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4. -- > * 47화 *
여윳돈이 생기면 어디다 써야할까?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자유였다. 사고 싶던걸 산다던가, 저축을 한다던가. 소비의 형태에 정답은 없었다.
'하지만 자산을 구입하는것이 제일 좋긴 하겠지.'
진석, 제이스, 아르데나. 셋은 잘 차려입고 호텔을 나서고 있었다. 진석의 재킷 상의 안에는 수표들이 들어있었고 돈 주머니의는 금화로 가득차 묵직했다. 주머니를 돈으로 가득 채운 진석은 자신을 따르는 두 여자와 함께 선셋대로로 나섰다.
'데오그라즈에 터를 마련한다거나 정기적으로 올일이 있다면야, 이 돈으로 더 큰 돈을 벌 수 있는 자산을 사거나 어딘가에 투자를 하는게 좋을테지만...'
딱히 그럴 필요는 없을것 같다. 돈은 어차피 교단측에서도 어마어마하게 벌어들이고 있지 않은가? 헤세스 약품 통상이 벌어들이는 수익은 상상을 초월할터. 필요하면 대신관인 미리안에게 손을 벌리면 될 일이다. 그녀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돈이야 넘칠만큼 지원해주겠지. 공기업을 보유한 국가예산급의 초월적 자금력이라, 악의 조직 만세로소이다! 만약 진석이 제이스를 죽이고 교단에 맞서는 길을 택했다면 돈은 돈대로 모아야지, 함께 할 능력좋은 동료도 구해야 하지, 막대한 자금력을 지닌 교단을 무너트려야 하지, 정말 험난한 길이 됐을터였다. 아무튼 진석 자신이 미리안에게서 용돈 타 쓰듯 손을 벌릴게 아니라 직접 벌어도 나쁠건 없을테지만... 지금 경계령이 내려진 데오그라즈에서 자산을 구입하겠다는건 좀 무모한 감이 있었다. 게다가 제이스의 생각대로 레오노르 공주가 약속을 깨고 진석에게 수배령을 걸 수도 있었으니까.
'하긴 뭐 어차피 교단을 도와 세계를 망하게 하면 자산이고 나발이고가 뭔 소용이람.'
그러니 그냥 쓰자! 써버리자! 펑펑! 미리안도 남는건 다 가져도 된다 했으니 부담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진석은 옆에서 따라오던 아르데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르데나. 혹시 뭐 갖고 싶거나 필요한거 있니?"
아르데나도 아주 무일푼은 아니었다. 아르데나에겐 이전 페레나시에서 제이스가 옷을 사라고 쥐어줬던 돈이 있었다. 옷을 여러벌 사고도 아직 잔금이 제법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르데나 스스로 뭔가 필요하다고 느끼는건 없었기에, 그 이후 한 푼도 쓰지않고 그냥 고스란히 가지고만 있었다. 아르데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뇨. 저는 괜찮으니까 오빠가 필요한데 쓰시는게..."
그 말에 진석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감동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으으. 아르데나는 정말 장하구나! 요 기특한것. 사람을 매도해대며 압박하는 어떤 여자랑은 완전 달라."
진석이 그렇게 말하며 힐긋힐긋 옆에 있던 제이스를 쳐다보자 제이스는 흐흥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진석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
"왜 이런 말도 있잖아. 내 것은 내거, 네 것도 내거. 나야 항상 열과 성을 다해 러셀에게 몸과 마음을 내어주고 있으니... 지갑 정도는 남자답게 넘겨줘야 하는거 아니겠어?"
"...그렇게 말하니 어째 내가 널 돈주고 산다는 것 같다? 이거 환불되냐?"
"안 됩니다~ 반품, 환불 둘 다 불가에요~ 교단의 목적이 달성되는 그날까진 끝까지 옆에 붙어서 뜯어먹을테니까. 후후후."
"우왓 뭐 이런 악질 상품이 다 있어. 도와줘 아르데나, 나 호구 잡혔다 흑흑."
"아, 저기... 그러니까... 히, 힘내세요!"
"뭘 힘내! 열심히 뜯어먹히란 얘기냐!"
