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베라 - 부회의 방랑자-72화 (72/155)

< --   - 6.   -- >         * 72화 *

배는 리베라의 세계에선 가장 우수한 이동수단. 많은 화물 및 승객을 빠르게 수송 가능했다. 일반 승객이 탈 수 있는 배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었는데, 바로 일반 수송선과 여객선이었다. 일반 수송선은 진석이 에베스에서 데오그라즈로 오며 이용했던것과 같은 종류의 배. 화물과 승객을 함께 실어나르는 배로, 화물을 옮기고 남는 자리에 승객을 덤으로 실어 나른다는 느낌이었다. 2~3일 거리의 비교적 가까운 거리의 항구간에 많이 이용되며 가격 역시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 대신 객실의 구분같은 것 없이 커다란 방 한두개를 승객들이 공용으로 쓴다거나 서비스의 질적인 면에선 전혀 기대할 수 있는게 없었다.

여객선은 그와 반대로 처음부터 승객만을 위해 고안된 운송수단. 요금에 따라 객실을 차등선택해 이용 가능했고 배 내부에도 탑승자를 위한 여러가지 부대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단 화물을 나르는 일반 수송선보단 운행속도가 느리고 중간중간 항구마다 기항하여 물자 보급을 자주 해야 했다. 여객선이 크면 클수록 더 내부 시설과 서비스의 질이 올라갔으며, 아예 귀족이나 부자만을 상대로 운행하는 호화 유람선도 존재했다. 여객 터미널 앞에서, 셀린은 잠시 고민하다 일반 수송선을 타는쪽의 창구로 가려고 했다.

"그쪽이 아니에요. 우리가 탈 건 이쪽."

진석은 셀린을 붙잡고 여객선을 탈 수 있는 방향을 가르켰다. 터미널의 창구 앞, 사람이 손수 갈아끼우는 타입의 패널칸엔 [ 아라파 - 수도 시라즈 행 정기 여객선 / 정오 출발 ] 이라고 적힌 패널이 들어있었다. 진석이 여객선쪽 창구를 가르키자 어쩔줄 몰라하는 셀린.

"그치만... 저기, 여객선은 많이 비싸니까... 너무 많이 폐를 끼쳤는데 에나씨에게 뱃삯까지 내달라고 할 순 없어요."

"나 돈 많다니까요. 겨우 뱃삯따위야."

일반 수송선이라면 은화로 해결될 금액도, 여객선이라면 금화로 치뤄야한다. 그나마 이용하는 객실이 3등칸이라면 그나마 저렴하겠지만 2등칸이나 1등칸만 되어도 그 가격은 배로 뛰어오른다. 하지만 진석에겐 그래봐야 금화 몇 닢 차이. 돈은 썩어날만큼 있으니 이깟 뱃삯 그냥 푼돈이었다. 진석이 이번 임무를 떠나며 준비한 돈은 약 금화 3천 3백닢에 달했다. 3백닢 가량은 금화로, 이전 빅 본의 금고에서 훔쳤던 돈주머니를 그대로 들고온 것이고 나머지 3천닢은 피터슨의 금고에서 얻은 금괴를 3개 넣어온 것이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단독으로 큰 일을 하러 가는 길에 이렇게 거액을 들고 다닐 필요는 없을테지만, 만약의 사태라는게 있으니 이 정도는 준비해두고 싶었다. 유사시에 타지에서 믿을 수 있는거라곤 돈 밖엔 없었으니까. 물론 가능한 이 금괴를 쓸 일이 없길 바랬다. 진석은 자신과 셀린몫의 1등칸 대금을 치르곤 표를 받아 배에 올랐다. 하지만 어제부터 진석이 계속 대금을 다 치뤄서일까. 셀린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그냥 일반 수송선을 갈아 타면서 가면 훨씬 싼데... 제가 동행하자고 하긴 했지만 너무 폐를 끼치고 있는것 같네요."

"이제와서 무슨 말이에요. 괜찮다니까요, 자자."

