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49화 (49/155)

< --   - 4.   -- >         * 49화 *

도시의 남동쪽 끝자락, 등대의 앞. 레오노르 공주와 윌포드는 막 등대의 내부를 조사하러 방문한 참이었다. 하지만 등대를 지키던 경비병들은 왕궁의 병사들과는 달리 레오노르 공주의 얼굴을 모르는지 등대 안쪽을 통 개방해주려 하지 않았다. 공주고 뭐고, 그들 입장에선 상대가 달리 명령서를 가지고 온것도 아닌데 무슨 권한으로 출입을 허가해준단 말인가? 하지만 그때 뒤에 있던 윌포드가 나서니 병사들의 태도는 금세 180도 바뀌었다. 매해 해신제때마다 토너먼트에 출전해 4강에 드는 성적을 올리는 기사 윌포드의 얼굴을 아는 병사들이 제법 있었던 것이다. 꿰뚫는자, 피어서 라는 별명을 지닌 그의 매서운 검격은 왕국내에 꽤 정평이 나있었다. 레오노르는 공주인 자신은 못 알아보고 도적 출신인 기사를 알아보는 경비병들의 태도에 어째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아랫사람 상대로 자존심 내세워봤자 자기 꼴만 더 한심해 질 따름이니, 그냥 얌전히 윌포드의 뒤를 따라가 등대의 안쪽을 조사했다. 이래저래 정말 싫은 남자였다. 아무튼 등대의 가장 깊은 지하실 창고엔 낡은 천과 잡동사니로 가려진 탈출통로의 출구가 있었다. 왕궁의 창고에서 본 것과는 다른 그냥 평범한 나무 덮개문이었다. 그런데 주변엔 먼지가 수북한게 누군가 드나든 흔적같은건 전혀 없었다. 윌포드는 흐음 하고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하긴 등대는 병사들이 24시간 교대로 지키고 있으니 그들을 쓰러트리지 않는 이상 여기를 통해 출입할 순 없었을테고. 게다가 여길 누군가 이용한 흔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는건..."

"보나마나 여기 외에 통로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또 있다는 이야기겠죠. 일단 한 번 내려가 볼까요?"

윌포드는 위로 올라가더니 병사들에게서 횃불을 하나 얻어와, 레오노르 공주와 함께 아래쪽으로 내려가보았다. 과연 윌포드의 예상대로 저쪽 통로의 끝에서 파도치는 소리와 더불어 빛이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윌포드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저쪽은 분명 해안 절벽. 절벽 한 가운데에 난 동굴의 입구로 기어들어와 왕궁의 지하까지 갔던 모양이군요."

레오노르 공주는 윌포드와 함께 통로의 끝까지 다가가 그 주변과 밖을 살펴보았다.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듯한 동굴의 바로 앞엔 거대한 바위가 마치 이쪽을 가리듯 막아서고 있었고, 아래쪽의 바다는 주변에 솟은 바위나 암초들때문에 파도가 거칠게 몰아치고 있었다.

"잘도 이런곳으로 잠입했군요. 잘못하면 휩쓸려 익사하기 쉽상일텐데 무슨 재주로 기어 올라온건지 놀랍습니다. 아무튼 다시 위로 올라가보죠. 병사들에게 물어볼것이 있습니다."

연신 싱글거리며 즐겁다는듯 떠들어대는 윌포드. 폼을 보니 아무래도 추적하는 상대의 정체에 대해 호기심이라도 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레오노르 공주는 즐거워하는 윌포드의 모습에 기분이 더 나빠졌다.

'이딴게 즐겁나보지? 정말 이해 못하겠어...'

하지만 레오노르 공주 본인은 이런 추적이나 조사 부분엔 아는게 하나도 없었으니 좋건 싫건 전적으로 윌포드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전직 도적떼의 수령이었던 이 남자는 이쪽 방면으로 나름대로 아는게 있는것 같았으니까. 게다가 아버지가 직접 지목해서 붙여준 사람 아닌가.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같이 다닐 수 밖에 없었다. 윌포드는 계단을 통해 올라가다가, 뭔가 발에 으지직 밟히는걸 깨닫고 즉시 바닥에 횃불을 들이대며 뭐가 있나 살펴보았다.

