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69화 (69/155)

< --   - 6.   -- >         * 69화 *

9일이 지났다. 운 좋게도 그 사이 공주의 가임기가 딱 끼어있었다. 진석은 임신기능을 켜둔채 하루종일 방에 틀어박혀 레오노르 공주의 몸을 탐닉했고, 레오노르 공주 역시 순순히 그의 모든 요구에 응했다. 개량형 팔시타스로 완전히 세뇌당한 지금의 레오노르 공주에게 있어 진석은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상대. 그의 욕구에 따르는것은 마치 사람이 살기위해 호흡을 하는것처럼 지극히 당연한 순리였다. 공주를 상대로 정말 생각나는건 원없이 다 해보았다. 더 생각나는게 없을 정도로 온갖 욕망을 다 채운다음, 그것을 다시 몇 번이고 반복했다. 따로 식사를 하러 나갈 필요도 없었다. 식사조차 신도들이 방앞까지 가져다 주었으니까.

먹고, 씻고, 자는일을 제외하면 계속 몸을 섞었다. 아니, 먹으면서도 관계를 가졌고 씻으면서도 행위를 나눴다. 이전의 게임들은 항상 자신의 대에서 게임을 끝냈기에 진석이 리베라를 하며 여성 캐릭터에게 2세를 가지게 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끝없이 반복하며 확인이라도 하듯 그녀의 자궁 안에 자신의 씨앗을 계속 심어넣었다. 처음엔 미리안의 명령이기도 하고 자신의 육욕과 정복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공주에게 손을 댄것이지만, 게임상이나마 후손을 만든다니 어째 점점 레오노르 공주가 사랑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일째의 점심 식사 이후, 미리안에게서 호출이 들어왔다. 진석은 아침내내 계속된 정사로 지쳐 잠든 레오노르 공주를 홀로 내버려둔채 미리안의 방으로 향했다. 미리안의 방엔 수호자 넷과 아르데나가 함께 모여있었다.

"아, 오셨군요. 지금 막 기본적인 계획의 설명을 모두에게 해둔 참입니다."

"......"

그 와중에 어째 진석을 향해 뚱한 시선을 날리는 제이스. 그도 그럴만했다. 제이스는 진석을 사랑하고 있는데, 자신이 사원 밖에 나가있는 사이 공주와 일주일 넘게 함께 뒹굴기만 했단 말이지? 아무리 계획의 일환이라지만 속이 상했다. 진석이 자리에 앉자 미리안은 한층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방금 설명했다시피 이번 일은 지금까지와의 일보다 더욱 어렵고 힘들것입니다. 목표는 그란델 왕국의 전복, 현재의 국왕인 스테인필드를 몰아내고 우리가 보유한 레오노르 공주를 여왕으로 추대합니다. 그 사전 단계로 우선 레오노르 공주를 해밀턴으로 돌려보내, 그녀가 해밀턴 가문의 가주가 될 수 있도록 뒷공작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이 뒷공작이지 레오노르의 손으로 그녀의 아버지인 해밀턴 공작을 살해하고 가문의 권력을 탈취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다. 미리안은 눈을 빛내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번의 일엔 전원의 협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드레비안, 맥, 머서, 제이스. 그리고 아르데나까지. 원래 아르데나는 제가 잠시 곁에 두고 더 교육을 하려고 했는데... 짧은 기간이나마 그녀의 교육을 도와준 포겔먼 교수의 편지에 따르면 그럴 필요가 없을것 같더군요. 하긴 이전번의 일을 도우며 이미 실전도 경험했다고 하니. 여섯번째 수호자로 인정하고 바로 같이 행동하는걸로 하겠습니다."

