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4. -- > * 52화 *
윌포드는 대담하게도 은행 정면을 향해 혼자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은행 안쪽에 있던 석궁조는 난리가 났다.
"뭐, 뭐야 저 새끼는?"
"난들 알아? 씨발... 게다가 저 놈만이 아닌데? 뒤에 바글바글해!"
"어쩔 수 없잖아. 명령대로 하자. 다들 쏴!"
"에익!"
석궁조 네 명은 창문 너머로 다가오는 윌포드를 겨냥하고 동시에 석궁을 발사했다. 그러나 윌포드는 그들이 석궁을 쏘는 타이밍을 절묘하게 읽고, 손에 든 두 장의 방패로 앞을 막으며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췄다. 타타타탕! 석궁 네 발이 정확히 방패 위로 날아와 꽂혔다. 하지만 무겁고 단단한 철제 방패엔 퀘렐의 끄트머리만 살짝 박혔을뿐,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뭐 여분의 석궁은 없는것 같군. 하긴 강도놈들이 미리 장전해둔 석궁을 여러벌 챙겨다닐리가 있나. 그러면 강도가 아니라 군대겠지.'
속으로 숫자를 센 윌포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뒤쪽을 향해 외쳤다.
"1조 돌입!"
윌포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섯명씩 나뉜 1조의 인원이 양쪽으로 갈라져 창문을 향해 속보로 이동했다. 윌포드가 앞서 지시한 그대로 선두엔 방패를 든 가병이 선도했고, 네 명은 그 뒤에서 각기 장검을 뽑아든채 일렬로 따라갔다. 은행 외곽에선 3조와 4조가 주변을 포위했다.
"무서운 강도 아저씨들이 석궁 장전하고 계신다~ 맞기 싫으면 빨리들 뛰어!"
윌포드는 가병들을 독려하며 손에 들고 있던 두 장의 방패를 각기 양쪽에서 진입하던 1조의 인원들을 향해 던져주었다. 윌포드에게 방패를 건네받은 두 가병들은 빠르게 선두에 나서며 방패를 들고 뒤쪽의 다른 동료들을 보호해주었다. 가병들에게 방패를 건넨 윌포드는 에스터크를 뽑아들고 빠른 몸놀림으로 은행의 창문을 향해 질주했다.
"온다! 한 놈 온다!"
"제길! 이 석궁은 장전이 오래걸려서... 안되겠다, 나는 두목을 불러올테니까 어떻게든 버티고 있어봐!"
"씨팔! 아니, 야! 저기 인질 있잖아! 방패로 삼자!"
석궁조는 혼란에 빠져서 서로 우왕좌왕 어쩔줄 몰라했다. 한 명은 두목을 부른답시고 지하로 내려가 버렸고, 한 명은 구석에 잡아둔 인질을 노리고 제이스와 아르데나 쪽으로 달려왔다. 나머지 두 명은 여전히 석궁의 장전을 시도했다. 클리버를 든 사내는 멍청하니 서서 우왕좌왕 혼자 어쩔줄 몰라했다.
"아... 아니. 이게 뭔..."
제이스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품안쪽으로 손을 넣으며 루비로드의 손잡이를 쥐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밖에 경비대나 뭔가의 지원이 온 것 같았다. 호기였다. 제이스는 아르데나에게 눈짓을 하며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석궁조 한 명을 맡으라는 신호를 했다. 저 클리버를 든 남자는 무슨일이 있어도 자신이 죽이고 싶었으니까. 아르데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눈을 감은채 힘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무형의 기류가 솟구치며 아르데나의 흑발이 휘날렸다. 어쩔줄 모르던 클리버 사내는 아르데나의 몸에서 뭔가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것을 보곤 깜짝 놀라 클리버를 내밀며 소리쳤다.
"너, 너어어! 뭔 짓을 하는거야?! 이상한 짓 하면 모가지를 따준데도!"
"네 모가지 걱정이나 해라, 이 추잡한 놈. 홍염탄!"
