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4. -- > * 56화 *
문은 이미 열려있었다. 진석은 거리낌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이전에 왔을때보다 향 냄새가 한층 진하게 났다. 집 안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서니 저번과 마찬가지로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아있는 라케르투스 족 늙은이, 피터슨의 모습이 있었다. 쓸데없이 멋을 부린듯한 모노클과 스리피스 정장도 변함없었다. 책상위의 황동 향로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게 한참 전부터 향을 태우고 있는것 같았다. 피터슨은 제자리에서 꼼짝않고 향로만을 빤히 들여다 보며 말했다.
"싯... 세이라가 진건가. 의외인걸."
"그래."
"내 욕심이 과했던 모양이군. 은퇴 직전의 마지막 큰 돈벌이를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거늘. 시시..."
그리고 잠깐의 침묵. 진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날 미행시키고 뒷조사를 해서 그 정보를 누구에게 팔 생각이었지?"
"그야 당연히 그 정보를 원하는 손님 아니겠는가. 아마도 그란델 왕실이나 귀족연맹쪽이 되었을테지. 왕실 측에선 폭풍의 지팡이를 되찾으려 할테고, 귀족연맹 쪽에선 암살자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곧 어느쪽인가는 접촉해 올거라 생각하고 있었네. 싯. 가능한 자네를 비싸게 팔아넘기곤 슬슬 은퇴하려 했건만, 오늘밤 레오노르 공주가 납치된건 의외였어. 이건 명확하지 않은 정보로 추리한 내 개인적인 생각이네만... 공주의 납치는 자네 일행인 두 여자의 소행이 맞겠지? 시시. 흥미로워. 혹시 자네가 지시한건가?"
"아니."
"그런가.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어쨌거나 이제 자네의 목은 수천닢의 금화만큼 값진 상품이 되었으니 말이야. 내가 이 정보를 누군가에게 팔아넘기기만 하면 될 터. 싯시."
"안됐지만 상품은 매진이다 영감. 댁은 이제 폐업이야. 영원히."
또 다시 잠깐의 침묵. 이번엔 피터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시시거리던 방금과는 달리 조금 무거운 어조였다.
"이보게. 그런데 세이라는... 고통스럽게 죽었나."
피터슨의 질문에 진석의 머리속에 가슴이 함몰된채 피를 토하던 세이라의 모습이 떠올랐다. 진석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피터슨은 아무 대답도 않는 진석의 모습을 보고도 다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크... 미안하구나 세이라. 내가 너를..."
모노클을 벗어 던지더니 책상위로 큼직한 두 손을 올려놓고 주먹을 쥔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는 피터슨. 진석은 피터슨에게서 무거운 살기가 발산되기 시작한다는걸 깨닫고 앞으로 단검을 내밀며 싸울 태세를 취했다. 제자리에 앉아 부들거리는 피터슨에게서 찌직 찌지직 하고 뭔가 찢어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저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잠시 지켜보고 있자니, 피터슨의 거체가 서서히 부풀며 몸에 걸친 스리피스 정장의 솔기가 투둑 터져나가고 있었다. 그저 뚱뚱한 라케르투스 족 늙은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몸이 벌크업을 하는 보디빌더처럼 삽시간에 근육덩이의 거체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네 이노오오옴-!!!"
쿠앙! 피터슨은 벽력같은 고성을 내지르며 진석을 향해 책상을 걷어찼다. 엄청나게 무거운 원목 책상이 무슨 축구공마냥 빠르게 날아들었다. 질겁하며 옆으로 피하는 진석. 쿠구웅! 책상은 한쪽에 날아가 얇은 석벽을 일부 무너트리며 박혔다. 책상을 걷어차고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난 피터슨. 압력을 견기지 못한 정장이 엉망으로 찢겨져나가며 터질것 같은 근육으로 부푼 피터슨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네가 무슨 헐크냐?'
다 찢어진 옷을 걸친 녹색 피부의 도마뱀 인간. 정말로 헐크를 연상시키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자기 입으로 늙은이라며? 세상 천지 어느 노인네 근육이 이렇게 정정하다 못해 옷이 다 터져나가는 정도냐? 진석이 당황하고 있자 피터슨은 스으읍 하고 깊게 숨을 틀이쉬더니 발을 쾅 구르며 다시 한 번 고함을 쳤다. 그것은 마치 자신 안에 내재된 야성을 강제로 끌어내려는 행동 같았다.
"가아아아아-!!!"
"시끄러! 화염화살!"
