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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63화 (63/155)

< --   - 5.   -- >         * 63화 *

하지만 여관에 돌아가니 그건 또 그거대로 난리였다. 어째 여관 1층에서 아르데나, 엘리야를 대동한채 기다리던 제이스가 대체 이렇게 오래 혼자서 뭘 하다 온거냐고 떽떽거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진석에게 다가와 킁킁 체취를 맡더니 어디서 또 여자랑 뒹굴다 온거 아니냐는 말도 하는데, 넌 사람을 뭘로 보는거냐고 얼버무리고 쉴거라며 방으로 돌아와 버렸다. 돈이 든 가죽가방과 칼집에 들어간 란비언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침대위로 몸을 던지는 진석.

'네가 무슨 탐지견이냐? 씻고 왔는데도 어떻게 알아채는거야 젠장. 눈치도 빠르다. 이거 무슨 남편 불륜 의심하는 마누라도 아니고.'

이번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당한거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해줄수도 없었다. 말해주면 보나마나 난리가 나겠지. 제이스 성격상 당장 그 가게 박살내겠다고 처들어갈게 눈에 선하다. 아르데나도 멋모르고 제이스 뒤를 졸졸 따라가겠지? 넷이 뒤엉켜 머리끄댕이 붙잡고 싸우면 거 볼만하겠다.

'아참. 그리고 두 자루를 샀어야 되는데. 란비언 성능에 정신이 팔려 진짜 그냥 이거 하나만 덜렁 사가지고 와버렸네. 방어구도 못봤고.'

바일리 델 비엔토는 쌍단검술. 두 자루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 란비언이 좋은 무기이긴 하지만 짝이 될 한 자루를 더 사왔어야 하는데. 어쩌다보니 좋답시고 이거 하나만 덜렁 사서 와버렸다. 그렇다고 다시 르마쿠르 자매의 가게에 들를 용기는 없었다.

'거길 또 갔다가 무슨 일을 당하라고? 그나마 언니 지젤쪽은 눈꼽만큼의 변별력이라도 있었지만, 동생쪽인 아네트는 눈빛이 진심이었어. 다시 갔다간 진짜 안 놔줄것 같아.'

그럼 어쩔까나. 메디니아로 떠나기 전에 마저 장비를 갖추고 싶은데.

'아르데나를 검으로 변신시켜 무기로 쓸 수도 있겠지만 딱히 무기를 입수하지 못하는 상황도 아닌데 당장 그럴 필요는 없고. 그냥 또 그 부녀가 운영하는 무기점이나 가볼까?'

원래 손님의 입장에선 한 가게에 두 번만 가도 무의식중에 자신을 이 가게 단골이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하던데. 그래서 처음 온 손님보단 두번째 온 손님이 더 중요하다나? 뭐 그런 내용을 일전 재미삼아 잠깐 본 가게 창업서 같은데서 우연히 읽은 기억이 있다. 두번째 방문에서도 좋은 인상을 받으면 진짜 단골로 자리잡는다나 어쩐다나.

'뭐 이번에 떠나면 또 다시 페레나시에 올 일이 있을지, 그 가게엔 다시 들를 일이 생길지 어떨지도 모르겠다만... 으으 귀찮아. 그래도 할 수 없지. 한 번 더 나갔다 올까나.'

진석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곤 주머니에 적당히 돈을 챙겨 방을 나섰다. 1층에 아직 제이스와 아르데나, 엘리야가 있겠거니 했는데 그녀들은 그새 또 어딜 간건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어디갔어? 그러고보니 어젠 엘리야한테 그렇게 틱틱대더만. 같이 술자리 한 번 하고 친해지기라도 했나보지? 요것들 아주 신났구만. 에이 뭐 맘대로 해라.'

방금 들어온 여관에서 다시 나가는 진석. 혼자서 털레털레 시장쪽으로 향했다.

"오늘은 혼자오셨슴다?"

시장쪽의 눈에 익은 무기점. 길가는 사람들을 향해 호객을 하다 금세 진석을 알아 본 점원 소녀는 웃는낯으로 대번에 아는체를 했다.

"뭐어... 아무튼 이번에도 단검을 보러 왔는데."

"예입. 저번에 사가셨던 흑철단검과 똑같은 물건이 두 자루 들어와 있는데 그건 어떠신지? 오늘은 그게 제일 괜찮습니다만."

뭐랄까, 권해오는 태도가 마치 장보러 온 주부에게 오늘은 이 생선이 물이 좋다고 어필하는 능숙한 장사꾼 말투같다.

"그럼 그걸로."

점원 소녀의 안내를 받아 가게 안으로 들어간 진석은 그냥 소녀가 권하는 물건을 사기로 했다. 일전 백의 런들 대거, 포님을 살때 같이 샀던 흑철단검과 동일한 성능의 무기였다. 내구높음과 날카로움 특성이 붙어있어 그냥저냥 쓸만한 무기.

