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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55화 (55/155)

< --   - 4.   -- >         * 55화 *

한참 골목 사이를 지나다보니, 곧 눈에 익은 나무 그루터기가 눈에 들어왔다. 저번에 왔던 정보상 피터슨이 사는 2층짜리 연립주택의 앞이었다. 진석은 답답하던 복면을 벗곤 가방에 쑤셔넣었다.

"앗 젠장. 그러고보니 여긴 벽돌 건물이네. 이러면 직접 안에 들어가서 태우는 수 밖엔 없잖아?"

태연하게 중얼거리며 왼손엔 기름병, 오른손엔 허리춤에서 뽑아든 단검을 쥐는 진석. 이제 장난은 끝났다. 지금부턴 제대로 싸워야 할터. 빈 가방은 나무 그루터기 옆에 대충 던져두고 잔뜩 경계하며 연립주택의 입구를 열고 안으로 한 발짝 내딛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합!"

진석의 정수리를 향해 섬전같은 참격이 떨어져 내렸다. 누가 가한 공격인진 안봐도 뻔할터. 이전에 왔을때 입에 이쑤시개를 문채 벽에 기대있던 사내, 문지기가 날린 공격이었다. 어두운 복도에는 공격을 가해온 그의 두 눈빛만이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진석은 뒤로 백스텝하며 건물 밖으로 나가 공격을 피했지만 문지기도 진석을 따라 밖으로 뛰쳐나오며 다시 한 번 곡도를 휘둘러왔다.

"제법!"

이 연격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싸워온 깡패들이나, 아까 성문에서 상대했던 경비병과는 정말 수준이 다른 공격이었다. 힘차게 내리꽂는 참격에선 그야말로 몸을 두동강 낼것같은 힘과 속도가 느껴졌다. 하지만 바로 정면에서 과시하듯 똑바로 날아드는 공격, 피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진석은 재차 뒤로 껑충 피하며 문지기를 향해 손에 들고있던 단검을 날렸다.

"흥!"

문지기는 콧방귀를 뀌곤 내질렀던 참격을 되돌리며 곡도의 검신을 세워 단검을 가볍게 튕겨내었다. 여전히 이쑤시개를 물고 있는 그의 입가엔 그딴 잔재주론 날 어쩌지 못한다는 의미의 비웃음이 걸려있었다. 진석은 일부러 크읏 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들으라는 듯 크게 외쳤다.

"하나 더! 이것도 튕겨내봐라!"

"하."

문지기는 진석을 향해 그딴건 얼마든지 던져보라는듯한 여유만만한 웃음을 띄웠다. 진석은 잽싸게 반대쪽 손에 숨기고 있던 기름병을 그에게 던졌다. 문지기는 당연히 단검이 날아오는줄 알고 검날을 세워 그것을 막았는데, 아까처럼 챙 하며 칼날이 튕겨나가는게 아니라 뭐가 와작하고 깨지며 그것의 내용물이 자신의 몸에 끼얹어졌다.

"음? 아니 이건... 기름?!"

가득 찬 기름병이 검날에 부딪혀 깨지며, 그 안에 들어있던 기름이 문지기의 전신에 뿌려지고 말았다. 기름 특유의 강한 휘발성 향이 문지기의 코를 확 찔렀다. 단순한 속임수에 넘어갔다는것을 깨닫곤 식겁하는 문지기. 진석은 당황하는 문지기를 보고 키득거리며 손바닥 위에 세 개의 화염화살을 띄워올렸다.

"쯔쯔, 멍청하긴. 왜. 검실력엔 제법 자신이 있는 모양이지만 내가 너랑 정직하게 싸워줘야 할 의무라도 있냐? 그보다 이거 어때? 뜨끈할때 잡숴봐."

사색이 되어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로 흔들어대는 문지기. 하지만 진석은 씨익 사악하게 웃으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거 너무하는구만. 온 몸으로 따스한 이웃의 정을 느껴보라고. 옛다."

