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5. -- > * 57화 *
단 이틀. 그 사이 그란델 왕국의 수도 데오그라즈는 역사상 유래없는 수난을 겪었다. 가네딘 후작이 왕궁에서 암살되고, 다음날엔 해밀턴 공작의 장녀가 도시 한복판에서 정체 모를 괴물에게 납치된 것이다. 게다가 추적대의 편성을 위해 계엄령을 선포, 병사들을 북문 밖에 소집하자 마치 치안의 공백을 기다렸다는듯 벌어진 대화재. 도시를 서에서 동으로 가로지르며 벌어진 화재로 도심내의 건물 이백여채 이상이 크고 작은 화재 피해를 입었으며, 동쪽의 부두에 정박되어 있던 선박들 역시 백여척 가까이 불타 가라앉았다. 거리에 사람과 병사들이 없는때를 노려 저질러진 일이라, 화재를 초기에 진압하지 못해 불길이 번져나가는걸 제때 막지못한탓이 컸다. 온갖 인적 물적 손실이 어마어마하게 심각했다. 엉망진창이 된 도시엔 가게와 배가 불타버려 파산 위기에 처한 사업자가 속출했다. 이 모든 피해를 금전으로 환산하면 아마도 수십만 골드는 가볍게 넘을터. 그리고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은 현재 한가롭게 하품을 하며 마차를 몰고 있었다.
"으하암. 으으."
쩌억 입이 찢어질듯한 하품을 하곤 눈을 부비며 마차를 모는 진석. 게임 속 가상현실임에도 낮의 햇살은 따스했다. 어째 잠이 솔솔 올 정도로. 정말 다 때려치고 낮잠이나 자면 딱 좋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아니, 잠이나 잘때가 아니지.'
게임속에서 잠을 자는건 의외로 현실과 다를게 없었다. 한 2, 3세대까지의 엔진에선 게임속에서 잠을 자면 현실의 플레이어도 잠들어 게임이 꺼지거나 튕겨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게임속에서 잠을 자고 눈을 떴더니 아니 이게 뭐야, 학교 갈시간이다! 혹은, 벌써 출근 시간이잖아! 이런 불상사가 잦았던것이다. 하지만 4세대의 엔진 설계 부턴 근본적이고도 대대적인 수정을 거쳤기에 5세대인 지금에 이르러선 별 문제가 없었다. 가상세계의 좀 더 완전한 구현을 위해 셀 수 없이 갈려나갔을 개발인력들을 위하여 잠시 묵념. 물론 게임속의 플레이어는 수면을 취할 필요도 없었고 수면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스킵이 가능했지만, 진석은 나름대로 몰입감을 높이며 즐기기 위해 별 일이 없다면 수면을 취했고 가능한 스킵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게임을 진행하면서 제이스랑 같이 많이 잤는데... 방금 잠든 상대 옆에 누워 몇 초 만에 수면시간을 스킵시키고, 순식간에 해가 떠오르는거 보면서 다시 아침인사를 하는건 뭔가 되게 어색하단 말이지. 뭐랄까, 하루의 낮밤중에서 밤이 없어지고 오직 낮만 남는것 같아 어째 시간 개념도 이상해지고.'
물론 그런거 신경쓰지 않고 수면을 아예 취하지 않거나, 수면을 취하되 무조건 스킵시키며 진행하는 플레이어도 많았다. 이것도 그냥 일종의 취향 차이였다. 게임 진행에 있어 하등 상관없는 부분은 생략하는 타입과, 진석처럼 재미를 위해 즐길 수 있는건 다 즐기는 타입. 물론 어느 쪽으로 즐겨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때 마부석과 마차 안쪽을 연결하는 작은 미닫이 창이 드르륵 열렸다.
"러셀씨? 얼마나 더 가야돼요?"