'하나는 내가 쓰고 하나는 아르데나 주면 되겠지? 언제 똑 부러질지 모르는 본 나이프니까.'

흑철단검 두 자루와 더불어 투척용으로 쓸 싸구려 단검도 몇 구입한 진석은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며 소녀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 가죽제품 취급하는데는 없을까?"

"음~ 저희도 가죽 방어구라면 취급합니다만... 어떤 종류의 물건이 필요하신검까?"

"벨트. 그냥 벨트가 아니라 전투용으로 쓸 벨트. 전에 쓰던건 어쩌다보니 잃어버려서. 검집이나 주머니 같은걸 좀 마음대로 달았으면 싶거든."

"아, 그거라면 딱 괜찮은게 있는데 한 번 보시겠슴까?"

당장이라도 안에서 물건을 꺼내주겠다는 듯 자세를 취하는 점원 소녀. 언제봐도 참 열심이다. 진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안쪽으로 들어가 금세 상자를 하나 들고 나왔다. 직접 상자를 열고 안을 보여주었는데, 검은 들소 가죽으로 만들어진 튼튼해보이는 무광 벨트가 들어있다. 벨트 곳곳에 일정한 간격으로 고리가 뚫려있는게 이전에 쓰던 전투용벨트와 거의 비슷한 물건이었다. 상자 안엔 손바닥만한 파우치도 두 개 딸려있었는데, 허리 양 옆부분에 장착해두고 물약이나 잡다한 소품을 수납해둔채 언제든지 간단하게 꺼내 쓸 수 있을것 같았다. 딱 진석이 찾는 종류의 물건이었다.

"어, 괜찮은데? 이것도 같이 계산하는걸로."

"매번 감사함다~!"

시원스럽게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선 진석. 그러고보니 공복도 게이지가 다시 쭉 떨어져 있는게 보였다.

'아... 계속 끼니 챙겨 먹는것도 귀찮아. 근데 뭘 했다고 공복도가 이렇게 떨어진거야? 가 아니라. 생각해보니 점심도 거르고 죽어라고 섹스만 몇 시간을 했었지. 여관에 가서 좀 기다리다 저녁을 먹어도 되겠지만...'

여기가 시장아닌가. 어차피 급히 여관에 돌아갈 필요도 없는데다가 여자들도 자기들끼리 어디간지 모르겠고, 아침나절에 시장에서 이것저것 사먹었던 것 처럼 노점을 돌며 맛있어 보이는걸 조금씩 구입하며 맛을 보았다.

'먹을때마다 생각하는거지만 이런 음식들 실제로 있긴 한거야? 무슨 기준으로 만들어 넣었을까.'

옥수수 가루를 섞은 반죽을 탁구공만한 크기로 튀겨서 계피가루와 설탕 위에 굴린 도너츠 비슷한것을 먹는 진석. 가상의 현실 속 음식이라도 꽤 맛있었다. 실제로 먹는것도 아닌데 맛이 느껴지다니 참 신기하긴 하다. 무슨 원리일까?

'이건 또 뭐야.'

그 옆에선 꿀과 향신료에 재운 서양배의 조각과, 한 입 크기로 자른 소시지를 번갈아 끼운 꼬치를 구워 팔고 있었다. 배도 구워먹나 싶었지만 노릇하게 구워진 태를 보니 의외로 맛이 궁금해졌다. 하나 사먹어 보니 의외로 맛이 괜찮았다.

'소시지도 그냥 소시지가 아니라 훈제였네. 꿀에 재워 달달한 배랑 짭짤하면서 훈제향이 나는 소시지를 같이 먹으니 호오 이거 제법.'

이것저것 주전부리를 하며 공복도를 채운 진석. 먹다보니 뜬금없이 여관 지하에 갇혀있을 레오노르 공주 생각이 났다.

'뭐 밥 정도야 다른 녀석들이 알아서 챙겨주고 있을테지만...'

과연 고귀하신 공주님도 이런걸 먹을까? 진석은 일부러 향이 강하거나 자극적인 음식 위주로 간단히 몇가지를 사서 여관으로 돌아갔다. 아까 돌아왔었을땐 보이지 않던 여관주인이 카운터 안쪽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여관주인은 안으로 들어오는 진석을 보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어째 필요한 물건은 잘 사셨습니까?"

어때, 재미 좀 보셨지? 하는 의미의 눈웃음을 지으며 이쪽을 바라보는 여관주인. 이 양반... 다 알면서 날 거기로 보낸거였구만. 진석도 히죽 웃으면서 대꾸했다.

"뭐 잘 샀지요. 아주 자아알. 허리가 빠질정도로."

