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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60화 (60/155)

< --   - 5.   -- >         * 60화 *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느즈막한 오후. 진석과 엘리야는 별 탈 없이 페레나시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몇 번이나 들러 이젠 제법 눈에 익은 거리를 지나, 빅 본이 운영하는 여관으로 향했다. 여전히 길가에서 의욕없는 호객을 하고 있던 종업원이 보였는데, 그는 진석을 대번에 알아보곤 이쪽으로 허겁지겁 뛰어왔다.

"저기, 그... 마차는 제가 맡을테니 손님은 어서 안으로 들어가보시죠. 일행분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허어? 그래?"

역시 그녀들은 페레나 시까지 도망쳐 온게 맞았어! 자신의 생각처럼 숲엔 들르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무사히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진석은 마차에서 자신의 배낭을 둘러메고 피터슨의 재산이 든 돈가방을 챙긴다음 엘리야를 데리고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안면을 익힌 여관주인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해왔다.

"어서오십시오. 저번의 방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올라가 보시죠."

진석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2층으로 올라갔다. 저번의 방이라면 가장 안쪽의 큰 방이겠지? 그런데 진석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던 엘리야가 뒤에서 불안한 어조로 물어왔다.

"에... 그, 뭐랄까. 이곳도 러셀씨가 말한 조직같은것의 일부에요?"

"뭐 대충 그렇다고나 할까? 근데 여기 자체는 진짜 그냥 평범한 여관이야."

얼굴만 보고도 이쪽을 알아보고 종업원이 마차를 주차시켜주거나, 익숙히 방을 안내해주는 주인의 모습에 엘리야는 어째 긴장한 모양이었다. 하긴 자신이 엘리야 입장이라도 그렇긴 하겠다. 교단에 대해 워낙 어중간하게 설명해놨으니. 둘은 짧은 복도를 지나 2층의 방에 다다랐다. 진석이 문 앞에서 노크를 하자 안쪽에서 네 하고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방문이 열렸다. 문을 열어준것은 아르데나였다.

"앗... 오빠!"

진석의 얼굴을 알아보곤 냅다 품에 안겨오는 아르데나. 아이고 귀여운 것. 진석은 아르데나를 가슴팍에 메단채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있던 제이스도 벌떡 일어나 환한 표정을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진석은 양손에 든 돈가방을 내려놓곤, 품에 안긴 아르데나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말했다.

"겨우 이틀만에 다시 보는건데 왠지 되게 오랜만에 보는것 같네."

"정말... 일이 어떻게 이렇게 꼬여선. 그런데 그보다... 저 뒤에 쟤는."

제이스의 얼굴에 보이던 반가운 표정도 잠시. 그녀는 눈썹을 슬쩍 찌푸리며 진석의 뒤에서 우물쭈물하던 엘리야를 가리켰다. 진석은 아르데나를 떼어놓고 돈가방들 옆에 짐 배낭을 벗어두며 대답했다.

"응. 주워왔어."

"줍다뇨! 내가 무슨 물건도 아니... 아니... 주, 주워졌습니다. 네."

진석의 말에 반박하려다가 제이스의 싸늘한 시선에 그대로 쪼그라드는 엘리야. 제이스는 하아 한 숨을 내쉬며 진석의 등짝을 찰싹 때렸다.

"저런걸 막 주워오면 어떻게 해. 대체 어디다 쓰려고."

"여... 역시 그렇죠? 저는 이만 돌아가겠..."

"어디가."

제이스의 냉대에 슬쩍 돌아서 방을 나가려하는 엘리야. 진석은 그녀의 뒷덜미를 붙잡고 이쪽으로 질질 끌어당겨 양 어깨에 턱 손을 얹었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무슨 상품 소개를 하듯 말하는 진석.

"이래보여도 재주가 쓸만해. 정보상 피터슨 밑에서 미행이랑 뒷조사 일을 쭉 해왔으니 교단을 위해서도 분명히 활약할 수 있을거야. 충분한 보수를 지불하는 댓가로 우리쪽 일에 협력하기로 했지. 실제로 얘 덕분에 오는길에 또 다른 미행을 하나 눈치채서 제거하기도 했고."

