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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51화 (51/155)

< --   - 4.   -- >         * 51화 *

한 편 진석의 명령으로 데오그라즈 은행에 돈을 바꾸러 간 제이스와 아르데나. 호텔과 은행은 도보로 10에서 15분 정도 거리라,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2층으로 된 은행 건물은 외관부터 호사스럽게 대리석으로 지어져 있었고 규모도 제법 컸다. 부지도 넓어서 건물 외곽엔 쭉 낮은 담장이 둘러져 있었고 그 안쪽엔 꽃이나 나무가 심어진 작은 뜰도 꾸며져 있었다. 은행 건물의 1층은 그냥 창구뿐이었고 2층에는 은행장의 방과 회의실, 개인상담실 정도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시설인 금고는 지하에 있었다. 수겹의 보호 마법과 고급 금속인 흑철을 아낌없이 사용해 만들어진 지하의 대금고는 그야말로 철벽 그 자체였다.

"정말 귀찮게... 한두푼도 아닌데 이걸 굳이 짊어지고 다녀야할 필요가 어딨냐고. 바보. 안 그래 아르데나?"

"에, 그... 글쎄요."

투덜거리며 은행의 부지 안에 발을 들인 제이스와 그 뒤를 따르는 아르데나. 그런데 뒤에서 뭔가 우르르 하더니만 갑작스레 나타난 한 무리의 남자들이 그녀들을 붙잡은채 은행 안으로 진입했다. 정말로 뜬금없이 달려들어 다짜고짜 그녀들의 목에 흉기를 들이대고 밀어붙인 통에 저항하거나 대처할 시간도 없었다.

"뭐야 당신들?!"

"닥치고 은행으로 들어가! 빨리! 야, 다들 서둘러!"

상대는 복면을 쓴 총원 열 네 명의 남자. 복면을 쓴 남자들의 무리가 갑자기 은행 안으로 들이닥치자 입구 근처에서 대기하던 세 명의 경비병이 즉각 대응에 나섰다. 마법사 한 명과 숙련된 검사 둘로 된 경비병이었다. 하지만 복면의 남자들 중 무려 여섯명이 석궁을 들고 있었고, 그들은 대응에 나선 세 명의 경비병을 향해 망설임없이 쿼렐을 쏘았다. 검사 한 명은 머리에 쿼렐을 맞고 즉사. 다른 검사는 팔과 다리에 각기 한 발씩 맞고 무기를 놓치며 쓰러졌는데, 칼과 쇠몽둥이를 든 복면의 남자들이 곧바로 달려들어 그를 살해했다. 검사들보다 좀 뒤쪽에 떨어져있던 마법사도 복부에 쿼렐을 한 발 맞은채 털썩 무릎을 꿇는 모습이 그대로 무력화 되는가 했는데, 떨리는 팔로 힘겹게 지팡이를 뻗어 주문을 외웠다.

"비, 빛의 차크람."

지팡이 끝에서 빛나는 차크람이 생겨났다. 차크람은 빙빙 회전하며 복면의 사내들을 향해 빠르게 날아가 앗 하는 순간 석궁을 재장전 하던 두 명의 목을 날려버리고는 사라졌다.

"아니 저 새끼가!"

"뭐해! 빨리 죽여!"

바닥에 쓰러진 검사를 찔러대던 복면의 사내들은 마법사가 공격해온것에 분노하며 그에게 달려들어 칼로 배를 쑤시고 쇠몽둥이로 머리를 내리쳐 부쉈다. 동료를 죽인 마법사의 시체를 아주 분쇄해버리겠다는 듯 두개골이 다 깨지고 내장이 흘러나올때까지 미친듯이 난도질을 해댔다. 복면의 사내들 중 리더로 보이는 자는 경비병들이 제압되자 서둘러 밖에 영업종료 간판을 내건뒤 은행 문을 닫고 봉쇄하며 크게 외쳤다.

"다들 꼼짝마! 보다시피 우린 강도다! 쓸데없는 저항만 안하면 너희들 목숨은 살려줄테니 얌전히들 있어!"

