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6. -- > * 73화 *
한참을 서서 구경만하고 있던 진석에게도 어느새 두 명의 해적이 달려들었다.
"크, 이 계집 반반한게 제법! 끌고가자!"
"그래. 두목한테 바치면 좋아하겠는데? 그전에 우리가 먼저 시식을 해야겠지만!"
얼씨구? 요놈들 보게. 내 손에 든건 무기가 아니라 뭔 장난감으로 보이나 보지? 그렇지 않아도 팔자에도 없는 여자행세 하고 있느라 스트레스 받는구만. 뒈지고 싶어하는 놈들을 봐줄 이유따윈 요만큼도 없다!
"오에스테!"
진석도 바닥을 박차고 두 해적들을 향해 달려들며 역수로 쥔 단검들로 원무를 추었다. 두 해적들의 사이를 스쳐지나간 다음 순간, 쩌억 갈라진 그들의 목덜미에서 피분수가 솟았다.
"억...?!"
"바, 방금... 무슨."
자신들이 무엇에 당했는지도 모르고 바닥에 쓰러지는 해적들. 바로 근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몇몇 해적이 깜짝 놀라며 진석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뭐야 또 이 년은! 이 년도 저쪽 델 그로도 계집들처럼 보통 솜씨가 아닌데?"
"씨발, 죽여! 한꺼번에 덮치면 되잖아!"
"생긴건 아깝지만 할 수 없지. 일단 죽여놓고 몸이 식기 전에 따먹으면 되니까, 헷헷."
야 잠깐, 마지막 발언한 놈은 대체 뭐냐? 또, 또라이 같은놈들. 좌우지간 하나둘로는 상대가 안되겠다고 판단한건지 해적들은 잠깐 사이 진석의 주위를 빙 에워쌌다. 진석에게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르마쿠르 자매들에게도 똑같이 집단으로 덤벼들었는데, 그나마 그쪽은 두 자매가 서로 등을 맞대고 해적들과 싸우는터라 사정이 나쁘진 않아보였다. 덤벼드는 족족 쇠망치같은 건틀렛에 맞아 안면이 박살나거나 언월도에 의해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쪽은 혼자였다. 상대는 해적 총 여덟. 우선 네 명이 사방을 에워쌌고, 그 밖에서 네 명이 또 다시 틈새를 막아서고 있었다. 사방이 아니라 팔방이 모두 가로막힌 상황.
'그래봐야 위기감은 하나도 안드는구만.'
다음 순간, 정면에 서있던 해적이 보란듯이 크게 검을 휘둘러 공격해왔는데 동시에 뒤와 양 옆에서도 해적들이 공격을 걸어왔다. 네 명의 동시 공격. 타이밍이 척척 맞는게 이놈들은 해적답게 이런 집단전에 익숙한 모양이었다. 진석은 무기들이 자신의 몸을 노리고 날아드는 찰나, 토르멘타를 사용했다.
"연약한 여자 하나를 상대로 부끄럽지도 않냐!"
일갈하며 사방의 해적들을 향해 필살의 난무를 펼치는 진석. 손에 쥔 두 단검에게서 무수한 검격이 폭발했다. 제일 먼저 그들의 무기가 저 멀리 튕겨나갔고, 비무장이 된 해적들의 전신을 향해 찌르고, 베고, 내려치고, 올려긋고... 채 셀수도 없는 초고속의 연격이 휘몰아쳤다. 수초간의 폭풍같은 난무. 진석이 한껏 치켜든 팔을 아래로 처억 내려 떨치자 제자리에 굳어서 있던 네 명의 해적들은 각기 피를 뿌리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야말로 전면이 너덜너덜한게 숨이 붙어있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바깥쪽에서 포위를 하고 있던 네 명의 해적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야말로 식겁했다.
"어... 어떻게 된거야?"
"마법인가?!"
하여튼 뭐만 하면 다들 하나같이 마법타령이냐. 그렇게 마법 구경이 하고 싶냐? 진석은 화염화살을 시전해 한 해적을 향해 빠르게 내쏘았다. 갑작스런 마법공격에 당황한 그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몸 곳곳에 화염화살을 꽂은채 으악 소리를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운좋게도 급소는 전부 빗나가 죽진 않았지만 손등과 어깨, 허벅지에 각기 한 발씩 맞았으니 제대로 싸우긴 힘을것 같았다. 그때 뒤에서 한 해적이 뒷춤에서 작은 나이프를 꺼내어 진석의 등을 향해 집어던졌다.