클리버 사내의 주의가 아르데나에게 쏠린 사이, 제이스는 품에서 빠르게 루비 로드를 뽑아 겨누며 자신의 장기인 홍염탄을 발사했다. 주먹만한 홍염의 구체는 총알처럼 쏘아져 클리버를 든 사내의 머리통을 산산히 박살내곤 그대로 나아가 벽에 부딪히며 터졌다. 그 모습에 이쪽 가까이까지 달려왔던 석궁조 사내가 흠칫 하며 걸음을 멈췄다.
"아닛! 어, 마... 마법사?!"
"아르데나!"
제이스가 그 사내를 노려보며 지시하자 뒤쪽에서 괴물의 힘을 충분히 끌어낸 아르데나가 섬전같은 속도로 뛰쳐나가 그에게 육박했다. 아르데나의 손엔 이전 진석이 호신용으로 사주었던 본 나이프가 들려있었다. 칼집에 끈이 달려 목걸이처럼 되어있으니 항상 목에 걸고 지니고 다녔던 것이다. 석궁조 사내는 삽시간에 자신의 눈앞으로 달려드는 아르데나의 모습에 경악했다. 그녀의 두 눈동자가 시뻘겋게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아아악?!"
푸우욱! 본 나이프가 사내의 가슴 한복판에 꽂혀 들어갔다. 아르데나는 사내의 가슴에 본 나이프를 찔러넣은 자세 그대로 쭈욱 수미터를 더 밀고 들어가 바닥에 내동댕이 쳐버렸다. 선혈을 뿌리며 바닥에 나뒹구는 석궁조 사내. 가슴의 갈비뼈가 몽창 내려앉은게, 딱 봐도 즉사였다. 그때 비어있던 창문을 통해 윌포드가 먼저 실내로 돌입했다.
"엿차. 도시 한복판에서 은행 강도라니. 대담한건 인정하겠는데..."
"이, 이거나 먹어!"
마침 간신히 장전을 마친 석궁조의 사내가 윌포드를 노리고 석궁을 쏘았다. 하지만 태앵! 쿼렐은 윌포드가 뽑아든 에스터크의 검날에 막혀 옆으로 튕겨나가고 말았다. 막는게 보이지도 않을만큼의 신속한 검격이었다. 검날의 면적이 넓지도 않은 에스터크로 쿼렐을 정확히 막아내다니, 정말 놀라운 검술이었다.
"어라라? 죽을뻔했잖아. 이런 위험한걸 함부로 쏘다니. 혼 좀 나봐라."
윌포드는 그렇게 말하며 왼손은 자신의 허리에, 오른손은 에스터크를 앞으로 내밀며 펜서 스타일의 자세를 취했다.
"슈테힌!"
슈각!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신속의 찌르기가 앞에 있던 석궁조 사내의 머리를 관통했다. 왼쪽눈으로 뚫고 들어간 에스터크는 뒤통수로 빠져나와 사내의 머리를 무슨 꼬치처럼 꿰뚫고 있었다. 머리를 관통당한 사내의 눈에선 삽시간에 생명의 빛이 사라졌다. 남아있던 마지막 석궁조 사내는 그 모습에 장전하던 석궁을 내팽개치고 허리춤에서 단도을 뽑아 윌포드에게 달려들었다.
"이야아아아, 이 개새끼이잇!"
"나 귀 안 먹었어. 그렇게 시끄럽게 소리 안질러도 다 알아듣거든."
에스터크에 꽂혀있던 사내를 발길질로 밀어낸 윌포드는 에스터크를 한 번 휙 휘둘러 피를 털어내고 단도를 들고 달려드는 사내를 향해 에스터크의 끝을 가볍게 휘둘렀다.
"헉?!"
챙! 에스터크의 칼끝이 단도를 후려치자 단도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 저쪽 바닥으로 탱그랑 떨어져 내렸다. 가벼운 칼놀림 한 번에 비무장이 되자, 그는 어, 어어 하고 당황해하더니 양손을 하늘 높이 번쩍 들어올렸다. 그때 창문을 통해 1조의 가병들이 안으로 돌입했고 사내는 사색이 되어 더듬더듬 말했다.
