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4. -- > * 53화 *
밖에선 무슨 난리가 벌어졌는지도 모른채 진석은 태평하게도 엘리야의 능욕을 즐기고 있었다. 조금전까진 처녀였던 여성의 몸으로 실컷 즐기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한시간 가까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어... 잠깐. 벌써 이런 시간이야? 그런데 은행이 이렇게 멀던가? 아닐텐데?'
헥헥거리며 열락에 잠긴채 정신을 못차리는 엘리야를 내버려두고, 진석은 바지를 추슬러 입었다. 소파에 남겨진 엘리야의 다리 사이로 파과의 피가 섞인 선홍색 정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처음 삽입 후 한번도 빼지않고 지금까지 연달아 사정했던것이다.
"...돈 찾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걸리는데? 설마 무슨 일이 생겼나."
엘리야를 미약으로 능욕할 흑심에 둘을 내보낼땐 언제고, 이젠 그들이 너무 늦으니 불안해졌다. 엘리야를 미행으로 붙였던 누군가가 둘을 노리고 습격이라도 한걸까? 으으음. 알 수 없었다. 생각이 많아지니 초조해지고 어째 목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진석은 엘리야에게 먹이고 남은 술병을 들어 벌컥벌컥 몇 모금 마시며, 일단 한 숨 돌릴겸 무심코 창가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 어째 눈에 익숙한 형체가 쿵쿵거리며 도시를 가로지르고 질주하는것이 보였다.
"푸후웁! 아... 아르데나? 괴물의 모습이잖아? 아니 이게 무슨일이야?!"
마시던 술을 그대로 다 뿜어버린 진석. 분명 저 아래에서 어두운 밤거리를 가로지르며 질주하고 있는것은 아르데나였다. 게다가 가만보니... 양팔에 각기 뭔가를 안고 있다? 어둡고 멀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그건 분명 사람같았다.
"하... 아, 아니. 한 명은 아마 분명 제이스일테지만... 다른 한 쪽은 대체 누구야?!"
이해불가였다. 은행에 돈 찾으라고 보냈더니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지만 하나 확실한건, 아르데나가 괴물로 변신을 해야 할 만큼 뭔가 급박한 상황이라는 것! 여유를 부릴때가 아니었다. 아르데나는 도시 북쪽의 출구로 달리고 있었다.
"북쪽인가... 아, 혹시 제이스가 아르데나에게 이동 방향을 지시하고 있나?"
이전, 에나의 시체와 기절한 제이스를 짊어지고 도시를 탈출할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북쪽으로 도주해 데오그라즈와 러프야드 사이의 숲에서 잠시 머물렀었다. 제이스도 분명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테니... 지금 저건 또 다시 그 숲으로 향하는걸까? 하긴 거기라면 딱히 진석 자신에게 알리지 않아도 아 이곳으로 도망갔을거다 하고 눈치챌만한 유일한 장소일거다. 아무튼 여기서 이렇게 구경이나 할 시간이 없었다. 경계령이고 나발이고 자신도 서둘러 도시를 빠져나가야 했다. 그런데...
"흐으... 으응..."
재갈이 물려진채 소파에서 몸을 뒤척이는 엘리야. 표정이 몽롱한게 정사뒤의 열락에 빠져 혼미한채로 지쳐 잠든것 같았다.
'태평하구만. 그나저나 이걸 어쩌지. 죽여야 하나? 얼굴은 평범한 편이라 그쪽 방면으론 하나도 아깝지 않지만 그냥 죽이자니... 진짜 능력이 아깝다.'
엘리야는 미행이나 뒷조사로는 엄청나게 특화된 능력자다. 외모는 평범한 축이라 밤상대로는 아쉬울 것 없었지만 이만한 기술을 지닌 여자를 입막음 처리로 죽이자니 뭔가 대단한 낭비같았다. 아니, 이 여자에게도 간단하게나마 미약과 자신의 아랫도리 콤보 맛을 한 번 보여줬으니... 잘만 꼬드기면 이쪽으로 넘어와주지 않을까?
'끄응. 새삼 느끼는거지만 나는 정말 여자에 약하구나.'
