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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70화 (70/155)

< --   - 6.   -- >         * 70화 *

이틀 후 저녁 무렵. 수송선은 데오그라즈의 항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도크 여기저기에 불타 망가진 배들이 꽤나 많이 보였다. 다 타진 않고 일부만 전소되어 손상된채 방치된 배들이었다. 심하게 망가져서 운항이나 수리는 못 할 상태고, 그렇다고 폐기하자니 돈이 들고. 결국 흉물이 되어 그대로 남겨져있는 배들이었다.

'음... 내가 한짓이지만 참... 아, 몰라. 나는 모르는 일이야. 하하호호.'

고개를 휘휘 저으며 가방을 메고 배에서 내리는 진석. 그나마 배에 있는동안 남자들이 주변에서 얼쩡거리기만 하지, 그 이상의 행동은 해오지 않은게 다행이었다. 만약 누가 와서 건드리기라도 했다간 피떡이 될때까지 패버렸으리. 그랬다간 당연히 난리가 났겠지. 아무튼 좁은 배를 벗어나 땅을 딛고 내려서니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원래대로라면 야간 운행선을 찾아서 하루라도 빨리 아라파로 향해 떠나야 할테지만... 근 사흘을 배에 갇혀 지냈더니 스트레스로 머리가 이상해질 지경이다. 최소한 오늘밤은 데오그라즈에서 묵고 내일 낮에나 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선착장 지구를 지나 도심으로 향하려는데 주변에서 이미 한 잔 거하게 걸친 선원들이 진석을 보고 휘익거리며 농을 던져댔다.

"오 아가씨, 예쁜데? 어디가는 길이야?"

"어어이! 배고프지 않아? 내가 낼테니 같이 식사 어때?"

"흐흐, 저 가슴 좀 봐라 저거. 한 번 시원하게 주물러 봤음 원이 없겠네."

이 병신새끼들이 아주 떼로 지랄합창을 하고 있네. 진석은 그들을 깔끔히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이런데서 저런것들을 일일이 상대했다간 한도 끝도 없을터. 그나저나 이래가지곤 스트레스가 쌓여 안되겠는데. 히잡 같은거라도 사서 쓰고 다녀야 하나? 아니, 괜히 그런걸 뒤집어 썼다간 이목만 더 끌겠지. 그렇다고 달리 얼굴을 가릴만한 수단이 떠오르는 아니고 으으음. 뭔가 수를 내긴 내야 이런 꼴을 안당할거 같은데 뭔가 좀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런데 그때였다.

"이 썅년이! 그거 내놔!"

"꺄아악! 누가 좀 도와주..."

"아가리 안 닥쳐?!"

저쪽의 어둡고 으슥한 골목 안쪽. 왠 남녀가 실갱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보니 남자쪽이 여자가 든 꾸러미 같은걸 뺏으려 하자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고, 남자가 손을 휘둘러 뺨을 때리고 있는 참이다. 과연 치안이 안 좋은 선착장 지구다운 풍경이었다. 평소같으면 뭐 그러거나 말거나 니들 팔자지~ 하면서 지나칠 장면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진석은 평소와 달리 스트레스가 상당히 쌓여있던 참이었다.

'뭐 불의는 나도 평소에 많이 저지르는거라 딱히 벌해주겠다 이런 생각은 아니고... 너는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라.'

진석은 배낭을 꽉 맨체 골목 안으로 빠르게 달려가 쓰러진 여자를 짓밟으려는 남자에게 쇄도했다. 남자는 길 저편에서 갑자기 왠 여자가 바람같이 달려들자 화들짝 놀랐다.

"뭐, 뭣...?!"

"뭐긴 뭐야 이 새끼야, 내 주먹하고 통성명이나 나누렴."

빠아악! 달려들며 그대로 내지른 라이트 스트레이트. 남자는 안면에 정통으로 주먹을 맞고 그대로 뒤쪽의 벽으로 날아가 쿵 하고 등을 부딪힌 다음 바닥에 엎어졌다. 때릴때의 느낌으로 보건데 아마 남자의 앞니는 두 개쯤 부러진것 같았다. 거 앞으로 뭐 단단한거 깨물어 먹긴 힘들게 됐군. 진석은 바닥에 떨어진 꾸러미를 주워 옆에 쓰러져있던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괜찮아요?"

"아, 고... 고맙습니다."