"흐음? 이건... 나무?"

뭔가를 깎아낸듯한 나무 부스러기. 레오노르는 그 조각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 나무 부스러기는 무기를 다 잃었던 진석이 벽에 걸려있던 횃불의 자루를 말뚝으로 쓰기위해 깎아냈던 흔적이었다. 윌포드는 나무 부스러기를 바닥에 버리곤 혼자 계단을 내려가 빠른 걸음으로 통로 안쪽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레오노르 공주는 당황하며 그를 불러세웠다.

"어디가는거야 윌포드?"

"거기서 기다리고 계시거나 먼저 올라가 계셔도 됩니다. 저는 잠깐 확인해보고 싶은게 생겨서 말이죠."

아니, 그렇게 말한다고 진짜 혼자 돌아갈 수 있을까? 레오노르 공주는 혀를 차며 서둘러 윌포드의 뒤를 쫓았다. 지금 이 남자가 뭘 하려는건지 모르겠다. 둘은 아무말 없이 통로의 안쪽으로 한참 걸어들어갔다. 그런데 어느순간, 안쪽에서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레오노르 공주는 손수건을 꺼내어 코를 막았다.

"뭐야 이 냄새는?"

"조심하십시오. 일단 제 뒤로."

레오노르 공주는 윌포드의 말대로 그의 등 뒤로 물러섰다.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바닥에 생선뼈라거나 바다에서 건져내온것 같은 여러가지 잔해와 잡동사니들이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건 대체..."

"꼴을 보니 보나마나 몬스터겠지요. 아, 저기 있습니다."

손을 뻗어 통로 한 쪽을 가리키는 윌포드. 윌포드의 손짓에 그쪽을 바라보는 레오노르 공주. 바닥엔 게나 가재처럼 생긴 기괴한 몬스터의 시체가 바닥에 대자로 뻗어있었는데 바로 그 시체에서부터 엄청난 악취가 풍겨오고 있었다. 레오노르 공주의 미간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크읏, 고약해. 생긴것도 냄새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시죠."

윌포드는 몬스터의 시체로 다가가 횃불을 들이대며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흠흠 거리며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몬스터의 시체뿐만 아니라 주변의 바닥도 꼼꼼히 살펴보는 그. 레오노르 공주는 결국 코를 찌르는 악취에 더 참지 못하고 신경질을 냈다.

"언제까지 그 냄새나는걸 들여다보고 있을거야? 적당히 하지 그래!"

"음, 알겠습니다. 대충 확인했으니 이만 돌아가죠."

레오노르 공주의 타박에도 여우눈을 한채 싱글거리는 윌포드. 이 자는 후각이 마비되기라도 했나? 어떻게 이 상황에서도 태연한지 모르겠다. 화가 난 레오노르 공주가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차며 걷자, 뒤에서 따르던 윌포드가 슬쩍 말을 걸어왔다.

"어제 만난 그 미남씨 말입니다만. 분명 자신은 장검을 다루는데 서투르다며 단검을 요구했다고 말씀하셨죠?"

"그래. 그게 왜?"

"그가 이 길을 통해 왕궁의 지하로 간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저기 죽어있는것은 랑케르라는 몬스터인데, 몸을 감싼 두꺼운 갑각은 어지간한 검과 화살도 가볍게 튕겨낼 정도이고 거대한 집게발은 사람의 팔다리도 가볍게 잘라냅니다."

"...그래서?"

"랑케르의 가슴엔 부러진 단검파편이 박혀있고 머리엔 뭔가에 그을린 흔적과 더불어 나무 말뚝이 박혀있더군요. 이 랑케르란 놈은 몸이 워낙 단단하고 집게발의 힘이 대단한데다가 입에선 산성침까지 뱉어대서 장정 예닐곱쯤 혼자서도 가볍게 상대하거나 살해하는 무서운 놈인데... 바닥에 남아있는 싸움의 흔적과 랑케르를 처치한 상처를 보면, 우리가 찾는 이 미남씨는 랑케르를 그야말로 순식간에 해치운 것 같습니다."