슈슈슛! 세 개의 화염화살이 순차적으로 발사되어 문지기를 노리고 날아갔다. 이래뵈도 문지기는 어지간한 기사도 가볍게 꺾을만한 뛰어난 검사. 평소같으면 이런 하급마법 쯤 곡도의 검날로 가볍게 베거나 튕겨내었을테지만 지금 곡도엔 기름이 잔뜩 묻어있다. 괜시리 막으려 들었다간 검날에 불이 옮겨붙을테고, 그랬다간 손잡이까지 흐른 기름을 따라 손을 타고 몸에도 불이 옮겨붙게 될 터. 이건 절대 못 막는다. 그저 피할 수 밖에 없었다.

"크으읏!"

서로의 거리가 가깝다보니 마법은 순식간에 날아들었다. 첫 발은 허리를 비틀면서 힘겹게 피했다. 두번째는 아슬아슬하게 상체를 숙이며 피했다. 하지만 무리한 회피동작에다 진석이 타이밍을 조절해가며 날린 세번째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화염화살이 문지기의 옆구리에 작렬하자, 그의 몸을 적신 기름을 타고 불길이 확 퍼져나갔다.

"으아아! 으아아아악!"

재빨리 곡도를 내던지고 몸에 붙은 불길을 끄려 바닥을 내뒹구는 문지기. 옷을 벗으려 발버둥쳤지만 옷 위에 걸친 낡은 가죽갑옷이 방해가 되어 쉽게 벗지도 못했다. 게다가 기름이 워낙 몸에 많이 묻어 잠깐 바닥을 뒹구는 정도로는 불길이 잡히지 않았다. 끄아아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하는 문지기. 진석은 고개를 저으며 재차 화염화살의 주문을 만들어냈다.

"최소한의 자비는 베풀어주마."

진석은 바닥을 뒹구는 문지기를 향해 주문을 쏘았다. 목표는 그의 머리. 첫번째 화염화살이 그의 이마 한복판에 날아가 꽂혔다. 주문이 직격하자 이마가 깨지며 피가 튀었다. 그리고 두번째, 세번째 화염화살도 첫번째 화염화살이 꽂힌 지점에 연이어 파고들었다. 단발로는 약한 화염화살이었지만 한 지점에 세발이나 연속으로 박아넣으니 치명타가 될만했다. 온몸에 불이 붙어 고통스러워 하던 문지기는 이마에 활활 타오르는 화염화살을 세대나 박은채로 겨우 움직임을 멈췄다. 무슨 괴물도 아니고 머리에 불타는 구멍이 뚫린채 살아있을 순 없을테니까. 진석은 잠시 서서 타오르는 그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 방법 은근히 편한데? 앞으론 기름병이나 잔뜩 사가지고 다닐까?"

"손속이 너무 잔혹하네요."

"?!"

갑자기 저쪽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진석이 그쪽으로 시선을 향하자 건물 안쪽의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는 노예 여성, 세이라의 모습이 보였다. 노출도가 높던 무희복을 입고 있던 이전과는 달리 오늘은 평범한 자주색의 마법사용 로브를 입고 있었다. 진석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실망인데. 오늘도 무희복을 기대했건만."

"기대를 실망시켜 미안하게 됐군요. 하지만 저도 제 '일'을 할때는 제대로 된 복장으로 하거든요."

"그보다 말 잘하네? 저번에 봤을때는 안에 들어오라는 처음의 인사 외엔 그다지 말이 없어서 피터슨이 일부러 제약이라도 걸어둔 줄 알았구만."

진석이 그렇게 말하자 세이라는 가볍게 미소지으며 진석을 향해 윙크를 해 보였다.

"외간 남자 앞에서 쓸데없는 말을 할 필요는 없지요. 평소의 이야기는 주인님하고만 해도 충분하니까요. 그보다... 하나만 질문해도 괜찮을까요?"

뜬금없는 세이라의 질문 요청. 진석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미인의 부탁은 거절하기 힘들지. 딱 하나만이라면 뭐든 대답해주겠어."

