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7. -- > * 77화 *
결국 진석은 끈덕지게 엉겨붙는 알 유세피나와 밤을 꼴딱 샌채 행위를 이어가다, 그만 긴장이 풀린 탓일까. 잠깐 쉬려고 누웠다가 깜빡 잠들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해는 이미 중천에 걸려있었다.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체온. 자신의 품엔 행복한 표정으로 잠든 알 유세피나가 안겨 있었다. 그 얼굴을 잠시 바라보고 있자니 도시 동문 밖에서 밤새 기다리고 있을 르마쿠르 자매가 떠올랐다. 아니 이런. 잘도 정신줄을 놓고 실컷 퍼질러 잤구나!
"...아차. 어, 어이. 알 유세피나? 일어나봐."
"으응... 응. 아... 잘 잤어요?"
진석이 흔들어 깨우자 덜깬눈을 하고도 이쪽에 꽉 안겨오는 알 유세피나. 가슴에 머리를 파묻은채 슥슥 문질러오는데 머리카락이 맨살에 스쳐 간질거린다. 그러더니 한 손을 아래로 뻗어 진석의 물건을 쥐고 부드럽게 위아래로 흔들며 다시 발기시키려고 시도하... 지마!
"아니! 그만그만. 밤새 했잖아. 그건 일단 그만두고..."
"후후, 괜찮아요. 뭐든 말씀만 하세요. 이야기는 잘 듣고 있으니까..."
하면서 슬슬 아래쪽으로 내려가나 싶더니 아예 진석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고 입으로 봉사를 하기 시작한다. 과연 지금까지 무희들을 상대로 자신의 욕망을 채워온 경험덕인지, 혀놀림이 능란했다.
'라고 감탄할 때가 아니잖냐! 아 진짜. 얘 엄청 밝히네. 보통 여자 같으면 이렇게 밤새 했으면 지쳐서 나가 떨어졌을텐데 눈 뜨자마자 또 매달려오다니. 뭐 이렇게 체력이 좋아? 으으음... 그 수많은 무희를 폼으로 데리고 있던건 아니라는 건가.'
어쨌거나 따뜻하고 매끈하고 촉촉한 알 유세피나의 혀와 입술이 성심성의껏 봉사를 해오니 이건 기분이 꽤나 좋다. 혀 끝으론 귀두 안쪽이나 요도 끝을 살살 자극하며 물건 전체를 강하게 흡입해 빨아올리는데 이건 테크닉이 확실히 제이스 이상이다. 제이스는 네 마음대로 하세요~ 하고 이쪽에 자신의 몸을 맡겨 온다는 느낌이었다면, 알 유세피나는 아 가만가만, 내가 해드릴테니까~ 의 차이랄까. 결국 얌전히 펠라치오를 받아들이는 진석. 하긴 뭐... 이렇게까지 해온다는건 자신과 관계를 나누며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거겠지? 상대를 금세 믿어버리다 레오노르 공주에게 뒷통수를 맞은적이 있긴하지만 지금 알 유세피나의 행동에선 확실히 진심이 묻어났다.
"...저택 밖으로 심부름꾼 정도는 보낼 수 있겠지?"
아예 무릎까지 꿇고 진석의 다리 사이에 머리를 묻은채 열심히 입과 혀를 놀리다, 진석의 질문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알 유세피나. 진석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도시의 동문 밖에 내 동료... 아니, 부하랄까. 뭐 그런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낙타 세 마리를 준비하고 있을 델 그로도 두 명이야. 사람을 보내서 러셀이 보냈다고 하고 이곳으로 불러와줘. 만약 의심을 한다면 '그때 내 주머니에 넣어준것은 검은색'이라고 하면 아마 알아들을거야."
르마쿠르 자매와의 첫 대면때, 아네트가 자신의 주머니에 검은색 팬티를 벗어 넣어줬던 일을 떠올리는 진석. 그녀들 입장에선 잠입했다 탈출할거라던 여자쪽의 자신, 즉 에나가 돌아오지 않고 엉뚱한 심부름꾼이 나타나 러셀이 찾고 있으니 이쪽을 따라오라면 당연히 의심할터. 하지만 서로만 알고 있을 이야기를 해주면 완전히 믿진 못해도 일단 확인을 위해서 와볼것이다. 알 유세피나는 진석의 물건을 쭉 빨아내며 입에서 떼어내곤, 진석의 지시에 대답했다.