레오노르의 머릿속에 어제 그 흑발의 남자가 자신의 호위 기사 셋을 단번에 쓰러트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숙련된 기사가 찔러낸 검격을 밟고 뛰어올라 되려 반격을 가한데다가 등뒤에서의 협격마저 피해내는 믿기힘든 몸놀림이라니. 그것도 정말 눈깜짝할 사이였었다. 분명 그의 몸놀림은 뭔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뭔가의 마법같은 것일까? 윌포드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등대를 지키는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거친파도를 해치고 절벽 한 가운데의 동굴로 기어올라, 안에 있던 강력한 몬스터를 순살하고, 창고를 통해 잠입해선 병영 한복판에서 들키지 않고 변복. 그렇게 왕궁의 본성에 잠입했다는겁니다. 게다가 호위 기사 셋을 일격에 제압하고 달랑 단검 한 자루로 가네딘 후작을 암살한데다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왕성을 빠져나가기까지. 대체 어느정도의 능력과 기술을 갖춰야 이 모든일을 실수 없이 해낼 수 있을까요?"

진석을 그저 솜씨가 뛰어난 상대정도로만 생각했던 레오노르 공주다. 윌포드의 말을 듣고 그의 행적을 정리 해보니... 정말 생각 이상으로 보통 내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것 치곤 성격은 뭔가 어수룩해 보이기도 했는데? 실제로 자신의 거짓말에 깜빡 속아넘어가 휘둘리기도 했었고. 레오노르 공주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좋아. 아무튼 다 알겠는데, 그래서 이제 어쩌겠다는거야?"

"행적의 조사는 이걸로 끝. 이제부턴 발로 돌아다니며 탐문을 하거나 정보를 모아봐야겠죠. 아까 말했듯 우선은 이곳을 지키는 경비병들에게 물어볼것이 있습니다."

통로에서 빠져나온 레오노르 공주와 윌포드는 덮개문을 닫곤 천을 덮어 입구를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 그리고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가 등대의 경비병들에게로 향했다. 레오노르 공주는 뒤에서 물러나 기다리고 있었고 윌포드는 혼자 경비병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뭔가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레오노르 공주에게 되돌아온 윌포드는 자신의 턱을 긁적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의외의 정보가 한 건 있군요."

"의외의 정보? 뭐지?"

"어제 근무를 섰던 병사들을 중심으로 혹시 해안쪽에서 뭔가 보지 못했냐고 물어봤습니다만... 점심경을 좀 지났을때 등대 외곽을 순찰하던 한 조가 절벽 근처에 밀려온 보트 한 척을 봤다고 하더군요."

"그거! 그 남자 아냐?"

흥분하는 레오노르 공주. 하지만 윌포드는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보트엔 두 명의 젊은 여성이 타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붉은머리와 검은머리의 젊은 여성 둘. 관광객이었는지 수영복 차림으로, 경비들이 주의를 주자 어쩌다보니 파도에 떠밀려 흘러왔다며 잠시후엔 배를 틀어 돌아갔다고 합니다."

"...뭐야 그게. 그럼 정말 단순한 관광객이잖아? 게다가 우리가 찾는 상대는 남자라고."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한 레오노르 공주. 하지만 윌포드는 가느다란 여우눈을 늘어트리며 실실 웃었다.

"글쎄요, 어떨까요? 의외로 그 여자들이 우리가 찾는 미남씨의 조력자 였을수도 있죠. 남쪽의 해수욕장과 이곳은 거리가 꽤나 멉니다. 뱃놀이를 하다 어찌어찌 파도에 떠밀려 올 정도로 가깝지 않아요. 십중팔구 목적이 있어 일부러 여기까지 배를 몰아온걸테고, 그녀들은 분명 그 미남과 연관되어 있을겁니다. 그나저나 붉은머리와 검은머리의 여성 한 쌍이라. 뭐랄까, 미남답군요. 어째 찾을 맛 나는데요?"