"미행?"

"왠 기사가 하나 붙었었는데. 너희들을 추적하던 기사같더만 어째 내쪽에 붙어서 미행을 하더라고. 아참. 그보다... 공주는? 어디있어?"

"아, 그녀라면 지하 창고에 잘 모셔놨지. 흥. 귀하게 자라신 몸이 언제 또 지저분한 먼지 투성이의 창고에서 지내보겠어? 이럴때 실컷 경험하게 해줘야지."

납치당하고 계속 끌려다니기만 하느라 그새 꽤나 초췌해진 레오노르 공주의 모습을 떠올리며 비웃는 제이스. 진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와... 어째 너 다운 대사다. 성격 못된티가 팍 나는게."

진석의 도발에 주먹을 쥐어보이며 발끈하는 제이스.

"뭐? 그러는 러셀이야말로 죄없는 수천명의 시민들에게 불벼락을 뿌려댔으면서. 우리를 위해 한 일이라는건 알겠지만 못된걸로 치면 그쪽이 더 심하다고 생각 안해? 아아 불쌍해라. 집도 일터도 잃은 시민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재산만 잃었으면 다행이지. 분명 죽거나 다친 사람도 어마어마하게 많을텐데."

"뭐 임마? 내가 그짓하느라 얼마나 똥줄 빠졌는줄 알아? 그리고 언제부터 네가 데오그라즈 시민들의 안녕에 관심을 가졌다고 그래? 나는 지금 절을 받아도 모자랄 입장이구만 무슨... 아니 근데 잠깐. 방화건을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거야? 바로 도시를 빠져나간거 아니었어?"

마구 쏟아지는 진석과 제이스의 대화. 엘리야는 진석과 제이스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정신없이 그 대화를 주워들었다.

'교단? 공주? 방화? 뭐... 뭐, 뭐, 뭐야?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진석에게 붙들린채 안색이 창백해지는 엘리야가 안됐던지, 아르데나가 엘리야의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을 이끌고 의자에 데려가 앉혔다. 엘리야가 알기로 아르데나는 분명 진석의 여동생. 저쪽 두 남녀는 성격이 나빠보였지만 그래도 이쪽은 상냥하구나. 엘리야는 조금 안도하며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아, 저기... 고맙..."

"오빠한테 너무 붙어있지 마세요."

"......"

그쪽이냐! 내가 네 오빠한테 붙어있는게 꼴보기 싫었던거냐? 뭐야 이 브라콘 여동생은? 나, 나도 붙어있고 싶어서 붙어있던건 아니거드으은? 반쯤 강제로 끌려온거라고!

'으아 서러워. 나도 오빠 정도는 있었다고! ...죽었지만.'

어깨를 추욱 늘어트리는 엘리야.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귀는 진석과 제이스의 대화를 계속 듣고 있었다.

"그래. 북쪽으로 도망치는 척 하다 빅 본의 지부로 돌아가서 도움을 받았다니깐. 몇 번을 다시 말해야 하는거야?"

"아니, 한참 도시를 벗어났을 상황에서 어떻게 안 들키고 다시 도시로 돌아갔다는거야? 난 틀림없이 그대로 쭉 페레나시까지 달아난건줄 알았구만."

이 부분을 정확히 설명하자면 전이의 보석을 사용한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미리안이 함구시켰던 부분. 제이스는 차마 진석에게 그 부분을 설명하지 못하고 손을 내저었다.

"윽. 그건... 교, 교단에 가면 설명해줄께. 지금은 곤란해."

"...에이 뭐 됐어. 결과적으로 무사하니 됐지. 그보다 이거 볼래?"

구석에 놓아뒀던 돈가방을 들어 테이블 위로 올려놓는 진석. 워낙 묵직하다보니 나무 테이블에선 끼익 하는 소리가 났다. 제이스는 손을 뻗어 가방의 입구를 열었다.