셋은 이런식으로 사이좋게 떠들어대며 선셋대로에서의 느긋한 오후를 즐겼다. 극장에서 연극 상연을 감상하고, 제이스를 따라 고급 의류점에 들러 옷이나 악세사리를 사고, 레스토랑에서 술과 식사를 즐겼다. 그저 두 여자의 뒤를 열심히 따라다니는것 뿐이었지만 진석으로도 나름 즐거웠다. 이런식으로도 한가롭게 게임을 즐기는것도 그리 나쁘진 않은것 같았다.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아르데나도 이제 진석과 제이스의 사이에서 완전히 적응이 됐는지, 자주 웃기도 하고 아주 편안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호텔을 나설때부터 그 뒤를 몰래 지켜보며 쭉 쫓고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의식하고 있지 못했다.
그 시각. 그란델 왕궁 안. 아버지인 해밀턴 공작에게 명령을 받은 레오노르 공주는 본성에서 빠져나와 가네딘 후작의 암살이 벌어졌던 대전의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뒤쪽으론 세 명의 여기사가 그림자처럼 붙어 따르고 있었다. 어제 진석이 일격에 쓰러트렸던 그 여기사들이었다. 진석에게 맞아 얼굴에 났던 상처들은 이미 흔적조차 없이 말끔히 치료되어 있었지만 표정은 하나같이 좋지 못했다. 그녀들의 신분도 평민은 아니었다. 하급이긴 하지만 엄연히 무관 집안 출신의 귀족 여성들. 자긍심을 가지고 어려서부터 자신을 단련해 왔는데 호위로서의 일을 완수하긴 커녕 정체모를 자에게 전부 일격에 당한것이다. 공주를 지키는 일에 실패했음에도 별 다른 처벌도 없이 그 남자에 대해 절대 발설 말라는 주의만 받았는데, 그녀들에겐 그것이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차라리 정당한 처벌을 받는게 더 속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어 그 남자를 찾아서 처치한다고 하니 그녀들로선 이 빚을 꼭 갚아주고 싶었다.
"안녕하십니까, 레오노르 아가씨. 오랜만에 뵙는군요."
대전의 앞에선 경장 차림의 여우눈 사내가 레오노르 공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오노르 공주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는 그의 등 뒤로는 해밀턴 가문의 문장이 들어간 무구를 착용한 마흔명의 사내가 열을 맞추어 정렬해 있었다. 이들은 해밀턴 가문의 녹을 받는 가병이었다. 원래 왕궁내로 일반적인 사병은 출입할 수 없었지만 현재 대귀족이 암살이 벌어진 상황이니 귀족들의 호위를 위해 임시로 허락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평범한 사병마냥 어중이 떠중이를 대충 모아놓은 것이 아닌, 아주 어려서부터 자질이 있어보이는 이들을 받아들여 직접 키워낸 가문의 일원이었다. 오로지 해밀턴 가를 향해서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존재로 이들 하나하나가 혼자서도 일반 병사 서넛쯤은 가뿐히 상대하는 실력자들이었다.
"...그래. 오랜만이네 윌포드."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받아주는 레오노르 공주. 그런 그녀를 향해 빙긋 웃어보이는 여우눈의 사내, 윌포드. 해밀턴 공작에겐 그란델 왕국 내에서 널리 무명을 떨치는 두 명의 호위 기사가 있었는데 한 명은 해밀턴 공작의 오른팔이자 '완전무결의 기사'라 불리는 클립튼이었고, 다른 하나가 바로 이 여우눈의 사내 윌포드였다. 꿰뚫는 자, '피어서'란 별명을 가진 윌포드는 단순히 검술 실력 뿐만 아니라 머리회전도 뛰어났는데 사실 그의 전직은 기사가 아닌 도적이었다. 태생과 출신이 알려지지 않은 이 남자는 5년 전 그란델에 흘러들어와 뛰어난 검술 실력과 비상한 두뇌를 살려 근방의 작은 도적단을 하나 둘 끌어 모아 규합했다. 거부하는 자는 해치우며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조직을 만들어 세웠다. 그렇게 무려 이백여명에 가까운 거대 도적단을 구성한 윌포드는 부하들을 이끌고 해밀턴 시 외곽의 작은 요새를 함락시킨 다음, 그곳을 거점 삼아 근처를 지나는 상단을 습격하거나 주변의 작은 부락을 상대로 약탈을 자행하기에 이른다.
