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54화 (54/155)

< --   - 4.   -- >         * 54화 *

"저... 저기."

"...응? 뭐야.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유언이라면 들어주지."

"힉! 히익! 그, 그게 아니고! 피터슨에 대해 제가 아는 정보를 전부 일러 드릴테니까... 저는 그, 뭐랄까. 좀 살려주시면 안될까 하고... 하! 아하하! 하... 하하..."

웃는건지 겁먹은건지 모를 어색한 표정으로 아하하 웃어보이는 엘리야. 그 태도에 진석은 얘 참 재밌는 캐릭터구나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시당초 심하게 반항하지만 않는다면 죽일 생각은 없었다. 죽일거라면 뭐하러 힘들게 마차에 실어 데리고 나왔겠는가? 호텔방에서 진즉 죽이고 시체는 어디 뒷골목에 대충 내버렸겠지.

"그... 음! 음흠! 어... 피터슨에게는 많은 조력자가 있어요. 하지만 저를 고용해서 일을 시킨것처럼, 필요에 의해 그때 그때 고용해서 부리는 식이라 평소엔 호위가 둘 뿐이에요."

"둘이라?"

진석은 피터슨의 거처에 갔을때의 일을 떠올려보았다. 분명 1층의 복도에서 본 이쑤시개를 물고 있던 용병풍의 남자. 그리고 피터슨에게 착 달라붙어 애교를 떨어대던 무희복 차림의 노예 여성. 분명 그 둘을 말하는 것 같았다. 엘리야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우선 피터슨의 거처 1층에서 대기하는 검사. 이름은 잘 모르겠고 그저 '문지기'라고 불리는데, 제 눈으로 직접 본건 아니지만 이 남자의 실력은 무시무시하다고 해요. 들리는 이야기론 곡도에서 뿜어지는 참격으로 뭐든지 일격에 베어넘긴다고... 난폭한 건달패나 깡패들이 협잡을 부리겠답시고 피터슨의 거처에 접근하지 못하는건 다 이 남자의 덕이라고 하더라구요. 분명 매서운 검사인건 확실해요."

"음. 하긴 확실히 뭔가 한가락 하는거 같긴 하더만."

진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자 엘리야는 깜짝 놀랐다.

"엇? 혹시 피터슨을 만나러 가본적... 있는거에요?"

"뭐 한 번. 필요한 정보가 있어서 들렀었는데 그땐 그 도마뱀이 이렇게 사람 뒤통수를 등쳐먹는 개놈인줄 몰랐지. 아무튼 계속 말해봐. 다음은 그 야한 옷차림의 노예 여자인가?"

"아... 네. 그녀는 세이라라고 하는데, 옷차림에 홀려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녀는 전투노예. 강력한 마법사에요."

"저, 전투노예? 게다가 마법사? 그 여자가?"

벙찌는 진석. 그냥 단순히 밤시중을 위해 사다놓은 성노인줄 알았더니만... 전투노예라, 그것도 강력한 마법사란다! 그 정도의 뛰어난 미모에 강력한 마법까지 구사하는 전투노예라니. 진석 자신이 이전 플레이때 구입했던 견족 바울의 셰퍼드 수컷은 약 3천 골드 가량 했었다. 노예는 일반 상인들도 개별적으로 매매하곤 했지만 정식으로 운영되는 노예시장이 따로 있었고 크게 세 등급으로 나뉘었다. 우선 경매에 참가하는데 아무 조건도 없는 일반 옥션이 가장 아래. 일반 옥션에 나오는 노예들의 질은 별로 대단하지도 않고, 유사인종이나 수인종은 커녕 대부분 인간이 상품인데다가 가격도 평균 수십골드선. 보통 빚 같은것 때문에 팔려온 경우가 많았고 아무리 비싸봐야 기껏 일이백 골드였다. 게다가 절대적인 복종을 위한 마법 낙인도 찍어주지 않았다. 가장 기본적인 마법 낙인의 비용만 해도 최소 백골드로, 그만한 재력이 있으면 차라리 그보다 한 단계 위의 실버옥션으로 갈 터. 허나 실버 옥션부턴 회원이 되어 일정한 연회비를 치르거나 입장료 겸 거액의 카탈로그를 구입해서 자신의 재력을 증명해야 참가할 수 있었다. 실버 옥션부턴 인간뿐만 아니라 이따금 타 종족의 노예들도 출품되었다. 어딘가 특이하거나 특별한 능력을 가진 노예들도 종종 상품으로 나왔다. 기본 출품 가격은 평균 오백골드 가량. 비싸도 천골드 내외였다.