늦은 시간. 살해당한 경비병 셋을 제외하면 은행 안에 남아있던것은 창구를 지키던 젊은 남녀 직원 두 명. 그리고 좋은 옷차림의 노부부 한 쌍과 제이스, 아르데나. 총 여섯명이었다. 복면의 남자들은 그 두 배. 경비였던 마법사에게 두 명이 살해당했음에도 아직 열두명이 남아있었다. 복면인들은 제이스와 아르데나의 목에 검을 들이댄채 노부부들과 함께 한쪽 구석에 몰아놓고 자리에 꿇어앉혔다. 게중 푸줏간에서 쓰는 칼인 클리버를 든 한 복면 사내가 노부부와 제이스, 아르데나를 향해 천박한 어조로 협박을 해왔다.

"아까 저 시끼들 뒈지는 꼬라지 봤지? 똑같이 개죽음 당하기 싫음 대가리 땅에 박고 여기 가만 처 앉아 있으라고들. 수상한짓 하면 칵 모가지를 따분다."

그러더니 몇 걸음 떨어진곳에 서서 인질이 된 네 명을 주시했다. 수상한 짓을 하면 바로 내리치겠다는 듯 클리버를 꼭 쥔채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리더로 보이는 사내는 막 직원 둘을 창구에서 끌어내 바닥에 무릎 꿇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허리춤에 달린 장검을 뽑아 남자직원의 목에 들이댔다.

"어이. 지하의 금고 열 줄 알지?"

"모, 모, 모, 못 엽니다!"

"장난해? 은행 직원이 금고를 못 연다는게 말이 되냐고?"

"하... 하지만 저는 정말 못... 큭?!"

리더 사내는 짜증난다는듯 장검을 들어 남자 직원의 가슴에 푹 찔러넣었다. 남자 직원은 자신이 찔린것을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 가슴을 뚫은 칼날과 리더 사내를 몇 번이고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그의 가슴에서 울컥울컥 쏟아진 피가 바닥을 타고 흘러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꺄아악! 꺄아아아악!"

"이 썅년이 분위기 파악 못하네. 닥쳐!"

리더는 손을 들어 비명을 지르는 여자 직원의 뺨을 후려쳐버렸다. 바닥에 털썩 쓰러지는 여직원. 리더는 쓰러진 여직원의 멱살을 곧바로 쥐어 들어올리며 그녀의 눈 앞에 피로 물든 장검을 가져다댔다.

"너도 저렇게 죽고 싶냐? 금고를 여는 방법을 말해."

"흑! 으흐흑, 으, 은행장님의, 끅. 여, 열쇠가! 어흐흑! 피, 필, 필요해요! 으헝엉!"

"호오. 은행장의 열쇠라. 그건 지금 어딨는데?"

"으... 은행장님! 끄윽! 지금, 위, 위쪽 사무실에... 살려주세요!"

평소라면 은행장은 정각 6시에 맞춰 다른 직원들과 퇴근을 했다. 하지만 이따금 중요한 업무가 남아있거나 일이 밀릴땐 자정까지 일했다. 오늘도 몇몇 중요한 업무가 남아있어 늦게까지 남아있던 것이 화근이었다. 은행장은 아래층의 소동은 아무것도 모르고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은행장의 방이 2층 가장 안쪽이라 아랫쪽의 소란을 눈치채기 힘든탓도 있었다. 게다가 그는 보통 퇴근할때 자택에 대금고의 열쇠를 가지고 가기때문에, 평소처럼 퇴근을 했더라면 이 강도들은 깔끔히 헛물을 켰으리라. 하지만 오늘은 강도들 쪽에 운이 따르는 날이었다. 리더는 아직까지 마법사의 시체를 으깨고 있던 세 명의 부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야이 또라이 같은 새끼들아, 뒈진놈 가지고 헛지랄 그만하고 위층이나 올라가 봐! 잽싸게 열쇠인지 뭔지 찾아가지고 내려와."