하긴 상대가 남자놈 같았으면 진즉 죽였을거다. 의뢰주? 씨펄, 알게뭐야 하고 배때기에 칼침을 한 방 푹. 끝~ 뭐 이렇게. 하지만 이 엘리야라는 여자는 자신이 처녀도 받은데다가 꽤 능력도 있으니...
"...주워가보자. 스킬도 많으니 분명 어딘가 쓸모가 있겠지. 말을 안듣겠다 싶으면 그때가서 죽여도 되고."
흡사 무슨 길거리에 떨어진 고물을 수집하는듯한 말투. 진석은 쳇하고 혀를 차며 방안에 널려있던 자신과 일행의 짐을 주섬주섬 챙기다, 무심코 방 한 쪽 구석으로 시선이 향하자 그대로 움직임이 멈췄다.
"쇼핑... 백들."
방 한쪽을 가득메운 수십여개의 쇼핑백들. 저걸 다 챙기고, 이 여자까지 대동한채 마차를 회수해서 도시를 빠져나가야 한단 말이지?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 진득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쇼핑따위 정말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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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스와 아르데나는 일단은 진석의 예상대로 움직였다. 아르데나는 제이스의 지시대로 북문을 돌파해, 그대로 어둠속으로 달려나갔다. 물론 도시는 난리가 났다. 오밤중에 정체불명의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서 도심을 질주한데다 북문을 돌파해서 도시를 빠져나간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경계령이 걸려있던 도시는 벌집을 들쑤신듯 들썩거렸다. 즉시 동원 가능한 모든 병사들이 소집되었다. 흡사 전시와 같은 긴급 편성이었다. 근처의 요새와 진채에도 파발이 띄워졌다. 그냥 괴물이 나타나서 도시를 한 번 질주한 소동이었다면 일이 이 정도로 심각해지진 않았을것이다. 문제는 정체불명의 괴물이 도심을 뒤집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해밀턴 공작가의 가병들을 살해하고 가문의 장녀인 레오노르 공주까지 납치했다는 것이었다. 이건 보통 상황이 아니었다. 왕족이 납치당했는데 그란델 왕실측에서도 손 놓고 구경을 할 리 없었다. 경계령보다 윗단계인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빠르게 편성된 백여기의 기병대가 1차 추적대로서 북문을 통해 도시를 빠져나갔다.
'...오, 마이, 갓. 얘들아. 공주는 대체 왜 납치한거니. 미리안한테 선물로 가져다 주려고? 응? 공주가 뭐 데오그라즈 특산품쯤 되냐?'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혼자 마음속으로 탄식하는 진석. 현재 도시의 여력은 전부 북쪽으로 도망간 괴물을 추적 하는데 집중되어있어 북문 밖에 한참 병사를 결집시키고 있던 터라, 되려 도시 안쪽의 경계는 평소보다 허술해져 있었다. 그래서 진석은 의외로 별 어려움 없이 마차를 되찾아 호텔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북문은 병사들에게 완전히 통제되어 일반인은 절대 출입할 수 없는 상황.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서문이나 동편의 항구를 이용해야 했다. 하지만 이 시간에 운행하는 여객선은 있지도 않거니와 계엄으로 모든 배가 죄다 운항이 멈춘 상태. 배로 제이스, 아르데나를 쫓는다는건 어불성설. 갈 수 있는 길은 서문뿐이었다. 제이스와 아르데나는 북쪽으로 향했으니 예상대로라면 아마도 데오그라즈와 러프야드 사이의 숲으로 향했을터. 진석이 서문을 통해 빙 돌아서 가자면 진즉 떠난 추적대보다도 훨씬 늦어질게 뻔했다. 게다가 1차 추적대는 기병들. 마차로는 아무리 서둘러도 한계가 있었다.
'하아. 제이스랑 아르데나가 추적대를 눈치채야 하는데 큰일났네. 행여라도 숲에서 날 기다리지 말고 그냥 메디니아를 향해 그대로 쭉 가거나, 아니면 어디 다른방향으로 도망쳐야 안전할텐데...'
