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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46화 (46/155)

< --   - 4.   -- >         * 46화 *

가네딘 후작의 암살. 진석은 별 생각없이 저지른 일이었지만 그 파장은 차근차근 퍼져나가고 있었다. 빅 본의 카야도 그 소식을 접했다. 부지부장인 웍스턴이 병원에 누워있던 그녀에게 찾아가, 어제 여자 쪽 수호자가 찾아와 돈을 주고 부하 다섯명을 빌려갔다가 별 일을 시키지 않고 다시 돌려보낸 일을 보고한 것이다. 왕궁 바로 근처에 대기시켜놨다 돌려보냈다고 하니, 카야와 웍스턴은 수호자들이 가네딘 후작의 암살건에 뭔가 관련되어있음을 눈치챘다. 웍스턴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정말 무서운 자들입니다. 대귀족의 암살이라뇨, 그것도 왕궁안에서. 세상에. 결국 우리쪽 애들은 아무일도 안하고 돌아오긴 했지만... 괜찮을까요?"

"...괜찮을거다. 실제로 한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 죄도 없잖아. 돈이나 좀 쥐어주고 입단속만 잘 시켜."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웍스턴은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곤 카야의 병실을 빠져나갔다.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레드라인의 잔당들은 레스토랑에서 진석에게 왕창 박살난터라, 이젠 정말 떨거지들만 남은 상태였다. 당장 카야가 없어도 크게 문제될건 없었다. 그나마 남은 놈들도 앞다투어 돈이나 마약을 챙겨 조직에서 도망가기 바쁘다고 했으니. 반면 빅 본은 레드라인을 꺾고 이제 데오그라즈의 선착장 지구에서 명실상부 가장 큰 세력으로 발돋움한 상태.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레드라인쯤은 웍스턴으로도 충분히 정리 가능했다.

"......"

침대에 걸터 앉은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카야. 카야는 입원 후 비싼 치료제를 잔뜩 처방받아 골절이나 타박상은 거의 회복되어 그대로 퇴원해도 될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 의사에게 한동안 병원에 더 머물며 요양하겠다고 요청했다. 몸은 나았어도, 꺾인 마음만큼은 쉽게 아물지 않았던 것이다. 매사 자신만만하고 당당했던 그녀였지만 교단의 수호자인 진석만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려왔다. 가슴 한켠에 자리잡은 두려움과 무력감 때문에 당장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쉬고 싶었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어느 연립주택. 2층의 한 방안. 푸른벨벳이 벽지처럼 둘러진 방 한가운데엔 마호가니 책상을 두고 거만하게 앉아있는 정보상 피터슨이 있었다. 데오그라즈에 거미줄같은 정보망을 뻗어두고 도시의 현황을 손바닥 보듯 하는 노회한 정보상. 라케르투스 족 늙은이 피터슨. 모노클에 멋들어진 스리피스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어제부터 일어난 사태의 추이를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 피터슨에겐 본인이 고용해둔 정보원들 이외에도, 자신이 듣거나 목격한 정보를 팔러 찾아오는 일반 시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가 피터슨의 눈이자 귀였다. 레스토랑에서 벌어진 진석과 카야, 레드라인의 충돌을 뒤에서 조장한것도 따지고보면 자신이었고, 진석에게 왕궁에 숨어들 수 있는 정보를 팔아치운 것도 바로 피터슨 본인 아니었던가! 대귀족 암살이라는 초유의 사태의 단초를 제공한것이 자신이라는 점에서 그는 뇌가 달아오르는 것 같은 희열을 느꼈다.

'자, 보아라! 온 도시가 발칵 뒤집히는 초유의 사태를 만드는데 기여한것은 바로 나다! 이 골방에 틀어박힌채 입을 놀리는것 만으로도 이 상황에 일조한것이다! 진실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 이 내게 황금을 가져온다면 진실의 편린따위, 얼마든지 나눠주지!'

기분이 좋아진 피터슨은 품에 안겨있는 무희 차림의 노예를 고양이 쓰다듬듯 다루며, 긴 혓바닥을 마구 날름거렸다.

"시시시. 하지만 대단하구만. 혼자 폭풍의 지팡이를 훔쳐내고 가네딘 후작을 암살하기까지? 아아 정말 무섭구만. 아주 무서운 사내였어."