그리고 마지막 최상위에 있는것이 바로 블랙 옥션. 블랙 옥션은 자신에게 돈이 아무리 많다해도 그것만으론 출입 불가. 회원이 아니더라도 돈만 있으면 출입 가능한 실버 옥션과는 달리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되며 오로지 기존 회원의 추천이 있어야만 입회나 가입이 가능했다. 블랙 옥션은 비정기적으로 열렸으며, 열릴때마다 회원들에게 사전 공지를 따로 해주었다. 블랙 옥션에선 굉장히 희귀하며 누구라도 탐낼만한 보물같은 노예만이 출품되었다. 진석이 견족 바울의 노예를 3천 골드에 구입했던것도 바로 이 블랙 옥션이었다. 근데 이게 말이 3천 골드지, 천 골드만 가져도 여느 도시 중심부에 번듯한 주택을 구입 할 만한 액수다. 그러나 그만한 액수를 구입했던 견족 바울의 전투노예도 블랙 옥션에선 비싼축에 속하는 상품이 아니었다. 이전 일이라 가물가물 하지만 진석이 견족 바울의 노예를 구입하던날 최고가를 찍었던 노예는 분명 마족이었던가 뭔가하는 희귀종족의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던걸로 기억한다. 대충 만골드를 가볍게 넘었던가? 미쳤지. 만골드면 병사 수백명을 모병해 무장시키고 먹이며 수개월을 유지할 비용이다. 솔직히 돈지랄이 따로없었다. 그러니 아름다운 외모와 강력한 마법사라는 능력이 갖추어진 세이라라는 여자의 몸값은... 과연 어느정도였을까?

"이 썩을놈의 도마뱀새끼 돈은 진짜 많은가보네."

진석이 중얼거리자 엘리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확한건 아니지만 재산이 아마... 최소 수만에서 십만골드에 달할거라는 얘기가 있어요."

"......"

결정했다. 이 도마뱀 새끼 처죽이고 재산을 모조리 강탈해주마! 진석은 주먹을 불끈쥐었다. 그런 진석의 모습을 보며 엘리야가 말을 걸었다.

"그럼... 저는 이제 푸, 풀어주실거죠?"

"아니? 싫은데."

"에엑?! 정보를 주면 살려준다고 했잖아요? 게... 게다가... 그..."

"게다가?"

"수, 순결도... 빼앗아놓곤... 그것도 약을 써서 짐승처럼 만들어 놓은채로... 아아. 이제 저한테 남은거라곤 이 목숨밖에 없는데, 그것마저 남겨주지 않겠다니..."

고개를 떨구곤 코를 훌쩍거리는 엘리야. 그 모습이 왠지 귀여워 짓궂게 놀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엘리야를 상대로 장난질이나 치고 있을때가 아니지. 진석은 손을 뻗어 엘리야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말했다.

"뭐 약속은 했으니 죽이진 않으마. 뭐 처음을 뺏은건 그냥 그렇다 치더라도 네 재주가 좀 탐이 나서 말이야."

"엣? 에에엑? 너무해! 지금 말의 순서가 거꾸로 된거 아니에요? 재주가 탐이나서 굴복시키려고 순결을 빼앗았다~가 아니라? 내 몸의 가치는 고작 그냥 그런거?"