꾸러미를 받아들고 몇번이나 반복해서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는 여자. 그런데 복장이 좀 야시시하고 가슴이 지금의 진석 이상으로 매우매우 큰게... 그러고보니 어째 낯도 뭔가 좀 눈에 익다? 분명 어디선가 이 여자를 한 번 본 기억이...

"헉, 레드라인!"

그렇다. 이 여자는 이전 빅 본의 부탁으로 레드라인을 공격할때 보트하우스에서 구해줬던 바로 그 창녀였다. 레드라인의 두목을 상대로 폭행과 질식플레이를 당하고 의식이 없는채로 강간당하던것을 진석 자신이 구해 안전한곳까지 옮겨다 줬었는데... 그냥 스쳐지나가는 가변 NPC라고 생각했건만, 설마 그때의 구조가 상호작용으로 간주되어 아직까지 도시내에 남아있었단 말인가? 창녀는 진석이 무심코 입밖으로 레드라인이라는 소리를 내자 깜짝놀랐다.

"네? 레, 레드라인?"

"아... 아니. 그... 저, 저 남자가 혹시 레드라인 패거리는 아닌가 싶어서."

허둥지둥 쓰러진 남자를 가르키며 변명을 하는 진석. 창녀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레드라인은 완전히 괴멸되었으니까. 지금 이 거리는 빅 본이라는 조직이 지배하고 있어요."

"어, 음. 그러면 다행이네요. 뭐 그럼 저는 이만..."

"저기!"

진석이 어물거리며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진석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멈춰세우는 창녀. 그녀는 잠깐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진석을 향해 애써 미소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니... 도와주셨으니까, 그... 저, 저녁이라도 한 끼 대접해드리고 싶어서."

"......"

그냥 거리의 창녀라서 별 생각없이 상대했는데, 보기보단 예의가 있는 사람 같았다. 아니. 잘 보니 옷깃을 쥔 그녀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진석은 그제서야 알아챘다. 이건 진짜 고마움의 표시로 밥 한 끼 대접하겠다는게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손길이었다.

'이런...'

나 갈길도 바쁜데 여기서 이런 혹을 달고 다닐수는 없다. 하지만 애써 미소를 짓는 그녀의 애처로운 얼굴을 보고있자니 어째 측은지심이 들었다. 게다가 아까 저 남자에게 한 대 맞아 뺨도 빨갛게 물든데다 입술까지 살짝 터져 있었고... 아오 정말. 이 창녀는 대체 뭔데 나랑 이렇게 얽히나 모르겠다. 진석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내가 아는 가게로 가죠."

"아, 네!"

이제서야 조금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 창녀. 진석은 앞장서서 그녀를 데리고 선착장 지구를 빠져나와 선셋대로 방향으로 향했다. 처음엔 근처의 적당한 가게로 가는건가 싶어하던 그녀는 진석이 비싸다 못해 살인적인 물가를 자랑하는 선셋대로로 자신을 데려오자 식겁했다.

"저기... 여긴..."

"괜찮아요. 내가 대접할테니까."

"네? 아니아니, 도움까지 받고 그런 신세를 더 질수는..."

"에이, 기왕 한 번 신세 진거 안면 몰수하고 그냥 그런가보다~ 해요. 나 돈 많으니까 걱정말고."

진석이 이렇게 나오자 되려 당혹스러워 하는 창녀. 진석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뭐 이렇게 된거 일단 통성명이라도 하죠. 나는... 에나. 에나 필즈. 그쪽의 이름은 뭐죠?"

어차피 성별도 여자로 바뀌었고, 본명으로 활동할수는 없는 상황. 진석은 가명으로 에나의 이름을 쓰기로 마음먹었었다. 나는 참 작명센스도 없지. 자꾸 죽은 사람의 이름을 빌려 쓰고 만다. 래스커도 그랬었고 이번엔 에나까지. 미안 에나, 이쯤은 용서해줘.

"저는 셀린이에요. 셀린 보스크."

"반가워요 셀린. 그나저나 아까 거기선 뭘 하고 있었어요? 선착장 쪽은 질이 안좋은 동네인데."

셀린이 무슨 일을 하는지 다 알면서 일부러 묻는 진석. 뭐 초면에 '그쪽 창녀죠? 나는 다 알지롱. 내가 댁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었는데 기억은 하실랑가?' 할 순 없는거 아닌가. 셀린은 잠시 우물거리며 뜸을 들이더니 겨우 대답했다.

"사실... 데오그라즈를 떠나려는 참이었거든요."

"응? 이사라도 가는거에요? 아. 여기. 이 가게 괜찮던데. 자자, 일단 들어가요."