하긴 이런 평범한 창녀 여캐, 딱히 특별히 대접해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뭐... 어젯밤의 경험은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었다. 소프트한 터치나 커닐링구스 정도의 애무만으로 갔던터라 가슴속 한구석엔 여전히 불완전 연소라는 느낌이 남아있었긴해도, 셀린 정도의 동행이라면 아라파까진 나름대로 심심하진 않을것이다. 그리고 뭣보다 가슴이 크잖아. 보고 있어도 좋고 만지면 더 좋고 얼굴을 파묻으면 더더욱 좋다. 물론 현재 자신의 가슴도 충분히 크고 보기 좋다만... 셀린이 만져주면거라면 모를까, 스스로 자기 가슴을 만지고 있으면 어딘가 굉장히 서글퍼진다.

'오, 그나저나 배 제법 큰데. 데오그라즈로 오면서 탄 수송선은 이 배에 비하면 조각배 수준이었군."

진석과 셀린이 탄 여객선의 이름은 멜리사 호. 호화라는 수식어가 앞에 붙을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제법 크고 좋은 여객선이었다. 진석과 셀린은 승선 후 선원에게서 표와 방 열쇠를 교환한 후 넓직한 갑판을 따라 선실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선착장 저편에서 또 다시 익숙한 두 여성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는게 보였다.

"...엑."

"왜 그래요? 아. 저건 아까 그..."

진석이 바라보는 방향을 눈치챈 셀린. 두 델 그로도 여성이 여객선쪽의 창구로 가서 티케팅을 하고 있었다. 그녀들도 이 배 멜리사 호에 탑승하려는 모양이었다. 금세 표를 끊고는 자기들끼리 계속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승선하기 위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뭐야. 그냥 데오그라즈에 볼일이 있어서 온줄 알았더니... 서, 설마 쟤들도 아라파에 가는거냐?!'

저 자매가 아라파에 간다면 보나마나 목적은 하나뿐일거다. 하디카겠지.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하필 지금 하디카로 가려는건데? ...아니 잠깐. 그러고보니 크리스 란비언을 살때... 자신이 분명 그녀들에게 무려 금화를 백닢이나 지불했었다. 진석이 자주 들른 선셋대로의 물가가 워낙 비정상으로 높아서 그렇지, 사실 금화 백닢이라는 액수는 일반 노동자의 수년치 임금. 먼 나라까지 여행을 가도 장기간 체류하며 실컷 놀고 오기에 넉넉한 액수였다. 시라즈의 하디카도 물가가 그닥 싼곳은 아니지만 선셋대로만큼 비정상적으로 비싼곳은 아니니 둘이서 금화 백잎이라면 한동안 원없이 즐길 수 있을터였다.

'결국 또 내 탓이냐아아! 괜히 호기를 부려선... 아이고오.'

어처구니가 없어서 난간을 붙잡고 순간 휘청 무릎을 꺾는 진석. 셀린이 깜짝놀라 옆에서 부축을 해왔다. 으으으, 뭐 저딴것들이 다 있어. 큰 돈이 생기면 성실하게 저축해서 모을 생각은 커녕 먼 타국의 환락가에 가서 쓸 궁리부터 하다니. 아니지. 쟤들은 원래부터 머릿속에 그 생각만 가득 들어찬 여자들이었다.

"아까부터 왜 그래요? 저기 저 두 여자들하고 뭔가 안 좋은 관계인가요?"

진석의 팔을 붙들어준채 걱정스런 어조로 물어오는 셀린. 이걸 뭐라고 설명한다, 아이고 두야. 잠시 생각하던 진석은 아하하 웃어넘기며 아무렇지 않은듯 일어났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그냥 좀 피곤해서. 자. 우선 방에 짐부터 풀어두죠. 가요 셀린씨."

"아, 네에..."