진석이 승낙하자 세이라는 마치 다른사람이 된 듯 얼굴에 띄우고 있던 웃음기를 슥 지우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냉랭한 어조로 물어왔다.

"왜 뜬금없이 주인님을 향해 칼날을 들이대는거죠? 현재 주인님과 당신 사이엔 뭔가 원한이 생길일은 없었을텐데요."

"...전 애인의 복수라고 해두지. 댁의 잘난 주인님이 팔아먹은 정보가 내 이전번 애인을 죽이는데 어느정도 기여를 했으니 말이야. 그걸 조금전에 막 알게됐거든."

복수는 이제와서 무슨 복수. 그렇게 치면 제이스부터 진즉 때려죽였겠지. 딱봐도 앞으로 데오그라즈엔 더 오기 글렀으니, 떠나는 김에 겸사겸사 도마뱀놈이 모아둔 재산을 빼앗아주려고 왔다, 왜! 물론 그런 속마음은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야 강도질 하러 왔다는 얘길 하면 폼이 안나잖아. 에잇, 복수다~ 하는쪽이 어째 당위성도 있어보이고. 진석은 허리춤에서 두 자루의 단검을 꺼내쥐었다. 가져온 단검은 총 네 자루로, 아까 하나는 문지기에게 미끼로 던졌었으니 손에 쥔 두 자루를 제외하면 이제 여유분은 하나 밖에 없었다. 이걸로 충분할까? 전투용 벨트를 차고 있었다면 여덟자루를 휴대할 수 있었을텐데. 어제 쇼핑에 끌려다닐때 어떻게든 짬을 내어 자신의 장비도 좀 사둘걸 하는 후회가 이제서야 몰려왔다. 하지만 세이라는 후우 한숨을 내쉬더니 진석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돌아가주실 순 없나요? 이래봐야 서로 얻는건 없는데. 문지기를 죽였으니 어느정도 분도 풀리지 않았나요?"

"대답은 하나만 해준다고 했어. 죽기 싫으면 거기서 비켜. 나도 미인을 베고 싶진 않으니까 말야."

"제가 전투노예라는건 알고 하는 말인가요? 주인님과 저는 일심이체. 주인님에게 해를 끼치려는 자 앞에서 물러날 순 없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4대 원소의 마법을 구사할 수 있어요. 그래도 꼭 싸우겠다면, 전심전력을 다해 상대해 드리지요."

4대 원소의 마법이라. 잘 알려진 불, 물, 흙, 대기의 네 가지 원소를 바탕으로 한 마법을 전부 구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거 어째 제 전투력은 얼마입니다~ 하고 뻐기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거 비전마법사인 제이스보다도 한 두 단계 강한 마법사일지도 모르겠는데? 실제로 제이스가 다루는 마법은 불에 관한것 하나 뿐이다. 하지만 이제와서 물러날 수도 없는법.

"그럼 이쪽도 전심전력을 다해주지. 시클론!"

파아앗. 눈 앞에 섬광이 퍼져나갔다. 마치 정지된 시간축에서 혼자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만큼 몸의 반응 속도가 향상된다! 라파가를 걸며 세이라를 향해 달려드는 진석! 하지만 세이라도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주문을 시전하고 완성시켰다.

"수류진벽. 토암장루. 합성 마법, 현무의 방벽!"

"뭣?!"

하, 합성 마법? 이딴건 처음 본다! 깜작 놀라는 진석. 예전 제이스가 마법은 워낙 기기묘묘한게 많아 자신도 모르는게 잔뜩이라는 말을 한적 있었는데 정말이었다. 세이라가 주문을 외며 짝 손뼉을 치자 그녀의 몸 주위로 거북이의 등껍질을 이어만든 것 같은 반투명한 방벽이 쭉 둘러쳐졌다. 진석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방벽에 진로가 가로막혀, 할 수 없이 그냥 방벽위에 수평베기를 때렸다. 채챙! 흡사 두꺼운 금속방패를 후려친 것 같은 단단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으윽! 뭔 쇳덩어리를 치는 것 같은게, 이 방어마법은 이딴 싸구려 단검이나 어중간한 공격으로 뚫을 수 있는게 아니다!'