"읏?!"
놈들이 자신처럼 투척공격을 해올거라곤 생각도 못했던터라 자칫 맞을뻔했다! 아슬아슬하게 몸을 틀어 맞진 않았지만 그 칼날이 팔뚝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사이에 하얀 피부위로 수센티짜리의 붉은 실선이 생겨났다.
'이런 씨! 감히 내 몸에 상처를 내다니! 아라파에 가서 알 뭐시깽이 새끼의 눈에 들려면 몸에 상처같은게 있어선 안된다고!'
놈의 취향까지는 몰라도, 상식적으로 몸에 흉터가 있거나 어디 결함이 있는 무희를 좋아할리는 없을터. 기껏 여자로 변하는 짓까지 감수하며 이 일을 하고 있는데 이게 감히! 진석은 순간 열이 받아 시클론을 걸고 자신에게 나이프를 집어던진 해적에게 달려들었다.
"라파가!"
란비언과 흑철단검이 수평으로 교차하며 해적의 목을 따 날렸다. 평소대로라면 목이 어느정도 잘려나가는데서 그쳤을때지만, 열받아서 정말 전력을 다해 후려쳤더니 그대로 머리와 몸이 뎅겅 나뉘어버린것이다. 장검도 아니고 단검으로 단번에 목을 참수하다니! 자신이 해놓고도 조금 놀라는 진석. 그나저나 동시에 덤벼든 네 명이 피보라를 뿌리며 쓰러져 버렸지, 마법도 쓰지, 순간이동같은 기술을 구사해 목을 날려버리지. 남은 두 해적은 완전히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나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딜!"
진석은 란비언과 흑철단검을 꽂아넣고 등 뒤에서 투척용 단검 두 자루를 뽑아 그들의 뒤를 향해 힘껏 집어던졌다. 한 명은 등 한복판에 단검을 맞고 바닥에 엎어졌는데, 다른 한 명은 하필 엉덩이 사이에 단검이 꽂힌채 처량하고도 괴로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기었다. 아 그러고보니 저놈이 아까 자신을 죽여놓고 식기전에 따먹는다 어쩐다 한 놈 같은데. 거 쌤통이다.
"흥, 병신새끼들."
진석은 파우치에서 체력회복제를 서둘러 꺼내어 팔뚝에 난 상처에 약을 들이붓고 잘 문질러 바른뒤, 나머지는 마셨다. 과연 상처가 얕고 처치가 빨라서 그런지 상흔은 순식간에 아물어 감쪽같이 사라졌다. 하지만 다음순간 어째 머리가 어찔했다.
"어...?"
싸우는통에 신경이 팔려 잘 몰랐는데 화면 한쪽 구석에 자신이 중독되었음을 알리는 아이콘이 떠올라 있었다.
'이런 젠장...'
아까 자신의 몸에 스쳤던 나이프. 그 나이프에 즉효성의 독이 발려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해적놈들이 정정당당히 싸울리 없지. 무기에 독을 바르는 것 따윈 범죄자들에겐 정말로 흔한 공격수단이다. 독은 서서히 그 효과를 발휘하는건지 적으나마 체력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진석의 파우치 안에 해독제가 하나 있었다. 곧바로 해독제를 꺼내어 들이키는 진석. 독에도 광물독이나 식물독, 생물독 등 다양한 분류가 있어서 랭크가 높은 조합독 같은거라면 이런 기본적인 해독제로는 해결이 안될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걸린것은 다행히도 약한 독인 모양이었다. 해독제의 약효가 돈건지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중독 상태의 아이콘이 몇 번 깜빡이더니 사라져버렸다.
"휴우, 이 자식들. 사람 놀래게 만드는구만."
그 사이 배 안쪽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선실로 들어간 해적무리와, 옆으로 돌아간 놈들이 승선하여 본격적인 약탈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갑판 위쪽엔 삼십에 달하는 해적들이 남아있었고 그보다 훨씬 적은 열댓명 가량의 선원과, 두 명의 르마쿠르 자매가 남아있었다. 르마쿠르 자매도 많은 적을 상대하느라 그새 꽤 지친것 같았지만 선원들도 좀 남아 있고 하니 어떻게든 정리 할 수 있을것 같았다. 진석은 몸을 돌려 선실쪽으로 향했다. 뒤쪽은 달리 상대할 전력이 없는것 같으니 자신이 맡을 생각이었다. 망설임없이 1등칸쪽의 내부로 들어선 진석. 그런데 내부는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사, 살려... 끄악!"