톤이 높고 새된게 어쩐지 기가 약할것 같은 목소리. 창 안쪽에는 안경을 쓰고 주근깨가 돋은 젊은 여성의 얼굴이 보이고 있었다. 엘리야 딘킨스. 원래 평범한 빵집 주인이었으나 오빠의 뒤를 이어 부업삼아 탐정의 일을 하던 아가씨. 그녀는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러프야드까지 거의 다 왔어. 저 앞에 보이는걸 보니 한 30분쯤 더 가면 될까?"
어제 저녁. 정보상 피터슨의 집에 찾아간 진석은 문지기와 전투노예 세이라, 그리고 피터슨 본인까지 싸그리 살해했다. 그리고 그의 재산을 몽땅 챙겨 무사히 데오그라즈 서문 밖에 숨겨둔 마차로 돌아왔다. 엘리야는 근 한시간만에 돌아와 자신의 포박을 풀어주는 진석에게 도시에 들어가 뭘 하고 온거냐고 물었고, 진석은 태연히 피터슨을 제거하고 왔다고 대답했다. 터무니 없는 대답에 경악한 엘리야. 물론 그가 혼자 도마뱀 새끼를 죽이네 어쩌네 혼잣말을 하긴 했었지만 그냥 화가나서 하는 욕설정도로 생각했다. 자신을 남겨두고 도시에 돌아가서 처리할 일이 있다고 할땐 챙겨오지 못한 물건이라도 가져오려나 했는데 진짜로 그 무시무시한 피터슨을... 없애버렸다고? 엘리야는 문지기의 강력함이나 세이라가 지닌 마법의 힘을 눈치로 어느정도 가늠하고 있었다. 그 둘 만으로도 어지간한 호위병 수십명의 가치를 할거라 생각했는데, 혼자서 잠깐 사이에 그들을 쓰러트리고 왔다니? 처음엔 믿을수가 없어 거짓말을 하는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내 진석이 보여준 두 가방의 내용물을 보곤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가방안엔 돈과 금괴, 수표뭉치가 꽉꽉 들어차 있었다. 도저히 얼마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어마어마한 재화. 이거면 엄청난 대저택, 아니 성도 살 수 있지 않을까? 막대한 돈에 순간 정신이 팔린 엘리야는 자기도 모르게 진석을 끌어안으며 결혼하자고 외쳤다. 물론 헛소리 말라는 핀잔과 더불어 따끔한 촙을 얻어맞았음은 물론이다.
"으으... 하지만 계속 여기에 있자니 좁고 답답하고 지겨워서. 그리고 배도 고파요."
볼멘 소리를 토하는 엘리야. 하긴 마차를 타고 가만히 앉아 이동하는게 재미있을리 없었다. 데오그라즈의 토박이라고 밝혔던 그녀로선 이렇게 오래 마차를 타는것도 처음일테니 더더욱. 게다가 마차 안쪽의 3분의 1은 쇼핑백으로 채워져있었다. 그 짐 사이에 파묻혀 있으니 더 답답하기도 할테지.
"거 참. 거의 다 왔다니깐. 조금만 참아, 애도 아니고."
"어른도 배가 고픈건 고픈건데요."
어제 붙잡히고 겁에 질려 덜덜 떨어댈땐 언제고 이젠 너무 편하게 군다. 적응력이 대단한건지 성격이 뻔뻔한건지 모를 여자다. 진석이 고개를 돌려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자, 엘리야는 그 시선을 외면하며 조용히 창을 닫았다.
"책임져준대놓곤..."