"뭔데 이게... 하? 어디서 이 많은 돈을... 도시에 불을 싸지른 김에 겸사겸사 은행이라도 털은거야?"

"정보상 피터슨이 모아둔 전재산이야. 그 망할놈이 내가 왕실을 털었다는 정보를 비싸게 팔아먹겠다고 궁리중이더라? 처죽이고 놈의 은퇴금을 대신 수령해줬지. 뭐 대충 십만골드쯤 되지 않을까 싶은데. 아 물론 현금이랑 금괴는 내꺼! 대신 수표랑 권리서 같은건 미리안에게 넘겨주려고."

"후... 훌륭해! 그 난리통에도 틈틈히 이렇게 예쁜짓을 다 하고! 이리와, 뽀뽀 해줄께!"

신나서 진석에게 안겨드는 제이스와는 달리 옆에 있던 엘리야의 얼굴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방금 러셀 이 남자, 뭐라고 했지? 왕실을... 털었다? 설마, 가네딘 후작이 죽은것과 그가 뭔가 관련이 있는건가? 아니 대체 이들은 무슨짓을 하는 작자들이란 말인가? 이거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로 발을 들여선 안될곳에 함부로 들어선 느낌이었다. 진석은 잔뜩 겁을 집어 먹고 어쩔줄 몰라하는 엘리야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젠 슬슬 말해줘도 되겠지? 어서와라, 허신 헤세스모데우스의 교단에."

이후 제이스와 아르데나와 이야기를 하며 그간의 상황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엘리야에게도 적당히 사정 설명을 하며 회유했다. 물론 교단의 최종적인 목적인 허신의 강림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지만, 그걸로 세상이 멸망한다는 말만큼은 쏙 빼놓았다. 엘리야는 이제 이쪽이 그냥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 자신들이 믿는 신의 현세 강림을 추구하는 집단정도로 알게 되었으리라. 이후 다 같이 저녁식사를 할때 엘리야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저기...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별로 도움이 안될것 같은데요. 나, 남 뒤나 캐는 재주밖에 없는데 뭘 할 수 있겠어요?"

이제와서 교단에 대해 대충이나마 듣고나니 또 겁이 나는 모양이다. 하긴 데오그라즈에서 진석 일행이 저지른 짓이나 신의 강림을 추구한다는 이야기만 들으면 뭔 광신도 집단으로 생각될테니. 제이스는 그런 엘리야의 태도에 포크로 샐러드를 뒤적거리며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긴하지. 자기 주제는 잘 알고 있어서 다행이네."

따악! 기습적인 촙이 제이스의 머리를 내리쳤다.

"아얏! 뭐야!"

"어리석구나 제시여... 감히 내 안목과 판단력을 의심한단 말인가?"

쓸떼없이 근엄한 흉내를 내며 폼을 잡는 진석. 제이스는 포크를 내려놓고 팔짱을 끼며 말했다.

"흥. 그렇게 말하는걸 보니 보나마나 둘이 벌써 잤나보지?"

아니... 어떻게 알았지? 순간 움찔하는 진석.

"......"

"그리고 너. 엘리야라고 했지? 너도 솔직히 돈이 아니라 러셀이 마음에 들었으니 순순히 끌려온거잖아? 그런게 아니라면 아무리 천만금을 준대도 이런 정체모를 남자 뒤를 따라올리 없을텐데."

아닌데요. 그런게 아닌데. 저 그만 데오그라즈로 돌아갈게요. 엘리야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서슬 퍼런 제이스의 기세에 눌려 도저히 입을 열 수 없었다. 진석은 옆에 있던 아르데나를 끌어안으며 엉엉 우는 시늉을 했다.

"으허엉! 아르데나! 저 여자가 나 괴롭혀. 혼내줘."

"아니... 그게 저..."

제이스 언니가 있는데, 다른 사람과 그런일을 했다면... 이건 오빠가 잘못한거 아닌가요? 아르데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주제 넘는 소리 같아서 결국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이스는 그런 진석을 지켜보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의외의 말을 꺼내었다.