그러고보니 아르데나는 대체 무슨 교육을 받고 온거지? 주요 NPC의 목록을 열어 아르데나의 스킬을 확인해봤다. 놀랍게도 그 짧은 기간동안 아르데나는 비페라 라는 이름의 단검 격투술과 해부학을 익혀왔다. 랭크는 비페라가 D, 해부학은 E였지만 지력을 비롯한 기본 스테이터스가 죄다 낮은 아르데나에게 어떻게 단기간내 기술을 가르친건지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다. 비페라는 에스크리마와 비슷한 나이프 파이팅 기술로, 확실히 괴물의 힘을 발휘해 무력과 민첩을 크게 끌어올린 상태의 아르데나라면 근접전에서 자신의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을듯 했다. 아르데나의 복장을 잘 보니 허리춤에 진석이 건네준 흑철단검이 단단히 메어져 있었는데, 손잡이를 감은 가죽끈이 그새 많이 헤어진게 요 9일간 도대체 얼마나 혹독하게 교육을 받은건지 궁금해졌다. 그러고보니 순둥이 같던 얼굴이 어째 약간은 늠름해진것 같기도 하다.

"잠깐. 그럼 러셀은 안갑니까?"

미리안의 설명을 듣던 맥이 질문했다. 어라? 그러고보니 진석 자신 캐릭터의 이름인 러셀을 호명하지 않았었다. 미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러셀 님에겐 따로 지시할 일이 있습니다. 오로지 그 혼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엥? 레오노르 공주와는 더 여한이 없을 정도로 아이 만드는 작업을 했겠다, 이제 틀림없이 그란델의 전복을 시도하러 가는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들 같이 가는데 나만 다른일을 시키겠다고? 하지만 가장 당황스러워 하는건 진석 본인이 아니라 제이스와 아르데나였다.

"하, 하지만 러셀은..."

"이 이상 오빠와 떨어지는건... 싫은데..."

제이스와 아르데나와 떨어져 단독 행동이라. 이건 득이 될까 실이 될까? 어쨌거나 미리안이 결정을 한 사항이라면 뭐 이제와서 이러니 저러니 해봐야 소용없을터. 미리안은 제이스와 아르데나의 불만을 가볍게 묵살하고 말했다.

"드레비안, 맥, 머서는 레오노르 공주를 데리고 해밀턴으로 향합니다. 여기 이 서류. 가짜 신분을 꾸며 놓았으니 여러분이 불한당들에게서 레오노르 공주를 구해낸것으로 위장하고 호위로서 곁에 머무르며 그녀가 어떤 방식으로건 해밀턴 공작을 제거하고 가문을 승계하도록 도우세요. 단, 완전무결의 기사라 불리는 클립튼의 처리에는 필히 주의하시길. 그는 그란델 제일의 기사. 단순히 힘으로 배제하긴 어려울 수 있습니다. 레오노르 공주와 의논해 그를 가문내에서 자연스레 내보낼 방법을 찾는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미리안은 준비한 서류봉투 하나를 남자쪽에게 내밀었다. 다음은 제이스와 아르데나 쪽이었다.

"제시와 아르데나는 데오그라즈로 갑니다. 귀족연맹측과 접촉해 라인을 만들어 두고, 러셀님이 가져온 수첩에 들어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거사를 진행할때 장차 여러 유력자들이 레오노르 공주를 지지할 수 있도록 포섭하는 일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역시 러셀님이 가져온 자금과 제가 준비한 것들을 내어드릴테니 아낌없이 사용하십시오. 금품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물리적 수단을 사용하셔서 제거해도 무방합니다. 빅 본의 인력도 적절히 활용하는게 좋겠지요. 데오그라즈의 생리를 잘 알고 있을 엘리야도 동행시킬테니 함께 협력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은 진석이었다. 그런데 미리안은 평소 짓던것과는 다른 야릇한 미소를 짓는게 아닌가? 원래 자주 미소를 짓는 미리안이었지만 이 표정은 어째...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는거랄까, 아니면 못된 생각이 드는걸 꾹 억누르는 느낌이랄까. 한 마디로는 설명못할 복잡 미묘한 표정이었다. 뭐지?

"러셀님은... 단독으로 아라파로 향해주셔야 하겠습니다."

"...아라파?"