이에 해밀턴 공작은 토벌을 위해 직접 일천의 병력을 이끌고 요새를 점거한 윌포드의 도적단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아무리 이백이나 된다지만 다들 제멋대로에 어떠한 훈련도 받지 않은 도적떼. 하지만 윌포드는 그런 도적들을 이끌고도 정규병인 해밀턴 공작군에게 근 일주일 이상을 버티며 허를 찌르는 기습과 기만책으로 의외의 선전을 펼쳤다. 하지만 버티는것도 거기까지. 서서히 요새내의 식량이 바닥나 전황이 불리해지자, 윌포드는 상황의 타개를 위해 직접 해밀턴 공작의 목을 노리고 야습을 걸어온다. 그러나 해밀턴 공작의 곁을 지키던 것은 완전무결의 기사라 불리우는 왕국 제일의 기사 클립튼. 윌포드는 결국 클립튼에게 패배하게 되고 수하인 도적들은 야습의 실패로 포위당해 전멸. 붙잡힌 윌포드도 목이 떨어질 상황에 놓인다.
다른 귀족이라면 도적단의 수괴인 윌포드를 곧바로 처형했을테지만 해밀턴 공작은 달랐다. 비록 도적임에도 수많은 도적들을 규합해 요새를 떨어트리고 정규군에 대항해 여기까지 맞선 그의 기량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해밀턴 공작은 윌포드에게 사면을 댓가로 자신을 따를 것을 제안하고, 윌포드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준 공작에게 전심전력의 충성을 맹세한다. 허나 처음엔 저지른 죄가 있어 주변에서 도적놈이라며 멸시받고 손가락질 받던 윌포드. 그러나 윌포드는 그런 비난따위 요만큼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 비난따윌 신경쓸 성격이었다면 애당초 도적단을 모으지도, 요새를 공격하지도 않았을 터. 이후 윌포드는 해밀턴 공작의 명령에 따라 그란델 왕국내의 다른 도적단을 소수의 병력만으로도 몇 차례나 토벌하고, 국경 외곽 지대에서의 일어났던 몬스터들의 대규모 습격 사태마저 신속하게 제압하며 자신의 능력을 확실히 증명했다. 거기에 더해 해신제의 토너먼트에선 매번 4강에 드는 성적을 차지하곤 했으며, 복수랍시고 해밀턴 공작가를 노렸던 한 도적떼의 잔당을 단신으로 퇴치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니 어느새 그의 실력이나 충성심에 의문을 가지는 여론은 싹 사라지고 어느새 그의 무용을 칭송하는 음유시인 마저 생겨날 지경이었다. 윌포드는 안색이 어두운 레오노르 공주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공작님께 대강의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뭐랄까. 참 재밌는 상황이군요?"
"...하아. 이게 재밌어? 당신다운 말이네."
허나 윌포드의 실력이 어떻든 레오노르 공주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의 아버지인 해밀턴 공작을 따른다고 한 들 그는 전직 도적. 한 나라의 정규군에 싸움을 걸고 무고한 백성들을 약탈했던 자다. 지금은 윌포드의 실력이나 충성심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가 없었지만, 레오노르 공주만큼은 여전히 그가 맘에 들지 않았다. 물론 머리 회전이 빠른 윌포드 역시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뭐 레오노르 아가씨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는 잘 압니다만... 일은 일이죠. 자, 여기서부터 시작해볼까요?"
저 가벼운 말투가 신경을 자극한다. 레오노르 공주는 인상을 썼지만 그의 말대로 일은 일. 윌포드가 맘에 들지 않는다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한낱 개인 감정의 문제. 지금 중요한것은 어제의 그 흑발 사내를 찾아서 제거하고 폭풍의 지팡이를 회수하는 것이었다. 사소한데서 화를 내며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사실 오기전에 가네딘 후작의 호위기사도 한 명 만나보고 사건 상황의 정황이 담긴 서류도 대강 훑어봤습니다."
윌포드는 무릎을 꿇고 앉더니 아직 바닥에 선명한 가네딘 후작의 핏자국을 살펴보았다. 가로세로 한 자 길이의 포석으로 포장된 보도 위엔 시커멓게 변한 피의 흔적이 타원을 그리고 있었다.
"겨우 십수미터 거리까지 다가와 정확히 머리에 파고드는 단검 투척이라. 거참 무섭네요. 활이나 석궁, 하다못해 마법도 아니고 이런식으로 암살을 시도하는 놈이 있다니? 너무 무식할 정도라 무서워요."
"......"
가네딘 후작의 암살에 사용된 그 단검을 건네준게 바로 레오노르 공주 자신 아니었던가? 그녀는 아무 대답없이 입을 다물었다. 물론 윌포드는 해밀턴 공작에게 전해들어, 레오노르 공주가 가네딘 후작의 암살에 관여된 사실과 암살자에게 단검을 넘겨줬다는 것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윌포드는 레오노르 공주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줄이며 물었다.
