 어디...'

입가를 길게 늘어트리며 웃음을 띄우는 진석. 슬쩍 몸을 일으키더니 제이스의 위로 올라탔다.

"어? 러셀. 설마 지금... 할거야?"

"응. 위험일이라는 이야길 듣고 나니까 갑자기 더 막 하고 싶어 지는데?"

"상관은 없지만... 알아 들었지? 안에는 곤란하니까."

대답없이 훌떡훌떡 옷을 벗어제끼는 진석. 제이스도 눈치를 보면서 천천히 옷을 벗었다. 옷을 다 벗고 보니 애무는 커녕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진석의 물건은 이미 준비 만전이었다. 제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러셀의 거기, 너무 쓸데없을 정도로 기운넘치잖아."

"응 뭐 그렇지. 지금부터 아기를 만들어야 하니까 힘내지 않으면."

"...뭐?"

황당해하는 제이스를 재빨리 덮쳐누르는 진석. 제이스의 양팔을 왼손으로 꽉 거머쥔채, 머리위로 들어올리고 강제로 입을 맞췄다.

"우, 읏! 잠깐! 무슨 말이야 방금!"

입맞춤을 필사적으로 거부하며 진석에게 항의하는 제이스. 진석은 제이스가 키스를 거부하자 대신 목덜미를 혀로 핥으며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아~ 보고싶구만~ 배가 잔뜩 부른 제시의 모습~"

"노... 농담이지? 응? 이것도 아까 나 놀릴때처럼 장난치는 거지?"

제이스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진석은 속으로 힛힛 사악하게 웃으면서 겉으론 진지함을 가장해 대답했다.

"왜, 내 아이는 갖고 싶지 않아?"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나한테는 수호자로서의 일이..."

"너에겐 일이 중요해 아니면 내가 중요해?"

"......"

진석은 어라, 원래 이런 대사는 보통 여자쪽에서 하는거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했다. 에이 아무렴 어때. 그런데 진석의 말을 들은 제이스는 말문이 막히는지 아무말도 못하고 가만히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한참 뜸을 들이던 제이스는 겨우 말문을 열었다.

"러셀을 사랑하는건 사실이지만... 내가 지금 아이를 가져버리면 교단의 일은 손에서 놓아야 하잖아. 지금은 중요한 시기인데... 역시 안돼. 임신만은... 위험일은 며칠만 지나면 되니까, 응?"

"아- 아- 제시는 결국 나보다 일이구나. 일이 훨씬 소중한 거구나. 그러니 나같은 놈 따위의 아이는 가질 수 없다는 이야기네."

"그런말이 아니잖아!"

제이스의 분위기가 엄청 심각해진다. 아줌마들이 즐겨보는 주말 드라마 여자 주연급 분위기. 놀리고 있는 진석의 입장으로서는 이상할정도로 진지한 그녀의 모습에 왠지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그래, 기왕 시작한거 어디 끝까지 놀려먹어보자고 생각했다.

"만약 미리안이 내가 아닌... 맥이나 드레비안, 머서의 아이를 가지라고 명령한다면 제시는 거절하지 않겠지?"

"왜... 왜 여기서 그런 말을 하는데? 대신관님이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을 시킬리가 없잖아!"

제이스는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만약 정말로 미리안이 자신에게 그런 지시를 내린다면? 하고 떠올려봤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진석에게 죄책감과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결국 미리안의 명령을 따를것이 분명했다. 자신을 먹이고, 돌봐주고, 가르치고, 키운게 바로 미리안이다. 비록 외관상으로 보이는 육체의 나이는 달랐지만 미리안은 제이스에게 있어 부모이자 스승이었고, 또한 언니이자 교단의 상사였다. 그녀는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정말로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미리안의 명령을 절대 거부할 수 없다는건 누구보다도 제이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갖는일을 방금 거절한 참인데, 명령에 따라 그가 아닌 다른 동료의 아이를 가진다는 상상을 하니... 갑자기 무시무시할 정도의 배덕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명령이 내려온다면 분명 따를거잖아? 그렇네. 역시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너한테 그정도 밖에 안된다는 거겠지."

"제발, 제발! 부탁이니까 그런 말 하지마..."

도발하듯 흘리는 진석의 말에 제이스는 이제 심각하다 못해 아주 울기 직전이다. 미리안이 실제로 저런 명령을 내린것도 아니거니와 그저 진석의 일방적인 가정일 뿐인데도, 제이스를 곤혹스럽게 만들기엔 넘치도록 충분했던 것이다. 진석은 이쯤에서 쐐기를 박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싫다고 해도 상관없어. 억지로라도 아이를 갖게 만들테니까."

"안 돼, 하지마... 아읏!"