"하아. 뭐 됐어. 애당초 러셀의 가벼운 하반신을 나 혼자서 감당해 낼 수 있을거라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언젠가 다른 여자에게 손댈것쯤 예상하고 있었어. 앞으로도 틈이 생기면 또 그럴텐데 뭘. 이런걸로 일일이 성질내면 못 버티겠지."

애시당초 자신이 어떻게 러셀에게 넘어갔었던가를 떠올려보는 제이스. 물론 처음엔 자신이 살아보고자 그를 필사적으로 회유했었지만, 교단까지 동행하며 쓸떼없을 정도로 힘이 넘치는 아랫도리에 역으로 넘어가버리고 말았었다. 정말 세상에 뭐 이런게 다 있었나 싶을 정도로 대단하긴 했으니까. 하지만 진석은 제이스의 말에 시시덕거리며 좋아했다.

"오. 제시도 의외로 이해심이 있는 여자였구나. 음... 그렇다면 이거 이러고 있을때가 아니지. 일단 아래에 있을 레오노르 공주부터 당장 만나보는게..."

그렇게 말하며 창고에 갇혀있을 공주를 보러 가겠다는듯 진짜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진석. 하지만 덥석, 옆에 있던 아르데나가 진석의 손을 붙잡아왔다. 엥? 하며 돌아보는 진석에게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보이는 아르데나.

"오, 오빠. 지금 그건 좀 아닌것 같아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엘리야도 갑자기 손을 번쩍 들더니 한 마디 했다.

"저기! 저도! 그... 분명 러셀씨랑 같이 자긴 했지만... 제가 좋아서 그런게 아니라... 미약 때문에..."

엘리야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는 제이스.

"...너도?"

제이스 자신도 분명 이곳의 목욕탕에서 진석이 만든 이상한 약에 당해 아주 제대로 호된꼴을 봤었다. 자신에게도 그 일이 결정타였었다. 그것때문에 홀라당 넘어갔던건데... 그런데 그런 짓을 또 하고 있었단 말이지? 오밤중에 환전해오란 말에 아르데나와 함께 은행에 갔다가 강도질을 하는 레드라인의 잔당이나, 왠 재수없는 기사에게 걸려 쓸데없는 고생을 하고, 겨우겨우 공주를 납치해 도망치느라 갖은 고생을 하고 있던 틈에 이 인간은 여자한테 미약을 써서 재미나 보고 있었단 말이지? 대번에 도끼눈이 되는 제이스의 시선. 그렇게 제이스, 아르데나, 엘리야. 세 여자가 동시에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당황하는 진석.

"뭐... 뭐야 이 분위기는."

"이러려고 익혀둔 약학이야? 사원에 머무르는 동안 어째 머서랑 자주 붙어다닌다 했더니... 기껏 이런데 쓰려는거였어? 실망이야."

"오빠가 자꾸 그러면 제시 언니가... 불쌍하잖아요."

"그,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피해자에요! 게다가 처음이었는... 아니 흡."

마지막으로 말을 하던 엘리야는 실언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스스로의 입을 막았다. 방금전까진 엘리야를 싸늘하게만 바라보던 제이스였지만, 어느새 그 시선은 동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째 자연스레 자신을 개탄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진석은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 잠깐만! 이러니 내가 뭐 여자를 되는대로 건드리고 다닌것 같은데 여태까지 고작 세 명 밖에 손 안댔다고! 에나, 제이스, 그리고 엘리야. 그나마 에나는 죽고 없는데? 군주 플레이 같은거 할땐 하녀들에게 닥치는대로 손을 대고 뒤에선 귀족 가문의 부인들이나 아가씨들하고도 마구 놀아났었는데, 지금은 그런때보단 백번 양호하구만! 뭐야 이 분위기는? 이런 재미도 없으면 게임 무슨 맛으로 하라고, 으이씨!'