외관부터 '여긴 비쌉니다. 진짜 비싼 가게에요.' 하고 과시하는 듯한 인테리어. 이전 카야때문에 불려나가 레드라인의 잔당들과 일전을 벌였던 르 아시에뜨와 비슷한 수준의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폭풍의 지팡이를 무사히 훔쳐내고 제이스, 아르데나와 함께 종일 쇼핑하던날 극장에서 연극 상연을 감상하고 여기서 저녁식사를 했었는데 분명 꽤나 맛있었던 기억이 있다. 진석은 가게앞에서 머뭇거리는 셀린의 등을 뒤에서 떠밀며 억지로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안쪽에서 연미복 비슷한 유니폼을 입고 있던 남직원은 가게로 들어선 셀린의 옷차림을 보자마자 노골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서오십시오. 예약은 하셨습니까? 현재 가게가 만석이라..."

그때 셀린의 등뒤에서부터 앞으로 슥 나서는 진석. 마치 합장을 하듯 양 손을 모은채 그 남직원을 향해 활짝 웃어보이며 말했다.

"안했는데, 두 명. 어떻게 안될까요? 부탁드려요."

진석을 본 그 남직원은 순간 흡 하며 얼굴을 붉히더니 이내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진석과 셀린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드, 들어오시죠. 이쪽입니다. 아... 아마 예비석이 남아있을겁니다."

'아니 이게 먹히네. 편한데?'

혹시나해서 한 번 가벼운 애교를 떨어봤건만 직빵이다. 이거 뭔가 세상 참... 불공평하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새삼 남자라는 생물의 비애를 느꼈달까. 자기가 해놓고도 어째 미묘한 기분이었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가게 안은 실제로 거의 만석에 가깝긴 했지만 그래도 몇 곳 빈 자리가 남아 있었고, 남직원은 그 중 가장 좋은 자리로 진석과 셀린을 안내해 주었다.

"와- 고맙습니다. 친절하시네요."

대충 던지는 진석의 영혼없는 멘트. 하지만 남직원은 느끼한 미소를 띄워보이며 정중히 허리를 굽혀보였다.

"천만의 말씀을. 즐거운 저녁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남직원이 돌아가고 나서 진석은 테이블에 턱을 괴며 주변을 두리번대는 셀린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까지 얘기 했죠? 아. 데오그라즈를 떠나려는 참이라는 부분까지였나?"

"네... 음... 저. 초면에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까 모르겠지만..."

눈을 내리까는 셀린.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녀가 무슨 이유로 데오그라즈를 떠나고 싶어하는진 몰라도, 사정 설명을 하려면 자신의 직업이나 상황등을 설명해야 할 터.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의 부분부터 말을 꺼내기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도와줬다고 해도 초면의 상대에게 저는 창녀에요, 몸을 파는게 직업입니다. 이렇게 쉽게 말할수가 있겠는가. 진석은 머뭇거리는 그녀를 향해 손을 들어보이고 대신 말을 꺼내었다.

"괜찮아요. 셀린씨 쪽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대충 짐작 하고 있으니까."

"아..."

그리고 진석의 머릿속엔 이전 엘리야와 러프야드에서 했던 대화의 일부가 떠올랐다. 아마 가슴의 크기 이야길 할때였던가? 분명 엘리야는 '상관없어! 가슴의 크기로 사람의 가치까지 정해지는 건 아니야! 정도의 말은 해줘야지!' 라던가 뭐라던가 했었다. 어디, 여기선 그 말을 조금 응용해서...

"상관없어요. 무슨 일을 하는가로 그 사람의 가치까지 정해지는 건 아니니까."

그 말에 셀린의 눈이 크게 떠지는것이, 꽤나 충격을 받은듯했다. 말 없이 진석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엔 감탄이 담겨있었다.

"대, 대단하네요 에나씨는. 이런건 여자로서 할 수 있는 가장 부끄럽고 낮은 직업인데... 그렇게 생각해주는 사람은 처음이라서..."

'아니, 나는 그냥 주워들은 말을 적당히 써먹은건데 뭘.'

셀린이 뭐라 다시 말하려는 찰나 테이블로 웨이터가 메뉴판을 가지고 다가온터라, 진석은 적당히 추천메뉴 2인분을 주문하고 술도 한 병 주문했다. 여자 둘이니 잔 단위로 시켜도 되었을테지만 진석은 여자가 아니다. 겉 껍데기만 여자일 뿐 알맹이는 평범한 남자. 원래 술따위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켜댔었다. 잔으로 시켜선 간에 기별도 안갈터. 게다가 기왕 도와준 셀린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일단 술이 넉넉히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진석은 셀린과의 대화를 다시 이어갔다.