진석의 거친 애무가 제이스의 몸 위로 난폭하게 쏟아졌다. 그동안 지겨울정도로 서로 몸을 겹치며 민감한 부분이나 약점은 꿰고 있었다. 제이스의 입은 거부의 말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최근 매일같이 정을 나누며 잔뜩 개발된 육체. 제이스의 중심이 금세 젖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러지마! 으응, 읏. 시, 싫어!"

"숲에서의 일. 기억나?"

뜬금없이 예전의 일을 언급하는 진석. 제이스의 머릿속에 외진 숲속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진석에게서 도망치려다 붙잡혀서 폭행당하며 강간당했던 기억. 왜 굳이 그때의 일을 언급하는걸까?

"미리 말해두는거야. 지금부턴 그때만큼 거칠게 할거니까."

움찔. 제이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때의 상황과 지금 자신의 모습이 겹쳐지니 왠지 모르게 팔다리의 힘이 조금 빠졌다. 진석은 그틈을 노리지 않고 제이스의 안에 자신의 분신을 단번에 밀어넣었다. 기습을 당한 제이스의 입에서 비명같은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수시간 후. 제이스는 탈진한 사람처럼 침대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거친 섹스를 해왔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 한 것은 그 이상이었다. 글자 그대로 그녀를 들었다 놨다 하며 무슨 장난감 다루듯 일방적으로 범한것이다. 폭력만 쓰지 않았다 뿐이지 예전 숲에서 한 것 이상이었다. 제이스는 이러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움찔움찔 간헐적인 경련을 하며 퍼져 있는 제이스를 내려보던 진석은 창가로 다가갔다. 먼 곳의 하늘이 서서히 밝아져 오는게 곧 해가 떠오를 것 같았다.

'예민한 촉감 이거 의외로 쓸모있네.'

이전 캐릭터를 생성할때 포인트가 남아서 찍었던 스킬 예민한 촉감. 그간 제이스와 관계를 가지며 손으로 애무할때마다 조금씩 경험치가 쌓이고 랭크가 오르긴 했는데, 오늘에서야 이 스킬의 본질적인 활용법을 익힌것 같았다. 평소에는 주로 성기의 삽입에 치중했었는데 방금전 제이스와 관계할땐 삽입뿐만 아니라 예민한 촉감을 적극 이용해 몸 내외부의 급소를 마구 공격했더니... 이게 효과가 아주 발군이었던 것이다. 확실히 평소 이상으로 제이스를 효과적으로 농락하며 괴롭힐 수 있었다.

'예민한 촉감이 이제 B랭크라... 이거 S랭크 찍으면 뭐 만지기만 해도 오르가즘을 느끼게 되려나?'

원래 예민한 촉감은 감정안의 하위 스킬로 재질이나 촉감만으로 특정한 물건의 질이나 등급 따윌 판정하는 기술이었는데, 진석은 참 묘한곳에서 스킬을 활용해대고 있었다. 그때 제이스가 정신을 차렸는지 뒤에서 그녀의 기운 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너무해... 흑. 흐윽..."

자신의 뱃속에 무언가가 가득 들어차 있는 이 이물감. 평소처럼 말도 안되는 횟수의 사정을 하여 자신의 안을 가득 채운것이리라. 허용량을 넘은 정액이 넘쳐 비부 사이로 주르륵 흘러내리는게 느껴졌다. 위험일인 지금 이렇게 당했으니 틀림없이 임신을 하게 되리라.

"왜, 왜 이렇게... 나는... 러셀을 좋아하는데. 왜..."

단순히 임신을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견은 무시한채 강제로 그것을 강요했다는게 사실이 서글펐다.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제이스. 진석은 아무 말 없이 제이스를 내려다 보았다.

'음... 글쎄? 그냥 놀리고 반응 보는게 재밌어서 될대로 되라 하면서 분위기 타다보니? 생각해보니 이렇게 심하게 할 필요가 있었나?'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별 생각이나 고민없는 플레이를 하는 진석이었다. 장난기가 발동해 그냥 심각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척 해봤을 뿐. 애시당초 진석을 정말 사랑하는 제이스와 달리, 진석 입장에선 제이스가 그저 아랫도리의 회포를 푸는 편리한 섹스파트너였으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 상황은 수습해야 했다. 진석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제이스의 얼굴을 상냥히 쓰다듬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래, 나도 널 좋아해. 다른 누구에게 주고 싶지 않아. 생각해봐. 그 누가 사랑하지도 않는 상대에게 자기 아이를 갖게 하겠어? 나는 널 시험해 본거야. 네가 교단과 나 중에서 어느쪽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가를. 하지만... 역시 나 보단 교단쪽이 더 중요했던것 같네. 할 수 없지. 탓하는건 아니야, 충분히 이해해. 나야 사실 만난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상대고 교단쪽은 지금까지의 네 삶 그 자체였을테니."

"......"