자신이 현재 남자였다면 저 자매들에게 붙잡혀 또 엄청나게 시달렸을테지만 지금은 여자. 자신의 입으로 설명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그녀들이 알아 볼 일은 없을것이다. 아무리 같은 배에 타고 있다고 해도 승객이 하나 둘 타는 작은 배도 아니고 백단위의 승객이 타는 여객선. 어지간해선 얽힐일도 없겠지. 괜히 찜찜하긴 했지만 분명 별 일은 없을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셀린과 함께 1등칸의 방을 찾아 들어갔다. 1등칸은 1인실이나 2인실 두 종류의 객실이 있었는데 둘은 당연히 2인실의 방을 선택했다.

"아담하네요."

방 안을 둘러본 셀린의 감상. 원래 선내라는 곳은 공간배정이 여유롭지 못하다. 게다가 최대한 많은 승객을 실어서 수익성을 내야 하는게 여객선이다. 비싼 1등칸이라고 해도 방은 넓지 않았고 내부에도 정말 딱 필요 최소한 것들만 배치되어 있었다. 진석은 고개를 셀린의 말에 끄덕이며 짐을 풀었다.

"그래도 수송선보단 백 번 낫죠. 데오그라즈에 오면서 수송선을 탔는데 그건 정말, 어휴."

"그렇게 불편한가요? 하긴 저는 마차는 타봤지만 배를 타는건 처음이라..."

침대에 걸터앉아 셀린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는 진석. 배 안을 둘러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것도 아니었지만 어차피 이 배를 타고 아라파까지 열흘 이상 항해를 할 터. 게다가 이 여객선은 중간중간 다른 나라의 항구에서 기항하여 보급도 할테고, 기상이나 바다의 상태에 따라 어쩌면 며칠쯤 더 운항이 늦어질수도 있었다. 그러니 급할거 없었다. 지금은 자신이 마차를 끌어야 하는 상황도 아니고 가만히 있으면 배가 목적지까지 알아서 실어다 줄 터. 안달복달 한다고 배가 빨리 가는것도 아니니 여유를 가지고 여행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

멜리사 호를 탄지 닷새가 지나고 엿새째의 아침. 기상상황도 쾌청하니 아무 이상없었다. 배는 아무 탈 없이 첫번째 기항지인 벨리언 왕국의 항구도시 헤직스를 지나, 두번째 기항지인 세이거스 왕국의 항구 힐즈타운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아마 오늘 점심즈음 닿을 수 있으리라. 두번째 기항지인 힐즈타운까지 지나고 나면 다음번 도착지는 종착지인 아라파의 시라즈였다. 진석은 갑판위에 마련된 야외테이블의 파라솔 그늘 아래에서 셀린과 함께 시원한 트로피컬 주스를 마시며 바다나 저 멀리 보이는 해안선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넓은 갑판 한켠엔 천막을 설치해놓고 간단한 술이나 음료를 파는 간이 바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바텐더 차림의 직원은 연신 얼음화살의 주문을 시전하여 그 얼음덩이를 손님들이 마실 음료의 재료로 모아두는 모습이 보였다. 주변엔 진석과 셀린처럼 바에서 구입한 음료나 칵테일을 마시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손님들이 제법 많았다.

'마법을 쓰는 바텐더라니, 거참. 페이가 꽤 셀것 같은데?'

자신도 만약 노예를 둔다면 한 명 정도쯤 저런 기술을 익히게 해보고 싶었다. 얼음화살이라는 마법자체야 화염화살이나 비슷한 난이도니 익히기 어렵지 않을테고, 그런데 바텐더라. 바텐더 일을 할 줄 아는 노예도 있을까? 있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주스를 홀짝거리는데 셀린이 진석을 보고 배시시 웃었다.

