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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68화 (68/155)

< --   - 6.   -- >         * 68화 *

진석은 잠시 눈을 붙이다 제이스가 깨우러 온 덕에 함께 점심식사를 하러 갔는데, 식당에 머서가 와 있는것이 보였다. 그렇군, 아마도 미리안에게 연락을 받고 개량형 팔시타스를 가지고 온거겠지. 그는 보통 헤세스 약품 통상의 본사가 위치한 갈론에 있을테니 사원까지는 겨우 한시간 거리. 언제든 쉽게 오갈 수 있는 위치다.

"...아."

물론 아르데나나 엘리야도 먼저 와서 식탁에 둘러 앉아 있었다. 식당에 들어선 진석을 보곤 얼굴이 붉어져선 얼른 시선을 돌리는 둘. 그녀들의 모습에 제이스가 너 설마? 하는 의미를 담아 진석을 돌아보았다.

'뭘봐 씨, 나도 몰라.'

진석도 일일이 변명하기 귀찮아 그냥 철판을 깔기로 하고 제이스의 시선을 무시한채 식탁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가 끝난 후 미리안은 평신도를 제외한 전원을 자신의 방으로 호출했다. 미리안의 방엔 미리안을 포함 진석, 제이스, 머서, 아르데나, 엘리야. 총 여섯 명이 모여앉았다. 미리안의 부탁으로 젊은 여신도가 후식인 차를 가져다 그들 앞에 하나씩 내려놓곤 방을 빠져나갔다. 뭔진 몰라도 옥빛이 나는 따스한 차였는데, 그냥 녹차 비슷한 맛이었다. 미리안은 전원이 차를 거의 다 마시고 나서야 말문을 열었다.

"우선 머서. 부탁한건 잘 해주셨습니다. 기왕 온거, 농장에 들러 수확한 타마엘 초의 이송과 가공을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잘 해줬다는건 역시 팔시타스 이야기겠지. 미리안은 이번엔 제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제시. 엘리야 씨와 함께 갈론으로 가서 헤세스 약품 통상에 대해 알려주세요. 회사에 대해 자세히 안내해주고, 인사부와 해외영업부에 가서 이 서류들을 가지고 수속을 하면 됩니다. 숙소는 사원 기숙사에 내어드릴 수도 있지만, 본인이 원한다면 외부의 다른곳에 얼마든지 거처를 마련해주도록 하세요."

서류봉투를 건네받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제이스. 미리안은 마지막으로 아르데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아르데나도 제시와 엘리야 씨를 따라 함께 가세요. 제시? 엘리야의 수속과 숙소 문제를 먼저 끝낸 후, 엠퍼슨 메디컬 아카데미의 제 3관으로 가서 포겔먼 교수에게 이 편지를 건네주고 아르데나를 소개해 주세요. 포겔먼 교수는 바쁜 사람이니 시간을 오래 낼 순 없을테지만, 그래도 아마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는 아르데나에게 여러가지를 지도해줄겁니다. 아르데나는 짧은 기간이나마 아카데미에서 머물며 그에게 잘 배워두도록 하세요. 제시는 아르데나의 지도 현황을 확인하면서 통상 업무를 보다가 아르데나의 교육이 끝나면 함께 사원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미리안의 말이 끝나자 제이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에게 반문했다.

"그런데 저기 대신관님. 러셀은... 아무것도 안하는건가요?"

"따로 지시할 일이 있습니다. 자, 어서 움직이세요."

제이스나 아르데나는 늘 함께 다니던 진석과 한동안 떨어진다는게 마음에 안드는지 둘 다 어째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명령이라 어쩔 수 없으니 이내 방 밖으로 나섰다. 지시를 받은 넷이 우르르 빠져나간 방엔 진석과 미리안 둘 만이 남아있었다. 미리안은 책상 서랍에서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내 이쪽으로 가져와 진석에게 내밀었다.

"자. 이것이 바로 그간의 연구를 거쳐 완성한 개량형 팔시타스. 안에 약병 하나와 사용법이 적혀있을겁니다."

진석은 주머니의 끈을 열고 안의 내용물을 꺼내보았다. 손가락 하나 길이만한 작은 약병엔 연푸른색의 액체가 가득 차있었다. 조그마한 쪽지도 있었는데, 휘갈겨 적은 세 문장만이 적혀있었다. [구강 복용 후 약 10분 뒤 효과 발휘 / 효과 시간은 약 5분간 지속 / 짧은 문장의 형태를 반복해서 각인시킬 것.] 개량형이라도 사용법은 일반 팔시타스와 같았다. 미리안은 쪽지를 읽는 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만들기도 힘들고 또 비싼 약입니다. 그 약 1회분이 금은보화로 가득찬 보물상자 몇 개 값어치는 한달까요."

