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62화 (62/155)

< --   - 5.   -- >         * 62화 *

지젤 르마쿠르, 아네트 르마쿠르. 이 델 그로도 자매는 페레나시엔 정착한지 3년이 조금 안되었다고 했다. 대부분의 델 그로도가 그렇듯 대륙 북부 출신이며 언니인 지젤쪽은 대장장이였던 아버지에게 어려서부터 무구제작의 기술을 전수받았고, 동생쪽은 상단의 호위로 한참 용병일을 하다보니 어깨너머로 자연히 상매의 기술과 물건을 보는 안목을 익혔다고 했다. 그리고 자매가 함께 고향을 떠나 세상을 돌며 한참 이런일 저런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페레나시에 정착해 가게를 열었다고. 지젤쪽은 자기 기술을 살려 가게 지하의 작업장에서 물건을 만들었고, 아네트는 용병 시절 익힌 장사꾼의 요령과 안목을 살려 언니가 만든 무구 이외에도 질이 좋고 싼 무구들을 매입, 판매해가며 가게를 운영했다. 하지만 이 자매에겐 큰 문제가 있었는데, 둘 다 지나칠 정도로 미남을 밝힌다는 것이었다. 별 생각 없이 매력을 높이 찍어뒀던게 이런데서 독이 될 줄이야!

"아무리 그래도 초면에 사람을 무작정 쓰러트려놓고 덮치다니."

가게 지하엔 작업장 이외에도 그녀들이 거주하는 생활공간이 있었는데 당연히 욕실도 딸려있었다. 단지 좀 좁다는게 문제랄까? 진석은 모락모락 증기가 올라오는 협소한 욕조안에서 마치 샌드위치 내용물처럼 꽉 끼어있었다. 그의 양쪽엔 지젤과 아네트가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정말 옴짝달싹 하기도 힘들정도로 욕조안에 빈틈없이 들어가있는 세 사람. 이래서야 욕조에 들어온건지 콩나물 시루인지 모를 판이다. 지젤은 진석이 불만을 토로하자 이쪽으로 가만히 몸을 밀착시키며 말했다.

"러셀이라고 했었지? 그런것치곤 그쪽도 만만치 않던데. 우리 둘을 한꺼번에 쓰러트릴 수 있는 남자는 처음이야."

반대쪽의 아네트도 진석의 머리를 잡아 자신의 가슴쪽으로 끌어안으며 말했다.

"응- 정말 고마워, 러셀. 덕분에 앞으로 세시간 정도는 섹스 생각 없이 살아갈 기력과 희망을 얻었어! 그런 의미에서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여기서 우리랑 같이 살지 않을래? 언니랑 내가 평생 먹여 살려줄테니까."

"...아니. 그러니까 나는 애시당초 그냥 단검 하나 사러 온 손님이라고. 나로서는 지금 이거 길가다 날벼락 맞은 꼴이거든?"

"그래도 날벼락치곤 제법 좋았지? 후훗, 신음소리가 꽤 귀엽던데."

검지손가락을 들어 진석의 볼을 꾹꾹 누르는 지젤. 아니 뭐 솔직히 기분 좋았다는건 인정할 수 밖에 없지만... 그 점이 어째 더 열받는다! 크윽! 한 숨을 내쉬며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는 진석.

"적당히 하자고. 나도 일행이 있으니 슬슬 돌아가 봐야돼."

"벌써 돌아가려고? 며칠쯤 묵다가도 상관없는데... 그보다 무기는? 기왕 왔으니 한 번 둘러보고 가지 않을래?"

"그래- 이래보여도 영업은 확실히 하고 있어서, 꽤 좋은 물건들을 충실히 갖춰놨거든. 뭔가 사주면 아까의 답례겸 잘 팔리지도 않는 언니의 무기 같은건 덤으로 팍팍 얹어줄테니까 구경이라도 해봐."

타월을 집어 몸의 물기를 닦아내는 진석에게, 욕조에 턱을 괸채로 무기를 보고 가라는 권유를 하는 두 자매. 그런데 지젤쪽이 아네트의 발언에 눈을 가늘게 뜨며 흘겨보았다.

"그런데... 잘 안팔리다니? 너 이 가게 얻을때 누구 돈을 썼다고 생각해?"

"누구 돈이라니? 반반씩 냈잖아. 이제와서 그 얘길 또 꺼내는거야?"