변온동물인 라케르투스 족이 유달리 불이나 얼음에 대한 공격에 약하다는것 쯤은 진석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화염화살이라면 어느정도 효과가 있을터! 허공에서 궤적을 남기며 빠르게 날아가는 세 발의 불꽃! 하지만 피터슨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화염화살을 향해 그 두꺼운 팔을 한 번 붕 휘둘렀다. 퍼퍼퍽. 굉장히 허무한 소리를 내며 촛불처럼 스러져 버리는 화염화살들. 진석은 벙쪘다.
"...어?"
"죽어라아아!"
화염화살을 가볍게 막아낸 피터슨은 쿵쿵거리며 진석에게 달려들었다. 매서운 손톱이 돋아난 팔을 묵직하게 휘둘러오는데, 도저히 막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넓지 않은 방안에선 피할곳도 그리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이거 한 번 피한다고 공격이 끝나는것도 아니고 어차피 상대와는 사생결단을 내야한다. 진석은 시클론을 걸고 그의 간격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노옴!"
"이놈 저놈 하지마! 내가 니 자식이라도 되냐? 짜증난다!"
그리고 서로 손이 닿는 거리에서 벌어지는 맹렬한 근접공방. 연신 양 팔을 휘두르는 피터슨의 공격은 넓은 범위의 공간을 사정없이 찢어발겼지만, 진석은 아슬아슬하게 종이 한 장 차이로 그것을 전부 피해내며 단검으로 피터슨의 몸통 이곳저곳을 찌르고 베었다. 하지만 무슨놈의 근육이 이렇게 질기고 단단한지 단검은 도통 반 치 이상을 파고들지 못했다. 치명상은 커녕 성질만 돋구는듯한 얄팍한 공격이었다. 헌데 라케르투스 족의 전투력이 이정도였던가? 아니다. 피터슨은 분명 뭔가로 자신의 신체능력을 비정상적으로 강화한 것 같았다.
'설마 아까 그 향이 뭔가...?'
하지만 지금 중요한건 그게 아니었다. 바로 코 앞에서 자신의 모든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는 진석의 모습에 분노로 이성을 잃은건지, 피터슨이 양팔을 활짝 벌린채 우와악 하며 덮치듯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그 거구로 도망갈 방향을 차단한채 몸으로 밀어붙이니 순간 난감해졌다.
"나는 내가 덮치는걸 좋아하지 덮침을 당하고 싶진 않다고!"
진석도 지지않았다. 서로 마주닿을것 같은 가까운 거리임에도 라파가의 숏대쉬를 걸며 피터슨의 명치께를 향해 단검을 찔러갔다. 그 짧은 거리에서 전력을 다해 서로에게 달려드는 인간과 수인. 둘의 몸체가 가운데 지점에서 힘차게 충돌했다.
"크윽!"
"커헉!"
쿠웅! 그야말로 순수한 힘과 힘의 충돌. 하지만 무게에서 밀린 진석은 벽으로 날아가 등을 강하게 부딪히며 바닥에 쓰러졌고, 피터슨은 명치에 단검이 반 뼘 넘게 박히고 말았다. 가슴을 파고드는 고통에 크윽 하며 무릎을 꺾는 피터슨. 하지만 아직 눈빛은 아직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먼저 일어난것도 피터슨 쪽이었다.
"크으... 네 놈...!"
피터슨은 저벅 저벅 무거운 걸음을 옮기더니 으으 투레질을 하며 막 정신을 차리고 있는 진석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창가쪽으로 끌고갔다.
"큭... 무슨!"
"꺼져라!"
콰장창! 미처 수습할 틈도 주지 않고 창문 밖으로 바로 진석을 집어던지는 피터슨. 진석은 산산히 부서진 유리파편과 함께 건물 밖으로 내던져지고 말았다. 그것도 등쪽부터 바닥을 향하며 던져졌기에 충돌에 어떻게 대처할수도 없는 자세.
'이런 씨... 그나마 2층이라서 다행이다. 더 높았다면 이걸로 죽었을터.'
아주 짧은 부유감. 그리고 다음 순간 등을 통해 느껴지는 장렬한 충격. 쿠당탕! 낙하의 데미지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물론 2층에서 던져진거니 높이는 높지 않았지만, 떨어지는 자세가 안 좋아 낙하의 충격에 대비 못한탓인지 체력치가 꽤나 심각한 수준까지 떨어졌다. 아직 시클론이 발동중이라 방어력이 떨어져 있던 탓도 컸다. 시클론을 발동중일땐 공격력과 속도가 올라갔지만 반대로 방어력은 어느정도 낮아졌으니까.