"......"

하긴. 그냥 팔시타스도 희귀한 약재가 있어야 완성 할 수 있는, 돈으로도 사기 힘든 약인데... 이 개량형은 그런 팔시타스를 가지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만들어낸 물건 아니던가. 행여 깨트려먹기라도 했다간 통곡하게 생겼다.

"벌써 잊진 않으셨겠죠? 세가지 입니다."

진석을 향해 자신의 명령을 상기시키는 미리안.

"첫번째, 헤세스모데우스 교단의 명령엔 절대 복종 할 것. 두번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란델의 여왕이 될 것. 세번째... 러셀 헤이든을 누구보다 사랑한다... 였지."

"맞습니다. 그 세가지만 확실히 각인시켜 두세요. 그 이후엔 알려드린대로 그녀를 본인것으로 만드시면 됩니다. 제시와 아르데나, 엘리야 씨도 없습니다. 방해가 될 인물은 한동안 아무도 없지요. 장차 여왕이 될 우리들의 소중한 공주님에게 사랑을 듬뿍 주입해주시길."

듬뿍 주입하라는 말에 강세를 두며 눈을 가늘게 뜨고 후후 웃는데 이건 뭐 어린아이가 아니라 정말 무슨 요물같다. 아니, 내용물은 분명 노회한 요물이 맞지. 진석은 약을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슨 종마도 아니고, 이거 하루종일 바쁘구만. 하루에 세명째라...'

"그나저나 제시와는 여전히 참 사이가 좋은데, 혹시 그녀를 사랑하시나요?"

미리안의 뜬금없는 질문에 말문이 턱 막히는 진석. 사랑? 아니, 그냥 육욕이지 뭐. 그녀는 연인 따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섹프다 섹프. 하지만 그런 솔직한 이야기를 대놓고 하긴 곤란. 그러나 미리안은 진석의 속내를 이미 짐작하겠다는듯 가만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뭐 아무래도 좋겠지요. 제시는 지금까지 해온것처럼 앞으로도 좋을대로 하셔도 됩니다. 그녀도 수호자로서 나름 우수한 인재이긴 하지만 역시 오빠의 능력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니까요. 계획에 대한것은 결국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설명해줘야 하겠지만... 공주를 임신시킨다는 부분만은 우리 둘만 알고 있도록 하지요. 후후, 뭐 작은 재미라고 할까요. 어쨌든 가장 중요한것은 비원의 달성이니까요. 바로 신의 강림. 목적만 달성 할 수 있다면 결국 나머지는 다 부가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교단에서 함께 하는 움직이는 한 사람이건, 돈이건, 얼마든지 가져도 좋고 마음껏 누리셔도 됩니다."

정말로 파격적인 대우다. 교단에서 일하는 댓가로 뭐든 가지거나 누려도 좋다니. 이렇게 되면 진석 자신을 실상 교단의 2인자로 인정해주는거나 다름없는게 아닌가 싶다. 정말 이 어린 대신관은 사람 일할맛을 나게 해준다. 미리안은 테이블에서 일어나 자기 책상으로 돌아가 앉으며 말했다.

"지금쯤이면 슬슬 시간이 됐을겁니다. 방에 돌아가 계세요. 꽃단장한 레오노르 공주를 맞이하실 수 있을겁니다."

"...뭐?"

"아까 점심전에 신도들에게 지시해 그녀를 잘 씻기고 단장해두라 일렀지요. 아무리 그래도 공주님의 첫경험인데, 최소한의 준비는 시켜드려야 할테니까요. 후후."

언제 또 그런 지시를... 거 참. 준비성이 좋다고 해야할지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레오노르 공주는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알고나 있을까? 진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신관의 방을 뒤로 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 짧은사이에 쓸데없는 짓을 잘도..."

방에 돌아오니, 창문과 벽에 하얗고 커다란 린넨천을 무슨 발처럼 드리워놨고, 테이블위엔 테이블 보를 깔아두고 양초와 와인, 글라스까지 정중히 세팅해 두었다. 게다가 침대시트 위엔 붉은 꽃잎 까지 흐트려 뿌려놓은걸 보곤 정말 뿜을뻔 했다. 아니 뭐야 이게. 센스가 이상하다고 해야하나 장난이 지나쳐 악의가 엿보인다고 해야하나. 무슨 신방 차리는것도 아니고 어처구니가 없어 코웃음이 나온다. 대놓고 '자, 섹스하세요.' 하며 판을 깔아주니 어째 놀림당하는 기분이다. 뭐 그렇다고 안할건 아니지만.