이러니 저러니해도 지금까지 쭉 붙어다니며 몸정이 든 제이스고, 아르데나는 자기 손으로 직접 구하고 거둔 아이다. 당연히 걱정이 됐다. 하지만 둘은 이미 자신과 물리적으로 한참 떨어진 상태.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빠르게 도시를 벗어나 북쪽으로 향하는것 밖에 없었다. 진석은 프론트에서 정산을 마치고 수많은 짐과 엘리야를 마차에 실은채 마부석에 올랐다. 그런데 마차칸 안엔 쇼핑백이 너무 많으니 이건 뭐 사람을 실어두는게 아니라, 숫제 사람과 짐을 같이 파묻는 수준이었다. 물론 사람들의 이목이 있으니 엘리야를 마차에 태울땐 재갈과 포박을 풀고 품에 안은채였지만, 그녀가 깨어나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니 마차에 태운 다음엔 다시 재갈과 포박을 해두었다. 떠날 차비를 마친 진석은 마차를 서문쪽으로 몰았다.
"...잠깐. 그러고보니 지금 이 상황... 혹시 내 탓인가?"
마차를 몰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랬다. 애당초 자신이 엘리야를 미약으로 능욕할 욕심에 제이스와 아르데나를 은행에 보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런일은 벌어지지 않았을텐데. 쓸데없는 성욕이 이 사태를 불러온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이게 다 내 아랫도리가 화근이란말인가... 아니 그래봐야 겨우 섹스 한 번인데! 섹스 한 번 한 것 치고는 결과가 너무 심각하잖냐! 으이익!'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진석. 누굴 탓할수도 없고 그저 자신의 잘못인것 같아 속만 답답했다.
"후우... 아니지 아니야. 잠깐 진정해보자."
쓸데없이 자학하던것을 멈춘 진석은 진정하고 서너차례 깊게 심호흡을 하며 기분을 가라앉혔다. 여기서 자기 머리털이나 뜯고 있어봐야 바뀔것은 없다. 제이스와 아르데나가 어떻게 움직일지, 자신은 뭘 해야 할지를 조금이라도 궁리하고 생각해보는게 옳은 행동이었다.
'자자. 그래. 음... 제이스와 아르데나는 북쪽으로 빠져나갔지. 그렇다면 역시 1차 목적지는 분명 숲이라고 보는게 맞을거다. 확실히 제이스도 머리가 좀 돌아가는 편이니 이심전심이라고 도시의 이변을 알아챈 내가 자신들을 쫓아 그곳으로 갈 거라는 정도의 계산은 할터.'
문제는 추적대였다. 물론 아르데나가 전력을 다해 달리면 말보다도 빠르긴 했지만 변신을 얼마나 지속 할 수 있는지는 진석도 잘 모르는 상황. 최악의 경우 변신을 얼마 유지하지 못한채 인간 모습으로 돌아가, 평원 한가운데서 도보로 이동하다 추적대에게 붙잡힐수도 있었다.
'그럼 진짜 끝이지. 괴물의 힘을 끌어내지 못하는 아르데나야 그냥 허약한 소녀고, 제이스가 비전 마법사라고 해봐야 혼자서 기병 일백기를 전부 당해내진 못할터.'
군에서 말을 탄다는건 그가 기사나 지휘관처럼 상급의 신분이거나, 혹은 극도로 숙련된 상급병이라는 뜻이다. 기병은 일반 잡병처럼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닌것이다. 단일 병과로 편제할때 가장 강력한 공격력과 기동력을 발휘하는게 바로 기병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공주를 탈환하기 위한 추적대. 일반 기병뿐만 아니라 전투력 높은 기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을게 뻔했다. 군주와 장수 플레이를 여러번 해온 진석이 알고있는 기사급의 무력은 결코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기사라는건 군대를 이끌고 최전선에 서서 군대를 이끌수도 있는 무관이라는 뜻. 드레비안... 아니, 드레비안이 아니라 맥의 절반쯤 되는 실력을 가진 기사라도 몇 명 포함되어 있다면 제이스 정도의 기량으로 상대하긴 절대 무리다.
'마차로는 아무리 빨리 가봐야 숲까지는 한참 걸릴텐데.'