"반반같은 소리하네. 9대 1이었어 요것아. 네가 그때 아라파의 하디카에서 신나게 돈을 탕진한 바람에! 그것만 아니었으면 페레나가 아니라 데오그라즈에 가게를 얻을 수 있었는데! 매일 저녁 일을 마치고 해변가에 놀러나가 남자들을 꼬셔보겠다는 내 소박한 꿈이 물거품이 됐다고!"

"아, 아야야얏! 귀 잡아 당기지마! 그러는 언니도 하디카에 몇 번이나 들락거렸으면서!"

"너처럼 뒷일도 생각않고 아예 처박혀 사는 정도로 놀아나진 않았다!"

갑자기 과거의 일을 언급하며 자기들끼리 투닥거리는 자매. 아라파라. 대륙 서부의 사막지대에 자리잡은 나라다. 이름부터 대놓고 아랍쪽의 느낌이 나는 나라랄까? 신정일치의 국가지만 뭐 일반적인 왕정제 국가랑 비교해 크게 다를건 없었다. 특징이라면 인도의 카스트 제도 마냥 신분별로 계급제가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는 것 정도. 그리고 하디카는...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하렘을 말했다. 아라파 특유의 대 환락가랄까. 남자고 여자고 유사인종이고 수인종이고, 돈만 있으면 누구라도 지고의 쾌락을 얻을 수 있었다. 기껏 건물 한 채에서 영업하는 소박한 창관하고는 규모가 달랐다. 분명 이전 플레이의 기억으로는 도시의 한 구역 전체가 다 하디카였었으니까. 하디카에서 노는걸 목적으로 찾아오는 여행자들도 적지 않았다. 게임을 시작할때 국가들의 위치는 분명 랜덤으로 설정했는데, 어째 아라파의 위치만큼은 기본 설정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무튼 이 못말리는 변태 자매는 과거 거기서 돈을 진탕 낭비했었던 모양이다.

'한심하구만. 뭐 그 한심한 상대들에게 붙잡혀 쥐어짜인 나도 나지만.'

이럭저럭 씻는걸 마친뒤 진석은 르마르쿠 자매와 함께 다시 가게로 올라갔다. 당연히 1층에서 물건을 보여줄거라 생각했는데, 그녀들은 진석을 2층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의아해하는 진석에게 아네트가 가볍게 윙크를 하며 대답해주었다.

"헤헤- 1층은 그냥 평범한 물건들이야. 다른데서 매입해서 보통 뜨내기 손님들 장사로 하는 상품들. 좋은건 2층에 있어."

"굳이 층까지 나눠둘 필요 있나? 아무 손님이건 팔기만 하면 되잖아."

진석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로 절레절레 젓는 지젤.

"좋은 무기는 그에 걸맞는 실력을 가진 사람에게 팔아야지. 물론 물건을 더 많이 팔아서 돈을 모으고 싶다는 마음이 없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만큼은 어째 양보 할 수 없달까."

'나름대로 장인의 고집같은건가?'

하지만 지젤의 말에 혀를 베 내미는 아네트.

"그런 도움 하나 안되는 이상한 개똥철학때문에 3년째 페레나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거잖아- 적당히 팍팍 팔아치우면 좋을텐데. 진열대에 쌓여있으면 아무리 좋은 무기도 그냥 악성 재고라고."

"요게 진짜 아까부터. 아버지가 하던 말도 까먹었어?"

"아야얏! 귀, 귀는 그만."

2층은 1층에 비해 좀 휑했는데, 한쪽엔 큼직한 나무상자들이 열댓개쯤 차곡차곡 쌓여있었고 그 맞은편의 진열대엔 여러가지 종류의 무구가 품목별로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수량은 많지 않아도 1층에 진열된 상품들보다 질은 확실히 나아보였다.

"호오, 이거 제법..."

바로 진열대로 다가가 이것저것 둘러보기 시작하는 진석. 그녀들이 일러준대로 2층의 상품들은 꽤 괜찮은것들이 있었다. 정신없이 한참 무기나 방어구를 구경하는 진석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거는 지젤.

"말했다시피... 원래대로라면 실력도 모르는 아무에게나 팔진 않는 아이들이지만, 그쪽이라면 특별히 얼마든지 넘겨줄께. 천천히 골라봐."