"그 가게랑 자매들은 페레나에선 워낙 유명합니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그러는건 아니고, 의외로 얼굴을 굉장히 따지지요. 손님은 인물도 훤칠한데다 오실때마다 워낙 팁도 후하게 주고 하시니... 심술궂은짓 같긴 하지만 일부러 거길 알려드렸습니다. 물론 패커즈 숍도 명색이 무기점이니 그저 밝히는 미녀 자매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장사가 안되겠죠. 그녀들이 취급하는 물건 역시 꽤 비싸긴 해도 실제 괜찮은걸로 알고 있습니다."

과연 여관주인. 자기가 사는 도시에 대해 훤하게 알고 있는 모양이다. 뭐 이전 미약때나 오늘이나, 진석으로선 별 생각 없이 금화를 쥐어줬었는데 여관주인 입장에선 이쪽이 꽤나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역시 서비스업 종사자에겐 친절히 해주고 볼 노릇이다. 하긴 제이스 왈, 돈 따위 한 푼도 안내고 이용해도 된다고 했는데 진석은 뭐만하면 손에 금화를 척척 쥐어주니 주인 입장에선 이렇게 통크고 좋은 손님이 또 어디있을까? 진석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방에 흑철단검들과 벨트를 놓아둔 뒤 사온 음식을 들고 공주가 있는 지하 창고로 내려갔다.

"여어. 바뻐?"

"...장난해?"

느닷없이 진석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들어오며 말을 걸자 짜증이 섞인 어조로 대꾸하는 레오노르 공주.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는 그녀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몸이 피곤한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지쳐있는게 분명했다. 하긴 납치범들에게 붙들려 며칠이나 여기저기 끌려다니고 이런 창고에 갖혀 옴짝달싹 못하는데 활기가 넘치면 그게 이상할 일이다. 그나마 레오노르 공주 본인의 정신력이 워낙 강단이 있어놓으니 협상을 걸어온다거나 하며 저렇게 꼿꼿한 태도로 버티는거지 보통 여자 같았으면 더 엉망진창인 상태였으리라.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진석은 히죽히죽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간식거리를 좀 사왔는데. 같이 먹을까?"

어제처럼 앉은뱅이 의자를 끌어다 공주의 앞에 앉는 진석. 하지만 공주는 후우 한 숨을 내쉬고 턱짓으로 옆의 소반을 가리켰다. 크지않은 사각 소반엔 빵이나 과일, 스프 그릇 따위가 놓여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먹기는 커녕 손을 댄 흔적도 없었다. 그런 소반이 두 개나 나란히 놓여있었다. 그렇다는건 어제 저녁은 몰라도 최소한 오늘 아침과 점심은 전혀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일터.

"이런이런. 이럴때일수록 잘 먹고 힘을 내야 버티지. 이거 어때?"

일부러 기름을 쓰거나 불에 구워 후각을 자극하는 음식 위주로 사온 진석. 공주는 눈 앞에 내미는 음식들을 바라보았지만 별 관심은 담겨있는것 같지 않았다.

"방금 요 앞에서 사왔지. 맛있더라고. 안 먹어?

"...됐어. 그쪽이나 실컷 먹어."

"흐응. 후회할텐데. 진짜 나 혼자 다 먹는다?"

공복도는 거의 다 차올라 있었지만 진석은 일부러 냄새를 풍기고 쩝쩝대며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아무리 귀한 공주님이라도 몸은 똑같은 사람.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 식욕이 없는것처럼 느껴져도, 몸은 그렇지 않을터. 왕족이라고 공복을 느끼지 못할리는 없다. 후각만큼 또 민감한 기관도 없지.

"아 맛있다 맛있어. 귀한 공주님은 이런 일반 백성들이 먹는 음식따윈 드시지 못하는 모양이지?"

"......"

"내가 그쪽이라면 기운을 내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잔뜩 먹어둘텐데. 똑똑한 공주님인줄 알았건만 겨우 이정도였나?"

"대체 나에게 뭘 하고 싶은거야. 정말 당신은... 저열하군."

경멸의 눈초리로 진석을 바라보는 레오노르 공주. 뭐 그러거나 말거나 진석은 더더욱 짭짭대며 음식을 먹어치웠다. 레오노르 공주는 진석을 무시하고 벽쪽으로 시선을 돌리는듯 했는데... 순간 하얗고 가는 목덜미가 살짝 꿀꺽하고 움직이는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사람인데 배가 안 고플리가 있나. 이렇게 냄새를 피워대며 눈 앞에서 라이브 먹방을 하는데 솔직히 자기도 먹고 싶지 않겠어? 게다가 오늘 하루종일 굶은것 같은데. 식욕 성욕 수면욕은 인간의 3대 욕구. 어디 산에 들어가 도라도 닦는게 아니라면 쉽게 참을 수 있는게 아니란 말이지.'