"수호자님."

똑똑. 밖에서 누군가가 노크를 하며 진석을 불렀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두 여신도들이 데려온 레오노르 공주가 서있었다. 그간의 피곤하고 후줄근한 꼬락서니가 아닌,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소담한 하얀색 원피스에, 가볍게나마 화장도 해준것 같았다. 꾸벅 인사를 하고 물러나는 신도들. 진석은 공주를 이끌고 방 안으로 들어와 테이블에 앉혔다.

"...이게 지금 뭘 하는 건지 묻고 싶은데."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진석에게 질문을 해오는 공주. 묘하게 꾸며놓은 방의 분위기나, 자신을 단장시켜 데려온 여신도들의 태도를 보면 어렵잖게 짐작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아니. 분명 그녀도 눈치는 채고 있을거다.

"뭐 보다시피."

어깨를 으쓱하는 진석. 레오노르 공주는 무감정한 시선으로 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 오래 살아온 삶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무력하게 장난감 취급이나 당하고 싶진 않다. 최소한 이 이상의 수치를 주지말고 차라리 죽여다오."

아이고, 그렇게 나오는건가. 하지만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제부터 약도 먹이고 세뇌도 하고 영차영차 아이만들기도 해야하는데? 진석은 다리를 척 꼬고 일부러 거만한 태도를 내보하며 말했다.

"물론 죽여주는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그 다음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

"다음...?"

대답을 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이는 진석. 대답을 기다리는 레오노르 공주가 약간 안달을 낼때쯤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공주가 스스로 자기 몸에 해를 가한다면 난 바로 데오그라즈나 해밀턴으로 가서 댁의 아버지나 왕족 양반들을 암살하겠어."

"뭣?!"

테이블을 타앙 치며 눈을 치켜뜨는 레오노르 공주. 그래그래, 무기력하게 있는것보다 차라리 화라도 내며 반응을 보이는게 낫지. 레오노르 공주는 진석을 매섭게 쏘아보며 말했다.

"그, 그딴짓을!"

"그래. 내가 그딴짓~을 실제로 할 수 있다는건 잘 알고 있겠지? 난 왕궁으로 숨어드는 길도 알고 있고 암살을 실행할 정도의 능력도 있어."

결국엔 또 협박이다. 허나 뭐 어쩌겠는가. 이제부터 머서가 가져온 개량형 팔시타스를 먹여야 하는데. 기껏 씻기고 단장해서 온 공주를 우악스럽게 붙잡아 놓고 힘으로 강제로 먹이자니 모양새 빠지고. 그렇다고 지금 공주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지 않은채 그냥 먹으라고 툭 던져놨다간 네 알겠습니다 하고 순순히 마시겠는가? 바닥에 버리거나 마시는척 하다 뱉어버리면 말짱 똥 되는거다. 그러니 순순히 마시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과연 진석의 협박은 효과가 있어 레오노르 공주는 씩씩거리며 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도 공주를 평생 잡아가두거나 할 생각은 없어. 간단한 명령에만 좀 따라준다면 데오그라즈로 돌려보내 주도록 하지."

"......"

이제와서 그딴말을 믿을 수 있겠냐? 하고 반문하는듯한 눈빛. 진석은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그 안에 들어있던 팔시타스 약병을 레오노르 공주의 앞으로 내밀었다.

"마셔. 이것만 마신다면 오늘은 더 아무것도 안하고 돌려보내주지."

"거짓말..."

"안 마시고 버티거나, 혹은 약을 뱉는다거나 하면 끝장이야. 묶어놓고 강제로 먹일수도 있지만 내가 그쪽에게 선택권을 주는 의미를 잘 생각해봐. 허튼짓을 했다간 공주는 여기서 평생 떠날 수 없을 뿐더러 댁 아버지인 해밀턴 공작과 그란델 왕국의 왕족들이 하나 둘 죽어간다는 소식이나 접하게 될걸. 물론 선택은 자유지만, 어리석은 판단을 했다간 평생 후회하게 될거라는걸 잘 명심해둬."