"이런 여행은 생전 처음인데, 생각보다 너무 좋네요. 에나씨 같은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더더욱. 쭉 이렇게 배를 타고 세계를 여행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직 겨우 엿새째라 그런지 셀린의 입에선 여유만만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헹, 며칠 더 타다보면 엄청 지겨워질걸? 그나마 여객선 안에 여러 편의시설이 구비되어 있어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해 그렇지 기간이 길어지면 이런 항해도 지겨워질게 분명했다. 실제로 진석은 이미 꽤나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먹고, 자고, 배나 한바퀴 슥 돌고. 밤에는 셀린과 끈적끈적하게 가위치기같은걸 하고. 그 외엔 할 수 있는 일도, 달리 할 것도 없었다. 중간에 몇몇 남자들이 여자 둘 뿐인 진석과 셀린을 꼬셔보고자 두세번 접근하긴 했었지만 그냥 가볍게 무시해줬다.

'나랑 자고 싶으면 성이라도 한채쯤 가져와서 꼬셔보던가.'

물론 성이 아니라 대륙을 통째로 가져다 바쳐도 자줄 생각은 없지만. 무심코 흐아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는 진석. 아~ 여유롭다 못해 지루하구만. 어라, 저기 저 구름 거시기같이 생겼네. 가져다 내 다리 사이에 붙일 수 없을까. 음 되찾고 싶다 거시기. 그런 생각을 하며 하릴없이 멍때리고 있는데 선실 안쪽에서부터 르마르쿠 자매가 올라오는것이 보였다.

'윽.'

배가 넓은편이라곤 해도 어디까지나 갇힌 공간. 며칠동안 배에 머물며 그녀들과는 몇 번 마주쳤었다. 물론 그녀들이 자신을 보기도 전에 이쪽에서 먼저 피했지만. 저 변태 자매가 자신을 알아볼리는 없을테지만 왠지 그냥 마주치기 싫었다. 뭐 마주친다고 해봐야 달리 무슨 일이 생기지도 않을건 알지만 그냥 싫은건 싫은거였다. 그러는사이 두 자매는 간이 바에서 술을 한 병씩 사들곤 진석과 셀린이 있는 바로 옆테이블로 다가와 앉았다.

"남자들 수준이 형편없네. 성에 차는 미남은 하나도 없는걸."

"이게 다 러셀이라는 남자때문에... 그 뒤로 눈만 너무 높아졌어, 흑흑- 흔해빠진 물건으론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단말이야."

"네가 입만 열면 그 남자 타령하는게 지겹다 못해 목을 졸라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지만... 솔직히 대단하긴 했지."

그러면서 진석 자신과 가게에서 관계를 했을때의 이야기를 막 떠들어대는데 어째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건 이러저러해서 좋았다느니, 저건 어째 좀 어설펐었는데 열심히 용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귀여워서 참을수가 없었다느니. 자신의 거시기와 테크닉을 놓고 열심히 품평을 하는데 도저히 들어줄수가 없다. 하지만 마주 앉아있던 셀린은 진석의 모습을 보고 작게 속삭였다.

"...에나씨. 역시 이쪽 두 분과는 아는 사이죠? 마주칠때마다 반응이 너무 이상해요."

"......"

바로 옆에서 몇 번이나 진석의 모습을 지켜본 셀린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뭔가 이상하다는것은 눈치챌 수 있으리. 셀린이 진석과 르마쿠르 자매를 번갈아 보며 은근히 대답을 채근하자, 르마쿠르 자매도 힐끔거리는 셀린의 눈길을 눈치채곤 이쪽을 바라보았다.

"...우왓? 엄청 미인. 재, 재수없어."

"저 가슴봐. 남자 꽤나 홀리게 생겼는데? 그리고 나보다 훨씬 크잖아! 젠장."

진석의 외모와 셀린의 가슴을 보며 어째 빈정거리는 르마쿠르 자매. 그녀들은 험악한 눈초리로 이쪽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저것들은 또 왜 저래... 가 아니구나. 쟤들은 미남을 못 꼬셔서 안달난 것들이지? 경쟁자가 될만한 여자는 전부 적이라는 건가. 와 진짜 한심한 자매다. 어휴.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드러워서 피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르마쿠르 자매를 피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진석.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심코 뱃전 방향을 한 번 바라보았는데... 어째 저쪽에서 다가오는 배의 속도가 심상찮다? 아니 많은 배들이 오가는 해로니까 다른 배들이 스쳐지나가는건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서도, 저 배는 상선의 기를 달고있는 주제에 전투용 쾌속선이었다. 게다가 뱃머리에 길다란 충각을 단채 이쪽을 향해 똑바로 돌진해오는 모습은 흡사...