실력도 모르는 아무에게나 팔지 않는다라... 진석은 지젤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 실력 확인이라는건 어떻게 해? 싸우는 모습이라도 구경해보고 파는건가?"

"뭐 비슷해. 아네트나 나와 대련해보는 것. 대련이라고 해도 대단한건 아니야. 가볍게 서너합 정도 겨뤄보는 정도? 뭐 아무에게나 팔지 않는다고 말하긴 했지만 어쨌든 이것도 장사니까, 상대가 어지간한 실력이라면 판매하고 있어. 이따금 우리랑 대련하는걸 뭔가의 여흥쯤으로 생각해 재미삼아 놀러오는 바보들도 있는데 그런 녀석들은 바로 엉덩이를 걷어차서 쫓아내주지."

"히히- 이래보여도 언니나 나는 꽤 강하거든. 호기심을 느끼고 오는 손님들 중 미남이 있으면 아까처럼 아랫도리로 대신 확인해주기도 하고."

"허어... 그럼 나는 실력이 아니라 거시기가 맘에 들었으니 특별히 대접해주는거라고? 이건 또 불쾌한 소린데."

진석의 발언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묘한 표정을 짓는 르마르쿠 자매. 잠시 말없이 있나 싶더니만 동시에 파하핫 웃음을 터트리며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댔다.

"아하하하! 지금 농담하는 거야? 분명 하반신은 절륜하지만 그닥 도드라지는 근육도 없는 몸인걸."

"헤헤헤- 기분 나빴던거야? 응? 남자의 자존심 뭐 그런거? 응?"

아니 이것들이. 보자보자 하니 사람을 밑도 끝도 없이 물로 보는 모양이다. 물론 지젤의 말대로 현실의 자신과 비슷하게 만든 몸이라 그닥 근육이 울룩불룩하거나 하지 않은 평범한 몸뚱아리다만... 높은 스테이터스와 그간의 플레이 경험을 가진 숙련된 플레이어다. 타고난 전사인 델 그로도라곤 해도, 이제와서 고작 이런 변태 자매 따위에게 질까 보냐? 진석은 진열대 앞에서 떠나 옆쪽의 빈 공간으로 자리를 옮겨, 르마르쿠 자매를 향해 도발적으로 손을 까닥거려 보였다.

"아까 놀아준걸로 딱히 특별 대접 받고 싶은 생각이 있는건 아니니까 어디 둘 중 아무나 덤벼봐."

"흐흥- 정말 삐졌나 보네? 좋아. 내가 상대해주지."

가소롭다는듯 코웃음을 치며 척척 다가와 진석의 앞에 마주서는 아네트. 진석은 가볍게 목과 손목을 스트레칭하며 말했다.

"아 참. 그쪽은 무기 쓰고 싶으면 얼마든지 써도 좋아."

진석의 호기로운 발언에 흥미롭다는 듯 팔짱을 끼며 한쪽에 등을 기대고 서는 지젤. 눈을 가늘게 뜨며 아네트를 향해 말했다.

"어머나, 제법 남자다운데. 아네트. 장난치지말고 제대로 해봐."

"알았어 언니. 그리고 러셀? 신경써준건 고마운데 난 딱히 무기가 필요없어. 왜냐하면..."

지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아네트도 손을 우득우득 풀더니 무게중심을 낮추며 천천히 싸울 태세를 취했다. 진석과 아네트가 서로 마주보고 지젤이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잠깐의 침묵이 감도는 2층 안. 먼저 움직인것은 아네트였다.

"내 전문은 격투기거든-?"

타앗! 아네트는 땅에 스칠듯 자세를 한껏 낮춘채 진석쪽을 향해 빠르게 대쉬해왔다. 정면으로 달려드나 싶더니 잽싸게 옆으로 빠지며 롤링 턴 백으로 배후를 잡곤 허리를 잡으려 들었다.

'그러고보니 아까 1층에서도 느닷없는 태클로 날 테이크다운 시켰었지? 방금 무게중심을 낮추는 자세만으로도 그라운딩을 시도할건 대충 알아봤다!'

뒤에서 달려드는 아네트의 안면을 노리고 여유있게 뒷차기로 카운터를 시도하는 진석. 하지만 아네트는 되려 발차기를 가해온 진석의 발목을 덥썩 잡았다. 그리곤 무릎 관절 안쪽을 강타하고 동시에 발목을 바깥쪽으로 비틀며 잡아당겨, 무게중심을 무너트려 바닥에 쓰러지게 만드려는게 아닌가?