"하... 항복하겠..."
"항복은 무슨. 어차피 이대로 경비대에 넘겨져봤자 사형일텐데 그냥 여기서 죽는게 백 번 낫지. 피차 쓸데없는 과정은 생략하자고."
푹! 윌포드의 에스터크가 사내의 가슴을 파고들어 심장을 관통했다. 끄윽 하는 단발마를 남기고 바닥에 추욱 쓰러지는 그. 윌포드는 실내의 풍경을 휘이 둘러보다 저 반대편에 있던 제이스와 아르데나를 발견했다. 윌포드가 석궁조를 쓰러트리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그녀들. 윌포드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제이스와 아르데나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그쪽은 인질인 것 같은데. 맞나요 아가씨들?"
제이스는 아르데나에게 기운을 가라앉히고 뒤로 물러서라는 사인을 하며 자신이 앞으로 나섰다.
"...네. 당신은 경비댄가요? 때마침 와서 살았네요. 아 그보다 지하에는 아직 패거리가 더 남아있..."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는 말처럼 마침 지하에서 남은 복면 패거리 여덟이 우르르 올라왔다. 아까 도망쳤던 석궁조 사내가 나머지 패거리를 이끌고 올라온 것이었다. 리더는 다 죽어버린 부하들의 모습과 실내에 돌입한 가병들의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네놈들은 뭐얏?! 이 빌어먹을!"
윌포드는 핫하 웃으며 양 손을 크게 벌리고 그쪽으로 다가섰다.
"뭐긴 뭐겠어. 머리가 달려있으면 남에게 묻지만 말고 생각을 해보라고. 요 깜찍한 은행 강도놈들아."
리더는 자신들을 조롱하고 비웃는 윌포드의 태도에 분노가 솟구쳤다. 방해꾼이라니, 다 틀렸다. 망했다. 게다가 지하의 대금고 역시 열쇠만으로는 열 수 없는 타입이었다. 열쇠와 더불어 은행장만이 알고 있는 특수한 비밀번호가 있어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것도 모르고 은행장의 배에 칼침을 먹이고 창문에서 떨어트려 반송장으로 만들었으니, 부하놈들이 아니라 숫제 웬수다! 금고도 못털었는데 1층은 난데 없이 나타난 병력에게 제압당했으니... 이거 어차피 항복해봐야 죽을거, 부하들을 방패 삼아서라도 혼전을 유도하고 도망갈 생각을 떠올렸다. 상대는 기껏 열 하나. 이쪽도 부하들이 일곱은 있었으니 도주가 성공할 가능성은 있었다. 그런데 그때 밖에서 무장한 스무명의 인원이 우르르 더 몰려들어왔다. 3조와 4조의 가병이었다.
"......"
순식간에 가병들로 가득찬 은행 로비. 리더는 도주 계획을 포기하고 싸울 의욕마저 잃었다. 그냥 포기하고 항복할까 하는 찰나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선 윌포드가 장난스레 제안을 해왔다.
"왜. 항복들 하려고? 안돼지 안돼. 그러면 재미가 없잖아. 이러면 어떨까? 내가 혼자서 너희 여덟 전부를 상대해주지. 너희들이 날 쓰러트리면 그대로 나가도 좋아. 이들은 아무도 너흴 쫓지도, 공격하지도 않을거야."
"...뭐라고?"
"걱정마. 여기 있는건 대 해밀턴 공작가의 충실한 가병들. 한 번 내건 약속을 어기는자들이 아니니 신용해도 좋다고. 어때, 도전해보겠어?"
뭐지 이 여우눈의 남자는. 제정신인가? 그쪽은 서른이 넘고 이쪽은 여덟이다. 게다가 저쪽은 무구를 충실하게 갖췄지만 이쪽은 맨몸에 보잘것 없는 무기들만 들었다. 그냥 무장을 해제하라고 명령해도 순순히 따라야 할 판인데 자기 혼자서 여덟을 다 상대해줄테니 덤비란다. 게다가 자신을 쓰러트리면 가도 좋다고? 믿기 힘든 소리였지만... 약속만 지킨다면야 이대로 체포당하고 사형대에 끌려가는것보단 훨씬 나았다. 리더는 이를 악물며 허리에서 장검을 뽑아들었다.
