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5. -- > * 58화 *
러프야드를 벗어나고 수십분. 진석과 엘리야가 탄 마차는 가도를 따라 북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그보다 한참 떨어져 윌포드도 말을 몰며 그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탁 트인 평지니 몸을 감추며 뒤를 쫓을 순 없었지만, 가도가 아는사람만 이용하는 동네 뒷골목 같은것도 아니고 딱히 윌포드가 수상해 보일일은 없었다. 실제로 말을 타고 이동하는 여행자라거나 상단의 짐수레들도 두세차례 옆을 스쳐갔다. 이정도 먼 간격을 두고 따라간다면 의심받을 일은 없으리, 윌포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진석과 엘리야는 처음부터 윌포드의 미행을 눈치채고 있었다. 아까 러프야드에서 출발하기 직전의 상황. 진석과 농담을 주고 받으며 투닥거리던 엘리야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진석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러셀씨. 지금 수상한 사람이 우릴 지켜보고 있어요."
"뭐...?"
"에잇, 바보처럼 두리번 대려고 하지 마요! 나한테 시선 고정!"
잽싸게 진석의 손을 마주잡고 당기며 자신에게 시선을 묶어두는 엘리야. 진석은 뜬금없는 미행 이야기에 당황스러웠지만 엘리야는 방금처럼 태연한 모습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길 저쪽으로 30, 4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왠 무장한 남자가 말에 타서 여길 빤히 바라보고있어요. 갑자기 이동하다 멈춘거나, 머리의 방향을 보니 우릴 탐색하고 있는게 확실해요. 혹시 누군지 짐작가는거 없어요?"
"...아니 글쎄. 당장은 생각나는게 없는데. 애당초 엘리야 네가 미행으로 붙은것도 의외의 일이었거든. 아니 이거 뭔 미행이 하루에 한 번씩 달라붙는거야?"
"짐작가는 정체가 없는 미행은 두 가지 경우에요. 첫 번째, 그냥 사람을 잘못 봤다. 이건 생각보다 흔한 일이죠. 먼 거리에선 사람의 인상착의를 착각하기 쉬우니까. 엉뚱한 사람을 목표인줄 알고 쫓는거죠. 그리고 두 번째, 절대 아닐거라 생각하던 의외의 인물이 보냈다. 한 침대를 쓰는 부부간에도 뒷조사를 시키는 일은 의외로 흔해요. 밤마다 살을 맞대고 자는 사이에 누가 미행 따윌 붙일거라고 생각하겠어요? 하지만 현실은 다르죠. 전 피터슨에게만 의뢰를 받았었지만 불륜 조사를 해주는 흥신소 따윈 데오그라즈에도 흔해빠졌으니까요. 미행 당하는 본인이 짐작가는 곳이 없다고 생각하는건, 무의식적으로 미행을 보낸 상대를 용의선상에서 제외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 사람은 그럴리가 없다, 혹은 그런짓을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뭐 이런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죠."
"......"
과연 미행과 뒷조사의 전문가. 엘리야는 진석이 알아채지도 못한 미행을 눈치챈데다가 생각하지도 못한 방향에서의 관점을 제시해주었다. 얘 나름대로 머리가 좋긴 좋구나. 진석이 은근히 감탄하는데, 곁눈질을 하고 있던 엘리야가 슬쩍 안경을 쓸어올리면서 말했다.
"길 옆으로 숨네요. 응, 확실하네. 저거라면 우릴 잘못본게 아닐거에요. 나는 달리 미행당할 일이나 원한을 산 상대도 없는데다가 애당초 데오그라즈 밖으로 나오는게 처음이니... 틀림없이 러셀씨를 노리고 있는거겠죠. 한 번 잘 생각해봐요."
"글쎄... 그렇게 말해도."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기는 진석. 어제에 이어 오늘도 미행이라니. 무슨 밤낮없이 수상한 놈들이 달라붙냐. 아주 인기가 폭발하는구만? 하지만 엘리야를 보낸게 피터슨이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었는데 이제와서 다른 배후가 짐작이 갈리가 없었다. 엘리야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진석을 잠시 지켜보다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끙. 역시 잘 모르겠는데."
"어제 러셀씨의 일행이었던 두 여자 말이에요. 아까 숲에서 볼 수 있을거라 했는데 결국 못 만나고 여기로 왔죠? 그럼 그녀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그녀들과 뭔가 일이 얽힌건 아닐까요?"