마법사의 시체를 난도질하느라 피투성이가 된 세 명의 사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대로 2층의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다. 그 사이 석궁을 든 네 명은 각자 창문에 붙어서 밖을 경계했고, 클리버를 든 한 명은 계속 인질의 제압을, 남은 세 명은 빈 자루를 들고 창구 안쪽을 뒤지며 돈을 챙겼다. 리더가 창구 안쪽을 바삐 뒤지던 인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뭐 좀 건졌냐?"

"얼마 안됩니다. 여기 창구쪽에 나와 있는돈은 박박 긁어봐야 백골드 될까 말까겠는데요?"

"이런 씨... 이런 미친짓까지 하고 백골드라니 안되지. 무조건 금고를 털어야 돼. 안 그래도 두목도 죽고 조직도 개박살나고 먼 도시로 도망가야 될 판인데 그거가지고 누구 코에 붙여?"

가만히 앉아 복면사내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던 제이스는 그제서야 그들의 정체를 눈치챘다.

'이놈들... 틀림없이 레드라인의 떨거지들이겠구만? 나와 러셀 덕에 조직이 반쯤 와해되고 이대로 데오그라즈에 남아 있어봐야 빅 본 쪽에 살해당할께 뻔하니 은행이라도 한 탕 털어서 도망가려는 수작일터. 그나저나 운도 지지리 없지. 하필 놈들이 일을 저지르는 타이밍에 은행에 왔다가 이따위로 붙잡히다니.'

제이스의 추측은 정답이었다. 지금 이들을 이끄는 리더는 아편굴 겸 창관인 영업장을 담당하던 레드라인의 간부였지만, 조직이 쫄딱 망했으니 이제 그에겐 남은 선택지가 몇 없었다. 두목이 당했다는 소식을 듣곤 항복의사를 밝히며 빅 본에 굽히고 들어갈까도 했었다. 하지만 강경파인 다른 간부 중 하나가 혼자 나돌아 다니던 빅 본의 새 지부장에게 복수하겠답시고 부하들을 이끌고 레스토랑에서 습격을 걸었다가 되려 실패하고 살해 당했다고 전해들었다.

'빅 본의 새 지부장년은 병원에 입원했다던데, 죽이려면 확실히 죽였어야지 겨우 부상밖에 못입히는건 또 뭐야? 그 멍청한 놈! 이미 뒈진놈이지만 한 번 더 죽여버리고 싶구만!'

물론 카야는 레드라인이 아닌 진석에게 두들겨 맞고 입원한 것이었지만 그런 세세한 것까지 이들이 알리는 없었다. 아무튼 이런 상황이니 이제와서 항복하겠답시고 고개를 숙여봐야 먹힐리가 없었다. 두목이 죽고나선 어차피 이쪽이 진 싸움인데 멍청한놈이 괜히 벌집만 들쑤셔 놓은 꼴이다. 새 지부장이 습격당한 건도 있고 하니 이제 빅 본의 조직원들은 이쪽을 발견하자마자 무조건 죽이려 덤벼들게 뻔했다. 게다가 뭔 후작인지 어쩌구인지 귀족 살해건으로 도시에 경계령까지 내려져 잔뜩 독이 오른 경비병들 눈치 보느라 범죄자인 자신들은 어디 함부로 나돌아다니기도 힘든 상황. 이럴바엔 빨리 도시를 탈출해야 했다.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을 모아 한 탕 저지르고 자신이 고이 숨겨두었던 밀수선을 이용, 도시를 빠져나갈 계획을 세웠다. 관리하던 창녀들을 데리고 가는건 무리일것 같았지만 아편의 재고는 밀수선에 몽땅 실어두었다. 이제 돈만 있으면 대륙 어디를 가더라도 재기를 꾀해볼 수 있을터. 그래서 이들은 가능한 경비대나 시민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은행이 닫히기 전쯤의 늦은시간을 노린건데, 그것이 제이스와 아르데나에겐 되려 불행이었다.

'석궁을 든 놈들만 없으면 내 마법으로 처치할텐데...'