"어차피... 이대로 잡혀가서 목메달리는 것 보단 그 제안이라도 받아들이는게 낫겠지. 다들 살고 싶으면 이놈을 죽여!"
"으, 으아아앗!"
"죽어엇!"
리더와 일곱명의 수하들은 한꺼번에 윌포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은행강도질을 저지르면서 다들 흥분할대로 흥분해있던차, 이판사판 가릴거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여덟명의 복면남들을 보면서도 윌포드는 태연했다. 손에 쥔 에스터크를 느긋하게 들어올렸다. 그리고 검을 내밀며 자세를 잡나 싶던 순간,
"지크붼즈 슈테힌!"
파파파팟. 윌포드의 손에서 4연속의 찌르기가 펼쳐졌다. 달려들던 선두의 사내들 넷은 전부 미간 한가운데가 구멍난채 피와 뇌수를 뿌리며 바닥으로 쿠당탕 엎어졌다. 리더 사내는 경악했다.
"뭐어어엇?!"
뭔가 이 남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검격은 커녕 움직이는게 보이지도 않았는데 부하 중 무려 반수가 머리통에 구멍이 난채 죽어버린것이다. 이런 말도안되는 실력의 펜서라니... 아니, 잠깐. 여우눈을 한 무시무시한 실력의 기사... 게다가 해밀턴 공작가라면...
"서, 설마. 피어서 윌포드?"
남은 사내들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이제서야 자신들이 상대하는게 누구인지 깨달았던 것이다. 너무 흥분해서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게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기사들 중 하나인 윌포드라는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 필살의 찌르기로 뭐든지 꿰뚫는다는 피어서 윌포드를! 이렇게 멍청할데가! 고작 자신들 따위의 조무래기는 이 남자에게 수십명이 덤벼들어도 상처 하나 입히기 힘들터!
"어째서 당신같은 기사가 여기에..."
"어째서는 뭘. 은행에 돈 찾으러 왔지. 그나저나 안 덤벼? 그럼 내가 간다?"
윌포드는 태연히 말하며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전의를 잃은 복면 사내들은 뒤로 움찔하며 물러나려 했지만 윌포드의 손에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속의 찌르기가 그들의 머리나 심장을 노리고 찔러들었다. 윌포드가 겨우 세 걸음 내딛는 사이에, 남은 네 사내도 각기 몸에 난 급소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정말 무섭도록 빠르고도 깔끔한 솜씨였다. 이렇게해서 복면을 뒤집어쓰고 은행을 습격한 레드라인의 잔당들은 전부 전멸했다.
"하지만 이거 엉망진창이네. 이래서야 돈을 찾을수가 없잖아?"
가벼운 어조로 말하며 가병들 중 한 명이 건넨 손수건으로 에스터크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윌포드. 그 사이 한쪽에서 겁먹은채 수그리고 있던 노부부는 가병들의 손에 무사히 구조되어 밖으로 빠져나갔고, 제이스와 아르데나도 은근슬쩍 난장판이 된 은행에서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윌포드가 뒤에서 둘을 불러세웠다.
"잠깐만요 거기 아가씨 두 분."
윌포드가 한 마디 툭 던지자,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가병들이 처척 움직이며 제이스와 아르데나의 앞을 벽처럼 가로막았다. 무슨 병정개미같은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제이스는 당황하며 윌포드를 돌아보았다.
"뭐죠? 우린 여기 우연히 휘말린 피해자일 뿐인데요."
"아, 이거 죄송합니다. 뭐 다름이 아니고 그냥 간단히 몇 가지 묻고 싶은게 있어서요. 불편하시더라도 잠깐만 협조해주시면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뭐하시면 이 믿음직한 해밀턴 가문의 가병들을 동원해서 댁까지 안전한 에스코트를 해드릴수도!"