먹는것을 멈추고 레오노르 공주를 바라보며 가만히 웃어보이는 진석. 레오노르 공주는 그 시선을 눈치채고 당황해하며 말했다.

"뭐... 뭐야? 기분나쁘게 쳐다보지 마. 그... 어서 윌포드 이야기라도 해보라고. 다음번에 이야기 한다고 했었잖아."

"음 그랬던가? 요새 기억력이 나빠졌는지 원."

일부러 이죽거리는 진석. 그 태도에 레오노르 공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 그만 놀려. 댁한테 쓰잘떼기 없는 놀림 당하는것도 신물이 날 지경이니까."

"좋아. 알았어. 공주가 같이 이 음식들을 먹어준다면 윌포드 이야기를 해주지."

그렇게 대꾸하며 아직 절반쯤 남은 음식들의 봉투를 공주쪽을 향해 내미는 진석. 공주는 음식들과 진석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야 먹고도 싶고 윌포드의 이야기도 듣고 싶지만 순순히 진석이 시키는대로 따르기엔 어째 자존심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진석은 그 점을 눈치채고 빙글빙글 웃었다.

"레오노르 공주, 협상 좋아하잖아? 이 음식을 먹으면 그쪽이 원하는 윌포드 이야기를 해주겠어. 누가 손해보는일도 없는 엄청 간단한 조건 아냐? 뭐 독이나 수상한건 안 들었다고? 보다시피 나도 이렇게 먹고있는걸."

지금 그녀의 자존심을 꺾을 필요는 없지. 어차피 교단까지 데려가 그녀의 신병도 미리안에게 넘겨줄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한동안은 동행해야 할 터. 천천히 가지고 놀 생각이었다. 이미 입 안에 들어온 먹잇감 아닌가. 이제 그녀는 단번에 꿀떡 삼키건 천천히 씹어 삼키건 진석 마음대로였다. 공주는 진석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조심스레 손을 뻗어 고기 꼬치를 하나 집어들었다.

"그... 그럼 이것을. 먹을테니 어서 윌포드 이야기를 해봐. 윌포드를 어디서 만났지?"

"먹고 이야기 하자고. 우선은 먹어."

"...알았어."

손에 든 꼬치를 보며 몇 차례나 머뭇거리다가 겨우겨우 입가로 가져가는 레오노르 공주. 끄트머리의 고기를 입에 넣고 다른쪽 손으로 입술을 가린채 오물거리는 폼이 제법 귀여웠다.

'으음... 어째 꼬치가 아니라 다른걸 입에 물려주고 싶구만... 아니 이것도 꼬치라면 꼬치겠지만.'

레오노르 공주의 입에 자신의 물건을 물리는 상상을 하며 그 모습을 구경하는 진석. 레오노르 공주는 그 시선을 눈치채곤 얼굴을 붉혔다.

"뭘 그렇게 쳐다봐?"

"아니 뭐 그냥. 그보다 서민의 맛은 어때? 궁중음식만 못한가?"

군주 플레이를 몇차례고 해온 진석이니 왕궁에서 어떤 수준의 음식이 나오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이게 게임속이라 실제의 음식들만큼 명확한 맛의 구분이 안가는 것인지, 혹은 진석의 입맛이 저렴해서인지는 몰라도 단순히 맛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이쪽의 주전부리도 그렇게 나쁜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진석이 직접 맛을 보곤 이건 꽤 먹을만 하다 싶은것만 골라서 사왔으니까. 음식을 씹어넘긴 공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단... 나쁘지 않아."

"다행이군. 그러면 약속했던 윌포드 이야기나 해볼까. 아~ 어디서 봤더라~ 그렇지. 러프야드 근처였던가?"

입에 든 음식을 씹으면서도 진석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레오노르 공주. 진석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 그보다 이제와서 이렇게 말하면 공주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레오노르 공주를 납치하고 싶은 생각따윈 없었다? 그 점은 오해하지 말라고. 내 일행인 두 여자들 쪽이 멋대로 저지른 일이니까."

"그런건 나도 알아. 당신이 날 납치 하려고 했다면 진즉 왕궁에서 했을테지."

"그래그래. 아무튼 나는 납치엔 관련되지도 않았는데, 러프야드에서 물자를 보급하고 나가는 길에 내 또 다른 일행쪽이 미행이 있다고 일러주더라고. 가만보니 왠 기사가 혼자서 내 뒤에 따라붙은거야. 대체 뭘 보고 날 쫓은건지 원."

분명 레오노르 공주는 일전에 윌포드에게 진석의 인상착의를 알려줬었다. 아마도 윌포드는 공주 본인을 되찾으러 러프야드까지 추격을 해왔다가 우연히 이 남자를 발견하곤 그 뒤를 쫓은것이리. 공주는 그렇게 추측했다. 진석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미행을 이미 눈치챘는데 본인만 모르고 뒤를 졸졸 따라오는 꼴이 웃기더구만. 아무튼 나야 그쪽이 누군지 모르니 유인해서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처리... 라고?"

