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6. -- > * 66화 *
'뭐... 뭐야 이거?!'
그렇다고 해서 막 사이한 기운은 아니다. 뭐랄까, 어째 버프를 받을때처럼 능력치가 증가된다는 느낌이 드는게... 앗 하는 사이 미리안은 입술을 떼었고 진석의 몸도 금방 자유를 되찾았다. 미리안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진석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때요. 느껴지시나요?"
뭐, 뭐가? 난 어린애들에게 불끈거리는 그런 쪽의 인간이 아니라고? 하지만 미리안은 검지손가락을 뻗어 진석의 가슴을 스윽 슥 쓸어내리며 말했다.
"제 능력을 써서 오빠에게 힘을 약간 내어드렸어요. 보잘것 없지만... 열심히 해주신것에 대한 답례랄까. 제가 할 수 있는건 의외로 많지 않으니까요. 이런거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해서."
이런것 밖에 못해줘서 미안하다는 표정과 눈빛으로 올려다 보는데 뭐라 따지기도 그렇고 화를 낼수도 없고. 게다가 힘을 내어줬다라? 진석은 미심쩍어 하면서도 메뉴를 열어 자신의 스테이터스를 확인해 보았다.
'아니... 헉.'
- 이름
러셀 헤이든
- 종족
인간/남성
- 스테이터스
- 체력 : 285(+30) / 315
- SP : 205(+20) / 225
- 공격력 : 115(+10)
- 방어력 : 70(+10) + 2
통솔 20(+2) / 무력 46(+2) / 민첩 41(+2) / 지력 35(+2) / 정치 20(+2) / 매력 40(+2)
- 액티브 스킬
바일리 델 비엔토[A랭크] / 약학[B랭크] / 화염화살[A랭크]
- 패시브 스킬
해부학[D랭크] / 식물학[C랭크] / 예민한 촉감[B랭크] / 회피의 심득[E랭크] / 투척[E랭크] / 세인트 베네딕션[D랭크]
놀랍게도 모든 능력치에 추가 보너스가 적용되고 있었다. 게다가 평범한 버프처럼 일정 시간만 지속되다 사라지는게 아니라, 패시브 스킬이 남아있는 한 반영구적으로 유지되는 증가 수치였다.
'이건... 허어.'
세인트 베네딕션. 처음보는 스킬이었지만 방금의 키스로 진석에게 넘겨준 힘이 분명하리라. 입맞춤 한 번으로 상대에게 아예 새로운 패시브 스킬을 각인시켜버리다니. 비록 사교이긴 하지만 과연 한 교단의 장이자 대신관다운 능력이었다. 하지만 능력치가 올라서 기쁜것보다, 미리안이 감추고 있는 힘에 대한 궁금증과 두려움이 더 커졌다.
"아, 저 혹시 기분 나쁘셨던건... 아니죠?"
미리안은 진석이 한참 말없이 있자 약간 곤혹스러워 하며 말을 걸었다. 진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힘이 늘어났다는것도 알겠고 고맙긴 하지만 갑자기 입맞춤이라니. 끄응. 이러면 안되잖아 이거."
"후후, 물론 꼭 입맞춤으로 힘을 전해드릴 필요는 없었어요. 그냥 손을 잡는 정도라도 충분하긴 한데."
장난스럽게 웃는 미리안. 진석은 으으 하며 자기 이마를 짚었다.
"그럼 처음부터 그냥 그렇게 하라고. 무슨짓인가 싶어 놀래게 만들지 말고."
"싫었나요? 이래뵈도... 저의 첫... 아, 아니. 못들은걸로 해주세요."
"......"
