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4. -- > * 48화 *
레오노르 공주가 먼저 걸음을 옮기자 윌포드는 그녀에게서 서너걸음 떨어진채 느긋한 태도로 뒤를 따랐다.
"그렇군요. 그런 통로라면 아마 본성 지하에 있지 않을까 추측했었는데 의외의 장소에 있었군요."
"당연하지만 이건 왕족이 아닌자에겐 알려줘선 안되는 비밀이야.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지만... 만에 하나 누구에게 발설했다간..."
"걱정마십시오 아가씨. 입단속 정도는 알아서 하겠습니다. 개도 주인은 물지 않듯, 하물며 지금의 전 해밀턴 공작 가의 녹을 먹는 기사니까요."
그리고 뚝 끊긴 대화. 둘은 별 대화없이 병영쪽의 창고로 향했다. 병영쪽으로 향하니 자연히 주변에 돌아다니는 경비병들의 숫자도 늘어나. 레오노르 공주를 알아본 경비병들이 연신 경례를 해왔다. 윌포드는 경비병들을 보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레오노르 아가씨. 그러고보니 그 미남씨는 경비병 복장을 하고 있었다고 했죠? 게다가 막사내에서 취침 도중 자신의 옷이 도둑맞았다는 증언을 한 경비병도 있었다고 하고... 아마 우리가 찾는 문제의 미남에겐 달리 조력자가 없는건 확실한 것 같군요."
"왜지? 통로는 통로고, 별개로 내부에 아직 찾지 못한 조력자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런이런. 레오노르 아가씨, 그 미남과 만난건 본인이면서 무슨 대화를 나누셨는지 벌써 잊어버리신겁니까? 제가 공작님께 들은 내용으론 분명..."
'아차.'
레오노르 공주는 퍼뜩 어제의 그 남자, 진석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는 분명 자기 입으로 '내가 한낱 귀족 나부랭이 따위의 졸개로 보였단 말인가?'라고 했었다. 왕궁내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귀족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아까 추측했던대로 탈출통로라도 이용하지 않는 이상 성벽과 병사들로 완벽히 보호받는 왕성에 침투하는건 물리적으로 무리다. 즉, 그렇다는건...
'왕당파와 대립중인 귀족연맹쪽이 아닌... 제 3의 세력에서 보낸자.'
그러고보니 귀족연맹이 폭풍의 지팡이를 노릴 이유는 없다. 귀족연맹도 결국은 그란델이라는 국가에 소속된 자들. 폭풍의 지팡이를 훔쳐 나라의 안보를 흔들리게 한다고 이득이 될 것은 없다. 일단은 나라가 굳건해야 그들도 자신의 영지와 재산을 지킬 수 있을테니까. 그리고 애당초 어제 그 남자의 배후에 귀족들이 있었다면 굳이 들킬 위험을 감수하면서 경비병 옷을 훔쳐입는다거나 하지 않고, 그냥 귀족의 호위 기사로 위장해 간단하게 왕궁안에 발을 들일 수 있었을터. 게다가 그는 자신과 거래해 귀족연맹의 우두머리인 가네딘 후작마저 죽이지 않았던가? 즉, 그 남자는 그란델 내부가 아닌 그란델 외부의 어느 세력에서 보낸 자라고 보는게 옳을것이다. 왜 이런 간단한 걸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을까? 레오노르 공주의 안색이 찌푸려졌다.
"그렇다면... 폭풍의 지팡이를 훔쳐낸다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벌써 도시를 빠져나가지 않았을까? 이제와서 통로따윌 살펴봐야..."
"아뇨. 그러니 더더욱 살펴봐야합니다. 앞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 자의 행적을 조사하면 배후를 알아내거나 추적을 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니까요."
"...알았어."
병영의 본부 건물에 들러 횃불을 하나 얻은 레오노르 공주와 윌포드는 함께 막사 뒤편에 지어진 창고건물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안에서 먼지가 풀풀 날리는 바람에 레오노르 공주는 손수건으로 입을 막으며 뒤로 물러섰다.
"이거 엉망이군요. 제가 앞장서지요."