설마. 윌포드조차 이 남자에게 벌써 당했단 말인가...? 순식간에 창백해지는 레오노르 공주의 안색. 진석은 일부러 안면 가득 미소를 띄워보였다.

"그래. 유인해서 끌어들인 다음 죽였지."

툭. 레오노르 공주에 손에 들려있던 반쯤 먹은 꼬치가 바닥에 떨어졌다.

"뭐..."

"오래걸릴것도 없이 일격에 끝. 하지만 피를 철철 흘리고 죽어가는 와중에도 공주 그쪽의 행방을 물어오더군. 제법 충성스러운 기사였던 모양이지?"

레오노르 공주는 머릿속이 새카매지는것 같았다. 그럴리가. 말도 안 돼. 윌포드가... 죽어? 물론 어제 이 남자가 윌포드 이야기를 꺼냈을때부터 그런 생각을 아예 안해봤던건 아니다. 하지만 가병이나 도시내의 병력도 있었을텐데, 어처구니 없게도 혼자서 미행을 시도하다 죽었다고? 그래, 이건 거짓말이다.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가지고 놀기 위한 하찮은 말장난이다. 레오노르 공주는 노기를 띈 모습으로 소리쳤다.

"거짓말! 그럴리가 없어! 윌포드 같은 기사가 혼자서 미행따윌 하고 있었을리가...!"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해서 얻을 이득이 뭐가 있겠어? 보자. 그 기사의 특징이... 아. 에스터크를 들고 다니는데다가 옆으로 쫙 찢어진 여우눈을 하고 있던데. 틀려?"

분명 윌포드의 특징은 맞다. 하지만 윌포드는 널리 알려진 기사. 그딴건 누구라도 알 수 있는거 아닌가.

'하지만... 하지만...!'

마음만큼은 절대 그럴리 없다고 믿고 싶었지만 머릿속에선 윌포드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남자가 자신의 희망을 꺾기 위해서 쓸 수 있는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많다. 손쉽게 순결을 빼앗고 능욕을 한다거나, 도망이나 저항을 막기위해 팔다리의 힘줄이라도 끊어버리면 그만이다. 하필이면 윌포드가 죽었다는 거짓말을 골라서 할 필요가 없는것이다. 믿을 순 없지만, 믿고 싶지도 않지만, 이 자가 하는 말은... 아마도 사실이리라. 레오노르 공주의 눈가엔 삽시간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으... 으, 윽. 으아아아아!"

비천한 도적출신의 그딴 남자, 정말 싫었는데. 하지만 그가 자신을 찾기 위해 혼자 뒤를 쫓다 되려 살해당했다니.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 된거지. 아주 희박한 일말의 희망마저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었다. 이제 날 도와줄 사람따윈 아무도 없는건가? 왜, 도대체 왜 살해당한거야...? 당신은 잘나디 잘난 기사님 아니었어? 아버님께 칼을 들이대고도 살아남았던 질긴 목숨이잖아? 건방진 태도로 실실거리면서 자기 좋을대로 지껄이는게 당신 아니었어? 레오노르 공주의 눈에선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아~ 아~ 공주님 울렸다 울렸어. 나도 참 못됐다니깐. 왜 이런게 재밌는걸까? 끌끌... 일단은 여기까지만 하자.'

진석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출구로 나갔다.

"내일 아침 일찍 여길 떠날거니까 그렇게 알아두라고. 난 이만."

대답없이 얼굴을 양손으로 가린채 서럽게 울어대는 레오노르 공주. 가녀린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진석은 희망을 잃어가는 공주를 홀로 남겨둔채 창고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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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나 시를 떠나고 며칠이 지났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별 탈 없는 평탄한 여정이었다. 앞으로 하루 정도면 메디니아의 국경에 닿을 수 있을듯 했다. 하지만 마차 안에 쇼핑백을 비롯한 5명 분의 각종 대량의 짐이 실려있었기 때문에, 자리가 좁아 이동하는 동안 마차 안엔 공주를 제외한 여자일행들 중 두 명만이 더 탈 수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은 진석과 함께 마부석에 탄채로 이동했는데 제이스, 아르데나, 엘리야 셋이 순서대로 번갈아가며 마부석에 올랐다. 진석은 그녀들과 말동무를 하며 마차를 몰았다.

'그런데 페레나시에서 셋이 날 빼놓고 같이 다니면서 대체 뭘 했던거야?'

무기를 구입하느라 혼자 돌아다녔을때 셋이 함께 뭘 한건지 궁금해서 물어보았지만 그것에 대해선 어째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아르데나 마저 끙끙거리면서도 끝내 입을 꾹 다물었으니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이것들 날 빼놓고 무슨 역적모의를 했길래? 진석은 궁금하긴 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에이 뭐... 까짓 여자들끼리의 친목이라도 다졌겠지.'