"헷- 드래곤 스크류... 아니, 백 드래곤 스크류라고 해야되나? 아니면 리버설?"

뭔진 모르겠지만 그 와중에 혼자 여유넘치게 기술의 해설까지 하고 있다. 아네트의 기술에 옆으로 휘청 몸이 기울어 넘어지려는 진석.

'어, 얼씨구?'

남자나 밝히는 호색한 자매라 만만할거라 생각하고 볼기짝이나 두드려줄까 한건데... 의외로 만만치가 않다? 하긴 생각해보니 예전 래스커한테도 접근전에서 한 수 밀렸던 기억이 있다. 어째 자신은 격투가와는 상성이 안 맞는걸까? 물론 카야는 깔끔히 박살내줬었지만, 그녀는 래스커와는 워낙 기량차가 나다보니 상대하기 쉬웠던거고. 에이, 아무튼 이대로 깨지면 진짜 개망신이다!

'시클론!'

진석은 시클론을 걸고 순식간에 반응속도가 빨라지는것을 느끼며 넘어질뻔한 자세를 간신히 추스르곤 아예 몸을 뒤쪽으로 날렸다. 예상치 못하게 진석이 등부터 밀고 들어오자 순순히 다리를 놓고 물러나는 아네트. 그녀는 이번엔 잽싸게 진석의 측면으로 이동하더니 또 다시 하체를 노리고 태클을 걸어왔다.

"무슨 여자가 자꾸 남자를 넘어트리려고 들어?"

"흥! 원래 말이랑 남자는 위에 올라타주는거야!"

콰악! 아네트가 진석의 하체를 붙잡고 중심을 무너트리며 테이크다운을 시도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자세를 바싹 낮추며 힘으로 버티는 진석.

'아무리 그래봐야 내 힘은 못 당할걸? 상대는 기술로 덤벼오는데 힘으로 때려막는건 어째 쪽팔리긴 하지만... 이기면 장땡이지! 으라쌰!'

진석은 자신의 저항으로 멈춘 아네트의 허리를 위에서 감싸안고, 번쩍 들어올렸다. 아네트도 진석이 자신의 허리를 잡으려 들자 저항하며 피하려고 했지만 46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선 장사 없었다. 결국 아네트는 다리가 위로, 머리가 아래쪽으로 향한 거꾸로의 자세로 붙들려버렸다. 치마가 완전히 뒤집혀 팬티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호오, 이번엔 핑크색 팬티인가?

"어때. 이대로 바닥에 머리를 절구공이처럼 내리찍어줄까?"

여유롭게 아네트의 팬티를 감상하며 시시덕거리는 진석. 아네트는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아... 그, 저기... 항복."

"어휴. 아네트 저 바보 저거."

이마를 감싸쥐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지젤. 그녀는 한 쪽 구석에서 자기 키보다 머리 하나쯤 더 긴 목봉을 집어들곤, 아네트를 막 바닥에 내려주고 있는 진석쪽으로 다가왔다.

"비켜 멍청아. 아까 아래에서 그렇게 알몸으로 살을 맞대고도 눈치 못챘어? 이쪽도 보기보다 힘은 있다고. 무조건 태클만 걸어대니 결국 그렇게 되지. 진지하게 하라니까 장기인 타격은 어디다 팔아먹고 그렇게 한심하게 지는거야?"

"그, 그치만... 헤헤. 오랜만의 미남이니까 이틈에 한 번이라도 더 품에 안아볼까 해서."

따악! 지젤은 아네트의 뒤통수를 때리곤 엉덩이를 걷어차 옆으로 쫓아냈다. 히잉 우는 소리를 하며 밀려나는 아네트. 지젤은 머리위로 봉을 붕붕붕 돌려보이며 진석의 앞에 마주섰다.

"아네트는 장난치느라 얼렁뚱땅 쉽게 이겼지만 나는 만만치 않을걸? 어때, 한 번 더 할 수 있겠지?"

"뭐 좋아. 나도 이번엔 진짜로 간다."

"핫, 선수필승!"

지젤은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붕붕 돌리던 봉을 잡아서 앞으로 확확 내찔러왔다. 정중선을 노리고 연속적으로 찔러오는 목봉! 하지만 시클론을 풀지 않은 진석에겐 여유로운 공격이었다.