훌쩍거리다가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반박해오는 엘리야. 순결보다 능력쪽을 우선한 발언이 그녀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진석은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뭐 그럼 겸사겸사 그런걸로 치자고."

"사... 상처받았어. 으으... 20년을 지켜온 내 처녀성은 대체 뭘 위해서..."

낙담하며 마차벽에 몸을 기대는 엘리야. 진석은 둘 사이를 가로막은 쇼핑백 더미를 헤치고 그녀에게 다가가, 턱을 붙잡곤 기습적인 입맞춤을 했다.

"으, 으읍?!"

"음음... 푸하. 처녀였으니 분명 키스도 처음이었겠지? 이야 이거 감사."

"아아! 아아아아... 위도 아래도 다 빼앗겨 버렸어... 으아앙, 몰라! 다 필요없어! 죽여라 죽여!"

기습적인 키스를 당한 후 징징거리며 빼애액 악을 쓰는 엘리야. 진석은 그녀의 머리를 토닥거리곤 두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하하, 그러니까 안 죽인대도? 나와 함께 메디니아로 가자. 이딴 도시에서 음습한 도마뱀 새끼에게 부려지는게 아닌, 네 기술을 인정받고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주지. 너의 능력은 이렇게 보잘것 없는데서 낭비될게 아니야."

"......"

순간 엘리야의 눈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지하게 말을 거는 진석의 모습이 자신의 오빠인 엘로이와 겹쳐보였다. 엘로이도 항상 자신에게 말했었다. 넌 똑똑한 아이라고, 결코 빵집주인 같은데서 끝날 재능이 아니라고. 그런식으로 말하며 언제나 자신에게 탐정일에 대한 여러가지를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자신은 엘로이가 하는 거친 탐정일엔 관심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빵을 굽는것 만으로도 만족했었다. 하지만 오빠는 죽었고, 결국 자신은 그의 유지를 잇기 위해 원하지도 않던 탐정일을 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탐정일이라기보단 미행이나 뒷조사 위주인 흥신소 업무나 다를바 없었지만 분명 우수한 적성을 지닌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키지 않았던 그녀의 미행 솜씨였건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처음으로 간파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곧바로 붙잡힌데다가 약기운에 얼렁뚱땅 순결을 빼앗기기까지. 정말 예상치도 못했던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 버렸다. 분명 이 남자는 미워 마땅해야할 상대이건만, 자신의 재능만큼은 확신하고 인정해주고 있다. 그게 어째서인지 싫진 않았다.

"...생각해볼께요."

고개를 떨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엘리야. 하지만 진석은 그녀의 볼을 양손으로 꽉 붙잡은채 다시 한 번 입맞춤을 했다.

"음음읍읍으~! 푸, 푸앗. 뭐... 뭐하는거에요?!"

"너도 참 어지간하다. 이 상황에 더 생각해보고 자시고가 어딨어? 섭섭하게 하진 않을테니... 아니, 너는 내가 책임진다. 나와 함께 가자."

"채, 책임... 그... 그 말인 즉슨. 즉 겨... 겨, 결혼?"

책임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며 얼굴을 붉히는 엘리야. 하긴 자신은 이미 흠이 난 몸. 약을 먹여 자신의 순결을 빼앗은 상대가 맘에 드는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의를 다하고자 한다면... 용서해주지 못할것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스스로가 좀 속물같지만 저쪽이 워낙 미남이니까! 그 정도는 관대히 넘어가주자. 게다가 이 상황에서 서로를 비난하며 각을 세워봐야 건설적인 결론이 나올리도 없지 않은가? 절충해서 합의점을 찾는다는건 좋은일이다. 하지만 진석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기대완 달랐다.

"응? 아니 뭐 결혼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뭐랄까. 음 경제적으로나 에... 또 뭐 여러가지를..."