피터슨의 혓바닥이 스멀스멀 뱀처럼 움직이며 노예의 목덜미를 훑었다. 아앙 하고 애교섞인 콧소리를 내며 피터슨에게 몸을 밀착시키는 그녀. 피터슨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빅 본... 뒤에 뭔가가 있다는건 진즉부터 눈치채고 있었지만 갑자기 적극적으로 움직이는것을 보아하니 흥미가 동하는걸? 분명 어제의 그가 얽혀있겠지. 폭풍의 지팡이를 훔쳐내고 가네딘 후작을 암살한 그 남자 말이다. 싯! 돈 냄새가 나는구나! 은퇴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거하게 벌어봐야겠어. 세이라, 엘로이에게 연락을 넣어두려무나."

"네, 주인님. 그런데 조금 천천히 가면... 안될까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멈춰서더니 요염한 표정을 지으며 피터슨을 바라보는 무희복의 노예, 세이라. 피터슨은 싯싯하고 웃으며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싯싯. 지금 날 유혹하는게냐? 요 귀여운 녀석. 못된 아이로구나."

"아앙, 죄송해요오..."

묘한 향내와 더불어 산더미같은 서류와 책들이 가득한 실내. 그 공간을 달뜬 신음성이 채워갔다.

어제 암살이 벌어져 벌집을 쑤셔놓은것 처럼 발칵 뒤집힌 그란델 왕궁. 본성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어느 조용한 방 안.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댄디한 중년 사내가 레오노르 공주와 마주 앉아있었다. 중년 사내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는 채였고, 레오노르는 눈을 깐채 다소곳히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어쩌자고 그런 일을 벌인게냐."

나직하지만 중후한 음색.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른 이 남자가 바로 레오노르의 아버지, 해밀턴 공작이었다. 레오노르 공주는 아버지 해밀턴 공작의 추궁에 조심스레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사정은 말씀드렸잖아요 아버님. 제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최선의 거래였습니다."

"그래서, 누가 너에게 폭풍의 지팡이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줬더냐?"

"하지만...!"

해밀턴 공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반박을 하려던 레오노르 공주는 입을 꾹 다물며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내 딸아, 이 어리석은 아이야. 가네딘 후작이 죽었다고 대세가 곧바로 왕당파로 기울거라 생각했느냐? 네가 한 짓은 그저 저쪽에게 날 뛸 빌미를 준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분명 가네딘 후작은 음험하고 교활한 작자였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말은 통하는 상대였거늘... 귀족연맹의 구심점이 되는 그가 암살을 당했으니 이제 그 아래에 모여있던 자들은 자신들이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격을 해올것이 자명하지 않느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이 있는데, 하물며 대귀족이 암살로 죽은 이상 그 세력에 속해있던 다른 귀족들은 당하기 전에 먼저 치겠다는 생각으로 나올게 분명했다. 해밀턴 공작은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곳이 전쟁터라면 지휘관을 쓰러트리는것으로 부대를 와해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정치판은 다르다. 정치판에선 하나를 쓰러트려봐야 곧 그 자리를 대신할 다른 자가 나타날뿐. 단순한 힘의 논리만으로는 싸울 순 없는게 바로 정치다. 폭풍의 지팡이라는 신기의 위광을 빌어 간신히 이쪽의 기반을 다져가던 참인데, 정체모를 자에게 빼앗기고 말았으니 네 행동으로 모든게 물거품이 된 셈이구나. 게다가 귀족연맹 역시 직접적으로 말을 꺼내지 않는다 뿐이지 보나마나 우리쪽이 암살의 배후라고 짐작하고 있을게 아니더냐? 그가 사라져서 가장 큰 반사이익을 볼 세력은 우리 왕당파니 말이다. 하아. 아무튼 지금 왕궁내에 폭풍의 지팡이가 없다는 사실은... 그것만큼은 절대 누구에게도 발설해선 안된다. 그것만이 우리가 가진 유일하고 확고한 억제력이니까."

레오노르의 안색이 시시각각으로 어두워졌다. 자신은 그저 아버지 해밀턴 공작에게 인정받고 싶었던건데. 그리고 왕당파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을 뿐인데. 그 위험한 상황속에서 폭풍의 지팡이를 댓가로 귀족연맹의 우두머리인 가네딘 후작을 제거하는 거래를 이루어냈는데! 자신의 아버지는 그 모든게 헛된일이라 탓하고 있었다. 꽉 모아쥔 레오노르 공주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해밀턴 공작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자식이 어지른 소치는 부모가 수습해야겠지. 이제부터 귀족연맹쪽의 상대는 전부 내가 할테니, 넌 당분간 왕궁에 출입하지 말거라."