"으그그극... 이 망할 도마뱀이, 으어억?!"
고통에 신음하며 몸을 일으키는데, 눈 앞에 피터슨의 거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2층에서부터 자신을 짓밟으러 뛰어내린것이다!
"죽어라!"
"으아아아!"
위험! 체면이고 뭐고 없다. 진석은 바로 옆으로 데구르르 굴렀다. 쿠우웅! 정말 간발의 차. 영점 몇초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피터슨의 착지 지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순순히 쥐포가 되줄성 싶냐!"
핸드스프링으로 바닥을 박차고 일어나며 곧바로 앞구르기를 해 피터슨과의 간격을 벌렸다. 마침 눈앞에 새까맣게 탄 문지기의 시체와 그가 쓰던 곡도가 굴러다니는것이 보였다. 낼름 곡도를 집어들며 피터슨쪽을 경계하는 진석. 곧바로 덤벼들어오지 않을까 했지만, 의외로 피터슨은 옆에 쓰러져 있던 세이라의 시체에 한 눈을 팔고 있었다.
"세, 세이라..."
그 커다란 덩치를 부들부들 떨며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세이라의 이름을 읇조리는 피터슨. 그때였다.
"...으..."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세이라의 손가락 끝이 움찔하며 그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피터슨은 대번에 놀라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손을 마주잡았다.
"세이라!"
"......"
세이라가 죽기 직전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저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우연찮게 마지막 숨을 토하고 있는것일 뿐. 하지만 피터슨은 송장이나 다름없는 그녀에게 온 정신을 팔고 있었다. 비겁하지만... 지금은 기회였다. 아까 동정심 때문에 세이라의 목숨을 끊지 않고 그냥 들어갔던게 이런 천금같은 찬스를 만들어 줄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진석은 라파가를 써서 피터슨을 향해 달려들며 크게 점프했다.
"타아아아앗!"
양 손으로 강하게 움켜쥔 곡도를 피터슨의 머리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그야말로 온몸의 체중을 담은 일격. 순간 피터슨이 진석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콰작! 곡도는 피터슨의 두개골을 깨트리는 필살의 참격을 적중시켰다.
"아... 으? 하... 세, 세이... 라, 하으."
진석의 기습으로 머리의 절반이 박살난 피터슨. 눈을 크게 뜬채 세이라의 이름을 부르다 혀를 빼물곤 서서히 옆으로 기울며 쓰러졌다. 허억 허억 거친숨을 내쉬던 진석은 시클론을 풀고 피와 뇌수범벅이 된 곡도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후우..."
이겼다. 이번에도 자신이 이겼다. 차례로 강한 적을 쓰러트리고 승리한것이다. 하지만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찝찝했다. 군주의 입장으로 뒤에서 전쟁을 관망할때나, 장수 된 신분으로 전선에서 적병을 쓰러트릴땐 이렇지 않았었는데. 내편 네편 갈라 피아를 확실히 한 채 싸우는 전쟁이 훨씬 단순하고 속도 편했었다. 지금의 이 상황은 분명 자신의 의지로 벌인 싸움이고 이미 결착까지 내버렸건만... 어째 뒷맛이 썼다. 제이스와 아르데나를 추적하려는 병력들의 시선을 돌린답시고 온 도시에 방화를 저지르고, 피터슨에겐 에나의 복수와 모아둔 돈을 빼앗는다는 명분으로 룰루랄라 하며 왔는데 이건 어딘가 시원스럽지 못한 결말이었다. 이런걸 기대하던건 아니었는데.
"대체 왜 수인종이... 인간노예에게 그렇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줘선... 쳇."
이래서야 내가 빼도박도 못할 악당같잖냐. 아니 분명 악당이 맞긴 맞다. 게임을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스레 범죄를 저질렀고, 어느샌가 세상을 말아먹겠다는 교단에 소속된것까지 포함해서 전부. 게다가 비겁하게도 한 눈을 판 상대를 등 뒤에서 기습하여 죽이기까지 했으니 이게 훌륭한 악당이 아니고 뭔가. 목숨을 건 싸움에서 비겁을 찾는건 우스운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이게 정당한 승리였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끄응."