미간을 찌푸리며 복면 강도들을 노려보는 제이스. 품 안엔 진석이 환전하라고 맡겼던 수표들과 늘 지니고 다니는 루비 로드가 있었다. 근접무기를 든 상대들을 처치하는건 그녀로선 일도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자신의 홍염탄 연사로 쓰러트릴 자신이 있었으니까. 마력을 최대로 집중시킨 홍염탄은 금속갑옷도 가볍게 관통했다. 하지만 지금은 석궁을 든 자들이 넷이나 있으니 도저히 함부로 나설수가 없었다. 자신의 장기는 공격마법뿐. 방어를 할 마법같은건 없는데다가 딱히 석궁을 막아줄 방어구를 걸치고 있는것도 아니었다. 아까 살해당한 마법사 꼴이 나고 싶진 않았다. 제이스는 옆에 있는 아르데나를 바라보았다.

"...언니."

의외로 아르데나는 침착했다. 명령만 내려준다면 당장이라도 괴물의 능력을 끌어내어 놈들을 공격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제이스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르데나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안 돼. 석궁을 든 놈들이 있어서 위험해. 일단 기다려."

"네..."

제이스와 아르데나가 속닥거리자 옆에서 클리버를 들고 있던 복면남이 둘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뭘 쫑알거려 이년들이? 닥치고 바닥에 고개 처박고 있으라니깐!"

으득. 제이스는 이를 꽉 물었다. 저깟 쓰레기가 기고만장한 꼴이라니. 하지만 불리한건 이쪽이니 일단 참아야했다. 그런데 클리버를 든 사내는 고개를 갸웃 하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헤... 그러고보니 요거 제법 반반한데?"

귀를 파고드는 추접스런 음성에 어깨를 움찔하며 이맛살을 팍 구기는 제이스.

'모, 몸이냐? 내 몸을 노리는거냐! 큿. 이 미모가 죄지. 쓰레기 주제에 보는눈은 있어가지고... 아, 아니. 좌우지간 이렇게 되면 홍염탄으로 이놈의 머리부터 날려버리고...!'

잔뜩 긴장하는 제이스. 하지만 클리버 사내가 손을 뻗은 것은 제이스가 아닌 아르데나쪽이었다. 클리버 사내는 아르데나의 머리채를 쥐며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꺄악!"

"헤헤. 되게 귀여운데 그래. 비실비실 힘도 못쓸것같이 말라빠진게 참 좋구만. 난 기가 센 년들은 싫거든."

그 모습에 제이스의 마음엔 왠지 모를 패배감이 들었다. 내... 내가 아르데나만도 못한거냐? 이, 이 더러운 아동성애자 새끼! 제이스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품에 손을 넣었다. 석궁이고 나발이고 이판사판이다. 당장 눈앞의 이 쓰레기를 날려버리지 않으면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으아아아악!"

와장창!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더불어 왠 중년 사내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곧 굳게 닫힌 은행문 밖에서 퍼억하고 무언가 무거운게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을 보건데 아마도 위층에서 사람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클리버 사내는 깜짝 놀라며 아르데나를 놓았고, 부하들과 함께 창구를 구석구석 뒤지고 있던 리더 역시 놀랐는지 위층을 향해 소리질렀다.

"뭐야! 무슨일이야!"

위층에서 세 사내가 다다닥 급히 뛰어내려왔다. 그 중 한 명의 손엔 손바닥만한 크기의 기묘한 금속판 같은게 들려있었다.

"위에 은행장이 있었는데 이 열쇠를 안 내놓으려고 반항하는 바람에... 실갱이를 하다 배때기에 한 방 찔러줬더니 이 새끼가 몸부림치며 복도로 도망나가다 중간에 창문을 깨고 뛰어내려서요. 그 놈 지금 요 문 앞에 퍼질러져 있습니다."

"야이 병신새끼들아! 그까짓거 하나 제대로 못해? 빨랑 도로 끌고 들어와!"

리더의 명령을 받은 사내들이 잠겼던 은행의 문을 열고 그 앞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은행장을 질질 끌고 들어왔다. 배에서의 출혈이 심했고 떨어지면서 다리를 잘못 디딘건지 한 쪽 발목이 완전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있는게 부상이 심각해 보였다. 그래도 아직 의식은 있는지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알아들을순 없었다. 복면 사내들은 그를 끌고 들어와 구석에 대충 방치했다. 저대로 냅두면 분명 얼마 못가 죽을것 같았다. 리더 사내는 그 꼴을 보며 이마를 감싸쥐곤 한숨을 내쉬었다.