"...우와. 너무하다 진짜. 책임을 져준다놓곤 무슨 그런 무책임한 소리를. 그런건 책임이 아니라 그냥 알량한 자기만족 같은데요. 여자 배를 불려놓곤 미안하다며 돈봉투나 하나 툭 던져주고 가는 뭐 그런 종류의."

하지만 버벅대며 그렇게 대답하는 그의 모습이 싫진 않았다. 번듯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속이려 드는것보단 차라리 이쪽이 정직하게는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어차피 피터슨 때문에 여기서 더 머물수도 없을테고. 이 남자를 따라 어디 다른곳으로 떠나보는것도 좋을지도 몰라. 난 한 번도 데오그라즈를 벗어난적이 없었으니까. 다른 도시는, 그리고 다른 나라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엘리야는 계속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는 진석을 향해 결국 졌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따라갈테니까... 대신 주말 휴식 보장과 근무 수당 정도는 꼬박꼬박 지불해 줄거죠? 피터슨도 건당 십 골드씩은 꼬박꼬박 내어줬었는데."

"하, 걱정마. 돈이라면 네가 금화속에서 수영을 해도 좋을 정도로 받을 수 있을걸?"

"으으음?! 그럼 진작 그 말부터 했어야죠! 저 갑니다, 갈거에요! 두 말 하기 없어요!"

이거 정말 참 재밌는 여자다. 진석은 웃으면서 엘리야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쓰다듬고 뒤로 물러났다.

"아무튼 네가 승낙을 했어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건 아니니 잠시만 더 묶여있어. 나는 잠깐 도시에 돌아가서 처리하고 올 일이 있으니까."

"엑. 방금 그렇게 말해놓곤 믿음이고 뭐고 없네요. 너무해."

"또 다시 뒷통수를 맞고 싶진 않으니까 일단은 서로 합의를 했어도 조심해야지. 그보다 가만보자. 여기쯤 놔뒀을텐데..."

잔뜩 쌓여있는 쇼핑백을 뒤적거리기 시작하는 진석. 한참을 뒤적거리다, 그 안에 파묻혀있던 자신의 짐 배낭을 끄집어냈다. 배낭을 꺼낸 진석은 안에서 갈아입을 옷과 기름병, 투척용 단검, 약병들을 잔뜩 꺼냈다. 딱히 옷까지 갈아입을 필요까진 없을지도 모르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조심하고 싶었다. 게다가 아까 성문 경비병하곤 잠깐이나마 이야기도 나눴었으니, 같은 옷차림으로 돌아가면 방금 마차를 타고 나간 그 사람이라고 눈치챌수도 있으니까.

"저기, 뭐하는거에요?"

진석이 하는짓이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던져오는 엘리야. 진석은 배낭을 옆으로 치워두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상의를 훌떡 벗었다.

"말했잖아. 도시에 돌아가서 처리할 일이 있다고. 어디보자, 우선 도시에 불이라도 잔뜩 싸질러볼까?"

"엑?"

상대가 말하는 내용도 터무니없었지만 눈 앞에서 상의를 벗어제끼고 태연히 바지도 벗는 모습이... 어째 누, 눈을 뗄수가 없다! 매력 40에다 이성함락의 효과가 작용중인 진석의 알몸은 엘리야에겐 왠지 너무 매력적으로 보였던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입을 헤 벌리는 엘리야. 진석은 그녀의 시선을 깨닫곤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전까진 섹스도 했던 사이잖아. 뭘 새삼스레 그렇게 쳐다봐?"

"...!"

그러고보니 자신은 저 남자에게 몸을 내주었었다. 미약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곤 해도 스스로 천박하게 하체를 내밀었던데다가, 허리를 다리로 꽉 감은채 더 해줄걸 요구하기까지... 엘리야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어떻게 자신이 그런짓을 할 수 있었는지 꼭 귀신에라도 홀렸던것 같다. 마치 자신의 몸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 마음대로 행동했던것만 같다. 으아, 미약 그거 정말 무서운 물건이구나! 그 사이 옷을 갈아입은 진석은 남는 옷가지를 북북 찢어 복면으로 만들어 뒤집어 쓴 다음, 허리춤에 단검들을 찔러넣고 기름병과 약병들을 챙기며 채비를 마쳤다.