'저의 첫' 까지만 들었어도 진석도 그 뒷 내용을 짐작하지 못할정도의 바보는 아니다. 거짓말이라고 해줘! 아니, 미리안이라면 거짓말일 확률이 높다. 사람 들었다 놨다 하는 재주가 보통이 아닌데 분명 이걸로 날 잘 낚아서 두고두고 부려먹으려는 심보로... 가 아니, 잠깐. 이게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이전에 미리안이 다른 누군가와 입맞춤이라던가 뭐 여러가지 일을 했다는 얘기? 뭐 이래저래 오래 살아 왔을테니 그런일이 아예 없었을거라곤 단정 내릴 수 없어도... 거 아무리 그래도 열살짜리 여자애와 입을 맞춘다던가 이런 저런일을 할 썩을놈이... 나잖아?! 당한거긴 하지만 이런 어린 여자애랑 키스해버렸다. 으악! 순간 혼란스러워졌다. 게다가 은연중에 그 작고 여린 몸으로 외간 남자와 몸을 섞는 모습이 떠올라 버리는데... 어째 자괴감이 미친듯이 몰려온다. 대체 난 뭘 상상하는거냐.
'으으, 레오노르 공주의 첫키스를 충동적으로 빼앗았던 일이 생각나는구만. 그녀도 이 정도로 혼란스러웠을까? 물론 이번엔 빼앗은게 아니라 뭐랄까... 즈... 증여 받은거지만. 하아. 어째 뭔가 돌아갈수 없는 강을 자꾸 하나씩 건너가는 기분이다.'
진석은 혼란에 빠져 엉망진창이 된 정신줄을 겨우 다잡고 입을 열었다.
"아니 싫다는게 아니라 나같은 정체 모를 놈에게 그 소중한 첫... 에, 아무튼 함부로 하면 안되는거잖아."
"미안해요. 전 뭔가 조금이라도 노력하신것에 대한 답례를 해드리고 싶어서 그만... 그리고 정체 모를 사람 아니잖아요? 교단의 수호자이자, 오빠인데."
미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금세 쓸쓸한 표정을 짓는데 작은 소녀의 호의를 내친것 같아 자신이 쓰레기처럼 느껴진다.
'진짜 얘 앞에선 정신없이 휘둘리기만 하는구만. 어째서 자꾸 이렇게 되는거지? 끄으응.'
진석은 손을 뻗어 미리안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어 줬다.
"...고맙긴 하지만 다음부턴 좀 더 온건한 방식으로 부탁해."
미리안은 아무 대답없이 미소지으며 진석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물론 미리안이 정말 러셀을 좋아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리안은 자신이 밝혔듯 진석이 폭풍의 지팡이를 훔쳐내오는 일에 실패할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돈 따위도 얼마든지 더 내어줄 수 있었고, 그 외의 다른 지원도 더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시험삼아 그에게 돈 5천 골드와 제이스만을 내어준 것이다. 그녀의 예상으로는 아무리 잘해봤자 성공률은 기껏 한 1할쯤? 한 나라의 왕궁을 터는 일이 애들 장난도 아니니, 고작 그정도일거라 판단했었다. 사실 실패해도 상관없었다. 실패해도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땐 또 다른 방식으로 그를 옭아메어 충실한 종으로 부릴 방법이 있었다. 되려 부드럽게 실패를 용서해주고 받아들이며, 자신의 도움이 미약했기때문에 해내기 어려웠을거라고 역으로 변호해주고 품어안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준다면 이 실패는 그의 마음속에 큰 부채로 남았으리라.