끝까지 궁시렁댄다. 그냥 죽이기엔 재주가 아까워 얼렁뚱땅 설득을 해서 데려오긴 했다만 이거 어쩐지 괜히 그랬나 싶어진다. 진석은 어제 저녁 도시에서의 일을 마치고, 엘리야를 대동한채 마차를 몰아 데오그라즈의 북쪽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데오그라즈와 러프야드 사이의 숲. 에나의 시체를 묻고 제이스와 한 판 실랑이를 벌였던 바로 그 장소다. 만에 하나 추적대 병력과 마주칠지도 모를 일을 피하기위해 잘 닦인 가도가 아닌 풀숲으로 움직이며 마차를 모는통에 나아가는 속도가 더디긴 했지만, 밤새 쉬지않고 이동한 덕에 새벽녘쯤엔 숲 어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숲 어디에서도 제이스와 아르데나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달리 그녀들이 이곳에 왔다는 흔적같은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예상이 틀렸던건가? 진석은 자신의 생각이 빗나갔다는걸 깨닫고 주변을 좀 더 둘러보며 기다렸지만 결국 누가 나타날 기미는 없었기에 포기하고 러프야드로 향했다.
그녀들이 숲에 오지 않은 이상 러프야드로 향한다는 것 이외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차안엔 제이스가 쇼핑해댄 물건들과 피터슨에게서 훔쳐낸 그의 재산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제 도시에서 급하게 빠져나오느라 물과 식량을 싣는다는걸 생각 못한 탓이다. 진석 자신의 짐 배낭에 아주 약간의 건량이 남아있긴 했지만 둘이서 한 끼를 제대로 때우기도 힘든 분량이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움직일 순 없으니 보급은 해야했다. 물론 진석 자신 혼자뿐이라면 어느정도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버틸 수 있겠지만 엘리야가 동행하고 있으니 그럴수도 없었다. 그리고 혹 수배령이 내려졌다고 해도 지금은 아마 사고를 친 제이스와 아르데나의 인상착의로 내려졌을터, 지금 엘리야와 함께하는 자신은 별 문제 없을거라 여겼다.
'그나저나 얘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거야...'
북쪽으로 도주했으니 당연히 숲으로 왔을거라 예상했는데 자신의 생각이 너무 안일했던 모양이다. 대체 어디로 갔을까? 설마... 추적대에게 붙잡혔다거나? 맨 처음 빠르게 따라나간 기병들까진 진석이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그 후속 병력의 발을 묶기 위해서 도시에 왕창 불을 싸지르는 미친짓까지 저질렀다. 그런 대형사고를 벌였음에도 이미 붙잡혔습니다~ 라는 결말이라면 너무 허무하다. 게다가 왕족의 납치라면 두 말할 것 없이 사형 아니겠는가. 왕정으로 통치중인 국가고 노예제도마저 용납되는 중세 수준의 문명이다. 범죄자 입장에선 현대식의 민주적인 절차를 기대할 수 없다. 선을 넘는순간 목이 뎅겅뎅겅 날아가기 쉽상이다. 설령 죽이지 않고 살려둔다 한들 보나마나 끔찍한 고문이 기다리고 있을 뿐. 물론 고문이 끝난뒤엔 당연히 사형이다. 바로 사형당하는게 낫지 고문을 당할대로 당한후의 사형은 정말 끔찍했다. 마법사인 제이스 혼자라면 쉽사리 붙잡혔을테지만, 괴물의 힘을 지닌 아르데나가 있으니 어떻게든 도망쳤을거라 생각했는데... 진석은 이래저래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들의 상황은 세가지 정도로 가정해 볼 수 있을까. 첫번째 가정, 최악의 경우. 둘 다 이미 붙잡히거나 죽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리 진석이라도 손을 쓸 수 없었다. 죽었다면 그걸로 끝이니 더 아무것도 할 수 없는건 당연. 죽지 않고 붙잡혀 있다고 해도 혼자서 구조를 시도하긴 무리였다. 아무리 날고 기는 진석이라도 변변한 무장도 준비도 없이 한 도시 병력 전체를 상대로 싸움을 건다는건 말도 안될 일이었다. 물론 높은 스테이터스와 전투 능력이 갖추어져 있으니 정말로 목숨을 내버릴 각오를 하고 싸운다면... 일반 잡병들 정도는 왠만큼 길동무 삼을 수도 있을터. 하지만 그 다음은? SP도 떨어지고 지쳐서 너덜너덜해졌을때 중무장한 상급 병과나 기사급 상대라도 나오기 시작하면 끝이다. 혹은 궁수대나 석궁병을 잔뜩 동원해 화망을 짜고 교차사격이라도 해대면 금세 고슴도치 신세가 되어 죽을터. 원래 물량앞에는 장사 없다. 군대는 어디까지나 군대로 맞서야 한다. 무쌍의 맹장 시늉도 뒤에 지원병력이나 그만한 아군이 받쳐줄때나 가능한 법.