아니 잠깐. 그러고보니 어제 분명 제이스와 아르데나를 쫓기위해 데오그라즈에서 기병대가 선발 추적대로 나왔었지. 혹시 저 남자도 그 인원...? 하지만 제이스와 아르데나를 쫓던 인원이 달랑 한 명만 남아서 여기서 자신을 미행하려든다는건 어째 말의 앞뒤가 안 맞는것 같다. 그리고 지금 엘리야는 제이스와 아르데나가 레오노르 공주를 납치했다는건 모른다. 자신에게 붙잡힌채 쭉 마차에 태워져 왔으니 어제 데오그라즈에서 피터슨이 죽었다는것 이외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모를것이다. 물론 진석 본인이 어떤 교단에 소속되어있는지도 아직 알려주지 않았다. 그냥 제이스, 아르데나와는 데오그라즈에서 서로 일이 나뉘어 나중에 만나는 정도로 대충 둘러댔을 뿐. 그럼에도 엘리야는 상황을 적절히 추론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을 돕고 있었다. 으음... 기특한데? 괜히 주워왔단 말은 취소. 그런대로 잘 주워온 것 같았다.
"...에이 몰라, 모르겠다. 그보다 일단 출발하자. 페레나 시로 갈거야."
"엑? 저 미행 어떻게 처리하지 않을거에요? 어제 저한테 했던것처럼 붙잡는다거나."
"벌건 대낮에 경비병들이 돌아다니는 도시안에서 소란을 일으킬 순 없잖아. 일개 경비병이라고 해도 일단은 공권력. 공권력을 상대로 눈에 띄는 일을 하면 이래저래 귀찮아진다고. 도시 밖으로 빠져나가서 처리하자."
"오 과연. 힘쓰는 일은 그쪽이 전문일테니 알아서 맡겨둘께요. 저는 얌전히 마차안에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이힛 웃는폼이 왠지 얄밉다. 하지만 미행을 알아차리도록 도움을 준 건 사실이므로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같이 마차에 탑승했다.
"아, 아이 참~ 애도 아닌데 어제부터 자꾸 머리를 쓰다듬고 그래요."
"아니 아르데나 때문에 왠지모르게 버릇이 되서..."
"아르데나라면 어제 그 검은머리 쪽 소녀 말이죠? 되게 귀엽던데. 무슨 관계에요? 역시 여동생?"
"뭐 그렇지."
"흐흥... 여동생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습관이 들어있는 오빠라. 팔불출?"
"왜, 내 여동생은 네깟 놈에겐 못준다~ 같은 종류의 인간일듯 싶어서?"
"오호, 그거 의외로 러셀씨에게 어울리는 대사인데요."
진석은 마부석에 올라 작은 미닫이 창 너머로 엘리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러프야드 밖으로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엘리야에겐 아직 교단에 대한 핵심적인 이야기는 해주지 않고 그냥 에둘러 어떤 특수한 조직 같은 곳에서 좀 위험하고도 어려운 일을 돕는거란 식으로 설명을 했다. 엘리야는 두루뭉술 넘어가는 설명에 뭔가 미심쩍어 하는 눈치였지만 일단은 그러려니 덮어두고 넘어갔다. 아르데나의 경우엔 자신의 저주를 깨어준 진석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으니 진석이 악의 조직에 소속되어 있건 말건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만난지 하루 밖에 안된 엘리야와는 아직 제대로 된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으니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미약을 먹여 강제로 순결을 뺏은것에 대해 의외로 큰 반감을 가지지 않고 있다는게 다행이었지만, 아직은 금전으로 설득해 동행한다는 느낌이 강했으므로 머리가 좋은 그녀에겐 섣불리 허신을 강림시켜 세계를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이야길 꺼낼 수 없었다. 함부로 얘기 해줬다간 보나마나 난리가 나리라. 이런 상대는 카야처럼 뭔가 저항할 수 없는 큰 약점을 쥐거나, 시간을 들여 이쪽을 따를 수 밖에 없도록 마음을 돌려놔야했다. 허나 엘리야에겐 달리 약점을 잡을곳이 없었다. 카야때처럼 인질 삼아 협박할 가족이나 조직같은게 있는것도 아니고. 그러니 일단은 차근차근 이야기라도 하며 관계를 진전시켜나갈 수 밖에! 정 안되면 미리안에게라도 던져주자. 그녀라면 자신에게 했듯 교묘한 언변으로 엘리야를 알아서 구워삶을테지. 그렇게 둘이 탄 마차는 도시를 벗어나 30분쯤 가도를 따라 이동했고, 윌포드는 자신이 들키지 않았을거라 생각하며 뒤를 쫓았다.