그야 그건 한 나라 최고의 권력자인 왕일때의 이야기고, 지금은 지금 아니겠는가. 진석은 이대로 있다간 무슨 말이 더 나올지 몰라 두려워졌다. 그 얌전하던 아르데나가 자기 손을 잡고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것만 봐도 가만히 있다간 그냥 끝나진 않을것 같은 분위기. 분명 착한 아이였는데! 우리 아르데나는 이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제이스같은 여자와 같이 다니더니 물들었구나 흑흑! 안되겠다 싶어 화급히 창 밖을 가르키며 놀란듯 소리지르는 진석.

"어? 저기 밖에 저거 미리안 아니야?"

"뭐?!"

제이스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대신관님이? 이런곳에 무슨일로? 정말 어지간히 큰 일이 아니고서야 사원에서 나오는 경우는 드문데? 제이스가 굉장히 놀라하며 창밖을 내다보는 바람에 엘리야나 아르데나의 시선도 저절로 그쪽을 향했다.

'시클로오온!'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시클론을 걸고 바로 여관의 지하쪽을 향해 몸을 날리는 진석. 다다닷 하는 소리에 다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지만, 진석은 그 짧은 사이 벌써 사라져 있었다. 제이스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휴, 정말 바보같아. 이런데 대신관님이 올리가 없잖아? 정말이지... 알면서도 그냥 한 번 속아줬다."

"괜찮겠어요, 언니?"

걱정스러운듯 물어오는 아르데나. 제이스는 걱정 말라는듯 피식 웃었다.

"보나마나 지하에 잡아둔 공주를 보러갔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해. 어차피 말린다고 들을것도 아닐텐데."

저렇게 철없어 보여도 데오그라즈에선 자신들의 추격대를 막아보겠답시고 혼자 온 도시에 불을 지르고 다닌데다가, 대신관에게 가져다 주겠다며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도 가져오지 않았는가. 워낙 큰 자금력을 보유한 교단이다보니 진석이 훔쳐온 거액도 실상 그렇게 큰 의미는 없을테지만 그래도 노력만큼은 가상했다. 애당초 자신은 저 남자의 저런 제멋대로인 점도 마음에 들었던거 아니었던가. 남 눈치나 보며 빌빌거리는 것 보단 당당히 자기 하고 싶은걸 한다는점이 좋았다. 수호자들 중 비교적 맥과 가장 가깝게 지냈던것도 그런 이유였고. 게다가 제이스 자신도 어느정도 그런 타입의 성격이었으니까. 제이스는 엘리야를 향해 선뜻 오른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래 뭐. 아무튼 이렇게 됐으니... 잘 부탁해. 제이스 스콧필드야. 제시라고 불러도 좋아."

"아, 에. 네... 저, 저는 엘리야 딘킨스."

어색하게 손을 마주잡으며 인사를 받는 엘리야. 둘의 인사가 끝나자 아르데나도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아르데나... 헤이든 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까 처음 봤을땐 오빠 옆에 찰싹 달라붙어있는게 어째 맘에 안들어 떼어놓긴 했었지만, 이젠 상황도 들은데다 제이스의 태도도 그녀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었으니 어색하게 굴것 없었다. 엘리야는 머쓱하게 손을 들어 아하하 하고 인사를 받았다. 제이스는 엘리야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묵을거니까. 어때, 여자들끼리 술이라도 한 잔 할까?"

아뇨, 전 술은 안 좋아하는데. 라고 말할 분위기는 아니겠지? 엘리야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적응을 하려니... 이게 미행이나 뒷조사보다 더 어려운것 같았다.

항상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레오노르 공주였지만 지금의 꼬락서니는 꾀죄죄하기 그지없었다. 가지런히 빗질해 아름답게 찰랑이던 금발은 엉망으로 헝클어진데다가, 몸이나 옷 여기저기에도 먼지나 이물질이 잔뜩 묻어있었다. 그나마 옷도 늘 입던 화사한 드레스가 아닌 허름한 평상복이었다. 어둑한 창고 지하에 갇힌채 멍하니 벽을 바라보며 한 쪽 구석에 앉아있는 레오노르 공주.