흡사 초짜 연극배우마냥 과장된 몸짓과 어조로 설명을 해오는 윌포드. 제이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하아... 됐어요. 그보다 묻고 싶은게 뭐죠?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싶네요."
겉으론 당당하게 대꾸하는 제이스였지만 내심은 당황스러웠다. 이렇게나 강력한 기사가 나타나다니. 덕분에 강도들에게서 해방된건 좋았지만 갑자기 붙잡아놓고 뭘 묻는다고 하니 뭔가 꺼림직했다. 게다가 해밀턴 공작 가문의 기사다. 진석과 얽혔던 레오노르 공주 집안의 가신이 아닌가? 어째 불안했다. 윌포드는 제이스와 아르데나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빙긋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뜬금없지만 혹시 해수욕 좋아하시나요? 아니면 뱃놀이라거나."
"...!"
제이스는 눈앞의 여우눈 기사가 내뱉은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교단에서 받은 훈련덕에 간신히 얼굴의 표정을 무너트리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르데나는 달랐다. 아르데나의 얼굴엔 순간적이지만 당혹감이 스쳐지나갔던 것이다. 윌포드는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등대라거나. 경치가 참 좋죠, 거기가?"
"홍염... 커헉!"
제이스는 품에 손을 넣으며 루비 로드를 꺼내 눈앞의 윌포드에게 공격을 하려 했지만 윌포드가 훨씬 빨랐다. 윌포드는 빠른 몸놀림으로 제이스의 복부에 주먹을 찔러넣었다. 기역자로 굽혀지는 제이스의 몸. 윌포드는 괴로워하는 제이스의 팔을 붙잡아 뒤로 꺾었다.
"오오 이런. 해밀턴 공작 가문의 기사에게 위협을 행사하려한 그쪽을 긴급 체포합니다."
등대의 순찰조가 일러줬던건 빨간머리와 검은머리의 두 여성이다. 지금 이 두 여자는 각기 빨간머리와 검은머리를 하고 있다. 물론 그것만으로 사람을 붙잡을 순 없었다. 하지만 윌포드는 은행에 진입한 후 여자들의 앞에 쓰러져있던 두 구의 시체를 똑똑히 보았다. 분명 그녀 본인들이 무력화시켰으리라. 머리색 뿐이긴 하지만 등대 경비의 증언과 겹치는 인상착의에 은행 강도를 제압할 정도의 실력자라. 충분히 수상하다. 눈치 빠른 윌포드는 그녀들을 순순히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가벼운 떠보기에 이렇게 냅다 걸려주기까지. 되려 고마울 정도였다. 윌포드가 제이스를 제압하자 뒤쪽에 서있던 가병 둘이 양쪽에서 아르데나의 팔을 붙잡았다.
"저항만 하지 않는다면 가능한 정중히 모실테니 쓸데없는 반항은 삼가주시길."
윌포드는 팔을 꺾어 제압하고 있던 제이스를 다른 가병에게 넘겨주며 그렇게 말했다. 우연찮게 은행 강도를 발견하고 돌입한것 뿐인데 이거 예상외로 놀라운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은행이 이 꼴이라 정보상에게 지불할 돈을 찾지 못해 곤란하겠다 싶은 참이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정보상에게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자 그럼 이 두 여자를 어디서 취조해야할까? 어디 적당한 장소가...
"읏, 으아아아아-!!!"
두 여자의 신병은 가병들에게 맡겨놓고 취조를 할만한 장소의 물색을 하던 윌포드. 갑자기 들려온 아르데나의 비명에 깜짝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호리호리해서 별 힘도 못쓰게 생긴 소녀였건만, 몸에서 무형의 기류가 솟구치자 놀랍게도 양 팔을 붙잡은 가병들이 뒤로 밀려 쓰러지고 있었다.
"아닛?!"