"어때요. 아직 따라오고 있어요?"
"음... 응. 한 백미터쯤 엄청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오고 있구만. 하긴 네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냥 가도를 지나는 행인이라고 생각했겠다. 뭐 꼬리를 달고 다니는 취미가 있는것도 아니니 슬슬 처리해야지. 저쪽으로 가볼까?"
마침 길 좌측에 야트막한 언덕이 보였다. 정말 작은 동산 수준의 언덕이었지만 수풀과 나무도 좀 자라 있었으니 그 뒤쪽으로 돌아가면 가도를 지나는 통행인들의 눈엔 잘 띄지 않을터. 진석은 가도에서 벗어나 마차를 언덕 뒤쪽으로 향했다.
'역시... 드디어 움직이는군. 거기였냐!'
윌포드는 윌포드 나름대로 마차가 길을 벗어나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가도를 따라 길을 잘 가던 마차가 저런 엉뚱한 곳으로 갈 이유가 있겠는가? 분명 레오노르 공주와 공주를 납치한 두 여자가 저기 있는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윌포드는 비록 지금 혼자였지만 자신의 실력에 확신이 있었다. 이백의 도적떼를 규합하고 한 나라의 군대를 상대로도 밀리지 않았던 검과 기술이다. 임기응변은 자신있었다. 어제 그 괴물을 정면으로 상대하는건 힘들어도, 틈을 노려 기습을 가한다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자신을 싫어하는 도도한 공주님의 입에서 반드시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를 받아내주지, 윌포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레 마차의 뒤를 따랐다.
"...아니?"
그런데 분명 들키지 않고 뒤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마차가 언덕 부근의 수풀이 우거진 코너를 돌때쯤 갑자기 속력을 내더니 그 뒤쪽으로 모습을 감추는게 아닌가? 이런! 저들은 자신의 미행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단 말인가?! 말도 안돼, 언제부터?
"제길!"
윌포드는 말에게 박차를 가하며 속력을 내어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웠다. 아니 어디서 어떻게 눈치챈거지? 혹 무슨 마법이라도 써서 자신을 탐지한 것인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무거운 마차다. 튼튼한 군마를 타고 있는 자신이 놓칠리는 없을터. 윌포드는 빠르게 말을 몰았고 언덕까지의 거리는 삽시간에 줄어들었다. 그리고 윌포드가 수풀이 자란 코너를 도는 순간, 갑자기 윌포드의 얼굴앞에 뭔가가 휙 날아들었다.
"큿!"
당황스러웠지만 윌포드의 검격은 신속했다. 말을 화급히 멈춰 세우며 에스터크를 뽑아 얼굴앞으로 날아드는 그 무엇인가를 일격에 베어냈다. 허공에서 허무히 두 토막으로 잘려나가는 그것. 허나 베는 감촉이 가벼웠다. 아니, 이건... 그냥 옷가지...?
바로 앞쪽에 세워진 마차. 그 지붕위에 올라가 있던 안경을 쓴 여자가 자신을 향해 왠 옷가지를 집어던진 것이었다. 그 순간 옆의 수풀속에서 뭔가가 윌포드를 향해 쏘아져나왔다.
"화염화살!"
검은머리의 남자! 자신이 쫓는 목표물! 그는 양 손에 단검을 든채 자신에게 달려들며 마법을 시전했다. 상대의 몸 주위에서 불꽃을 두른 화살 세 발이 나타나 빠르게 쏘아졌다. 옷가지를 베느라 자세가 흐트러졌던 윌포드였지만 이래 뵈도 수많은 싸움과 전투로 단련된 왕국 최고의 기사들 중 하나! 어떻게든 검을 추스리며 자신을 노리는 화염화살 두 발을 쳐내었다. 하지만 마지막 한 발이 향한것은 자신이 아니라 말의 몸통이었다. 평소라면 이런 하찮은 마법쯤 몇 발이고 튕겨낼 수 있었을테지만 급히 검을 휘두르는 바람에 미처 말을 노린 공격까진 다 막아낼 수 없었다. 화염화살에 직격당한 말은 자신의 몸을 태우는 고통에 깜짝 놀라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 바람에 말 위에 있던 윌포드는 고삐를 붙들고 떨어지지 않으려 버티다 자세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그야말로 무방비상태. 그 사이 코 앞까지 육박한 검은머리의 사내는 양 손의 단검을 역수로 고쳐잡으며 뭔가를 중얼거렸다.