'시클론을 안 썼으면 좀 곤란했을지도 모를만큼 빠른편이긴 하다만... 호락호락하게 맞아줄수야 없지. 오에스테!'

진석은 오에스테를 써서 정면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파고 들어가 원무를 추듯 목봉의 측면을 노리고 주먹을 휘둘렀다. 먼저 왼주먹. 빠르게 끊어 친 타격에 빠작하고 두 뼘 길이가 부서져 나가는 목봉. 다음은 오른주먹. 콰작! 이번엔 한 세뼘쯤 끊어져 나갔다. 단 두 번의 주먹질로 반토막 나버린 목봉. 선공을 해왔던 지젤은 진석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봉을 후려쳐 끊어버리자 벙찐 표정을 지었다.

"어... 엇?!"

"어는 무슨 어야? 라파가!"

파앗! 진석은 라파가의 대쉬로 지젤을 스쳐지나가며 그녀의 손등을 세게 내리쳐, 쥐고 있던 반토막짜리 목봉을 떨구게 만들었다. 지젤의 손에서 떨어져 덱데구르 바닥을 구르는 목봉. 바람같이 지젤의 뒤로 돌아간 진석은 여유로운 자세로 그녀의 뒷통수에 가벼운 촙을 먹였다. 머리를 툭 치는 감촉에 깜짝 놀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는 지젤.

"아니. 바, 방금 그거 뭐야? 순간 눈 앞에서 사라졌었어. 마법이야?"

"마법은 무슨.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서 편식 안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재주야."

"하... 하하. 되게 재미없는 농담이지만 정말 놀랬어. 솔직히 만만하게 봤었는데... 역시 인간은 우리 델 그로도랑은 달리 겉모습 만으로는 알 수 없구나. 함부로 판단해서 미안."

가볍게 고개를 숙여오며 사과하는 지젤. 아네트도 슬쩍 다가오더니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헤- 대단하네. 나도 순간 모습을 놓쳤었어. 실력을 감추고 있었던거야? 음흉한걸."

감추고 나발이고 지들이 멋대로 판단해놓고는 음흉은 무슨. 지젤은 잠시 음 하고 생각하더니 진석의 손목을 붙잡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 왜?"

"아까 욕실에서 분명 단검을 사러왔다고 했었지? 따라와봐. 솔직히 말하자면 2층에 있는것들도 사실 그냥 적당적당한 물건일 뿐이니까. 우리 물건은 실력이 안되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안 판다는 등, 가끔 적당히 대련같은거 한 번씩 해주고 이런식으로 장사하면 대단한 물건인줄 알고 비싸게 사가는 바보가 제법 많거든. 하지만 당신 실력은 진짜니까 우리 가게에서 제일 좋은 단검을 넘겨줄께."

진석과 지젤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하자 그 뒤를 쪼르르 따라오는 아네트.

"어라, 언니. 작업장에 있는 물건 주려구? 진짜?"

"응. 이만한 실력이라면 충분해. 이게 실전이었다면 너랑 내가 함께 덤볐어도 순식간에 당했을걸? 장인으로서 훌륭한 전사에겐 그에 걸맞는 물건을 내어줘야지."

'...오잉?'

뭔진 모르겠다만 지젤은 진석의 실력이 대단하다고 납득하고 인정해버린 모양이었다. 사람 얕잡아 보는게 맘에 안들어 가볍게 몸이나 풀어볼까 했던건데... 어째 일이 잘됐다. 좋은 물건 준다는데 마다할 필요있을까? 진석은 그녀들을 따라 다시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 한 켠엔 생활공간과는 별도로 대장 작업을 위한 화로와 풀무, 모루 따위가 준비된 공간이 있었는데, 지젤은 익숙하게 작업장으로 들어가 안쪽의 커다란 수납장을 뒤지더니 곧 붉게 칠해진 상자를 하나 꺼내어 가져왔다.

"자, 마음에 들진 모르겠지만 내가 공을 들여 만든 무기 중 하나야. 나름대로 회심의 작품 중 하나랄까."