"...해적?"

그러고보니 이 대륙의 남부엔 '해적 군도'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전, 자신이 데오그라즈로 가서 폭풍의 지팡이를 훔쳐오라는 명령을 받았을때 드레비안과 맥은 해적 군도에서 떨어져 나와 메디니아의 해안까지 올라온 해적단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실제로 헤세스 약품 통상의 수송선도 한대 나포당해 지원 할 수 있는게 5천 골드 밖에 되지 않는다던가 그런말을 했었지. 리베라의 세계에는 아직 화약무기라는 개념이 없다. 장거리전은 활이나 석궁, 마법을 이용해 교전할 뿐. 해상전도 마찬가지로 배를 서로 가까이 붙인채 화살과 쿼렐을 쏴대거나, 석탄과 청을 섞어 불을 붙인 것을 삽으로 뿌린다거나, 혹은 아예 화염병을 투척하고 갈고리를 멘 밧줄이나 널판지로 상대의 배에 올라 백병전을 벌이는게 전부였다. 그러니 저렇게 대놓고 충각을 단 배로 돌진을 해오는건 딱 두 종류 뿐이다. 첫번째, 군선. 그리고 두번째는 해적. 하지만 평범한 여객선이 군대의 공격을 받을리가 없다. 그러니 정답은 자연히 두번째, 해적이었다.

"저, 정면! 정면에서 해적선으로 보이는 배가 접근중!"

과연, 뱃머리에서 반쯤졸며 파수를 보던 선원도 정면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배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경고의 외침을 질렀다. 갑판에서 여유롭게 노닥거리는 손님들은 뜬금없는 해적 경보에 당황해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파수꾼의 경고에 갑판장 으로 보이는 중년의 건장한 선원이 인상을 쓰며 선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손님들을 모두 안으로! 그리고 전 선원 전투준비! 선장님께 상황 전파하고 안에서 석궁이랑 쿼렐 있는대로 꺼내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선원들은 손님들을 선실 안쪽으로 대피시키기 시작했는데,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는걸 눈치챈 손님들 사이로 여기저기 비명이 터져나오며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셀린도 갑작스런 해적의 습격에 울상이 되어 어쩔줄 몰라했다.

"어, 어쩌죠? 저희도 우선 안으로 피해야!"

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 셀린과 방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옆 테이블의 르마쿠르 자매는 신난다는듯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언니, 들었어? 해적이래!"

"배 안에만 쭉 있느라 찌뿌드드하던 차였는데. 잘됐네. 몸 좀 풀어볼까?"

그러면서 선실쪽으로 향하는데 저건 해적을 피하는게 아니라 보나마자 무기를 가져와서 한 판 벌이려는 모양인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그녀들의 행동은 틀린거 하나 없었다. 진석 자신도 겨우 해적상대로 몸을 피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안 그래도 진석역시 슬슬 지루하던 차였다. 그리고 어차피 무사히 아라파의 시라즈까지 가기 위해선 여기서 해적놈들을 물리쳐야한다. 해적놈들을 넋놓고 구경하다 배가 해적놈들에게 나포라도 당했다간 아라파로 가긴 커녕 놈들에게 강간이나 겁탈이나 윤간 같은걸 잔뜩 당하겠지. 뭐 그게 다 그거지만서도.