아라파 하니 문득 페레나시의 변태 자매가 운영하는 패커즈 숍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동생인 아네트 쪽이 대환락가인 하디카에서 돈을 너무 쓰는 바람에 어쩌고 저쩌고 했었더랬지. 그런데 왜 나만 아라파로 가라는거지? 미리안은 복잡 야릇한 미소를 지우지 못한채 계속 말했다.

"아라파의 국왕인 알 파지드에게는 알 유세프라는 사촌동생이 있습니다. 수도 시라즈의 재무차관 겸 근위대의 고문이라는 허울뿐인 직책을 맡고 있는 자로, 제가 얼마전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그가 경매장에서 '대지의 눈'이라는 이름의 보옥을 낙찰받았다고 하더군요. 그것을 가져다 주셨으면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문제는?"

미리안은 흠흠 하며 목을 가다듬고,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며 진지한 표정을 한채 설명을 이어갔다.

"이 자의 저택은... 어떻게 보면 데오그라즈의 왕궁보다 침입하기 고약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한 나라의 왕궁보다 침입하기 고약하다니?"

무슨 용이 사는 둥지도 아니고, 그래봐야 사람 사는 집 아닌가. 높은 신분이면 경비나 호위쯤이야 있겠지만 그까짓거, 수백명의 왕실 경비대 사이에서도 폭풍의 지팡이를 훔쳐내온 자신 아니던가. 하지만 미리안의 설명은 예상과는 달랐다.

"얄궂게도 알 유세프의 저택은 왕궁의 바로 앞입니다. 그의 저택 우측으로는 수도 내의 치안을 유지하는 경비대의 본부가 있고, 또 좌측으로는 경비대와 별도로 왕족들을 전담하여 호위하는 근위대의 병영과 막사가 있지요. 즉, 저택의 삼면이 셀 수 없을정도로 많은 병력과 철통같은 검문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상 그 저택 역시 왕궁을 지키는것이나 다름없다고 할까요. 게다가 저택 주변의 수블록 내로는 일반 시민들이 아예 얼씬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물론 저택에도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도 별도의 호위들이 잔뜩 지키고 있을테니..."

뭐냐 그 편집증이라도 걸린것 같은 미친 위치의 저택은. 데오그라즈의 경우 왕궁의 성벽만 믿고 외곽에 병사를 잔뜩 배치해둔덕에 내부는 오히려 허술한 감이 있었지만, 알 유세프란 자의 저택은 아예 그 일대 전체가 다 위험지대라는 이야기다. 근위대에, 경비대에, 뒤는 왕성. 그럼 노릴 곳은 정면뿐인데 그렇다고 놈들이 잘도 어서옵쇼하고 길을 터주겠다. 보나마나 정면 역시 병사나 경비대가 잔뜩 널려있겠지. 조금의 소란이라도 일으켰다간 둘러싸여 포위되기 딱 쉽상일터. 아니, 그럼 이걸 혼자 가서 어떻게 뚫으라는거야?

"그런거라면 아무리 내가 실력이 있어도... 강행 돌파를 한다면 혼자서는 무리인데. 최소한 드레비안과 맥 정도의 실력자라도 동행한다면 모를까."

대련에서 자신과 평수를 이룰정도였던 드레비안과, 그 보다는 한 수 떨어져도 강력한 전사인 맥이 동행한다면 단시간내에 치고 빠지는 습격이 가능할 수도 있을터. 하지만 미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시라즈에서 머물며 제게 정보를 보내주는 수하가 있습니다만, 그의 전언에 따르면 아무리 실력자라고 한들 소수로 강행 돌파는 무리. 도시 전체의 경비대와 근위대에 싸움을 거는 격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철통같다 한들 어디에나 헛점은 있는법이죠. 알 유세프에겐 나쁜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나쁜 습관이라고?"