"급한건가요?"
"그쪽은 돌아오지 않는 나를 밤새 기다리고 있었을테니... 일단 부탁해."
진석이 그렇게 말하자 알 유세피나는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뇨, 부탁이라뇨. 명령하세요. 저는 당신의 것이 되기로 결정한 몸. 소유물에게 부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알 유세피나의 눈이 어째 진지하다. 그러고보니... 아라파는 남존여비 사상 같은게 묘하게 강하달까. 미혼 여성이라면 몰라도, 결혼을 하고 나면 자신의 부인을 소유물로 여기는 인식같은게 알게 모르게 사회 저변에 깔려있었다. 은근한 현실 반영이랄까? 아니 그러면 이거 뭐야. 얜 지금 자처해서 내 마누라 행세하도 하겠다는건가? 처음엔 상대가 순종적으로 나와서 아 의외로 일이 잘 풀리려나 보다 싶었는데 어째 뭔가 또 슬슬 꼬이는게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든다.
"그... 그래. 그러면 명령하지. 일단 사람을 보내서 그들부터 데려와."
"알겠습니다. 그럼 제 아침식사는... 그 뒤에 계속."
아침식사라는 단어를 말하며 입맛을 다시곤 진석의 물건을 뜨거운 눈길로 바라보는 알 유세피나. 완전히 공략이 끝난 제이스조차 정액을 마시는 일은 썩 내켜하지 않았었는데 얘는 그걸 보고 아침식사라니. 어, 어째 여러가지 의미로 무섭다. 이 게임내에서 미약과 아랫도리의 시너지 효과가 여자를 얼마나 빨리 떨어트리는지 모르는건 아니지만, 이제 겨우 하룻밤 같이 보낸 사인데 이렇게까지 나오는건 되려 무섭다고. 알 유세피나는 진석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한쪽에 걸려있던 붉은색 가운을 걸쳐 입고 방을 빠져나갔다.
"쓰... 이거 어째 지뢰밟은 느낌인데. 재미볼때만 해도 틀림없이 적당히 사기 좀 쳐서 잘 풀어나갈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이거 뭔가 좀 이상해. 끄응."
진석도 일단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알 유세피나가 알려준 그림쪽으로 다가갔다. 방 한쪽의 구석,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는 거대한 주 기둥앞엔 한 폭의 풍경화가 걸려있었다. 분명 이 그림뒤에 금고가 있다고 했겠다? 그 캔버스안에는 오아시스를 그린 사막의 풍경이 담겨져 있었다. 크기는 40호나 50호쯤 될까? 떼어내서 치우고 보니 과연, 기둥의 안쪽엔 다이얼 금고가 들어 있었다. 그러고보니 어째 이쪽 기둥은 다른 기둥들보다 훨씬 더 두껍고 커보이는게, 건물을 지을때부터 아예 기둥 안에 금고를 묻어둔 형태인듯 했다. 재질은 흑철인지 새까만게 아주 튼튼해 보였다.
"78... 41... 23."
알 유세피나가 알려준대로 다이얼을 순서대로 돌리자 찰칵하고 안쪽에서 기관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났다. 좋아, 이 안에 대지의 눈이 들어있겠지? 어떻게 생겼으려나? 기대하며 금고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진석.
"...이게 뭐야?"
금고의 안쪽은 생각보다 넓었는데, 그 안엔 빽빽할 정도로 금괴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얼핏봐도 일백, 아니 근 이백을 넘었다. 천골드 짜리 금괴가 이백개 이상이라니. 그 가치는 이십만 골드.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크고 작은 보석과 반지나 목걸이 등, 패물이 그득그득 담긴 어른 주먹만한 크기의 주머니도 이십여개가 주루룩 늘어서 있었다. 이건 가치를 딱 잘라 산정할 순 없지만 이 주머니 하나당 최소 수천골드는 되겠지. 이 주머니 하나를 오천골드로만 어림잡아도 역시 이십여개니 십만골드는 된다. 그럼 금괴와 보석을 합쳐 대략 30만 골드.