'어떤 상황일까... 데오그라즈는. 그리고 윌포드는...'

자신이 괴물에 손에 붙잡혔던 급박한 순간, 윌포드는 침착하게 괴물을 상대로 협상을 걸었었다. 붉은머리의 제이스라는 여자가 내린 지시만 아니었다면 자신은 풀려났을수도 있으리라.

'윌포드... 맘에는 안들지만... 그래도...'

자신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똑똑히 봤다. 짐승도 은혜를 안다는데, 하물며 주인의 목숨을 구하려고 애쓰던 충성스런 가신. 그 모습을 보고도 계속 도적 출신이라며 깔아볼정도로 레오노르 공주는 철면피가 아니었다. 조금은 윌포드를 인정해줄 마음이 들었다.

'누구든 좋으니... 날 좀 구해줘.'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갑자기 덜그럭 하며 밖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는 레오노르 공주.

'설마? 정말로 누가 날 구하러?'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럴리가 없었다. 데오그라즈에선 빅 본의 멤버 일부만 제외하곤 그 누구도 공주의 행방을 파악하지 못한 상황. 추격도 실패한데다가, 레오노르 공주는 벌써 살해당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사망설마저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납치와 감금에 지친 레오노르 공주는 헛된 희망이라도 품으며 문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거기서 나타난것은 의외의 얼굴이었다.

"다, 당신은... 래스커?!"

진석이 일전 폭풍의 지팡이를 훔치러 왕궁에 잠입했을때 레오노르 공주에게 래스커의 이름을 가명으로 댔었다. 그 가명을 기억하고 있던 레오노르 공주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창고 안으로 들어오는 진석을 바라보았다.

"기억하고 있었네?"

진석은 씨익 웃으며 구석에 굴러다니던 앉은뱅이 의자를 가져와 그녀의 앞에 마주 앉았다. 레오노르 공주는 진석을 향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그 여자들은... 당신의 조력자가 맞았구나. 뭐 이제와서 그런건 상관없겠지. 댓가는 지불하겠어, 날 풀어줘."

"헤엥?"

뭔 헛소리냐는듯 딴청을 피우며 귀를 후비적 거리는 진석. 레오노르 공주는 짧게 한 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당신의 목적은 폭풍의 지팡이 아니었어? 손에 넣었잖아. 이제와서 날 데려가 어디다 쓰겠다는거야?"

레오노르 공주는 아버지인 해밀턴 공작에게 이 남자를 제거하고 폭풍의 지팡이를 되찾아올것을 지시받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납치당해 혼자로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상대를 제거하긴 커녕 무슨 짓을 당하더라도 반항조차 하기 힘든 입장이다. 납치를 했던 두 여자는 계속 자신에게 재갈을 물려놓은채로 끌고다녀 설득을 할 새도 없었지만 이 남자는 다르다. 어쨌든 한 번은 서로간에 거래를 나눴던 사이. 어떻게든 상대의 마음을 돌려봐야 했다. 우선은 풀려나는게 중요했다. 일단 자유를 되찾고 나서야 이 굴욕을 갚아주건 지팡이를 되찾건 뭐라도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진석은 피식 웃었다.

"쓸모야 많지. 잘만 하면 공작가에서 돈이라도 잔뜩 뜯어낼수도 있을테고. 혹은 그에 상응하는 뭔가로 교환할 수도 있겠지. 게다가 일국의 왕족이잖아? 그 신분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넘친다고. 저번에 한 번 속여넘겼다고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나도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냐."

"후우... 그래. 그럼 원하는건 돈이야? 얼마를 원하는데? 합당한 액수라면 당신이 아버님께 돈을 받을 수 있도록 서신이라도 써주겠어. 풀어만 준다고 약속하면 가능한 큰 액수를 받을 수 있도록 도울께."