정말 이게 그냥 게임이라서 다행이다. 복잡하게 생각하는건 그만두자. 이런식으로 따지면 한도 끝도 없을거다. 진석은 푸욱 한숨을 내쉬고, 아직까지 나무 그루터기에 방치되어있던 빈 가방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체력과 SP회복을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이런. 주머니가 축축한데다가 집히는건 병의 파편뿐이었다. 마차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주머니에 체력회복제와 SP회복제를 하나씩 넣어왔었는데 아까 추락할때 깨진모양이었다. 싸움에 몰두해 이게 깨지는줄도 모르고 있었다니. 그냥 이대로 진행해야지 뭐. 없는건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챙길것도 챙겨가야지."
위에 고스란히 남아있을 피터슨의 재산. 이제 주인 잃은 돈이니 자신이 접수해야 했다. 애당초 그러려고 이 짓거릴 벌인게 아니었던가? 하지만 기껏 이 난리를 피워놓곤 무슨 속물마냥 돈이나 챙겨야 한다니... 어째 스스로가 한심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원래 이런 장면에선 등을 돌리며 쿨하게 퇴장해줘야 하는데.
'...에라이 쿨은 얼어죽을. 언제부터 그런거랑 친하게 지냈다고 이제와서 무슨.'
그러니 아득바득 다 긁어갈테다! 동전 한 닢 안남기고 다 내꺼다! 게다가 이 도마뱀 새끼는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원하는 손님만 왔다면 진석 자신에 대한 정보도 팔았을거라고. 돈 욕심에 죽이러 온거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피터슨을 제거하지 않았다면 자칫 두고두고 그란델 왕국의 공적이 될뻔했다. 그리고 피터슨은 정보를 팔아먹은 돈으로 은퇴해서 룰루랄라 호의호식 했겠지. 진석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한 번 계단을 올라 피터슨의 거처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정도 난리를 쳤으면 다른 집의 주민도 나와볼법 한데... 아니, 아마도 나머지는 빈집이겠지. 생각해보니 이런곳에 세를 얻고 살 평범한 사람이 달리 어디있을까. 진석은 엉망진창이 된 피터슨의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진짜 다 박살났군."
싸울땐 정신이 팔려 몰랐는데 이제와서 살펴보자니 방안에 성한게 없다. 책상은 벽을 반쯤 뚫고 나간채였고 장식장 같은건 죄다 반파, 벽을 장식하던 벨벳천도 너덜너덜 걸레짝이 되어있었다. 온전한건 방 구석에 놓여있던 철제 금고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열쇠가... 어, 그냥 열리네."
혹시나 해서 한 번 당겨봤더니 순순히 열렸다. 애당초 잠궈두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금고 안엔 기대하던대로 엄청난 양의 수표와 금괴, 돈주머니가 가득 들어차있었다. 토지나 건물의 권리서 같은 뭔가의 서류들도 있었다.
"하... 모아놓긴 진짜 많이 모아놨군. 이 골방에 앉아서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들였단 말이지? 도마뱀 주제에 난 놈은 난 놈이었군."
액수별로 분류해놓은 수표만 해도 하나로 합쳐보니 그 두께가 거의 반 뼘이다. 소액권도 많이 있다지만 이만하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대충 몇 만 골드는 될법하다. 개당 천골드짜리의 금괴도 마흔개 가까이 쌓여있었다. 백골드씩 나눠 담아둔 돈자루도 차곡차곡 쌓인것이 십여개. 거기에 토지나 건물의 권리서 같은것까지 합치면... 진짜로 십만골드 가까운 돈이 될 것 같았다. 엘리야의 정보는 정확했다.
"이런게 잭팟이라는 건가."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보니 꿀꿀하던 기분은 삽시간에 다 날아가버렸다. 물론 데오그라즈의 수표와 여러가지 권리서 따윈 어차피 이곳을 떠날테니 자신에겐 쓸모가 없다고 해도, 교단에 가져가서 미리안에게 주면 그만이다. 그녀라면 분명 알아서 유용하게 쓰겠지. 틀림없이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자신이 가질 수 있는건 금괴와 돈자루. 이것만 해도 4만 골드 가량이다. 이거라면 좋은 저택을 사고 귀여운 노예들을 들여 펑펑 놀고 먹어도 된다. 더 큰 돈을 벌어줄 사업체나 자산도 얼마든 구입 할 수 있을거다. 아니, 아예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는것도 가능할터. 공백지에 터를 닦고 동료나 주민을 끌어모아 마을을 건설할수도 있었고 빅 본이나 헤세스모데우스 교단처럼 세간에 스며들어있는 특정한 조직을 만들수도 있었다. 너무 큰 돈이 굴러들어오니 막상 어디에 써야할지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졌다.
"후... 뭐 사용처는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챙기자."