실패를 용인해주는것은 상대가 아직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드레비안과 호각을 다투는 그의 전투능력은 분명 유용히 쓰일 수 있었다. 관대히 용서해주면 다음번엔 실패의 보상을 하듯 알아서 전력을 다할것이 분명했다. 과감히 버림패를 써야하는 곳에 전력을 다할 그를 던져두면 의외의 결과를 이끌어 낼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 폭풍의 지팡이를 훔쳐낸데다 덤으로 큰 돈과 쓸만한 정보가 담긴 수첩까지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레오노르 공주를 납치해왔고, 나름대로의 능력을 지닌 여자 두 명을 포섭해서 데려오기도 했다. 이건 뭐 사슴 한 마리를 잡아오랬더니 사슴은 물론 곰과 호랑이까지 덤으로 잡아온 격이다. 미리안은 확신했다. 지금껏 오래 살아오며 허신을 강림시키기 위한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이런 자는 없었다. 이 남자야말로 오랜 세월에 걸친 숙원을 이뤄줄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미리안에게 딱히 예지 능력이 있는건 아니었지만, 오랜 세월 허신의 대신관으로서 살아 온 경험이 있는 그녀다. 분명 그럴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게다가 어린아이에게 모질지 못한 성격이다. 이렇게 초월적인 성공을 거두고 온 이상, 자신의 첫 입맞춤을 주었다는것으로 그에게 작으나마 정신적인 빚을 씌운다. 인간은 자신에게 호감을 갖는 상대에겐 자연히 잘 대해주기 마련이다. 그러니 상대를 좋아하는 사랑스런 여동생을 연기하며 더더욱 자신을 도울 수 밖에 없게 만드는것이다. 물론 방금의 입맞춤은 거짓이 아닌 정말로 첫 키스였지만, 이 자를 자신의 밑에 두고 부릴 수 있다면 지나칠 정도로 싼 댓가다. 비록 이런 어린 몸뚱아리지만 그를 밑에 두고 부리기 위해서라면 내어줄수도 있었다. 섹스를 이러니 저러니 포장해봐야 기껏 구멍에 막대를 쑤셔넣는 일이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던가? 하지만 그럴일은 없겠지. 그는 자신의 입맞춤만으로도 저렇게 당황하고 있었다. 실력에 비하면 정말이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어리숙한 남자다. 아이를 안는게 뭐 어떤가? 귀족들 사이에선 지금도 비일비재한 일이다. 미리안 자신 역시 이 몸뚱아리를 탐낸 다른 귀족에게 팔려가다 목숨을 잃었던거 아닌가. 애당초 허신을 이 세계에 강림시켜 모든것을 영구한 평온, 즉 태초의 허무로 되돌리려는 교단이다. 하찮은 도덕관념에 연연하는 진석의 태도 따위. 백년 가까이 살아온 허신의 주구인 미리안이 보기엔 정말로 귀엽기 그지없었다.
"그... 아르데나와 엘리야랑은 이야기 해봤어?"
한참 머리를 쓰다듬기만 하던 진석은 머쓱하게 말문을 열었다. 미리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둘 다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계시더군요. 우선 엘리야씨는 헤세스 약품 통상에서 일하도록 부탁드렸습니다. 영업쪽으로요. 주로 외국을 돌아다니게 되겠죠. 타인을 조사하거나 정보를 모으는데 특화된 그녀의 능력이라면 교단의 목적을 위해 여러모로 유용히 쓰일 수 있을겁니다. 큰 보수를 약속하니 흔쾌히 승낙하시더군요."
'윽... 엘리야를 쓰긴 쓰되, 교단 외부로 돌리는건가. 그럼 언젠가 교단을 배신하려고 해도 엘리야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겠군.'
뭐 어쩔 수 없다. 애당초 엘리야에겐 큰 기대를 하고 있던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 다음 이야기를 하는 미리안의 표정에선 이채가 엿보였다.
"그리고 아르데나는... 정말로 특이한 능력을 지니고 있더군요."
진석은 그러고보니 미리안이 아르데나에겐 경칭을 붙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제만해도 아르데나 님, 엘리야 님, 과할 정도로 격식을 차려 부르더니... 엘리야 님은 엘리야 씨가 되었고 아르데나 님은 그냥 아르데나가 되었다.
"아르데나는 저주를 받아서..."
"설명을 하지 않으셔도 압니다. 저에게도 그 정도 힘은 있으니까요. 첫 대면의 순간부터 그녀가 가진 능력은 파악했습니다. 고약한 저주였지만 한 번 파훼되어 주도권은 그녀 자신에게 넘어가 있더군요."
그래, 그렇지. 그게 다 내 덕... 아니, 잠깐. 첫 대면부터 아르데나의 능력을 파악했다고? 그렇다면... 미리안에겐 타인의 능력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종류의 힘이 있단 말인가? 그럼 진석 자신은 미리안의 능력을 알 수 없는데 반대로 그녀는 진석의 능력을 알아 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럴수가. 자신이 NPC의 능력을 들여다보는것만 생각해왔지, 그 반대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입맞춤 한 번으로 능력치를 반영구적으로 상승시켜버리는 스킬도 구사하고... 이렇게 마주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도저히 미리안의 밑바닥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진석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리안은 말은 계속됐다.