횃불에 불을 붙인 윌포드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엔 일자형 복도가 안쪽으로 쭉 뻗어있었고 총 여섯개의 창고방이 있었다. 레오노르 공주는 윌포드의 뒤를 따라 내려가며 말했다.
"가장 안 쪽의 창고야. 자세한건 모르지만 아무튼 거기에 탈출통로의 입구가 있다고 들었어."
윌포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복도를 지나 맨 안쪽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지나는 와중 다른 창고방을 슬쩍 들여다보기도 했는데 별볼일 없는 잡동사니만이 쌓여있을 뿐이었다.
'과연. 탈출통로를 감추기 위해 대충 명목상으로 지어놓은 창고인가. 꼴을 보니 분명 쓰이지도 않는것 같고.'
맨 안쪽의 방에 도달해 들어가니 이곳도 앞의 방들과 크게 다를건 없어보였다. 방 위쪽엔 손바닥만한 채광창이 하나 덜렁 뚤려있었고 휑한 내부엔 잡동사니가 들어있는 나무상자가 몇 개 굴러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윌포드는 잠시 창고안을 돌아다니며 주변을 둘러보다, 어느 지점에서 바닥을 딯는 소리가 다른걸 깨닫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돌바닥의 또박하는 소리가 아닌 속이 빈 철판을 밟는 텅 하는 소리였다.
"호오. 이건가요?"
"그런가보네."
탈출통로가 어디있나 살펴보던 레오노르도 윌포드가 뭔가 발견한 것을 보곤 그에게 다가갔다. 검게 칠해진 철판이 바닥 한쪽에 깔려있었다. 적당히 성인 한 명이 드나들만한 크기. 실내가 워낙 어둡고 바닥에 깔린 돌도 어두운색이라 정말 얼핏봐선 여기에 이런 철판이 있다는것도 알아채지 못할성 싶었다.
"가네딘 후작의 암살때문에 분명 이 창고에도 수색하는 인원이 한 번쯤 들어오긴 했을텐데, 이렇게 교묘하게 칠해져 있으니 언뜻봐선 발견하지 못할만도 하군요. 애당초 이렇게 먼지만 가득한 휑한 창고방을 꼼꼼하게 살펴볼 사람도 없었을테고. 아무튼 한 번 열어보겠습니다."
횃불을 벽의 횃불걸이에 걸어둔 윌포드는 철판의 한쪽을 잡고 영차 하며 위로 들어올렸다. 철판을 걷어 올리고 안쪽을 들여다보니 엉망으로 부서진 사다리와 입구 주변에 박힌 철막대들, 그리고 그 철막대에 묶여진 밧줄자락이 보였다. 윌포드는 그것들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이건... 사다리가 부서진지 그리 오래 된 것 같진 않군요. 일부러 부순게 아닌 피로파괴 같은게... 아마 철판 입구 위에 이 상자라도 올려져있어서, 아래에서 그걸 밀어내기 위한 지지대이자 발판으로 쇠막대와 밧줄을 이용한 것 같군요. 사다리는 그 와중에 부서진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설명은 됐고, 그래서 그 남자의 정체에 대해 뭔가 알 것 같아?"
"아뇨. 아무리 저라도 이것만으론 알 수 없군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이는 윌포드. 레오노르 공주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그럼 대체 뭐하러 여길..."
"그보다 이 통로. 어디로 연결되는지 아시나요?"
레오노르 공주의 말을 잘라먹으며 질문을 던지는 윌포드. 무례하긴. 역시 레오노르 공주는 이 남자가 맘에 들지 않았다. 이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잠시 기억을 더듬어본 레오노르 공주는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윌포드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등대야. 유사시 배를 타고 도시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부둣가 근처에 세워져 있는 등대의 지하로 이어지는걸로 알고있어."
"그렇군요. 그럼 이번엔 거기로 가볼까요."