돈으로 밀어붙여보려는 레오노르 공주. 분명 이 자를 움직이는 것은 돈일거라 생각했다. 폭풍의 지팡이 같은 신기를 개인이 가져서 무엇에 쓰겠는가? 뭐 그냥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나서 훔쳤다던가 하는것은 아닐터. 배후가 어떤 세력인지는 몰라도 큰 돈이라도 주며 의뢰를 했겠지. 그렇다면 역시 중점은 돈이다. 공작가의 자금력을 내세워 우선 자기 자신을 되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석의 태도는 여전히 시큰둥했다.

"돈이라. 돈 따윈 나도 지금 썩을만큼 많은데. 시시하구만. 뭐 다른건 없어?"

"큿..."

분했다. 차라리 대놓고 욕을하거나 비웃는게 낫지, 고작 그게 전부냐고 무시하는 태도는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칼자루는 상대의 손에 있었다. 돈이 썩을만큼 있다고 하는걸 봐선 이미 폭풍의 지팡이를 넘기고 보수를 넘겨 받은걸까? 한참 침묵을 지키던 레오노르 공주는 미간을 좁힌채 머뭇거리다 겨우 말문을 열었다.

"...그럼 당신이 원하는건 뭐야? 가능한 들어주겠어. 나도 이대로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계속 끌려다니고 싶진 않으니 거래를 하자."

"음~ 가능한 들어주겠다라. 역시 그쪽의 몸일까?"

"......"

하아. 역시 그렇게 나오는건가. 하긴. 당장 엎어놓고 발가벗겨 강간해도 꼼짝못할 판이다. 그럼에도 강간을 하지 않고 저런말을 꺼내온다는건, 그래도 아직 실낱같은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이야기겠지. 레오노르 공주는 진석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래. 정조도 중요하지만 목숨만은 못하지. 내가 당신과 한 번 동침한다면... 어때, 풀어주겠어? 잘 알고 있다시피 난 처녀거든. 공주의 첫 경험, 가져보고 싶지 않아?"

그야 물론 마다할 남자가 있겠냐만... 진석은 지금 여기서 레오노르 공주를 범할 생각은 없었다. 위에서 그 꼴을 보고 도망쳐온건데 이런 후미지고 어두운 창고방에서 공주를 덮칠 기분이 나겠는가? 그냥 얼굴이나 볼까 해서 내려와 본 참이다. 겸사겸사 곤란해하는 공주님을 좀 골려주기도 하고! 귀한 신분의 상대를 일방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몰아놓고 괴롭히는건 이전 플레이때도 많이 해오던 짓이었으니까. 진석은 속이 빤히 보이는 유혹을 걸어오는 레오노르 공주를 향해 팔짱을 끼곤 쿡쿡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당당한 공주님이구만. 맘에 들어. 자신의 처녀성을 거래의 댓가로 자유라... 하지만 이쪽이 너무 손해보는 이야기 같지 않아? 까놓고 말하자면 난 당장이라도 그쪽을 맘대로 범할 수 있는데."

그럼 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거야? 돈도 싫고 이쪽의 몸도 맘대로 할 수 있다고 하면, 자신은 더 이상 낼 수 있는 카드가 없다. 하지만 벌컥 화를 낼수도 없었다. 협상에선 먼저 화내는쪽이 지는거다. 더군다나 일방적으로 불리한 상황. 레오노르 공주는 가슴속에서 솟아오르는 울화를 진정시키며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럼 원하는 바를 말해봐. 횟수가 중요한거야? 어차피 몸을 내어준다면 한 번이고 열 번이고 상관없겠지. 맘대로 해. 반드시 풀어준다고 약속만 하면... 정해진 횟수만큼은 충실하게 그쪽의 밤시중을 들어줄테니까. 침대위에서긴 하지만 일국의 왕족을 당신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거야. 이만하면 제법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아?"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진석을 바라보는 레오노르 공주. 어차피 아무것도 잃지않고 벗어날 순 없다. 이대로 납치된채 질질 끌려다니는것 보단 눈 꾹 감고 다리 몇 번 벌려주더라도 자유를 얻는게 중요했다. 하지만 이런 레오노르 공주의 노력에도 진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거라면 말야, 공주가 내 아이를 가지면 돌려보내주지. 그건 어때?"