붉은 상자를 받아들고 뚜껑을 열어보는 진석. 안에는 기어가는 뱀의 몸통처럼 구불구불한 날을 한 단검이 들어있었다. 흑철을 사용한건지 날은 검었는데, 손잡이의 곡선도 유려하고 실용적인 미가 넘치는데다가 각 요소의 마감 상태도 굉장히 뛰어났다. 단검을 손에 쥐고 들어보는 진석. 날이 제법 길고 두꺼워 무겁지 않을까 했는데 생각보단 가벼웠다.

"이건..."

"크리스야. 란비언이라고 이름 붙였어. 날이 파도치는것 같은게 참 예쁘지?"

자신이 공들여 만든 무기를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지젤. 진석은 메뉴를 열어 무기의 정확한 수치를 살펴보았다.

- 크리스, 란비언

공격력 : 34+(8)

설명 : 말레이 민족의 고유한 단검. 물결치는 듯한 날이 특징이다. 더할 나위 없이 튼튼해 보인다. 완성도가 높아보인다. 날카롭게 벼려져 있다. 한 대상에게 공격을 가할시 타격횟수에 비례해 추가피해를 입힌다.

특징 : [내구극한], [완성도 높음], [날카로움], [추가피해]

'이야 이거... 생각외로 굉장한데? 랭크로 치자면 S까진 아니더라도 특 A급이라곤 할 수 있겠다. 여기에 스테이터스 보정이나 뭔가 특수기능 같은것만 하나 더 붙어있었더라면 정말 완벽했을텐데. 아니지, 아니야. 해안동굴에서 무기를 바닷속에 떨궈버린 이후엔 공격력 10을 간신히 왔다갔다 하는 싸구려 단검이나 쭉 써온판에. 이런 수준의 무기면 충분히 감지덕지지, 암.'

진석이 말없이 크리스 란비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자 지젤은 누가 물어본것도 아닌데 주절주절 멋대로 무기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날이 검어서 그냥 통짜 흑철로 만든거라고 생각할수도 있을텐데 천만의 말씀. 마법 금속 듀나라민을 뼈대로 삼아 탄소강을 중간 내부재로, 그리고 운철과 흑철 합금을 맨 바깥에 덧씌운 삼중 구조야. 어지간해선 부러지기나 날이 빠지긴 커녕 10년쯤 쭉 써도 숫돌을 댈 일도 없을걸? 그리고 검신의 비드만스태튼 무늬 보여? 멋지지?"

대장기술엔 문외한인 진석이라 뭔소린진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검고 구불구불한 칼날 위로 격자무늬 비슷한 비드뭐시기 라는 무늬가 쭉 이어져 있는것이 과연. 꽤나 마음에 들었다. 진석은 란비언을 들고 손목을 가볍게 돌리며 무기의 무게중심이나 그립감 등을 가늠해보았다.

"...정말 손에 딱 맞는데? 좋은 무기야. 잘 만들었네."

"그렇지? 후후, 역시 훌륭한 전사는 무기를 잡아보기만 해도 그 수준을 알아보는 법이라니까!"

그때 뒤에서 팔짱을 끼고 둘을 지켜보던 아네트가 끼어들며 말했다.

"그래서 다 좋은데... 지젤 언니, 그거 얼마에 팔 생각이야?"

아네트의 말에 앗차 하며 한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막는 지젤.

"핫. ...생각 안해봤는데."

"이잇, 아무리 그래도 공짜로 줄께- 같은건 용납 못해. 모처럼 원 없이 즐기게 해 준 상대니까 서비스를 팍팍 적용한다 치더라도 최소한 재료비는 건져야지? 게다가 그거 만들때 삼중 구조 연습해본다고 이래저래 제법 많이 말아먹지 않았었어?"

"그렇긴한데... 끄응."

보아하니 지젤은 가격산정이 고심스러운 듯 했다. 대장장이가 본업이라 셈에는 약한 걸까? 하긴 그러니 동생쪽이 가게 운영을 맡고 있는 거겠지. 진석은 말가죽으로 된 칼집에 란비언을 꽂고 품에 챙겨넣으며 말했다.

"어차피 사는건 나니까, 내가 적당한 가격을 메겨줘도 될까?"

"흐응- 설마 그래놓고 동화 한 닢 놓고 가버린다거나 하려고? 언니 무기가 워낙 변변찮긴 하지만 그건 너무 심하잖아."

진석의 발언에 되려 불신의 눈을 하며 이쪽을 바라보는 아네트. 하지만 진석은 피식 웃었다.

"일단 1층으로 올라가자. 아까 내 돈가방을 위에 두고 왔으니."