"그래서, 데오그라즈를 떠나려는 이유가 뭐에요?"

"한심한 이유지만... 이 도시가 무서워서요."

"무섭다?"

"네. 사실 저는 이 일을 시작한지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어요. 데오그라즈에 상경해서 처음엔 주점에서 여급일을 했었는데, 고향의 남동생이 사기를 당해 큰 빚을 졌다는 연락을 해오는 바람에...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은 생각에 레드라인에게서 돈을 끌어다 변통해줬어요. 하지만 레드라인쪽의 빚독촉이나 이자 요구가 갈수록 심해지고... 일터에서도 난동을 피워대는 통에 잘리고, 결국 그들이 시키는대로 강제로 창관에서 일하게 됐죠."

가족의 빚때문에 고리대금을 끌어쓰고 수렁에 빠지고... 거의 가나다 수준의 아주 전형적이고도 흔해빠진 패턴이었다.

"4개월 쯤 일했는데 한 번은 레드라인의 두목이라는 사람에게 불려가서... 그... 괴, 굉장히 심한일을 당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뒷골목 으슥한데 버려져있고... 그땐 정말 무서웠어요. 사흘동안 잠도 한 숨 못자고 계속 울었어요."

진석 자신이 그녀를 구해줬을때의 일을 말하는 모양이다. 그때의 공포가 아직도 남아서인지 셀린의 손이 약간 불안한듯 떨리는게 보였다. 셀린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레드라인은 항쟁 끝에 패배해서 와해되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창관의 창녀들도 다 붕 떠버렸지요. 대부분은 고향이나 다른 도시로 떠나갔어요. 이 일 외엔 달리 생계를 이어갈 줄 모르는 몇몇은 거리의 창녀로 남거나 빅 본이 운영하는 곳으로 흘러들어 간 것 같지만... 아무튼 제가 레드라인에 진 빚도 어느샌가 흐지부지 되서... 더 이상 이 데오그라즈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으니 저도 떠날 생각이었어요. 폭력조직간의 항쟁에, 엄청 높은 귀족이 암살되었다고 하지 않나, 도심 한가운데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 공주님을 납치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에, 온 도시를 혼란에 빠트렸던 의문의 대화재까지... 지금의 데오그라즈는 너무 혼란스러워진데다 실제로 치안도 굉장히 많이 나빠졌어요."

"......"

지금 셀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일들은 전부 진석 자신이 연관된 일들 뿐이다. 그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 눈 앞에 있는 자신이라는 말을 하면 그녀는 과연 믿어줄까? 그때 주문했던 술이 먼저 나왔다. 진석은 셀린의 잔을 채워준 후, 자신의 잔도 자작하곤 잔을 내밀어 보였다.

"일단 한 잔 하죠. 아참, 입술 괜찮아요? 술 마셔도 되려나."

"괜찮아요. 소독하는 셈 치고 마시죠 뭐."

흔쾌히 잔을 들어 건배를 나누는 진석과 셀린. 과연, 사흘동안 선창에 처박혀 남자들 시선이나 의식하며 스트레스를 잔뜩 쌓아오다 간만에 마시는 술맛은 엄청 달았다.

'캬, 이거 무슨 꿀물이네 꿀물. 현실에서만 술이 단 날이 있는게 아니라 게임에서도 이런걸 느낄줄이야.'

진석은 잔을 단번에 원샷으로 비우고 다시 잔을 채우며 셀린에게 물었다.

"그래서... 데오그라즈를 떠나면 어디로 갈거죠? 고향?"

"...아뇨. 이제와서 제가 어떻게 고향에 가겠어요. 고향을 떠나면서 했던 결심도 하나도 이루지 못했고... 어쨌건 동생의 빚은 갚아줬으니까요. 걔도 이제 어른이니 자기 앞가림은 이제 알아서 잘 해나가겠죠. 저는 아라파로 가볼 생각이에요."

"아라파에?"

설마, 하디카? 하디카에 일하러 가려는건가? 셀린은 진석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의미를 눈치챘는지 술잔을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왕 이렇게 된거 아라파의 하디카에 가서 일하려구요. 몇 년 꾹 참고 일하면 작은 가게를 얻을 정도의 돈을 모을 순 있겠죠."