게다가 공격을 가하고 멈칫한 사이 거북의 등껍질 같은 그 틈새에서 느닷없이 뱀 머리 같은것들이 쉭쉭 튀어나와 진석을 깨물려고 덤벼들었다! 공방 일체의 마법이란 말인가? 재빨리 몇 걸음 뒤로 물러난 진석은 혀를 차며 시클론을 풀고, 혹시나 해서 화염화살을 띄워 그녀에게 쏘아보았지만 역시 현무의 방벽에 막혀 허무히 스러지고 말았다. 마법이건 물리공격이건 그녀의 몸 주변을 빙 둘러싼 저 방벽은 흡사 철벽수준의 방어력을 제공하는 듯 했다.

'...아니 젠장. 그럼 어떻게 뚫어야 돼? 화염화살도 안되고, 근접공격도 무리면 할 수 있는건 단검 투척 정도인데... 그걸로 저 방벽을 뚫을 수 있을리가 없잖아! 게다가 근접하면 뱀 대가리 같은게 물려고 덤비고. 으 제길! 처음부터 저런 강력한 방어마법을 둘러칠 줄이야. 쓸데없이 이야기 하지 말고 도중에 기습이나 할걸!'

진석이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하자 세이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다 하셨습니까? 그럼 이번엔 제가 공격하지요. 춤춰라, 염렬편작."

다시 짝 하고 손벽을 치는 세이라. 그러자 이번엔 허공에서 주먹만한 불꽃의 새떼 수십마리가 나타나 진석을 향해 빠르게 쏟아져 날아왔다.

"또 뭐야 이건?!"

얼핏봐도 무려 사오십. 한 번에 겨우 세 발이 나가는 진석의 A랭크 화염화살 따윈 애들 장난같이 보일 지경이다. 진석은 허둥지둥 몸을 날려 피하려고 했지만... 저 마법탄엔 유도 기능이 있나보다! 불꽃의 새떼는 허공에서 선회하며 슈팅게임의 호밍탄처럼 진석을 따라붙었다!

'도망가는걸론 못 피한다 이거냐? 빌어먹을, 할 수 없지!'

진석은 자리에 멈춰서며 단검을 든 손아귀에 꾹 힘을 주었다. 불꽃의 새떼는 멈춰선 진석에게 한꺼번에 쇄도했다.

"토르멘타!"

퍼버버버벅! 단검을 쥔 진석의 양 손이 상식을 초월한 속도로 움직이며 몸에 닿으려는 불꽃의 새들을 후려쳐 격추시켰다. 흡사 진석의 손을 따라 허공에 불꽃의 장벽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매서운 열기로 손이 화끈화끈 불타는 것 같았다. 불덩이를 연속으로 베어낸 검날도 순식간에 과열되어 그 끝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수초간 이어진 난무는 근 오십에 달하는 불꽃 새떼의 돌격을 완벽히 막아냈다. 아니. 완벽히 막아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일검을 휘두른 순간, 작은 파편으로 갈라진 새의 몸체 중 한 조각이 품안으로 파고들어 진석의 옷에 닿았다. 치직하고 겉옷이 타고들더니 곧 화아악 하며 진석의 옷 안쪽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아, 아차!"

내의처럼 옷 안쪽에 입고 있던 붉은 메갈롯 거미 셔츠. 가볍고 튼튼한 방어구였지만 분명 불에 약하다는 특성이 있었다. 다른 옷이라면 불똥이 튀어 기껏 구멍이 난 정도로 끝났을테지만, 이 셔츠는 작은 불씨로도 무슨 기름을 먹인 천마냥 빠르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으그극!"

이러다간 되려 자신이 불태워 죽였던 그 문지기 꼴이 날터! 진석은 손에 든 단검을 내던지곤 뒤로 몸을 빼며 황급히 상의를 벗어 던졌다. 바닥에 던져진 상의는 금세 불덩이가 되어 활활 타올랐다. 세이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보통 옷은 아니었나보군요."