금고안에 가득차 있는 재물들을 가방에 옮겨담는 진석. 하지만 금고안에 든 내용물이 너무 많아 가방의 공간이 모자랐다. 집안을 뒤져 적당한 가죽 가방을 하나 더 찾아내어 거기에도 돈과 금괴를 나눠 담았다. 그리고 지금 상의를 입지 않은 상태였으니 기왕 집안을 뒤진김에 적당한 셔츠도 하나 찾아입었다. 근데 사이즈가 커서 꽤 헐렁거리는게, 아마도 피터슨이 입던 옷인듯 했다. 묵직한 돈가방 두 개를 챙겨 나갈까 하는데 어째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집어 던져졌던 깨진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진석. 도시 동쪽과 남쪽 방면은 온통 붉게 타오르고 있었고 북문 방향에선 수많은 병사들이 내려와 각기 양 방면으로 이동하는듯 했다.
"열심히 불을 싸지른게 효과가 있긴 있었군."
이런 대규모 화재라면 확실히 왕족의 구출이 급한 상황이라도 화재 진압을 위해 추적에 온건히 집중하지 못할거라는 계산이 맞은 모양이다. 서문으로 빠져나갈때 행여라도 저 병력과 마주치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막 방에서 빠져나가려는데 우연히 벽에 처박힌 마호가니 책상에 눈길이 갔다. 반쯤 튀어나온 서랍의 끄트머리에 뭔가 걸려있었다.
"...어?"
손바닥만한 크기의 수첩. 분명 이전에 본 기억이 있었다. 일전 이곳에 왕궁에 침투할 정보를 사러왔을때, 피터슨이 저기에 적힌 내용을 찢어 자신에게 줬었다. 그렇다는건 혹시...
"저거... 피터슨놈이 저 안에 온갖 중요한 정보를 잔뜩 담아놨다는건가?"
겉보기엔 평범하지만 한 왕실의 탈출통로 정보가 적혀있던 수첩이다. 어쩌면 저 안에 더 많은 비밀이나 중요한 정보가 담겨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저것 역시 이 재물들만큼이나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인건 틀림없다. 챙겨두자! 진석은 서랍에 끼어있던 수첩을 잡아 끄집어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수첩의 틈새로 왠 접힌 종이조각이 하나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오래되었는지 색이 누렇게 바랜데다 모퉁이가 너덜너덜하게 닳아있는 종이였다.
"뭐야 이건? 보물지도라도 되나?"
무심코 그 낡은 종이를 집어들어 펴보는 진석. 하지만 내용을 보곤 잠시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
종이안엔 목탄으로 그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글자가 반쯤 지워져 알아볼순 없었지만 무슨 무슨 곡예단이라고 쓰여있는 천막을 배경으로 두 명의 인물이 나란히 서있는 그림이었다. 좌측엔 어린 라케르투스 소년이 뻣뻣한 자세로 서 있고, 우측엔 무희복 차림의 성인 여성이 라케르투스 소년의 어깨를 감싸안은채 웃고 있는 그림이었다. 워낙 오래되어 흐려질대로 흐려져 있었지만 무희 여성의 생김새가 어째... 세이라를 닮은 것 같았다.
"...쳇."
어쩐지 못볼 것을 본, 아니. 봐선 안될걸 본듯한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에 어렴풋히 피터슨의 생애가 그려지려 했다. 하지만 진석은 고개를 저어 그 상념을 머릿속에서 쫓아내고, 그림을 화염화살로 태워없애며 수첩과 가방들을 챙겨 연립주택을 빠져나왔다. 건물의 앞엔 여전히 시체 세구가 나뒹굴고 있었다. 복잡미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진석은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시체를 뒤로한채 서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화재가 발생한 도시의 저 멀리에선 연신 누군가의 비명과 요란한 소음들이 메아리치듯 들려오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가벼운 생각으로 쓰기 시작한 글인데 갑자기 이만한 관심을 받아도 되는건가 싶습니다. 보는 눈이 많아지니 기대에 부응해야겠다는 생각에 뒷내용을 두드리다가도.. 내가 지금 쓰는게 제대로 된 건 맞나, 과연 이런 내용과 전개가 재미는 있는건가 싶어 자꾸 손이 멈춥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가슴이 울렁거리고 리플 볼땐 무슨 성적표 확인하는것 마냥 긴장되는게.. 덕분에 새삼 본인이 심각한 새가슴이라는걸 깨달았습니다. 으이구 한심. OTL
맞춤법이나 오타등의 지적은 확인하는대로 수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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