"그녀는 여섯번째 수호자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오빠처럼 당장 밖으로 내보내기엔 힘들겠죠. 한동안은 사원에 머물게 하면서 교육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교... 교육?"
"네. 이래보여도 전 지금의 네 수호자가 아주 어린 아이일때부터 데려다 먹이고 가르치며 손수 길렀습니다. 다 큰 소녀 한 명 쯤 돌보는건 일도 아니죠. 게다가..."
스윽. 미리안의 얼굴이 진석에게 가까워졌다.
"그 아이는 오빠를 아주 좋아하더군요? 만약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 아니라 실제로 죽을수도 있을 정도에요. 단지 그녀의 소심함으로 표현을 하지 못하고 있을뿐, 당장이라도 오빠의 품에 안기길 원하고 또 독점하고 싶어하더군요. 표면상으론 제시를 잘 따르는것 처럼 보일지도 몰라도 실상은 제시에게 조차 큰 질투를 품고 있었어요."
"......"
그, 그 정도야? 아니 이건 저주 한 번 깨준것 치곤 너무 과한거 아냐? 게다가 잘 따르는것 같은 제이스에게도 사실은 질투를 품고 있었다니... 진짜 무서운 이야기다. 인터넷 상의 유저 게시판에서 읽었던 글과 지금 미리안에게서 들은 내용이 서로 겹치며 등골에 한줄기 식은땀이 배어나온다. 하여튼 제작진놈들 뭐든간에 꼭 어딘가는 꼬아놓는다니깐... 유용하게 부려먹을 욕심에 데려다 잘 돌봐주고 있었는데 이런거라면 차라리 다른 유저의 선택대로 노예시장에 비싸게 파는것도 고려해 봄직하다.
"후후, 하지만 걱정 마세요. 어제 저와 단독으로 면담을 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잘 나누었으니까. 제시에게 질투심을 품어 말썽을 일으킬 일 따위 없을거에요. 그런 불상사가 생기는건 저도 바라지 않으니까. 그 대신 오빠를 향한 그 아이의 마음은 한층 더 커진것 같네요. 언젠간 단단히 책임져 주셔야 할거에요."
'...뭐? 대체 아르데나한테 뭔 짓을 해놓은거냐. 힘을 써서 정신개조나 세뇌같은거라도 해버린건가? 게다가 단단히 책임지라니, 대체 뭘?'
불안하다. 엘리야는 그렇다 쳐도 아르데나를 미리안에게 맡겨놓고 제이스나 괴롭히며 희희낙락 하고 있었다니... 난 바보냐? 크윽. 하지만 뭐 어쩌랴. 이미 던져진 주사위. 이제와서 궁상맞게 로드를 한 다음 대신관의 방에 난입해 그녀들의 대화를 방해하기라도 할까? 그건 진짜 한심천만한 바보짓이나 다름없다. 그냥... 그냥 일단 되는대로 흘러가보자. 어찌됐건 아르데나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거다. 그 점만 확실하다면 일단 다른건 상관없었다.
"그럼 아르데나랑 엘리야는 그렇다 치고 레오노르 공주는..."
일단 아르데나 이야기는 덮어두고 레오노르 공주쪽으로 화제를 돌리는 진석. 그런데 미리안의 입에선 전혀 뜻밖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사실 오빠가 살해한 가네딘 후작과는 손을 잡을 생각이었습니다."
"어?"
터억. 진석의 무릎에서 내려가 타박타박 자신의 자리쪽으로 돌아가는 미리안. 그녀는 진석을 등진채 창밖에서 떠오르는 해를 내다보며 말했다.
"이곳 메디니아는... 경제력은 있지만 영토도 작고 인구도 적은데다 군사력도 약하지요. 비록 제가 엠퍼슨 아카데미를 만들고 헤세스 약품 통상을 세워 이 나라를 대륙 최고의 약품 수출 대국으로 만들고 경제적으로는 부강하게 바꾸었지만 단독으로 타국과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돈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엔 분명 그 한계가 있으니까요."
"......"