철판으로 탈출 통로의 입구를 덮고 벽에 걸어두었던 횃불을 회수한 다음 앞장서서 창고를 나서는 윌포드. 레오노르 공주는 그의 뒤를 따르며 과연 이런식으로 조사해서 그 남자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도시의 남쪽방면. 경치가 좋은 해수욕장 부근엔 건물의 외부까지 가게를 확장하거나 길가에 테이블을 늘어놓고 장사하는 술집과 음식점이 드글거렸다. 좋은 경치가 보이는 자리라는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장사수단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이쪽 해수욕장 부근의 가게들엔 관광객들이나 젊은 층의 손님들이 주로 많이 몰렸다. 진석 일행은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호텔로 돌아가지 않았다. 제이스의 손에 이끌려 몇시간이나 더 여러 가게를 돌며 쇼핑을 즐긴 다음 이제서야 한 숨 돌리기 위해 한 펍에 멈춰선 것이다. 음료와 간단한 먹거리를 주문해 놓곤 사람이 넘쳐나는 거리와 밤바다의 풍경을 보며 휴식을 취했다.
'현실이나 게임이나 여자 쇼핑 따라다니는건 사람 할 일이 아니구나.'
달리 여자친구가 없었던 진석. 젊은 여자들의 쇼핑에 따라가 본 경험이라곤 두세살 터울의 친척 누나들을 따라가봤던 딱 한 번 뿐이다. 그때 반나절 내내 누나들의 뒤만 따라다니다 정말 지겨워 죽는 줄 알았었다. 자기 눈으론 아무리봐도 그냥 그게 그거 같은데 본 걸 또 보고 이걸 집었다 저걸 집었다 또 다른걸 골랐다... 그리고 또 다른 가게에 가서 그걸 반복. 진석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필요한거 골라서 계산대에 가져가면 끝. 그게 쇼핑 아닌가?
'쓸데없이 게임에서까지 이런거 구현해 놓지 말라고.'
테이블에 코를 박고 으으 죽어가는 신음성을 내는 진석. 반면 제이스는 아까부터 원없이 즐긴 쇼핑에 기분이 좋아진건지 표정도 밝고 활기차 보였다. 그저께, 진석이 제이스를 밤새 괴롭히고 이른 아침 카페로 카야를 만나러 갔을때완 서로 딱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아르데나도 처음엔 지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진석을 신경쓰는 것 같았지만 여자는 여자라서인지 어느샌가 제이스의 뒤에 바짝 붙어 함께 수다를 떨며 쇼핑에 몰두했다. 지금도 제이스와 함께 오늘 산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나누고 있는 참이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게 평소의 오빠바라기 같던 태도는 온데간데 없었다.
'그야 머릿속에 별 기억도 남아있지 않은 아이니까... 아무것도 아닌 쇼핑조차도 아르데나 입장에선 저렇게나 재밌었겠지.'
스스로 납득해버리는 진석. 하지만 서럽다. 뭔가 굉장히 서럽다! 자신은 오늘 하루종일 그저 두 여자의 짐꾼이자 지갑으로 뒤만 졸졸 따라다닌것이다.
'나는... 뭘까.'
테이블에 얼굴을 박은 자세 그대로 멍한 시선을 거리쪽으로 돌리는 진석. 수많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거나 하며 길을 지나다니고 있었다. 와글와글 붐비는 인파. 그런데 그 수많은 사람들 중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어?'
골목 한 귀퉁이에 서 있는 남자. 평범한 일상복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얼굴엔 안경을 쓴게 어째 꼭 간단한 변장을 한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진석과 눈이 마주친 그는 잠깐 멈칫하더니 자연스레 골목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야 저거?'
평소라면 가변 NPC인 행인따위와 눈이 마주치는 것 쯤 별로 신경쓰지 않을테지만... 지금은 어째 싸한게 묘한 촉이 온다. 눈이 마주치자 자리를 피하는 저자의 태도가 어쩐지 수상했다. 이거 뭔가 있는것 같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그냥 우연일수도 있었지만 왠지모르게 한 번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저 자신의 착각이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면? 그냥 그걸로 땡인거다. 진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하하. 정말 아까 그거... 어라? 왜 그래 러셀?"
제이스는 한참 아르데나와 이야기를 나누다, 진석이 심각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진석은 손을 들어 사내가 사라진 골목방향을 가르키며 말했다.