"지금 농담하는건 아니겠지?"

"농담이라뇨. 저는 진지합니다. 자 그럼 이번엔 저를 따라와 주실까요? 함께 색다른 장소로 찾아가보도록 하죠. 아참, 그런데 지금 돈 좀 있으신가요?"

뜬금 없는 돈타령을 하며 씨익 웃어보이는 윌포드. 갑자기 왠 돈 타령이람. 왜, 밥이라도 한 끼 사달라는 의미일까? 하지만 지금 그녀의 수중엔 돈이 없었다. 레오노르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등대를 빠져나갔다. 등대의 앞쪽 너른 공터에선 마차 한 대와 사십명의 가병, 그리고 세 명의 여기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엔 호텔의 4층 특실 안. 진석은 정체모를 안경녀를 등에 업은채로 펍에 들러 제이스, 아르데나와 합류해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와중 제이스와 아르데나에게 대강의 설명은 해주었지만, 이번엔 제이스 역시 미행을 시킨 주체가 누구인지 짐작가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소파에 앉혀놓은채로 안경녀의 팔다리를 포박하는걸 지켜보던 제이스가 말을 걸었다.

"역시 달리 생각나는건 카야 정도 뿐인데? 현실적으로 그 여자 말고 우리에게 미행을 붙일만한 상대는 없잖아."

"음 그렇긴 한데... 겨우 어제 그렇게 깨져놓고 하루만에 마음을 바꿔 이런짓을 한다는건 납득이 안가. 아무래도 다른 상대의 소행같아. 그나저나 오래도 기절해있네. 슬슬 깨워서 물어보자. 아르데나? 거기 있는 컵에 물 좀 떠오렴."

"네, 떠올게요."

아르데나는 테이블 위에 있는 유리컵을 하나 집어 쪼르르 욕실로 들어가더니 곧 물을 가득 채워 돌아왔다. 진석은 물이 가득 찬 컵을 건네받았다.

"좋아. 원래 기절한 사람 깨우는덴 이게 최고지."

촤악! 진석은 컵에 가득 찬 물을 안경녀의 얼굴에 끼얹어버렸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흐하! 어푸풋. 으아... 아... 어레?"

아직 정신이 덜 들었는지 멍한 눈으로 눈앞에 있는 진석과 옆에 서있던 제이스, 아르데나를 번갈아 쳐다보는 안경녀. 진석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잘잤어? 정신 차려야지."

"...아. 아아아, 아아아아!"

이제야 정신이 퍼뜩 돌아왔는지 진석을 바라보며 절망에 찬 소리를 흘리는 그녀. 진석은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단검을 집어 휘리리릭 손 안에서 돌려보였다. 다분히 위협적인 손놀림이었다.

"자 이제 정신 들었으면 아까 하던 질문의 대답을 듣고 싶은데. 왠만하면 순순히 협조해주지 그래?"

"히익. 그, 그렇지만... 주, 주, 죽일거잖... 아요? 다 불고나면. 워, 원래 그렇게 되어있는 법인데."

오들오들 떠는 안경녀. 말하면 죽을테니 버텨보겠다는 태도였다.

'나 참. 그런다고 정보를 끄집어낼 수단이 없는것도 아니고.'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이스는 안경녀의 태도가 짜증났던지, 품에서 루비 로드를 꺼내며 앞으로 내밀었다. 루비의 끝에 빛이 집중되더니 주먹만한 홍염의 구체가 생겨났다. 그걸 보며 히이익 겁먹은 소리를 내는 안경녀.

"고통스럽게 죽을지 편안히 죽을지 정도는 선택하게 해줄테니까 짜증나게 칭얼 거리지 말고 아는거나 말해. 누가 미행을 지시했어?"

'오오, 이 모습은 처음 적으로 마주했때의 제이스구만. 오랜만에 보니까 되려 신선한데? 아니아니, 좋아할때가 아니지.'

진석은 손을 내밀어 제이스를 가로막았다. 진석이 자신의 행동을 가로막자 뚱한 표정을 짓는 제이스.