"가능한 빨리 다녀오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어차피 팔다리가 묶여 할 수 있는 일도 없거든요? 엘리야는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진석은 곧바로 마차의 문을 닫곤 어둠속으로 몸을 날리며 사라졌다. 마차안에 혼자 남겨진 엘리야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기대었다. 오늘은 정말 엘리야에겐 잊지못할 파란만장한 하루였다. 엘리야 자신은 기본적으로 조심성이 많고 겁도 많은 성격이다. 그래서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무섭고 두렵기도 했지만 왠지 한켠으론 두근대는게 기대되기도 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상황. 어쩌면 이게 우... 운명이라는 걸까?

가벼운 달리기로 방금 빠져나왔던 서문 근처로 되돌아간 진석. 어둠속에 몸을 숨긴채 잠시 경비병들을 지켜봤다. 숫자는 아까와 변함없는 다섯. 한 도시의 성문을 지키는 수비병이라기엔 극단적으로 적었다. 뭐 현재 대부분의 병력이 북문쪽에 소집되어 편성중일테니 그런거겠지만, 이제부터 도시를 뒤집어놓을 진석에겐 모든 병력이 한 곳에 집중된게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게다가 왕궁의 병사들은 제법 질 좋은 장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지금 눈 앞에 있는, 이들 일반 경비병들은 그렇지 못했다. 가슴팍만 겨우 가리는 경가죽갑옷과 낡아보이는 군화, 싸구려 단창 한자루가 그들이 지닌 장비의 전부였다.

'뭐 훈련도도 그닥 높지 않은것 같고, 죽일 필요가 있는것도 아니니 저 정도면 딱히 무기는 쓰지 않아도 되겠지.'

진석은 바닥에서 적당한 크기의 돌을 하나 집어든 다음 경비병들을 향해 당당히 나아갔다. 자기들끼리 시덥잖은 잡담을 하던 경비병들은 진석이 십여미터 전방까지 다가오고 나서야 겨우 그 존재를 알아챘다.

"어엇...? 뭐냐! 정지!"

"보, 복면? 멈춰라, 수상한 놈!"

단창을 꼬나쥐곤 진석을 향해 그것을 내밀어 보이는 경비병들. 진석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뭐 전에 빅 본이나 레드라인의 조직원 같은 깡패놈들 죽이는거야 어차피 범죄자들 상대니 별 거리낌이 없었는데... 막상 죄없는 병사들에게 힘 쓰려니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네. 다들 먹고 살자고 저러고 나와있는 걸텐데 좀 미안하구만. 쏘리쏘리.'

마음속으로 미리 사과한 진석은 손에 들고 있던 돌을 적당히 힘 조절을 해서 집어던졌다. 다섯명 중 맨 오른쪽에 있던 경비병의 복부에 빨려들듯 적중하는 돌맹이. 그는 크헉 고통스런 비명을 토하며 뒤로 발라당 나동그라졌다. 바닥에 드러누운채 쿨럭쿨럭 기침을 토하며 눈물 콧물 쏙 빼고 있는 꼴이, 금방 회복되진 못할 것 같았다.

"저... 저 자식이!"

"침착하고! 한꺼번에 찔러!"

젊은 경비병들이 당황하자, 아까 진석의 마차를 수색했던 고참병이 나머지 병사들을 지휘하며 그런 명령을 내렸다. 경비병들은 눈짓으로 서로 신호를 주고받더니 이내 동시에 창끝을 내밀며 진석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네 명이 전방에서 한꺼번에 몰아치는 모습은 나름대로 위협적이었다. 물론 평범한 사람 기준으로.

'어휴. 창 쥔 꼬라지 좀 봐라.'