"이 씨발... 그나마 지금 은행에 손님이 더 안오고 있어서 다행이지만 깨진 창문조각들하고 저 핏자국은 어쩔거야 저거? 기껏 문앞에 걸어둔 영업종료 간판이 쓸모 없게 됐잖냐! 저거 치우자고 문 열어놓고 청소네 뭐네 지랄할수도 없고... 하아. 빨리 금고나 털어야겠구만. 1층엔 석궁조랑 너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다 따라와. 네년도 같이 내려가자."

석궁조 네명과, 인질을 지키는 클리버 사내를 포함 다섯명만 남겨놓고 지하 계단으로 향하는 그들. 공포에 질려 계속 울고 있는 여직원도 같이 데리고 내려갔다. 클리버 사내는 리더와 동료들이 지하로 내려가고 나서야 휴우 한숨을 쉬며 콧등의 땀을 닦았다.

"하 씨바 깜짝 놀랬네. 뭐가 콰장창 하길래 인질 건든다고 욕 처먹고 혼나는줄 알았구만. 헤헤, 운 좋은줄 알라고 이년아. 아오 평소같으면 내가 아주 아랫도리에 물이 질질 흐르게 만들어주는데."

그렇게 지껄이곤 혼자 허리를 들썩이며 낄낄거리는 클리버 사내. 제이스는 당장이라도 그의 머리통에 바람구멍을 뚫어주고 싶었지만... 역시 석궁조가 거슬렸다. 아무리 홍염탄의 연사를 가한다고 해도 저들도 이쪽이 공격을 하면 바로 반격을 가할테니 제이스로선 이 클리버 사내와 석궁조 한두명 잡는 정도가 한계일것 같았다. 옆에 아르데나가 있긴 했지만 창가에 자리잡은 저들과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달려가다 석궁을 맞을 수도 있었다. 그냥 이놈들이 금고를 털어서 물러나길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뭔가 요행이라도 바라고 일전을 치뤄야 할까? 어차피 이놈들은 모 아니면 도인 막장의 상황. 돈을 털고 나가며 목격자를 제거한답시고 자신들을 죽일수도 있었고, 혹은 인질로 끌고갈수도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나 아르데나는 젊은 여자 아닌가. 놈들에게 젊은 여자의 몸은 돈만큼이나 끌리는 전리품일터. 허나 싸우는쪽의 선택을 하자니 역시 저 석궁조 넷을 한꺼번에 제압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제이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럴때 러셀이 있었으면...!

등대에서 나오며 윌포드는 레오노르 공주에게 뜬금없이 돈을 요구했다. 레오노르 공주는 윌포드가 장난하거나 농담하는건줄 알았는데 그런게 아니었다. 은행으로 향하는 마차안에서 윌포드는 레오노르 공주에게 정보상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설명을 다 듣고난 레오노르 공주는 불신의 표정을 띄웠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보상이란 작자가 왕궁에 침입한 자에 대한 정보까지 알고 있을거라고 생각되진 않는데? 왕궁의 정보력이 일개 정보상만큼도 안된다고? 그건 말이 안되잖아."

하지만 윌포드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 내용이 크건 작건 정보상은 분명 뭔가를 알고 있을겁니다. 정보상 피터슨 이라는 이름은 저도 들어본 기억이 있거든요. 데오그라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정말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르는 정보가 없다고 합니다. 어디 살고있는지까진 저도 몰랐는데, 아까 등대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 중 한 명이 우연찮게 알고 있더군요. 위치는 기억해 뒀습니다."

"휴우. 듣도보도 못한 그런상대에게 돈을 써야하나. 그래서, 얼마나 필요한건데?"