게다가 서문을 통해 나간다음 북쪽으로 향하며 추적대의 눈에 띄지 않게 가도에서 벗어난채 이동한다면 길이 고르지 않으니 더더욱 오래 걸릴터. 이래저래 자신에겐 불리한 상황이었다
'차라리 내가 추적대를 막을만한 방법은... 뭐 없을까?'
먼저 나아간 기병대 일백기는 어쩔 수 없지만 그 후속 추적대를 막을만한 방법이 있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대규모 공격마법 같은걸 북문쪽에 모여있는 병사들에게 되는대로 쏴제껴 대규모 사상자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제이스 급의 강력한 마법사가 너댓명만 있어도 기습을 가해 가만히 집결해 있을 병사들에겐 어마어마한 피해를 줄 수 있으리라. 왜, 자신과 일전을 벌였을때 마지막으로 썼던 마법. 홍염삭이었던가? 그런 마법을 병사들의 전열에 마구 날려대면 정말 대참사가 일어나리라. 현대전으로 치면 밀집 대형에 수류탄급 위력의 마법이 펑펑 작렬하는 셈이니까. 하지만 진석에게 있는 공격마법이라곤 최하급의 주문인 화염화살 뿐이었다.
'내 마법이라곤 화염화살 뿐이니 택도 없는 소리라 무리고. 그렇다면...'
제이스와 아르데나에게 쏠린 이목을 어딘가 다른곳으로 향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었다. 이를테면 뭐 도시내에서 대규모 폭동이라도 일어난다면 북문에 결집한 병력들은 할 수 없이 도시로 되돌아 오곘지?
'...그럴듯한데?'
물론 지금 당장 폭동을 일으키겠다는건 당연히 말이 안되는 소리다. 하지만 병력의 이목을 강제로 다른쪽으로 유도하겠다는 생각 자체는 어째 시도해봄직 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손놓고 멍청하게 마차를 몰며 북쪽으로 가느니 어떻게 해서건 추가 추적대를 막아보고 싶었다. 마침 마차는 서문쪽에 다다라 있었다. 화톳불을 밝혀놓고 문을 검문하는 병사는 고작 1개 분대 뿐이었다. 정말 요소에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두고 동원 가능한 병력은 전부 북문쪽에 집결시키는 모양이었다.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뭐라고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다 진석의 마차를 발견하곤 손을 들어 정지시켰다.
"어이, 거기 마차 정지."
"...네. 무슨일이라도?"
짐짓 태연함을 가장하며 마차를 세우는 진석. 가장 고참병으로 보이는 중년의 병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에잉, 무슨 일은! 지금 뭐 난리도 아니더만. 괴물이 나타나서 레오노르 공주를 납치했다나. 이게 왠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지... 그보다 어디가는 길이쇼? 계엄이니 뭐니 난리판인데 마차를 끌고 태연히 돌아다니다니. 용감한 양반일세."
"해밀턴 시로 갑니다. 귀족가에서 들어온 주문때문에 당장 급히 보내야 할 물건이 있어서요."
"이런 시간에? 하 거참 상인들도 먹고 살기 힘든건 매한가지구만. 뭐 서문으로 나가는거라면 별 상관없겠지. 통과!"
병사가 선선히 손짓하자 성문 앞을 가로막고 있던 병사들이 길을 터줬다. 그들을 향해 가볍게 목례하며 마차를 모는 진석. 그런데 마차칸 안쪽에서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고참병이 이쪽으로 뛰어와 소리질렀다.
"어이! 잠깐! 뭐야 방금 그 소리? 마차 안에서 난 것 같은데."
고삐를 쥔 진석의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아마 안에 실려있던 엘리야가 뭔가 한 것 같았다. 이 망할년! 그냥 죽일걸! 난 진짜 여자에게 너무 물러서 탈이다! 당황한 진석이 마차를 몰고 강행돌파 해야하는지, 아니면 이 병사들을 쓰러트려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이 잽싸게 다가온 고참병이 마차문을 확 열어제꼈다.
"이 안에 뭐가 있는거야?"
"앗...!"