그러나 이게 알 유세피나의 전재산은 아닐것이다. 이건 그저 금고속에 보유해둔 현물일 뿐이고, 이 저택을 포함한 그 이외의 자산들도 잔뜩 있을테지. 왕족답게 부자는 부자구나. 그러고보니 진석 자신에겐 갈론의 교단 사원엔 4만골드 가량의 금액이 더 있다. 그 돈과 여기 있는 30만 골드를 합친다면... 정말로 공백지에서부터 작으나마 자신만의 나라를 세워가는 일도 가능할 터.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혹시나 싶어 보석주머니를 하나하나 열어 안을 확인해 보는 진석.
"없잖아? 대지의 눈으로 보이는 보옥 따윈 아무데도 없는데? 그냥 다 평범한 보석이나 장신구일 뿐이고."
어떻게 된거지? 날 속인건가? 아니아니, 금고 번호가 맞는거 보니 거짓말을 한건 아닐텐데. 잠시 멈춰선채 알 유세피나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보는 진석. 그러고보니... 자신은 금고의 행방만 물었었지 대지의 눈이 여기 있느냐고 물어본건 아니었다. 아니 뭐 그야 당연히 그런 보옥이야 당연히 금고 속에 들었을거라 생각했으니까. 너무 귀중한 물건이라 이 금고가 아닌 다른곳에 특별히 보관해두기라도 한건가? 애꿎은 보석주머니들만 뒤적이는데, 문이 열리고 넓직한 소반을 든 알 유세피나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 금고를 확인하고 계셨나요? 모두 당신의 것이니까 원하는대로 하세요. 그리고 동문 밖엔 말씀하신대로 사람을 보내뒀답니다. 금방 돌아올거에요."
알 유세피나는 환하게 웃는낯으로 한쪽의 흑단목 테이블 위로 소반을 차려놓는다. 뭔가 싶어 봤더니 아침 식사 겸 간단한 요깃거리들을 가져왔다. 청자색 다기에 뜨거운 흑차와 중탕으로 데운 우유, 각설탕을 넣고 티스푼으로 잘 저은다음 진석에게 내미는 알 유세피나.
"잘 마실게... 가 아니라. 아니 야, 야. 잠깐잠깐."
알 유세피나는 진석에게 찻잔을 건네자 마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바로 다시 진석의 물건을 쥐고 입에 물려고 든다. 뒤로 물러나며 알 유세피나를 제지시키는 진석.
"네. 뭔가 다른 시키실거라도?"
그러면서 방긋방긋 웃어보이는데, 아니 아무리 이쪽이 맘에 들었다고 해도 만난지 몇시간이나 되었다고 이러는거냐고 얘는? 지나쳐서 부담스러울 정도다.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태도는 분명 르마쿠르 자매와 닮은데가 있다. 진석은 금고 안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다른게 아니라 대지의 눈. 그거 네가 가지고 있는거 아니었어?"
"어머... 그게 목적이셨나요? 그런데 이걸 어쩌죠. 대지의 눈은 제 수중에 없는데."
"......"
그럼 그렇지. 알 유세피나가 이상할 정도로 순종적인게, 뭔가 너무 술술 잘 풀린다 싶었다. 진석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앉으며 방금 건네받은 찻잔의 내용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어 이거 맛있네.
"대지의 눈은 분명 네가 경매장에서 낙찰받았다고 들었는데."
"네. 제가 나지르를 통해 대지의 눈을 테베이의 경매장에서 낙찰받은건 사실이지만... 운송중에 화물을 노린 도적들에게 강탈당했어요."
뭐? 도적에게 강타알? 왜냐! 대체 왜!
'씨... 틀림없이 알 유세프. 아니아니, 알 유세피나가 대지의 눈을 가지고 있을거라 생각해서 꼴사납게도 여자모습을 한채 여기까지 힘들게 온건데 이제와서 땡~ 없었습니다~ 라니. 지금 장난하냐?'
테이블을 타앙 세게 내려치며 미간을 찌푸리는 진석.
"그 도적들. 잡을 수 없는거야? 넌 왕족에다가 표면상이나마 근위대인가 뭔가의 고문이라며? 병사들을 쫙 풀어서 붙잡고 대지의 눈을 되찾으면 되잖아?"
진석이 기분나빠하는 태도를 보이자 어쩔줄 몰라하는 알 유세피나.
"네, 분명히 옳은 말씀이세요. 저도 당연히 그렇게 명령을 했지만... 그... 상대가 '사카르'라고, 이 사막을 무대로 십수년 넘게 한 번도 붙잡히지 않고 유유히 도적질을 계속해온 신출귀몰한 자들이라서... 역시 평범한 병사들로 그들을 잡는다는건 무리더라구요."