명색이 공주님인데 거액의 현금을 들고 다닐리는 만무. 정보상에게 지불할 대금을 찾기 위해서라도 은행으로 돈을 찾으러 가는 중이었다. 야간엔 환전 업무밖에 해주지 않는 은행이라 하더라도 왕족의 공주가 예금을 찾겠다는데 융통성 없이 거절할리는 없을터. 데오그라즈 은행에 레오노르 공주가 예금해두고 있는 돈은 정확히 금화 300닢. 물론 그녀의 본 계좌는 해밀턴에 있는 은행이었고, 이쪽의 계좌는 그냥 명목상으로 개설해 놓은것에 지나지 않는터라 넣어둔 액수가 많진 않았다.

"듣기론 시세가 정보 하나에 금화 백닢이라고 하더군요."

"뭐?! 미쳤어? 정체도 모를 놈이 멋대로 떠드는 헛소리 한 마디에 금화를 백닢이나 지불해야 한다고?"

화를 내는 레오노르 공주. 그 모습에 윌포드의 여우눈이 조금 가라앉았다.

"미친게 아닙니다. 정보상의 말은 무엇보다 정확함이 생명. 귀한 신분인 아가씨에겐 우습거나 하찮게 보일지 몰라도, 자신의 목 그 자체를 신용으로 내걸고 정확한 정보를 파는 직업이 바로 정보상입니다. 애시당초 확실한 정보를 파는게 아니라면 사람들이 정보상이라 불러주지도 않을테죠."

"......"

어딘가 들뜬듯 가볍던 윌포드의 태도였는데 지금은 달랐다. 가는 눈 너머로 뭔가 묵직한 기운이 뿜어지는 것 같았다. 레오노르 공주는 윌포드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내 예금 전부 넘겨줄테니까, 정보상이건 뭐건 맘대로 해. 대신 그 남자에 대한 단서를 얻지 못하면 각오해두는게 좋을거야."

"이거이거 무섭군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내기해도 좋습니다. 정보상은 분명 뭔가 한 가지라도 알고 있는게 있을겁니다."

끼익. 그때 마차가 정지했다. 아마도 은행에 도착한 것 같았다. 똑똑, 가병 중 하나가 마차문을 두드리며 안쪽에 말을 걸어왔다.

"윌포드님. 은행에 도착했습니다만...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흐음? 무슨 일이지?"

"입구에 창문이 깨진 파편과 피의 흔적이 있습니다. 창문 파편은 은행 2층의 창문이 깨지면서 떨어진걸로 보입니다."

순간 윌포드에게서 매서운 기도가 뿜어졌다. 바로 맞은편에 앉아있던 레오노르 공주는 윌포드에게서 위압감을 느끼고 어깨를 움찔했다. 윌포드는 엇 하고 정신을 차리더니 멋쩍은듯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아 이거 보아하니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생긴것 같군요. 걱정마십시오. 제가 금방 해결하고 올테니 아가씨는 여기서 편안히 기다려 주시길."

"으, 응..."

다시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마차를 빠져나가는 윌포드. 레오노르 공주는 마차를 나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제의 그 정체모를 남자, 래스커라는 가명을 댔던 진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그에게서 느꼈던 살기와 방금 윌포드에게서 느꼈던 위압감이 어째 흡사했기 때문이다.

'윌포드... 비천한 도적 출신이...'

순간적이나마 그에게 압력을 느끼고 기가 눌렸다는게 불쾌했다. 정말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 없는 남자였다. 한 편 마차밖으로 나간 윌포드는 은행쪽을 한 번 슥 살펴본 뒤, 가병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10명씩 4개조로 나눈다. 고참병들을 우선으로 해서 1조, 나머지는 적당히 뒷조다. 2조는 마차의 호위. 3조는 은행 좌측편의 포위, 4조는 우측편이다. 1조는 내 뒤를 따른다. 아참, 방패 있나 방패?"

"마차에 네 장 실려있습니다."

"좋아. 다 꺼내고 나한테 두 개만 가져와."

입가에 미소를 띈채 손짓으로 마흔명의 가병들을 지휘하는 윌포드. 그 모습에 뒤쪽에서 대기하던 세 명의 여기사가 다가왔다.

"지금 뭐하는거죠?"