"저는 가네딘 후작에게 힘을 실어줘서 귀족연맹이 그란델 왕국 내에서 쿠테타를 일으키게 만들 생각이었지요. 제가 오빠에게 폭풍의 지팡이를 훔쳐오라 명한건 폭풍의 지팡이가 제단을 완성하기 위해 큰 도움이 되기도 해서지만, 가네딘 후작의 적이 될 왕당파의 힘을 대폭 깎아낼 목적도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양쪽으로 말이죠."
과연, 그런것이었나. 일석이조였군. 미리안은 자신의 행동 하나로 두 가지의 목적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네딘 후작이 쿠테타를 일으켜서 교단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뭐지...? 마치 진석의 생각에 답해주듯 미리안의 입에서는 말이 계속 이어졌다.
"가네딘 후작이 성공적으로 쿠테타를 완수하고 그란델 왕국을 장악해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면, 그를 '지배'해서 그란델 왕국의 군사력으로 타국을 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란델 왕국의 군사력, 제가 대륙 곳곳에 심어놓은 정보망, 지금까지 쌓아둔 자금력, 그리고 엠퍼슨 아카데미와 헤세스 약품 통상의 전폭적인 의료지원이라면 주변의 나라 하나둘쯤 손 쉽게 꺾을 수 있을테죠. 그리고 저희는 전쟁의 혼란을 틈타 제단을 완성하기 위한 '제물'을 모르는 일에 박차를 가할 생각이었습니다. 지금까지와 같은 은밀한 방식은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렸으니까요."
작은 소녀의 입에서 하나 둘 거대란 음모의 진의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정말 조그만한 체구건만, 지금 진석에겐 그녀의 등이 이상할 정도로 크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가네딘 후작은 암살당했지요. 그것도 제가 보낸 오빠의 손에 의해."
"......"
"하지만 재미있게도 가네딘 후작 따위보다 더 좋은 소재를 구해오셨습니다. 네, 레오노르 공주지요. 그녀는 해밀턴 공작의 장녀이자 왕족. 순위는 좀 밀리긴 하지만 엄연한 왕위 계승권자이기도 하지요."
"그렇다는건...?"
미리안은 슬쩍 고개를 돌려 진석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린 얼굴엔 천진난만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너무 티없이 맑아 흡사 소름이 끼칠 정도로 순수한 웃음이었다.
"저는 레오노르 공주를 그란델 왕국에 무사히 돌려보낼겁니다. 단, 그녀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 해밀턴 공작을 살해하도록 머릿속을 잘 만져준 다음에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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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참 음모를 좋아하는 인종이 많다. 물론 대부분은 허황된 음모론일 뿐이고, 할 일 없는 자들의 헛소리이자 술자리의 안주거리일 뿐이지만... 막상 자신이 거대한 음모의 중심에 서고보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바보같은 소리지만 '어? 이게 그렇게 되는 거였어?' 하는 정도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진석은 가만히 자신의 방에 앉아 조금 전 대신관 미리안이 한 이야기를 떠올려봤다.
"머릿속을... 만져준다고?"
"네. 저는 그녀를 '세뇌'해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게 만들고 공작가의 권한을 탈취한 다음, 귀족연맹과 손을 잡아 현재의 그란델 왕실에 반기를 들게 할 생각입니다. 가네딘 후작은 애시당초 일개 귀족. 그가 쿠테타를 일으켰다면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찮아 많은 손실과 혼란이 뒤따랐을테지만... 레오노르 공주는 왕족. 그런 공주가 반기를 든다면 이건 그냥 왕실내의 왕위 다툼이고 집안 싸움이지요. 자칫하면 반역자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니 아무나 함부로 끼어들거나 방해를 할 순 없을겁니다. 잘만 진행된다면 쿠테타 보다 더 빠르고 손실도 적게 일을 마무리 할 수 있겠죠. 그렇지 않아도 왕당파는 주축인 해밀턴 공작가를 제외하면 기반이 부실한 세력, 레오노르 공주가 왕당파를 버리고 귀족연맹과 손을 잡으면 더더욱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을겁니다. 그란델 왕실의 힘이 귀족들의 세에 비해 약한건 널리 알려져 있는바니까요. 그렇게 해서 일이 마무리되면 레오노르 공주는 레오노르 여왕폐하가 되겠지요. 우리는 발 아래에 한 나라의 여왕마저 주구로 두게 되는 겁니다. 거기다 오빠가 가져온 자금과 이 수첩의 정보들을 잘 활용한다면 데오그라즈에서의 거사는 한층 쉬워지겠죠. 권력층이나 유지들의 약점이 잔뜩 적혀 있으니 그들의 지지를 이쪽으로 돌리는건 그야말로 어린애 손목 비틀기나 다름없을터."