'끄응... 뭐 아무튼 그건 최악의 경우고. 두번째 가정, 그녀들은 어디론가 무사히 도망갔다.'
진석은 이쪽의 확률이 가장 높을거라 생각했다. 숲으로 오지 않은건 예상밖이었지만 괴물로 변한 아르데나의 발이 있다면 설령 말로 추적을 시도했다고 해도 쉽게 따라잡기 힘들터. 어쨌거나 도망갔다면 다행인데 문제는 그녀들이 어디로 도망갔는지를 모른다는거다. 러프야드는 데오그라즈에서 너무 가까우니까 러프야드를 지나쳐서 그대로 빅 본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페레나시까지 가버린건 아닐까? 아, 아니지. 아무리 발이 빨라도 마차로도 하루 이상이 걸리는 거리인데 그새 주파했다는건 무리겠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진석.
'마지막 가정. 사실 붙잡히지도 않았고 도망친것도 아니다. 도망가는듯 기만해놓고 의외로 데오그라즈 근처 어딘가에 숨어있었다... 라거나?'
이건 가능성이 희박한 가정이라고 생각했다. 확률의 총계를 10으로 봤을때 붙잡혔다가 3, 도망쳤다가 6 이라면 이건 뭐 1 정도?
'데오그라즈 북문 근처에 숨을만한데가 있나? 별건 없는것 같던데...'
자신이 본 기억으론 북문 근처는 숲이나 언덕같은 별다른 지형지물이 없는 평탄한 지형이었다. 아르데나가 괴물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그 덩치로 숨을곳은 없을터. 하지만 혹시 또 모른다. 북쪽으로 도망치는 척 병사들에게 각인을 준 다음 슬쩍 변신을 풀고 공주를 붙잡은채 어딘가에 숨어 추적대를 피했다거나...
'...으으음. 모르겠다. 모르겠어.'
분명 이 셋 중 어느 가정이 맞긴 할거다. 하지만 지금 진석으로선 어느것이 정답인지 알 방법이 없어 답답했다. 애당초 진석 자신은 그녀들이 숲에 있을거라 무작정 가정하고 마차를 몰아왔었으니. 아무튼 이렇게 된 이상 러프야드에 들러 보급을 한 후 행선지를 다시 정해야 할 것 같았다.
'알아서 잘 도주했을거라 믿고 북쪽의 페레나 시로 가? 아니면 다시 데오그라즈로 돌아가서 직접 상황의 확인을? 그것도 아니면 러프야드에 머무르면서 들려오는 정보에 귀를 기울여?'
아악! 도저히 못 정하겠다! 평소에 딱히 결정 장애같은게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건 진짜 모르겠다. 차라리 주사위라도 굴려서 결정해야 되는게 아닌가 싶다. 이마를 감싸쥐고 으으 괴로워하는 진석. 진석이 괴로워하거나 말거나, 마차는 어느새 러프야드의 입구에 근접해 있었다.
러프야드는 전에 왔을때와 다를바가 없었다. 소작농들이 주민의 대다수라 별 활기도 없고 볼 것도 없는 도시. 하지만 이전과 하나 다른 점이라면 어제 데오그라즈에서 일어난 레오노르 공주 납치건 때문인지 드문드문 짝을 이뤄 돌아다니는 경비병들이 몇 눈에 띄었다는것. 허나 워낙 한적한 느낌의 거리다보니 그나마도 길을 돌아다니는 행인보다 경비병들이 더 눈에 많이 보이는 지경이었다.