"...!"

상대를 유혹하기 위해 얼굴에 얇게 덧씌우고 있던 눈웃음을 유지하지 못하고 인상을 구기며 아랫입술을 깨무는 레오노르 공주. 눈 앞의 상대방은 자신의 반응을 보며 재밌다는듯 빙긋빙긋 웃고있었다. 이 남자... 애시당초 협상을 하러 온게 아니었어. 레오노르 공주는 그제야 자신이 상대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 뭐하러 여기 온거야. 날 놀리러 왔어?"

"정답. 역시 머리회전이 빠른 공주님이네."

"이익! 이 추잡하고 더러운 작자가! 날 가지고 놀아?!"

분하다는듯 발을 쾅 구르는 레오노르 공주. 눈 앞의 상대에게도 화가 났지만 자신의 어리석음에 더욱 화가 났다. 처음부터 저쪽이 모든 주도권을 다 가진 상황이었다. 저번에 한 번 거래를 했다고 해서 이번에도 협상을 받아들여줄리는 없었는데!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다보니... 그만 상대가 자신의 거래를 받아줄거라 생각했다. 이건 뭐 협상의지도 없는 상대방 앞에서 날 봐달라며 알몸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어준 꼴이나 다름없다. 아무 소득도 없이 놀림만 당했다. 너무 화가나고 억울해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진석은 하하하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고귀하고 아름다우신 공주님과의 담소 즐거웠어. 솔직히 제안이 너무 매력적이라 넘어갈뻔 했지만 그렇게 쉽게 결론이 나면 재미가 없잖아? 어차피 당분간은 함께 해야될 것 같으니 그렇게 미워하지 말라고. 이래 뵈도 공주님의 첫키스도 가져갔던 남자니까."

"나가."

"왜, 내가 나가고 혼자 남은 뒤엔 혀라도 깨물거야? 거 잘 몰라서 하는짓들인데 혀 깨문다고 사람 목숨 안 끊어진다? 괜히 혀가 잘려서 말 더듬이나 될 뿐. 혀가 반토막 나서 말 더듬는거 봤어? 그거 되게 웃기는데."

"꺼져! 내 눈 앞에서 사라져!"

"오오 무섭구만. 어째 우리 대화는 자꾸 이런식으로 끝나는데?"

진석은 실실 웃으며 알겠다는 듯 양손을 들어보이곤 선선히 창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문을 나서기 직전, 슬쩍 뒤를 보더니 한 마디 했다.

"그러고보니... 레오노르 공주. 윌포드라는 기사 알아?"

"뭐... 뭣? 윌포드? 당신! 윌포드와 만났었어?"

깜짝 놀라 고개를 드는 레오노르 공주. 진석은 공주가 보이는 의외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랍쇼? 그러고보니 그 기사, 실력이 괜찮은것 같더만... 혹시 공주와 가까운 사이였던건가?'

진석이 잠시 멈칫하자 레오노르 공주는 필사적인 태도로 진석을 향해 말을 걸어왔다.

"어디야, 어디서야? 언제 윌포드를 본거지?"

윌포드라면... 윌포드라면 저 남자와 상대 할 수 있을거다. 싫어하던 상대였지만 실력은 분명 확실한 기사였으니까. 완전무결의 기사 클립튼이 아버지의 오른팔이라면 그는 왼팔격에 해당하는 자. 가문을 대표하는 기사 중 한 명이며 매해 개최되는 해신제의 토너먼트에서도 매번 4강에 들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만한 기사라면 반드시 이 남자를 쓰러트려 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진석은 코웃음을 치며 창고를 빠져나갔다.

"다음번을 위한 이야깃거리로 남겨두지. 잘 자라고."

쿠웅. 무거운 창고문이 닫히고 진석은 레오노르 공주를 남겨둔채 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레오노르 공주는 안타까운 기분으로 한참 그 문을 바라보다... 다시 구석에 움츠린채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납치극은 그리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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