이전 빅 본의 카야에게 했던것과 비슷한 협박. 가족이나 연인 등,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 남아있는 상대에겐 간단하지만 정말로 효과적인 위협이었다. 마음속에 긍지나 도덕심이 있는 자는 이런 종류의 협박을 결코 외면하지 못한다. 자신의 소중한 대상이 이런 위험에 처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감당하는게 낫다, 하는 식으로 판단해버리기 때문이다. 레오노르 공주도 마찬가지였다. 이 자와의 협상은 더 이상은 불가. 남은 선택은 이 제안에 대한 가부의 판단 뿐. 그녀는 이제와서 자신의 안위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 자들이 무엇을 원하길래 이러는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아버지나 왕국에게까지 피해가 가는 꼴은 볼 수 없었다. 물론 분했다. 그녀는 한 나라의 왕족이자 공작가의 장녀, 정체도 모를 자들에게 멋대로 휘둘리는데 분하지 않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당신은 최악의 쓰레기지만, 그래도 거짓을 협상의 조건으로 내진 않을거라 믿고 마시겠어. 모든건 나 하나만으로... 끝내줘."

팔시타스의 약병을 집어든 레오노르 공주는 뚜껑을 열고 망설임없이 내용물을 마셨다. 푸른색의 액체는 식도를 타고 한 방울의 남김도 없이 공주의 몸안으로 흘러들어갔다.

'됐군.'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는 진석. 이제 약효가 돌기만 기다리면 끝이다. 형용할 수 없는 묘한 맛이 입안으로 퍼져나가자 레오노르 공주는 조금 인상을 썼다.

"...자, 그쪽이 원하는대로 다 마셨어. 이제 적어도 내가 마신게 뭔지 정도는 알려주지 그래?"

뭐가 됐건 어차피 제대로 된 약일리는 없을터. 자신을 단장시키고 방을 이렇게 꾸며놓은걸 보면... 기껏 뭐 미약이라도 되는걸까. 내가 성욕을 이기지 못하고 추하게 무너져가는 꼴이라도 보고싶었던 거겠지. 이제와서 몸의 정절 따위 아무래도 좋을일이다. 결국엔 이렇게 될거라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기도 했으니... 레오노르 공주는 자기 자신의 타락을 직감하며 진석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진석은 영 엉뚱한 대답을 했다.

"내 이름은 래스커가 아니라 러셀 헤이든."

이제와서 본명을 밝히는건가? 의문스러워 하는 레오노르에게 진석은 이야기를 계속 했다.

"레오노르 공주. 당신이 메디니아로 끌려왔다는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래, 이곳은 메디니아에 자리잡은 어떤 교단이야."

"교단...?"

의외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는 레오노르 공주. 진석은 약효가 돌기 전까지 잠시 진실을 이야기 해 줄 생각이었다.

"헤세스모데우스 교단. 허신 헤세스모데우스를 섬기고 그의 현세 강림을 추구하는 이들의 모임이다. 이곳은 바로 그 교단의 본산이지."

세간엔 여러 종류의 신을 믿고 따르는 교단이 많았지만, 이러한 교단의 이야기는 처음들었다. 게다가 신의 현세 강림?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이들의 정체는 정신나간 사교도의 집단이었단 말인가?

"그래서 그 교단이 대체 왜 폭풍의 지팡이를 원한거지?"

"나도 잘은 모르겠다만 신기라고 불릴 정도의 물건이니 신을 소환하기 위한 제단 완성에 도움이 되는 모양이더군."

"그딴 허황된 이유로...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인가. 맹신에 눈이 먼 광신도들이군..."

광신도들이라. 뭐 말이야 맞는 말이다. 이들의 목적인 허신의 강림은 곧 세계의 멸망을 뜻하는거니까.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다면 이들은 도울 대상이 아니라 막아야 할 이들일터. 하지만 알게 뭐냐. 진석은 자신의 재미가 중요했다.

"광신도건 미치광이건 상관없어. 어차피 공주도 교단의 목적에 협력하게 될테니."

"뭐?! 말도 안되는 소리. 내가 그런 정신나간 짓을 도울리가..."

말을 하다가 아차 하는 레오노르 공주. 설마, 또 암살을 빌미로 나에게 무언가 강제적인 협력을 끌어내려는건가 짐작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래봐야 얼마 없는데? 공작가의 장녀라고 해도 가문의 모든 권력은 아버지 해밀턴 공작이 쥐고 있었다. 가문을 승계하지 못하는 이상 자신은 한낱 허울뿐인 왕족 나부랭이. 하지만 진석은 대답없이 술병을 따 잔에 내용물을 채우고 천천히 맛보기 시작했다.

"공주쪽은 별로 마실 기분이 아니겠지?"

이죽거리며 그렇게 말하는 진석. 당연하지, 이 상황에서 술맛이 날리 있을까. 지금 이렇게 대면하고 있는것도 짜증이 나는 판에. 레오노르 공주는 아무 대답없이 진석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대체 뭘 하고 싶은걸까. 결국 자신이 마신 약에 대한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말 한마디 하지 않은채 시간만 흘렀다.