"언제 와도 의욕없는 동네라니까."
마차의 지붕 위로 식량과 음료, 여러 물자를 보급해서 올려둔 진석은 그것들을 방수포로 잘 덮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볼 거 없는 동네긴 하네요. 그래도 이건 맛있지만."
마부석에 걸터 앉아 양발을 앞뒤로 흔들며 큼직한 돼지고기 햄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냠냠 먹고있는 엘리야. 호리호리한 체구만 보면 식사량이 얼마 안될것 같았지만 의외로 그 반대였다. 저게 벌써 두개째였다.
"그러다 살찐다?"
"괜찮아요. 저는 체질인지 아무리 먹어도 안 찌거든요. 물론... 그... 여자로서 좀 쪄야 할 부위도 안 찐다는건 좀 괴롭지만."
빵을 우물거리며 슬쩍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는 엘리야. 제이스와 아르데나의 걱정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진석이었지만 저 태평한 태도를 보고 있다니 기분이 좀 가벼워졌다. 진석은 손을 탁탁 털고 반쯤 마시다 내려두었던 병맥주를 다시 들어 목을 축이며 대답했다.
"난 개인적으로 큰 쪽이 좋은데."
"아아~ 남자들은 그게 문제에요. 반대로 생각해서 여자들이 전부 거시기 큰 남자만 좋다고 하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어요? 표준사이즈인 사람도 있고, 좀 작은 사람도 있을텐데. 태어난 신체조건은 어떻게 극복 할 수 없는 법이잖아요. 그러니까 작은것도 존중할 줄 알아야지!"
"뭔 소리야."
"그러니까, 작지만 제 가슴도 가슴은 가슴이라구요."
"누가 뭐래?"
"이익! 여자가 자기 입으로 내 가슴 작다~ 하는게 진짜로 가슴 작다는걸 어필하려고 그러는 줄 알아요? 남자라면 이럴때 '상관없어! 가슴의 크기로 사람의 가치까지 정해지는 건 아니야!' 정도의 말은 해줘야지! 러셀씨 바보에요? 둔감해!"
엘리야에게서 터져나온 생각치도 못한 신랄한 소리에 진석은 입에 머금고 있던 맥주를 그대로 뿜을뻔 했다. 방금전 기분이 가벼워졌다던가 어쨌다던가 취소. 아 이거 괜히 주워왔다.
"야 너 데오그라즈로 돌아갈래?"
"에엑?! 이제와서? 아, 안돼요. 못가!"
먹던 돼지고기 햄 샌드위치를 휙 집어던지고 파다닥 뛰어내려와 진석의 품에 와락 안겨드는 엘리야. 그녀는 진석을 향해 어딘가 필사적인 태도로 외쳤다.
"일단 결혼해줘요! 부디 재산권 분할은 공평하게 반반씩! 그리고나서 이혼해준다면 데오그라즈로 돌아갈 용의가 있으니까!"
"아오 이게 진짜. 1절만 해. 그리고 먹던 음식을 함부로 집어던지면 어떻게 해?"
따악. 엘리야의 머리에 작렬하는 징벌의 촙. 엘리야는 히잉 머리를 감싸쥐면서 뒤로 물러났다.
"나, 나는 진심인데..."
"......"
"주로 재산권에 대한 부분 말이지만."
그만해!