"꺄아악! 싫어!"
해적들은 1등칸 쪽에 바글바글 몰려들어와 있었다. 여기저기서 승객들을 죽이거나 그새 여자들을 덮쳐 범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아무생각 없이 1등칸에 탄게 해가 될줄은! 하긴 자신이 해적같아도 돈이 많을 손님들부터 노렸을테지. 복도에 보이는것만 해도 십수명. 그런데 그 중 한 해적은 손님들의 짐가방 여러개를 짊어진채 복도를 빠져나가고 있었는데... 게중 자신과 셀린의 가방도 섞여있었다! 잘 보니 자신이 묵던 방의 문도 이미 산산히 박살나있었다. 얇디 얇은 나무 문짝은 저항이고 뭐고 할것도 없이 발로 걷어차 깨부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개새끼들이!"
가방안엔 성별 반전의 팔찌가 있다! 다른건 다 빼앗겨도 그것만은 안돼! 그렇게 생각하며 가방을 든 해적을 쫓으려는데 부서진 문 안쪽에서 셀린의 것으로 추정되는 애처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해적을 쫓아야 하나, 아니면 셀린부터 구해야하나? 이건 생각하고 어쩌고 할 여지가 없었다.
"당연히 가방부터 되찾아야지!"
하지만 자신의 발은 해적의 뒤를 쫓는게 아닌, 객실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씨이이발! 그러니까 나는 여자한테 너무 약하다고!'
방 안까지 달려 들어가는 도중 진석을 발견한 몇몇 해적들이 비열한 미소를 흘리며 덮쳐왔지만 단칼에 목을 따버리며 허겁지겁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방 안엔 두 명의 해적이 들어와 있었는데 한 명은 침대에 눕힌 셀린의 양 팔을 붙들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든채 막 삽입을 하려는 찰나였다. 셀린은 진석을 보고 깜짝 놀랬는데 코피가 흐르고 눈가에 멍이든게 저항하다 폭행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에나씨! 도망가요!"
진석을 향해 필사적으로 외치는 셀린. 그러자 막 셀린을 범하려던 해적이 바지를 추스리고 일어나며 말했다.
"허허, 어랍쇼? 왠 호박이 넝쿨채 굴러들어오네. 야, 이년 잠깐만 붙들고 있어봐. 저거 내가 잡을께."
"씨발 거 욕심은. 빨리 끌고와."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한채 지들끼리 시시덕 거리는 해적들. 진석은 그들이 서로 말을 주고 받느라 한 눈을 판 그 짧은 사이 뒷춤에서 투척용 단검을 뽑아 빠르게 집어던졌다. 퍼퍽!
"으, 어?"
"내가 히흐하... 겍."
정확히 미간에 단검이 꽂힌채 바닥에 쓰러져 버리는 두 해적. 셀린은 진석이 단번에 두 해적을 쓰러트려버리자 굉장히 놀라는 기색이었지만, 반쯤 벗겨진 옷을 허둥지둥 추스리고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왔다.
"에, 에나씨. 그보다 이것."
짤랑. 셀린은 손에 소중하게 쥐고 있던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아까 배가 흔들리느라 셀린때문에 끊어졌던 성별 전환의 팔찌였다. 아니, 이걸 어떻게? 진석이 놀란 눈으로 셀린을 바라보자 셀린은 진석의 손에 그것을 넘겨주며 말했다.
"씻을때나 잘때도 늘 빼놓지 않았던걸 보면 이 팔찌는 에나씨에게 어쩐지 중요한것 같아서... 해적들이 방문을 부수고 들이 닥치기 전에 이것만 빼내어 제가 가지고 있었어요."
"아... 자, 잘했어요!"