뭔가 대꾸하려 고개를 치켜드는 레오노르 공주. 하지만 매서운 해밀턴 공작의 눈빛에 눌려 어깨를 늘어트리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해밀턴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가며 축 쳐져있는 레오노르를 향해 말했다.

"한심한 꼴 하고 있지 말고 고개를 들어라. 네게 윌포드와 가병을 붙여주마. 외부의 도움은 불허하지만 가문내의 자원이라면 얼마든지 가져다 써도 좋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제 그 암살자 사내를 찾아내라. 반드시 그를 처리하고 폭풍의 지팡이를 회수해오거라. 넌 내 딸이기 이전에 공작가의 후계자이자 이 나라의 왕족이 아니더냐? 자신의 실수는 자신의 손으로 만회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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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때가 한참 지난 느즈막한 오후. 그란델의 수도 데오그라즈 선셋대로에 위치한 로엔 호텔의 최상층 특실. 진석과 제이스, 아르데나는 룸서비스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진석은 자신 몫의 그릇을 싹 비운후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아 잘 먹었다. 그나저나 명령은 완수했으니 이제 슬슬 메디니아로 돌아가면 되려나? 배를 타고 가면 빠르겠지?"

옆에 앉아있던 제이스는 손에 든 컵의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 내 생각이긴 하지만... 문제가 생길지도?"

"엥?"

그게 무슨 소리냐는듯 제이스를 돌아보는 진석. 제이스는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고 다리를 꼬아 앉으며 대답했다.

"러셀이 얘기해준 왕궁에서의 일 말인데... 아무리 레오노르 공주와 거래를 해서 폭풍의 지팡이를 받는 댓가로 가네딘 후작을 암살했다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러셀의 수배를 걸지 말라는 확실한 보증은 없거든."

그러나 진석이 보기에 레오노르 공주가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할 인물 같진 않았다. 진석은 제이스의 말을 반박했다.

"하지만 그녀가 나서서 내 인상착의를 밝히며 수배를 걸면 그거야말로 자신이 암살자와 관계있다고 자백하는 꼴 아냐? 내가 가네딘 후작 죽일땐 머리를 다 덮는 복면을 쓰고 있었대도? 아무도 모를 내 얼굴을 혼자 알고있답시고 나선다는건 말이 안되잖아."

"그거야 적당히 둘러대면 그만이지. '아, 어제 제가 수상한 남자가 복면을 벗어던지고 도망가는걸 봤어요! 얼굴이요? 이렇게 저렇게 생겼었는데, 혹시 그 남자가 범인인건 아닐까요?' 이런식으로 증언해버리면 끝인걸. 게다가 그녀는 엄연한 왕족이잖아? 무려 왕제 해밀턴 공작의 딸이라고. 상식적으로 고귀한 신분의 공주님이 암살의 배후일거라 생각할 사람이 있겠어? 다들 그녀의 발언을 곧이 곧대로 믿어주겠지."

"......"

듣고보니 틀린말은 아니다. 게다가 제이스는 이전 빅 본의 조무래기들이 진석의 얼굴을 알아보고 카야에게 귀띔을 할지도 모른다는 걸 미리 지적해주기도 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카야와 결판을 내기도 했었고. 진석 자신이 제이스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일방적으로 휘둘러대서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 뿐, 진석과 만나기 전까지의 그녀는 혼자서 수호자의 업무를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수행할만큼 머리도 잘 돌고 판단력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진석의 표정이 굳어지자 제이스는 안심하라는듯 진석의 손을 마주잡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수배령이 내려졌다고 확정된건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마. 일단 그냥 가능성을 말해본 것 뿐이니까. 정 안되겠다 싶으면 빅 본의 밀수루트를 이용해 도시를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도시에 내려진 경계령이 풀릴때까지 느긋히 버티다 떠나면 되는거니까."

진석이 저지른 가네딘 후작의 암살로 인해 현재 데오그라즈엔 엄중한 경계령이 내려져 있었다. 별다른 절차가 없던 평소완 달리 도시에 출입하는 이들을 철저히 검문하고, 항구를 통해 드나드는 인력과 화물도 철저히 검역하는 상황. 도시 곳곳을 순찰하는 병력도 대폭 증강되어 있었다. 그냥 일반 시민으로 가장해 도시에서 빠져나가지 못할것도 없었지만, 세상일엔 언제나 만에 하나라는게 있으니 엄중히 검문중인 곳에 제발로 찾아갈 필요는 없었다. 만약 누군가 지금 당장이라도 호텔방에 들이닥쳐 진석의 배낭을 열어본다면 그 안에 든 엄청난 액수의 돈과 투척용으로 구입해둔 여러자루의 단검들을 발견할 터. 수상한 자로 몰리는건 일도 아닐것이다.