창녀들의 수입은 생각외로 좋은 편이다. 단, 창관에 소속되어 일하는 경우 숙식과 안전은 제공받지만, 그곳을 운영하는 조직이 이런저런 이유로 수입의 대부분을 가져가기때문에 벌이가 박한것이다. 그래서 거리에서 혼자 영업하는 창녀들은 중간에 떼이는 몫이 없으니 의외로 많은 수입을 벌어들였다. 손님이 그렇게 많으냐고? 항구도시인 데오그라즈다. 언제나 사람과 선원들이 넘쳐나는 곳이다. 창녀를 원하는 손님이야 지나칠정도로 널려있었다. 대신 거리의 창녀들은 보호해주는 이가 없으니 폭력이나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게 문제랄까. 창관에 들어가 숙식을 제공받고 조직의 보호를 받는대신 적은 수입으로 만족하느냐, 혼자서 거리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일하는대신 재주껏 벌어들이느냐. 뭐 그런차이였다.

그리고 창관에 소속된 창녀들의 벌이가 박하다곤 했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일에 비하면 훨씬 많이 버는 편이었다. 게다가 지명을 받을 정도의 인기인이라도 된다면 조직측에서도 수익 배분을 조정해주거나 여러가지로 신경을 써주기 마련이니... 그런식으로 쉽게 큰 돈을 벌다 평범한 일을 하려면 분명 적응이 쉽지 않을것이다. 기껏 수십분, 혹은 한 시간 가량 남자와 잠시 상대해주는걸로 은화나 금화를 벌어들이는 일을 해왔다면 평범한 일을 해서 버는 수입은 당연히 한심해 보이겠지. 아마 셀린도 짧은 기간이나마 창녀일을 해온터라, 몸을 팔아 큰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당연히 여기게 된 듯 했다. 기껏 레드라인에게서 해방되었으니 정상적인 일자리를 찾아도 될텐데 새로 하디카로 옮겨 일을 하겠다니... 그래도 그것은 그녀의 선택이었다. 진석이 왈가왈부할 이유도 없었고,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어째 안쓰러웠다. 단순한 동정에서 한 일이긴 하지만 한 번 자신이 목숨을 구해준 대상인데, 기껏 자유를 찾았음에도 또 다시 험한 그쪽일에 발을 담구려 들다니.

"다른 일을 할 생각은 없나요?"

"......"

진석의 말에 조금 슬픈 표정을 지어보이는 셀린. 그녀는 술을 한 모금 들이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이미 더럽혀졌으니까요. 앞으로 어딜 가더라도, 또 무슨 일을 하더라도, 설령 아무도 내 과거를 모르는 곳으로 가더라도... 이 기억만큼은 꼬리표처럼 날 따라다닐거에요. 외면하고 부정하느니... 그냥 받아들일거에요. 이렇게 살아가기로 마음 먹었어요."

창녀는 돈 몇푼에 웃음을 팔고 쉽게 다리를 벌려주는, 욕망을 채워주는 자판기 정도로 생각했던게 사실이다. 물론 현실에서 성매매따윌 한 일은 없었지만 이것은 게임이니 이전 플레이땐 아무렇지도 않게 여러차례 이용했었다. 돈을 뿌리고 마음대로 범하고... 하지만 셀린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어째 자신이 부끄러워지는게 마음 한 켠이 씁쓸해졌다. 참 게임주제에 사람 여러모로 생각하게 만드는구나.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술잔만 비우는 사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자 그럼. 우선 먹죠."

"...네, 고마워요 에나씨. 잘 먹을게요."

뭐 음식맛이 어떻네,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음식이 뭐냐 등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마쳤다. 계산을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서자 셀린은 진석에게 90도로 허리를 꾸벅 굽혀보였다.

"정말 고마워요 에나씨. 도와주신데다 맛있는 식사까지 얻어먹고."

"아뇨, 별거 아니에요. 그보다... 지금부터 야간 운행선을 타고 데오그라즈를 떠나실거에요?"

"네. 그럴 생각에 배를 타러 가다 불한당을 만난거였는데... 아참. 그러고보니 에나씨는 어디로 가시는 길이죠?"

"어... 그게 사실은... 저도 아라파로 향하는 길이긴 한데."

진석의 대답에 우왓하며 좋아하는 셀린. 그녀는 진석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간곡한 태도로 부탁해왔다.