"네. 알 유세프는... 하디카를 즐겨 찾는다고 합니다. 하디카는 어디까지나 시민과 여행객들을 위한 유희장. 국왕의 사촌동생이라는 지체 높은 신분의 몸이 자랑스레 드나들 곳은 아니죠. 하지만 그는 세간의 눈따위 개의치 않고 하디카를 자주 드나들며 아름다운 무희들을 발견하면 직접 저택으로 데려가 몇날 며칠이고 붙잡아 둔채 즐긴다고 합니다. 마음에 들면 아예 첩실로 삼기도 하구요."

잠깐, 여기서 하디카와 무희라니. 이거 어째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하는데? 진석은 정색하며 말했다.

"...나는 남자라고? 설마 놈을 상대로 남색이라도 하라는 건 아니겠지."

진석의 매력은 미리안의 버프인 세인트 베네딕션의 영향을 받아 현재 42. 현실의 외모와는 관계없이 NPC들 입장에선 정말 눈이 부실정도의 어마어마한 미남으로 보일것이다. 하지만 상대도 남자. 동성애자라도 되는게 아닌 이상 꼬실 수 있을리가 없잖은가? 아니! 꼬실 수 있다고 해도 꼬시고 싶지도 않다! 그런일을 할까보냐! 하지만 미리안은 진석의 지레짐작에 재밌다는 듯 웃었다.

"아하하.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뭐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군요."

"엥? 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야."

짤랑. 미리안은 주머니에서 가느다란 금제 사슬 팔찌를 하나 꺼냈다. 그 팔찌엔 정육면체 모양의 작은 보석이 두 개, 마치 장식처럼 달려있었다. 보랏빛을 내는 보석은 묘하게 영롱해 보이는게 뭔가 마법적인 힘이 깃든 물건 같았다.

"이건 어렵게 구한 물건입니다만... 혹시 성별 반전의 마법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설마! 안 돼, 싫어! 오 제발. 아니라고 해줘. 아까의 그 이상야릇한 웃음은 바로 이런 의미였단 말이냐!

"이 보석 하나당 마법을 한 번 사용 가능합니다. 즉 이 팔찌로는 두 번 성별을 반전 시킬 수 있다는 의미지요.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러셀님은 지금도 충분히 훌륭한 외모를 하고 계시니, 여자로 변한다면 역시 굉장한 미녀가 될테죠. 그 상태로 무희로 가장하여 알 유세프의 눈에 든 다음, 그의 저택에 들어가 보옥 대지의 눈을 가져다 주십시오."

"......"

진석 자신만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게 아니었다. 제이스도, 아르데나도, 맥도, 머서도. 죄다 입을 반쯤 벌리고 이 어처구니 없는 계획에 놀라는 중이었다. 오직 드레비안만이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평정을 유지하고 있을 뿐. 진석은 테이블 위로 쿵 머리를 박았다.

"그냥 제시라도 보내던가... 왜 하필 나한테 이런걸 시키는거야..."

"이번 일은 제시의 외모로는 좀 무리... 아, 아니. 제시도 충분히 미인이긴 하지만, 알 유세프의 눈은 보통 높은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의 마음에 쏙 들 정도의 미인이면서 무사히 저택에서 보옥을 훔쳐내어 달아날 수 있을정도의 실력자가 또 누가 있겠습니까? 러셀님 뿐이지요."

"내... 내 외모로는 좀 무리? 대신관니임?"

흥분하는 제이스. 야 넌 이상한데서 열내지 마라. 진석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궁시렁 거렸다.

"그... 아니. 뭐랄까. 남자로서 도저히 그런짓은 생리적으로 무리랄까... 차라리 이 상태로 어떻게든 처들어가서 훔쳐내올테니까..."

물론 진석 역시 여자 캐릭터로 게임을 진행해본적이 있었다. 하지만 달려있을 곳이 비어있으니 다리사이는 허전하고 가슴은 움직일때마다 흔들거리니 이건 자기 몸 부터가 위화감이 너무 심한데다가, 매력이 조금만 높아놔도 여기저기서 사내 새끼들이 꼬여대는데 정말 보통 짜증나는게 아니라 금방 때려쳤었다. 하지만 미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쪽으로 다가와 진석의 손목에 직접 그 팔찌를 채워주었다.