"흐음..."

제이스가 제시한 대안을 듣곤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기는 진석.

'안전한 방법은 두 가지인가. 빅 본 쪽에 협력을 구해서 밀수 루트를 통해 도시를 벗어나 돌아가거나, 아니면 잠시 몸을 숨기고 상황히 안정된 후에 느긋히 떠나거나...'

평범하게 생각하면 밀수 루트를 이용해서라도 빨리 돌아가는게 나을것이다. 하지만 서둘러 돌아가봐야 뭐하겠는가? 미리안은 진석에게 곧바로 또 다른 일거리를 던져줄것이고, 그렇게 그녀가 시키는 일을 해결하면 할수록 세계멸망까지 남은 시간은 더욱 단축될것이다. 애당초 진석은 미리안의 언변에 넘어가 어찌저찌 협조하게 된거지 진심으로 교단에 복종하고 있는것도 아닌데 세계멸망을 재촉할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세상이 망하면 게임도 끝나는 것. 새로이 뉴게임을 해야한다. 게임을 진행하며 자신의 능력이 올라가고 동료, 재물 등 여러가지가 쌓이면 쌓일수록 그것을 차근차근 즐기는 맛이 있는 법. 급한사정이 있는것도 아니고 뭐에 쫓기는것도 아닌데 후닥닥 게임을 끝내버리면 뭐하겠는가? 그러니 서두를거 없었다. 진석은 가능한 천천히 즐기면서 하기로 마음먹었다. 세계멸망이라는 거창한 목표보단 어디까지나 자신의 즐거움이 우선이었다.

"뭐... 경계령이 풀릴때까지만 좀 머무를까?"

게다가 카야를 굴복시키며 온갖 똥폼을 다 잡았던 진석이다. 이제와서 니네 밀수 루트로 도시 밖에 내보내달라는 말을 하러 가기엔... 어째 폼이 살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진짜로 강력하고 신비스러운 교단의 수호자라면 누가 돕지 않더라도 도시에서 빠져나가는 정도쯤 알아서 해결해야 하지 않겠는가.빅 본 쪽엔 결코 얕보이고 싶지 않았다.

"흐음, 그렇네. 하긴 경계령이래봐야 뭐 얼마안가서 풀리겠지."

씨익. 진석의 제안에 미소짓는 제이스. 어차피 목적도 달성했겠다, 솔직히 말해서 며칠 정도라면 제이스도 여유롭게 쉬고 싶었던 것이다. 진석을 만나고부턴 여기저기 계속 마차로 이동할 뿐이었고, 별다른 오락거리도 없는 사원에서 머무는 동안엔 그저 서로 몸만 섞어댔다. 이렇다 할만한 휴가나 휴식은 없었던 것이다. 그 전에도 수호자로서의 임무에 계속 충실해 왔으니 이 기회에 대신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과 느긋히 보내고 싶었다. 게다가 이곳은 대륙 남동부에서 가장 번성한 항구도시가 아니었던가? 돈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양한 유흥을 즐길 수 있었다.

"좋아 그럼. 조용해 질때까진 푹 쉬자고. 그런데 아르데나는 특별히 뭔가 하고 싶은거 없어?"

진작 식사를 마치고 오도카니 앉아 빈 포크만 쪽쪽 빨고 있던 아르데나. 진석이 갑자기 질문을 던져오자 앗 하고 놀랬다.

"아, 어... 저기, 글쎄요. 저는 잘 모르니까..."

과거의 기억이 온전치 않은 아르데나. 갑자기 하고 싶은게 있냐고 물어봐야 달리 생각나는게 없었다. 지금 아르데나의 관심사라고 해봐야 오직 진석에 관한일 뿐인것을. 진석은 아르데나를 한참 바라보다 갑자기 와락 껴안으며 불쌍하다는 듯 토닥거렸다.

"으이구! 이 딱한것! 뭐 좋아. 데오그라즈에 온 이후 열심히 일했으니까... 수호자 일은 잠시 휴업이다. 돈도 남아도는데 쓸데없는 과소비로 지역경제 부흥에 일조해보자꾸나."