"으... 으음? 뭔가 이상... 앗."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어느순간 띵 하며 강한 현기증을 느끼는 레오노르 공주. 팔시타스의 약기운이 몸에 돌기 시작한 것이다. 머릿속이 뭔가 어지럽고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 그녀의 의식은 저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넋이 나간듯 멍한 표정, 두 눈동자의 촛점도 미묘히 어긋나 있었다. 진석은 술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향해 나직히 말했다.

"나는 헤세스모데우스 교단의 명령엔 무조건 복종한다."

"나는... 헤세스모데우스 교단의 명령엔... 무조건 복종한다..."

백치처럼 진석이 말하는 내용을 따라 읊는 레오노르 공주. 진석은 계속 말했다.

"나는 그란델의 여왕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나는... 그란델의 여왕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세번째. 진석에게 있어선 이것이 가장 중요했다.

"나는 러셀 헤이든을 무엇보다 사랑한다."

"나는... 러셀 헤이든을 무엇보다 사랑한다..."

여기까지는 미리안의 명령대로. 하지만 진석은 여기서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리고 러셀 헤이든의 명령은 교단보다 우선한다."

"그리고 러셀 헤이든의 명령은... 교단보다 우선한다..."

이것은 자신이 깔아두는 포석이었다. 미리안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래왔듯, 진석 자신도 만에 하나를 대비해 자신의 소유물이 될 레오노르 공주를 철저히 이용해볼 생각이었다. 이 한 마디를 심어둔 이상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더라도 레오노르 공주는 절대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미리안은 진석을 완전한 자신의 수하로 삼기 위한 보상이자 먹잇감으로서 레오노르 공주를 던져준 것이지만, 되려 그것을 이용해 자신이 이렇게 할 거라는건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진석은 5분간 몇번이나 더 반복해 레오노르 공주에게 명령을 심어주었다. 계속 진석의 말을 따라 읊기만 하던 그녀는 어느순간 눈동자에 촛점이 돌아오며 제정신을 차렸다.

"아... 으? 머리가 어지러우... 윽."

이마를 짚으며 두 눈을 감고 인상을 찌푸리는 레오노르 공주. 진석은 빙긋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기분은 어때?"

진석이 말을 걸자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레오노르 공주. 그녀는 어째서인지 앗 하고 당황해하며 얼굴을 붉혔다.

"아, 저기 네. 이제 괜찮아요. 잠시 뭔가... 그, 어지러워서."

왠지 허둥지둥 대며 이쪽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핀다. 어떻게 보더라도 사모하는 사람을 눈앞에 둔 수줍은 소녀같은 태도다. 더 확인하고 말것도 없이 개량형 팔시타스의 효과는 아주 잘 적용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

"으..."

진석이 아무 말 없이 빤히 레오노르 공주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얼굴이 새빨개진채 부끄러워 어쩔줄을 몰라한다. 약을 먹기 전, 차라리 자신을 죽이라고 까지 말하며 모든것을 체념하던 사람의 태도와는 완전 딴판이다.

"응, 역시 귀엽네."

"...!"

고개를 푸욱 숙이며 몸둘바를 몰라한다. 뻣뻣하시던 공주님에게도 이런 깜찍한 면모가 다 있었군 그래. 약의 힘을 빌린것이긴 하지만 이제 이 아름다운 공주가 자신을 사랑하며 절대 복종하는 노예가 되었다 생각하니 더할 나위 없이 유쾌했다. 진석은 레오노르 공주를 잡아 일으켜, 침대로 데려가 마주 앉았다.

"아, 그, 으으..."

"왜 레오노르.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뇨. 부끄럽지만... 부디..."

되려 잘 부탁한다는듯 꾸벅 고개까지 숙여온다. 왕족이면서 자신의 정절을 앗아가려는 상대에게 이렇게 나오다니. 공주가 아니라 그저 사랑에 눈이 먼 아가씨로 밖엔 안보인다. 생각해보면 데오그라즈의 왕궁에서 그녀를 처음 본 이후 여기까지 데리고 오며 용케도 손을 안댔구나 싶다. 이제 그 긴 인내를 보상받을 시간이었다. 진석은 레오노르 공주를 품에 안으며 침대 위로 넘어트렸다.

============================ 작품 후기 ============================

그러고보니 본문에서 레오노르 공주의 연령에 대한 묘사가 딱히 없었는데, 주인공이 육체관계를 맺는 대상은 일단 전부 성인입니다. 뭐 이제와서 이런 소리를..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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