"하..."
말이 나오지 않는다. 자신은 그냥 지팡이 하나 훔쳐오나보다 덜렁덜렁 갔다가 이리 치이고, 저리 뒹굴고, 되는대로 일을 마무리 한다음 돌아온건데... 사실 뒤에선 이런 음모가 계획중인 것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결국 자신은 미리안이 움직인 일개 장기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군주 플레이를 할때는... 이런식으로 하지 않았었지. 골치아픈 음모나 계획을 사용하기보단 그냥 전략 게임의 정석적인 방법 그대로, 내정을 다지고 기술을 개발하며 인재를 등용하고 병력을 모아 차근차근 영토를 넓히는 기본에 충실한 방법만 썼는데...'
최종적인 목적을 위해 바닥에서부터 하나하나 포석을 깔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미리안의 행동을 보고 있자니, 자신은 지금껏 정치나 외교 협상 같은것들을 그저 수박 겉핥기식으로 진행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왕이란 신분을 내세워 자기 주장만 고집했었지. 물론 그 대부분은 오로지 이득을 최우선한 결단이라 결과론적으론 옳은 선택이긴 했지만서도... 장수 플레이도 거의 왕처럼 했었다. 언제나 강경론 일변도를 주장하며 짜증나게 구는 정적들은 야 좆이나 까잡숴 해놓고 혼자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며 전선에서 전과를 올리는 식으로 대륙 통일을 밀어붙였으니까. 지금에서야 좀 더 다른 방법으로도 게임을 진행 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난건 지난 일이고, 현재는 현재다. 미리안은 이야기를 계속 했다.
"오빠도 약학을 어느정도 익힌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팔시타스라고 아시나요?"
알다마다. 애당초 약학을 찍은 이유는 미약을 만들기 위해서였고, S랭크를 찍을시 만들 수 있는 팔시타스는 약학트리의 최종적인 목표이기도 했다. 실제로 맨 처음 해밀턴시에서 약초를 사다 에나에게 쓸 미약을 만들때 아 언제쯤 팔시타스를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했었는걸. 미리안은 진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어갔다.
"머서와 같은 우수한 인재를 헤세스 약품 통상의 연구팀에 넣어둔건 그저 그가 약학을 좋아해서만은 아닙니다. 머서는 제 명령에 따라 수없이 팔시타스를 만들어봤고, 이젠 그보다 더 효능이 강력한 개량형 팔시타스도 완성했지요. 오랜 연구와 수많은 임상실험을 걸쳐서야 완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기존의 팔시타스는 이따금 대상의 체질이나 특징에 따라 수차례 반복 섭취해야 효과가 정착 될 수 있었지만... 이 개량형은 다릅니다. 머서가 완성해낸 이 신약은 단 한 번만 마셔도 상대를 완벽히 세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그냥 팔시타스를 만드는 것만 해도 희귀한 재료때문에 꽤나 힘든데, 아예 개량형을 연구해서 완성했다고? 아, 그러고보니 메디니아는 엠퍼슨 메디컬 아카데미와 헤세스 약품 통상이 있는 대륙 최고의 의료약학 강국이다. 그런 연구를 하기엔 이곳보다 더 좋은곳은 없을터. 기가 찬다. 도대체 이 소녀는 언제부터 이러한 계획을 구상하고 진행해 왔던걸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레오노르 공주의 세뇌는... 전적으로 오빠에게 맡기지요."
"뭐, 뭣?"