진석은 셀린을 데리고 방으로 돌어간 다음, 가방에서 전투용 벨트를 꺼내 허리에 착용했다. 앞쪽엔 크리스 란비언과 흑철단검이 꽂혀 있었고, 우측의 파우치에는 체력회복약, 좌측의 파우치에는 SP회복제와 아주 오래전, 제이스를 숲에서 잡아두고 있을때 별 생각없이 만들어 둔 해독제가 하나 들어있었다. 그리고 뒤쪽에는 투척용 단검 네자루. 하지만 셀린은 전투준비를 하는 진석을 보며 당황해했다.

"에나씨. 지금 뭐하시는거에요? 설마 밖에서 싸우려구요? 위험해요!"

"말했잖아요. 저는 용병이라니까요. 저깟 해적들 쯤 간단히..."

그렇게 말하며 방을 나서려 하는데 셀린이 뒤에서부터 진석의 손목을 쥐었다. 불안함과 공포에 가득찬 얼굴을 한채 고개를 좌우로 젓고 있었다. 가지말라는 의미겠지. 하지만 진석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마디 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쿠웅 하고 배가 큰 충격을 받아 한껏 흔들렸다.

"으윽?!"

"꺅?!"

아마도 해적선의 충각이 멜리사 호의 뱃머리를 들이받은 것이리라. 휘청하며 자세가 흐트러지는 둘. 진석의 손목을 잡고 있던 셀린은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졌는데, 그 와중에 진석의 왼쪽 팔에 걸고 있던 성별 전환의 팔찌에 손가락이 걸리고 말았다. 셀린의 체중과 힘을 견디지 못하고 투둑하며 끊어지는 얇은 사슬. 보라색 보석이 달려있는 팔찌는 바닥에 툭 떨어지고 말았다.

"윽!"

이게 없으면 어디선가 성별 전환의 마법을 얻기 전까진 앞으로도 이렇게 여자 꼬라지를 한 채 게임을 해야한다. 지금의 진석에겐 생명줄만큼이나 중요한 물건. 허겁지겁 바닥에 떨어진 팔찌를 주워들었다.

"아... 미, 미안해요! 저 때문에!"

그 모습을 보곤 크게 당황하며 어쩔줄 몰라하는 셀린. 순간 좀 짜증이 나긴 했지만 일부러 그런것도 아니니 뭐라 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줄이 끊어진 이 팔찌를 들고다니다간 어디 흘릴지도 모르고. 급한대로 자신의 가방에 쑤셔넣어뒀다. 그리고 울상이 된 셀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보다 문 꼭 걸어잠그고 잘 숨어있어요. 내가 아니면 절대 열어주면 안되니까, 알았죠?"

"네, 네!"

황망히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대답하는 셀린. 진석은 그런 그녀를 남겨두곤 선실 밖으로 나서 갑판쪽으로 향했다. 과연 넓찍한 갑판에선 벌써 선원과 해적들 사이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해적들은 이쪽으로 밧줄이나 널판지를 걸쳐오며 승선하려고 기를 쓰고 있었고, 선원들은 무기를 휘두르며 그걸 저지하거나 이따금 석궁을 쏴 진입을 방해했다. 하지만 해적들은 평범한 선원들보다 해전에 익숙한 난폭자들. 선원들의 저항이 심하자 해적들 쪽에서도 화살이나 쿼렐을 마구 쏴서 이쪽의 선원들을 잔뜩 죽이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해적선의 바로 뒤쪽에서 조금 작은 배가 한 대 튀어나오더니만 배의 측면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곤 깜짝 놀라는 진석.

'이런! 처음부터 놈들의 배는 두 대였구나! 저 두번째 배는 정면의 이 쾌속선 뒤에서 딱 붙어서 따라온거였어. 지금 정면에서야 선원들이 대충 막고 있지만 반대쪽으로 올라와 양쪽에서 합공하면 끝인데!'