윌포드는 에스터크를 뽑으며 소녀를 향해 쇄도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저건 그냥 놔두면 안된다! 어째 불길한 기운의 냄새가 풀풀 흘러넘쳤다. 어차피 붙잡은건 두 명이니 한 명쯤은 죽여도 무관할터! 평범한 사람의 눈엔 보이지도 않을 신속의 찌르기가 아르데나의 심장을 노리고 찔러들어갔다.
"핫!"
챙! 하지만 아르데나의 손에서 뭔가가 휘둘러지며 윌포드의 검격을 튕겨냈다. 화들짝 놀라며 뒤로 훌쩍 물러서는 윌포드. 그녀의 손엔 자그마한 본 나이프가 들려있었다.
'아니, 내 공격을 막아내?'
놀랠 노자였다. 수없이 단련한 자신의 찌르기를 막아낸게 강력한 검사나 기사가 아닌 일개 어린 소녀일 줄이야. 그것도 보잘것 없는 나이프 하나로! 게다가 그녀의 몸에서 계속 뿜어지는 무시무시한 기운을 보니... 아마도 저것은 신체 능력을 대폭 끌어내는 종류의 능력인것 같았다. 자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윌포드가 대처 방법을 궁리하는 사이, 아르데나는 다시 한 번 기합성을 내질렀다.
"언니를! 언니를 놔줘어어어!"
푸화악! 아르데나에게서 폭사되듯 뿜어지는 기운에 윌포드는 양 손으로 앞을 가리며 몇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 아까보다도 더 강하고 어두운 미지의 기운이 소녀에게서 뿜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소녀의 두 눈동자는... 불길하다못해 섬뜩할 정도의 붉은빛으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이, 이건 위험하다! 당장 죽여야 한다! 윌포드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서며 자신이 가진 비장의 기술을 펼쳤다.
"가우켈빌트!"
뒤에서 갑자기 솟아올라 상대의 허를 찌르는 전갈의 독침마냥, 극단적으로 휘는 궤도의 찌르기로 적의 사각을 노리는 기술 가우켈빌트. 분명 정면에서 오는가 싶지만 어느순간 측면이나 뒤를 찌르는 황당할정도의 이상 검격. 그야말로 신기루 같은 윌포드의 절기! 지금까지 이 한 수를 제대로 막을 수 있던 상대는 오직 클립튼 뿐이었다. 윌포드의 손에서 펼쳐진 가우켈빌트의 매서운 찌르기가 아르데나의 우측 관자놀이를 노리고 휘어들어갔다. 그렇게 에스터크의 검극이 그녀의 머리로 파고드나 싶던 순간,
"아아아아아-!!!"
어린 소녀의 몸에서 저주의 힘이 완전히 해방되며 검은 괴물이 현신했다! 찌르기의 스페셜리스트인 펜서가 펼쳐낸 필살의 검격은 허무하게도 허공을 찌르는데 그쳤다.
"뭣...?!"
거대한 늑대인간과 같은 검은 야수가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게다가 피처럼 붉은빛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끔찍한 두 눈동자라니! 아무리 백전연마된 윌포드라도 이 상황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덩치부터가 시야를 가득 메우는... 흡사 2층 건물만한 크기. 키가 거의 4미터는 되어보였다. 은행의 로비가 높은 편이긴 했지만 키가 저 정도니 머리가 거의 천장에 닿을듯했다. 팔뚝이나 다리도 무슨 건물의 기둥만큼이나 어마어마한게 저기에 한 대 맞았다간 즉사하기 쉽상일듯 싶었다.
'내가 지금... 뭘 상대하고 있는거지...'
순간 얼이빠진 윌포드는 혼란에 빠질뻔 했지만, 고개를 흔들고 이를 악 물며 정신을 차렸다. 뒤에서 얼어붙은채 꼼짝도 못하는 가병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전원! 그 여자를 데리고 공주님과 함께 당장 왕성으로! 서둘러!"
"그렇겐 안돼! 언니를! 내놔아아아!"