낭패다! 포박된 엘리야의 모습을 보면 당연히 수상한 자라고 생각해서 공격을 해올터! 이를 꾹 깨물며 허리 뒤춤에 찔러놓은 단검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고참병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는 의외의 것이었다.
"으엑. 뭐야 이 쇼핑백들은. 세상에 이게 다 얼마어치야?"
'...잉?'
당황한 진석은 서둘러 마부석에서 내려 고참병에게 다가가 그가 활짝 열어둔 마차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마차칸 안쪽에선 대충 정리해두었던 수십여개의 쇼핑백이 몽땅 무너져 엉망진창으로 바닥에 쌓여있었다. 그런데 좌석위에 눕혀두었던 엘리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엘리야가 무슨 마술이라도 부려 사라졌을리는 없다. 아마도 그녀는 좌석에 누운채 뒤척거리다 마차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 충격으로 쇼핑백들이 무너져 그녀의 위로 쏟아져 내린것 같았다. 덩치나 체구가 큰 상대였다면 무리였을테지만 체구가 가는 엘리야다보니 쇼핑백 더미로도 감쪽같이 모습이 감춰진 것이었다. 고참병은 마차의 문을 닫고 진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자네 귀족가의 주문을 받고 가는 길이랬지? 저렇게 비싼 물건 잔뜩 싣고 가는 길이니 특별히 조심해서 가게. 안 그래도 어젠 후작 나리가 암살되고, 오늘은 괴물이 공주를 납치했다고 난리고... 흉흉해서 원. 세상이 미쳤는가봐."
쇼핑 따위 정말 싫다고 생각했던 진석이었다. 하지만 그 징글징글 하던 쇼핑백 더미가 이런식으로 도움이 되다니! 버리지 않고 아득바득 다 챙겨서 실어두길 잘했다. 세상일 정말 한 치 앞을 알 수 없구나!
"아, 뭐어... 네."
진석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걸 느끼며 적당히 대답하곤 잽싸게 마부석에 다시 올랐다. 마차칸에 탄 엘리야가 방금의 충격으로 잠에서 깨서 더 소란을 피울 지도 모르니 서둘러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마차는 다각거리며 서문을 빠져나가 무사히 밤의 어둠속으로 녹아들었다.
"흐아... 십 년 감수했네."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 겨우 다섯. 해치우는건 일도 아니지만 이 이상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의심받지 않도록 한 십 분쯤 가도를 따라 쭉 얌전히 마차를 몬 진석은, 이만하면 됐다 생각하고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어 그 앞쪽에 보이는 잡목림으로 향했다. 아까 생각했던 추적대 방해 계획을 실행해볼 생각이었다.
'보자. 역시 병사들의 이목을 끌어내기 가장 쉬운건 왕궁일까? 하지만 왕궁은 성벽때문에 진입하기가 힘들어서... 정면에서 성벽의 병사들을 상대로 도발이나 화염화살로 공격을 해봐?'
잡목림 안쪽으로 마차를 깊숙이 대며 이런 저런 궁리를 하는 진석. 그때 마차칸 안쪽에서 아까처럼 쿵쿵 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번엔 한 번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연속적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나는게, 아마도 엘리야가 깨어난 것 같았다.
"타이밍 한 번 죽이는구만. 하긴 아까 안 깨어난것도 다행이지. 뭐 마차는 대충 이쯤에 대어두면 되겠지."
잡목림 한가운데로 들어와 마차를 세우고 말을 메어둔 진석. 마차칸쪽으로 다가가 문을 열고 쿵쿵거리는 소리가 계속 나는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야. 시끄러우니까 그만해. 그래봐야 소용 없거든?"
쇼핑백더미 사이에서 빼꼼 머리와 팔다리 끄트머리만 내놓고 있던 엘리야. 겁먹은 표정으로 포박된 팔과 다리로 마차의 벽이나 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분명 강제로 미약을 먹은 뒤 이성이 날아간 상태에서 남자와 한참 섹스를 하다 정신을 잃고 잠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주변은 어두운데다가 뭔 짐더미 같은데 파묻혀 있는 상태. 겁먹고 날뛰는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녀는 처음 눈떴을땐 뭔가에 깔려있길래 자신이 땅에 생매장이라도 당한줄 알았었다. 진석은 덜덜 떠는 엘리야에게 다가가 재갈을 풀어주었다.