"몰라 젠장. 오밤중에 스트립쇼를 하게 만들다니."

방금 상의를 벗느라 단검을 급히 집어던졌으니, 이제 남은 무기라곤 허리뒤춤에 꽂아둔 한자루 뿐. 방어구도 불타버렸는데 상대는 공방일체의 강력한 마법으로 몸을 감춘 상황이다. 다시 한 번 방금의 공격 마법이라도 쓴다면... 막을 방법도 피할 방법도 없다. 게다가 지금 이 상황은 진석 자신이 욕심을 내느라 먼저 건 싸움 아닌가. 이제와서 물러선다는것도 한심했다. 거기다 세이라가 그만 싸우자고 한 제안도 거절하지 않았던가.

'아니 그보다 이 여자가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지, 망할.'

이게 비전마법인지 뭔진 모르겠다만 너무 세잖아? 다음번에 게임을 할땐 자신도 마법을 주력으로 써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진석이었다. 아무튼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는데 갑자기 스슥하고 세이라의 몸을 두르고 있던 방어 마법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진석의 눈매가 날카로워지자 세이라는 마치 들으라는 듯 진석에게 말했다.

"현무의 방벽은 뛰어나지만 마력을 너무 소모하는터라 역시 오래 유지하긴 힘들군요."

말투가 너무 여유롭고 담담하다. 뭐지? 유인하는건가? 아니 그럴 필요가 있나? 방금의 불꽃 새떼를 부르는 마법만 난사해도 자신은 위험한데? 아니면... 강력한 마법이니 뭔가 연달아 쓸 수 없는 제약이라도 있는건가? 혹시 뭐 쿨타임 그런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진석은 허리 뒤춤의 단검을 뽑아 세이라에게 잽싸게 던진다음 앞으로 몸을 날리며 방금 옷을 벗느라 집어던졌던 단검 두 자루를 주워들었다.

"불어라, 섬간진풍."

세이라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단검을 피하지도 않고 제자리에 서서 손뼉을 짝 쳤다. 그러자 허공에 사람의 키만한 진공의 파동이 너댓개 떠오르더니 진석을 향해 마구 발사되었다. 거대한 낫같은 형태의 공기 진공파! 기껏 세이라 근처까지 날아갔던 단검은 진공파의 기세에 밀려 산산히 박살나버렸다.

"크으읏!"

아직도 이런 강력한 마법이 튀어나오다니. 저 진공파에 스치기라도 했다간 팔다리쯤 그냥 떨어져 나가겠다. 진석은 허둥지둥 몸을 날리며 회피했다. 진석이 있던 자리로 진공파가 순차적으로 날아와 꽂히며 콰앙 쾅 하고 몇 번이나 연달아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흡사 그 하나하나가 수류탄이 터지는듯한 위력. 진공파가 일으킨 장렬한 흙먼지로 주변은 연막을 피워놓은것처럼 시계가 흐려졌다. 간신히 마법을 피해낸 진석은 그 흙먼지 속에서 몸을 일으키며 생각했다.

'이걸로 4대 원소의 마법을 일단 한 번씩은 다 쓴거 같은데? 분명 방어 마법을 쓸때 물과 흙의 두 가지. 공격으로는 불과 대기의 두 가지. 이걸로 합이 넷. 물론 이게 그녀가 가진 전부는 아니겠지만... 아까 추측한대로 쿨타임이나 뭐 그런게 있는듯 하니 위력이 큰 마법을 연달아 쓰지 못하는거겠지? 그리고 간격을 두고 어물대봤자 어차피 내가 불리하니 좋건 싫건 이쪽에서 먼저 덤벼들 수 밖에 없다!'

결정을 내린 진석은 몸을 낮추고 흙먼지 사이를 달려 세이라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자욱한 흙먼지 구름을 뚫고 나가는 순간, 진석의 눈에 들어온것은 이쪽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고 있는 세이라였다.

"제 비기로도 쓰러트리지 못한건 의외였지만, 공격을 하러 접근할건 예상했습니다. 화염화살."