그도 그럴것이 셋은 이제 제법 사이가 괜찮아 보였다. 제이스와 아르데나야 그렇다고 해도 맨 나중에 들어온 엘리야는 처음엔 쭈뼛거리는게 눈에 보일정도였는데 이젠 특유의 뻔뻔한 입담까지 발휘해가며 그녀들과 어울리고 있었으니까. 슬슬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진석 일행이 탄 마차는 이전 아르데나와 처음 만났던 잡목림 근처에 자리를 잡고 불을 피웠다. 식사당번은 처음엔 진석과 가사스킬이 있는 엘리야가 적당히 번갈아 가면서 했는데, 나중엔 귀찮아져서 엘리야에게 전담시켰다. 엘리야는 당연히 궁시렁 거렸지만 아르데나가 대신 나서서 그녀의 일을 돕는걸로 대충 넘어갔다.

'그래, 분명 아르데나도 가사 스킬은 있긴 하지. E랭크긴 하지만. 뭐 이런식으로 보조라도 하다보면 나아지겠지.'

진석은 한쪽 너른 바위위에 걸터앉아 엘리야와 아르데나가 저녁식사의 준비를 하는것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는데, 제이스가 옆에 다가와 앉으며 말을 걸었다.

"저기 러셀."

"응? 왜."

"레오노르 공주 말야. 페레나를 출발하고 부턴 통 먹질 않는데 괜찮을까?"

그러고보니 레오노르 공주는 여관 지하에서 윌포드가 죽었다는것을 알려준 이후 어째서인지 의욕이나 기운을 완전히 잃은게, 이제 저항이나 협상따윈 다 포기한듯 했다. 진석도 그런 공주는 별로 괴롭힐 의욕이 나지 않아 일단 내버려 두었다. 식사때에도 먹으려고 들지 않아 엘리야나 아르데나가 옆에 붙어 닥달해야 겨우 몇 입 먹을뿐이었다. 레오노르 공주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눈에 띄게 쇠약해지고 있었다. 그에 대비되듯 아르데나는 이제 난민같던 처음의 꼬락서니에서 벗어나 거의 정상적인 체형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진석은 흐음 하며 턱을 괴었다.

"뭐 본인이 먹지 않으려고 하는데 억지로 먹이기도 그렇고..."

"그래도 우리가 데리고 다닐땐 끼니 정도는 꼬박꼬박 잘 먹었었거든? 우리가 안 보는 사이 공주에게 무슨짓이라도 한거 아냐? 그... 덮쳤다거나."

따악. 진석은 제이스의 이마에 촙을 날렸다. 아야 하며 이마를 감싸쥐는 제이스. 진석은 혀를 차며 말했다.

"너는 내가 여자만 보면 무조건 강제로 하는줄 아냐?"

"사실이잖... 때, 때린데 또 때리지맛! 아파!"

"안했어 안했어. 그냥 말 몇마디 해줬더니 저렇게 되어버리네."

"무슨 말? 또 협박이라도 한거야? 하여튼 그런쪽의 말재간은 있다니깐..."

이 남자의 협박 솜씨는 일품이다. 제이스 자신도 겪어봤었다.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는 말솜씨는 정말 한두번 해본게 아니겠거니 싶었다.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에서 당하는 협박은 정말 당해보지 않고는 모른다. 사람이 심리적으로 극단적인 상황에 몰아붙여져 정상적인 판단이나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아마 그것도 과거에 몸 담았다는 도적길드에서 배운 기술이려니 지레 짐작하는 제이스. 하지만 도적길드 출신 따위라는건 알다시피 다 지어낸 이야기, 지금까지의 숫한 플레이 경험에서 나온 요령이자 진석만의 기술이었다.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한 뒤 소국의 왕족이나 귀족을 인질로 잡아놓고 괴롭히는 짓 같은건 이전에도 꽤 많이 해봤었으니. 진석은 제이스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협박이 아니라 거 윌포드였나 뭔가 하는 기사를 죽였다는 이야길 해줬더니..."

"...잠깐. 윌포드? 아, 그 미행으로 붙어서 유인해 죽였다는 기사의 이름이 윌포드였어?"

"응. 왜?"

서로의 행적은 이야기 했었지만 제이스는 진석에게서 미행으로 따라붙은 왠 기사를 죽였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그의 이름까진 듣지 못했었다. 근데 그의 이름이 윌포드라면... 분명 은행에서 자신들을 붙잡았던 상대 아니던가? 제이스는 진석에게 물었다.

"그 기사 말인데, 혹시 여우눈에 세검을 쓰지 않았어?"

"그런데. 뭐 문제라도?"