41의 민첩을 지닌 진석에겐 병사들이 창진을 짜 달려드는 모습이 위협적이긴 커녕 한심해 보였다. 실전경험이 없는 병사들인지, 공격을 위해 창을 스트로크 하려는게 아니라 그냥 그대로 내민채 달려들고만 있었다. 저런 어설픈 공격에 맞는다면 너무 부끄러워 죽어서도 눈을 못 감을터. 진석은 속으로 한 숨을 쉬고 시클론을 걸며 그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헉?!"

"뭐얏!"

마치 순간이동하듯 창의 간격안으로 진석이 뛰어들자 기겁하는 병사들. 진석은 가벼운 잽으로 한 병사의 턱을 툭 때렸다. 어? 하더니 줄 끊어진 인형마냥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는 그 병사. 옆에 있던 다른 병사에게도 마찬가지로 턱에 가볍게 한 방. 두번째 병사도 첫번째 병사와 똑같은 모습으로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음~ 해부학 스킬의 크리티컬이 빛을 발하는구만. 이것도 어서 랭크 좀 올랐으면 좋겠는데. 아무나 붙잡고 배라도 째봐야하나?'

주먹을 잘만 쓴다면 턱도 엄연한 급소가 된다. 진석은 병사들의 턱을 쳐서 그들의 머릿속을 뒤흔들어 버린것이다. 고참병은 크게 당황했다. 그야 옆에서 보기엔 별 힘도 들어가지도 않은 장난같은 주먹에 두 명이나 쓰러져버렸으니까. 하지만 맞는 입장에선 충분히 정신을 잃을 정도의 치명타였다.

"이게 무슨...! 마법이냐앗?!"

자기가 이해 못하는거면 뭐 다 마법이냐? 기술이다! 진석은 고참병과 남은 병사에게도 다가가 마찬가지로 턱에 잽을 먹여주었다.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풀썩풀썩 자리에 쓰러지는 그들. 너무 싱거워서 뭐 싸운것같지도 않았다.

'야 이거 너무하는구만. 아무리 하급병이라지만 능력치가 뭐 그냥 동네 시민 수준인가보네.'

하긴 상급병이나 실력있는 병사들은 전부 소집됐을테니. 이런 떨거지 수준의 경비병들만 남아있던거겠지. 그렇게 짐작하는 진석. 허나 이건 진석이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사실 이들은 전부 예비병이었다. 정식으로 경비대에 소속된 병사가 아닌, 일반 시민이되 유사시를 대비해 명부에만 등록되어 있던 주민들. 그들이 급히 몇 소집되어 성문을 경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중 오직 고참병 한사람만이 젊은 시절 몇년간 병사로 근무하다 은퇴한 경험이 있을 뿐, 나머지는 정말로 평범한 주민들이었다. 그래서 전투능력이나 무장이 이렇게나 형편없었던 것이다. 계엄상황임에도 성문 밖으로 나가려는 수상한 인물인 진석을 그다지 꼼꼼히 검문하지 않고 쉽게 통과시켜준것도 이들이 직업 병사가 아닌 일반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석은 맨 처음 돌을 맞고 바닥에서 괴로워하던 병사에게 다가가 역시 잽 한 방으로 편안히 기절시켜줬다. 다른 경비병들은 한 대씩만 맞았는데 이 병사만 두 대나 때린터라 왠지 미안했다.

'뭐 살다보면 그런 날도 있는거지. 똥 밟았다고 생각하던가... 앗, 잠깐. 그럼 내가 똥?'

성문의 경비병들을 싱거울 정도로 손쉽게 제압한 진석. 품에서 기름병을 꺼내든채 근처에 있던 자그마한 목조 창고를 향해 화염화살을 시전했다. 퓨퓨퓩! 세 개의 화염화살들은 나무벽에 두 치 정도 박혀들어간채 지지직 검은 연기를 내며 타기 시작했다.