윌포드의 짜증은 극에 달한 상태였다. 자신의 눈앞에서 레오노르 공주를 납치해 유유히 달아난 신원 미상의 두 여자. 한 명은 괴물로 변신해가며 상식을 초월하는 힘을 보여준터라 유능한 기사인 윌포드 조차 그녀들을 제지하지 못했다. 해밀턴 공작가에 투신한 이후론 단 한 번의 실패나 실수 없이 모든일을 완벽히 수행해 왔었는데, 어제의 일은 정말이지 엉망진창이었다. 게다가 해선 안될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른것이다. 자기 입으로 호위기사의 역할에 대해 잘난척 떠들어 놓은 주제에, 공주가 납치되는것을 결국 막지 못한 것이다. 그것도 바로 자기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공주가 잡혀가는 것을 무력히 지켜봐야만 했다. 혀를 빼물고 죽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럽고 화가 났지만 자신이 죽는다고 해결되는건 없었다. 윌포드는 빠르게 왕궁과 해밀턴 공작에게 상황을 전파한 후 1차 추격대에 합류하여 데오그라즈의 북쪽으로 추격을 나섰다.
초반엔 무난히 추격을 할 수 있었다. 괴물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이 가도에 선명하게 남아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느지점에서 그 발자국이 누가 지우기라도 한 듯 싹 사라져버렸다. 하늘을 날기라도 한 건 아닐테니, 윌포드는 그 괴물이 원래의 인간 모습으로 돌아갔을거라 추정했다. 하지만 그 이후 어디로 향했는가? 그것이 문제였다. 추격대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발자국이 가짜다, 다른 방향으로 갔을거다, 마법을 쓴거 아니냐, 게다가 정말로 하늘을 난 거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왔다. 하지만 죄다 헛소리. 이 추격대 중에서 괴물의 실체를 눈 앞에서 똑똑히 본건 오로지 윌포드 뿐이었다. 저들은 자신이 쫓는 괴물이 정확히 뭔지도 모른채 급히 뛰쳐나왔을 뿐이었다. 뭘 쫓는건지도 제대로 모르는 자들이 추적을 제대로 할 리 만무하지 않은가? 잠깐의 회의 끝에, 결국 추격대는 인원을 나누어 평원을 탐색하기로 했다. 어차피 발자국이 중간에 끊긴 이상 인원을 열명 가량의 정도의 소추격대로 나뉘어 사방으로 전개하며 추격을 계속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총 8개조로 나뉜 추격대. 소득이 있건 없건 날이 밝으면 데오그라즈로 귀환하기로 했다.
윌포드는 그중 러프야드 방향으로 향하는 추격대에 자원해서 합류했다. 윌포드는 그들이 분명 가장 가까운 도시인 러프야드로 갔을거라 추측했다. 애당초 그 두 여자들은 왕궁에 침입한 미남의 조력자로 추정되는 인물들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이번엔 반대로 그 미남이 그녀들의 도주를 도왔을수도 있다고 생각했던것이다. 발자국이 사라졌다고? 그까짓거, 말을 끌고와 중간 지점에서 합류라도 한거 아니겠는가? 함께 합류한 다음 괴물의 변신을 풀고 말을 탄채로 이동했겠지. 그러면 발자국이 없어진것도 간단히 설명된다. 또 말을 끌고 이동했다면 분명 보급을 위해서건 뭐건 분명 러프야드를 한 번쯤은 지나쳤을테니 그쪽에 어떤 단서가 남아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것이 윌포드의 추측이었고 러프야드 쪽 추격대에 합류한 이유였다.
수시간을 쉼없이 내달려 러프야드에 도착한 추격대. 하지만 윌포드의 예상은 틀렸던지 러프야드에서는 수상한 자들의 흔적따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러프야드 경비대의 말로는 상황은 평소와 다름없었으며 더군다나 괴물따위는 볼 수도 없었다고 했다. 추격대는 포기하지 않고 경비대의 협조를 얻어 도시 내를 돌며 수색을 해봤으나 그저 허탕이었다. 혹시나 싶어 도시 외곽도 어느정도 돌아봤으나 역시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동이 터오고 날이 밝기 시작했다. 추격대는 처음 결정한대로 데오그라즈로 귀환하기로 했다. 하지만 윌포드는 귀환을 거부했다.