"팔찌에 달려있는 보석을 가볍게 잡고 마력을 살짝 불어넣기만 하면 됩니다. 화염화살의 마법을 사용하실 수 있는걸로 알고 있으니 스스로 사용 가능할겁니다. 자, 어서 써보시길."

특유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미리안. 평소보다 뭔가 반짝반짝 빛나보이는 환한 웃음이었다. 넌 지금 이게 재밌냐아아아!

'두... 두고보자. 나한테 이딴 일을 시키다니. 끄으으, 배신할거야. 틈을 봐서 교단이고 뭐고 끝장내주겠어. 여자가 원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 남자가 원한을 품으면 그 잘난 신의 강림조차 박살난다는걸 보여주지.'

생각치도 못한 상황에 마음속으로 고이 원한을 품는 진석. 후우 크게 한 숨을 내쉰 진석은 할 수 없이 팔찌에 달린 보석을 쥔 다음 화염화살을 쓴다는 느낌으로 보석을 사용했다. 사용한 보석 중 하나가 환하게 빛을 나며 사라져가고 동시에 마법의 힘이 진석의 몸을 감쌌다.

"큿...!"

샤아아아. 전신에서 빛이 나며 마법의 힘이 진석의 신체를 빠르게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키와 체격이 줄어들며 머리카락이 늘어나는 등 몸의 구석구석이 변화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렇게 십수초쯤 흘렀을까. 빛이 사그라들고 여성의 모습으로 변화한 진석의 모습이 드러났다. 정면에 서있던 미리안은 진석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와... 이건 정말 예쁘... 아니, 아름답네요."

남자에게 아름답다니. 전혀 칭찬이 아니거든? 하지만 옆에 있던 제이스나 아르데나 역시 입을 쩍 벌리고 놀라워했다.

"러, 러셀. 이 정도까지 변할줄은.... 크으윽! 내가 졌어. 여자로서의 뭔가가 완전히 패배했어. 그것도 남자에게! 부... 분해!"

테이블을 탕탕 내려치며 분을 내는 제이스. 아니 그러니까 넌 아까부터 이상한데서 열내지 말라고. 그리고 아르데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얼굴을 붉혔다.

"러셀 오빠... 아니, 러셀 언니... 너무 멋져요."

"...그래? 고맙다고 해야되나? 하아."

대답을 하는데 목소리 역시 톤이 높고 가는게, 외모뿐만 아니라 자신의 음성마저 완전히 달라졌다는게 느껴진다. 한숨을 푸욱 내쉬는데 옆을 돌아보니 맥과 머서도 얼굴을 은근히 붉히는게 보인다. 특히 맥은 이쪽을 빤히 바라보며 콧김을 뿜어댈 정도로 흥분하는게 아닌가? 뭐야 이놈, 정신나갔냐.

"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 임마. 이건 마법이야, 나는 남자라고 남자."

"아니 그야 물론 잘 알고있는데 이게 참... 가슴도 훌륭하고... 역시 제시 정도로는 무리라는 대신관님의 말씀이 백번 옳다는 생각이 들..."

아, 의자가 날아갔다. 제이스가 집어던진 나무의자를 안면에 정통으로 맞고 뒤로 넘어가는 맥. 하지만 하하하 웃으며 금세 일어나는게 정말 근육바보라는 말이 맞긴 맞는것 같았다. 하긴, 자신과 싸웠을때도 엄청 맞았었는데 몇시간 후에 보니 멍은 좀 들었어도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었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뼈라도 몇 군데 박살났을텐데. 그놈 참 맷집 하나는 일품이라니까. 미리안은 후후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진석을 마치 재미난 장난감처럼 바라보더니 제이스를 불렀다.