피어서 윌포드. 그의 명성따위 제이스는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지만 레드라인의 떨거지들을 일소해버리는 검술을 보고 실력만큼은 굉장하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러셀이 이미 그 남자를 죽였었다니? 은행에서 자신들의 정체가 발각되고 붙잡혔던일의 복수를 해준 것 같아 마음 한 켠 어딘가 통쾌하면서도 새삼 눈앞의 이 남자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제법 실력이 있는 기사같던데. 그런 기사라고 해도 역시 러셀의 상대는 안되는구나. 대단하네."

은근한 미소를 띈채 슬쩍 팔짱을 끼며 기대오는 제이스. 그 숲에서 붙잡혔을때 포기하지 않고 회유해서 교단으로 끌어들인게 정말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만약 이 남자가 그때 자신의 회유에 응하지 않고 교단에 칼끝을 돌렸다면... 상상도 하기 힘든 피해를 입었겠지. 물론 러셀이라고 해도 대신관님이 질리는 없겠지만 평신도들이나 다른 수호자들은 다 살해당했을수도 있었을터. 더욱 더 이 남자를 놓아줄 수 없다고 느꼈다.

"그렇지? 내가 좀 대단하지. 음 잘났다 정말. 아이참, 왜 이렇게 잘났을까. 으쓱으쓱."

이 유치한 성격만 빼면 참 좋을텐데! 하지만 한 번 좋게 보이면 상대의 흠마저 이뻐보인다고, 어째 그런 점까지도 귀엽게 느껴졌다. 진석의 품에 안겨오며 은근히 가슴을 꾸욱 눌러오는 제이스.

"흐흥. 그러고보니 우리 한참 못했네?"

데오그라즈의 로엔 호텔에서 묵을때 이후 요 수일간 관계를 가지지 않은 진석과 제이스. 제이스는 자신도 그게 슬슬 땡겨올 정도니, 진석도 지금쯤 하고 싶어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은근히 유혹을 해왔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녀는 진석이 주는 열락에 누구보다 익숙해진 몸. 게다가 다른 수호자들과의 육체관계는 끊은터라 진석외에 딱히 상대할 남자도 없었고, 지칠 줄 모르는 그의 하반신이 아니고선 쉽게 만족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진석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응. 근데 뭐?"

"뭐라니? 그러니까 저기... 이따가 아르데나랑 엘리야 잠들면 잠깐 저쪽에서라도..."

"어, 슬슬 식사 준비 다 된것 같은데? 밥이나 먹자."

휙 일어나 불가로 다가가 버리는 진석. 제이스는 자신을 쏙 내버려놓고 가버리는 그의 모습에 당황스러워 졌다.

'사람이 모처럼 먼저 유혹을 해주는데 뭐야 저 태도는?'

물론 진석도 제이스가 유혹을 해온다는걸 모를리 없었다. 단지 요새 묘하게 기어오르는것 같아 길을 들여줄 생각이었을 뿐. 교단의 사원에 돌아갈때까진 손을 대지 않고, 나중에 머서에게 약초를 얻어 콤모티오 칵테일을 만들어 먹이고 한 번 호되게 괴롭혀줄 생각이었다.

'콤모티오 칵테일은 처녀였던 엘리야를 발정난 암컷으로 만들 정도였으니 섹스에 익숙하고 즐길줄도 아는 제시라면 뭐... 볼만하겠군. 같이 다닌지 좀 됐다고 오냐오냐 해줬더니 아주 뭐 마누라마냥 행세를 하는데 그딴 폭거를 계속 용납해줄순 없지.'

그간 관계를 못하는건 좀 아쉽긴 하지만 정 궁하면 적당히 틈을 봐 엘리야라도 끌고가서 해결하면 될 일이다. 엘리야도 처음 이후엔 한 번도 관계를 못해서 얌전히 응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진석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리야는 음식이 잘 만들어진게 기분이 좋은지, 웃는낯으로 음식이 담긴 그릇을 진석에게 내밀었다.

'하긴 얘는 빵집 주인이었지. 뭔 낙으로 빵가게를 했을까 싶은데 그냥 자기가 만든 음식을 사람들이 먹어주는데서 즐거움을 얻는 타입이었나? 그런 주제에 잘도 남 뒤를 캐는 삭막한 일을 해왔구만...'

잡다한 생각을 하며 냠냠하고 태평히 저녁을 먹는 진석. 아르데나는 자신의 식사는 뒷전으로 미루곤 마차로 가서 레오노르 공주의 식사 먼저 챙겨주기 시작했고, 제이스는 뚱한 표정으로 다가와 깨작깨작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평원에서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점심때가 한참 지난 느즈막한 오후. 메디니아의 수도 갈론. 이전에 왔을때처럼 제이스는 헤세스 약품 통상 부터 들렀다. 나머지 일행까지 안에 들어갈 필요는 없었으므로, 다들 그냥 마차에서 그녀가 나오길 기다렸다. 이번엔 의외로 오래걸려 한 30분이 넘어서야 제이스가 마차로 되돌아와 진석의 옆에 앉았다.