미리안은 생각했다. 이 남자는 아직 어수룩하고, 어중간하다. 폭풍의 지팡이를 훔쳐내오고 여러 성과를 올린것만 봐도 나름대로 뛰어난 인재겠지만, 자신이 보기엔 그래도 진짜 악당이 되기엔 한참 부족하다. 겨우 어린아이의 입맞춤 한 번에 흔들거리는 정신력이라니. 그래서야 어찌 믿고 대업에 끌어들일 수 있겠는가? 그에겐 각오가 필요하다. 자신의 손을 확실히 더럽힐 각오. 이 일에 깊숙히 발을 담그고, 끝까지 함께 하게 만들 그런 종류의 각오가.
"공주에게 각인시킬것은 세 가지. 첫번째, 헤세스모데우스 교단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한다. 두번째, 그란델의 여왕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러셀 헤이든을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한다."
"...?!"
아무말도 못하고 당황하는 진석. 미리안은 미소지었다.
"그녀를 마음대로 하세요. 어떤짓을 해도 반항은 커녕 그것을 따르고 원할 충실한 노예로 만드는겁니다. 범하세요. 얼마든지 능욕해도 상관없습니다. 질릴때까지 가지고 노세요. 그렇게해서 아이를 배게 만드는것도 좋겠지요. 아니, 반드시 아이를 가지게 만드는겁니다. 레오노르 공주가 여왕이 되고 나면 그녀가 낳을 러셀 오빠의 아이는 한 나라의 후계자가 되는겁니다. 물론 일이 제 계획대로 진행 된다면 그 아이가 장성해서 왕국을 통치하기 훨씬 전에 헤세스모데우스 님의 현세 강림이 이루어지고 영구한 평온이 찾아올테지만... 그래도 한때나마 일국의 여왕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고 자신의 아이는 왕자가 된다니, 충분히 매력적인 일 아닌가요?"
"......"
이건 생각도 못했었다. 단순히 세뇌라기에 대신관의 힘으로 뭐 정신 마법이라도 거는건가 했더니 오랜 연구를 통해 만들어낸 개량형 팔시타스를 사용해 상대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한 나라의 지배자로 추대하는 계획이라... 게다가 그 레오노르 공주를 내 맘대로 해도 좋다고? 한 술 더 떠 내 아이를 가지게 해? 하지만 그래서야 제이스에게 했던 거짓말이 걸린다. 아니, 이제와서 제이스에게 했던 거짓말따위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어째선지 약효가 소멸되었다던가, 머서에게 도움을 받아 치료받았다던가. 현재로선 자신을 신뢰하는 제이스니 둘러댈 말따위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다. 중요한건 대체 왜 미리안이 자신에게 이러한 큰 권한을 주는것인가다. 레오노르 공주를 세뇌하는게 지금 이 계획의 핵심일텐데... 진석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터무니 없는 말을 쏟아내고도 천진하게 생글생글 웃는 미리안의 얼굴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구만, 그런 의미인가. 난 별로 똑똑한 편은 아니지만... 이 정도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지. 그저 명목상으로만 수호자네 뭐네 하던 나를 이 일을 통해 발을 빼지 못할 진짜 깊숙한 음모속으로 끌어들이는거군. [자 어때. 아름답고 매력적인 공주를 네 맘대로 해서 여왕에 올리고 짧은 기간이나마 한 나라를 막후에서 지배할 수 있다니깐? 어서 승낙해. 이것만 한다면 너도 진정한 우리 동료다.] 뭐 이런 느낌인가.'
여기까지 와서 거부를 할 수 있겠는가? 진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안은 만족스럽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따 점심 이후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그렇게 긴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야 진석은 대신관의 방을 빠져나와 터덜터덜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것이다.
"후우."
기분상으론 미리안의 방에 엄청 오래 있었던것 같지만, 실제론 기껏 30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었다.
'어째 30분 만에 정신적으로 팍삭 늙은 느낌이군. 하... 레오노르 공주의 세뇌라...'