"시클론. 라파가."
화염화살을 쳐낸데다가 말 때문에 균형을 잃은 상태라도 윌포드는 어떻게든 손에 쥔 에스터크를 상대를 향해 내찌르려고 했다. 마지막까지 전진하며 급소를 찌르는것이 바로 펜서의 검! 지금의 상태론 장기인 신속의 찌르기를 발할 수 없었지만 윌포드는 순순히 당해줄 생각따위 요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상대는 갑자기 자신의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뭣?!"
파아악! 순간, 뭔가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같은것이 자신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한박자 늦게 목덜미 주위로 묵직한 충격이 몰려왔다.
'...아, 그렇군. 당했어.'
목에서 느껴지는 시큰한 고통에 윌포드는 자신의 패배를 직감했다. 어느새 사내는 자신의 반대편으로 지나가 바닥에 착지하고 있었다. 자신의 슈테힌처럼 저 남자도 무언가 자신의 장기를 발휘한 것이리라. 에스터크를 내밀고 있던 윌포드의 팔이 아래로 기울었다. 그리고 그것이 뭔가의 신호인것 마냥, 윌포드의 목이 쩌억 갈라지며 피가 몸 밖으로 사정없이 쏟아졌다. 삽시간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윌포드는 화염화살의 충격으로 여전히 마구 날뛰는 말 위에서 버티지 못하고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말은 윌포드를 떨구고 저 멀리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혼자 남겨져 피를 철철 쏟아내는 윌포드의 곁으로 진석이 다가왔다. 윌포드는 벌써 창백해지는 입술을 열어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물었다.
"당신... 이, 이름은..."
"러셀."
"난... 위... 윌포드. 공주... 님은?"
"나도 모른다. 여기엔 없어."
뭐? 이럴수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단 말인가? 분명 옳게 추적을 한것일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이게 대체 무슨 헛수고였단 말인가. 어차피 죽어가는 상황, 자신의 판단이라도 옳았던 거라면 싶었는데. 공주를 구하다 죽은거라면 조금이라도 덜 억울했을터. 이건 정말로 엉뚱한 곳에서 목숨을 낭비한 꼴이다. 한심하다. 자기 잘난맛에 사는 공주님을 여봐란듯 구해주고 그 앞에서 실실대며 뻐겨보고 싶었거늘. 실수를 만회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한 순간의 착오로 모든것을 잃었다. 고집부리지 말고 차라리 데오그라즈로 돌아갔어야 했을까? 하지만... 이젠 다 어쩔 수 없지. 지나간 일은 후회해봐야 소용 없으니까. 윌포드는 자신의 목을 통해 생명이 빠르게 빠져나가는것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지금껏 자신이 수많은 상대들에게 행사했던 죽음이다. 이번엔 그것이 그저 자신에게 돌아왔을 뿐. 검을 쥐게 된 이후 편안히 침대 위에서 죽을수 있을거란 기대는 안했지만... 이렇게 허무히 당할거라곤 생각 못했다. 많은것이 아쉬웠다. 그럼에도 기사 윌포드는 묵묵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
진석은 조용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윌포드를 잠시 지켜보았다. 이 윌포드란 남자는 의외로 실력자였던것 같았다. 그도 그럴것이 맨 처음 옷가지에 신경이 팔렸음에도 화염화살을 두 발이나 막아냈고 말이 날뛰는 와중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반격을 가해왔었다. 이쪽이 처음부터 미행을 눈치채고 엘리야를 이용해 함정에 빠트려 선공을 가했으니 쉽게 잡았을 뿐, 정면에서 당당히 싸웠다면 생각외로 힘든 상대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죽기 직전 공주의 이야기를 꺼낸것을 보니 이 자는 아마도 어젯밤 데오그라즈를 떠난 추격대 중 일원이 맞는듯했다. 어떤 경위로 혼자서만 남아있었던 건지, 또 자신을 왜 쫓은건진 알 길이 없었지만 진석에게 공주의 행방을 물어본것으로 보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제이스와 아르데나는 붙잡히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대로 분명 어떻게든 도주에 성공한것이리라. 오오 언니들 나이스 샷. 그러니 그냥 페레나 시로 향하기로 한 자신의 결정은 옳았다. 허나 만약 페레나 시에 도착해서도 그녀들을 찾지 못한다면... 모르겠다. 그땐 그때가서 생각해 볼 일이다. 무사히 도망쳤다면 나중에 어떻게든 되겠지 뭐. 뜬금없는 미행이었지만 덕분에 큰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곧 그의 숨이 끊어진것을 확인한 진석은 마차쪽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마차에 다가가서 보자니 엘리야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마차 지붕위에서 다리를 후들거리고 있었다.