"그러고보니 제시, 일전에 데오그라즈에서 이것저것 잔뜩 사왔었죠? 화장품부터 시작해서 옷이라거나 구두, 속옷, 장신구 등등. 여러가지를."

"아... 네."

"그것 좀 빌리도록 하죠. 어디 같이 러셀님의 모습을 좀 꾸며볼까요? 누구라도 한 눈에 반할만치 아름답게."

씨익, 사악하게 웃는 미리안. 제이스의 두 눈이 호오 듣고보니 그거 재밌겠는데? 하며 빛나고 있었고 그 뒤의 아르데나 역시 얼굴을 붉힌채 호기심으로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 여자는 진석을 향해 서서히 검은 마수를 뻗기 시작했다. 하, 하지마아아! 내 정신력은 이미 제로라고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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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젠장."

갈론 동쪽의 항구도시 에베스에서 출발한 정기선. 화물과 약간의 승객을 실어나르는 평범한 수송선으로, 그 갑판위엔 흑발의 한 젊은 여성 승객이 바다 풍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바람에 제멋대로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할 생각도 없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그녀. 누가봐도 아름답다는 단어를 떠올릴만한 외모를 한 이 여성의 정체는 다름아닌 진석이었다. 갈론에서 에베스로 단독으로 이동하여 정기선을 탄 진석은 우선 데오그라즈로 향하고 있었다. 아라파의 위치는 대륙 남서쪽. 남동쪽에 위치한 그란델 왕국과는 정 반대의 위치인것이다. 육로로는 말을 타고 이동했을때 한 달 이상 걸릴 먼 길이지만, 배를 타고 대륙 남부의 해로를 타고 이동한다면 기상이나 배의 운항 사정에 따라 조금 차이는 있겠지만 길어도 대략 2주면 닿았다. 시간 절약을 위해 당연히 해로로 이동하기로 했다.

"으... 망할."

그건 그렇고 다리 사이가 허전했다. 그래도 무릎까지는 내려오는 치마건만 바람이 술술 통하는게 도저히 뭘 입은것 같지가 않았다. 옷만 불편한게 아니라 브래지어도 불편했다. 안 그래도 가슴에 무거운게 달려있는데 그걸 받쳐주는걸 또 둘러줘야 한다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애당초 제이스의 속옷은 가슴 사이즈가 안맞아서 입지도 못했다. 결국 다같이 갈론까지 내려와 엘리야까지 합세해서 속옷을 사준다고 난리법석을 떨어댔다. 진석의 가슴을 훌떡 까놓고 여자들이 이건 구십몇 D컵이네 백얼마 E컵이네 하는데 뭔소린지 하나도 못알아 들었다. 속옷 갈아입혀져, 옷 갈아입혀져, 머리를 손질하고 화장을 해대고... 그짓을 계속 당하고 있자니 진짜 자괴감에 목을 메달고 싶어졌었다. 결국 어젠 하루종일 옷과 장신구 고르는법, 속옷 입는법, 화장법 따윌 배우고 여자다운 몸가짐에 대해서도 온갖 소리를 들었지만 죄다 까먹었다. 알게뭐야, 씨. 한 귀로 듣고 바로 흘려버려 기억나는것도 없었다. 좌우지간 아래는 허하지, 위는 불편하지. 여자란 참 대단하구나 싶었다. 남자는 그냥 잘 씻고 적당히 걸쳐입은 다음 밖에 나가면 끝인데. 진석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

진석은 갑판 주변을 스윽 돌아보았다. 괜히 주변에서 일하는 척 하던 선원들이나 바깥 바람을 쐬는척 어정거리던 남자 승객 몇몇이 딴청을 피운다.

'이 시벌롬들이.'

갈론에서 에베스로 이동해 정기선에 타는 수시간 동안에도 뭇 남성들의 뜨거운 시선이나 은근한 추파를 몇 번이나 받았다. 매력 42의 미인은 어딜가든 정말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던것이다.

'남자일땐 이런거 별로 못느꼈던거 같은데 여잔 매력 좀 높다고 뭐가 이래?'