자신이 막지 못해 벌어진 사태다. 단서 하나 찾지 못한 빈손으로 털레털레 병신처럼 돌아갈 순 없었다. 추격대의 다른 인원들은 윌포드를 설득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윌포드는 혼자서라도 추격을 계속 이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분명 뭔가가 이 러프야드와 근처 어딘가에 있을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지금 데오그라즈로 돌아가 버린다면 이대로 놓칠것만 같았다. 윌포드의 강한 집념에 결국 추격대도 그의 의사를 존중해주기로 하고 윌포드만 남겨둔채 전원 데오그라즈로 귀환한다. 혼자 남은 윌포드는 경비대에 돌아가 신분을 밝히고 협조를 부탁하며 필요한 물자를 얻고 식사도 얻어 먹었다. 그 후 말을 갈아탄 다음 다시 한 번 러프야드 주위에서부터 추격을 개시하려 마음먹었다. 잠을 자지 못해 피곤하긴 했지만, 이까짓것 아무것도 아니었다. 힘은 들지만 사흘까지라면 안자고도 버틸 수 있었다. 이전 도적떼를 이끌고 해밀턴 외곽의 요새를 점거한채 해밀턴 공작과 공방전을 펼쳤을때도 도중에 사흘동안 한숨도 안잔채 방어전을 펼치기도 했었다. 사흘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병력의 우위를 앞세워 차륜전을 가해왔던 해밀턴 공작군. 그것을 막아낼 수 있었던건 잠도 자지않고 뛰어다니며 부하들을 지휘했던 윌포드의 능력이었다. 하물며 지금은 그런 전쟁 수준의 대규모 싸움이 아닌 말을 타고 다니며 사람 몇 추적하는 일이 아닌가. 못할거 없었다. 애시당초 이 일은 자신의 책임 아니었던가. 반드시 공주를 되찾아야 했다. 그렇게 경비대를 빠져나와 대로를 지나서 마을 외곽으로 향하는 길. 길 한켠에 마차를 세워놓고 자기들끼리 뭔가 잡담을 나누고 있는 두 명의 젊은남녀를 발견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인가. 여자쪽은 안경을 썼을 뿐 평범한 생김새였지만 남자쪽은... 검은머리에 보통 체구. 그리고 눈이 번쩍 뜨이는 미남이었다.
"...!"
자신도 모르게 칼을 뽑아 들고 달려들뻔했다. 하지만 진정해야 했다. 여기서 덮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지금 저 남자의 곁에 어제 본 두 여자들이 아닌 다른 여자가 옆에 있다는건... 아마도 납치한 공주와 두 여자는 러프야드 외곽 어딘가에 숨겨두고, 이 남자만 다른 일행을 데리고 물자의 보급을 하러 온게 아닐까? 실제로 마차의 위쪽에 뭔가 물건을 잔뜩 실어둔건지 덮어씌워진 방수포가 불룩했다.
'차라리 러프야드 밖으로 빠져나갈때까지 내버려 두고 그 뒤를 쫓는게 낫겠군.'
물론 저 남자가 공주가 말했던 그 상대라는 확실한 보장은 없다. 그냥 우연의 일치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제 은행에선 어땠는가. 자신은 머리색이라는 작은 단서만으로도 그녀들의 정체를 눈치챘었다. 저 남자의 인상착의도 단순한 우연이라기엔 너무 절묘했다. 그리고 애당초 자신의 추리는 공주를 납치한 여자들을 도운게 바로 그 미남 아닐까 하는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미남으로 짐작되는 인상착의의 남자가 바로 지금 저기에 있는것이다! 윌포드는 눈앞의 남자가 어제 그 두 여자와 연관되어 있을거라는 강한 확신을 가졌다. 그러니 저들을 따라가면 공주의 행방을 파악할 수 있을터. 뭔가의 이야기를 마친 두 남녀는 곧 마차에 올라 도시의 북쪽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윌포드는 그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상당히 거리를 둔 채 조심스레 그 마차의 뒤를 따랐다. 자신의 예상이 틀림없을거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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