하지만 반대쪽의 배를 막고 어쩌고 할 새도 없이 선원들의 상당수를 쓰러트린 해적들이 그새 배에 우르르 오르기 시작했다. 이제서야 배 안쪽에서 허겁지겁 뛰어나온 몇몇의 선원들도 합세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지만 이래서야 중과부적이겠다. 처음부터 해적쪽의 머릿수가 선원들보다 훨씬 많았다. 진석도 가세하기 위해 단검을 뽑아들고 해적들을 향해 달려가려는 찰나, 뒤쪽에서부터 누군가 빠르게 달려와 진석을 스치고 갑판으로 뛰어갔다. 두 명의 델 그로도 여성. 르마르쿠 자매였다.

"아하하- 싸움이야? 벌써 시작됐네? 파티랑 싸움은 다 같이 즐겨야 제맛이지!"

"아네트! 장난치지말고 제대로 해!"

"알아! 나도 그 정도는 구분 하거든-?"

아네트는 양 손에 강철 건틀렛을 착용하고 있었다. 근데 이건 말이 건틀렛이지, 팔꿈치까지 전부 감싸고 있는게 엄청나게 두껍고 튼튼한 강철의 덩어리였다. 저걸로 한 대 맞으면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안면이 함몰되게 생겼다. 저 건틀렛을 장착한채 팔을 겹쳐 전면을 가리기라도 하면 흡사 방패로 지키는것이나 다름없으리. 그리고 지젤쪽은 저번에 봤던 가죽덮개를 씌운 장대를 들고 있었는데, 가볍게 끈을 풀어 그 덮개를 확 벗겨내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잘 벼려진 반달같은 칼날이 모습을 드러났다. 언월도였다.

'그러고보니 아네트는 격투기가 주특기라고 했었고, 지젤은 봉을 쓰는걸 봤었는데... 주무기는 언월도였군.'

진석은 잠시 멈춰서서 그녀들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네트는 커틀라스를 붕붕 휘두르는 해적의 간격 안으로 위빙하며 가볍게 파고들더니 아래에서부터 턱을 강하게 올려쳤다. 쩌억하고 뭐가 박살나는 소리가 나더니 해적의 입에서 핏줄기와 더불어 부서진 이빨 파편들이 후두둑 뿜어졌다. 꽥 소리도 못하고 의식을 잃은채 바닥에 거꾸로 처박히는 해적. 그 모습에 다른 동료 해적들이 무기를 휘둘러 아네트를 공격해왔지만 두껍고 단단한 건틀렛은 그 공격들을 전부 가볍게 튕겨내었다. 경쾌한 스텝으로 상대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어 주먹을 한 번 휘두를때마다 해적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네트가 휘두르는 주먹은 글자 그대로 철권이였다.

'허, 제법...'

지젤쪽도 보통 실력은 아니었다. 아네트는 강철 건틀렛으로 해적들을 한 명씩 때려잡고 있었지만 지젤은 언월도를 붕붕 휘두르며 자신의 간격내에 들어오는 해적들을 한 번에 두셋씩 베어내었다. 물론 넓게 휘두르는 만큼 일격에 무력화 될만큼 강한 공격은 아니었지만 해적들은 가까이 근접하지도 못하고 몸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으며 전투능력을 잃어갔다. 지젤이 넓게 휘둘러대던 언월도를 가슴앞으로 끌어당겨 사선으로 세워 들었다고 생각한 다음 순간,

"하아압! 봉락열주!"

콰콰콰콱! 정면으로 무섭게 돌진하며 흡사 풍차처럼 휘둘러진 언월도! 그 돌진의 간격내에 있던 해적들은 전부 팔다리가 하나씩 잘려나가며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자신의 무기가 닿는 범위의 적을 한꺼번에 무력화 시키는 그 몸놀림은 그야말로 필살. 아무래도 저 기술이 그녀의 절기인듯 했다. 르마쿠르 자매가 순식간에 해적들을 마구 쓰러트리자 해적들쪽에서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보통 사람보다 덩치가 배는 됨직한 어마어마한 거구가 양손에 커틀라스를 하나씩 들고 아네트를 향해 쿵쿵거리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너어어~! 죽인다아~!"