진석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도 아무 대답않는 제이스. 진석의 말에 되려 왠지 모를 죄책감이 느껴졌다. 입으론 이 남자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결국은 우선순위에서 뒷전으로 미뤄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보면 사실 말장난일 뿐이지만 제이스에겐 이런 농간이 잘 먹혀들어가고 있었다. 진석은 잠시 말을 끊고 뜸을 들였다. 땀에 젖은 제이스의 이마. 엉망으로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가지런히 쓸어넘겨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실... 오늘의 관계로 네가 임신할 일은 없어. 약을 먹었었거든, 내가."

갑자기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뜬금없는 이야기에 제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약이라고 해도 뭐 너한테 해를 끼치는건 아니고... 남자가 먹는 영구 피임제라고 할까? 사실 약이라기보단 독에 가까운 물건이지. 이걸 먹으면 평생동안 여자를 임신시키는 일은... 절대 없어. 그 대신 비정상적으로 강해진 정력을 얻게되지. 예전 도적길드에 있었을때 놈들이 날 암살자로서 훈련시키며 먹인 비전의 약이야. 암살자 주제에 여자와의 사이에서 덜컥 자식이라도 생기면 삶에 애착이 생겨서 안된다나. 하긴, 이런 고약한 약이 존재한다는건 약학에 능한 머서조차도 모를테지."

"그... 러면..."

당혹스러워 하는 제이스. 진석은 감정을 잡으며 최대한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난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조차 만들수 없는... 결함이 있는 몸이야. 그래서 일부러 심술을 과하게 부려봤어. 미안해."

지금 진석의 태도는 그야말로 견강부회. 이전에 말했던 거짓에 또 다른 거짓을 더해 말을 꾸며내고 있었다. 혀에 침도 바르지 않고 술술 거짓말을 늘어놓는 재주가 그럴싸했다. 약은 무슨 약? 게임내에 피임약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생리나 배란일에 대한 부분을 대폭 축소하며 원래 기획되어있던 피임약의 존재도 같이 없애버린 것이었다. 애당초 플레이어에겐 임신 기능의 ON/OFF가 자유로웠으니 달리 피임약이 필요 없었다. 자유롭게 관계하다가도 맘만 먹으면 언제든 상대에게 아이를 갖게 할 수 있었으니까. 지금의 진석은 딱히 2세를 만들 필요나 이유가 없으니 임신 기능을 OFF로 해두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읏..."

진석은 제이스에겐 보이지 않게 자신의 허벅지를 꽈악 꼬집으며 억지로 눈물을 짜냈다. 과연, 무력 46으로 하는 꼬집기는 고작 꼬집기인데도 체력 게이지가 줄어드는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악력이 너무 좋아서 이게 어찌나 아픈지 금세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진석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걸 본 제이스는 지쳐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그를 끌어안았다.

"아, 아냐. 미안해 하지마. 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어? 처음부터 솔직히 말해줬더라면..."

'그야 뭐, 이거 다 뻥이라고 솔직히 말하면 네가 날 죽이려 들테니 그럴 수 있나. 애당초 교단에 들어간것조차 널 낚은 사기였는데. 제시야, 또 속는구나!'

진석이 흐느끼는 척 어깨를 떨자 제이스는 더 한껏 그를 감싸안으며 토닥였다.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다며, 되려 미안하다고, 괜찮다면서 진석을 달래왔다. 흡사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아 이것 참. 예전부터 느끼는거지만 나 연기력 너무 쩌는거 아냐? 혹시 진짜로 이쪽에 재능이 있나?'

한심한 자아도취에 빠진채 얼렁뚱땅 사기극을 마무리짓는 진석이었다. 온갖 거짓말로 점철된 이 플레이는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 작품 후기 ============================

임신으로 장난질치는 부분은 괜히 쓸데없는 장면같기도 해서 넣을까 뺄까 고민하다.. 써놓은 분량이 아까워서 그냥 넣었습니다. OTL

그리고 위에서 나온 지문처럼 부제인 부회의 방랑자는 뭐 대단한 의미가 있는건 아니고 그냥 사자성어 견강부회의 그 부회입니다. 이치나 사리에 맞지 않는걸 형편좋게 가져다 대어 꾸민다는 의미로, 지금까지 보신대로 주인공이 시종일관 하는 짓이 이렇습니다. 일단 생각없이 대충 저질러 놓고 힘을 쓰거나 거짓말을 해서 적당적당히 수습해 나갑니다. 그짓의 반복. 어차피 서진석 입장에서는 죄다 게임 속 가상세계의 일이니 현실처럼 심각해지거나 진지해질 필요가 없으니까요. 딱히 선이나 악 어느 한쪽만을 추구하는게 아닌, 그 가운데에 서서 오로지 자신의 재미만을 위해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좋은 한가위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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