아까같은 강한 마법이 아닌 화염화살을 쓰는걸 보니 쿨타임에 대한 추측은 맞는것 같았지만, 자신의 행동도 그녀에게 읽힌 모양이다! 세이라의 몸 주위에 화염화살 다섯발이 떠올라 진석을 향해 빠르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다섯발이라니, 그쪽은 S랭크인거냐!

"큿, 화염화살!"

이판사판, 세이라를 쓰러트리려면 여기서 물러설 순 없다. 지금이 기회다. 여유를 줬다간 언제 또 4대 원소의 마법이 날아들지 모른다. 다시 한 번 그 강력한 마법들을 써댄다면 진짜 위험하다. 진석도 달려나가는것을 멈추지 않으며 화염화살의 주문을 외쳤다. 허공에 세 발의 화염화살이 떠올라 정면으로 발사되었다. 그리고 퍼퍼펑! 양쪽의 화염화살 여섯발이 서로 부딪혀 허공에서 장렬한 불꽃을 퍼트리며 사라졌고, 이제 남은것은 세이라쪽의 두 발 뿐이었다. 바로 진석의 지척까지 날아온 불화살들! 진석은 양손에 든 단검 두자루를 화염화살들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시클론! 라파가!"

그리고 시클론을 걸며 라파가로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순간적인 가속으로 진석은 자신이 던진 단검보다도 빠르게 정면으로 쏘아져 나갔다. 등 뒤에서 퍼펑하고 단검과 화염화살이 부딪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이라는 화염화살에 맞을듯 하던 진석이 눈앞에서 사라지며 순간이동하듯 거리를 좁혀오자 경악했다.

"아닛?! 화, 화염화..."

재차 주문을 쓰려드는 세이라. 하지만 진석은 디딤발에 힘을 밀어 넣으며 주먹을 꾸욱 강하게 모아쥐었다.

"잡았다!"

퍼어억, 우드드득! 시클론과 라파가의 가속을 받은 혼신의 강타. 세이라의 상반신을 때린 일격은 갈비뼈를 함몰시키며 몸 속으로 깊숙히 파고 들어갔다. 주먹으로 때린게 아니라 흡사 거대한 망치로 후려친것 같았다. 뼈가 부숴지고 내부가 파열되는 끔찍한 감촉이 주먹 너머로 똑똑히 느껴졌다. 단 일격에 무력화. 아니, 이것은 죽음에 이를만한 치명타가 확실했다. 산산히 부러진 갈비뼈가 폐부와 내장을 망가트렸다. 뒤로 붕 떠오른 세이라는 가녀린 입술 사이로 푸학 피를 토하며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그녀의 몸은 내던져진 장난감처럼 바닥위를 한참이나 구르고나서야 멈춰섰다.

"큭, 쿨럭! 흐윽..."

세이라는 바닥에 쓰러진채 팔다리를 부들부들 경련하며 진정되지 않는 호흡을 힘겹게 토해내고 있었다. 가슴이 불규칙하게 맥동하는게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진석은 터벅터벅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컥. 이제... 쿨럭! 추, 충분. 제발 도... 돌아가 주..."

두 눈에서 생명의 빛이 빠르게 꺼져가고 있었다. 입에서 피를 울컥거리면서도 진석을 향해 주인에게 해를 끼치지 말것을 부탁하는 세이라. 마지막까지 헌신을 다하려는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분명 자신이 쓰러트린 상대이건만 왠지 연민이 차올랐다.

"......"

목이라도 꺾어 쓸데없는 고통이나마 덜어줄까 했지만, 애처로운 모습에 그런 마음도 쏙 들어가버렸다. 진석은 그녀를 그대로 남겨두곤 맨 처음 문지기에게 던졌다 튕겨졌던 단검을 주워들었다. 화염화살에 던졌던 두 단검도 충격으로 칼날이 깨져 온건한 무기라곤 이제 이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애원을 무시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진석의 뒷모습을 세이라의 두 눈동자가 원망스럽게 쫓았지만, 무력화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죽음을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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