자신도 모르게 셀린을 와락 껴안는 진석.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었다. 가방을 가져간 해적을 놓아두고 셀린부터 도우러 온 터라 내심 자신의 어리숙한 결정을 후회하고 있었는데 이것만큼은 그녀가 회수해서 지니고 있었을줄은! 만약 이 사실을 모른채 해적을 쫓는답시고 따라가 전투를 벌이며 시간을 낭비했었다간 그 사이 해적들이 셀린을 간살하고 그녀가 지니고 있던 이 팔찌를 가져가 행방이 묘연해졌을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팔찌만큼은 무사히 자신의 손에 돌아왔으니, 이제 가방도 되찾아야 했다. 3천골드가 넘는 거액이 든 가방이 아니던가. 순순히 해적놈들에게 내어줄 생각은 없었다.
"셀린씨. 어디 다른데 가지 말고 이 방안 침대 밑에 숨어있어요. 내가 오기 전까진 절대로 방 밖으로 나오지 말고."
"아... 알았어요. 부디 조심하세요!"
셀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진석이 시킨대로 꼬물꼬물 침대 밑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침대의 높이가 낮아 사람이 들어가긴 좁았지만 거의 몸을 구겨넣듯 해서 어떻게든 들어간것 같았다. 셀린의 안전을 확인한 진석은 팔찌를 파우치안에 잘 넣어두고 복도로 나섰다. 여전히 여기저기에서 해적들이 난장을 치고 있었다.
"이 새끼들. 사람을 식겁하게 만들고... 한꺼번에 덤벼 이 개새끼들아!"
주변의 해적들은 왠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나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시시덕거리며 하나 둘 근처로 다가왔는데, 아니 이게 뭔가. 순식간에 동료들의 신체가 도마위의 채소처럼 썰려나가며 사방에 선혈이 난무하는거 아닌가?!
"씨발, 조심해! 저년 칼잡이다!"
"개같은 년이! 묶어놓고 죽을때까지 범해주마!"
주변에서 1등칸을 약탈하던 십수명의 해적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복도 한쪽에서 여자 승객들을 범하고 있던 놈들도 급히 옷을 추스르며 달려들었지만 다 소용 없었다. 시클론을 건 진석은 그들 사이를 그림자처럼 슥슥 빠져나가며 단검을 휘둘러댔다. 잠깐의 칼부림이 끝나고 복도에 멀쩡히 서 있는건 진석 혼자뿐이었다. 전신에 피칠갑을 한채 숨을 헐떡거렸지만 눈빛만은 활활 불타고 있었다.
"썩을, 해적일 벌이가 그렇게 좋냐? 뭐 이렇게 많아?"
진석 자신이 죽인 해적들의 숫자만 해도 벌써 대충 서른 가까이 된다. 갑판으로 치고 온 해적들 숫자나 작은 배로 측면에서 올라탄 놈들의 숫자까지 치면 아마 백은 가볍게 넘어가는 모양이다. 그런데도 아직 배 곳곳에선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으니... 그나마 놈들이 당장 배에 불을 싸지르지 않는건 다행이다. 뭐 약탈을 다 끝낸 뒤엔 틀림없이 태우려 들겠지만.
"그보다 내 가방."
피와 시체가 낭자한 복도를 지나 다시 밖으로 빠져나가는 진석. 어렵지 않게 여객선 측면에 대어진 해적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과연, 열댓명가량의 해적들이 배에 온갖 물자나 재화를 옮겨싣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가방은 해적선의 갑판 한가운데에 다른짐과 함께 섞어있었다.
"뭐야 이년? 피투성인데?"
"어디서 한 번 돌려먹고 장난질 당하다 도망나온건가?"
한참 짐을 나르다 엉망진창인 진석의 몰골을 발견하곤 그렇게 지껄이는 해적들. 진석은 그들에게 달려들어 양손에 쥔 단검으로 둘의 복부를 힘차게 쑤셨다.
"커억!"
"아아악! 스, 습겨... 억!"
양손에 든 무기로 두 해적의 배를 찌른자세 그대로 주우욱 앞으로 달려나가다 바닥에 확 내동댕이 쳐버렸다. 쿠당탕. 배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꺼억거리고 바닥을 기는 그들. 특히 란비언에 찔린쪽은 배에서 싯누런 내장조각같은게 삐져나오고 있는게 빼도박도 못할 치명상이었다. 진석은 손에 가득 묻은 피를 휙 휘둘러 털고 의외의 사태에 멍청한 표정들을 짓고있는 해적들을 향해 말했다.
"뭘 봐? 어서들 덤벼 이 싸구려 인생들아."
"서, 석궁 가져와!"
"어디서 갑자기 저런 미친년이!"