진석이 의식을 안해서 그렇지, 그가 지나쳤던 여성 NPC들은 대부분 호감을 표시했었다. 단지 남성과 여성간의 표현의 차이일뿐. 물론 여성 NPC 중에서도 페레나의 패커즈 숍을 운영하는 르마쿠르 자매같은 경우도 있었지만 그건 지극히 드문 케이스. 남성들은 시선이나 추파섞인 행동으로 다이렉트하게 관심을 표현하는 반면, 여성쪽은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정도가 덜하고 태도가 수동적이라 알아차리기 힘들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제 성별이 역전되어보니 그 차이를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하긴... 내가 남자였어도 이런 NPC가 지나가면 어떻게든 한 번 해보고 싶어서 뭔가 수작을 부렸을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지금의 자신은 엄한 놈에게 순순히 박혀줄 생각은 없었다. 그런 거지같은 경험을 할 것 같냐! 겉은 아름다운 여성이라도 속 알맹이는 남자 그 자체.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평범한 이성애자인 진석이 같은 성별의 상대에게 당하고 싶어할 리는 만무했다.

'알 유세프인지 뭔지 이 개자식. 어디 두고보자. 저택까지만 무사히 잠입하면 바로 모가지를 뽑아버릴거야. 아주 그냥 콱.'

으드득. 이런꼴을 해서까지 게임을 해야하나 회한이 들고 이가 갈린다. 가슴 속 깊은 밑바닥에서 부터 지글지글 분노가 끓어오른다. 으으, 이걸 대체 어디다 풀어야 하나? 갑판의 난간을 쥔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으지직.

"...아차."

난간의 모퉁이가 손모양 그대로 찌그러지며 약간 부숴졌다. 과연 무력 48의 괴력. 힘을 좀만 더 줬더라면 그대로 뜯어낼수도 있었으리라. 으, 설마 누가보면 변상하라고 하는건 아니겠지. 다시 한 번 주위를 휘휘 돌아보았는데... 아직도 선원들이나 다른 남자 승객들이 근처에서 얼쩡댔다. 대체 뭐냐 너넨, 뭔 똥파리라도 되냐? 저리 안꺼져? 별 일도 없으면서 주변에서 어슬렁 대는데 정말 신경에 엄청 거슬린다. 차라리 사람의 이목이 없는곳으로 좀 들어가 있음 좋겠는데, 이건 대형 여객선 같은게 아닌 작은 수송선이라 선실이라고 해봐야 그냥 공용으로 쓰는 큰 방이다. 이 배를 타고 앞으로 이틀하고 반나절은 더 가야 데오그라즈인데.

'돌아버리겠네. 아니지. 이럴때일수록 침착하게 소수... 소수를 세자.'

하지만 뒷통수나 온몸 여기저기에 계속 따가울 정도로 느껴지는 시선. 그냥 얼굴만 쳐다보는건 이해하겠지만 가슴이나 다리를 쳐다보는건 뭔가 울컥하고 만다. 전엔 그냥 바라보는걸로 성희롱이네 뭐네 호들갑떠는 여자들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었는데, 직접 겪어보니 아주 이해가 잘 갔다. 야 이거 진짜 기분 나쁘긴 하구나. 이래서야 소수고 나발이고 세어지겠냐! 다 쥐어패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그냥 선실로 들어갔다. 차라리 어디 구석자리에 얌전히 앉아서 잠이라도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잘 알아두세요. 선생은 한동안 고추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에, 다시 말해서 성관계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오. 에, 마법이 가장 중요한 것을 뺏어갔단 말입니다.

사실 이 부분을 쓰면서 주인공의 성별이 잠시 전환되는 전개로 할지,

아니면 주인공이 팔찌를 받아든채 아라파로 가되, 결국 쓰지 않고 강행돌파를 시도하고 팔찌는 다른 인물에게 써버리는 전개로 갈지 고민했었는데... 그냥 고추 떼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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