르마쿠르 자매는 어째 탐탁치 않아하면서 진석과 함께 위로 올라갔다. 1층의 바닥엔 아직 치우지 않은 정사의 흔적이 잔뜩 남아있었다. 주로 말라붙은 진석의 정액이었다.

"앗. 그러고보니 이거 아직 안 치웠지. 흐응- 치우기 귀찮은데 기왕 더렵혀진거 좀 더 어지럽혀 보지않을래? 더 잔뜩 더럽힌 다음에 청소하는게 보람도 있을것 같고."

헤실거리며 진석에게 다가오는 아네트. 진석은 촙으로 아네트를 뒤로 물린 뒤 가죽 가방에서 백골드가 든 돈자루를 하나 꺼내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궁금하다는 듯 다가와서 자루의 입구에 손을 대는 지젤.

"제법 묵직해보이는데... 그래서 이거 얼마?"

"확인해 봐."

지젤이 지체없이 돈자루를 열자, 반짝반짝 빛나는 금화더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깜짝 놀라는 지젤과 아네트. 지젤은 진석을 향해 말했다.

"뭐야 이거. 잘못 준거 아니야? 얼핏봐도... 거의 백골드쯤 되어보이는데."

"그냥 받아둬. 이 크리스, 꽤 마음에 들었거든."

게다가 아까 재미본것도 뭐 나름 좋은 경험이었으니 겸사겸사.

'그리고 어차피 돈은 많은걸. 겨우 백골드쯤이야. 그리고 호기롭게 가격을 메겨준다고 했는데 이제와서 가방에서 주머니를 꺼내 한닢 한닢 세어 주자니... 어째 폼이 안 살잖아. 처음부터 더 소액으로 나눠서 가져왔다면 모를까, 백골드씩 나뉜 주머니를 그대로 들고왔으니.'

그런 진석의 호탕한 태도에 옆에 있던 아네트는 갑자기 우는 시늉을 했다.

"흑흑-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인간 남자가 다 있다니. 한 30-40 골드쯤 불러 뜯어먹을까 궁리하던 내가 나빴어! 알아서 백골드나 내놓을 줄이야. 부자야? 부자인거야? 하체 튼튼하지 돈도 많지, 이제 마음만 넘어오면 완벽할텐데! 저기. 역시 같이 살자!"

와락 진석을 끌어안으려 드는 아네트. 하지만 지젤이 뒤에서 아네트의 포니테일을 잡아당겨 진석에게 다가가는것을 막았다.

"아야야야! 왜에!"

"그만해 아네트. 정도가 있어야지."

이제와서 정도를 운운하기엔 좀 심하게 늦지 않았나? 진석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젤은 자신의 무기에 큰 금액을 메겨준 진석이 새삼 달리 보인 모양이었다. 살짝 목례를 해오는 지젤.

"그... 아무튼 고마워. 내 무기 잘 써줬으면 좋겠는걸."

"오래오래 잘 써주지. 자 그럼 이만 가볼테니까 잘들 있어."

진석이 가방을 챙겨 가게를 나서자 뒤에서 아네트가 버둥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아앙- 가지마! 급할거 없잖아, 저녁이라도 먹고 하루 자고 가! 아니면 적어도 마지막 작별의 키스라도! 놔줘 언니! 진짜 가버리잖아아-!"

진석은 뒤도 안돌아보고 가게 문을 닫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분명 아침나절에 나왔었는데 이미 해가 제법 기울어 있었다. 메뉴를 열어 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오후 4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저기서 단검 하나 사면서 몇 시간을 붙잡혀 있었던거야? 뭔 개미지옥같은 가게구만."

크리스 란비언을 건진건 좋았지만 두 번 다시 오고 싶지 않은 가게였다. 두 자매를 상대로 재미를 본건 분명 기분이 좋긴 좋았었지만, 진짜 너무 힘들었으니까. 섹스가 아니라 흡사 중노동 같았다. 차라리 나가서 땡볕아래 막노동을 뛰는게 더 편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으니.

'이래저래 지쳤어, 으으. 일단 여관에 돌아가서 좀 쉬자.'

진석은 터덜거리며 여관으로 돌아갔다. 어쩐지 아랫도리가 유난히 허하고 텅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드는게... 앞으로 며칠은 제이스나 엘리야에게 손을 안 대도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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