허둥지둥 전투태세를 취하는 해적들. 진석은 아직 여객선쪽에서 짐을 나르던 해적들 셋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난간을 밟고 아래로 뛰어내려 해적선 쪽에 내려섰다.
"배에 탔다! 이쪽에 올라왔어!"
"죽여! 같이 공격해!"
여기저기서 소리를 지르며 진석을 향해 경계태세를 취하는 해적들. 근데 이들의 폼은 어째 좀 엉성한게, 아까 갑판쪽 정면에서 배에 쳐들어온 놈들보단 조금 수준이 떨어지는 해적들 같았다.
'해적들이라도 전부 똑같은 전투원은 아니라는건가? 하긴 그러니 뒤에서 짐이나 나르고 있었겠지. 어딜 가나 모자란 녀석들은 있기 마련이니. 그래봐야 나한텐 도토리 키재기지만.'
게다가 숫자도 그리 많지 않았다. 갑판에 있는 인원은 딱 여덟. 진석은 당황해 하는 그들에게 라파가를 쓰며 달려들었다.
"히익!"
바로 눈앞에서 동료의 목이 날아가자 해적들 사이에선 동요가 일었다. 그새 선창 안에서 올라온 두 명의 해적이 진석에게 석궁을 조준하고 바로 발사했다.
'그딴걸 맞아줄 것 같냐? 어차피 직사무기인데 쏘는 방향이랑 타이밍만 안다면야!'
정면으로 휙 덤블링을 해서 석궁의 사격범위에서 벗어나버리는 진석. 한 발은 허공을 갈랐지만 다른 한 발의 쿼렐은 그 뒤쪽에 서있던 해적의 가슴에 박혀들어갔다.
"컥! 윽... 케헥?!"
석궁을 쏜 동료와, 피로 물들어가는 자신의 가슴을 번갈아 보며 원망스러운 눈을 한채 바닥에 쓰러지는 그. 진석은 그사이에도 다른 해적들의 목이나 급소를 연달아 찌르고 베며 착실히 숫자를 줄여나갔다.
"대체 뭐야 이년은!"
주변에서 동료들이 별 저항도 못하고 삽시간에 몽땅 죽어나가자 경악하는 한 해적. 진석은 순식간에 그에게 다가와 멱살을 콱 움켜쥐었다. 얼굴은 물론 머리카락까지 피로 물들어 이마나 볼에 달라붙은채 핏방울이 뚝뚝 흘러내리는 지경이었는데, 아무리 아름다운 얼굴이라도 그 몰골을 한채 자신을 올려다보니 이건 뭐 흡사 귀신이나 악귀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년이 아니라 놈이거든? 내세엔 착하게 살아라."
"무, 무슨..?! 크으윽!"
다음 순간 복부를 통해 밀려드는 끔찍한 고통. 란비언이 해적의 뱃속을 헤집고 들어갔다. 구불구불한 칼날의 란비언을 뱃속에 찌른채 손목에 가볍게 스냅을 주자 내장들이 얽히는 느낌이 났다. 그 상태에서 칼날을 빼니 내장이 잘리고 끊어지며 아주 난리가 났다. 해적은 장이 얽힌채 썰려나가는 상상을 초월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의식을 잃고 자리에 무너졌다. 이제 남은건 방금 석궁을 쐈던 둘 뿐이었다. 한 명은 열심히 재장전을 시도했지만 다른 한 명은 석궁을 집어던지며 양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하, 항복! 항복하겠소!"
"뭔 개소리야 병신아! 저년이 우릴 살려줄 것 같... 켁!"
석궁을 장전하며 동료에게 소리를 지르는 그. 하지만 진석이 바닥에서 집어들어 던진 커틀라스에 이마가 쪼개진채 뒤쪽으로 나가떨어졌다.
"응, 자네는 똑똑한 친구구만. 난 똑똑한 사람이 좋아. 그나저나 이제 이 배엔 더 아무도 없는거야? 그 선창 밑은 비었어?"
"아... 아뇨. 아직 이 아래엔 한 명이 더 남... 크아악?!"
두두두두! 갑자기 선창 아래에서 쿼렐들의 연사가 날아와 항복한 해적의 몸 여기저기에 박혔다. 온몸에 쿼렐을 박은채 바닥에 쓰러진 그. 갑작스런 쿼렐의 연사에 진석도 조금 놀랐다.