"왜 이렇게 오래걸렸어?"

"명목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사잖아. 아주 가끔씩이긴 하지만 내 손을 거쳐야 할 서류가 올라와 있길래 그걸 정리하느라 그랬어. 이제 출발하자. 저녁은 오랜만에 사원에서 먹을 수 있겠네."

어째 지쳤다는듯 마차벽에 등을 기대며 말하는 제이스. 진석은 마차를 몰기 시작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고보니 나는 뭐 안 시켜줘?"

"뭘?"

"저거, 헤세스 약품 통상. 명목상이건 뭐건 넌 한 공기업의 이사잖아. 나도 일단은 같은 수호자인데 뭐 없냐?"

진석의 말에 고개를 가로로 저어보이는 제이스.

"나야 필요에 의해서 맡고 있을 뿐이지 달리 별 득볼것도 없는 일인걸? 실제로 맥이나 드레비안도 헤세스 약품 통상하곤 관계없고. 나랑 머서만 이쪽 일을 하고 있는거야. 알고 있을테지만 머서는 타마엘 초 가공이나 평소엔 연구팀에서 일하고 있으니."

"그래? 그럼 맥이랑 드레비안은 평소에 뭐 다른거 하는건 없는거야?"

"맥은 뭐 운동을 해서 몸을 단련하거나 농장쪽 일을 돕거나... 뇌까지 근육으로 되어있어서 그런지 걘 몸 쓰는일은 그냥 뭐든 좋은것 같아. 그리고 드레비안은... 그러고보니 드레비안은 일이 없을때 뭘 하는진 나도 잘 모르겠네. 어렸을때도 유난히 멍했는데."

"멍해?"

"어려서 우리가 한참 대신관님의 교육을 받고 있을때 얘기야. 맥은 늘 기운이 넘쳐서 대신관님의 교육이 끝나면 머서나 나를 끌고 밖에 나가서 뛰어 논다거나 했거든? 그런데 드레비안은 같이 따라다니긴 해도 적극적으로 뭘 나서서 한다거나 한 일이 없었어. 그런 주제에 이따금 시험같은거라도 치르면 우리들 중 가장 우수했고, 대신관님이 지시한 임무 역시 한치의 오차도 없이 빠르고 깔끔하게 처리하고 온단 말이지."

게다가 얼굴도 잘 생겼고 몸매도 뭔 조각상 마냥 끝내주지. 말수가 극단적으로 적고 태도가 뻣뻣해 어째 로봇이 연상된다는 점만 빼면 자신과 평수를 이룰정도의 실력자이기도 하고, 진석은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막상 같이 지내보니 그래도 붙임성이 아주 없는편도 아닌것 같았고, 진석이 오기 전까진 수호자들 넷 중 실력도 제일이라 챔피언의 타이틀을 지니고 있기도 했으니...

"그러고보니 나랑 드레비안하고 전력을 다해서 싸우면 누가 이기려나. 내가 이기면 내쪽이 교단의 챔피언이 될 수 있는거야?"

"엑? 뭐하러 그런짓을 해."

"아니 너나 머서는 어쨌든 직함도 있고, 드레비안은 챔피언이고... 맥은 아무것도 없구나. 그럼 나나 맥이 동급이라는 이야기잖아? 그 근육 바보랑 내가 같은 수준이라니 납득 할 수 없다! 나도 뭔가 간판을 달고 싶다! 나는 잘났는데! 으아아아 참을 수 없다!"

"어, 어린애야? 이상한데서 떼를 쓰고 있어..."

"에이씨, 야. 헤세스 약품 통상에 예쁜 여직원 많냐? 많지? 좋은 직장이니까 틀림없이 많을거야. 거 이사님 특권으로 인사권 좀 남용해서 낙하산으로 좋은 자리에 좀 꽂아주라. 남직원들은 야근에 휴일출근 강요해서 괴롭히고 여직원들은 으슥한데서 성희롱 하고싶다."

"......"

질린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제이스. 음 너무 솔직하게 속 마음을 밝혔나? 데헷 하며 귀여운척을 해보이는 진석.

"농~담."

"...농담은 무슨. 말에 아주 진심이 뚝뚝 묻어나더만. 추해."

"어허! 원래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네 마음이 이미 더럽혀져 있으니 네 눈으로 보는 나도 추해보이는거란다."

"하, 정말 끝내주는 궤변이다. 궤변대회같은거 있으면 상도 받겠는데?"

"상? 상 좋지. 아아 상 받고싶다~ 받아서 침대 머리맡에 잘 장식해두고 싶다."

진석은 제이스와 영양가 하나도 없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사원으로 향했다. 슬슬 해가 기우는게 저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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