돈이 남아돈다는 말에 갑자기 눈을 빛내며 진석의 옆에 찰싹 달라붙는 제이스.

"그러고보니 대신관님이 주신 돈, 그거 얼마나 남았어? 나 좀 주면 안돼?"

현재 진석이 보유한 현금은 300닢에 조금 못미치는 금화. 그리고 데오그라즈 은행에서 발행한 백골드 짜리 수표가 서른일곱장 남아있었다. 총 4천골드에 달하는 거액. 하지만 진석은 손을 내저었다.

"야 왜 콧소리를 섞고 그러냐 징그럽게. 저리가 저리 쉭쉭."

"아앙, 러셀 사랑해! 나 흔해빠진 옷이나 구두는 이제 질렸어. 보석이 가지고 싶은데! 응?"

"됐고 여기 1골드 줄테니까 가서 사탕이라도 사먹어."

제이스는 진석의 차가운 태도에 눈썹을 치켜세우며 볼을 잔뜩 부풀렸다.

"우~ 너무해. 어젠 배를 부르게 해주겠다느니, 마구 해댔으면서... 그건 겨우 1골드짜리 사랑이었구나."

'배를 부르게...? 설마. 아기...?'

대화를 듣고 있던 아르데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르데나의 얼굴이 붉어지는걸 본 진석은 아르데나의 귀를 자신의 양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물론 대충 막는 시늉한 한거라 여전히 둘이 나누는 대화가 고스란히 들렸다.

"애 앞에서 뭔 쓸데없는 소리야. 정서교육에 안좋게."

진석이 그렇게 말하자 제이스는 기가 찬다는듯 혀를 차며 말했다.

"하, 방금 정서교육이라고 했어? 내가 잘못들은거 맞지? 여자는 아랫도리로 굴복시킨다는 주의인 러셀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올리가 없는데? 틈나는대로 날 맘대로 만지거나 주무르고, 내키면 바로 침대위로 끌어들이는 주제에 정서교육이 무슨 말인지는 알긴 아는거야? 정사교육이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거 아냐?"

"와, 와아. 너 말발 세졌다."

"말발이 세진게 아니라 지금까지 그냥 말을 안했을 뿐이야. 평소에도 하고싶은 말을 얼마나 꾹꾹 참아두고 있는지 알아? 정말이지... 어쩌다 이런 남자를 좋아하게 되서. 나도 참 한심하지."

"음 그거야 내가 워낙 잘났기 때문아닐까? 후후 이놈의 매력이란."

"암. 잘났고 말고. 강간하는 재주도 매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

"...야 제시, 그 얘긴 좀 그만..."

"내가 지쳐서 제발 좀 그만하라고 할 때 한 번이라도 그만둔적 있어? 오히려 더 신나서 짐승마냥 허리를 마구 흔들어 댔으면서. 명색이 사귀는 사이라면 이게 빈말인지, 진짜로 거부하는건지 정도는 눈치챌 줄 알아야지. 무조건 쑤셔넣기만 하면 단 줄 알아?"

"......"

"그리고 입으로 해줄때 말인데, 왜 자꾸 정액을 먹으라고 하는거야? 그거 삼키는게 얼마나 고역인줄 알아? 한 번이라도 좋으니 스스로 맛이라도 보지 그래?"

한 번 시작하니 멈출줄 모르고 봇물처럼 계속 터져나오는 제이스의 거센 비난. 결국 진석은 두 손 두 발 다 들 수 밖에 없었다. 진석으로선 제이스에게 당하는 첫 패배였다.

"아, 알았어! 거 보석 사주면 되잖아!"

진석의 항복선언. 제이스는 그제서야 비난의 말을 멈추고 생글생글 웃으며 진석의 팔을 끌어안았다.

"어머~ 정말? 고마워! 후후훗."

'으으 뭐야 이 태세전환은! 무섭다! 여자 무서워!'

자신이 우위에 서서 맘대로 다루던 하던 상대에게 말 몇 마디만으로 거꾸로 이렇게 휘둘리다니. 리베라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여성 캐릭터에게 두려움을 느껴보는 진석이었다.

============================ 작품 후기 ============================

쓴다고 열심히 써도 매일 올리는 분량이 있다보니 비축분이 전혀 늘지 않는군요.

아니, 남은 분량도 점점 간당간당 해집니다.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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