"아 불장난 하면 밤에 오줌싸는데. 아니지. 지금이 밤인데. 그럼 밤에 불장난을 하면 낮에 싸줘야하나?"

실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는 진석. 그러나 아무리 목조 건물이라고 해도 건물은 건물. 뭔 종잇장도 아니니 이정도 불씨론 생각만큼 불이 잘 붙진 않았다. 뭔가 불이 잘 붙을만한 발화제가 있어야 했다.

"옳지, 기름같은걸 끼얹나?"

진석은 활짝 웃으며 손에 든 기름병의 뚜껑을 열고 벽에 박힌 화염화살을 향해 내용물을 뿌렸다. 화아악! 기름이라는 최고의 연료와 만난 화염화살의 불길은 삽시간에 벽을 타고 크게 번져나갔다.

"오오 잘탄다. 내가 이렇게 지구 온난화에 일조하는구나! 흑흑, 내가 이렇게 흉악한 방화범이 되어버릴줄이야."

혼자 되도않는 농담을 지껄이며 도시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진석. 돌아다니면서 근처의 적당한 건물에 기름을 끼얹고 화염화살을 쏘길 반복했다. 시간도 늦은데다 계엄령 때문인지 거리엔 인적이 없던터라 달리 그를 방해하거나 거리낄 상대도 없었다. 게다가 야간의 도심에서 순찰을 돌 병력마저 전부 북문쪽으로 간 상황. 진석의 행동을 제지하거나 막을 이는 정말 아무도 없었던것이다.

"주민들에겐 미안하지만... 아 몰라. 어차피 난 세상을 조지려는 사교집단의 일원인걸. 생각하기를 그만두자."

하지만 기름병의 내용물은 그렇게 많지 않던터라 두 번쯤 반복하니 내용물이 금방 비어버렸다. 빈 기름병을 바닥에 내버린 진석은 서둘러 상점가쪽으로 발길을 돌려, 가장 가까운 잡화점 간판을 발견하곤 거기로 달려갔다. 하지만 잡화점의 문은 당연하게도 굳게 닫혀있었다.

"시간도 시간이니 가게고 뭐고 죄 문을 닫았구만... 에잇, 누구맘대로 닫으래? 안 열어? 손님은 왕이다!"

진석은 굳게 닫힌 잡화점의 문을 힘차게 뻐엉 걷어찼다. 콰작! 두꺼운 문짝이 그대로 두 토막이 나며 안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멋대로 가게안으로 들어가 큼직한 크기의 가방을 하나 챙기곤 그 안에 기름병 수십개를 싹 쓸어담았다.

"에잇. 주유소가 없으니 잡화점 따윌 습격 할 수 밖에 없잖아? 음음, 잡화점 습격 사건이라고 해두자."

가방안에 기름병을 잔뜩 챙긴 진석. 가방을 메고 가게에서 빠져나와 한참 상점가를 걸어다니며 건물들과 길가에 기름을 몇 병 어치고 잔뜩 뿌려댄 다음, 화염화살을 시전했다.

"음. 평소부터 이런거 한 번은 해보고 싶었어."

바닥에 늘어진 기름의 흔적위로 화염화살을 날림과 동시에 휙 돌아서며 상점가를 등지는 진석. 기름위로 날아간 화염화살은 길게 이어진 기름의 선을 따라 불타올라, 금세 사방의 건물들과 거리를 집어삼켰다. 마치 헐리우드 영화의 마지막 폭발신을 연상시키는 장면이었다.

"에이. 하지만 뭔가 뻥 터지는게 없어서 임팩트가 없네. 다들 이럴때를 대비해서 집에 폭발물 같은거 하나쯤 놓아두란 말이야."