"저, 저, 저 기사... 지, 지, 진짜 주, 주, 죽은거에요?"
"그, 그, 그 그럼 가, 가 가짜로 주, 주, 죽었겠어?"
엘리야를 놀리듯 더듬는 말투를 따라하는 진석. 엘리야는 얼굴을 붉혔다.
"누... 눈 앞에서 사람이 죽는건 처음본단 말이에요!"
하긴 미행과 뒷조사의 프로라도 사람이 죽는 일에까지 관여한적은 없었겠지. 피터슨도 바보가 아니니 전투능력이 없는 그녀를 그런 일에 보냈을리는 없었을테고. 진석은 피식 웃으며 지붕 위의 엘리야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무튼 고맙다. 덕분에 쉽게 이겼어. 이제 내려와."
"그... 어휴. 사람을 죽이는데 협조하다니... 아우 정말."
엘리야는 자신이 기사를 살해하는데 도움을 줬다는 사실이 영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진석은 엘리야를 받아들어 땅 위로 내려주곤 엉덩이를 한대 툭 쳤다.
"으! 어딜만져요!"
"자자 진정해. 머리 좀 식히라고. 방금 네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내가 죽었을지도 몰라. 그럼 넌 저 기사에게 붙잡혀 다시 데오그라즈로 끌려가 이것 저것 추궁당했겠지. 그랬다면 어떻게 됐겠어?"
"어..."
"그러니 너무 죄책감 가지지마. 네가 날 도운건 잘못된게 아니야."
엘리야는 잠시 멍하니 진석의 말을 듣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곤 질문해왔다.
"아, 아니. 그보다 저 사람... 아니 기사라고 했죠? 어째서 기사가 러셀씨의 뒤를 쫓고 있던거죠? 피터슨을 죽인것때문... 아니. 그럴리가 없어. 한낱 정보상 죽었다고 기사가 움직일리가 없으니. 그보다 저 사람 죽기전에 분명 서로 뭐라고 얘길 하는것 같던데, 무슨 내용이었나요?"
'너처럼 눈치가 빠른 꼬마는 싫어! 가 아니라 으으. 은근슬쩍 넘기려 했건만 머리가 좋으니 쓸데없는데서 꼬치꼬치 캐물어 오는군. 하긴 얘는 지금 공주 납치에 관한걸 모르지? 게다가 어떤 이유에서 저 기사가 날 쫓은건진 나도 잘 모른다고. 이 이야길... 해줘야 되나? 아니. 아직 안 돼.'
진석은 히죽 웃으며 검지손가락을 들어 입술 앞에 세워보이며 장난스레 말했다.
"원래 남자에게는 말 못할 비밀이 많은법이야."
"에엑? 기사에게 추적을 당할만한 비밀을 달고 다니는 사람 곁에 있고 싶진 않은데. 그냥 솔직히 알려주는건 어때요?"
"어머, 남자의 비밀을 캐내려 하다니 저질."
입을 가리며 새침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진석. 엘리야는 비위가 상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토하는 시늉을 했다.
"오웩. 징그러워 .무슨 흉내에요 그게? 어휴... 어쩌다 이런 사람을 따라와선. 으으, 좋은거 준다고 꼬드기는 낯선 아저씨는 따라가면 안되는거였는데! 그깟 돈에 홀려서 내가 이게 무슨 꼴이람."
"무슨 꼴은, 신세 망친 꼴이지. 자 그만 가자!"
"으으... 시원스레 말해주니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네요. 러셀씨를 만나고 어제 오늘 겨우 이틀사이에 별 경험을 다 하는군요. 이러다 수명 짧아질 것 같아."
'참 주절주절 입심만은 끈질긴 아가씨고만.'
진석과 엘리야는 마차에 올라 언덕을 빠져나가 다시 가도로 향했다. 마차가 멀어지는 언덕 뒤쪽으론 싸늘히 식은 윌포드의 시체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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