"뭐야? 선창 아래에 있는게 왠 놈이길래?"
선창 입구에서 물러선채 잠시 그쪽을 경계하고 있자 곧 쿵쿵거리며 굉장한 거한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까 갑판에서도 거구의 해적을 봤었지만 그는 그냥 살덩어리, 이 남자는 그야말로 온 몸이 근육으로 가득한 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햇볕에 탄 구릿빛 피부에 전신에 새긴 온갖 위협적인 문신. 게다가 빡빡민 스킨헤드. 외모만으로 보면 이 자가 해적들의 두목이 아닐까 싶을 엄청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왼쪽팔에 소형화시킨 석궁 발사기를 끼우고 있었는데, 옆에 달린 손잡이를 돌려 현을 감아 장전하는 방식으로, 발사구가 무려 여섯개나 되었다. 아무리 소형화 된 발사기라지만 한 번에 여섯개나 되는 현을 감아 장전해야 하다니. 보통힘으론 장전조차 못할 물건이었다. 그는 허리춤에 달린 쿼렐통에서 쿼렐을 꺼내서 석궁 발사기에 차근차근 장전하며 진석을 향해 말했다.
"뭔가 했더니 계집년이... 잘도 내 부하들을 다 죽여놨구만."
목소리도 묵직한 저음인게 꽤나 분위기 있다. 하지만 진석도 지지않고 스킨헤드 사내를 쏘아보며 말했다.
"넌 이딴 쓰레기들을 부하들이라고 달고 다니냐? 그러고도 잘도 해적질 해먹었구만? 나같으면 쪽팔려서 혀 빼물고 뒈졌겠다."
"큭큭큭. 입담 하나는 걸판진 년일세. 맘에 들어."
그러더니 기습적으로 왼팔을 내밀고 석궁을 발사한다! 두두두두두! 여섯발이나 되는 쿼렐이 총알처럼 빠르게 쏘아져왔지만 진석은 옆으로 몸을 날려 가볍게 회피하곤 바닥을 박차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라파가!"
연속으로 스텝을 밟으며 펼쳐내는 숏대쉬! 상대와의 거리가 한 순간에 좁혀지며 눈앞에 가까워진다! 급소인 목을 노리고 수평베기를 펼치는 진석. 하지만 스킨헤드 사내는 왼손에 끼운 석궁발사기를 들어 정말 아슬아슬하게 진석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콰자작! 타격을 입은 석궁발사기가 엉망으로 박살나고 사내의 손목에도 얕은 검상이 생겼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진석의 복부를 향해 오른주먹을 휘둘러왔다.
'이 자식, 제법!'
왼 무릎을 세워 주먹을 막아내고, 오른발로는 땅을 박차며 뒤로 물러나는 진석. 지금은 시클론을 걸고 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해적주제에 일격필살의 기술인 라파가를 막아내다니 이건 꽤 의외였다. 보기보단 실력자인듯 했다. 사내는 칫 하고 혀를 차더니 바닥에 나뒹구는 커틀라스를 하나 집어들고 싸울태세를 취하며 말했다.
"보통 계집이 아니군. 어때? 우리 밑에서 일하겠다면 금화가 가득한 상자를 건네줄 용의도 있는데. 이 배의 대장으로 삼고 부하들을 마음대로 이끌 지휘권도 주지."
"하! 나처럼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그딴게 관심 있을것 같아? 여자 꼬시는 재주가 형편없군!"
진석은 상대의 제안을 농으로 받아치고 이번엔 시클론을 건채 다시 라파가를 써서 달려들었다. SP가 슬슬 간당간당 했지만 상관없다! 아까보다 훨씬 빠른 돌진에 당황하는 스킨헤드 사내. 그래도 진석의 진로를 읽었는지 커틀라스를 정확히 휘둘러왔지만 거기에 맞을 진석이 아니었다. 커틀라스를 종이 한 장 차로 피해내며 이번에야말로 그의 목덜미에 라파가를 작렬시켰다.
"해적놀이는 네놈들이나 실컷 하라고!"
"크어억!"
스킨헤드 사내의 목을 베고 스쳐지나간 다음, 그의 등을 힘껏 걷어차 난간쪽으로 밀어냈다. 절반 가까이 잘려나간 목을 움켜쥔채 비틀거리던 그는 별 저항못하고 난간쪽으로 기울더니 바다속으로 풍덩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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