진석은 수십채나 되는 건물과 상점에 방화를 저질러놓곤 되도 않는 소리나 지껄이고 있었다. 진석은 그대로 도시를 쭉 가로지르며 되는대로 여기저기에 불을 붙여댔다. 한참을 그러고 다니니 계엄이고 뭐고 여기저기서 주민들이 뛰쳐나오며 진석이 지나간 자리마다 어마어마한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석은 방화를 멈추지 않으며 그대로 직진해서, 어느새 도시의 동편끝인 부둣가에까지 다다랐다. 방화를 저지르며 도시를 서쪽에서 동쪽 끝까지 쭉 가로지른것이다. 물론 진석이 아무 이유없이 불을 지르고 다니는것은 아니었다. 제이스와 아르데나를 추적하려는 병력의 이목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공주가 납치된 급박한 상황이라지만 도시에서 대화재가 발생하고 있는데 전원이 태평하게 추적을 강행할리는 없을터. 당연히 진화를 위해 병사들을 동원할테고 그러면 추적이 늦춰지거나 최소한 추적에 동원되는 머릿수라도 줄일 수 있을거란 계산이었다.

"오. 선착장쪽까지 왔네. 음... 기왕 여기까지 온거 배도 좀 태워볼까?"

부두엔 세자리수에 달하는 크고 작은 배가 정박되어 있었다. 허나 지금 진석의 눈엔 그 수많은 배들이 그저 거대한 땔감으로 보일뿐. 부둣가엔 도심지완 달리 계엄령도 무시하고 돌아다니는 선원들이 몇 있었지만, 진석은 그들따윈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우선 제법 큰 배 중 한 척에 올라, 갑판에 기름을 뿌려대며 배와 배 사이를 뛰어넘고 빠르게 달렸다. 정박된 배중엔 이따금 선원이 타있던 배도 있었는데 알게 뭐냐 하며 발로 걷어차 쓰러트리거나 멱살을 쥐어 바닷속에 집어 던지면서 계속 달렸다. 그러길 한참. 한 서른척쯤 기름을 뿌려줬을까? 진석은 뒤로 돌아서며 배들을 향해 화염화살을 마구 쏴대고 허공에 외쳤다.

"배가 쓸데없이 많잖아! 이 몹쓸 배들이 다 불타 없어져야 일자리를 창출하지! 목재를 베는 나뭇꾼에게도 일감이 생길거고! 그걸 가공하는 제재소나, 조선소에서의 고용도 늘어날터!"

그럼 선주나 선원들은?

"글쎄? 나도 몰~라~! 으하하하!"

퍼펑, 화르르륵! 화염화살이 내리꽂힌 배들 사이로 어마어마한 불길이 치솟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배는 기름이 뿌려진터라 쉽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매섭게 솟구친 불길은 곧바로 돛에 옮겨붙었고, 타들어간 돛의 잔해는 불씨가 되어 옆의 다른배들로 날아가 미리 뿌려둔 기름을 발화시켜 불을 옮겨붙게 했다. 진석이 배와 배 사이를 뛰어다니며 여기저기 잔뜩 기름을 먹여놨으니 수십척의 배들은 그야말로 삽시간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기왕 미친짓을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아주 제대로 해보자고 작정한 것이다. 지금 필요한것은 혼란, 더 큰 혼란! 불타라 데오그라즈여! 진석은 또 다시 배와 배 사이를 뛰어넘으며 기름을 뿌려대고, 재차 화염화살을 쏘았다. 앗 하는 사이에 무려 백여척 가까운 배가 숯덩이가 되어 타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배에 남아있던 선원들이나 선착장 주변에서 돌아다니던 이들은 아주 난리가 났다. 엄청난 불길에 주변은 흡사 대낮처럼 환해졌다.

"그럼 슬슬 퇴장해볼까?"

이만큼 난리를 피운터라 아까 잡화점에서 훔친 기름병도 이제 고작 셋 남아있었다. 진석은 주택가를 향해 달리면서도 틈틈히 기름병 두 병 어치의 방화를 더 저지른 다음, 마지막 한 병을 남겨둔 채 연립주택 단지로 향했다.

"어디... 야식은 도마뱀 구이나 먹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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