윌포드의 지시에 반박하듯 곧바로 괴물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나왔다. 괴물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반응하다니! 그냥 단순한 괴물이 아니었다. 분명 이성을 유지하는채로 저 모습으로 변신한것일터. 윌포드는 즉시 뒤로 뛰어가, 한 가병이 들고 있던 철제 방패를 빼앗아들고 괴물쪽을 향했다.
"괴물의 말 따윈 무시해! 가병들! 내 지시를 따라라!"
제정신을 차린 기병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제이스를 연행한채 마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아르데나는 카아아 분노의 괴성을 내지르며 그쪽으로 걸음을 내딛었지만 그 앞을 방패를 든 윌포드가 막아섰다.
"그렇겐 안되지. 내가 상대다!"
"비켜어어어!"
콰캉! 아르데나가 휘두른 앞발이 윌포드의 방패 위를 후려갈겼다. 윌포드는 방패를 비스듬히 세워 어떻게든 일격을 흘려보냈지만, 그 댓가로 방패를 손에서 놓쳐버렸다. 엉망으로 찌그러진 방패는 저쪽 구석으로 날아가 벽을 푸딩처럼 뚫으며 깊게 박혔다. 강렬한 타격을 흘려낸 윌포드의 손은 충격으로 인해 신경의 말단까지 저릿했다. 흡사 팔꿈치 아랫쪽이 무슨 전기쇼크라도 맞은듯 덜덜 떨렸다.
'제길! 막을게 아니라 피할걸 그랬다!'
상상외로 상대의 힘이 너무 강했다. 방패로 적당히 막으며 버티다가 가병들이 어느정도 후퇴하면 자신도 몸을 빼려고 했는데 일격을 흘려보낸걸로도 이 정도라니! 방금전의 행동이 후회됐지만 이미 지나간일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다른생각을 할 틈도 없이 눈앞으로 아르데나의 두 번째 공격이 날아들고 있었다. 잽싸게 몸을 피하는 윌포드. 가벼운 경장만을 걸치고 있어 그런지 발놀림만은 거칠것 없이 가벼웠다.
"카아아앗!"
콰아앙! 아르데나의 주먹이 애꿎은 지면을 때렸고 장렬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윌포드는 몸을 뒤로 날려 공격을 피하긴 했지만 아까 방어로 인한 충격이 여전히 팔에 남아있어 도저히 반격은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도무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검을 쥘 수 없었던 것이다. 반격도 하지 않으며 도망다니는 윌포드를 쫓듯 아르데나의 발길질과 손톱이 연신 날아들었다. 윌포드는 혀를 찼다.
"칫! 덩치는 산만한데 쓸데없이 빠르기까지!"
콰르릉! 아르데나의 빗나간 발길질에 벽 한쪽이 와륵 무너져내렸다. 벽 너머로 가병들이 몰려가는 모습을 확인한 아르데나는 자꾸 피하기만 하는 윌포드를 내버려두고 막 저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마차를 향해 몸을 날렸다.
"젠장, 이리와 이 괴물! 어딜 꽁무니를 빼냐!"
윌포드는 아르데나를 도발해 자신의 앞에 묶어두려 했지만 지금의 아르데나는 이전의 단순한 괴물이 아닌 자신의 이성을 유지하는 상태. 단순한 괴물 상태였다면 눈앞의 윌포드에게 집중했을테지만 아르데나는 제이스를 구출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윌포드는 아르데나의 뒤를 쫓긴했지만 손이 저려 당장은 검격을 펼칠수도 없으니 딱히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아르데나가 윌포드의 지연책에 걸려들지 않았던터라 마차는 은행에서 채 얼마 이동하지도 못했고, 아르데나는 그 뒤를 금세 따라잡아 높이 뛰어오르며 가병의 무리 한복판으로 착지했다. 콰아앙! 바닥을 울리는 충격에 십수명의 가병들이 휘청이며 바닥에 나자빠졌다.
"내놔아앗! 언니를 돌려줘어엇!"