"뭐긴요. 딱 보면 모릅니까? 은행에 강도가 들었군요."

윌포드의 말에 깜짝 놀라는 여기사들. 그녀들은 허둥대며 말했다.

"아니, 그럼 경비대에 신고를 해야!"

"그래요. 우리의 일은 공주님을 지키고 흉수를 찾는거지 은행 강도 따윌 물리치는게 아닙니다."

여기사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들은 윌포드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어졌다.

"뭐 처음부터 큰 기대는 안했지만 여러분은 정말... 심각할 정도로 한심하군요. 괴롭혀줄 가치도 없는것 같습니다. 됐으니 마차안에 들어가 공주님의 말벗이라도 하고 계시죠. 그게 여러분에게 어울리는 일감이겠군요."

"뭣!"

"당신! 보자보자 하니 말이 너무... 힉."

여기사들 중 리더격인 쪽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따지려 들었지만, 어느샌가 뽑힌 윌포드의 에스터크가 그녀의 목줄기를 겨누고 있었다. 같이 마주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주제에 대체 이건 언제 뽑았단 말인가? 그녀들 입장으론 윌포드의 손에서 갑자기 에스터크가 뿅 나타난것 처럼 느껴졌다.

"다음번엔 그냥 찔러버릴테니 까불지 마."

"......"

"...시길."

겁먹고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여기사들을 남겨둔채, 윌포드는 빙긋 웃으며 에스터크를 칼집에 꽂아넣고 몸을 돌렸다. 뒤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 가병이 윌포드에게 해밀턴 가문의 문장이 박힌 튼튼한 철제 방패 두 개를 건네주었다. 양손에 들고 방패의 무게를 가늠해보던 그는 만족스럽다는듯 빙긋 웃었다.

"음~ 좋아좋아. 튼튼한걸. 역시 해밀턴 가문제 무구는 믿음직해. 이거라면 쿼렐도 가볍게 막을 수 있겠어. 남은 방패 두 개는 1조의 최고참 두 명에게 쥐어줘."

"네. 그런데 쿼렐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병의 질문에 윌포드는 턱짓으로 은행의 창문쪽을 가르켰다.

"뭐긴. 저기 안보여? 석궁을 든 놈들이 창가에 매복하고 있군. 아마 놈들도 당연히 이쪽을 눈치챘을거야. 다가가면 바로 쏘겠지. 자아~ 그럼 다들 잘 들어라. 작전을 설명하지."

윌포드는 양손에 방패를 든채 네 조로 나뉜 마흔명의 가병에게 작전을 설명했다.

"아까 말했듯 움직인다. 2조는 마차의 호위. 불의의 사태에 대비한다. 3, 4조는 은행의 좌우측 포위. 혹 건물에서 빠져나가 달아나는 놈이 있으면 봐줄거 없으니 바로 죽여. 내가 허가한다. 그리고 은행의 돌입엔 내가 선두에 나선다. 은행 안쪽에 석궁을 든 사수들이 있는데 대충 셋이나 넷인것 같다. 미리 장전해둔 여분의 석궁을 갖추고 있을지도 모르니 놈들이 날 향해 사격한 후... 대충 5초가 지날때까지 후속 공격이 안오면 장전하고 있는거야. 방패를 든 동료의 뒤를 따르면서 창문으로 잽싸게 달려. 문은 보나마나 잠궈놨겠지. 아, 창문을 통해 안으로 돌입할때 측면 공격 조심하고. 나랑 1조가 모두 안으로 돌입하고도 밖으로 도망치는 놈이 없으면 3조와 4조도 안으로 돌입해. 다 이해했냐?"

"넷!"

마흔명의 사내는 윌포드의 설명을 다 듣고 동시에 대답했다. 과연 정예답게 대답 하나조차도 군기가 엄정한 모습이었다. 윌포드는 맘에 든다는 듯 씨익 웃으며 방패를 양 손에 쥐고 앞으로 나섰다.

"말했다시피 내가 먼저 나갈테니 신호하면 다들 뛰어. 알겠지?"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어디 강도님들 실력 구경을 한 번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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