"그보다 어떤 자였나요? 가능한 기억나는 사실을 제게 알려주셨으면 좋겠는데."
"...검은머리에, 키나 체구는 보통. 굉장한 미남이야. 클립튼보다도 잘 생겼어."
"호오?"
해밀턴 공작의 오른팔이자 완전무결의 기사라 불리는 클립튼은 얼굴마저 대단한 미남자였다. 왕국 제일의 뛰어난 실력과 선량한 인품, 거기에 멋진 외모까지. 그래서 클립튼의 주변엔 그를 사모하는 여자가 하나둘이 아니었는데 그런 클립튼보다도 미남이라? 윌포드는 호기심이 동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거참 재밌는 상대네요. 검은 머리, 보통 체구에 눈이 번쩍 띄일 미남이라. 이거이거, 수배령만 내리면 찾기 쉬울텐데요?"
찌푸려지는 레오노르 공주의 미간. 그녀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저었다.
"수배령은 안돼. 내가 지금 아무도 모를 암살자의 외모를 증언한다는건 '네, 제가 그와 관련이 있는 배후입니다' 하고 동네방네 떠드는 격이잖아. 게다가 지팡이도 회수해야 하니 어디까지나 조용히 처리해야돼."
"핫하. 뭐 저도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보다 우선 이 미남씨가 왕궁에 어떻게 들어왔고 어디로 사라졌는지가 궁금한데요. 이 자의 수법이나 전후의 행적을 조사하면 배후를 알아내거나 추적을 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경비대의 조사로는 외부인이 드나든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고 하던데?"
윌포드는 큭큭 조소하며 고개를 가볍게 좌우로 흔들었다.
"왕궁내에 목줄이 메인채 매일 똑같은 장소에서 규칙적으로 근무나 서는 멍청이들이 뭘 알겠습니까? 틀림없이 누군가 조력자가 있거나 아무도 모르는 비밀 통로라도 있는거겠죠."
"...아."
비밀 통로라는 말에 뭔가 짐작가는 바가 있는지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두드리는 레오노르 공주. 윌포드는 가느다란 여우눈으로 눈웃음을 지어보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뭔가 짐작가는게 있으신가요?"
"응. 하지만..."
왕궁 내에 있는 탈출통로. 쓰이지 않는 창고를 가장한 그 통로의 위치는 병영 막사 뒤쪽의 작은 창고 지하에 있었다. 허나 그것은 오로지 왕족만이 알고 있는 비밀의 길. 자신도 가본적이 있는것은 아니지만 오래전 아버지가 일러주었기에 일단 위치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직 왕족만이 아는 비밀통로를 어떻게 알고 그곳으로 침입한단 말인가?
"말도 안돼. 차라리 조력자가 있다는 쪽이 더 현실적인데..."
"가네딘 후작 가문 측 사람들이나 그쪽 파벌의 귀족나리들도 왕궁내에 부정한 조력자가 있을거라며 조사관입네 뭐네 잔뜩 보내서 애꿎은 시종이나 하녀들, 경비병들만 죽어라 족치더군요. 그들이 아무리 무능해도 하루종일 이런 대대적인 조사를 벌였으면 뭔가 흔적 정도는 찾아냈을텐데. 아직 아무말도 없던걸요?"
"......"
설마. 그렇다면 어제 그 남자는 탈출통로를 거슬러 왕궁으로 잠입한 것인가? 믿긴 어려웠지만 그게 정답인 것 같았다. 도대체 이 남자의 정체는 뭘까? 갑자기 창문으로 뛰어들어 자신을 덮칠땐 정말 놀랐었다. 순간적으로 빠른 판단을 내려, 연기를 해 속인다음 호위기사를 이용해 붙잡으려 했지만 되려 목숨을 위협받기도 했고. 결국엔 그와 폭풍의 지팡이를 놓고 암살의 거래를 해버리기도 했다. 새삼 떠올려보니 어제 그 남자와 상대하고 있을때의 자신은 분명 평정을 유지하지 못한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었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금고실에선... 느닷없이 입술을 빼앗기기까지.
"...으으으."
기습적으로 입술을 빼앗겼던 일을 생각나니 속에서 울화가 치민다. 그 이상한 놈이 하필이면 자기가 있던 방에 뛰쳐들어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본성에 넘쳐나는게 방인데 대체 왜 나야! 망할놈! 인생의 오점! 반드시 없애 어둠속에 묻어버릴테다!