시, 십수년 넘게 안 붙잡혀? 신출귀몰? 하, 거참. 이거 뭐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같은거라도 튀어나오는거냐? 어쨌거나 미리안이 자신에게 내린 명령은 대지의 눈을 찾아오라는 것. 알 유세프는 알 유세피나였고, 처음 생각과는 상황이 달라졌지만 그렇다고 빈 손으로 털레털레 돌아가서 이야~ 그 대지의 눈 말인데 정체불명의 도적들이 훔쳐갔다네요. 어쩔 수 없죠? 포기하고 다른거나 훔쳐봅시다~ 이럴수는 없는 노릇이다. 뭔가 잘 풀린다 했어. 이렇게 된 이상 이번 일은 목표물 강탈과 회수가 아니라, 지금부터 도적사냥으로 바뀌었다. 나참 거 사람 별짓을 다 하게 만드네.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일도 여간 쉬운게 아니다.
"흥. 십수년동안 안 붙잡혀? 좋아, 그렇다면 그 놈들 내가 직접 잡아주지."
"네에? 아니, 그런 험한일을 하실 필요는... 다, 당장 병사들을 다시 풀어서 놈들을 찾으라고 명할게요!"
당장이라도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겠다는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알 유세피나. 하지만 진석은 손을 뻗어 그녀를 멈춰세우곤 자신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턱짓으로 자신의 아랫도리를 가리키는 진석.
"자기 입으로 내 소유물이라고 칭했으면 주제넘게 굴지말고 가만히 있어. 그보다 아까 하던 아침식사를 허락하지, 먹어."
딱 잘라 말하는 진석의 단호한 명령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는 알 유세피나. 테이블 아래로 들어가 무릎을 꿇은채 진석의 물건에 입을 맞추곤 입안에 한껏 머금은채 열과 성을 다해 봉사를 하기 시작했다.
'...얘 혹시 매저키스튼가?'
아무리 굴복한 상대라도 갑자기 강압적인 명령을 들으면 그 태도엔 최소한의 저항감이나 일말의 동요가 일어나기 마련인데 알 유세피나에겐 그런 기색이 전혀 안 보인다. 되려 얼굴을 붉히며 흥분감을 나타내고 명령을 좋아라 하는게... 진짜로 M성향이 엿보이는것 같다.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터라 자신을 필요로 해주는거라면 이런 명령을 받는거라도 좋은건가? 그런 주제에 잘도 무희들을 억지로 지배해왔었군. 하긴, 새디스트나 매저키스트나 본질은 종이 한 장 차이라던가. 뭐 아무래도 좋을 얘기다. 알 유세피나의 성적 정체성따윈 차근차근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다. 그보다 도적이라. 뭐랬지? 사카르?
'십수년동안 붙잡히지 않았다고? 이 황량한 사막에서? 불가능해.'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사막이다. 어딜가도 모래, 온통 모래뿐. 낮에는 모든걸 말려버리는 태양이 작렬하고 밤엔 정 반대로 싸늘한 추위가 찾아온다. 대기중에 습도가 없는 만큼 열이동이 빠른것이다. 사람이 쉽게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시라즈가 그런 사막의 대지위에 자리잡았음에도 부강한 이유는 그란델의 데오그라즈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지리상의 이점을 살린 교역에 있었다. 대륙의 남부와 서북부의 연결기점이 되는 무역의 창구라는 것. 아무리 사막이라고 해도 그 요소요소엔 사람이 자리를 잡고 사는 이상 도시간엔 필연적으로 막대한 양의 화물이 오고갔다.
바다를 통해 들어온 타국의 화물을 사막을 건너 내륙의 다른나라들로 운송하면 큰 이문이 남았다. 이 도적들은 그것을 노리며 먹고 사는 이들일 터. 하지만 황량한 사막에선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환경이 철저히 제한되어있다. 여느 산적이나 해적들마냥 적당한곳에 자리를 잡고 머물면서 자신들의 영업을 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 사막 한복판에 터를 잡고 머물러봤자 그냥 잘 마른 건어물 신세나 될터. 게다가 사막 한 가운데 섣불리 본거지를 꾸렸다간 쉽게 발각당해 토벌당할것이다. 그럼 이 자들은 어떻게 해서 십수년이나 붙잡히지 않고 도적질을 해온걸까?