따지고보면 그녀도 불쌍하긴 하다. 정말 재수없게 자신과 얽히고, 또 납치까지 당한 것 아닌가. 게다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정적들과 손을 잡은 다음 왕위 찬탈까지 해야 할 운명이라니. 정말 잔인하다. 차라리 그냥 죽이면 죽이고 범하면 범했지, 자신은 사람을 이렇게까지 철저히 목적달성을 위한 도구로 써먹을 생각은 못했었다. 뭐 죽고 싶어질 정도의 수치나 괴롭힘을 주긴 했었지만... 자신의 재미에서 비롯한 그런 행동과 이쪽은 한차원 수준이 다른 이야기다.
'하지만 레오노르 공주를 범하고 임신시키라는 명령은... 흠 좀 좋은듯.'
데오그라즈의 왕궁에서 처음 마주했을때도 그녀에게 손대지 않고 협상을 했었다. 메디니아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혹시 몰라 공주를 범하지 않고 온전히 데려와 그녀의 신병을 미리안에게 넘겼건만, 결국 돌고 돌아 자신이 그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확고한 명분이 생긴것이다. 한 나라의 공주다. 그 아름답고 순결한 신체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니. 거기다 아이를 밸때까지 능욕하라는 옵션까지 딸려있다. 캬, 이런일은 나름대로 자신의 전문분야 아니던가? 참 근로의욕 고취되는 훌륭한 명령이 아닐 수 없다. 이래서 대기업(?)에 취직을 하려고 다들 애를 쓰는거구나! 음음. 그렇게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갑자기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흡사 도깨비같은 무시무시한 표정을 하고 있는 제이스였다.
"아."
"아는 무슨 아야!"
문을 쾅 닫고 뛰어들어와 진석을 끌어안고 침대위로 넘어트리는 제이스. 진석의 위에 올라탄 제이스는 어깨를 꽉 내리누르며 말했다.
"덕분에 난 어젯밤에 잠도 제대로 못잤거든? 아직 아침 식사까진 한참 여유가 있으니... 그간 밀린 몫, 받아내야겠어!"
과연 눈이 충혈되고 약간 다크서클도 생긴것 같은게, 꼴을 보니 밤새 진정하지 못하고 자위라도 해댄 모양인가보다. 어제 진석이 그렇게 불을 싸질러 놨으니 겨우 혼자서 하는 손장난으로 해결이 됐겠는가? 아침이 올때까지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었겠지. 그러니 이렇게 무서운 모습으로 처들어 온걸테고. 만약 진석이 미리안에게 레오노르 공주를 맘대로 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이번에도 어떻게든 제이스를 놀리기만 하고 빠져나갔을 테지만... 지금은 공주를 임신시켜야 한다는 명령에 진석도 정신적으로 꽤 흥분되어 있었다. 좀 더 놀려주고 싶었지만 뭐 이만하면 됐겠지. 진석은 제이스를 끌어안고 토닥거렸다.
"아이고, 우리 제시 귀엽기도 해라. 그래서 이렇게 새벽같이 헐레벌떡 찾아온거야?"
"으, 으으... 그만 놀리고! 내 몸... 펴, 평소 하던대로 좋을대로 다루면 되잖아!"
옆에 드러눕더니 웃옷을 풀어헤치고 치마도 확 걷어내리는데... 작정을 했는지 아예 속옷도 안 입고 왔다. 정말 애가 타긴 탔었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나름 굽히고 들어오는 모양새니 진짜 이쯤에서 봐주자. 진석은 제이스를 상냥히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몸 이곳저곳을 애무해주었다. 달아있던 그녀의 몸은 삽시간에 촉촉히 젖어들었다. 진석이 준비가 된 제이스의 몸에 막 삽입하려는데, 갑자기 제이스가 불안한 어조로 한 마디 했다.
"혹시라도 어제처럼... 중간에 그만두거나 그러지 마."
"걱정마. 이번엔 끝까지 해줄테니까. 좋아서 울지나 마시라~"
"...바보. 누가 운다고 그, 으흐응!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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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저는 현재 구치소에 수감된채 이 글을 적고 있습니.. 농담입니다.
앞으로 쓰다보면 좀 더 늘거나 줄어들 수 있겠지만, 일단 구상한 내용 중 대략 3~4할 가량은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직 갈길이 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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