"저, 정말요? 그러면 실례가 아니라면 같은 방향이니 아라파까지 함께 동행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실 혼자 가려고 마음먹긴 했지만 또 아까같은 일을 당할까봐 무섭기도 하고... 에나씨는 주먹 한 번 휘둘러서 남자를 쓰러트릴 정도로 강하니까요."

결국 혹이 붙고 마는가. 끄응. 하긴 이제와서 싫으니 따로 갑시다 하는것도 이상하겠지. 뭐 멍청하니 혼자 다니는것보단 잠시 동행할 말벗이라고 생각하자. 혼자서 남자들 시선에 짜증내고 있는것보단 누가 옆에 있으면 조금이라도 낫겠지. 진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셀린은 기쁜 표정으로 진석을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데오그라즈에 온 이후 에나씨같이 친절한 분을 만나긴 처음이에요."

'우와 이거 가슴이 엄청 좋... 은게 아니라 다, 답답하잖아!'

그렇지 않아도 큼직한 가슴을 한 셀린이 진석을 끌어안으니 기분이 좋은게 아니라 자기 가슴까지 같이 눌려 숨이 턱 막힐정도로 답답하다! 남자라면 좋았을텐데, 이게 뭐야 흑흑. 진석은 자연스레 셀린을 떼어놓으며 말했다.

"뭐 지금 당장 배를 타러 가기도 그렇고... 하루 묵었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죠."

"아 그럴까요? 그런데 저는 제가 쓰던 방을 다 정리하고 나온참이라 그럼 어디 여관에라도..."

"에이, 여관은 무슨. 따라와요."

기왕 데리고 다니기로 했으니 사소한 경비정도는 내가 부담하지 뭐. 진석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셀린이 그간 창녀일을 했다지만 뭐 얼마나 벌었겠는가? 빚 때문에 창관에 넘겨진거니 대부분 떼였을텐데. 셀린을 끌고 로엔 호텔쪽으로 향하는 진석. 셀린은 아까 레스토랑에 들어갈때처럼 쭈뼛거렸지만 진석은 익숙히 대금을 치르고 적당한 방을 하나 빌렸다. 객실은 2층 이었다. 객실을 향해 올라가는 동안 셀린이 진석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기, 에나씨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세요?"

'엑.'

그러고보니 그런쪽의 변명은 그다지 둘러댈걸 생각해보지 않았다. 애당초 동행이 생길거라 예상하지도 않았었고, 머릿속에 있는 생각이라곤 '1. 아라파로 간다, 2. 알 유세프의 눈에 든다, 3. 알 유세프의 머리를 뽑는다, 4. 보옥을 탈취한다.' 딱 이 정도 밖에 없었으니. 진석이 당황해서 말을 못하고 있자 셀린은 멋대로 진석의 정체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강하고, 돈도 많은것 같고... 호, 혹시 어딘가의 높은 신분인가요?"

"아니 딱히 그런건 아닌데..."

"그럼요?"

순수한 의문을 담아 진석을 바라보는 셀린. 뭐라고 적당히 말해두긴 해야할텐데 대답이 궁해서 말문이 막혔다. 그때 복도에 다른 손님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지나갔는데, 진석의 얼굴과 셀린의 압도적인 가슴 양쪽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이쪽을 쭉 바라보며 걸어갔다. 진석은 목소리를 죽인채 속삭였다.

"...저, 그... 사람들 앞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긴 아니니까 일단 방으로 들어가서."

"아! 미안해요. 제 생각이 짧았네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끝으로 자신의 입을 막아보이는 셀린. 다 큰 처자건만 그런 행동은 어째 나름대로 귀여워 보였다. 복도 끝에 다다라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최상층의 특실만큼 크고 화려한 방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넓찍하니 두 사람이 쓰기엔 충분히 여유로워 보였다.

"와아, 좋은방."

품에 들고 있던 짐 꾸러미를 한쪽에 내려놓고 방안을 둘러보며 좋아하는 셀린. 일반 객실로도 이렇게 좋아하면 특실을 봤을땐 눈이 휘둥그레지겠군. 진석도 한켠에 배낭을 내려놓고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휘이잉. 밤바람이 안으로 들어와 커튼과 진석의 긴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하아..."

한 숨을 내뱉으니 숨결에서 술냄새가 감도는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딱히 취기가 도는것은 아니었다. 셀린과 둘이 나눠 기껏 반 병 조금 더 마신건데 그걸로 취할리가. 그나저나 뭐라고 둘러대야 그럴듯해 보일까? 잠시 밤바람을 맞으며 생각을 떠올리던 진석은 셀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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