"저쪽에서 왠 수상한 남자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것 같더라고. 잠깐 살펴보고 올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엇... 러셀? 러셀!"
제이스가 뒤에서 불러세웠지만 진석은 더 머뭇대다간 상대를 놓칠것 같아 아까 수상한 남자가 사라진 골목쪽으로 몸을 날렸다. 넘쳐나는 인파가 방해됐지만 억지로 마구 헤치고 지나가며 길을 뚫고 나갔다. 여기저기서 항의의 목소리나 욕설이 들려왔지만 그딴거 알게 뭐냐. 우격다짐으로 사람들을 거슬러 골목으로 들어서자 골목 저쪽 끄트머리에 서있는 아까 그 모자안경남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뒤를 따라온 진석을 보고 깜짝 놀라더니 갑자기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야, 너!"
촉이 맞았구나! 저자의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건 틀림없는것 같다. 저렇게 도망가는것만 봐도 저 남자가 수상하다는건 백퍼센트 확실! 자세한 이야기는 일단 붙잡아서 몇 대 패놓고 해도 충분했다.
"거기 안 서?"
달리기에 집중하는 민첩 41의 발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현실에선 맛볼 수 없는 쾌속의 준족! 이 다리로 백미터를 전력질주한다면 6, 7초대로도 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야말로 가상 현실에서만 가능한 바람같은 스플린트. 골목의 풍경이 쭉쭉 좁혀지며 도망가는 남자와의 간격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히익!"
도망가던 남자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오는 진석을 돌아보곤 기겁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뭔가를 꺼내 바닥에 세차게 집어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그것들은 퍼엉 낮은 소리를 터졌는데, 곧 흰색과 노랑 두 가지 색의 연막이 순식간에 화악 피어올랐다.
"뭐야, 연막탄?"
게임상에 이런것도 있었나? 경험많은 진석도 이 연막탄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진석은 연막이 터진 곳 바로 앞에서 속도를 줄이며 멈춰섰다. 흰색은 보통의 연막인것 같았는데, 노란색의 연막은... 눈과 코를 바늘로 찌르듯 파고든다!
"최, 최루탄?! 콜록!"
실수로 노란 연막을 한 모금 들이켰더니 화면 하단에 최루상태의 상태 이상 아이콘이 떠오르며 눈물과 콧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진석은 재빨리 뒤로 몇걸음 물러섰다.
"콜록! 아오 눈 매워. 에이씨, 이거 뭐하는 놈이야? 놓칠까보냐!"
진석은 옷소매로 코와 입을 막으며 달려나갔다. 골목의 벽 쪽으로 달려나가 힘껏 점프한 다음 라파가의 숏대쉬로 벽을 박차며 연막의 위쪽을 뚫고 나갔다. 연막을 돌파한 다음 바닥에 착지하니, 막 저쪽 골목에서 꺾어지고 있는 사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넌 잡히면 죽었어!"
라파가! 라파가! 라파가, 라파가, 라파가! 앞으로 뛰쳐나가는 진석의 두 다리에선 라파가가 쉴새없이 발동되었다. SP가 엄청나게 소모되는것 따윈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전속 이동에 집중하는 진석. 팟팟팟! 연속으로 거리를 건너뛰듯 이동하는 그 모습은 마치 단거리 순간이동 능력자를 보는 것 같았다. 뭔가의 꾸러미를 안고 근처를 지나가던 한 젊은 아가씨는 초고속으로 거리를 돌파하는 진석의 모습을 보곤 꺄악 새된 지명을 지르며 제자리에 주저앉기도 했다.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여러분의 친절한 이웃입니다!"
실없는 소리를 남기며 추적을 계속 해나가는 진석. 하지만 상대가 이 골목쪽을 빠져나가 인파가 많은 거리로 몸을 숨기면 분명 놓치게 될터! 거기에 생각이 미친 진석은 라파가의 숏대쉬로 벽을 타고 올라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섰다. 기껏 2층 짜리 건물, 라파가를 이용한 대쉬 점프 두 번이면 가볍게 뛰어오를 수 있었다. 건물 옥상으로 올라선 진석은 아까 그 사내가 꺾어진 방향을 살피며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넘고 계속 달렸다. 건물들의 풍경이 휙휙 바람같이 뒤로 흘러갔다.