"소리 지르거나 난리 쳐봐야 소용없어. 여긴 도시 밖의 숲 속이거든. 쓸데없이 짜증나게 굴었다간 아프게 때려줄테니 그런줄 알고."
주먹을 들어보이는 진석. 엘리야는 열린 마차문 밖으로 나무들이 보이는걸 눈치채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은 사실인것 같았다. 쓸데없이 반항해서 화를 돋굴 필요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그보다 궁금한게 있었다.
"그... 나, 나를 어떻게 할거죠? 역시 죽여서 파묻는다거나... 어딘가에 팔아넘긴다거나?"
엘리야가 생각하기론 그런 결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상대는 자기 몸을 가지고 실컷 재미도 봤으니 이제 더 볼 일 있겠는가? 자신을 어떻게 처분할지 두려웠다. 진석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왜.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어? 죽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성노 따위로 팔려가서 죽는것 만도 못한 꼴로 살거나? 네가 원한다면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데..."
"시- 싫어요! 살려줘! 아참! 전부 말할테니까! 피터슨이에요! 당신의 미행을 지시한건 그 뚱뚱하고 징그러운 도마뱀 정보상 피터슨이에요!"
"...허?"
엘리야의 입에서 터져나온 의외의 사실. 그녀는 진석에게 자신이 어째서 피터슨의 밑에서 일하고 있는것인지 자신의 과거사를 간략히 설명하곤, 이전에도 한 번 피터슨의 명령으로 진석을 미행했던 일, 그리고 이번에도 그가 미행하라며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 등등을 술술 불었다. 가만히 설명을 듣던 진석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이 썩을 도마뱀 새끼가 날 미행시켰다고... 그리고 이전에도 미행을 시켰다라. 그러면 에나의 죽음에 그 도마뱀 새끼도 조금은 일조 했다는 이야기구만?"
"에나...? 아! 예전의 그 갈색머리의 여자가 에나였군요. 그런데 주, 죽음...?"
째릿. 진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엘리야를 노려보았다.
"그래. 베이머스 호텔에서의 일전때 죽었다."
"힉. 죄, 죄, 죄송해요."
눈을 찔끔 감으며 어깨를 움추리는 엘리야. 진석의 시선 한 번에 잔뜩 겁을 집어 먹었다. 저 남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에나라는 여자가 죽는데 일조한 피터슨에게 원한을 품는 것 같았는데, 그러면 그 분노가 자신에게 향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그야 지시를 내린건 피터슨이지만 미행을 했던 건 본인 아닌가? 자신도 그 일에 관련된 몸인 것이다. 손발이 묶여 꼼짝도 못하는 상황에 도와줄 사람도 하나 없는 숲 속. 자신의 모든게 상대의 판단에 달려있었다. 심기를 상하게 할 말이나 행동을 하면 안되는데... 엘리야는 슬쩍 눈을 뜨며 진석의 안색을 살폈다. 진석은 턱을 괸채 뭔가 생각하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그러면 잘됐구만. 일단 돌아가서 피터슨인지 개나발 새끼를 족치고..."
뭐라고? 지금 뭐라고 하는거야? 피, 피터슨을... 족쳐? 죽이겠다는 의미겠지? 하지만 피터슨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엘리야는 조금이라도 좋은 인상을 줘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하루새 추천 및 선작이 거의 두 배로 늘었군요. 아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갑자기 확 늘어난건지 모르겠습니다. 앞서 몇 번이나 반복한 말이지만 모자란 글 재밌게 봐주시는 분들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말 밖에 할 수 있는게 없군요. 이거 무슨 감무새도 아니고..
여전히 비축분은 별로 늘지 않아서 이러다간 1일 1편도 간당간당하지만 감사의 의미로나마 한 편 더 올려봅니다. 많은 관심을 받는건 고마운 일이지만 그만큼 부담도 되는군요. 제가 좀 쫄보라서 지금도 막 두근두근합니다.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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