지능이 좀 떨어지는건지 그 거구해적의 외침엔 어눌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하지만 엄청난 덩치가 커틀라스를 수수깡처럼 휘둘러대며 덤벼드니 그 기세만은 결코 얕볼수가 없었다. 하지만 피식 콧방귀를 끼는 아네트. 손바닥에 자신의 입술을 찍어 훅 하고 간접키스를 날리곤 웃는낯으로 윙크를 해보였다.

"덤벼봐 귀염둥이."

"팔다리, 토막낼거다아~!"

양손에 든 커틀라스를 동시에 내리치는 거구해적. 힘과 속도가 실린게 쉽게 막아낼 수 없을 일격이었다. 말투는 우습게 보여도 검격은 사람 꽤나 썰어본 티가 났다. 아네트는 바닥을 기나 싶을정도로 자세를 잔뜩 낮추더니 커틀라스를 내리치는 타이밍에 맞춰 안쪽으로 파고드나 싶다가... 측면으로 쏙 빠져나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자세를 잡고 거구의 해적의 오금안쪽을 힘차게 걷어찼다. 쫘악! 찰지다 못해 아주 살이 터져나가는듯한 타격음이 울려퍼졌다. 굉장한 로우킥이었다. 온 힘을 다해 정면으로 공격을 가했다가 생각치도 못한 측면에서의 로우킥을 맞곤 으헉하며 제자리에서 휘청이는 거구해적. 아네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어머나, 마침 얼굴이 딱 때리기 좋은 위치로 내려왔네? 이그젝션-"

아네트의 주먹이 거구해적의 턱과 인중에 툭툭 가볍게 원투를 먹이나 싶더니, 다음 순간 사정없는 연타가 쇄도했다. 정말 숨 한 번 안쉬고 사정없이 내지르는 철권의 연격! 뻐버버벅! 그야말로 떡메치는구나 싶은 장렬한 타격음이 울려퍼졌다. 앗 하는 잠깐 사이 수십번이나 되는 강철 건틀렛의 연타를 허용한 거구해적의 안면과 상체는 거의 걸레짝이 되어있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건 기본이고, 원래의 생김새를 못알아 볼정도로 팅팅 부운데다, 맞은곳 안쪽의 근육이나 혈관이 파열되어 여기저기가 벌써 검푸르게 변해있었다. 아네트는 상대를 샌드백마냥 실컷 때려넣곤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휘익 몸을 회전시켰다.

"버스트!"

뻐억! 뒤돌려차기로 내지른 부츠의 뒷굽이 정확히 거구해적의 관자놀이에 찍혀있었다. 눈을 까뒤집은채 손에 든 커틀라스를 놓치고 바닥에 쿠웅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엎어지는 상대. 손 쉽게 거구의 해적을 쓰러트린 아네트가 주변을 돌아보며 씨익 웃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해적들은 다들 움찔하며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아이참- 다들 그렇게 숫기가 없어서야 해적질 해먹겠어? 난 들이대는 남자를 좋아하니까 부끄러워하지 말고 팍팍 오라고. 이런 바보같은 메이드복도 다 남자를 꼬셔보려고 일부러 입고 다니는건데!"

"아네트, 헛소리는 그만하고 빨리빨리 쓰러트리기나 해. 저거 봐. 그새 선실 안쪽으로 들어가는 놈들도 있고 아깐 옆쪽으로도 배가 한 척 돌아갔다고."

르마쿠르 자매가 해적들을 가볍게 쓰러트리고 있다곤 해도 겨우 둘. 해적들의 수는 아직 몇십이나 더 남아있었다. 선원들도 아직 남아있었지만 저항이 많이 무력화 된 상태였고, 그 틈을 타 해적들은 제멋대로 소리지르고 날뛰며 배 안 여기저기로 약탈을 위해 스며들어갔다.

============================ 작품 후기 ============================

밤을 꼴딱 새는통에 오늘은 일찍 올리고 자러갑니다. OTL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