"어랏. 아가씨. 표정이 무섭군요. 괜찮으십니까?"
윌포드의 말에 핫 하고 정신을 차리는 레오노르 공주. 태연한 척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괘, 괜찮아! 그보다 윌포드. 당신만 따라와.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못할 중요한 게 있으니까."
레오노르 공주의 말을 들은 윌포드는 고개를 끄덕이곤 뒤쪽에서 대기중이던 가병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알겠습니다. 다들 들었지? 함께 왕궁 정문의 대기소로 가 기다리도록. 아, 그쪽의 호위 기사님들도 같이."
윌포드가 마치 아랫사람 부리듯 레오노르 공주의 전속 호위인 여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리자 그녀들은 동시에 발끈했다.
"무슨! 우리는 레오노르 공주님을 지켜야 할 의무가..."
"하하. 어제의 일은 자~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만? 애당초 여러분들이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해서 지금의 상황에 일조한거 아닙니까? 난 해밀턴 공작님의 명으로 아가씨를 돕고 있는거니 좋게 말할때 제 지휘에 따르시죠."
"큿..."
분노하는 기색이 역력한 여기사들. 하지만 해밀턴 공작이 윌포드에게 레오노르 공주를 도우라는 명을 내린이상 아무리 분해도 지금은 그의 지휘를 따르는게 옳았다. 그녀들은 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채 가병들의 뒤를 따라 대기소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눈썹을 살짝 찌푸리는 레오노르 공주.
"너무 무례하게 굴진 말지 그래? 그녀들은 결코 실력이 없는게 아니야. 상대가 너무 강했던거지."
레오노르 공주는 자신의 호위인 여기사들을 두둔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윌포드는 얼굴에 시종일관 띄우고 있던 가면같은 미소를 지우면서 대꾸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원래 도적놈. 하지만 실력있는 도적놈이었지요. 칼 한자루와 세치 혀만으로 이백이나 되는 도적떼를 규합해 요새를 하나 떨어트리기도 했습니다. 저를 막으러 출정한 해밀턴 공작님껜 그 칼끝을 향하고 죽이려고도 했었지요. 그런 제가 어째서 공작님의 수하가 되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걸까요?"
"그건... 클립튼이 당신을 막았으니까."
뭐지. 윌포드는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걸까? 윌포드는 의문이 담긴 레오노르의 시선을 받아넘기며 계속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공작님의 호위 기사인 클립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말 훌륭한 기사지요. 완전무결이라는 말이 그렇게 어울리는 남자도 또 없을겁니다. 인간적으로도, 남자로서도 정말 존경스러운 사람이죠. 하지만 그때 그 자리에 클립튼이 없었다면 상황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
"해밀턴 공작님은 제 손에 살해 당했을겁니다. 네. 클립튼만 없었더라면 분명 그렇게 되었겠지요. 제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호위 기사란 방패입니다. 자신의 전부를 내던져서라도 섬기는 자의 목숨을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실패했지요. 레오노르 아가씨는 운 좋게도 별 다른 해를 입지 않고 끝났지만, 그래도 실패는 실패. 원래대로라면 그녀들의 목을 쳐 날려도 시원찮은 상황입니다."
"윌포드...!"
"오오.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지으실 것 없습니다. 제게 그녀들의 목숨을 박탈할 권리따윈 없으니까요. 하지만 자신의 주인을 지키는데 실패했다는 부끄러움보다, 패배한 상대에 대한 복수심이 더 커 보인다는게 마음에 안들지 뭡니까. 그런 의미에서 제가 이번 일을 돕는동안은 이따금 그녀들을 좀 괴롭혀 주겠습니다. 사소한 벌이니까 그 정도는 방금처럼 못본척 넘어가 주시죠."
자기 할 말을 다 해놓곤 다시 태연한 모습으로 싱글벙글 웃어보이는 윌포드. 뭐야 이 제멋대로인 태도는? 레오노르 공주는 역시 윌포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가 한 말은... 분명 정론이었다. 레오노르 공주는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좋을대로 해. 단, 이번일이 끝날때 까지만이니까. 너무 심한짓은 하지말고."
윌포드는 레오노르 공주에 승낙에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며 예를 표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그러면, 어디로 가야할까요?"
"...병영의 막사. 그 뒤쪽에 있는 작고 오래된 창고야. 왕족을 위한 탈출통로가 거기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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