'보나마나... 도시 내부에 끄나풀이 있겠군.'
진석의 추리는 이러했다. 도적단은 도시에 심어둔 자신들의 동료와 연계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어떤 경로나 수단을 사용하는지까진 알 수 없지만, 값어치가 나가는 화물의 정보를 얻는다면 그것을 슬쩍 도적단쪽에 흘려줄테지. 그럼 그들은 도시 밖으로 나가 대기를 하고 있다 목표물을 노려 사냥한다.
'그리고 패를 나누어 상인이나 여행자 따위로 가장해서 다시 도시로 돌아오면 그만이지.'
저는 도적입니다요~ 무법자입니다~ 도시 밖을 떠돌며 약탈을 합니다~ 따위의 티를 낼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이놈들은 틀림없이 목표물을 탈취하면 그 즉시 선량한 일반 시민의 모습으로 가장하여 다시 도시내로 돌아올터. 사막을 무대로 십수년간 붙잡히지 않았다고? 그럼 가능한 방법이라곤 이것뿐이다. 놈들은 뻔뻔스럽게도 양민의 탈을 쓴채 이 도시안에 녹아들어 살고 있을것이다.
'그렇다면 필요한건 정보인가. 아니, 아냐. 정보상 놈들 따위 신용할 수 없어.'
분명 이 도시에도 정보상이 있을터. 하지만 그들을 신용할 순 없었다. 피터슨의 경우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가? 피터슨은 진석에게 데오그라즈 왕궁의 침투경로라는 정보를 팔아먹고, 진석이 성공적으로 폭풍의 지팡이를 훔쳐내고 가네딘 후작을 암살하자 그 정보를 그란델 왕실이나 귀족연맹측에 팔아넘기려고 했었다. 자신의 이득밖에 모르는 정보상에게 섣불리 사카르라는 도적단의 정보를 캐러 갈 순 없었다. 게다가 사카르라는 놈들은 이 도시내의 어둠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이 틀림없으니, 최악의 경우 정보상이 놈들과 한패일 가능성도 있었다.
'결국...누구의 도움 없이 직접 발로 뛰어서 정보를 캐야한다는 이야기군. 나참. 알 유세피나가 고분고분하게 나온덕에 이번일은 편하게 해결하나 했더니...'
알 유세피나가 부릴 수 있는 병사들을 동원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일이 더 꼬일터. 병사들이 자신들을 추적한다는걸 깨달으면 이놈들은 더 몸을 사릴것이다. 역시 도시내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을 자신이 직접 나서야 했다.
'뭐 그렇다고 아예 혼자서 하는건 아니고 변태 자매가 있으니 걔들을 최대한 부려먹어 봐야겠군. 근데 이것들이 도적 색출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 전투력은 어느정도 있지만 둘 다 골통이 푹 삭아놔서. 음... 뭐 그래도 동생쪽은 분명 용병 경험이 어느정도 있었고, 같이 세간을 떠돌며 여행한 경험도 있다니 어떻게든 되겠지. 아니, 어떻게든 되겠지가 아니라 무조건 찾아내야 돼. 겨우 두번째 임무인데 실패할수야 없지.'
이거 아무래도 시라즈에서의 체류는 생각하던것보다 좀 더 길어질 것 같았다. 진석은 알 유세피나의 봉사를 받으며, 식어가는 찻잔의 내용물을 들이켰다.
"우왓?! 지, 진짜 러셀이네!"
나지르가 픽업해온 르마쿠르 자매. 알 유세피나의 침실로 안내받은 그녀들은 반신반의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가, 안에 있는 진석의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다. 대번에 짐을 내팽개치고 달려드는 아네트.
"으아아앙! 보고 싶었어! 안아줘!"
양팔을 내민채 달려오는 아네트의 앞을 스윽 가로막아서는 알 유세피나. 진로를 가로막힌 아네트는 우뚝 멈춰서더니 알 유세피나와 진석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보다 손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누구야? 이 아줌마는."
"아줌마라니! 무례하다! 아직 스물여섯밖에 안됐다고 이쪽은!"
바닥을 탕 박차고 앞으로 한걸음 나서며 버럭 화를 내는 알 유세피나. 아네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노골적으로 빈정거리는 태도를 취했다.