"왜? 나한테 맡겨둬. 이깟 얼빠진 계집쯤은 바로..."

"그게 아니라. 은행 말인데, 아직 열었을까?"

뜬금없는 은행 타령. 제이스는 뭔 소리를 하고 싶어 이러나 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마 하고 있을걸. 오늘이 분명 금요일이지? 주말엔 안 열지만 평일엔 자정까지 근무를 하는걸로 알고 있어. 오후 6시가 넘어가면 주요 근무자는 다 퇴근하고 당직자 몇 명만 남아 단순한 수표 환전 업무밖에 안해주긴 하지만."

"헤에. 되게 늦게까지 하는데?"

"그거야 뭐... 늦은 시간에 본격적인 영업을 하는 그렇고 그런 가게들은 세무관계나 뭐 그런것때문에 일부러 수표를 잘 안 받는편이라고 하더라? 오직 현금만 받는 가게들이 많으니, 유흥을 위해 돈을 쓰러 나온 손님들은 늦은 시간임에도 자신이 가진 수표를 현금으로 환전하고 싶어하고... 그러니 은행측에서도 직원을 몇 명 남겨 자정까진 환전을 해주는거라고 하던데. 아 물론 야간엔 추가 수수료가 붙는걸로 알고있어. 뭐 은행쪽은 고객의 편의보단 그 수수료가 목적인거겠지."

아무래도 게임 속의 은행이니 현실의 은행과는 업무의 형태나 영업시간이 좀 달랐다. ATM 같은건 없으니 당직자를 남겨 늦게까지 업무를 시키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늦은 시간까지 환전 업무를 해주는 이유가 고작 유흥업소에서 돈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 때문이라니... 어째 좀 한심한 이유다. 뭐 은행측에선 환전 수수료를 먹고, 손님들은 돈을 바꿔서 좋고. 나름 윈윈인걸까? 진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품안에 있던 수표를 전부 제이스에게 넘겨주었다. 낮에 무려 이백여 골드에 달하는 쇼핑을 했던터라, 이제 총 서른 다섯장이 남은 백골드짜리 수표였다.

"아무튼 잘됐네. 이거 전부 금화로 바꿔와."

"엑?! 지금 당장? 이걸? 왜?"

갑작스런 명령에 당황해하는 제이스. 의미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이 여자를 미행으로 붙인걸 보면 분명 우릴 노리는 상대가 있다는 의미잖아? 이 여자가 붙잡힌걸 상대가 눈치채기 전에 도시를 빠져나갈 준비를 해둬야겠어. 게다가 어차피 이 수표는 데오그라즈가 아니면 못 쓰잖아? 이 도시에서 벗어날거라면 수표를 아무리 들고 있어봐야 의미가 없지. 현금으로 바꾸자고."

"하, 하지만... 수천닢의 금화라니. 큰 궤짝으로 하나 가득 채울 분량일텐데. 시간도  오래 걸릴테고. 게다가 이걸 내가 어떻게 옮겨. 그냥 대신관님께 반환해두는게..."

한 번 손에 들어온 이런 거액을 도로 뱉으라고? 그렇겐 못한다. 진석은 옆에 멀뚱히 서있던 아르데나를 불렀다.

"저기 아르데나? 부탁 좀 할께. 제시와 함께 다녀오렴."

"아, 네. 알았어요 오빠."

인상을 부욱 찌푸리는 제이스. 하지만 시간은 벌써 열한시 정각. 자정까진 한 시간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만한 금액을 당장 금화로 환전 받으려면 서둘러야 할 터.

"이만한 현금을 어떻게 들고 다니려고... 정말 쓸데없는데서 욕심을 부리긴."

투덜거리며 외출 준비를 서두르는 제이스. 진석은 헹 코웃음을 치며 방 한켠에 가득 쌓여있는 쇼핑백을 가리켰다. 온갖 고급 상점의 브랜드 마크가 박힌 쇼핑백이 몇십여개나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옷, 구두, 악세사리, 핸드백, 보석, 화장품... 그야말로 없는게 없었다. 여기 있는 물건만으로도 작은 가게를 하나 차릴 수 있을듯 했다.