"거기냐!"
막 골목에서 벗어나 자연스레 사람들 사이로 몸을 숨기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진석은 옥상에서 바로 대로쪽으로 풀쩍 뛰어내리며 그 사내를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소매치기야!"
기차 화통을 삶아먹었나 싶은 엄청난 고성. 거리를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에, 주변을 걷던 사람들은 모두 제자리에 멈춰선채 진석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처억 뻗어 저 앞쪽에 있는 모자안경남을 가르키는 진석.
"저기 저 모자쓴놈! 소매치기야아아!"
진석에게 집중되었던 수많은 시선이 손가락의 방향을 따라 모자안경남에게 향했다. 순식간에 자신에게 집중된 거리의 이목에 화들짝 놀라는 그. 흐아아 맥빠진 소리를 내며 반대쪽 골목으로 허둥지둥 도망가기 시작했다.
"거기서라 이 소매치기이이이!"
진석이 소리를 지르며 그의 뒤를 쫓자 인파가 좌우로 쫙 갈라졌다. 소매치기를 쫓는다는데 막아설 이유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자연스레 진석의 진로에서 비켜서주었다.
"히이이! 나, 나 소매치기 아닌데에에에!"
억울하다는 듯 힘빠진 변명을 내지르며 골목으로 달려들어가는 사내. 진석은 전력으로 달려 그 뒤를 바짝 따라잡았다.
'근데 어째... 목소리가 톤이 높다?'
히익 거리는 상대방의 목소리가 어째 남자의 그것이라기엔 가볍고 새되다. 아니, 지금 목소리 따위가 중요한게 아니지. 결국 골목 한 가운데에서 상대를 따라잡은 진석은, 그의 뒷덜미를 확 나꿔채며 거칠게 벽쪽으로 몰아세웠다.
"힉! 히익!"
상대는 붙잡혀서 벽에 밀어붙혀지자 부들부들 떨며 다가오지 말라는 듯 양손을 휘적휘적 내저었다. 아까 멀찍이 떨어져서 볼땐 몰랐는데 붙잡아놓고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어째 체구도 자그마하고 팔다리도 가늘다? 진석은 그에게 한 발 다가서며 깊게 눌러쓴 모자를 손으로 탁 쳐서 날렸다.
"너! 정체가 뭐냐!"
"아, 안돼!"
눈을 질끈 감으며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그. 모자속에 감춰져있던 긴 머리카락이 출렁 흘러내렸다.
"...어? 여자?"
어깨에 닫는 단발.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들여다 보이는 주근깨 돋은 얼굴. 큼직한 안경을 쓰고 있는 눈앞의 상대는 분명 여자였다. 그러고보니 남성용 옷을 입고 있어서 그렇지 가만 보니 분명 가슴도 약간 부풀어 있었다.
'이거 대체 뭔... 이 여자는 뭐야?'
문득 골목 저편을 보니 아까의 소란때문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 이쪽을 바라보며 웅성대고 있었다. 안되겠다. 진석은 상대방의 멱살을 쥐며 더 깊은 골목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쪽으로 따라와."
"으아! 끄악! 사, 살려주세요! 싫어!"
겁을 먹은 표정으로 양손을 마구 내저으며 반항하는 그녀. 진석은 아랑곳 하지 않고 그녀를 질질 끌고았다.
"누가 죽인댔냐? 얘기나 좀 듣자."
"안돼! 강간범! 꺄악! 누가 도와줘요!"
"...야 내가 강간범이란 소리를 좀 싫어하거든? 한 대 때린다?"
"힉! 포, 폭력반대!"
뭐야 이 웃기는 여자는? 진석은 구경꾼의 이목이 닿지않는 골목 깊은곳까지 그녀를 한참 데리고 들어온 다음 구석에 밀어 붙여놓고 물었다.
"하아...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너 누구냐."
"마... 말 할 수 없어요."
네가 지금 상황에서도 정신을 못차리는구나. 진석은 그녀에게 자신의 주먹을 들어보였다.
"대답 안하면 맞는다?"