"네에 네에, 스물여서엇- 하, 나보다 다섯살이나 더 많네. 강산이 절반이나 변할 시간이잖아? 어딜봐도 훌륭한 아줌마인걸. 화를 내는거 보니 벌써 폐경기라도 온거야?"
"무... 무슨 이런...!"
아네트의 빈정거림에 할 말을 잃으며 비틀거리는 알 유세피나. 그때 뒤에서 지젤이 다가와 아네트의 포니테일을 잡아당겼다.
"초면의 상대에게 시비걸지마 멍청아. 죄송합니다. 여동생의 무례는 대신 사과하죠. 그보다 러셀. 그... 에나 누님쪽은 어떻게...?"
지젤의 의문은 당연한것이었다. 분명 자신들을 이 계획에 불러들인것은 진석이 아닌 에나쪽. 지시한대로 동문밖에서 밤새도록 기다렸는데도 나타나지 않더니, 이번엔 왠 훤칠한 외모에 화려한 복장을 한 아라파 왕족같은 남자가 호위를 잔뜩 이끌고 찾아와 러셀이 기다린다며 자신들을 불러들이는것이 아닌가? 처음엔 에나쪽이 무슨 함정에라도 걸린건가 싶어 일전도 불사하려 들었지만, '그때 내 주머니에 넣어준것은 검은색'이라는 말에 러셀에게 억지로 팬티를 건네줬던걸 뜻하는걸 깨닫곤 반신반의 하면서도 저택까지 따라온 것이다. 아네트가 했던 그런 바보같은 행동을 일부러 일러줄 정도면 함정은 아닌것 같았으니까. 좌우지간 러셀을 다시 만난것은 반가웠지만, 에나의 행방은 어떻게 된것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알 유세피나는 지젤의 질문을 듣곤, 진석이 위장 신분인 무희의 모습으로 저 자매를 속였다는것을 깨달았다. 그 무희의 모습이 가짜라는걸 알고 있는 알 유세피나로선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을 찾는 지젤의 모습이 퍽 우스워진 것이다. 입가에 슬쩍 비웃음을 띄우는 알 유세피나.
'후후. 러셀님은 이 이종족 여자들에게 자신의 위장신분조차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일을 시켰단 말이지? 그렇다면 분명 이들을 그닥 신용하거나 하는건 아닐터. 델 그로도 족의 부하라기에 당연히 남자일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여자였던건 예상밖이었지만... 어쨌거나 이깟 천한 여자들이 이 분의 마음에 들 순 없었을테지.'
아네트는 지젤때문에 뒤에 밀려나있다가 알 유세피나의 비웃음을 보곤 버럭하며 그녀에게 삿대질을 해왔다.
"거기 아줌마! 뭘 기분나쁘게 웃어? 으- 웃을때 입가에 주름잡히는거 봐."
"흥. 맘대로 떠들거라. 제 주제도 모르는것이..."
입가를 손등으로 가리며 우후후 비웃는 알 유세피나와 그 모습에 한층 더 발끈 하며 왁왁거리는 아네트. 진석은 이마를 감싸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자 그만 그만. 싸우지마. 그리고 에나는 사실 나였으니까. 마법으로 위장한 거였어 이 바보들아. 그 동안 시누이니 언니니 낯간지러워 죽는줄 알았네."
"엑?!"
"뭐어?!"
입을 쩍 벌리고 정말 크게 놀라는 르마쿠르 자매. 그간 러셀의 누님이라 생각해서 얼마나 알랑방귀를 뀌어댔는데, 그게 사실 본인이었다니. 이 무슨 바보짓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진석은 휘휘 손을 내저으며 귀찮다는 투로 설명을 이어갔다.
"뭐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됐어. 아무튼 사정을 설명하자면... 엄청 길어지니까 말하기 싫다 으. 적당히 생략해서 말할께. 첫번째, 나는 이 알 유세프... 아니, 알 유세피나가 가지고 있다는 대지의 눈을 훔치러 여기까지 왔습니다. 두번째, 에나라는 모습은 이를 위해 마법으로 만든 위장신분이었습니다. 세번째, 하지만 대지의 눈은 지금 여기 없습니다. 자, 이해했어?"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네트는 투레질을 하더니 정신을 차리고 손을 번쩍 치켜들며 질문을 해왔다.
"저기저기- 선생님. 나 질문이 두 가지 있는데요."