아르데나는 섬뜩한 괴성으로 울부짖으며 주변에 쓰러진 가병들을 향해 마구 참격을 휘두르고 날뛰었다. 가병들이 단련된 병력이라곤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병사들을 상대로 했을때의 이야기. 이들에겐 윌포드처럼 아르데나의 공격을 막거나 회피할 정도의 능력은 없었다. 아르데나의 손톱이 한 번 휘둘러질때마다 잘려나간 팔다리와 피보라가 휘몰아쳤다.
"으아아악!"
"괴, 괴무우울!"
순식간에 십여명의 가병이 저민 고깃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흩어졌다. 주변의 가병들을 제압하고 씩씩거리던 아르데나는 마차로 다가가, 문짝을 붙잡고 힘으로 와작 뜯어내었다.
"꺄아아악!"
"이, 이 무슨!?"
마차안엔 레오노르 공주와 세명의 호위 여기사, 그리고 그새 밧줄에 포박된 제이스가 있었다. 아르데나는 손을 뻗어 안에서 먼저 제이스를 끄집어내어 품에 안고, 재차 손을 뻗어 레오노르 공주를 꺼냈다.
"꺄아악! 도와줘!"
"저 괴물이 공주님을!"
"포... 포위해라!"
가병들은 아르데나가 레오노르 공주를 끄집어내 손에 쥐자,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했다. 놀라 혼란에 빠진건 레오노르 공주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진석이 갑자기 눈 앞에 뛰어들었을때도 침착히 거짓말을 해서 함정으로 인도했던 레오노르 공주였지만 이런 무시무시한 괴물앞에선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도 지금은 공포에 질린 비명을 연신 꺅꺅 질러댈 뿐이었다. 아르데나는 왼팔로는 제이스를 안아들고, 오른팔엔 레오노르 공주를 쥔 채 그녀를 높이 들어보였다.
"따라오지마라! 추적하면, 이 여자를 죽일테다!"
"크읏...!"
"이게 무슨!"
위협은 효과적이었다. 가병들은 공주가 사로잡히자 제자리에 못박힌듯 꼼작않고 서서 아무것도 하지못했다. 그때 뒤에서 헐레벌떡 달려온 윌포드가 나타났다.
"어이! 괴물!"
순간 아르데나와 모든 가병들의 시선이 윌포드에게 쏠렸다. 윌포드는 허억허억 몇 번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가다듬곤, 아르데나를 향해 말했다.
"쫓지 않을테니 얌전히 공주님을 두고 가라. 네가 지금 공주님을 납치했다간 해밀턴 공작가... 아니. 그란델 왕국 전체의 추적을 받게 될거다. 지금 이 상황까지라면 내가 수습해줄 수 있지만, 왕족의 납치를 저지르면 거기서 끝이다. 아무리 강력한 변신능력을 지녔다고 해도 한 나라 전체를 상대로는 살아남진 못할터. 게다가 우리도 그쪽과는 더 얽히고 싶진 않다. 오늘일에 대해선 어떠한 책임을 묻지도 않고 추적도 하지 않는다고 약속할테니... 공주님을 이쪽에 돌려다오."
나직히 퍼져나가는 윌포드의 목소리. 험악한 상황임에도 차분한 그의 목소리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아르데나는 마음이 흔들리는건지 손에 든 레오노르 공주와 윌포드를 번갈아 보며 주저하기 시작했다. 그때 아르데나의 품에 안겨있던 제이스가 크게 외쳤다.
"저딴놈의 말은 들을 필요 없어! 저 남자가 약속을 지킬거란 보증은 아무데도 없어! 분명 이 여자가 공주라고 했지? 그럼 주도권은 우리가 쥐고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날 믿고 뛰어! 뛰어서 여기서 도망치자!"
"으... 으읏. 알았어요!"
아르데나는 제이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양손에 제이스와 레오노르 공주를 쥔 채 어두운 밤거리를 마구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4미터 짜리의 거구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속도! 순식간에 질주해 저 멀리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저런 속도라면 준마를 타고 달려도 따라잡기 힘들 것 같았다. 황망히 뒤에 남겨진 윌포드는 그야말로 피를 토하듯 절규했다.
"안 돼에에! 거기서어엇! 이 빌어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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