"싫어! 아픈건 싫어!"
"그럼 말해. 넌 누구고 왜 날 지켜보고 있었지?"
"그... 그건 그냥... 그, 그쪽이 잘 생겨서..."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여자의 이마에 가벼운 촙을 먹이는 진석. 여자는 크게 움찔하더니 머리를 감싸쥐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 당신이 저번달에 죽은 내 지인과 닮아서 나도 모르게 뒤를 쫓..."
"야 자꾸 헛소리 할래?"
재차 촙을 먹이는 진석. 이번엔 아까보다 좀 더 세게 때렸다. 확실히 이번건 아팠던지 여자는 히잉 울상을 짓더니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의뢰를 받고... 미행을..."
"...!"
미행이라니? 대체 누가? 지금 이 도시에서 자신에게 미행을 붙일만한 상대는 몇 없을텐데, 설마 카야가 정신 못 차리고 또 수작을? 그럴리가. 미친게 아니고서야 자기 가족과 조직이 망할 위기를 무릅쓰고 이런짓을 하겠는가? 아니면 혹시 어제 왕궁에서 거래를 했던 그 왕가슴... 아니, 레오노르 공주? 아니지 아니야. 레오노르 공주는 진석 자신의 정체는 커녕 아직 이 도시에 남아있다는 사실조차 모를거다.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어떻게 미행을 붙인단 말인가? 게다가 그녀의 성격이라면 미행같은걸 붙이느니 직접 찾아와 담판을 짓지 않을까? 잠깐 스스로 고민해봤지만 아무래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진석은 안경을 쓴 주근깨 여자의 멱살을 쥐고 벽에 밀어붙이며 물었다.
"누구야. 그 의뢰를 지시한게."
"힉! 히익! 그, 그것만은 말 못해요! 가진 돈 다 드릴테니까 놔주세요!"
아니 이것들은 내가 거지로 보이나. 카야나, 레오노르 공주나, 이 여자나. 죄다 돈돈돈, 돈타령 뿐이다. 진석은 왠지 조금 열이 받았다.
"나 돈 필요없거든? 그렇지. 아까 네 말대로 강간이라도 해줄까? 여긴 보는 사람도 없고. 아니 뭐 보여도 상관없지. 구경거리로 만들어 줄까? 앙?"
"꺄아아아... 흡! 으브으브흐브으!"
진석의 천박한 협박에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여자. 진석은 화급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쭈 이게? 내가 개인적으로 충격받고 나름 반성한 바가 있어서 왠만해선 험한짓은 자제하려 했건만 네가 제 목을 죄는구나. 어디 혼 좀 나봐라... 으, 으악?!"
입을 틀어막은 진석의 손을 붙잡더니 앙 하고 힘껏 깨무는 여자. 아니 이게 증말! 순간 화가 난 진석은 그녀의 뒷덜미에 힘껏 촙을 내리쳤다.
"키힝!"
힘을 제어하지 않고 반사적으로 내리친 촙이라 아주 제대로 들어간건지, 여자는 꼴딱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바로 기절해 버렸다. 무력 46짜리 촙을 직격으로 먹었으니 목이 안 부러지고 기절로 끝난게 천만다행이었다. 진석은 바닥으로 추욱 늘어지려는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
"...어휴 정말. 어째 가면 갈수록 뭐가 자꾸 첩첩산중이구나. 대체 뭐야 이 여자?"
진석은 정체 모를 안경녀를 등에 업어메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아까 그 해변가의 펍에서 제이스와 아르데나가 자신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터. 하지만 갑자기 사라지더니 낯선 여자를 메고 나타난 이 꼴을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벌써부터 설명할 일이 귀찮았다. 안 그래도 하루종일 쇼핑에 끌려다녀 피곤해 죽겠구만! 왠 별 이상한게 다 나타나는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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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한 번 했던 이야기지만, 부족함이 많은 조악한 글임에도 재밌게 봐주시는 분들에겐 정말 감사드립니다. 조횟수나 선작이 조금씩 늘어나는걸 보면 기쁘기도 하고 어째 부끄럽기도 하고.. 달리 뭐라 표현할 길이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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