선생님은 뭐냐 선생님은.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를 훔치러 저택에 잠입한다는 설명은 전에도 들었었지만... 대지의 눈이 대체 뭐야? 그걸 왜 훔치려 했던건데? 그리고 대지의 눈이 여기 없다면 지금은 어디로갔어?"
"대지의 눈은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보옥이야."
진석이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서 끼어들며 대신 대답하는 알 유세피나. 진석은 알 유세피나가 밝힌 의외의 정보에 깜짝 놀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 소원들 들어주는 보옥? 대지의 눈에 그런 효능이 있는거야? 이건 또 처음듣는 소린데...'
알 유세피나는 팔짱을 끼곤 뭔가를 생각하는지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내 몸엔... 그, 선천적으로 타고난 병 같은게 있어서... 물론 대지의 눈이 소원을 들어준다는 이야기는 그냥 반쯤은 허황된 전설 같은 소리지만... 만에 하나라도 싶은 생각에 대행인을 보내 테베이의 경매장에서 낙찰을 받았지. 하지만 운송 도중 사카르라는 신출귀몰한 도적단에게 빼앗기고 말았어."
진석은 그제서야 알 유세피나가 대지의 눈을 구입했던 이유를 이해했다. 그렇구나, 알 유세피나는 아주 적은 가능성이라도 좋으니 대지의 눈을 이용해서 자신의 몸을 평범한 여자로 되돌리고 싶었던 거겠지. 헛소문 같은 거라도 그녀에겐 솔깃한 이야기였을터.
"헤에- 소원을 들어주는 보옥이라. 러셀. 그걸로 뭔가 소원이라도 빌고 싶었던거야? 응? 뭔데뭔데? 응?"
눈을 반짝이며 진석을 바라보는 아네트. 하지만 진석은 아무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뿌우하고 입술을 내밀며 불만을 표시하는 아네트.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젤이 말문을 열었다.
"소원이라. 소원... 대지의 눈이라는 보옥이 진짜 소원을 들어주는지는 둘째치고서라도, 러셀은 왕족의 저택에 위장해서 침입한다던가 하는 여러가지 위험을 무릅쓰고 일을 벌인거잖아. 분명 대지의 눈을 가져야 할 굉장히 중요한 이유가 있는거겠지?"
"그래. 이 이상은 설명을 해줄 수 없고, 해줄 생각도 없지만 확실히 지젤의 말대로야. 대지의 눈은 내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물건이야. 꼭 필요해."
흐음 하고 생각에 잠기는 지젤과 아네트. 잠시간의 침묵. 먼저 입을 연것은 알 유세피나 쪽이었다. 그녀는 진석의 옆으로 다가가 그 어깨에 기대서며 르마쿠르 자매를 향해 말했다.
"고민따윌 하다니 한심하네. 러셀님이 너희를 완전히 신용하지 않는것도 이해가 가는걸.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원하는일은 무슨 수를 써서건 이루어 드리기 위해 노력한다, 이게 아랫사람으로서 취해야 할 당연한 태도 아냐?"
"자, 잠깐. 모시는... 주인?"
황당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지젤과 아네트. 알 유세피나는 그녀들을 향해 도발하듯 요염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훗, 그래. 나는 오늘부로 이분을 내 부군으로 섬기기로 마음먹었으니까. 할 생각이 없다면 너희들은 그만 돌아가지 그래? 꼬락서니가 딱하니 여비정도는 챙겨주지."
"으익- 이, 이게 무슨말이야 러셀! 대체 어째서 이런 아줌마에게 꽉 붙들린거야?"
"맞아. 우리도 러셀을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온거야. 부군이니 섬긴다느니, 함부로 떠들지 말지? 애시당초 러셀이 어째서 당신 주인이야?"
왁왁거리며 말싸움을 하기 시작하는 세 여자. 진석은 다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떨궜다.
'으... 틀렸어. 글러먹었다 아주. 알 유세피나의 태도가 협조적이길래 르마쿠르 자매를 더해 도적단을 찾는데 써먹으려 했건만 초장부터 꼴이 아주 가관이구만. 아니 그보다 나는 대체 왜 이 여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거야? 벼, 별로 그런일을 한 기억은 없는데?'
기억에 없다니, 틀린 말이었다. 진석은 그녀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애썼다. 그게 비록 아랫도리를 사용하는일 뿐이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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