"욕심 타박은 네가 아니라 내가 해야지. 여기 널린 쇼핑백 갯수나 좀 봐라. 이게 마차에 다 들어가기나 할지 모르겠다."

"칫! 알았어. 가자, 아르데나."

"네, 언니."

아르데나는 제이스의 뒤를 따라 호텔방을 나섰다. 이제 방안에 남겨진것은 진석과 안경녀 둘뿐이었다. 안경녀는 주의가 분산된 틈에 자신의 팔다리를 묶고 있는 포박을 끙끙대며 풀어보려고 하다가, 말없이 그꼴을 지켜보는 진석의 눈길에 핫 하고 놀라더니 시선을 다른곳으로 돌렸다.

"딴청피우기는."

"휘, 휘이이~ 아무것도 안했어요오~ 휘이~"

되지도 않는 휘파람을 부는 안경녀. 얘 진짜 되게 재밌네. 진석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짐 배낭으로 다가가 안에 손을 집어넣고 뒤적거렸다. 잠시 후 진석이 배낭안에서 끄집어낸것은 작은 약병 두 개 였다. 투명한 액체가 든 약병과, 연황색의 액체가 든 두 가지의 약병. 투명한 쪽은 미약 중 가장 효과가 가벼운 흥분제 페르모티오였고, 연황색쪽은 새로 만들어놓고 아직 효과를 시험해보지 않은 상위 흥분제 콤모티오였다. 진석은 테이블로 그것을 가져와 아까 아르데나가 물을 담아왔었던 컵에 그것을 둘 다 섞었다.

"...아, 저... 저기요? 질문이 있는데. 그건 뭐죠?"

진석이 뭔가 수상한 약을 두 가지나 가져와 잔에 섞자 대번에 긴장하는 안경녀. 진석은 긴장하는 그녀를 향해 해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때. 목 마르지? 술은 좋아해?"

"아뇨. 아, 안 마시는데요."

"그럼 한 잔 해봐."

룸서비스로 시켜놓고 마시다 남았던 술병 중 하나를 들어, 페르모티오와 콤모티오가 섞인 잔에 따르는 진석. 상위 흥분제 콤모티오는 하위 흥분제인 페르모티오 보다 기본적으로 대여섯배는 강한 약. 그런 콤모티오에 페르모티오나 술, 둘 중 한 가지를 섞으면 효과가 배로 늘어난다. 그런 콤모티오에 아예 페르모티오와 술 두 가지를 한꺼번에 섞으면? 효과는 배가 아니라 무려 제곱이 된다. 그냥 기본 콤모티오만 마신다면 의지력이 강할 경우 어떻게 버텨볼수도 있을테지만, 페르모티오와 술을 몽땅 섞은 콤모티오 칵테일은 한 번 맛을 볼 경우 자의와는 상관없이 발정기의 짐승마냥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게 될 터. 원래 카야에게 써볼까 하며 음흉한 생각을 하다 제이스에게 한 번 호되게 하이힐굽을 얻어 맞았었지만 이번엔 다르다. 방해할 사람도 없는 자유로운 상황. 진석이 제이스와 아르데나에게 돈을 바꿔오라며 내보낸 이유가 있었다.

"에... 안 마셔요. 절대! 안 마실거야. 수, 수상한 사람이 주는건 함부로 먹으면 안되니까요."

콤모티오 칵테일이 든 잔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안경녀. 하지만 손발도 묶인 처지에 반항이 무슨 소용이랴? 안경녀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피했지만 진석은 그녀의 코를 꾹 잡아 쥐었다.

"...으, 으으응? 응응? 푸하앗!"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코로 숨을 쉬고 있었을텐데, 그 코를 쥐어 막았으니 어쩌겠는가? 안경녀는 채 몇 초 숨을 참지도 못하고 입을 한껏 벌리며 숨을 내쉬었다. 그틈을 놓칠 진석이 아니었다. 콤모티오 칵테일이 가득 찬 컵을 그녀의 입에 강제로 쑤셔넣고 들이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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